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중국은 그 넓은 대륙 전지역이 강제로 단일 시간대를 쓰며, 대만(중화민국)쯤은 자기뿐만 아니라 남들까지 승인하지 못하게 압력을 넣을 정도로 강경하게 1중국 단일 국가 정체성을 쪽수빨로 밀어붙이고 있다. 조금 수틀렸다간 지금의 유럽처럼 십수 개 이상의 나라로 쪼개지고 서로 독립하네 마네 내전 헬게이트가 밤낮 벌어졌을 수도 있는 대륙이 어쨌든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유지되고 있다. 뭐, 지금도 구석 곳곳에서 분쟁과 잡음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우리나라는 워낙 작다 보니 미국처럼 외국 나가서 세계 평화를 지키다가 산화한 자국 군인 같은 개념이 없고, 일본이나 중국처럼 자국 내부의 무슨 소수 민족 갈등 문제 같은 것도 없다. 옛날에는 울릉도나 제주도 사람들이 본토인들에 비해 문화가 이질적이었을지 모르지만, 거기도 본토 행정구역 편입과 동화가 이미 몇백 년 전에 마무리 됐으니 이제 와서 문제될 것은 없다. 굳이 민족간 갈등이라면 재중· 재러시아 동포라든가 탈북자, 북한 관련 문제가 있을 뿐이다.

이런 한국에 비해 중국은 참 크고 아름다운(?) 단일 국가이긴 한데, 이 때문에 말과 글까지 전지역에서 완전히 깔끔한 단일 체계로 유지되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사정이 생각보다 복잡하다.
우리나라에서 중국어라고 하면 99%는 '니 하오 마, 워 쓰 뿌, 한 궈, 쭝 궈 런' 이러는 베이징 표준 중국어, 일명 보통화를 떠올린다. 실제로 이게 화자가 가장 많아서 중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통용되며, 중국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권장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대륙에는 일명 Cantonese라고 불리는 광둥(광동)어 방언도 있다. 언어 구조는 중국어와 뿌리를 공유하지만 음운과 어휘는 보통화와 이질감이 굉장히 커서 통역이 필요할 정도라고 한다. 즉, 같은 글자를 발음하는 방식이 다르고 성조 체계도 다르다. 이 말인즉슨, 보통화에 맞춰진 병음 기반 입력 방식을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표준 중국어는 일부 음운에 ㄴㄹㅇ 같은 유성음 받침이 존재하는 것 말고 다른 종성이 없다. 그래서 초성은 '성모'요, 중성과 종성은 한데 뭉뚱그려서 '운모'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중국어는 음운 체계가 두벌식스럽다는 뜻이다.
그런데 광동어는 무성음 받침이 존재하며 한자들의 독음이 의외로 한국어 한자음에 더 근접해 있다.

전세계에서 모국어 화자가 가장 많은 보통화와는 달리, 광동화는 화자가 1억이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물 좋은(?) 홍콩과 그 인접 지역에서 통용되고 유명 무술 영화 같은 데서 많이 나오는 관계로 화자 수에 비해 임팩트가 좀 있어 보인다.

실제로 이 연걸만 해도 보디가드 영화에서 홍콩 여주인공으로부터 "대륙 아저씨"라고 비아냥 받지만 말하는 것은 광동화이다. 성조도 있고 뭔가 중국어처럼 들리긴 하지만 보통화를 배운 사람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내뱉는다.
킬 빌에서도 파이 메이 싸부가 광둥어 대신 일본어밖에 할 줄 모른다고 여주인공을 개무시하는 걸 볼 수 있다.

중국어는 (1) 말뿐만 아니라 (2) 글자도 잘 알다시피 간체자와 번체자로 파편화돼 있다.
간체자는 기존 한자가 획이 너무 많고 불편하다는 실용적인 이유로 인해 1950년대 말에 마오 쩌둥이 자기 재량으로 고안하고 제정한 문자 체계이다. 화폐 개혁이 아니고, 철자법이나 맞춤법 개정도 아닌 일종의 문자 개혁을 한 셈이다. 공산당 특유의 불도저 식 독재가 아니면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당장 1953년에 6· 25 전쟁 휴전 당시에만 해도 중국도 '나라 국'을 國이라고 썼는데 불과 몇 년 뒤에 그게 싹 달라진 걸 보면 굉장한 이질감이 느껴진다.
지금 같은 고성능 컴퓨터가 처음부터 짠 등장해서 잘 보급돼서 사람이 손으로 직접 한자를 쓸 일이 없어지다시피했다면 굳이 번거롭게 간체자 따위 만들어서 시간(옛날 문헌)과 공간(한국 및 대만..) 단절을 초래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옛날에는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었으며, 마오 휘하의 중국 공산당은 옛것을 청산한답시고 간체자보다 훨씬 더 심한 병크 뻘짓도 많이 저지르긴 했다.

이 때문에 오늘날 중국은 한자의 종주국이면서도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그런 종주국은 아닌.. 뭔가 어색한 위상을 지니게 됐다.
(그러고 보니 그럼 중국 말고 일본의 한자 약자는? 1949년에 '신자체'라는 이름으로 중국의 간체자보다도 먼저 자체 제정한 거라고 한다.)

문제는 간체자와 번체(글)가, 보통화와 광동화(말)가 서로 딱 정확하게 맞물리는 관계가 아니라는 점에서 더 커진다. 2*2=4개 조합이 모두 제각기 존재한다.
중국 대륙이야 보통화+간체이지만, 대만은 보통화+번체여서 문자만 서로 다르다.
홍콩과 마카오에서는 광동화+번체이지만, 중국에서 광동어가 통용되는 접경 지역은 광동화+간체여서 역시 문자만 차이가 난다.

  보통화 광동화
간체 베이징 포함 중국 본토 중국의 홍콩 접경 일부 지역
번체 대만 홍콩, 마카오

컴퓨터의 localize 관점에서 봤을 때 중국어 간체(chs)와 중국어 번체(cht)는 응당 서로 다른 것으로 취급된다. 하지만 표준 중국어(보통화+간체) 입력기라고 해서 번체 한자 입력 기능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zhongguo라고 입력했을 때 玉가 아니라 或이 들어간 中國이 제시되게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럼 중국과 대만이 한 IME를 옵션만 바꿔서 쓰면 되느냐 하면 또 그렇지는 않다. 말이야 보통화 기반이니 '니 하오 마, 워 아이 니' 같은 간단한 말이야 그대로 통한다. 하지만 지리적으로 수십 년 이상 단절되었던 관계로, 최신 유행어라든가 외래어, 학술 용어로 가면 미묘하게 차이가 발생한다. 같은 브라우저 기능도 '즐겨찾기'와 '책갈피'로 서로 다르게 불리듯이, 다른 쪽 말을 알아들을 수는 있지만 현지에서 말을 그렇게 쓰지는 않는 것들이 생겨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어 입력기와 대만어 입력기는 그냥 서로 다른 어휘 DB를 사용한다. 간체자냐 번체자냐 하는 건 문자 표현 수단의 차이일 뿐, 말 자체의 차이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차이에 불과하다.

여담이지만, 보통화와 광동화도 차이가 나는 건 구어체 발화이지, 같은 문장이나 단어를 글자로 쓴다면 간체/번체만 일치한다면 글이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리고 대륙 사람도 백지 상태에서 쓸 줄을 모를 뿐이지, 옛 번체자를 그럭저럭 알아보기는 한다고 한다. 이 사람들이 현대 중국어 말고 소위 말하는 공자 맹자 고전까지 그대로 읽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진다.

물론, 그런 차이는 있다고 한다. 's, 다시 말해 '~의' 소유격을 나타낼 때 문어체의 고전에서는 之가 즐겨 쓰였지만 구어 위주의 현대 중국어는 잘 알다시피 de 的이 쓰인다.
일상적으로 之를 쓰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중국 사람들이 그렇게 쓰인 문장을 아예 독해를 못 하는 건 아니라고..
한국 사람들이 "-느니라, -노라, -느뇨" 이딴 말을 일상생활에서 안 쓴다고 해서 그걸 못 알아듣는 건 아니니 말이다.

오히려 중국어는 한국어 같은 복잡다난한 어미나 조사가 없고, 그야말로 어간 어근만 성조 넣어서 내뱉으면 되는 간결한 형태 고립어인데, 딱히 고어체와 현대어체가 달라질 만한 게 있는지.. 온통 궁금한 것 투성이이다.
중국어가 구어는 '한어'이지만 문어는 '한문'이 아니라 '중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런 고전과 현대 중국어를 구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심상의 차이 때문에 우리나라 역시 고전 중국어 시대의 인명 지명은 국어 발음으로 표기하고, 현대의 중국 인명 지명은 현지음으로 표기하는 게 아닐까 한다.

한편, 중국과 대만은 자기 나라 말을 한자 없이 (3) 발음만 표기하는 수단도 서로 달라져 있다.
원래 중국에서는 20세기 초에 한자의 획을 적당히 떼어내서 카타카나처럼 생긴 주음부호(bopomofo)라는 걸 만들어 쓰고 있었다. 그랬는데 대륙 중공은 1950년대 말에 간체자와 동시에 라틴 알파벳 기반의 한어병음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이걸로 주음부호를 대체했다.

괜히 어설픈 독자 문자 대신에 라틴 알파벳을 채용한 것은 오늘날 같은 컴퓨터 시대에 혜안 선견지명이긴 했다.
하지만 옛 전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게 대만이고, 그걸 버린 것은 중화인민공화국인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두 나라 입력기는 언어 DB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말소리 입력법까지도 서로 달라지게 됐다.

※ 입력법

컴퓨터에서 중국어를 입력하는 방법은.. (1) 한자의 모양으로부터 입력하는 방법과, (2) 말소리에 대응하는 한자를 입력하는 방법으로 크게 나뉜다.
(1)의 가장 궁극적이고 원시적인 형태는.. 그냥 필기 인식(..;;; )일 것이다. 한자나 중국어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이 생판 모르는 한자도 곧장 입력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너무 느리고 비효율적이고 그림과 문자의 구분이 없고.. 이럴려고 컴퓨터를 쓰나 싶은 자괴감이 들기에 충분하다.

그러니 한자를 적당히 기본 단위로 분해한 오필화수입법이나 창힐수입법이란 게 있다. 나름 중국에서 날고 기는 천재들이 머리를 짜내어 고안한 방식이겠지만, 일반인들은 그런 천재가 아니며 한자부터가 추상화나 기계화가 꽤 난감한 문자인 관계로.. 그런 입력법들은 처음에 그 체계 내지 파자(破字, 문자를 더 작은 모양 단위로 쪼갬) 이념을 익히는 게 까다롭다. 비록 익숙해지고 나면 속도가 제법 나겠지만 높은 진입장벽은 근본적으로 어쩔 수 없는 핸디캡이다.

(2)는 결국 더 단순한 표음문자의 도움을 받아서 한자를 '간접적으로' 입력하는 방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빠르고 효율적인 입력 방식을 구현하기 어렵다. 한글만 해도 로마자 입력법이 기존의 두벌식이나 세벌식 글자판보다 절대로 효율적이지 못한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더구나 한자를 이런 식으로 입력하는 건 소리가 같은 한자들에 대해 후보를 고르는 과정을 반드시 필요로 하며, 글자보다는 단어 및 문장 묶음 단위의 입력을 지향해야 한다. 즉, 일이 더 복잡해진다.

하지만 (1)이 워낙 복잡하고 그에 비해 (2)는 직관적이고 입문하기가 쉽다 보니,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에서도 가장 대중적인 입력법은 후자이다. (2)는 언어 데이터에다가 딥 러닝이니 뭐니 하는 인공지능 기술을 접목하여, 후보 추천과 자동 완성 같은 쪽이 갈수록 발전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2)에 속하는 입력법이 한어병음뿐만 아니라 주음부호 방식이 존재한다.
주음부호는 알파벳보다 글자수가 많다 보니 4단의 숫자 글쇠까지 사용한다는 점, 단어보다는 성모+운모+성조까지 모두 입력해서 글자 단위 완성을 지향한다는 점, pin-gan / ping-an, xi-an / xian 같은 모호성이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한글 입력에서 세벌식과 비슷한 심상이 느껴진다.

PC에서는 숫자 글쇠가 후보 선택이 아니라 주음부호 입력용으로 계속 쓰이기 때문에 입력 방식이 병음과는 사뭇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런 제약이 없는 모바일 스크린 키보드용 입력기에서는 주음부호도 병음처럼 쫘르륵 한데 늘어놓고 단어를 고르는 식으로 서로 비슷하게 동작하는 편이다.

※ 성조

끝으로, 중국어는 성조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표준 중국어 기준으로 흔히 4종류가 있다고 하는데, 지방 방언 중에는 성조 체계가 더 복잡한 것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표준 중국어도 표기에 반영하는 것만 4종류이지, 표기를 생략하는 덜 중요한 성조(경성?)까지 포함하면 사실상 5종류이다.
알파벳 기반의 Pinyin에서는 경성이 생략되지만 주음부호에서는 1성인 평성(-)이 생략되고, 경성(·)이 점으로 표기된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한국어도 중세 시절에는 원래부터 그랬는지, 아니면 중국어의 영향을 받아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성조가 비스무리하게 있었다고 한다. 그걸 표기하려 했던 흔적이 바로 방점이다. 하지만 성조는 몇백 년 전에 이미 깔끔하게 소멸하고, 그나마 장음과 단음 구분으로 간소화됐다고 하지만 오늘날은 이나마도 극도로 문란해진 지 오래다.

글쎄, 말, 벌, 눈, 밤 같은 단어는 어느 길이가 어느 뜻인지 한국 토박이도 분간을 못 하고 그냥 다 문맥에 의존한다. 하지만 '적다'처럼 용언에서는 짧은 '적'은 write이고 긴 '적'은 few라고 절대 헷갈리지 않는 것 같다. 옛날 사람들은 현대인보다 말의 길이와 ㅐ/ㅔ 구분 같은 것도 훨씬 더 신경 쓰며 살았을 것 같은데, 중세 국어가 현대 국어보다 더 복잡하고 정교했을 것 같다.

사실, 이건 중국어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중국 토박이들도 그 많은 글자들의 성조를 칼같이 다 구분해서 쓰고, 하나라도 어긋나면 완전히 말을 못 알아듣는다거나 하지 않는다. 그리고 성조를 외국인 학습자들처럼 과격한 연기 하듯이 큼직하게 구사하지도 않는다. 애초에 성조는 노래를 부를 때만 해도 깡그리 무시되는 요소이다. (뭐 그렇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뮤직비디오에 자막이 반드시 들어간다고 한다. 일본에서 한자로 적힌 고유명사에다가는 곁에 히라가나 발음이 거의 반드시 병기되는 것처럼 말이다. 읽는 방법이 워낙 다양할 수 있고 복잡해서..)

성조가 여전히 필요하긴 하지만, 그래도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치부되고 문란해지는 기미가 조금씩 보인다는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8/09/20 08:32 2018/09/20 08:32
, ,
Response
No Trackback , 5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534

어휘, 언어유희 관찰

1. '아' 다르고 '어' 다름

  • 이건 번역이 아니라 반역이다.
  • 이건 재판이 아니라 개판이다.
  • 저놈들은 소통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소탕의 대상일 뿐.

음운 하나만 바꾸니 긍정· 중립적인 심상이 확 부정적인 심상으로 바뀜.
이런 맛깔나는 개드립을 만들 수 있는 예가 또 뭐가 있나 궁금하다.

ㅐ와 ㅔ도 '한대', '한데', '한 데' 모두 다름.
'매다'와 '메다', '결제'와 '결재' 의외로 구분하기 아주 어렵다.
"사랑해 보고 싶다", "사랑해. 보고 싶다"가 다른 것만큼이나...!!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

2. I sawed the demons

Doom 1 게임의 배경 음악 중에 제목이 "I sawed the demons"인 곡이 있는 걸 보고는 표현의 기발함에 빵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안 그래도 국산 영화 중에 "악마를 보았다"가 있는데.. saw가 아니라 sawed이다. 핑키데몬 패거리를 훌륭한 대화수단인 전기톱으로 쓱싹쓱싹 썰어 죽였는가 보다.

이런 식의 말장난들을 수집하면 자료가 잔뜩 모이지 싶다. 하긴, 레밍즈의 레벨 이름 중에도 "No problemmings!" 같은 게 있었고 말이다.

3. 중의성

난 벡터의 외적이라고 하면 당연히 3차원에서만 정의되고 결과값으로 역시 벡터가 나오는 그 연산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위키백과를 보니.. 내적이 행벡터(한 줄짜리..)와 열벡터(한 칸짜리)의 곱으로서 스칼라이듯이, 외적은 반대로 열벡터와 행벡터의 곱으로서 행렬이 나오는 연산으로 정의될 수도 있다. 내가 원래 아는 그 외적은 '벡터곱'이라고 따로 부르기도 하더라.

자동차 기계에서 '로터리 엔진'도 이와 비슷한 중의성과 혼동의 여지가 있는 단어이다. 모든 행정이 피스톤의 상하 왕복 없이 태생적으로 곧장 회전으로 바뀌는 엔진을 뜻하지만, 한편으로 실린더가 불가사리 팔처럼 달려 있는 '성형'(별 모양 같은.. 星形) 엔진도 로터리라고 불리는가 보다. 내가 아는 로터리 엔진은 제작자의 이름을 따서 '반켈' 엔진이라고 부른다.

'반켈'을 자음 역행 동화까지 반영해서 '방켈'이라고 적는 건 내가 알기로 현행 외래어 표기법에 허용돼 있지 않다. 그래도 이런 음운 변화가 한국어에만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영어로도 같은 접두사가 correct의 반의어는 in-correct이지만, possible의 반의어는 im-possible이다~!

4. 마술사와 마법사

magician sorcerer wizard. 마술사 요술쟁이 마법사.
다~ 그 말이 그 말 같다.
심지어 성경에서도 셋 다 등장하며, 별다른 구분이 없이 공평하게 다소 부정적인 심상으로 쓰였다. 출 7:11, 단 2:2처럼.

오늘날의 용례를 따라 좀 구분하자면, M은 영국 신사 검은 모자 검은 정장 차림으로 흰 장갑을 끼고 모자에서 토끼를 꺼내는 그 사람을 가리킨다. 즉, 전적으로 기술과 트릭만으로 마술 쇼를 선보이는 직업 엔터테이너이다.
유럽에서는 단두대를 작동시키는 사형 집행관이 경찰· 군인 제복 차림이 아니라 저런 마술사 같은 정장 차림이기도 했다. 나름 전문직임을 표방하고 사형수에게 최후의 순간까지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S는 마법사 중에서도 좀 사악한 마법사.. 과학자로 치면 매드 사이언티스트에 가까운 느낌이 난다. 똑같은 뱀도 snake 대신 serpent, 돼지를 pig 대신 swine이라고 부르는 듯한 그 느낌이다.
각종 동화와 게임에서 악역으로 나오는 마법사는 전부 이 칭호가 붙는다. 알라딘과 페르시아 왕자에 나오는 Jafar처럼 말이다.

W는 소매가 치렁치렁 내려오는 군청색 계열 robe 차림에다 비슷한 색깔의 고깔도 쓴 백발 할아버지 마법사를 가리킨다. 우리에게 딱 이렇게 고정된 이미지가 있다.
참고로 위저드의 여성 버전이 바로 witch(마녀..!)이다. 얘는 옷차림은 남자와 비슷한데 코가 툭 튀어나왔으며,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닌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전세계를 통틀어 wizard라는 단어의 용례를 크게 바꿔 버린 이력이 있다. 자기 컴퓨터 프로그램 UI 요소 이름을 '마법사'라고 붙였기 때문이다. '다음', '다음' 누르면서 몇 가지 선택만 하면 나머지 작업은 마치 컴퓨터가 마술을 부리듯이 짠 알아서 해 준다고..;;
그거 원조가 1994년 Word 6.0에서 도입된 문서 작성 마법사(정확히는 문서· 양식마당 같은 기능)이다. Visual C++에서도 초기 프로젝트를 세팅해 주는 기능의 이름이 AppWizard이다.

5. 토마토와 감자

개인적으로 유튜브에서 즐겨 보는 Doom 2 플레이 동영상 시리즈 채널이 있다. 중계를 하는 아저씨가 말을 참 찰지게 잘했다. replenish the ammo (탄약을 보충) 이런 말도 하길래 지금까지 성경에서 문어체로만 보던 replenish가 현대에도 구어에서 저렇게 쓰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양반은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시뻘건 둥근 몬스터 Cacodemon을 토마토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big red tomato랜다.. ㅋㅋ 카코데몬이 토마토라니.. 완전 창의적인 발상이다.
그리고는 비슷한 계열의 갈색 몬스터인 Pain Elemental을 감자라고.. potato라고 불렀다. 한국어 내지 한글 표기로는 전혀 느낄 수 없지만, 영어로는 감자와 토마토가 묘하게 롸임이 잘 맞는 단어들이다. =_=;; 유전공학에서도 괜히 pomato라는 말을 만든 게 아니다.

하긴, 스타크래프트에도 비슷한 예가 있으니, 바로 템플러 두 기가 합체한 아콘이다. 빨간 공(다크 아콘), 파란 공(그냥 아콘) 둘을 싸잡아서 전구 러쉬라고도 하는데 꼭 리버처럼 특정 동물이나 벌레를 닮지 않은 아닌 유닛도 이렇게 애칭이 존재하는가 보다.

6. 어휘 병렬

난 초월번역 때문에 퍼진 이런 유행어들을 좋아한다. '찢고 죽인다'(rip and tear), '크고 아름다운', '힘세고 강한'(mighty fine...??)..
'충격과 공포'(shock and awe)는 딱히 초월번역은 아닌 것 같다.
awe는 성경에서도 fear와 비슷하지만 좀 더 놀라움과 존경(대단하게 여김)의 뉘앙스가 가미된 '두려움'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또한, 유의어를 대구· 병렬해서 의미를 강조하는 것 자체도 성경에서 문학서 위주로 즐겨 쓰이는 수사 기법이다.
우리말에서는 기도할 때 많이 쓰이는 '고맙고 감사하신 하나님' 이것도 비슷한 용례일 수 있겠다. 엄밀히 말해 주술 호응이 어법상 좀 안 맞긴 하지만 말이다.

병렬과 대구는 유의어로 할 수도 있고 반의어로 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수학을 좋아하는데, 그 다음으로 수학을 도구로 사용하는 과학 계열 과목을 덩달아 좋아하고 잘한다면 그건 뭐 뼛속까지 이공계 적성일 것이다. 이런 건 일종의 유의어 병렬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인이 영국, 캐나다 같은 나라의 복수 국적도 덩달아 갖고 있는 격이다.

하지만 이와 달리, 수학을 좋아하는데 극도의 추상적인 것만 추구하다 보니 그 다음으로 철학이나 신학(...)으로 빠져드는 사람도 있다. 파스칼은 대표적인 예이며, 아이작 뉴턴도 물리뿐만 아니라 저 바닥으로도 사상이 장난 아니게 심오하고 책도 많이 쓴 사람이었다.
이런 건 반의어 병렬인 걸까? 미국인이 호주나 일본 같은 나라의 복수 국적을 갖고 있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7. 영화 대사

(1) 범죄도시 영화에 나오는 '진실의 방'과 '전 변호사'
이말년 씨리즈에 나오는 '존대말 학습기'
가혹행위 고문 도구일 뿐인데 쓸데없이 병맛 고퀄의 이름을 붙여 놓은 예가 또 뭐가 있을까?
이런 거 나오면 재미있다. 범죄도시에 나오는 '휘발유와 경유'는 둘리에서 '핵폭탄과 유도탄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2)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배우는 언어 예절은 다음과 같은 예가 있다.

  • When someone says 'hi,' it's usually polite to say 'hi' back. (테이큰.. 끝날 때 다 돼서)
  • You forgot to say 'please'. (터미네이터 2 첫부분..)

정말 기가 막히게 대사를 쓴 것 같다.. ^_^
특히 후자의 경우, 그 마초 아저씨는 자기에게 대뜸 "오토바이, 재킷, 구두 좀 내놔"라고 요구하는 벌거벗은 청년에게 담배빵까지 선사하면서 참교육을 시도하지만, 상대는 터미네이터인지라 교육이 통하지 않고 자기가 쳐발렸다..;; (아 그나저나 벌거벗은 남자에게 담배빵이면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 종말편과 비슷한 장면이네..!! ㅋㅋㅋ)

(3) 내가 타이타닉 호 내지 영화 타이타닉 얘기를 하면서도 지금까지 이걸 언급한 적이 없었구나. 칼의 집사이며 흥신소 탐정 출신의 '러브조이'는 악역인데 왜 이름을 하필 성경적인 심상이 굉장히 강한 '러브조이'라는 이름으로 지었는지 궁금하다.
갈 5:22가 말하는 '성령의 열매' 중 첫째와 둘째가 바로 사랑, 기쁨(love, joy)이기 때문이다. 그 뒤로는 peace, longsuffering 등이 이어진다.

영화를 본 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본인은 오로지 칼만이 속물 나쁜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정말 원리 원칙대로라면 타이타닉은 음행을 자유로운 사랑이라고 정당화· 미화하는 색채가 짙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칼은 싫지만 칼의 다이아몬드 선물은 싫지 않았던 로즈의 행동도 역시 비판받을 점이다. -_-;; "과속 칼치기 vs 차로 안 지키기"만큼이나 내가 나이가 들면서 생각과 관점이 약간 바뀌었다.

8. 나머지..

  • '자급자족'과 '자업자득'은 용도와 뉘앙스가 굉장히 다른 사자성어이긴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의외로 구분이 쉽지 않은 게 느껴진다...;;
  • 망치와 마치, 갯벌과 개펄.. 이렇게 원래는 발음이 미묘하게 다르고 뜻도 미묘하게 차이가 있었는데 지금은 구분이 없어져 버린 말의 예가 더 있을까? 돌과 돐도 비슷한 경우이겠다.
  • 동물 중에도 이리와 늑대(wolf), 부엉이와 올빼미(owl) 같은 건 구분이 꽤 애매하다.
  • 서울랜드는 '서울 대공원'의 안에 있는 놀이공원이고, 반대로 롯데월드는 놀이공원인 '롯데월드 어드벤처'를 포함한 복합 시설의 총칭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둘을 섞어서 아무 명칭이나 놀이공원을 가리키는 용도로 쓰는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8/01/22 08:31 2018/01/22 08:31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450

여러가지 언어 관찰 메모

1. '값'과 두 값의 '차이'

C/C++ (프로그래밍 언어)에서 두 포인터의 차이는 정수로 계산된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를 보면 속도의 차이와 당장 지금 위치의 차이, 그리고 어떤 특정 값하고 두 값의 차이 같은 개념을 정확하게 구분하지 않고 쓰는 어휘가 많은 걸 알 수 있다. 수학으로 치면 전자는 f(x)의 값이고 후자는 도함수 f'(x)의 값과 얼추 비슷하겠다.
예전 글에서 이미 언급한 아이템도 있겠지만 그런 예들을 한데 다시 늘어놓아 보았다.

- 시각과 시간: 두 시각의 차이가 시간이다. "현재 시간은?"이 아니라 "현재 시각은?"이 맞다(What time is it now?). 그런데 일단 만능 세계어 영어부터가 time이 둘을 명확하게 구분 안 하긴 한다. time table이라고 부르는 것 중에 학교 '시간표'야 '9시부터 10시까지 1교시' 시간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숫자만 쭈욱 늘어서 있는 열차 운행 스케줄은 명백히 '시각표'라고 해야 맞다. "9시 정각 서울 발차, 9시 10분 영등포 도착, 9시 11분 영등포 출발" 같은 각각의 시각이 중요하니까..

- 빠름과 이름, 느림과 늦음: 현재 9시 10분인데 시계가 13분을 가리키고 있다면 시계가 3분 이르다고 해야 원칙적으로 맞다. 빠른 건 그 시계의 무브먼트가 문제가 있어서 가만히 놔두면 1시간이 아니라 59분 30초 만에 1시간치 눈금이 흘러갈 때 쓰는 말이다. 다시 말해 '빠름'의 결과로 인해 시계의 표시 시각이 언젠가 '일러질' 수 있을 뿐, 빠름 그 자체는 지금 당장 시계 바늘이 어느 시각을 가리키고 있는지가 핵심이 아니다.

- 수와 번호: 숫자는 수량을 나타낼 때도 쓰고 무언가를 그냥 식별할 때도 쓰인다. 영어로는 똑같이 number. 그래서 성경에서 짐승의 수 666이 수량와 번호 중 짐승의 어떤 특성을 나타내는 숫자인지 알쏭달쏭할 때가 있다.

- 째와 번째: 일단 영어의 nth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우리말은 그냥 '째'이다. '번째'는 nth time이다. 허나 '째'라고만 하면 자꾸 단순 순서 이상으로 서열, 랭크의 느낌이 강해서 요즘은 앞에 '번'이 구분 없이 쓸데없이 자꾸 끼어 들어오는 것 같다.

- 음고와 음정: 두 음고(pitch)의 차이가 음정일 뿐이다. 음정을 영어로는 interval이라고 하니 이보다 명확할 수 없다. 그런데 노래방 기계에는 조를 높이거나 낮추는 버튼의 이름이 그냥 '음정 -+'이다. 음높이를 정확하게 맞춰서 노래를 못 부르는 음치를 보고 음정이 안 맞다고 그런다.
용어의 쓰임이 '시각'과 '시간'만큼이나 뭔가 좀 이상하다..;; 과학 실험에다 비유하면, "측정값이 안 맞다."가 아니라 "오차가 안 맞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두 백분율(퍼센트)의 차이는 퍼센트 포인트이다. 20%이던 것이 50% 증가하면 30%가 되지만, 50%포인트가 증가하면 70%가 된다. 훌륭한 액션 영화 테이큰에는 "Your arrogance offends me. For that the rate just went up 10%."라는 대사가 있는데, 상납금 요율이 진짜 1.1배 상승인지 아니면, 실제로는 10%에서 또 10%포인트가 상승한 20%를 가리키는지 문맥을 봐서는 잘 모르겠다. 최종적으로는 20%로 협상이 마무리 되니까 말이다.

2. 힘은 빛을 만든다

'힘'이라는 건 굉장히 추상적이고 뜻의 표현 범위가 넓은 단어이다. 영어로 하면 보통 power, strength가 떠오르고, 과학에서 사용하는 질량 곱하기 가속도로서의 힘은 force이다.
이 힘은 찰나의 순간에 가속도를 나타내기 때문에,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힘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사실 알고 보면 힘이 쌓인 거리가 곱해진 '일'인 경우가 많다. 마력수가 높은 엔진을 흔히 힘 좋은 고성능 엔진이라고 하는데, 마력이 괜히 단위 시간당 '일률'인 게 아니다. 마치 질량보다는 그게 발현된 형태인 무게· 중력이 더 친근한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그런데 이런 단어 말고 might도 평소에 동음이의어인 조동사로 하도 많이 쓰여서 그렇지 사실은 '힘, 세력'을 뜻하는 단어이다. mighty라고 '강한, 힘센, 힘 있는'이라는 형용사도 쉽게 만들 수 있다. 마이티 마우스, 현대 자동차 트럭 마이티처럼.
유명한 왈도체 표현인 "힘 세고 강한 아침"도 Mighty fine morning인 거 잘 알려져 있다.

음절초에 파찰음이 없어서 딱히 힘 있게 들리지는 않지만, 얘는 마초 액션물에서도 은근히 종종 볼 수 있는 단어이다.
모탈 컴뱃의 격파 시험 Test your might!
그리고 둠 코믹스에서 Might makes light! "힘은 빛을 만든다" 처럼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거 무슨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문구인 독일어 Arbeit macht Frei에서 단어만 바꿔서 Macht macht Licht를 떠올리게 한다. 독일어는 공교롭게도 '힘' 명사와 '만들다, 행동하다' 동사가 동음이의어이다..;;

3. 형용사 no

예전에도 한번 언급한 적이 있지 싶은데, 한국어는 부사와 용언(동사)을 좋아하는 언어이고 영어만치 명사를 이것저것 수식하는 관형어 쪽은 훨씬 덜 발달해 있다.
단적인 예로 한국어는 영어로 치면 형용사 more, less, no 따위에 동일한 품사로 대응하는 어휘가 없다. 그래서 '더/덜'은 체언이 아닌 용언에만 붙을 수 있는 부사이고, '없다' 역시 용언이다. 이거 영어와 한국어 사이의 굉장히 큰 차이이며, 상호 번역을 어렵게 하는 요소이다. 단적인 예로 Oh no! More lemmings 같은 게임 타이틀을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하시겠는가?

그래서 한국어는 None, nobody라든가 더 나아가 void 같은 단어도 한 단어로 대응하는 번역이 없으며 기껏해야 '없다'에다 명사형 전성어미가 붙은 '없음', 또는 한자어 無 접두사로 비슷한 의미를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단, 반대로 영어는 '없다', '모르다' 같은 용언이 용언 형태로 딱 떨어지게 있지는 않다.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모르다'가 한 단어 동사로 존재하는 언어는 내가 아는 한 지금까지 모국어인 한국어밖에 못 봤다. 기억이나 지식이 없는 게 무슨 동작과 관계가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누구를 아는 것의 반대로 누구를 모른다는 상태를 타동사로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는 건 편리한 점이긴 하다.

4. out of

하루는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에서 한국어로는.. "너그러운 자비의 마음을 베풀어서 자네에게 또 한번 살아남을 기회를 주겠다."라고 번역된 대사가 영어 자막으로는 "Now, out of the mercy of my heart, I will give you one more chance to live a long life."라고 번역된 걸 봤다.
out of라는 건 굉장히 뜻이 많고 추상적인 단어이다. 의미가 반대로 달라질 수도 있을 정도로 뜻이 많아서 문제이며, 성경 번역에서도 이거 의미가 왔다갔다 한다.

컴퓨터에서 out of는 '-없음, -부족'이라는 뜻으로 압도적으로 많이 쓰인다. 나 역시 Out of memory라는 응용 프로그램 에러 메시지, Out of data in line xx라는 GWBASIC 에러 메시지에서 out of를 난생 처음으로 봤다. 그래서 '아오안'(out of 안중 = 관심없음) 같은 말도 있다.
하지만 out of는 저 영어 자막에서 보듯이 from, among 비스무리하게 뭔가 '출처, origin'을 뜻하기도 한다. "뭔가를 어떤 집단으로부터 밖으로 끄집어냄"에서 관점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해석 방식이 달라진다. 저 문맥에서는 run 같은 동사가 앞에 붙어야 out of가 '고갈, 부족'이라는 뜻이 더 분명해질 것으로 보인다. "더는 나도 인내심이 한계가 있거든? 못 참겠거든?" 이럴 때도 당연히 out of patience가 쓰이니 말이다.

또한, out of가 인내심 같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물리적인 장소를 받을 때에도 '-밖에서', '-밖으로'가 다 되는 듯. 의외로 골치아프다.

5. die / be dead

한국어는 영어처럼 완료형· 수동태 같은 게 없거나 발달해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동사의 일반 과거형이 0에서 1로 바뀌는 그 움직임 자체뿐만 아니라 0에서 1로 바뀌어 있는 그 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아무개가 죽었다"라는 말을 영작하면 "XXX died"가 아닌 경우가 많다. 십중팔구 "XXX is dead"가 맞는 번역이다. 당신이 밥숟가락을 놓았고 저승사자 내지 천사가 "넌 이제 죽었어. 나랑 같이 하늘로 가자" 이런 말을 한다면 당연히 "You are dead."이다.

초점이 숨이 끊어지는 동작이 아니라 현재 죽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한국어도 '죽어 있다'라고 말을 풀어서 표현할 수는 있지만 그게 자주 쓰이지는 않는다.
비슷한 맥락에서, 한국어로 "틀렸다"도 영어로는 it is / you are wrong이다. 한국어로 과거 시제 동사인 것이 영어로는 현재 시제 be 동사 + 형용사인 것이다. 하긴, 일상생활에서 '틀린다, 틀리게 된다'라고 저 동사를 현재 시제로 곧이곧대로 쓸 일은 매우 드문 것 같다. 그러니 '틀리다'의 현재 시제의 의미가 자꾸 '다르다'처럼 변질돼 가는 것일 테고.

그 반면, "고인은 2017년 몇 월 며칠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 "이 게임은 너무 어려워서 나도 다섯 번쯤은 죽은 뒤에야 깰 수 있었다" 이럴 때에는 영어로도 동사 died(혹은 그에 상응하는 경어체 동사)가 쓰인다. 관점의 차이를 아시겠는가?
또한 신학적으로는 예수님 역시 일회적인 죽으심을 나타낼 때 died이다. 그분은 한때 die 하셨지만 언제까지나 be dead는 아니니까 말이다.

이런 관점의 차이가 '찾다'라는 단어에도 존재한다. 한국어의 '찾다'는 찾는 동작 자체를 가리키는 seek/look for과, 그 동작의 결과로 인해서 무언가· 누군가와 실제로 연결이 성사되는 find에 대한 구분이 없다.
성경의 "seek, and ye shall find." 그리고 테이큰 대사"I will look for you. I will find you. (And I will kill you.)"를 생각해 보자. 이게 '죽다'로 치면 "Die, and ye shall be dead"와 비슷한 관계인 셈이다.

6. 그 밖에

(1) 가끔씩 본인은 총에 맞은 건 개머리판으로 두들겨 맞았을 때에나 쓰는 게 맞지 않나(be struck) 생각한다. 날아오는 야구공에 맞듯이 "총알"에는 맞을 수 있다. 그러나 총알이 아닌 총에는 "쏘였다"고(be shot) 말해야 맞지 않을까?
뭐, 한국어는 머리카락을 자른 것을 머리 자른다(!!!)고도 줄여 말하는 언어인데, 총에 맞는 것쯤이야.. 총알도 총의 연장선으로 생각할 수는 있겠다. 다만, 활의 경우는 내 언어 직관이 크게 이상하지 않은 한, 화살에 맞았다고 꼬박꼬박 말하지 활에 맞았다고는 잘 안 그러는 것 같다!

(2) abandoned이나 forsaken을 번역할 때는 '버려진'이라고 잘만 쓰면서 왜 lost를 번역할 때 '잃어버려진'이라고는 선뜻 표현하지 않는지 궁금하다. '잃어버리다'는 피동형으로 잘 안 쓰는 게 기독교계 문서 사역 번역계에서 불문율인가 보다. 덧붙이자면, 난 개인적으로 번역투 피동형을 기피한답시고 given도 괜히 주어가 불분명한 능동으로 번역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3) 영어 같은 외래어가 국어로 들어오면, 원래는 다의어나 동음이의어이던 것이 토착화 과정에서 상상도 못 할 기괴한 방법으로 '구분'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도트(문자 그대로 픽셀 화소. 도트 프린터, 도트 노가다)와 닷(인터넷스러움), 네트(구기 종목 경기장에서 쓰이는 그물망;;)와 넷(역시 IT스러움) 같은 건 대표적인 예이고, 3D조차도 그렇다. '삼디'라고 읽으면 더럽고 어렵고 위험하다는 뜻이고 '쓰리디'라고 읽으면 왠지 삼차원 입체라는 의미가 된다. 물론 3D 업종를 '쓰리디 업종'이라고 읽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내 어감상은 느낌이 좀 덜하다.

(4) '물 불 / 맑다 밝다 / 묽다 붉다' 이런 관계를 보면 한국어에도 꽤 오묘한 구석이 있다는 게 느껴진다. 말소리와 의미가 서로 아무렇게나 형성된 게 아니어 보이기 때문이다.
ㅁ과 ㅂ 계열 음운이 서로 대조를 이루는 대표적인 쌍은 어머니와 아버지(맘마 빠빠..)이다. 가장 발음하기 쉬운 축에 드는 입술소리인 데다 갓난아기가 본능적으로 거의 제일 먼저 구사하는 축에 드는 어휘이다 보니, 저 관계는 내가 아는 한 거의 세계 공통이다. 부/모, papa/mama 등..
그런데 엄마 아빠 말고 물과 불이 관련 심상까지 비슷하게 저렇게 한데 엮이는 건? 한국어 말고는 잘 모르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7/07/03 08:35 2017/07/03 08:35
, ,
Response
No Trackback , 2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377

각종 언어 관련 생각들

1.
“A is better than B.” (A는 B보다 더 낫다)라는 영어 평서문에 담긴 정보를 생각해 보자.
여기서 A를 묻는 wh 질문을 만든다면 “Who is better than B?” (누가 B보다 낫다고?)가 될 것이다. 이건 쉬운 문제다.
그럼 B를 묻는 질문은 뭐가 될까?

Who is A better than? (A가 누구보다 낫다고?)
Than who is A better?

내 문법 시스템으로는 위와 같은 두 문장이 만들어지긴 한데... 평생 저런 형태의 문장을 만들 일이 없다가 만들고 보니 정말 괜찮은가 모르겠다.
인간의 언어가 경이로운 점이 뭐냐 하면 화자는 평생 접한 적이 없는 새로운 문장을 그것도 안긴 문장· 이어진 문장 같은 복잡한 형태로 자유자재로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2.
그리고 than 다음에는 문법 원칙상으로는 목적격이 아니라 주격이 온다. better than me가 아니라 일단은 better than I가 맞다는 것. 하지만 It's me/I만큼이나 이건 원어민들 사이에서도 구분이 굉장히 문란해져 있다.
게다가 who와 whom의 구분도 이와 같은 처지이다. 3인칭 단수는 him/her을 쓸 곳에다가 he/she를 갖다붙이지는 않을 텐데 왜 그러는 걸까?

테이큰에서도 리암 니슨이 유괴범을 고문하면서 "You sold my daughter? You sold her? Huh? To who(m)?"라고 물을 때 나는 당연히 whom이라고 말했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다시 들어 보니 너무나 분명하게 그냥 who였다.
의문대명사 얘기가 나오자마자 이번에도 내 머리는 0.1초 만에 테이큰 대사를 검색 결과로 내놓았다. 영화 한 편 제대로 봐 놓으니 실생활에서 대사를 정말 많이 우려먹으며 지낸다. 테이큰은 좋은 영화이다~ㅎㅎ

3.
다음으로, “Replace A with B.” (A를 B로 바꿔라)라는 문장을 생각해 보자.
여기서 A를 묻는 wh 질문은 What do we replace? (우리는 뭘 바꾸는가?) 이다.
그럼 또 B를 묻는 질문은 어떻게 만들면 될까? 영어는 with만 붙이면 간단히 해결된다.

With what do we replace? (우리는 무엇으로 바꾸는가?)
What do we replace with?

그래서 찾기/바꾸기 대화상자를 우리말로 옮길 때면 난 늘 껄끄러웠다. Find what / Replace with가 각각 "찾을 문자열 / 바꿀 문자열"이긴 한데, '바꿀 문자열'은 문맥에 따라 개념상 B뿐만 아니라 A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국어에서 체언 없이 조사를 앞세워서 '으로 바꿈'이라고는 안 쓰니까 의미가 엄밀하지 못하게 되는 건 뭐 어쩔 수 없다. (뭐, See also를 가뿐하게 '도보시오'라고 옮긴 백괴사전은 참 기발하다.)

4.
우리말에서 (내가 보기에) 관계가 굉장히 이상해져 있는 단어의 쌍이 최소한 둘 있는데, 바로 '장/쪽'과 '성/이름'이다. 양면이냐 단면이냐가 분명치 않다 보니 '다섯 장'은 대부분의 경우 다섯 페이지이지만 가끔은 앞뒤로 열 페이지를 의미하기도 한다. page/sheet에는 양면 개념이 없는 것 같은데 우리말만 왜 그런지 잘 모르겠다.

이름의 경우, 가끔은 first와 family를 모두 포함한 full name을 뜻하지만 가끔은 그 자체가 '성'과 대립하여 first name만을 뜻하기도 한다. 한 단어가 상위 개념과 하위 개념을 모두 포함하다니 거 참..;;
성/이름도 그렇고 다시 '장'으로 돌아오면, '장'은 '쪽'뿐만 아니라 알다시피 chapter를 의미하기도 해서 더욱 지저분하다. 이런 건 순우리말만으로 도저히 변별이 불가능하다면 외래어를 로컬라이즈 해서라도 논리적으로 분간이 되게 만들어야 하지 않나 싶다.

5.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한국어에는 sibling을 뜻하는 한 단어가 없나 참 궁금하다. '내일', '초록' 같은 건 순우리말이 없어서 한자어라도 있지만, sibling은 부모/자식 같은 한 단어도 없어서 그냥 "형제 자매는 있습니까?" 이렇게 매번 풀어서 설명하게 되는 게 불편하다. 이렇게 꼭 필요한 우리말이 없으니 전산학에서 트리 구조를 설명할 때는 오늘도 '시블링, 시블링' 이런 외국어가 나올 수밖에 없다.

6.
한국어는 '저희'라는 1인칭 복수형이 존재하는 것도 다른 언어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아이템이라고 한다. '우리'와는 달리 청자를 확실히 배제한 1인칭 복수이고 1인칭 쪽을 좀 낮춤으로써 청자를 높이는 효과까지 있으니, 특히 회사가 고객에게 말할 때 사용하기에 무척 적절한 대명사이다. 언어학자에 따라서는 이것을 제4인칭으로 분류하기까지 한다고 들었다.

7.
종교관 중에는 이신론(deist)이라는 게 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긴 하지만 그 신은 아주 기계적이고 정교한 자연 법칙에 가까운 추상적인 존재일 뿐, 무슨 인격을 갖고 있고 인간의 삶에 관여하거나 인간에게 무슨 계시를 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는 종교관이다. 뉴턴의 법칙은 절대적인 법칙이긴 해도 무슨 종교적인 숭배의 대상은 아닐 테니까. 유신론을 뭔가 무신론 내지 불가지론 스타일로 풀이한 것 같다.

미국이 지폐에까지 In God we trust가 적혀 있는 나라이고, 메이플라워 서약 역시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멘"으로 시작할 정도로 기독교 이념이 철철 넘쳤다고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초대 대통령을 포함한 건국 공신들이 다 프리메이슨이네, 구원받은 크리스천이 아니네 하는 이의 제기도 많다. 이들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믿은 신자가 아니라 실제로는 저런 이신론자였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이신론의 '이'는 한자로 무엇일까?
二(2)는 당연히 아니요,異(다름)도 아니며, 바로 理(이치)이다. 이성이라고 할 때의 그 한자이다.
한때 일부 '유(柳)씨' 가문에서 자기 성을 한글로 '유'가 아닌 '류'로 쓰게 해 달라고 소송도 냈던 것 같던데, 理는 '리'로 좀 구분해서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리신론'. 二나 異와는 완전히 다르지 않은가?
게다가 우리는 이미 "그럴 리가 없다" 같은 문맥에서 의존명사 理는 두음법칙 없이 오랫동안 잘 사용해 오고 있다. 그래서 내가 이런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기도 하는 것 같다.

8.
뭐, 영어도 만능은 아니긴 마찬가지다. time이 시각도 되고 시간도 되고.. number가 번호도 되고 수도 되어서 꽤 모호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 건 본인이 예전 글에서 몇 번 지적한 바 있거니와, free가 무료 & 자유를 다 의미하는 것도 상당히 불편한 점이다. "free software"는 영어권 사람이 문서에다가 친히 'free as in free beer(맥주가 공짜!)'이라고 모호성 해소를 해 줄 정도로 free는 유명한 다의어이다.

한국어가 ㅐ와 ㅔ의 중화로 인해 '내, 네'가 동음반의어가 돼 버린 것은 굉장한 막장 상황이긴 하다만, 영어도 2인칭 대명사의 단· 복수 구분이 없는 것과, 남녀 구분 없이 3인칭 단수 사람을 간단히 일컫는 대명사가 없는 것은 굉장히 불편한 점이다. 이것 때문에 (s)he, he or she, 심지어 they 등 갖가지 꼼수가 나돈다. 그렇다고 사람까지 it으로 싸잡아 일컬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9.
영어에서 안테나(antenna)의 복수형은 antennas또는 antennae이다.
곤충의 더듬이를 가리키는 안테나의 복수형은 불규칙인 antennae인 반면,
더 나중에 생긴 기계 안테나의 복수형은 규칙인 antennas이다.

이와 비슷한 진통을 겪고 있는 대표적인 단어는 mouse이다. 요놈의 복수형에 대해서는 영어권에서도 혼란이 많다.
전통적인 생물 생쥐의 복수는 mice이지만, 컴퓨터 포인팅 장비인 마우스는 mouses도 인정하는 분위기이다.

동사 hang은 처음에는 '걸다, 매달다'이다가 '사람 목을 매달다 → 교수형에 처하다'라는 뜻이 확장되어 나갔다.
본래 뜻인 '걸다, 매달다'의 과거형은 불규칙인 hung이지만, '교수형에 처하다'의 과거형은 역시나 hanged이다.
이렇듯, 다의어의 경우, 단어의 활용· 파생 형태에까지 그대로 의미 확장이 반영되지는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10.
그나저나 일본어에는 우리말 주격조사 이/가(일본어 발음으로는 '가')와 보조사 은/는(일본어 발음으로는 '와')에 개념적으로 거의 그대로 대응하는 조사가 존재한다는구나..!! 신기하다. 그래서 '고레와', '고레가' 요런 말이 있었구나.
지구상에 이런 개념 pair가 존재하는 언어는 한국어/일본어 정도밖에 없다고 한다. 굉장한 레어템을 공유한다는 것만으로도 두 언어가 문법 구조는 무척 비슷하며, 상호간 학습 장벽을 크게 낮춰 준다.
일본어는 음운 구조가 워낙 간단하다 보니 한국어처럼 받침 유무에 따른 이/가 바리에이션 같은 건 없다. 다만, 쓰기는 '하'라고 적고 읽기는 '와'라고 이상하게 한다는 것도 어렴풋이 들었다.

11.
'르' 불규칙이 적용되는 형용사 용언인 '빠르다'와'다르다'를 생각해 보자. 얘들은 '-ㄹ리'가 붙어서 '빨리, 달리'라고 부사형 활용이 가능하다. '-이/-히'라는 부사형 접미사가 붙어서 얼추'빠르게, 다르게'를 짧게 줄인 뜻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멀다/가깝다'에 서 '멀게/가깝게' 대신 '멀리/가까이'라고 하는 것처럼.

그런데 이런 활용은 보편 생산적이지 않다. 즉, '바르다'(right, correct 형용사), '가파르다', '푸르게' 같은 용언은 저렇게 활용이 가능하지 않다. '게으르다'는 '게을리 하다' 정도로만 활용 가능한데 양상이 좀 다른 듯.
그래서 '달리', '빨리' 같은 단어는 좀 예외적인 케이스로 간주되어서 사전에 별도로 등재돼 있기도 하다.
올림픽 표어를 '보다 빠르게'라고 번역할 때와, '더 빨리'라고 번역할 때는 어감이 서로 확 달라지는 것 같다. "더 빨리, 더 높게, 더 힘차게" 중에서 faster만 '-게'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 주목하라.

'다르다'가 활용된 '다른'은 말 그대로 활용된 형용사(different)도 되지만, another를 의미하는 관형사 '다른'도 된다. 같은 형태의 단어가 두 의미를 모두 지닌다는 게 꽤 흥미롭다. '와/과'가 and뿐만 아니라 with의 뜻도 갖는 것처럼.
사전에서 '다른'을 찾아 보면 관형사의 뜻만 실려 있다. 형용사 하나만 있는 영어와는 달리, 국어의 체언 수식언에서 형용사와 관형사가 구분이 필요한 이유 중 하나가 이 때문이다. 국어에서 형용사는 수식언 중에서 용언에서 유래된 것만을 일컬으니까 말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새 이름으로'에서 '새'는 관형사이지만, '새로운'은 형용사이다.

12.
옛날에는 인간 학문의 모든 분야가 그런 것처럼 언어 쪽도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학풍이 꼴보수였다.
대표적인 예가 <걸리버 여행기>를 지은 조너선 스위프트인데.. 사회 풍자적인 선구자라는 점에서는 중국의 루 쉰과도 이미지가 비슷해 보인다.

루 쉰은 한자를 없애지 않으면 중국 인민은 망한다고까지 한자를 디스한 걸로 유명한데, 스위프트는 사전을 만들어서 사랑스러운 자기 모국어 영어의 스냅샷을 기록으로 남기고, 앞으로 세속화되거나(?) 더럽혀지지 않게 영원토록 불변의 언어로 남길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couldn't 같은 구어체의 어휘가 버젓이 인쇄되어 나오는 것에도 왕창 분노했다고... 이런 사람이 오늘날의 일명 인터넷 축약어, 한글 파괴 이런 걸 보면 노발대발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에휴.." 이랬을 것 같다.

오늘날은 분위기가 이와는 완전 반대로 갔으니 참 아이러니다. "그 어떤 것도 절대적인 건 존재하지 않는다, 사전은 말뭉치 데이터를 바탕으로 당대의 언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반영만 하면 된다."이다. '너무'도 사람들이 다 긍정적으로 쓰면 뜻풀이를 바꿀 수 있다. 동성애자들도 결혼을 하니까 결혼의 정의도 굳이 남자와 여자가 하는 건 아니라고 업데이트 할 필요가 있다는 식이니까.

지금 학풍이 0이고 스위프트가 1이라면 난 그래도 여전히 0.7~0.8 정도의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다. 내가 모든 걸 감히 판단할 만한 실력은 없지만, 난 그래도 언어에도 타락이라는 게 있긴 하다고 개인적으로 믿는다. 물론, 그 타락이라는 게 겨우 맞춤법 안 지키고 상스러운 비속어 남발 같은 단편적인 현상만을 의미하는 건 아님.
그냥 쓰기 나름, 정하기 나름인 용례가 바뀌는 것은 상관없지만, '다르다/틀리다'처럼 분명하게 구분이 되고 있던 개념의 구분이 문란해지는 것만은 막았으면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6/02/01 08:35 2016/02/01 08:35
, , ,
Response
No Trackback , 7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188

우리말 관련 생각들

또 오랜만에 우리말 관련 뻘생각들을 투척한다.

1.
여자의 멸칭 '년'은 한자어가 전혀 아닌데, 남녀를 싸잡아 부르는 멸칭은 왜 '년놈'이 아니고 '연놈'이라고 두음법칙이 과잉 적용돼 있는지 나로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ㄴ 음가를 빼서 ㅇ으로 바꿔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2.
'박다'와 '받다'에는 모두 다의어 명목으로 '충돌하다/부딪치다'라는 뜻이 있다. 그런데 둘의 차이가 뭘까? 표준 국어 대사전의 풀이는 다음과 같다.

박다 01
「9」머리 따위를 부딪치다.
받다 02
「1」머리나 뿔 따위로 세차게 부딪치다.

공식 석상에서 더 정확한 단어로 인정되는 것은 '받다'인 듯하다. '들이받다'가 있으니까.
그런데 <블랙박스로 본 세상> 같은 프로를 보면, 사람들은 전부 '박았다'라고 말을 하는데 자막은 온통 '받았다'라고 보정을 해서 나가는 게 본인이 보기엔 굉장히 어색했다.

차와 차가 부딪친 것은 '들이받다'뿐만이 아니라 '꼬라박다' 같은 말도 쓴다.
사전의 뜻도 비슷해 보이는데, 현실을 반영하여 '박다'와 '받다'에 대한 더 정확한 관계가 정립되어야 하지 않나 싶다. 구어 말뭉치까지 분석을 해야 하려나?

3.
현재 사전에 '뱃속'이라는 단어는 오로지 다음과 같은 비유적인 의미만 풀이되어 있다.

‘마음01’(사람이 본래부터 지닌 성격이나 품성.)을 속되게 이르는 말.

즉, 뱃속에 있는 것이 마음의 상징인 심장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뱃속은 마음과는 다른 뜻으로 훨씬 더 많이 쓰이며 이는 말뭉치를 분석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뱃속의 아기", "뱃속에 들어간 음식" 등, 소화기관이나 자궁 용례가 더 많다. 배의 속에는 심장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국어사전이 반영해야 하지 않나 싶다.

4.
언어학에는 동사가 기술하는 동사의 방향성을 나타내는 '태'(voice)라는 개념이 있다.
그런데 우리말에서 한자어에 접사가 붙어 동사가 되는 단어들을 보면, 태는 그 단어 자체의 의미에 의해 결정될 때가 있는가 하면, 그 접사에 의해 결정될 때도 있다. 이게 굉장히 뒤죽박죽이며, 국어사전은 이런 걸 딱히 명확하게 결정하지 않는 편이어서 혼란이 더욱 가중된다.

  • 시키다: 남을 하게 함
  • 하다: 자기가 뭘 함(자동사), 남을 뭘 하게 함(타동사?)
  • 되다: 자기가 뭘 당함
  • 되어지다: (비공식. 마치 이중과거만큼이나 이중피동?)

단어마다 위의 태 매핑이 정확하게 어떻게 되는 걸까?
예를 들어 지금 킹 제임스 흠정역 성경에는 창세기부터 계시록을 통틀어 '소멸하다'라는 단어가 없다. '소멸되다'와 '소멸시키다'만 있다. 남을 없애는 건 '시키다'이고, 자기가 없어지는 건 '되다'로만 옮겨졌다.
'소멸하다'라고만 써 놓고 consuming fire을 '소멸하는 불'이라고 써 놓으면, 이게 꺼져 가는 불인지 아니면 다른 걸 태워 없애는 불인지 언뜻 봐서 분간이 안 된다는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인해 '오염'이나 '마취' 같은 단어도 동사가 될 때엔 '시키다' 아니면 '되다'만 붙지, '하다'는 거의 안 붙는 실정이다. 이런 현상에 대한 국어사전의 공식적인 규명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5.
(1) And의 처리 문제랑, (2) 정관사 the의 표현 문제, (3) 과거 시제를 "-니라"라고 뭉뚱그리는 건
우리말 성경의 번역에서 정말 영원한 아킬레스건으로 남지 싶다.
뭐 특정 역본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어의 구조적인 한계에 가깝기 때문에.
그리고 And it came to pass도 이거 번역하는 방법이 없을까?

6.
'장'은 page(페이지 수 단위)랑 chapter가 굉장히 헷갈리고,
'절'은 verse랑 clause(주어 술어가 갖춰진 안긴문장 단위)가 굉장히 헷갈릴 때가 있다.
우리말 순화를 연구하려면 괜히 잘만 쓰이고 있는 다른 외래어들을 다듬을 게 아니라 이런 것들부터나 좀 확실하게 구분하는 우리말을 만들어서 국립국어원 차원에서 밀어 붙였으면 좋겠다.

7.
"어머니께서 내게 과자를 만들어 주셨다"라는 문장을 길게 영작하면 My mother made cookies for me. 정도가 된다.
그런데 잘 알다시피 요건 그냥 My mother made me cookies. 라고 해도 된다. 중학교 영문법상으로는 전자와 후자는 각각 3형식과 4형식이다.

하지만, 맨 첫 예문에서 목적어가 me 정도가 아니라 엄청나게 길면.. 예를 들어 children who have never eaten anything since yesterday 정도 되면.. 영어는 길고 복잡한 덩어리는 뒤로 빼는 걸 좋아하는 언어이다. 오죽했으면 가주어 it까지 있을 정도이고.. 그러니 그때는 cookies for children who ... 이렇게 가는 게 훨씬 나은 작문이다. 또한 영어는 3음절 이상 정도 되는 긴 형용사는 비교/최상급도 -er, -est를 안 붙이고 more / most로.. 이것 자체도 형용사인데 부사로 임시로 품사통용이 된다.

이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길이에 대한 선호 편차가 한국어에 존재하는 대표적인 예는 아마 긴 부정과 짧은 부정이지 싶다. '안'이 자연스럽게 붙을 수 있는 용언과, 그렇지 않고 '-지 않다'로 써 줘야 하는 용언의 차이를 규명하라고 하면 한국어 토박이에게도 쉽지 않을 것이다.

8.
우리말에서 품사 통용 때문에 헷갈리는 문법 요소 4천왕은 조사, 어미, 접미사, 의존명사이다. 이를 다음과 같이 표로 정리해 보았다.

  어미 (E*) 접미사 (X*) 의존명사 (NNB)
조사 (J*) 완전히 다름.
AND: 와/과/랑(조사) vs 고/며 (어미)
너희들(접미사) 다 안녕들(조사) 하신가? 너뿐(조사)만이 아니라 나도 그렇게 했을 뿐(의존명사)이었다.
어미   그림(명사 파생 접미사)을 잘 그림(명사형 전성어미). 이곳에서 산 지(의존명사)는 오래 됐지만 계속 여기서 살지(어미)는 모르겠다.
접미사     김 씨(의존명사)는 김씨(명사 파생 접미사) 집안의 자랑이다.

위의 표는 헷갈리기 쉬운 품사 위주로 둘씩만 비교했지만, 실제로는 한 단어가 셋 이상의 품사가 통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지'는 위의 표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명사 파생 접미사도 되며, '들'에도 의존명사 의미가 있다.

9.
그리고.. 이건 아마 예전에도 했던 말일 텐데,
개인적으로 '다르다'와 '틀리다'는 반드시 구분해서 쓰도록 하고 국어사전에서도 different를 '틀리다'라고 쓴 것은 "'다르다'의 잘못"이라고 선을 그어 줬으면 좋겠다.
그 반면에 '서, 세, 석' 같은 단순 발음 편의를 위한 불필요하고 쓸데없는 구분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어서 "'세'로 통일을 원칙으로 하되 '석 장'도 허용" 같은 식으로 나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맞다/맞는다'가 개판인 것, 그리고 '와/과'가 접속조사(and)뿐만 아니라 부사격조사(with)의 뜻도 있어서 굉장히 불편한 것 역시 이미 예전 글에 언급돼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5/06/05 08:42 2015/06/05 08:42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101

국어, 언어학 잡설

1. '여' 불규칙

ㄱ부터 ㅎ까지
'가다(go), 나다(bring forth), 사다(buy), 자다(sleep), 차다(kick), 타다(get on), 파다(dig)'
라는 용어들을 생각해 보면, 이들은 과거형은
'갔다, 났다, 샀다, 잤다, 찼다, 탔다, 팠다'
라는 아주 규칙적인 패턴으로 활용된다.

그러나 잘 알다시피 '하다'(do)만은..
'하였다' 아니면 '했다'라고 굉장히 이상하게 활용된다. 중등학교 국어 시간엔 이를 '여' 불규칙이라고 배운다.
그런데 어미 '여'가 쓸데없이 붙는 것도 이상한데, 그게 축약되어서 '했다'가 되는 건 또 뭐냐..? '하다' 말고 그 어떤 용언도 활용 시에 ㅏ와 ㅐ가 그런 식으로 연계하여 변하는 경우는 없다.

'가다'의 경우, 다른 'Xㅏ다' 용언과는 달리, 명령형에서 '가거라'라고 생뚱맞은 '거'가 불규칙으로 첨가되기는 한다. 그러나 이 '거'는 명령형에서만 첨가되지 '해서/하여서, 했다/하였다'의 '여'에 비하면 등장이 훨씬 제한적이다.

'갔다', '팠다'처럼 '핬다'라는 단어는 한국어의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었던 걸까? 원래 있긴 했는데 혹시 전설모음 역행동화가 일어나서 '했다'라고 바뀌기라도 한 건 아닐까? 난 잘 모르겠다.

본인은 '바라다'가 자꾸 '바랬다', '바랬는데', '바램'처럼 활용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의 현상이 아닌가 하고 거의 10년도 넘게 더 전부터 생각해 왔다. '하다'는 '함'이 '햄'으로 바뀌는 건 아니니 둘이 완전히 같은 양상은 아닌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도 자음 하나만 다른 '자라다'는 활용 과정에서 '라'가 '래'로 바뀌는 현상이 결코 전혀 없으니 참으로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자랐다', '자랐는데', '자람' 등.. =_= 신기하다.

2. 지난 학기에 들은 변형 생성 문법 수업의 편린

(1) 아무래도 교재가 영어 원서이고 영어 통사론을 다루는 비중이 적지 않다 보니.. 선생님이 영어 고어 문법 얘기도 종종 하셨다. 그래서 내 머리엔 KJV 영어가 떠오른 적이 적지 않았다.

옛날에는 be + 동사PP가 수동태뿐만 아니라 마치 지금의 have + 동사PP처럼 완료 시제를 나타내기도 했다고 한다. KJV에 "is come"이 왜 이리도 많이 등장하는지 이제 알 것 같다.

(2) have가 의문문으로 등장할 때 Do you have 대신 곧바로 Have가 나오는 거..
난 개인적으로 have ye any meat? (요 21:5)가 곧장 떠오르던데 오늘날에도 이런 패턴이 영국의 일부 방언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마치 C언어로 치면, C이긴 한데 오늘날 안 쓰는 오리지널 K&R 스타일 C 같은 느낌이다. #include 과감히 생략하고 main 함수에 int나 return 다 생략하고 바로 printf("hello, world!");를 하는... 좋게 말하면 간결하고 나쁘게 말하면 불친절한 스타일 되겠다.

(3) 문법을 설명하는 데도 문장 구조 binary tree를 그려서 노드를 이리 저리 옮기는 게 많다. 마치 빨강 검정 나무의 동작을 다루는 것 같았다. 물론 둘은 개념과 성격은 서로 완전히 다르지만 말이다.
또한, 전산학 자료구조 시간에는 tree 노드를 표현할 때 sibling, child 등 다 중성 어휘를 쓰지만, 언어학에서는 sister, daughter 같은 여성형 어휘를 쓰더라.

프로그래밍 언어와 자연어를 설명하는 이론을 모두 마스터하고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4/07/28 08:33 2014/07/28 08:33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989

언어의 기원에 대한 생각

“처음에 말씀이 계시니라. ...” (요 1:1)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왜 하필 자신을 '말씀'이라고 성경에서 계시하셨을까?

인간의 언어라는 건 자연과학의 영역인 우주, 지구, 생명체 세포 같은 것 만만찮게 참 신기한 물건이 아닐 수 없다.
문자는 수천 년 전에 인간이 발명했지만 문자의 기록 대상인 그 언어 자체는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 생명 자체의 기원만큼이나 정말 “아무도 모른다.”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 창조 아니면 진화밖에 답이 없듯이,
언어의 기원에 대해서도 신수설 아니면 인위적인 발명설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더구나 언어는 화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방사성 원소 연대 측정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니.. 진짜로 뭐 과학적인 방법론을 동원하여 연구할 여지 자체가 없다.

게다가 언어의 우열이나 기원을 함부로 가리는 건 정치적으로도 꽤 민감한 영역이기도 하다.
이 분야에 검증 불가능한 추측과 낭설들이 하도 많이 떠돌다 보니, 언어학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익히 잘 알듯, 먼 옛날 1866년에 파리 언어학회가 아예 공개적으로 이 분야는 불가지론의 영역이라고 못을 박아 버렸다.
언어의 기원에 대한 연구 같은 건 금지하고, 이 분야의 논문은 무조건 거절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난 무생물에서 생물이 우연히 생겨날 수 없고 원숭이가 아무리 긴 시간이 흘러도 사람으로 진화할 수 없다고 믿는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동물의 울음과 사람의 말은 넘사벽 급으로 서로 다르다.

겨우 몸짓, 손짓, 맘마, 빠빠, 쭈쭈, 끙끙에서...
촘스키 계층으로도 다 설명을 못 하는 그런 재귀적이고 복잡한 언어 문법이 점진적으로 생성되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상한 날랄랄따따따 방언이 질서를 갖춘 정상적인 인간의 언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ㅎㅎ
이건 내가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뜻이지, 언어의 기원과 관련해서 나와 견해가 다른 사람을 디스한다거나 논쟁하겠다는 의도는 아니다.

NOTES
1. 한국어는 언어 계통상 고립어로 간주되고 있다. 우랄 알타이 어족 떡밥은 약발이 다한 지 오래이고, 주변에 유사한 언어를 도무지 찾을 수 없는 굉장히 특이한 언어라는 뜻이다.
일본어와 더불어 고립어치고는 그래도 사용자가 많은 축에 드는 언어이고, 또 영어권 사람이 배우기 몹시 어려운 언어로 분류되어 있다.

2. 우리말에는 '말'의 높임말로 '말씀'이라는 아주 좋은 말이 있어서 성경 용어로도 즐겨 쓰인다.
다만, “교장 선생님 말씀이 계시겠습니다.”는 잘 알다시피 높임법이 어긋난 문장이다. 말씀이 '계실' 수 있는 문맥은 요한복음 1:1과 요한일서 1:1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12/24 19:31 2013/12/24 19:31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912

몇몇 언어 현상 관찰 -- 上

철도, 컴퓨터, 교통 덕질에 밀려서 너무 오랫동안 먼지가 쌓여 있던 언어 카테고리에 오랜만에 글 나가신다.

1. 이다

영어에서 be 동사는 존재를 나타내는 아주 독특하고 중요한 단어이다.
한국어에는 be에 부분적으로 대응하는 개념으로 '이다'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역시 문법적 역할을 분류하기가 꽤 까다로운 단어이다. '다'로 끝나니 용언 같아 보이긴 하나 그러기에는 존재감이 너무 없고.

요즘은 '이다'를 '서술격 조사'로 분류하는 게 대세여서 학교 문법을 포함해 어지간한 사전에도 그렇게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조사가 아닌 단순한 종결어미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be는 한국어로 치면 '이다'와 '있다' 사이를 함축적으로 감싸는 단어라 볼 수 있다. (이것도 영어로는 have를 쓸 걸 한국어로는 그냥 '있다'로 번역하는 경우가 있어서 더욱 미묘한 구석이 있지만..) 게다가 I am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타이틀과도 관계가 있어서 성경 번역에 민감성을 한층 더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이런 것 말이다.

Before Abraham was, I am. (요 8:58;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나는 있느니라)
I AM THAT I AM. (출 3:14; 나는 곧 나니라;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등~)
I AM hath sent me unto you. (엥, I AM 자체가 명사로!)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햄릿>에도 아래와 같은 너무나 유명한 문장이 있다. 한국어는 영어 표현의 함축성을 그대로 표현할 수가 없어서 한 단계 의역되었음을 알 수 있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a question.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물론 영어권 사람들에게 와 닿는 의미는 한국어 번역과 동일하다. 그들에게 본디 문장에 대해 paraphrase를 시켜 봐도 to live, or to die가 들어간다.

이뿐만이 아니라 영어의 be 동사는 한국어의 '이다'와 크게 다른 점이 하나 발견되는데, 그것은 바로 시제이다.

공 병우 박사는 세벌식 한글 타자기의 [발명가이다].
내가 [어릴 때는/어렸을 때]는 인터넷도 없었고 스마트폰 같은 것도 없었다.
세종대왕은 조선의 [성군이다].


이런 문장을 영작하게 되면 모두 현재 시제가 아니라 반드시 과거 시제인 was가 붙는다. 공 박사건 세종대왕이건 2012년 현재는 죽고 없는 사람이라는 관점에서 과거 시제를 쓰는가 보다.

그러나 한국어는 지금도 그분들에 대한 역사적 행적이 변함없는 사실이라는 점을 중점에 두고 '이었다'보다는 '이다'를 선호한다.
“세종대왕은 조선의 [성군이었다]”라고 쓰면 꼭 “명왕성은 태양계의 아홉째 행성이었다”처럼 역사가 번복되었거나, 아니면 세종대왕이 말기에는 폭군으로 흑화했다는 여운을 강하게 남기게 된다.

혹시 내 언어 직관과 다른 생각을 갖고 계신 분 있으면 의견 기다리겠다.

2. '-이/가'와 '-은/는'의 차이는 무엇일까?

간단한 것 같아도 둘은 개념적으로 서로 꽤 다른 단어이다.

전자는 격(格)을 갖는 조사로, 주격 조사와 보격 조사의 역할을 겸한다. 다시 말해 선행사가 주어임을 나타내거나 보어임을 나타낸다는 뜻이다.
그에 반해 후자는 격이 없는 보조사 또는 특수 조사라고 불리며, 문맥 독립이 아니라 문맥 의존적인 문법을 구성한다. 보조사는 대체로 주격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으나, 문맥에 따라 목적격도 되고, 사실은 보격도 안 되라는 법이 없다. '-은/는' 말고도 보조사로는 '-만', '-도' 같은 것 게 더 있다.

보조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문법적으로 굉장히 wild하고 어려운 개념이다.
격조사는 국어 통사론의 맨 첫 단원에서 문장의 필수 요소로 곧장 다뤄지는 반면, 보조사는 통사론이 다 끝나고 화용론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다뤄진다. 그 정도로 서로 차원이 다르다.

마치 스타크래프트에서 스포닝 풀을 짓고 나면 저글링의 발업(격조사)은 해처리 수준에서 곧장 가능한 반면, 아드레날린업(보조사)은 무려 하이브까지 올린 뒤에야 가능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랄까. 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스타크래프트 세 종족을 통틀어서 한 유닛의 업그레이드 사이에 이 정도로 기술 격차가 존재하는 건 저것밖에 없다.

3. '없다'와 '아니다'

'없다'와 '아니다'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용법과 의미를 지닌 개념이다. 이게 구분이 아예 없으면 '없는 것보다는 낫다'와 '도대체 나은 구석이 전혀 없다'를 언어적으로 분간할 수가 없게 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영어에서 no는 감탄사로도 쓰임과 동시에 두 의미를 문맥에 따라 적당히 지니며, none이나 nothing 같은 파생어에도 그 형태가 살아 있다. 그 반면, not은 '아니다'의 의미만이 더 부각되는 것 같다.

No trespassing 무단 침입 금지
No way 길 없음 / 안 돼(not at all과 비슷)

... There is [none righteous, no, not one]. (롬 3:10)
의로운 자는 [없다, 정말 하나도 없다.]

And Enoch walked with God: and he [was not]; for God took him. (창 5:24)
에녹은 하나님과 걷다가 [사라졌다/없어졌다.] ...

For my thoughts [are not your thoughts, neither are your ways my ways], saith the Lord. (사 55:8)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이 아니며/생각과 같지 않으며/생각과 다르며] ...


이런 부정문은 한국어와 영어가 서로 일대일 대응하지 않고 형태가 크게 달라지는 대표적인 문법이라 볼 수 있겠다.
한국어는 void처럼 공허함을 뜻하는 無에 해당하는 단어가 토박이말에 없는 반면, '없다'라는 용언이 따로 존재하는 건 때에 따라서는 굉장히 편리하다. 물론, 영어의 no처럼 '없음'이라는 의미를 넣어 주는 관형사가 없기 때문에, 한국어에서는 없다는 의미는 주어가 아닌 서술어에서 반드시 전달되지 않으면 안 되기도 하고 말이다.

잘 알다시피 킹 제임스 이외의 변개된 성경에서는 신약 성경에서 13개 구절이 삭제되어 있다. 한국어 성경은 행 8:37이나 막 9:44, 46 같은 유명한 구절을 펴면 '없음'이라는 간결한 표현이 있지만, 영어 성경은 그런 게 없다.  굳이 '없음'을 표현하려면 그 문맥에서 none, gone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고 missing, omitted이라고 '누락됨'이라는 단어로 돌려서 표현을 해야 할 것이다.

한국어가 부정문도 서술어 형태를 좋아하는 것은, '알다'의 반대말로 '모르다'가 동사로 존재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내가 알기로 '-에 무지한, 무식한'이라는 형용사 말고, '모르다'가 동사로 딱 존재하는 언어는 의외로 흔치 않다.

'전혀'라는 부사와 잘 어울린다는 특성상, '모르다'는 '아니다'와 '없다'와 더불어 부정의 의미가 담긴 대표적인 단어이다. M의 OST인 <나는 널 몰라>가 생각나는군.. 한국어를 가르칠 때 “모른다”와 “모르겠다”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도 꽤 쉽지 않을 것 같다. 참고로 영어로는 똑같이 둘 다 그냥 I don't know로 번역 가능하다.

4. 우편향

언어가 그 자체적으로 왼쪽보다 오른쪽을 더 좋아하는 현상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난 모르겠다.
한국어의 경우 오른쪽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옳은 쪽'에서  유래된 말인 반면, 왼쪽은 '외다'라는 '뭔가 정상 궤도에서 이탈하고 뒤틀림' 같은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오른쪽과는 달리, 무슨 뜻이더라도 좋은 어원은 절대 아니다.

이말년이 이런 성향을 잘 간파하여 '외길'이라는 브랜드를 좋아하는 것이 틀림없다. ㅋㅋㅋㅋ. 물론 최 현배 박사의 호 '외솔'은 속세를 초월한 빳빳한 지조, 강직함, 대쪽같음을 나타내려고 '외'라는 형태소를 긍정적으로 해석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왼쪽과 오른쪽의 관계는 신기하게도 영어도 마찬가지여서, 오른쪽이 아예 right와 동음이의어도 아닌 다의어 관계이다! 글쎄, 반대로 left는 그렇게 안 좋은 심상이 담긴 걸까? 혹시 잉여? -_-
내가 제대로 아는 언어가 저 두 개밖에 없어서 다른 언어는 어떤지 궁금하다.

성경을 보면 물론 우리더러 좌로나 우로나 편파적으로 치우치지 말라는 권고(신 5:32, 잠 4:27 등)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은 우편향이기도 하다는 것이 성경을 통해 분명히 발견된다.
여러 근거들이 있지만 한 가지 예만 들면, 하나님의 권능과 구원을 찬양하는 문맥에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손은 열이면 열 모두 무조건 오른손이다. 시편에 '주의 오른손'은 수도 없이 등장하지만 왼손은 단 한 번도 안 나온다.

그렇다고 해서 왼손잡이가 무슨 동성애에 필적하는 나쁘고 가증스럽고 죄악된 기질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런 특수한 경우를 빼면, 일반적으로는 사람이 오른손으로 숟가락을 들고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며 왼쪽과 오른쪽에 대해 그런 편견을 갖고 사는 게 아무 근거 없는 인습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자 한다.

또한 사회 이념에서 좌익과 우익이라는 구분이 역사적으로는 무슨 프랑스 의회에서 좀 진보 성향이 왼쪽, 보수 성향이 오른쪽에 앉은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하지만, 이 역시 아무 근거 없이 정립된 개념은 아니라고 본인은 생각한다. 비록, '뉴 라이트'인가 뭔가 하는 진영에서 '오른쪽'의 의미를 모독하고 있는 걸 생각하면 좀 한숨이 나오긴 하다만...

* 다음 下에서 다른 소재로 이야기는 계속된다. 기대하시라.

Posted by 사무엘

2012/11/05 08:29 2012/11/05 08:29
, ,
Response
No Trackback , 4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752


블로그 이미지

그런즉 이제 애호박, 단호박, 늙은호박 이 셋은 항상 있으나, 그 중에 제일은 늙은호박이니라.

- 사무엘

Archives

Authors

  1. 사무엘

Calendar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Site Stats

Total hits:
2955533
Today:
2442
Yesterday:
10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