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어 어휘 관찰

1. 한자 義

義는 '의롭다, 옳다, 올바르다' 등의 아주 좋은 뜻을 나타내는 글자인데, 어쩐 일인지 글자 내부에 '양'이라는 부수가 포함되어 있다.
아 그래서 "한자에 담긴 창세기"를 지지하는 진영에서는 한자에 진작부터 "어린양"이라는 기독교 개념이 담겨 있다는 식으로 해석을 해 왔다.

개인적으로는 이게 정말 신빙성 있는 해석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최소한 船의 8이 노아의 가족을 의미한다는 떡밥보다는 어린양이 '좀 더' 개연성이 있어 보이긴 한다. 하긴, '아름답다' 美에도 '양'이 있으니 참 신기한 노릇이다.

그런데 이 義는.. 모조, 가짜, '실물이 아니지만 실물에 준하는' 이런 뜻이 있다. 그래서 의형제, 의수 의족 의안에서 '의'가 '가짜'라는 뜻의 義이다.
동일한 글자에 옳다 바르다.. 의롭다랑 '가짜'라는 뜻이 같이 있는 게 굉장한 의외이지 않은가? 게다가 이건 다의어이지, 동음이의어 관계가 아니다.
저 의가..

  • 依 손발 없는 장애인이 의지할 만한..
  • 儀 모양 외형만.. (예의)
  • 醫 의학의 힘으로 재현한..

어느 것도 아니라니 굉장히 의외로 느껴진다.;; 의형제까지는 이해가 되지만 의수 의족 의안은..?
비록 레알 실물이 아니지만 "부정적인 어감"이 덜한 모조 대체품이라는 단서가 붙어야 할 듯하다.

2. 2음절 한자어의 앞뒤

우리말의 한자어는 비슷한 뜻의 한자 2개가 적당히 결합해서 단어가 된 경우가 많다.
'은혜'라든가.. 그리고 '명령'도 둘 다 뜻이 비슷하기 때문에 태조 왕건 드라마의 대사도 "폐하의 명이시니라 / 폐하의 영이시니라. 눈을 감아라."가 오락가락했다는 얘기를 본인이 예전에 한 적이 있다.

기린이나 앵무 같은 동물 이름도 그냥 '기린 기, 기린 린(麒麟)', '앵무 앵, 앵무 무(鸚鵡)' 한자의 결합이다. ㄲㄲㄲ
다만, 사자는 '사'만 獅이고 '자'는 그냥 잉여 글자 子이다. 일본에서는 한자로는 동음이의어 변별이 안 돼서 저건 그냥 영어 '라이온'으로 부르고 말이다.

이 자리에서 또 제시하고 싶은 예는 '역참'이다. (驛站) 이건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파발꾼이 말 타고 장거리를 달리다가 지친 말을 교체하거나 각종 중간 보급을 받는 기지의 명칭이다. 고속도로 휴게소의 전근대 버전뻘??
역참은 한 왕조 내지 중앙 정부의 통치력이 닿는 곳 이내엔 당연히 모두 설치되어야 했다. 동서양 어디에나 비슷한 기지가 있었고 조선의 경우 암행어사의 파견과도 접점이 있었다.

마패는 원래 암행어사 신분 자체를 입증하는 표식이 아니라, 그냥 역참 시설을 이용하고 말을 불출할 자격이 있음을 나타내는 표식이다.
그리고 "암행어사 출두요~!" 소리와 함께 우루루 뛰어오는 암행어사 편의 포졸들은 지방 관아가 아니라 바로 역참에 소속된 제3자 '역졸'이다. 무슨 특검도 아니고.. 암행어사는 조선만의 참 특이한 제도이긴 했다.

아무튼, 이런 말 대신 철도가 등장하면서 '역참'이라는 시설은 그냥 철도역으로 자연스럽게 대체되었는데.. 한국과 일본에서는 앞글자 '역/에키'를 떼어간 반면, 중국에서는 뒷글자 '참'을 떼어갔다는 차이가 있다. 중국어로는 철도역을 '차참'이라고 한다.

3. 순우리말과의 관계

(1) '거리'는 순우리말로는 길거리 street라는 뜻이지만, 한자어로는 distance라는 뜻이다.
'고장'은 순우리말로는 지역, 마을이라는 뜻이지만, 한자어로는 기계 고장, 트러블, 탈, 문제라는 뜻이다.
'저자'는 현재 한자어 author이라는 뜻으로 거의 굳어져 있지만, 순우리말 고어로.. 장터, 도떼기시장, 가게라는 뜻이 어렴풋이 있다. '저잣거리', 그리고 '저자 시'(市)에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들은 순우리말은 모두 뭔가 지리와 관련된 용어라는 공통점이 있다.

(2) 육지 land를 뜻하는 '뭍'은 앞으로 수십 년 뒤에는 거의 듣보잡 사어가 되지 않을까 싶다.
빚 증서를 나타내는 '어음'은 한자어가 전혀 아닌 순우리말이다.

(3) 잎을 달여 마시는 식물 '차'는 순우리말이다. 차의 한자어는 '다'(茶)이며, 바퀴 달린 탈것을 가리키는 차(車)가 한자어이다.

(4) 놈 자(者), 계집 녀(女)를 보면.. 어쩌다가 순우리말이 천박한 표현으로 전락했나 궁금해진다. "제 뜻을 실어 펴지 못할 놈이 하니라" 특히 계집은 여자에 대해서 거의 흑인-니그로 같은 급의 멸칭이 된 듯하다. 같은 여자끼리 서로 싸울 때나 사용하는 단어이다.
요즘은 한자의 훈 자체가 사람 자, 여자 녀로 바뀌기도 했지 싶다. 문둥병, 장님 같은 말까지 나병, 맹인 등으로 바뀌었고 말이다.

4. 은혜

'은혜'라는 단어는 여러 언어에서 여자 이름으로 쓰이는 것 같다. 우리말은 말할 것도 없고, 영어권에도 Grace나 Gracia가 있으며 일본어에도 '메구미'(惠)가 있다.
우리나라 통일/새 찬송가에서 일본인 작사로 알려져 있는 가장 유명한 곡은 나카다 우고 작사의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인데.. 얘는 원어 가사도 영어 번역이 아니라 일본어로 기재된(Megumi hukaki mikami yo ...) 거의 유일한 곡이다.

본인은 '메구미'를 배틀로얄에서 미츠코에게 낫으로 목이 따여 죽는 여학생 이름으로만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 ㅠㅠㅠ ^^;; 은혜라는 뜻이긴 하지만 딱히 기독교적인 심상을 담은 건 아니다.
이는 마치 서울 은평구와 비슷한 처지이다. 은평은.. 딱 정확하게 은혜와 평화에서 유래되었지만, 신약 바울 서신에 나오는 은혜와 평강(평안)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5. 나머지

(1) 요즘은 무슨 물자나 서비스의 가격이 올랐을 때 '인상/상승'이라는 평범한 단어를 찾기가 어렵다.
가격을 올리는 당사자는 '조정, 합리화, 현실화'라고 말을 돌려서 표현하고,
언론에서는 1%가 오르든 0.1%가 오르든 언제나 '폭등'이라고 보도하기 때문이다. -_-;;

(2) 암석의 생성 원리가.. 한자의 제자 원리(육서)와 대응하는 구석이 있는 것 같다.
화성암: 상형 지사
퇴적암: 회의 형성
변성암: 전주 가차 ㄲㄲㄲ

(3) 우리나라의 성씨하고 한자 부수가 좀 성격이 비슷해 보인다.
귀화해서 생긴 너무 예외적이고 마이너한 성씨를 빼면 성이 내가 알기로 250여 개 정도 있어서 부수의 개수 214와 비슷하다.
부수의 획수 범위 1~17획은 ㄱ부터 ㅎ까지 자음 순서 14와 비슷하다. ㅋㅋ
하긴, 우리나라는 자국민에게는 창씨가 금지되어 있고, 성씨가 너무 적은 게 그냥 특징인지.. 문제점인지 좀 그렇다.

(4) 태권도, 그리고 태풍.. 얘들은 의외로 '태'의 한자가 太나 泰가 아니다.
태권도의 '태'는 跆(밟다, 발로 차다)인데, 국어에서는 태권도 계열의 단어 말고는 사실상 쓰이는 곳이 없는 글자인 듯하다.
그리고 태풍도 아주 의외로 태풍이라는 뜻의 전용 글자인 颱가 존재한다. 태풍의 뜻이 태풍이라니 뭔가 재귀적이다만.. 얘 역시 태풍 말고 다른 용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5) 갓난아기가 맨 처음으로 접하는 단어, 맨 처음으로 시도하는 발음이란 게 뻔할 뻔자이다 보니..
전세계 언어들이 다 '엄마'에는 M 소리가 들어가고, '아빠'에는 어떤 형태로든 B/P 소리가 들어간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엄마'의 포스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해충 '모기'도 세계 언어들 상당수에는 M 소리가 들어있다고 한다. 흥미로운 점이다. 영어 mosquito, 그리고 마침 한자 蚊도 음이 '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3/02/11 08:35 2023/02/1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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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복을 빕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제사나 고사 같은 것이야 사람의 생사 교리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지내지 않는다.
하지만 죽은 조상이 아니라 살아 계신 부모님에게 세배하느라 절하는 건 딱히 문제될 게 없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는 요삼 2 같은 구절의 의미를 부여하여 좋게 받아들일 수 있으며,
심지어 “메리 크리스마스”도 문화 통념적인 차원에서 크게 잘못된 관행은 아닐 수 있다. 이교도의 비성경적인 절기이긴 하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가 대놓고 드루이드교의 인신공양 관습을 희화한 할로윈 같은 급은 아니니까.

하지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는 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쉽지 않은 문제다.

하다못해 불교에는 단순 명복 내지 애도를 넘어, “고인의 극락왕생과 성불을 빕니다”라고 자기네 내세관이 가미된 덕담 문구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내세관이 여타 종교와는 상당히 다르다 보니, 그런 말을 선뜻 사용하기엔 좀 무리가 있다.

우리 쪽 사람들은 교리가 교리이다 보니 누가 돌아가시면 “그래도 아버님은 복음을 전해 들었을 때 분명 의식이 살아 있었으며, 예수님 영접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고개도 끄덕이셨다. 그러니 구원받고 돌아가신 거다” / “아리까리하다” 이런 식으로 얘기가 종종 나온다.

“고인이 꼭 구원받았고 죽어서 하늘로 가셨기를 우리도 진심으로 바랍니다”...가 바로 예수쟁이들이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유족을 위로할 때 머릿속으로 실제로 하는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명복'이라는 단어 자체는 “죽은 뒤에 저승에서 받는 복”이라는 뜻이다. 이런 비성경적인 기원의 단어를 이용해서 성경적인 뜻이 오해 없이 전달될 수 있을까 싶다. 다른 표현으로 바꾸고 싶어도 딱히 대안이 안 떠오르니 말이다.

기독교는 하늘-지옥 말고 다른 사후 세계를 가르치지 않는다. 윤회, 환생, 귀신, 완전 소멸 같은 게 없으며 산 자와 죽은 자가 교류 가능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일면 과격하고 매정하게 보일 수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뒤끝 없이 깔끔하며 온갖 고인드립 미신들을 원천봉쇄하는 건전한 교리이기도 하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사후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에 기독교는 오로지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주의 만찬'만을 시행할 뿐,
무슨 순교한 믿음의 선배들에 대한 묵념이나 추모 같은 건 안 하는 것이다.
솔직히 교회 역사상 순교자가 얼마나 많이 생겼던가? 군대에서 온갖 장병들의 무용담을 기리고 추모하는 논리를 적용하자면, 예배 때도 매번 그런 묵념이라도 해야 하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기독교는 부활을 믿고, 그 믿음의 선배들이 지금도 다 살아 있으며 죽어서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게 교리적으로 일관성이 있는 조치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4/09/07 08:33 2014/09/07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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