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의 높임법

높임법은 한국어의 주된 특징인 한편으로 쓰임이 까다롭고 외국인에게 배우기 몹시 어려우며, 심지어 자국민끼리도 그 용법이 차츰 문란해지고 있는 존재이다.
높임법의 적용 여부와 그 수준을 결정하는 변수는 크게 다음과 같다.

나이: 한국 사회는 나이가 깡패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회생활에서 일단 한 살이라도 차이가 나면 존댓말과 반말이 갈린다.
계급이나 어떤 조직 내에서의 짬: 이것도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다만 나이와 계급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친밀도: 존댓말을 쓴다는 것은 그 사람을 높인다는 의도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당신과는 가까워지지 않고 그냥 사무적으로만 정중하게 대하겠다는 뉘앙스도 있다. 사회에서 만나는 선후배와는 달리, 친형제 사이엔 나이 차이가 나더라도 반말로 일관하는 것 역시, 이 친밀도와 관련이 있다 하겠다.

그런데 이 세 변수를 모두 고려하여 가장 적절한 solution을 찾는 게 상당히 어렵다!
닥치고 계급이 짱인 군대에서도 나이와 계급이 엇갈려서 생기는 웃지 못할 사례가 있다.
갓 임관한 소위가, 아버지뻘 나이인 행보관에게 “자네가 행보관이구만.” 운운하며 반말을 찍찍 쳐 갈겼다는 루머. ㄲㄲㄲㄲㄲㄲ
이건 장교라 할지라도 꼴통으로 찍히게 만들고 자기 남은 군 생활에 애로사항을 꽃피우는 무모한 짓이다.

이런 높임법과 관련하여 본인이 떠올리는 언어 현상으로는 다음과 같은 게 있다.

1. “교장 선생님 말씀이 계시겠습니다”라는 멘트는 무려 중학교 국어 수업 시절부터 어법에 어긋난 표현이라고 귀가 따갑도록 듣는다. 그런데 요즘도 그런 잘못된 표현이 쓰이고 있나? 본인이 단언하건대 한국어에서 말씀이 ‘계실 수 있는’ 문맥은 요한복음 1:1 정도밖에 없다. ㅋㅋ

2. 그런데 요즘은 1번 정도는 약과. 각종 서비스 업종에서 직원들 교육을 대놓고 잘못 시키는 바람에, 더욱 듣기 민망한 잘못된 높임법이 범람하는 중이다.
“고객님, 지금 상담 요청 전화가 너무 많으시네요.”
“음악을 좋아한다는 건 아주 좋은 취미이십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으면, 제품이 고객보다 더 높다. 도대체 지금 누굴 높이고 있는 거야? ㄲㄲㄲㄲ ‘시’가 주체를 높이는 게 아니라 청자를 높이는 효과를 낼 거라고 뭔가 착각을 하는 것 같다.

저 불편한 멘트를 견디다 못해 본인의 학교 국문과의 모 학생은, 투철한 직업 정신을 발휘하여 고객 불만 사항에다가 잘못된 높임법을 신고까지 했다. ㄷㄷㄷ;; 그런데, 거기서 연락이 뭐라고 왔냐 하면, “고객님, 저희 직원이 실례를 범하셨다는 불만 사항이 잘 접수되셨습니다.” ㅠ.ㅠ
이 정도면 날 두 번 능멸한 거라고 그 친구는 쓴웃음을 지으며 회상하더라. ㅋㅋㅋㅋㅋ

3. 한국어 맞춤법의 복병은 단연 압존법이다. 할아버지에게 아버지에 대해서 얘기를 할 때는 할아버지가 아버지보다 더 높으므로 아버지를 반말로 표현하는 게 맞다.
그런데 요즘은 이게 또 문란해져서... 회사에서 대리가 “부장님, 김 과장은 외근 나갔습니다” 이러면 상사의 언어 감각에 따라서는 “넌 김 과장하고 친구 사이냐?” 이런 갈굼이 되돌아오기도 한다나? 본인은 병특 시절에 압존법을 적용 안 했다가 혼난 적은 있다(청자보다 낮은 직급인 사람을 언급하면서 높임법을 써서).

KBS 한국어 능력 시험 공부하면서도, 압존법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에 대해서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이거 정말 써도 문제이고 안 써도 문제이고..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추라는 건지 알 수 없는 난감한 경우인 것 같다.

4. 그나저나 본인은 아무런 높임도, 낮춤도 없이 간단하게 2인칭을 지칭할 수 있는 you가 한국어에 없는 것에 굉장한 불편을 느낀다. 그래서 특히 소프트웨어의 UI를 보면 you는 사용자, 회원님, 고객님으로 어정쩡하게 우회 번역되고, 바깥 사회에서는 선생님이나 사장님으로, 심지어 채팅 같은 곳에서는 그냥 ‘님’으로 바뀐다.

한자가 일본어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것만큼이나 본인은 저런 난잡한 용법도 한국어의 경쟁력을 크게 떨어뜨리고 기계화와 정보화를 어렵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냥 간단하게 ‘당신’이라고 쓰자고 의식 전환 운동이라도 벌이면 안 될까? 웬 3인칭 ‘당신’은 잘 쓰지도 않는데 그냥 없애 버리고 말이다!
하나님까지 대놓고 you라고 일컫는 것까지는 무리일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런 거야말로 번역투랍시고 대안도 없이 배척만 하지 말고 한국어가 받아들여야 할 면모가 아닐까 한다.

C++에서 전처리기, 다중 상속 같은 거 뚝뚝 떼어 내고, 가비지 컬렉터 넣고, CFG 문법 체계로 개편하여 더 세련된 D나 C# 같은 언어를 만들듯, 한국어도 그렇게 좀 개조를 하고 싶다.
혼잡한 언어를 숙청하려면 강력한 독재 권력이 필요함을 또 다시 느낀다. ㅋㅋㅋㅋ

Posted by 사무엘

2010/11/20 09:19 2010/11/20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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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기윤 2010/11/20 11:08 # M/D Reply Permalink

    4. 를 읽다가 생각난건데, 폴라리스 랩소디라는 소설 중에 등장하는 "데스필드" 는 자신 이외의 누군가를 지칭할때 무조건 "당신" 이라 합니다. 다시 말해서, 1인칭 외의 2인칭이나 3인칭은 무조건 "당신" 으로 통일. 신기한건 주의해서 읽으면 여기 쓰인 "당신" 이 몇인칭의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었죠.. (다만 한번에 알아듣기는 역시..)

    http://www.angelhalowiki.com/r1/wiki.php/%EB%8D%B0%EC%8A%A4%ED%95%84%EB%93%9C

    수정) 폴라리스 랩소디 맞습니다. 관련 페이지 링크

  2. 푸른·가람 2010/11/20 12:18 # M/D Reply Permalink

    그래서 아는 분은 부하 직원들을 부를 때 '그대'라고 부르시더군요.
    저 경우에 당신이 쓰이기는 힘들 것 같은게, 당신이 요즘 쓰이는 제일 대표적인 경우가 서로 멱살잡을때라서(.. )

  3. 사무엘 2010/11/20 19:56 # M/D Reply Permalink

    김기윤: 2인칭과 3인칭 대명사가 겹치는 게 제가 알기로는 독일어도 Sie/sie 같은 경우도 있던 걸로 기억합니다. 물론 동사의 굴절을 통해 중의성이 형태 차원에서 해소는 됐을 겁니다. 하지만 그저 문맥과 의미로밖에 판별을 할 수 없다면 대략 낭패.

    푸른·가람: 아 그렇군요. ㅠㅠ "당신이 내 라이터 가져갔잖아!"(영화 <라이터를 켜라> 중)처럼.
    한국어는 높여 주지 않으면 아예 싸잡아 낮추는 표현이 되고, 뭔가 중립적인 문체가 부족한 게 문제인 것 같습니다.

  4. 맑아릿다 2010/11/22 21:50 # M/D Reply Permalink

    저..저는 3인칭 당신을 많이 쓰는데ㅠㅁㅠ 없애면 안된다능요ㅠㅠㅠㅠㅠ
    2인칭은 주격조사와 '-이'와만 결합하고 3인칭은 '-께서'와만 결합하니
    적어도 주격일 때는 중의성이 없어요(<-)

    물론 목적격일 땐........ 몰ㅋ라ㅋ

    저 송구스러운 일로 이메일을 보내 민폐를 끼쳤습니다.
    ...도와주세요 (운다)

    1. 사무엘 2010/11/22 23:27 # M/D Permalink

      헉, 3인칭 당신을 실제로 구어로 구사하는 사람이 있군요. =_=;;;
      공돌이 출신은 언어 감각도 그냥 단순 무식하고 기계 친화적이죠. ㅋㅋㅋㅋㅋ

      그런데, 위의 댓글에도 언급돼 있듯이, 멱살 잡으면서 "당신 때문에 망했잖아!"하는 것과 "당신께서는 정말 훌륭한 학자이셨습니다"... 가 공존한다는 게 너무 어색하지 않나요? 판타지 수준인 듯..
      메일은 봤습니다. 어이쿠, 저도 기말 과제 고민해야 하는데 ㅠㅠ...;;; 곧 연락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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