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가지 지론

오랜만에 플게에 이런 이슈가 나와서 우리말 쪽으로도 글을 써 본다.

1. 서로, 스스로를 부사가 아닌 명사로 쓰는 것은 잘못됐다.
OK. 공감함.
  서로가 서로를 배려해야 한다. (X)
  각자(우리)가 상대를 배려해야 한다. (O)

  네 스스로에게 문제가 있다. (X)
  너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 (O)
O 같은 어휘를 생각해 내기가 귀찮아서 X로 단순화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모두'까지 부사로만 써야 하고 명사형이 잘못됐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
모두를 안 쓰면 전부, 전체 같은 한자어가 대신 들어갈 수밖에 없음.

2. 그녀라는 말을 쓰지 말아야 한다.
응, 충분히 취지를 이해하며 가능한 한 다른 걸로 표현을 바꿔 쓰고 싶은데 전혀 안 쓸 수가 있나?
특히 성경 번역 같은 거 할 때.. 한국어에 she 같은 개념 자체가 없었고 이제는 필요해졌는데 어떡하라고?

3. '-에 있어서'란 말을 쓰지 말아야 한다.
OK. 정말 장황한 군더더기이고 '더 이상'만큼이나 안 쓰고 지냄.

4. 역할, 입장, 불구하고(despite, in spite of) 같은 말도 쓰지 말아야 한다.
글쎄. 한동안 구실, 관점, though 같은 다른 표현도 써 봤지만 전자는 후자하고 의미가 다른 면모가 있다.
완전히 안 쓸 수는 없을 것 같으며, 특히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본인의 고민은 도대체 일본과 한국이 공용하는 한자어들 중 어떤 건 괜찮고 어떤 건 써서는 안 되는지 판단하는 그 잣대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이건 판단 보류.

5. 애매하다와 모호하다를 구분해야 한다.
OK. 좋은 지적.
  공연히 애매한 사람을 들볶다..
  의미가 너무 모호(한자어)하고 막연하다.

6. '의'자 붙이는 거 자제해야 한다.
가능한 한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싸그리 몰아낼 수는 없다.
'의'자 안 붙이고 링컨 대통령의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를 번역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한국어는 이런 점에서 표현력이 무척 떨어지는 면모가 있다.
'A의 평면 B로의 정사영'... 영락없는 영어/일본어 번역투인 것은 알지만 도대체 이보다 더 간편하게 어떻게 번역할 수 있겠는가?

7. '보다'를 주의해서 써야 한다.
  보다 나은 미래 (X)
  네가 나보다 낫다 (O)
OK. X는 영 어색하고 기초적인 우리말 문법 관념도 없이 생겨난 표현임을 인정한다. '(좀)더'만 써도 충분하죠.

8. 했었다 같은 이중 과거
순화 운동가들이 보면 펄쩍 뛰고 노발대발할 말투인데..
원래 한국어에는 없던 시제 표현을 확장해서 받아들인 거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간 적이 있다"를 줄여서 "갔었다"라고.. 굳이 배척할 필요는 없다고 느낀다.

9. '가지다' 남발
OK. 한국어의 정서와 명백하게 이질적인 own, have 직역투는 자제염..;;
쓰기 전에 한번 생각을 해 보고 쓰자.
임신하면 아이를 배는 거지 아이를 갖는 게 아니다.
행사를 가지는 건 너무 심했잖아!

이것 말고 또 무슨 예가 있을까?
본인은 고등학교 시절에 이 오덕 선생, 대학교 시절에 이 수열 선생님의 우리말 순화 책을 섭렵한 경험이 있다.
100% 공감하지는 못하는 사항도 있지만 어쨌든 우리말의 실태에 대해 많은 생각을 일깨워 준 좋은 내용이었다.

스스로 판단하기에 OK라고 결론을 내린 사항들은 나름대로 이 홈페이지 열 무렵부터 그대로 지켜 왔다.
지금은 한말글 정신이 투철하던 2001~02 시절에 비해서는 많이 타-_-락해서 본인 쓰는 글에 한자어, 영단어도 예전보다 많이 들어간 편이지만, 그래도 감각 자체를 잃어버린 건 아니다.

나의 원칙은 간단하며 실용성을 지향한다.

- 한국어가 의미가 잘 구분되고 문법에 원칙이 있는 언어가 되는 방향으로: 다르다/틀리다는 반드시 구분해서 써야 한다. '더 이상' 같은 말을 쓰지 말아야 한다.
- 청각적으로 구분이 잘 되는 방향으로: 그래서 한글 전용 지지이다.
- 그리고 가능하면 짧고 간결하게
- 그리고 가능하면 토박이말에 우선순위: 어설픈 외래어 순화보다, 이미 있던 순우리말부터 먼저 퍼뜨리고 써야 한다.

4번을 제외하고 위의 세 가지 대원칙에 역행하지 않는다면 외래어나 번역투도 다른 우리말 순화 운동가들에 "비해서는" 그렇게 배척하지 않는다.
우리말이 영어처럼 수동태가 발달해 있지 않고 자주 쓰이지 않는 것은 사실이나 우리말에 수동태에 해당하는 표현이 없어서 좋을 것도 없는 건 사실이지 않은가.

물론, 번역투 때문에 말이 장황하고 거추장스러워지는 것은 분명히 경계한다. 또한 외래어나 외래 문체가 전혀 필요하지 않고 이미 멀쩡히 잘 쓰이던 우리말 표현까지 왜곡되고 파괴되는 것 역시 막아야 할 것이다.

우리말과 글 쪽의 홍보/계몽은 이렇듯 분명한 원칙과 체계를 갖추고 추진해야 쓸데없는 논쟁과 반감에 휩싸이지 않는다.

그리고 "비판을 하려면 수긍할만 한 대안을 제시하라." 주의이다.
그런 거 없이 무조건 뭐 일본식 한자어니까, 번역투란 이유만으로 쓰지 말자는 주장은 그냥 가능한 한 기피하는 고려 수준은 될 수 있어도, 적극적으로 안 쓰지는 않는다.

내가 또 하나 주장을 하는 걸로 글을 맺겠다. 나름대로 이 바닥에 짬밥도 있기 때문에 응용하는 것이다.

※ '기존'은 '예전'이 아니다. 제발 똑바로 쓰자.

- 현존, 실존 이런 단어하고 똑같은 용법으로 써야 하는 말이다.
- "기존에 있던 것들은 다 지워라" 이런 말... 정말 한숨만 나온다. "기존하는 것들은" 아니면 "예전의 것들은"이라고 쓰는 게 낫다.

Posted by 사무엘

2010/01/11 00:16 2010/01/11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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