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의 상징은 뭐니뭐니해도 산업화의 주역이던 증기 기관차이다.
우리말의 경우 기차(汽車)라는 한자어부터가 증기라는 뉘앙스를 잔뜩 담고 있는 단어이며, 칙칙폭폭 역시 증기 기관차에서 유래된 의성어이다.
철도 건널목 표지판은 연기를 모락모락 내는 증기 기관차의 모습을 형상화한 그림이다.
증기 기관차가 달리면서 연기를 온 천지에다 뿌려대는 모습을 보면, “기차 화통 삶아먹었나?”란 말의 의미를 확실하게 이해하게 된다. 아마 중국어로는 기차를 아예 火車라고 했지 싶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었다. 드보르작이 증기 기관차를 보고 철덕이 되었던 반면, 21세기의 철덕은 전자음 옥타브를 들으면서 쾌감을 느낀다.
오늘날의 철도 차량 중에 저렇게 연기를 뿜으면서 칙칙폭폭 하면서 달리는 녀석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기억 속에 각인된 철도의 첫 구현체인 증기 기관차에 대한 인상은 너무나 뿌리 깊다. 마치, 플로피 디스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도 3.5인치 디스켓 아이콘은 ‘저장’ 아이콘으로 보편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건설되는 철도는 복선 전철이 기본이요 전부 고가이다. 건널목은 절대 만들지 않으며 무조건 입체 교차이다. 그러니, 철길 건널목 하면 표지판의 증기 기관차가 암시하듯, 옛날의 꾸질꾸질한 기관차형 열차만을 사람들이 떠올리게 되는 것도 일리가 있다.
본인은 디젤 동차인 새마을호 연구 전문이기 때문에, 철덕치고는 열차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증기 기관차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증기 기관차에 대해서 한번 좀 기계공학스러운 글을 써 볼까 한다. 역사든 지리든 음악이든 과학이든, 철도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 모든 학문은 나의 친구이다. ㅋㅋ
물리학에는 열역학이라는 분야가 있으며, 열역학이라는 관점에 따르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에너지는 궁극적으로는 어떤 형태로든 열로 바뀐다.
하지만 반대로 열을 에너지로 바꾸는 건 쉽지 않은 일이며, 모든 열을 에너지로 바꾸지는 못한다. 그 일을 하는 물건을 통상 기관 내지 엔진이라고 부른다.
그 기관 중 증기 기관은 외연 기관이라고 불린다.
증기 기관은 연료를 태워서 물 같은 다른 매개체를 끓여 증기를 만들고, 그 증기의 힘으로 피스톤이나 터빈을 움직인다. 연소가 동력을 만드는 곳과는 별개의 장소인 보일러에서 행해진다는 점에서 ‘외’(external)라는 말이 붙은 것이다.
밥솥 내지 냄비에서나 나오는 그 연약한 수증기가 평소보다 10수 배로 압축만 하면 집채만 한 무거운 열차를 움직이게도 한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요즘이야 기관차형 열차에는 기관차 뒤에 발전차가 편성되어 있다. 객실 내부에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증기 기관차 시절에는 발전차가 아니라 석탄을 실은 별도의 화차가 한 량 필요했다. ^^;; 기관사 밑에서 일하는 조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삽으로 석탄을 아궁이에다 열심히 퍼 넣어야 했다. ㅎㄷㄷㄷ;;
그리고 증기 기관차를 굴리기 위해서는 역에는 급수탑이 필요했다. 수원, 영천 등 몇몇 역에 있던 급수탑이 지금은 역사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문화재로 보존되어 있기도 하다.
오늘날의 철도 차량에서는 찾을 수 없는 당시 증기 기관차의 특징 중 하나는 바퀴 크기가 큼직했다는 점이다. 옛날에는 앞바퀴가 유난히도 큼직한 자전거가 존재하기도 했던 것과 따지고 보면 비슷한 맥락이다. 또한, 증기 기관차는 꼭 둥근 원통형이고 색깔은 새까맸다. 어차피 매연 묻어서 시꺼멓게 되는 걸 가리려고 검은색을 의도적으로 선택한 듯.
또한 증기 기관차는 20세기 중반에 세상에 컬러 사진이 보편화할 무렵엔 모두 은퇴했기 때문에, 최소한 연기를 뿜으면서 달리는 모습을 컬러 사진으로 보기는 쉽지 않은 물건이기도 하다. 특히 정지 사진이 아닌 컬러 동영상은 더욱 찾기 힘들 것이다.
이에 덧붙여 증기 기관차의 트레이드마크는 역시 특유의 '웨에에엥!' 기적 소리인데.. 이건 어떻게 만들어 낸 소리인지 모르겠다.
증기 기관은 오늘날의 내연 기관에 비해서야 구조가 간단해서 만들기 쉽고, 저속에서도 비교적(언제까지나 '비교적!') 토크가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마차보다야 월등히 더 뛰어난 수송력으로 물류 혁명을 달성한 건 사실임. 그리고 무슨 방법을 써서든 물을 끓게만 만들면 됐으니 옥탄가가 크지 않은 저가의 저질 연료를 써도 괜찮은 점 역시 장점이었다.
그때 증기 기관차에는 별도의 변속기라는 게 없었다. 외연 기관은 태생적으로 연소 따로, 구동 따로인데 어차피 바퀴의 부하가 엔진에 바로 걸리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냥 석탄 열나게 많이 때면 빨리 가고, 적게 때면 느려졌다. 수증기가 오늘날로 치면 일종의 유체/유압 변속기 역할을 자연스럽게 했다.
변속기가 없기 때문에 그 대신 기관차의 바퀴 크기 자체가 동력비를 조절하는 역할을 했으며, 바퀴마다 크기가 들쑥날쑥이기도 했다. 여객용 기관차는 속도를 중요시해서 바퀴가 유난히 크고, 화물용 기관차는 견인력을 중요시해서 작은 바퀴 여러 개였던 식.
나름 증기 기관도 발전을 거듭하여 처음 발명되었을 때보다 더욱 출력이 향상되고 전성기를 맞이하기도 했으나, 전반적으로 볼 때 이런 동력을 쓰는 열차는 매우 비효율적이고 문제가 많았다.
증기 기관 자체가 물리학적으로 볼 때 태생적으로 미치도록 열효율이 저조하고 열차를 굴리기에는 출력이 부족했다. 가감속이 쥐약이고 고속화 역시 곤란했다.
또한 증기 기관은 보일러가 필요하고 물탱크에 석탄까지 있어야 하다 보니, 구조는 단순하지만 덩치가 커지는 게 불가피했고 소형화하기가 곤란했다. 증기 기관이 자동차의 동력원으로는 실패하고 그나마 철길이라든가 증기선으로 살 길을 찾은 게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비열이 큰 물이 끓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고 석탄 같은 고체 연료는 취급하기가 번거로워서 여전히 큰 골칫거리였다. 시동 시간이 굉장히 길고, 차를 세우거나 움직이게 하는 게 고역이었다는 뜻. 연탄재 치우는 것만 해도 얼마나 귀찮은데 다량의 석탄재 처리는 어떻게?
마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순전히 관광 목적으로 streetcar (바닥의 전선을 잡고 달리는 legacy 시가지 교통수단)를 운행하듯이, 요즘 일부 국가에서는 관광용으로 일부러 증기 기관차를 굴리는 곳이 있는데, 참고로 말하자면 걔네들은 석탄 대신 석유나 가스로 물을 끓인다. 200년 전의 증기 기관차를 100% 그대로 재연한 건 아니라는 뜻. 사실, 증기 기관이 발명되고 실용화한 시기 자체가 영국의 산업 혁명과 맥을 같이하며, 오늘날처럼 대량의 석유를 값싸게 전세계에 공급하는 인프라가 갖춰지기 전이었다.
환경면에서도 증기 기관차 역시 석탄이든 석유든 엄연히 화석 연료를 태워서 달리는 만큼, 그 큼직한 굴뚝에서는 수증기만 나오는 게 아니었다. 달릴 때 방출되는 엄청난 양의 그을음 내지 매연은 친환경과는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존재였다.
18세기에 발명되어 인류의 동력원으로 활동한 증기 기관(핵심 인물: 제임스 와트)은 19세기 중후반이 되어서야 내연 기관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다. 최소한 육상 교통수단의 동력원에서는 확실하게 은퇴이다. 내연 기관이야 다임러, 벤츠, 오토 같은 사람이 공헌한 가솔린 기관도 있고 디젤 기관도 있으며 심지어 제트 엔진이나 로켓도 이에 속하지만, 외연 기관은 사실상 증기 기관과 동치나 마찬가지인 개념인 것 같다. (뭐, 스털링 엔진 같은 특이한 엔진도 외연 기관이라고는 하지만)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