지난 2013년 5월 4일, 어린이날을 앞두고 본인은 교회 지인 가족의 초청으로 파주 임진각 일대에 안보 관광을 갔다 왔다.
그 경험에 힘입어 그로부터 거의 정확히 1년이 지난 2014년 5월 3일엔, 본인은 교회 친구들을 데리고 철원에 안보 관광을 직접 갔다 왔다.

본인은 철덕의 성지순례 코스로서 철원을 오래 전부터 주목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군사분계선의 주변을 지도로 살펴보면, 판문점이 있는 서쪽이야 평지이지만 동쪽으로 갈수록 빽빽한 산악 지형이 이어진다. 그런데 수풀을 머리숱에다 비유했을 때 땜통 같은 지역이 강원도에 동서로 딱 두 군데 있는데, 하나는 '평야'가 있는 철원이고 다른 하나는 분지처럼 생긴 양구이다. 북한 역시 이 두 지역을 염두에 두고 과거에 남침 땅굴을 팠었다(철원 쪽으로 #2를, 양구 쪽으로 #4를).

철원은 예로부터 천혜의 자연이 살아 있는 곡창 지대요 한반도 중부 지방의 교통의 요지이기도 해서 전략적 가치가 높았다. 6·25 휴전 이후에 서울이 북한과 더욱 가까워진 건 좀 ㅎㄷㄷ한 일이지만, 그래도 치열한 전투 끝에 철원을 수복해 낸 것은 굉장한 쾌거였고 김 일성도 이를 애석해했을 정도라고 한다. 여긴 나름 38선 이북이기 때문에 분단 직후 6·25 전쟁 전까지는 북한에 속해 있었다.

교통의 요지라는 건 여기에 철도가 있기도 했다는 뜻이다. 경원선이 지났고 금강산 관광 철도도 있었다. 우와..!
그래서 본인은 철원에 있는 다른 자연 관광지나 유적지들은 제쳐 두고 오로지 안보 그리고 철도와 관련된 곳을 골라서 답사하려고 마음먹었다. 로드뷰, 항공 사진 등을 참고하면서 모든 스케줄을 짠 뒤, 드디어 답사를 떠났다.
동반자가 없으면 나 혼자라도 차 끌고 가려고 생각했으나, 다행히 교회 친구를 세 명이나 꾀어(?) 내는 데 성공했다. “저런 델 도대체 왜 가 ㄲㄲㄲ” 같은 놀림과 비아냥은 물론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 자매까지 한 명 불러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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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7시 반, 떠나는 날의 아침이 밝았다.
토요일 이른 아침엔 도로가 아주 한산하고 소통이 원활했다. 날씨도 아주 쾌청하고 좋았다.
동부 간선 도로를 탄 뒤 의정부에서부터 국도 43호선만 죽어라고 타고 올라가면서 드디어 철원에 도착했다. 북쪽으로 갈수록 군부대가 수시로 눈에 띄기 시작했다.
편도로 약 85km를 달렸다. 고속도로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가는 데 2시간이 넘지 않을까 예상했지만, 그래도 1시간 반 만에 잘 갔다.

처음 간 곳은 고석정 관광 사업소였다.
고석정 계곡은 예정에는 없이 시간이 남아서 들른 것일 뿐이었는데.. 경치가 끝내주게 아름다웠다. 하루 종일 날씨도 굉장히 좋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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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예매를 해 둔 패키지 안보 관광을 떠났다.
평일에는 허가를 받은 뒤에 민통선 안으로 자가용을 몰고 들어갈 수도 있는 반면, 인파가 몰리는 주말에는 셔틀버스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탄 버스는 어린 학생들까지 포함해 44개 좌석이 꽉 찬 만석이었다. 하지만 작년에 파주· 임진각· 도라산 역 일대는 외국인들도 많고 민통선 내부까지 완전 바글바글했던 반면, 여기는 우리 관광객 말고는 주변에 사람이 거의 없으며 조용하고 한산한 편이었다. 그 이유로는 여기는 파주보다 서울에서 더 멀고 교통이 불편하며, 또 황금연휴여서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놀러 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임진각으로 가는 길은 경의선 철도뿐만 아니라 자동차 도로도 신호 대기가 없는 자유로가 시원스럽게 뚫려 있다. 그러나 철원은 그렇지 않으니까 말이다.

버스는 지방도 464호선의 모 구간에서 좌회전하여 민간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민통선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서부터는 초소를 지날 때마다 군인이 수시로 탑승하여 탑승 인원 숫자가 맞는지 검문을 했다. 그리고 버스는 토교 저수지보다도 더 북쪽으로 남방 한계선으로 추정되는 철조망을 따라 쭉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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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제2 땅굴의 입구에 도착했다.
제1 땅굴이 발견된 지 반 년이 채 되기 전에, 거기서(연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더 깊고 더 큼직한 땅굴이 발견되었으니 국가적으로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제3 땅굴은 열차로 드나드는 진출입로가 뚫려 있으며 제4는 터널 안까지 열차로 다닐 수 있는 반면, 제2는 땅굴 출입과 관련된 그 어떤 동력 시설도 없다. 그리고 내부의 길이도 제3 땅굴보다 더 길다. 그러니 오갈 때 발품을 좀 팔아야 한다.
땅굴 내부는 사진 촬영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땅굴이라는 건 땅 속에 뭔가 빈 공간이 있다는 걸 감지하는 것이 별개이며, 그걸 찾아서 저지하려고 실제로 파 내려가는 게 또 별개이다. 우리나라에서 뚫은 출입로 땅굴에 들어가면, 북쪽으로도 길이 있고 남쪽으로도 길이 있다. 북쪽은 북한이 파 내려온 from 방향이고, 남쪽은 걔네들이 의도한 목적지 to 방향이다. 이 땅굴의 경우, 남쪽은 더 진행할 수 없게 길이 막혀 있고, 북쪽으로 약 500m 정도, 남방 한계선에 2~300m 앞까지 접근한 곳까지가 관광객에게 개방되어 있다고 한다. 사실 그건 제3 땅굴도 마찬가지다.

이 땅굴의 시점은 도대체 북한 어디에 있는 걸까? 쟤네들은 지하에 무슨 짓을 해 놨는지가 몹시 궁금해진다.
한반도가 통일되어서 땅굴도 남쪽 종점과 북쪽 종점이 모두 한데 뚫린 채로 역사 교육 현장으로 개방되는 날이 오길 기대해 본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통일이란 연방제니 나발이니 하는 말장난이 아니라, 김씨 부자 동상을 무너뜨리고 주체사상을 완전히 지워 버리는 제대로 된 통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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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땅굴을 탐사하고 저지하는 과정에서 이런 희생자가 있었다. 저기 나오는 계급은 아마 최소한 2계급 특진은 받은 것일 테고, 실제로 작업을 한 사람들은 다 병사 신분이었을 것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제1 땅굴은 발견 직후 지하에 있던 북한군 인부와의 총격전으로 인한 전사자가 있었고, 제2 땅굴 탐사 중에 발생한 전사자는 내부에 있던 지뢰를 밟고 산화했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제3 땅굴을 탐사하던 때는 딱히 사상자가 나오지 않았으며, 제4 땅굴을 탐사할 때는 사람 대신 군견이 희생되었다. 땅굴이 발견되고 위험 요소가 완전히 제거되어 안보 관광지로 개방되는 것조차도 다 이런 누군가의 희생이 따른 덕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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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제2 땅굴을 발견하는 데에도 귀순자의 힌트가 기여했었구나.
땅굴이 북한 소행이라는 증거들은 제3 땅굴 소개 자료에도 거의 똑같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쉽게 말해 북한은 NATM 공법으로 굴을 팠고, 우리나라가 그 땅굴을 관통하기 위해 따로 굴을 판 건 실드 공법과 비슷하다는 얘기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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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이면 땅굴이 발견되기 한참 전이었고 서울 근처와 강원도 일대에 온통 무장공비들이 출몰하던 무시무시한 시절이다. 그런데 북한이 그때부터 벌써 땅굴을 팔 생각을 하고 그 땅굴의 남한 쪽 출구를 어디쯤에다 낼지를 생각했다니 이건 뭐 흠..?
그나저나 저 사살된 간첩의 임무가 그런 것이었다는 건 어떻게 알아냈는지가 궁금하다.

땅굴 구경을 마친 뒤, 남방 한계선과 DMZ가 코앞인 평화 전망대로 갔다. 동송 저수지 근처이니, 구글 지도에서 위치가 어디인지는 이제 알겠다. (그나저나 철원에는 다른 곳에 승리 전망대도 있다고 그런다.)

(to be continued)

Posted by 사무엘

2014/05/09 08:21 2014/05/09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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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알려져 있는 북한의 남침용 땅굴은 총 4개이다. 그리고 이들은 발견 순서대로 1(1974년)부터 4(1990년)까지 번호가 매겨져 있다.

북한이 남침 땅굴을 판 사상적 근거로는 1971년 9월 25일 “하나의 갱도는 10개의 핵 폭탄보다 더 효과적이다”라는 김 일성의 교시가 제시되곤 한다. 뭘 하는지 알 길이 없는 비밀 스텔스 폐쇄국가인 북한이 땅 속을 두더지처럼 헤집으면서 한반도에 나이더스 캐널 네트워크를 깔아 놓는다면 무섭긴 할 것 같다. 그래서 우리나라 정보 기관들은 북한이 땅굴 발파 기계를 대량 수입했다는 첩보 하나만으로도 전전긍긍해야만 했다.

종북들의 눈엔 한반도에 땅굴이란 공식적으로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땅굴처럼 생긴 건 다 자연 동굴일 뿐인가 보다. =_=;;
그러나 반대로 '땅굴 덕후' 기질이 있는 안보 연구가들은 우리나라에 이것보다 땅굴이 훨씬 더 많이 깔려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의 대외 인지도와 신뢰도는 예수회/프리메이슨 세계 정복설이나 광주 5·18 북한군 개입설 급의 후덜덜한 수준이다. (긍정이나 부정이 아니라, 그냥 흠좀무스럽고 엄청나다는 뜻임.)

그런데, 오늘날 같은 수준의 인터넷 인프라에 '비해서' 남침 땅굴과 관련된 정보는 구글과 네이버를 총동원해도 이상할 정도로 잘 안 찾아진다. 내 느낌으로는 그렇다. 각종 위키나 백과사전에 등재된 설명도 너무 부실하다. 땅굴의 발견 경위, 작전에 참여한 부대의 신상 정보, 발견 과정에서 벌어진 위험 상황 등을 한데 열람하기가 너무 어렵다. 사람들의 관심이 적은 걸까?

단적인 예로, 한국어 위키백과에 '제n땅굴'이라고 땅굴마다 독립된 표제어조차 개설되어 있지 않은 걸 보고 본인은 정말 굉장히 놀랐다. (내가 써 넣을까ㅋㅋㅋ)
그래서 오기가 생겼다. 6·25 발발일을 기념하여, 평양 시내까지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구글 어스를 이용하여 4개의 땅굴들의 입구를 찾아 보았다.

1. 제3땅굴(1978): 도라산 역과 도라 전망대보다 살짝 북서쪽으로

앞서 글을 쓴 적이 있듯이 이 땅굴은 서울 및 판문점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위협적인 놈이며 길이도 가장 짧다. 그리고 첩보를 바탕으로 의심 지대을 탐사하던 중에 발견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DMZ 내부의 의심 지대 곳곳에다 구멍을 뚫어서 시추봉을 집어넣고 동향을 살폈는데, 한 시추봉이 지하의 발파 충격으로 인해 튀어오르고 물이 솟는 등 이상 증세를 보인 것이다.

관광객은 도라산 역, 도라 전망대, 통일촌 일대의 안보 관광의 일환으로 이 땅굴을 방문할 수 있다. 출입구는 승강 전동차를 타고 가거나 그냥 도보로 왕래할 수 있는데, 전동차를 타면 요금이 몇천 원 더 비싸진다. 도보 출입구와 전동차 출입구는 서로 다른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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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본인이 직접 갔다 와 본 적이 있기 때문에 구글어스에서 위치를 아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남방 한계선(좌측 하단의 선)이 10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그리고 땅굴을 이용하면 군사 분계선의 거의  200m 앞까지 지하로 도달한다고 한다.

2. 제2땅굴(1975): 토교 저수지보다 북동쪽으로 수 km

제1과 제2땅굴은 모두 DMZ를 경비하던 병사가 지표면에서의 이상 현상을 발견하고 신고하여 조기에 발견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초창기이다 보니 심도가 이후의 땅굴보다는 얕았던 편. 하지만 2땅굴은 1땅굴에 비해 터널 단면적이 더욱 커지고 대담해져 있었다.

2땅굴이 있는 곳은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이길리이다. (우리나라는 DMZ나 민통선 내부도 독립된 행정구역이 할당되어 있다) 이곳은 최근에 경원선 북쪽 끝에 생긴 역의 이름이 '백마고지'일 정도로 6·25 당시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며, 결국 우리나라가 수복해 낸 38선 이북 지역이다. 백마고지 역이라든가 38선 시절에 북한이 사용하던 로동당 청사 정도는 그래도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지만, 월정리 역과 제2 땅굴까지 가는 건 패키지 관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곳은 본인이 아직 직접 가 보지는 않았기 때문에 땅굴 입구의 정확한 위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토교 저수지'를 먼저 찾은 뒤에 거기서 쭉 올라가 보면, 도로 위에 검은 아스팔트 덧칠이 덕지덕지 되어 있는 이 지역을 찾을 수 있다. 지상 사진은 내가 참조 목적으로 구글링을 통해 임의로 긁어 온 것임. 땅굴 입구 역시 여기 근처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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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땅굴은 탐사와 발견 과정에서 국군 장병의 인명 피해(사망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비극의 땅굴이기도 하다. 입구에는 희생자 위령탑이 만들어져 있다.

3. 제4땅굴(1990):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이현리

예전의 세 땅굴과는 다소 다른 위치와 시기에 발견되었다. 이로써 강원도 동부도 땅굴 안심 지대가 아님이 입증되었다.
지상의 이상 징후만으로 조기에 발견된 1, 2나, 첩보에 따른 수색에 의해 발견된 3과는 달리, 이 땅굴은 교본대로 평범하게 땅굴 탐사를 하던 중에 산지 아래의 지하 140m의 굉장히 깊은 곳에서 꽤 어렵게 발견되었다. 그래서 이 땅굴은 발견 당시 남방 한계선 이남으로 이미 1km가 넘게 진행되어 있던 상태였다.

양구군 이현리를 찾은 뒤 북쪽으로 울창한 숲이 있는 곳으로 가 보면 땅굴이 있는 지점을 찾을 수 있다. 도로 이름도 '땅굴로'이다. 땅굴 근처에는 '남침 분쇄'라고 적힌 기념탑이 세워진 광장이 있다. 이곳 역시 각종 전망대, 전쟁 기념관 같은 연계 관광 상품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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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땅굴은 길어서 그런지, 땅굴들 중 유일하게 땅굴 내부를 전동차를 타고 구경할 수 있다. (3땅굴은 출입구의 경사로에만 전동차가 다님) 제3궤조 집전식이라거나 한 건 아니고, 전동차가 자체적으로 배터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운행 후엔 충전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땅굴은 탐사 과정에서 '헌트'라는 이름의 군견이 희생되었다. 화약 냄새를 맡고 지뢰를 찾도록 훈련받은 독일산 셰퍼드였는데, 물에 잠겨 있던 목함 지뢰를 밟고 그만 장렬히 산화했다. 그 대신, 10여 명의 분대원들이 당했을지도 모를 희생을 몸으로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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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못 하는 짐승이라지만 이것은 너무나 숭고하고 값진 희생이었다. 그래서 헌트에게는 소위 계급과 인헌 무공 훈장이 추서되었으며, 땅굴 입구에 '충견지묘'라고 적힌 무덤과 동상이 세워졌다. 누가 일계급 특진을 한다고 소위가 되지는 않으니, 소위는 영예로운 죽음을 맞이한 군견에게 적절한 계급 포상인 것 같다. (고 한 주호 준위에게 소위 계급이 추서되지는 않았잖아?)

4. 제1땅굴(1974):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포춘리

가장 먼저 발견된 제1땅굴을 가장 나중에 소개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이건 땅굴들 중 유일하게 입구가 남방 한계선 이북의 DMZ 내부에 있으며,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초창기의 땅굴인 만큼 얘는 다른 땅굴들보다 훨씬 얕고 작고 소심한 규모이다. 사람이 서서 걸을 수도 없을 정도로 터널 단면적이 작다. 단면이 아랫변이 더 긴 사다리꼴 형태이다.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 봐도, 이 땅굴의 주변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는 이게 유일하다. 어느 언론사 기자가 남방 한계선 철책 근처에서 줌을 당겨서 촬영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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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바탕으로 본인은 저게 아마 제1 땅굴의 입구가 아닌가 추정한다. 지상 사진과 좀 비슷해 보이지 않는가? 땅굴 입구의 위쪽 언덕은 나무가 없이 풀만 나 있는 것도 그렇고 말이다. 주변에 이것 말고 다른 대안이 될 만한 인공물은 보이지 않는다. 서울 시청으로부터는 직선 거리로 약 60km가량 떨어져 있다.

우측 하단에 있는 경계선이 바로 남방 한계선이다. 그리고 땅굴 근처의 서쪽 상단에 있는 수직선은 군사 분계선은 아니며, 아마 GP 초소를 드나드는 길이지 싶다. GP는 아무래도 북한 땅을 내려다봐야 하는 곳이니, 언덕 위의 높은 지대에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이를 보면, 그저 학교 교과서나 언론 보도를 통해서만 존재에 대해 들었던 남침 땅굴이 더욱 현실성 있게 느껴질 것이다. 또한 땅굴들도 다 같은 땅굴이 아니라 제각기 특징과 개성이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본인이 캡처한 4장의 구글어스 사진들은 모두 같은 배율로 맞춰져 있다. 그리고 지도 화면에 남방 한계선이 같이 찍힌 땅굴은 1과 3 이렇게 둘이다. 1은 입구가 남방 한계선으로부터 5~600m 정도 떨어져 있고, 3은 그야말로 코앞임을 알 수 있다.

비록 땅굴을 의식하여 그 주변으로 우리나라의 군사 시설들이 배치되는 건 사실이긴 하지만, 땅굴 자체는 우리나라의 군사 시설이 아니라 오히려 북한 애들이 직접 만든 물건이다. 이 정도로 아주 간접적으로만 위치에 대한 힌트와 항공 사진을 노출하는 건, 설령 이북 간첩들이 본다 하더라도 새로운 정보를 주는 게 아니며 안보면에서 그리 문제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ㅎㅎ

Posted by 사무엘

2013/06/25 08:29 2013/06/25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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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이제 애호박, 단호박, 늙은호박 이 셋은 항상 있으나, 그 중에 제일은 늙은호박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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