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es 서체 이야기

Times라는 단어가 쓰이는 곳이 어딜까?
수학에서는 '곱하기'를 나타낸다. 5 times 3 equals 15처럼. 디즈니의 만화영화 라이온 킹에는 I'm ten times the king Mufasa was! 라는 스카의 대사도 있다.

그리고 Times는 영미권에서 왠지 신문의 이름을 나타내는 경향이 있다. 뉴욕 타임즈가 대표적이고, 영국에도 The Times라는 신문사가 있다.
하긴, 신문 이름에 쓰이는 단어로 Herald도 있긴 하다. 성경에서는 딱 한 번, 다니엘서에서 느부갓네살 왕의 황금 형상에다 다들 절하라고(안 그러면 뒈진다고) 대국민 담화를 선포하는 자가 herald라고 나온다(단 3:4).

옛날에 윈도우 95 CD에는 Good times bad times라는 노래의 뮤직비디오도 있었는데 이건 그냥 잡설이고..

다시 Times라는 단어로 돌아오면, 이 단어는 오늘날 영미권에서 쓰이는 가장 유명한 본문용 서체의 이름이기도 하다. 워낙 너무 유명해서 이미 아시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이 서체의 이름 역시 영국의 The Times 신문사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렇다, 이건 신문사에서 만든 서체이다. 서체의 공식 명칭은 Times Roman인데 이건 우리로 치면 '조선일보명조', '한겨레결체' 이런 것과 완전히 동일한 작명법이다.

more..


Times가 만들어진 때는 1931년. 컴퓨터가 발명되기 전에 만들어지긴 했지만 Bodoni나 Baskerville만치 오래 된 서체는 아니다.
생김새가 기존 세리프 계열 서체들과 비교했을 때 사뭇 이질적이다. 이것 때문에 등장 당시에는 비판도 받았다고 한다.

가령, 2자의 모양을 보자. 세리프 계열이라면 좌측 상단 끝부분의 획에 동그란 세리프가 달리는 게 통념일 텐데 Times는 그렇지 않다. 사실은 6이나 9도 마찬가지. Times는 전반적으로 / 모양의 붓으로 글자를 그렸을 때 생기는 모양을 형상화했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모양이 무척 미려하고 아름답긴 하다. 무난하면서도 참신하고 잘 만든 서체이다. 컴퓨터 시대가 되면서 Times는 그야말로 신문을 넘어서 전세계 본문 서체를 평정했다. 거의 모든 책과 문서들이 이 서체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한국은 신문 명조와 일반 본문 명조 사이의 경계가 아직도 뚜렷한 편인데 이는 좋은 대조가 아닐 수 없다. 과거에는 신문용 서체가 세로쓰기에 맞춰져서 더 납작하고 뚱뚱한 편이기라도 했지만, 요즘은 세로쓰기도 다 없어졌는데 말이다.

Times는 한글 명조와 같이 쓰기에는 약간 어울리지 않고 혼자 튀는 경향이 있다. 뭐, 대다수의 영문 서체들이 그렇지만, 이들이 한글 서체와 잘 어울리려면 좀더 홀쭉하고 가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전반적인 디자인을 차치하고라도 Times의 세리프는 뭐랄까, 좀 보수적이다. 그냥 명조보다는 문화바탕과 더 어울리는 것 같고, 윤명조 같은 파격적인 명조와는 어울리기 힘들다. Times보다는 Century Schoolbook 같은 부류의 세리프가 명조와 더 잘 맞을 것 같다.

그래서 Times의 획을 한중일 문자에 맞게, 아니 심지어 불변폭 서체 형태로 바꾼 변종이 있다. 과거 윈도우 3.1 시절의 바탕체에 포함된 영문· 숫자 글꼴이 그 예이며, 오늘날 MingLiu라는 한자 서체도 영문· 숫자 글꼴을 보면 딱 그렇다. 참고로, 불변폭은 아니지만 과거에 신명 세명조라는 서체가 내가 생각한 문화바탕+Times 컨셉과 굉장히 비슷한 모양을 세명조답게 아주 가늘게 변형한 형태였다.

Times는 그 중후하고 보수적인 분위기 덕분에, 문화바탕을 넘어 붓글씨 서체인 궁서와도 의외로 잘 어울린다. 사실, 오늘날 한글 서체에 같이 들어있는 영문· 숫자의 궁서체는 Courier 같은 딱딱한 타자기체-_-를 더 굵게 하고 눈꼽만치 기교를 넣은 뒤, 적당히 가변폭 서체로 바꾼 것에 더 가깝다.
어째 세리프 계열의 한글 서체에다가 산세리프 계열의 영문 서체를 집어넣었나 싶다만-_-, 어차피 영문은 붓글씨 테크닉이 정착해 있지도 않으니 붓으로는 아무 기교 없이 그렇게 글자를 그린다 해도 이상할 건 없겠다.

그 반면, 오늘날 역명판이 코레일체 대신 궁서체로 기재되어 있는 경춘선 김유정 역은, 궁서와 더불어 영문이 Times 서체로 기재되어 서로 잘 어울리고 있으며, Chick tracts 같은 미국의 전도지도 성경 구절은 Times로 적고 있다. 우리가 산돌성경체 같은 개역성경 붓글씨체를 보수적인 성경 본문체로 생각하듯이, 걔네들은 그게 보수적인 성경 본문체인 것이다.

여담이다만, 오늘날 타이포그래피의 대세는 산세리프와 세리프의 경계를 깨고(뭐, 굳이 하나만 고르자면 역시 세리프에 더 가깝지만) 화면 표시용 튜닝이 잘 된 그런 서체가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맑은 고딕, Segoe, 서울 남산 같은 서체들이 그런 유행을 따르고 있다.

옛날에는 그런 하이브리드 서체로 그래픽체가 아주 유명했고 참신했는데 지금은 그것도 너무 outdate돼 있다. 2, 30년 전의 TV 화면에서 그래픽체 자막을 보니 얼마나 격세지감이 느껴지던지!
오늘날은 Times 신문사도 Times가 아닌 다른 본문 서체를 사용한다는데, 이 Times에도 먼 미래에는 오늘날 우리가 중세 서체를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고전 서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1/09/05 19:07 2011/09/05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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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삼각형 2011/09/05 23:22 # M/D Reply Permalink

    언어 불문하고 화면에서 세리프는 가독성이 영 아니더군요. 맑은 고딕 같은 서체는 산세리프인줄 알았는데(이름 부터 고딕인지라) 세리프의 요소도 좀 가지고 있는 모양인가 보군요.

    1. 사무엘 2011/09/06 09:25 # M/D Permalink

      도트 매트릭스의 특성상 저해상도에서는 세리프의 가독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죠.
      그나마 흑백이 아니라 RGB(ClearType), 명암(Grayscale) 등으로 픽셀 당 정보량을 늘림으로써 가독성을 향상시키려는 글꼴 기술이 개발되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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