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기의 역사 -- 上

1. 개인 화기로서 등장한 최초의 총은 화승총

전쟁이라는 건 그걸 겪는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고 비극이다. 하지만 옛날에 이미 일어났다가 끝나 버린 전쟁에 대해서 우리가 뭘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이제는 후손들도 깨달은 게 있는지, 최소한 인류를 멸망시킬 능력이 있는 주류 국가들이 대놓고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식민지를 만들지는 않는다. 시대가 바뀌었고, 핵무기까지 등장할 정도로 무기의 화력이 역설적으로 너무 강해진 탓이다. 앞으로 미래가 또 어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3차 세계 대전은 2차가 끝난 지 70년이 넘은 2016년 현재까지는 여전히 떡밥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인간이 활, 칼, 창 같은 냉병기로 싸우던 시절부터 돌격소총, 전투기, 핵무기, ICBM이 존재하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전쟁과 싸움의 근원은 한결같이 '인간 내면의 정욕'(lust)이라고 말한다(약 4:1). 이거 하나 때문에 사람 죽이는 기술이 어떤 식으로 기상천외하게 발달해 왔는지를 과학 기술 역사와 연계해서 살펴보는 것은 밀덕이나 역덕에게 나름 의미가 있어 보인다. 냉병기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에서도 몇 년 전에 다룬 적이 있다.

흔히 혼동하기 쉬운데, 활은 새총과는 달리 줄의 탄성이 아니라 활대의 탄성을 이용해서 화살을 날린다.
이건 마치 케이블카와 스키장 리프트의 차이와도 비슷해 보인다. 전자는 차량 위에 달린 바퀴가 케이블 위를 굴러가는 형태이기 때문에 개념적으로 모노레일과 비슷하다. 하지만 후자는 차체는 가만히 고정돼 있고 케이블 자체가 움직임으로써 차체 내지 좌석을 이동시키니까 말이다.
총보다 화력이 약하고 다루기도 까다로운 활로 아들 머리 위에 놓인 사과를 맞힌 빌헬름 텔은 정말 대단한 인물이긴 하다. 실존하지 않은 가상의 캐릭터이더라도 말이다.

그러다가 총이 발명되면서 인간은 지구상의 그 어떤 맹수도 죽일 수 있는 먹이사슬의 최정점에 올랐으며, 같은 인간끼리 싸우는 전쟁의 양상도 크게 바뀌었다.
기존 갑옷이나 방패 같은 방식의 방어구는 화살이나 냉병기가 아니라 훨씬 더 큰 운동량을 가진 총알을 막는 건 어림도 없었다. 아니면 인간이 거동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지금보다 더 두껍고 무거워져야 했다. 그러니 그런 건 퇴출되었고, 차라리 방탄조끼나 헬멧으로 형태가 바뀌었다.

다만, 총이 하루아침에 모든 냉병기를 싹 밀어낸 건 아니다. 총도 똑같이 길다란 총구가 있고 방아쇠가 달렸다고 해서 다 같은 총이 아니다.
총은 총알을 강한 화력으로 편하고 지속적으로, 또 단위 시간당 많이 발사하기 위해서 수백 년 동안 끊임없이 내부 구조가 바뀌고 발전해 왔다. 쉽게 말해 서울-부산 열차의 운행 시간이 단축되고 컴퓨터의 연산 속도가 빨라진 것만큼이나 총의 격발 성능도 향상되어 왔다. 시대에 따라 그 양상이 명백한 편이므로 총이 등장하는 옛날 역사물을 만든다면(만화, 영화, 게임 등) 정확한 고증을 반영해야 오늘날의 똑똑한 역덕· 밀덕 시청자나 사용자들에게 털리지 않는다.

옛날에는 화약을 제조하는 기술부터가 최고급 최첨단 기술이었다. 재료의 가격은 말할 것도 없고. 그리고 그걸로 차라리 대포도 아니고 더 작은 개인 화기를 만드는 건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초창기의 총은 지금처럼 방아쇠만 당기면 바로 펑~ 발사되는 형태가 아니었다. 탄환과 화약을 잘 뭉쳐서 총구 안으로 쑤셔 넣고, 그 화약도 심지에다 따로 불을 붙여서 격발하는 등, 그 불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름하여 match lock, 화승총 또는 조총이다. 숙달된 사수라 해도 1분에 겨우 한 발을 쏠까 말까 수준에 불과했다. 방아쇠는 화승을 화약 접시와 연결하는 역할을 했지, 그런다고 바로 격발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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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우리 선조부터가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임진왜란 때 이런 불편한 조총으로도 왜군에게 쳐발려서 나라가 멸망할 뻔했다. 하긴, 스페인의 신대륙 개척자(혹은 침략자)인 코르테스와 피사로도 임진왜란보다 불과 몇십 년 더 전에 그런 비슷한 수준의 총(거기에다 중화기인 대포까지 덤)으로 중남미의 비문명인들을 잘만 제압하고 멸망시켰었다.

그 시절에 총은 불(火)과 천둥, 짙은 연기를 내뿜으면서 '탕' 하니까 사람이 죽는 캐사기 무기가 아닐 수 없었다. 적군을 죽이는 게 아니라 겁을 주는 용도로도 이만한 물건이 없었으며, '겁 주는 용도'로는 오늘날까지 공포탄이 그 역할을 톡톡히 분담하고 있다.

2. 전열보병

옛날 화승총에 쓰인 흑색 화약은 한번 발사되고 나면 주변이 온통 연기로 자욱해져서 연기가 걷힐 때까지는 목표물을 제대로 볼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무기가 아닌 전술 차원에서의 얘기를 좀 덧붙이자면, 그 시절에 총과 총끼리 교전이 붙었을 때는 오늘날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단순무식한 전술인 '전열보병'이라는 게 가능했다. 양 진영이 아무 엄폐물도 없는 개활지에서 한 100미터 간격으로 횡대로 쭈욱 늘어서서는 "영국 신사들이여, 그대들이 먼저 쏘시오" /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사양하겠소. 귀측에서 선빵을 날리는 게 어떻겠소?" 이러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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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패트리어트>의 한 장면.)

무슨 전쟁놀이도 아니고, 철없는 고삐리들이 건물 옥상에서 현피 뜨는 것도 아니고.. 병사들 목숨을 갖고 이게 무슨 미친 소리인가 싶은데.. 저건 단순히 낭만적인 기사도 차원에서 나온 관행이 아니다. 그 시절엔 그 전술의 천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조차 전열보병의 불가피함과 효율을 인정하고 있었다.

먼저 쏜 쪽에서 일제히 격발을 하고 나면, 비록 맞은 쪽의 1열은 상당수 사망과 부상을 면치 못하지만, 먼저 쏜 쪽은 연기가 걷히고 긴 재장전 작업이 끝날 때까지 완전히 무력화 상태가 됐다. 그럼 맞은 쪽은 그 사이에 상대방을 향해 더 가까이 더 접근해서 반격을 하면 됐다. 실제로, 역사적으로는 먼저 쏜 쪽이 전투에서 지고, 반대로 1빵을 맞은 진영이 이긴 사례도 있다.
이런 식으로 총격을 교환하면서 전진하다가 병사가 너무 많이 죽고 전열이 먼저 흐트러지는 쪽이 졌다. 그 잔여 병력들은 항복하지 않는 한 그냥 적군 기병이나 냉병기 육탄전 병사들이 알아서 정리하면 됐다.

물론, 죽을 게 뻔한 상황에서 전열보병의 제1열로 서는 건 보통 멘탈로 가능한 게 아니었다. 과거 사다리를 타고 성을 오르는 공성전에서, 맨 먼저 사다리를 타는 1타는 그야말로 총알받이요, 그냥 죽으러 가는 거나 마찬가지였듯이 말이다. (당장 우리 임진왜란 공성전에서도 볼 수 있듯, 돌팔매질, 뜨거운 물 등등..) 그런데 이런 선구자 아방가르드가 없으면 전투가 제대로 진행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런 1열 1타는 당근과 채찍을 동원해서 강제로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다. 1타를 뛰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오는 병사는 종전 후에 나라에서 엄청난 벼슬과 보상을 약속하고, 전사하더라도 최고의 예우에다 유족들이 연금 타서 평생 먹고 살 걱정 안 하게 해 줬다.
반대로 1열로 서 있다가 무서워서 혼자 도망가는 놈은 사기 유지 차원에서 가혹한 태형과 채찍질로 거의 반 죽여 놓는 식으로 다스렸다. 적군에게 죽을 확률은 95%쯤 되지만 그래도 호국영령으로서 아주 영예롭게 산화하는 것인 반면, 아군 지휘관에게 죽는 건 100%이고 겁쟁이 졸장부로 아주 치욕스럽게 뒈지는 구도를 만든 것이다. =_=;;

그 시절에는 군복, 아니 전투복이 오늘날로 치면 사관학교 생도 예복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아주 형형색색 화려했다. 뿌연 연기 속에서 피아식별을 하는 게 더 중요했으며, "군대에 가면 저렇게 멋있고 간지나는 옷도 입는구나" 하는 긍정적인 홍보 효과도 덤으로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갑옷이 사라진 뒤에 초창기의 총기가 가져온 레어한 관행이다.

총기가 격발만 된다면야 활보다 화력이 강하지만 초창기에는 보다시피 그 격발이 너무 더디고 재장전도 힘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의 필요성이 지금보다 훨씬 더 절실했으며, 지금 같은 개인 단위 위장과 각개전투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3. 성냥에서 부싯돌로, 부싯돌에서 뇌홍으로

옛날 총은 격발 방식뿐만 아니라 총열의 내부 구조도 오늘날과 차이가 있었다. 총열 내부에 강선이 파이지 않아서 기껏 발사된 총알도 뱅글뱅글 돌지 않고 궤도가 안정적이지 못했다. 허나, 강선은 정교하게 파인 홈 형태인데 이건 옛날 기술로 제대로 만들기가 매우 어려웠다. 또한 그 강선의 이점을 살려 제대로 날아가 주는 총알을 만들 기술도 부족했다.

격발 방식 말고, 총열에 강선이 없다는 관점에서 옛날 총을 흔히 '머스킷'이라고 부르며, 오늘날의 강선이 파인 개인 화기를 '라이플'(소총)이라고 부른다.
강선도 없는데 총알이 최대한 곧게 나아가게 하려면 닥치고 총신을 곧고 최대한 길게 만들어야 했다. 옛날 화승총이 구조는 아주 단순해 보이는데 어지간한 작대기 지팡이처럼 엄청 길쭉한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라이플은 기술이 한참 발달한 뒤인 19세기에야 등장했기 때문에 그 전까지 쓰인 총기는 다 머스킷 형태였다. 월트 디즈니 <포카혼타스>를 봐도 머스킷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프랑스의 소설 <삼총사>도 제목의 원래 의미는 그냥 총이 아니라 '머스킷 사수 트리오'(three musketeers) 정도다.
포카혼타스의 경우 위기· 절정부 장면을 보면, 토머스가 인디언 코쿰을 죽이면서 "both eyes open.."(조준할 때는 두 눈을 뜨고)라는 충고를 뇌까릴 때, 총의 심지가 타오르는 게 보인다. 1600년대의 match lock 방식 총이니까 그렇다.

화승 방식은 당장 비만 와도 심지가 꺼져 버리고 총을 쏠 수가 없으니, 불편해도 너무 불편하다. 그래서 일단 격발 방식이 총 내부에 부싯돌을 내장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담배에다 비유하자면, 불 붙이는 도구가 성냥에서 라이터로 바뀐 것과 같다. 총도 그런 변화를 겪었다. wheel lock, 그리고 뒤이어 flint lock이라는 방식이 등장했는데, match lock보다 사용이 더 편리해지긴 했지만 총의 구조는 예전보다 훨씬 더 복잡해지고 제조 단가가 더 올라갔다. 그래서 가성비 면에서 옛날 방식을 완전히 대체하기까지는 1세기 이상 시간이 더 걸렸다. 휠락은 말 그대로 방아쇠 주변에 동그란 바퀴 같은 장치를 볼 수 있으며, 플린트락은 총신 위쪽에 부싯돌처럼 생긴 돌출 부품이 있다.

그러다가 19세기에는 새로운 기폭제를 기반으로 '퍼커션 캡'이라는 방식이 도입되면서, 총기는 격발 방식이 부싯돌 점화가 아닌 뇌관 기반으로 바뀌었다. 툭 건드리기만 하면 부싯돌보다 불꽃이 훨씬 더 잘 일어나는, '뇌홍'이 든 캡슐을 탄환+화약과는 별개로 따로 장전한다. 총기의 방아쇠는 그 캡슐을 자극하는 역할만 한다. 그럼 그 뇌홍의 불꽃으로 인해 화약이 폭발하고, 그 힘으로 총알이 날아가게 된다.

퍼커션 캡은 거의 400년간 총기에 존재하던 화약 접시를 퇴출시켰으며 장전 속도를 크게 향상시켰다. 미국의 남북 전쟁을 포함해 19세기의 주요 전쟁들에는 부싯돌 방식 총기를 퍼커션 캡 기반으로 개조한 머스킷이 맹활약을 했다. 전열보병 전술도 사라졌으며, 병사들이 입는 군복도 미국 독립 전쟁 시절보다 훨씬 더 칙칙하고 단순해졌다. 그리고 이 탄환, 화약, 기폭제를 하나로 통합하여 간소화시킨 것이 바로 오늘날의 '탄피'가 되었다.

여담이지만,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세포이의 항쟁"이 왜 일어났는지도 그 시절에 총의 격발 방식을 알고 있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쉽게 설명하자면 "뭐, 탄환과 화약을 감싸는 주머니에 쇠기름· 돼지기름이 발라져 있었다고? 그럼 난 그걸 입으로 물어뜯고 총을 쏠 때마다 힌두 교/이슬람 교 율법을 어긴 꼴이잖아?" 이런 종교 규범 광역 어그로 때문에 용병들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오늘날의 편리한 자동 소총이라면 그런 걱정은 전혀 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下에서 계속됨)

Posted by 사무엘

2016/07/11 08:34 2016/07/11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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