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가지 언어 관찰 메모

1. '값'과 두 값의 '차이'

C/C++ (프로그래밍 언어)에서 두 포인터의 차이는 정수로 계산된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를 보면 속도의 차이와 당장 지금 위치의 차이, 그리고 어떤 특정 값하고 두 값의 차이 같은 개념을 정확하게 구분하지 않고 쓰는 어휘가 많은 걸 알 수 있다. 수학으로 치면 전자는 f(x)의 값이고 후자는 도함수 f'(x)의 값과 얼추 비슷하겠다.
예전 글에서 이미 언급한 아이템도 있겠지만 그런 예들을 한데 다시 늘어놓아 보았다.

- 시각과 시간: 두 시각의 차이가 시간이다. "현재 시간은?"이 아니라 "현재 시각은?"이 맞다(What time is it now?). 그런데 일단 만능 세계어 영어부터가 time이 둘을 명확하게 구분 안 하긴 한다. time table이라고 부르는 것 중에 학교 '시간표'야 '9시부터 10시까지 1교시' 시간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숫자만 쭈욱 늘어서 있는 열차 운행 스케줄은 명백히 '시각표'라고 해야 맞다. "9시 정각 서울 발차, 9시 10분 영등포 도착, 9시 11분 영등포 출발" 같은 각각의 시각이 중요하니까..

- 빠름과 이름, 느림과 늦음: 현재 9시 10분인데 시계가 13분을 가리키고 있다면 시계가 3분 이르다고 해야 원칙적으로 맞다. 빠른 건 그 시계의 무브먼트가 문제가 있어서 가만히 놔두면 1시간이 아니라 59분 30초 만에 1시간치 눈금이 흘러갈 때 쓰는 말이다. 다시 말해 '빠름'의 결과로 인해 시계의 표시 시각이 언젠가 '일러질' 수 있을 뿐, 빠름 그 자체는 지금 당장 시계 바늘이 어느 시각을 가리키고 있는지가 핵심이 아니다.

- 수와 번호: 숫자는 수량을 나타낼 때도 쓰고 무언가를 그냥 식별할 때도 쓰인다. 영어로는 똑같이 number. 그래서 성경에서 짐승의 수 666이 수량와 번호 중 짐승의 어떤 특성을 나타내는 숫자인지 알쏭달쏭할 때가 있다.

- 째와 번째: 일단 영어의 nth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우리말은 그냥 '째'이다. '번째'는 nth time이다. 허나 '째'라고만 하면 자꾸 단순 순서 이상으로 서열, 랭크의 느낌이 강해서 요즘은 앞에 '번'이 구분 없이 쓸데없이 자꾸 끼어 들어오는 것 같다.

- 음고와 음정: 두 음고(pitch)의 차이가 음정일 뿐이다. 음정을 영어로는 interval이라고 하니 이보다 명확할 수 없다. 그런데 노래방 기계에는 조를 높이거나 낮추는 버튼의 이름이 그냥 '음정 -+'이다. 음높이를 정확하게 맞춰서 노래를 못 부르는 음치를 보고 음정이 안 맞다고 그런다.
용어의 쓰임이 '시각'과 '시간'만큼이나 뭔가 좀 이상하다..;; 과학 실험에다 비유하면, "측정값이 안 맞다."가 아니라 "오차가 안 맞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두 백분율(퍼센트)의 차이는 퍼센트 포인트이다. 20%이던 것이 50% 증가하면 30%가 되지만, 50%포인트가 증가하면 70%가 된다. 훌륭한 액션 영화 테이큰에는 "Your arrogance offends me. For that the rate just went up 10%."라는 대사가 있는데, 상납금 요율이 진짜 1.1배 상승인지 아니면, 실제로는 10%에서 또 10%포인트가 상승한 20%를 가리키는지 문맥을 봐서는 잘 모르겠다. 최종적으로는 20%로 협상이 마무리 되니까 말이다.

2. 힘은 빛을 만든다

'힘'이라는 건 굉장히 추상적이고 뜻의 표현 범위가 넓은 단어이다. 영어로 하면 보통 power, strength가 떠오르고, 과학에서 사용하는 질량 곱하기 가속도로서의 힘은 force이다.
이 힘은 찰나의 순간에 가속도를 나타내기 때문에,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힘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사실 알고 보면 힘이 쌓인 거리가 곱해진 '일'인 경우가 많다. 마력수가 높은 엔진을 흔히 힘 좋은 고성능 엔진이라고 하는데, 마력이 괜히 단위 시간당 '일률'인 게 아니다. 마치 질량보다는 그게 발현된 형태인 무게· 중력이 더 친근한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그런데 이런 단어 말고 might도 평소에 동음이의어인 조동사로 하도 많이 쓰여서 그렇지 사실은 '힘, 세력'을 뜻하는 단어이다. mighty라고 '강한, 힘센, 힘 있는'이라는 형용사도 쉽게 만들 수 있다. 마이티 마우스, 현대 자동차 트럭 마이티처럼.
유명한 왈도체 표현인 "힘 세고 강한 아침"도 Mighty fine morning인 거 잘 알려져 있다.

음절초에 파찰음이 없어서 딱히 힘 있게 들리지는 않지만, 얘는 마초 액션물에서도 은근히 종종 볼 수 있는 단어이다.
모탈 컴뱃의 격파 시험 Test your might!
그리고 둠 코믹스에서 Might makes light! "힘은 빛을 만든다" 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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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무슨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문구인 독일어 Arbeit macht Frei에서 단어만 바꿔서 Macht macht Licht를 떠올리게 한다. 독일어는 공교롭게도 '힘' 명사와 '만들다, 행동하다' 동사가 동음이의어이다..;;

3. 형용사 no

예전에도 한번 언급한 적이 있지 싶은데, 한국어는 부사와 용언(동사)을 좋아하는 언어이고 영어만치 명사를 이것저것 수식하는 관형어 쪽은 훨씬 덜 발달해 있다.
단적인 예로 한국어는 영어로 치면 형용사 more, less, no 따위에 동일한 품사로 대응하는 어휘가 없다. 그래서 '더/덜'은 체언이 아닌 용언에만 붙을 수 있는 부사이고, '없다' 역시 용언이다. 이거 영어와 한국어 사이의 굉장히 큰 차이이며, 상호 번역을 어렵게 하는 요소이다. 단적인 예로 Oh no! More lemmings 같은 게임 타이틀을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하시겠는가?

그래서 한국어는 None, nobody라든가 더 나아가 void 같은 단어도 한 단어로 대응하는 번역이 없으며 기껏해야 '없다'에다 명사형 전성어미가 붙은 '없음', 또는 한자어 無 접두사로 비슷한 의미를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단, 반대로 영어는 '없다', '모르다' 같은 용언이 용언 형태로 딱 떨어지게 있지는 않다.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모르다'가 한 단어 동사로 존재하는 언어는 내가 아는 한 지금까지 모국어인 한국어밖에 못 봤다. 기억이나 지식이 없는 게 무슨 동작과 관계가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누구를 아는 것의 반대로 누구를 모른다는 상태를 타동사로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는 건 편리한 점이긴 하다.

4. out of

하루는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에서 한국어로는.. "너그러운 자비의 마음을 베풀어서 자네에게 또 한번 살아남을 기회를 주겠다."라고 번역된 대사가 영어 자막으로는 "Now, out of the mercy of my heart, I will give you one more chance to live a long life."라고 번역된 걸 봤다.
out of라는 건 굉장히 뜻이 많고 추상적인 단어이다. 의미가 반대로 달라질 수도 있을 정도로 뜻이 많아서 문제이며, 성경 번역에서도 이거 의미가 왔다갔다 한다.

컴퓨터에서 out of는 '-없음, -부족'이라는 뜻으로 압도적으로 많이 쓰인다. 나 역시 Out of memory라는 응용 프로그램 에러 메시지, Out of data in line xx라는 GWBASIC 에러 메시지에서 out of를 난생 처음으로 봤다. 그래서 '아오안'(out of 안중 = 관심없음) 같은 말도 있다.
하지만 out of는 저 영어 자막에서 보듯이 from, among 비스무리하게 뭔가 '출처, origin'을 뜻하기도 한다. "뭔가를 어떤 집단으로부터 밖으로 끄집어냄"에서 관점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해석 방식이 달라진다. 저 문맥에서는 run 같은 동사가 앞에 붙어야 out of가 '고갈, 부족'이라는 뜻이 더 분명해질 것으로 보인다. "더는 나도 인내심이 한계가 있거든? 못 참겠거든?" 이럴 때도 당연히 out of patience가 쓰이니 말이다.

또한, out of가 인내심 같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물리적인 장소를 받을 때에도 '-밖에서', '-밖으로'가 다 되는 듯. 의외로 골치아프다.

5. die / be dead

한국어는 영어처럼 완료형· 수동태 같은 게 없거나 발달해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동사의 일반 과거형이 0에서 1로 바뀌는 그 움직임 자체뿐만 아니라 0에서 1로 바뀌어 있는 그 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아무개가 죽었다"라는 말을 영작하면 "XXX died"가 아닌 경우가 많다. 십중팔구 "XXX is dead"가 맞는 번역이다. 당신이 밥숟가락을 놓았고 저승사자 내지 천사가 "넌 이제 죽었어. 나랑 같이 하늘로 가자" 이런 말을 한다면 당연히 "You are dead."이다.

초점이 숨이 끊어지는 동작이 아니라 현재 죽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한국어도 '죽어 있다'라고 말을 풀어서 표현할 수는 있지만 그게 자주 쓰이지는 않는다.
비슷한 맥락에서, 한국어로 "틀렸다"도 영어로는 it is / you are wrong이다. 한국어로 과거 시제 동사인 것이 영어로는 현재 시제 be 동사 + 형용사인 것이다. 하긴, 일상생활에서 '틀린다, 틀리게 된다'라고 저 동사를 현재 시제로 곧이곧대로 쓸 일은 매우 드문 것 같다. 그러니 '틀리다'의 현재 시제의 의미가 자꾸 '다르다'처럼 변질돼 가는 것일 테고.

그 반면, "고인은 2017년 몇 월 며칠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 "이 게임은 너무 어려워서 나도 다섯 번쯤은 죽은 뒤에야 깰 수 있었다" 이럴 때에는 영어로도 동사 died(혹은 그에 상응하는 경어체 동사)가 쓰인다. 관점의 차이를 아시겠는가?
또한 신학적으로는 예수님 역시 일회적인 죽으심을 나타낼 때 died이다. 그분은 한때 die 하셨지만 언제까지나 be dead는 아니니까 말이다.

이런 관점의 차이가 '찾다'라는 단어에도 존재한다. 한국어의 '찾다'는 찾는 동작 자체를 가리키는 seek/look for과, 그 동작의 결과로 인해서 무언가· 누군가와 실제로 연결이 성사되는 find에 대한 구분이 없다.
성경의 "seek, and ye shall find." 그리고 테이큰 대사"I will look for you. I will find you. (And I will kill you.)"를 생각해 보자. 이게 '죽다'로 치면 "Die, and ye shall be dead"와 비슷한 관계인 셈이다.

6. 그 밖에

(1) 가끔씩 본인은 총에 맞은 건 개머리판으로 두들겨 맞았을 때에나 쓰는 게 맞지 않나(be struck) 생각한다. 날아오는 야구공에 맞듯이 "총알"에는 맞을 수 있다. 그러나 총알이 아닌 총에는 "쏘였다"고(be shot) 말해야 맞지 않을까?
뭐, 한국어는 머리카락을 자른 것을 머리 자른다(!!!)고도 줄여 말하는 언어인데, 총에 맞는 것쯤이야.. 총알도 총의 연장선으로 생각할 수는 있겠다. 다만, 활의 경우는 내 언어 직관이 크게 이상하지 않은 한, 화살에 맞았다고 꼬박꼬박 말하지 활에 맞았다고는 잘 안 그러는 것 같다!

(2) abandoned이나 forsaken을 번역할 때는 '버려진'이라고 잘만 쓰면서 왜 lost를 번역할 때 '잃어버려진'이라고는 선뜻 표현하지 않는지 궁금하다. '잃어버리다'는 피동형으로 잘 안 쓰는 게 기독교계 문서 사역 번역계에서 불문율인가 보다. 덧붙이자면, 난 개인적으로 번역투 피동형을 기피한답시고 given도 괜히 주어가 불분명한 능동으로 번역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3) 영어 같은 외래어가 국어로 들어오면, 원래는 다의어나 동음이의어이던 것이 토착화 과정에서 상상도 못 할 기괴한 방법으로 '구분'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도트(문자 그대로 픽셀 화소. 도트 프린터, 도트 노가다)와 닷(인터넷스러움), 네트(구기 종목 경기장에서 쓰이는 그물망;;)와 넷(역시 IT스러움) 같은 건 대표적인 예이고, 3D조차도 그렇다. '삼디'라고 읽으면 더럽고 어렵고 위험하다는 뜻이고 '쓰리디'라고 읽으면 왠지 삼차원 입체라는 의미가 된다. 물론 3D 업종를 '쓰리디 업종'이라고 읽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내 어감상은 느낌이 좀 덜하다.

(4) 다음 단어들은 통념과는 달리 앞의 어근이 한자어가 '아니다.': 바지선(barge), 바자회(bazaar), 마지노선(프랑스의 지명 Maginot), 지로용지(giro), 모기지론(mortgage).
마지노선은 '마지노 선'이라고 해야 정확하지 '마지+路線'도 절대 아니다. 외래어는 '나일 강, 야마노테 선, 후지 산'처럼 고유명사와 품종 이름 사이를 띄우기도 하니까 말이다.
또한 모기지론은 '론'도 loan이지 論 같은 한자어가 절대 아니다! 좀 띄어쓰기를 해야 앞의 말의 어원이 외래어라는 걸 더 분명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5) '물 불 / 맑다 밝다 / 묽다 붉다' 이런 관계를 보면 한국어에도 꽤 오묘한 구석이 있다는 게 느껴진다. 말소리와 의미가 서로 아무렇게나 형성된 게 아니어 보이기 때문이다.
ㅁ과 ㅂ 계열 음운이 서로 대조를 이루는 대표적인 쌍은 어머니와 아버지(맘마 빠빠..)이다. 가장 발음하기 쉬운 축에 드는 입술소리인 데다 갓난아기가 본능적으로 거의 제일 먼저 구사하는 축에 드는 어휘이다 보니, 저 관계는 내가 아는 한 거의 세계 공통이다. 부/모, papa/mama 등..
그런데 엄마 아빠 말고 물과 불이 관련 심상까지 비슷하게 저렇게 한데 엮이는 건? 한국어 말고는 잘 모르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7/07/03 08:35 2017/07/03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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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허국현 2017/07/08 09:02 # M/D Reply Permalink

    값의 차이의 예로는 "파도"와 "파고"도 있습니다. 파도는 말 그대로 바닷물이 출렁이는 거고, 파고는 바닷물이 출렁일 때의 높이를 의미하는데, 사람들이 가끔 혼동해 씁니다.

    파고의 높이 같은 괴상한 표현도 기자들이 가끔 쓰고요.

    1. 사무엘 2017/07/08 11:20 # M/D Permalink

      파장의 길이, 전설의 레전드 등등... 이런 식으로 '역전앞'을 능가하는 재미있는 말들이 많이 만들어질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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