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본인은 회사에서 어도비 인디자인의 약간 구버전을 업무상 프로그램 구조 분석을 목적으로 설치한 적이 있었다.
본인은 프로그래머이지 디자이너가 아니며, 나의 컴퓨터 생업 밑천은 비주얼 C++이지 인디자인은 아니다. 이건 잠깐만 들여다보고 버릴 예정이므로 30일 트라이얼 버전만 잠깐 깔았다.
그리고 그걸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뒤, 본인은 그걸 방치했는데..
나중에 내 한글 입력기가 인디자인에서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 듯하다는 문의가 어디선가 들어왔다. 난 비록 30일 기간은 아득히 경과했겠지만 일단 내 회사 컴에 인디자인이 깔려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걸 일단 실행해 봤다. 그랬더니..
프로그램은 "트라이얼 기간이 경과했으니 이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실행 기회를 준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일단 실행이 됐다.
어도비가 요즘 먹고 살기가 팍팍한지, 혹은 도를 넘는 불법복제에 이골이 났는지 소프트웨어 제품들에 인증을 강화하고 패키지 일회성 구매보다 사용권/사용 기간 구매 위주로 정책을 짜게 바꾸고 있다고 본인은 들었다. 하지만 30일이 경과하자마자 칼같이 실행을 거부하는 여느 데모나 셰어웨어와 달리, 트라이얼 버전에 대해서는 쟤들이 나름 자비심 있는 조치를 취한 것 같다. 단 한 번만 더 기회를 준 것이지만 사용자의 입장에서는 훨씬 더 좋은 인상을 받았다.
이와 유사한 다른 사례들을 주변에서 여럿 찾을 수 있다.
옛날에 '잔기'(목숨, 마릿수)가 존재하던 게임을 보면, 1이 마지막 잔기인 게임이 있는가 하면 0이 마지막인 게임도 있었다. 이 역시 1보다는 0이 더 관대해 보인다.
지하철의 경우, 운임이 중간에 오르더라도 예전 운임을 기준으로 이미 충전된 한 달치 정기권은 추가 정산 없이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
지금은 없어진 지 10년이 넘었지만, 옛날엔 서울 지하철에 정액권이란 게 있었다. 구입가보다 더 많은 금액이 입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소진 직전 맨 마지막에는 금액이 100원이 남았든 50원이 남았든 무방하게 전철 최장거리 구간도 1회에 한해 더 이용할 수 있었다. 뭐, 지하철 회사의 입장에서는 이런 운임 누수 꼼수를 막으려면 정액권의 단가를 최대한 높게 잡아야 했겠지만 말이다.
이런 식의 아기자기한 '마지막 한 번의 여유'를 생각할 만한 일이 또 있었다.
한번은 교회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놀다가 야식을 시켜 먹었다. 이럴 때는 집 냉장고나 문에 쳐박혀 있는 야식집 메뉴판을 꺼내서 그 내용대로 주문을 하는데, 그 메뉴판 가격을 그대로 접수받는 집이 내 경험상 생각보다 적다. 수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가격이 올랐다고 그런다. 그러나 이것도 그렇게 센스 있는 조치는 아니다.
자기 집의 옛날 메뉴판 찌라시를 제시하면 그걸 회수하고 새 찌라시로 교환하는 조건으로 1회에 한해, 메뉴에 적힌 대로 옛날 가격을 받게 하는 게 고객에게는 훨씬 더 좋은 서비스가 되지 않을까?
자기네 가게에서 옛날에 집집마다 돌며 뿌렸던 광고 찌라시를 버리지 않고 기억하고, 나중에 그걸로 주문을 한 것만으로도 업소에서 보상을 해 주는 게 마땅치 않은가 말이다.
또한 이것은 "찌라시에 대한 신뢰도를 올리고" 한번 주문을 했던 고객으로 하여금 자기 업소에 대한 충성도를 높이는 효과도 낸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할인 쿠폰이 뭐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소프트웨어 UI 내지 고객을 접대하는 장사를 하는 업종에서는 이런 '마지막 기회'에 대한 아량이라는 덕목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