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도우 3.x 시절에 MS에 한글 글꼴을 공급한 업체는 왕년의 유명한 국내 벤처 기업이던 큐닉스 컴퓨터였습니다. 한때 프린터까지 만들던 곳인데, 지금은 망하고 글꼴 개발 부분만 모리스 디자인으로 상호를 바꿔 명맥을 유지 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개성체를 비롯해 동글동글한 이솝체를 만든 곳이죠.
이 글꼴들은 같은 명조, 고딕, 궁서라 할지라도 당시 아래아한글 2.x 전문용이 번들로 제공하던 한양 글꼴 equivalent에 비해 미려함이 덜하고 단조로워 보였습니다. 하지만 외국산의 품질 좋은 래스터라이저와 힌팅 정보에 힘입어, 작은 크기에서의 품질 하나는 아래아한글이 적수가 될 수 없을 만큼 정말 좋았지요.
그때는 유니코드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고 한글 글꼴은 2350자를 일일이 다 그려 넣는 것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윈도우 95에 와서는 한글 글꼴 체계가 크게 향상됩니다. 그리고 이때 첫 라이선스 한 한양 글꼴은 그 최신 기술이 모두 반영된 작품이었습니다. 어떤 게 있는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첫째, TTC. 굴림과 돋움, 바탕과 궁서가 한 글꼴 컬렉션으로 병합됨으로써 둘이서 한 한자 글립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으며, 나머지는 다 같은데 영문만 불변폭 글꼴인 ‘-체’ 글꼴 변종도 기억 장소의 낭비 없이 손쉽게 구현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런 기술은 작은 고유 문자와 한자를 공용하는 일본에서도 더욱 필요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굴림과 궁서도 별도의 한자 글립이 있으면 더 좋을 것 같네요. 한국에서는 지금도 명조 고딕 외의 한자 글꼴은 가정용 PC에서 좀체 보기 힘듭니다.)
둘째, 비트맵 자형 내장. 알파벳 글꼴이야 아예 비트맵밖에 없는 FON 파일만 쓰든가, 아니면 트루타입은 정교한 수제 힌팅만으로 작은 크기에서도 아주 보기 좋은 자형을 만들어 냈지만 한글/한자 같은 문자는 아예 비트맵을 만들어 넣어 주는 게 당장 더 유리합니다. 윈도우 3.1 시절엔 이런 개념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바탕체 12포인트는 BT16.TBM이라고 TTF와는 완전히 별개의 파일에 글립이 저장되어 있으며 운영체제가 임의로 불러들이고 출력해 주더군요. 12포인트 말고도 15포인트용 BT20.TBM 파일도 있습니다.
TTF가 자체적으로 다양한 크기의 비트맵을 내장하게 된 것이 윈도우 95부터입니다. 덕분에 굴림, 바탕, 돋움이 모두 자체적으로 비트맵을 갖게 되고 결과적으로 윈도우 3.1보다 글꼴의 품질은 크게 향상되었죠.
끝으로 유니코드 지원입니다. 확장완성형 때문에 큰 물의를 빚긴 했으나 어쨌든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윈도우에서 운영체제 차원에서 11172자 한글 표현이 가능해지고 한글을 조합 글립으로 표현할 수도 있게 된 것이 95에 와서부터입니다.
윈도우 9x를 직접 설치해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얘네 계열들은 설치 GUI가 정확하게 윈도우 3.1 커널 기반입니다. 16비트 코드와 32비트 코드가 짬뽕이어서 그런지 한글 글꼴도 두 체계가 완전히 짬뽕인 것을 볼 수 있죠. 첨부하는 그림을 보시면 설치 마법사 대화상자 안의 모든 글꼴들은 9x에서 볼 수 있는 ‘한양 시스템’ 굴림이지만, 그 바깥에 있는 약간 조악한 느낌이 드는 글씨들은 전부 윈도우 3.1 ‘큐닉스 굴림’ 10포인트입니다. 둘의 품질의 차이가 한눈에 보이시죠?
컴퓨터의 성능이 향상되고 운영체제가 발달하면서 문자 입출력 기술도 알게 모르게 더욱 정교해지고 범용성이 향상되고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똑같은 기능을 하면서 덩치만 아무 이유 없이 커지는 건 아니거든요.
예전에는 동아시아 버전 아랍권 버전 이렇게 따로 적용되던 기술이 이제는 전세계 어느 기계 내지 소프트웨어에나 동일하게 들어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