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쓰기와 세로쓰기

우리나라의 문자 언어 문화는 지난 20세기 후반에 큰 변화를 겪었다. 이는 두 양상으로 요약된다. 첫째로 한자를 섞어 쓰는 빈도가 크게 감소하였으며, 둘째, 세로쓰기가 전멸하다시피 하고 가로쓰기가 대세가 되었다. 사실, 예전에 한글 학회의 슬로건이 “한글만으로 가로로 쓰자”일 정도였다. 한글 전용만 주장한 게 아니라 가로쓰기까지 주장했다는 뜻.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세로쓰기는, 태생상 세로로 길쭉할 수밖에 없는 간판이나 책의 등짝 같은 극소수 제한된 환경에서나 볼 수 있는 듯하다. 더 나중에는 그런 곳에서마저도 세로쓰기를 하느니 차라리 영문 문화권처럼 가로쓰기를 90도로 돌린 표기로 대체될지는 모르겠다.

붓글씨+세로쓰기 스타일이던 성경책은 이미 1990년대 중· 후반부터 한국 교회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된 지 오래이다. 신문은 1990년대 초반에 한겨레가 처음으로 한글 전용+가로쓰기를 시작한 후, 1999년에 그 보수적인 조선일보마저 가로쓰기로 돌아섰다.

출판물뿐만이 아니라 영상 매체에서도 분명한 추세를 발견할 수 있다.
예전에는 TV 프로에서 방송이 시작되기 전 ‘제공’이라는 명목으로 뜨는 광고주 리스트라든가, 일부 중요 인명이나 문구는 때에 따라 가로쓰기와 세로쓰기가 혼용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다 가로쓰기이다.

영화관에서는 과거에 길쭉한 스크린의 우측 상단에 으레 세로쓰기로 뜨던 한글 자막도, 이미 옛날에 가로쓰기로 다 바뀌었다. 세로쓰기는 확실히 낡은 구닥다리 스타일로 간주되게 되었다. 이런 변화가 무엇을 의미할까?

세로쓰기가 천덕꾸러미가 되고 도태된 가장 큰 이유는, 컴퓨터가 세로쓰기를 전혀 하지 않는 문화권에서 처음으로 발명되었고 따라서 세로쓰기도 컴퓨터에서 직관적으로 처리하기 곤란한 고리타분한 방식으로 전락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물론, 본인은 명백히 가로쓰기에 익숙한 가로쓰기 지지자이다. 세로로 써진 빽빽한 글은 한국어가 한국어처럼 덩어리 단위로 눈에 확 들어오질 않는다. -_-;; 일단은 가로든 세로든 자기에게 익숙한 방향의 텍스트가 눈에 더 빨리 들어오겠지만, 아무 편견이 없는 사람이라면 두 눈이 가로로 달려 있는 이상, 가로쓰기가 더 유리하게 읽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그래도 세로쓰기를 일부러 의도적으로 배척할 필요는 없고 제목이나 장식용으로 제한적으로는 적절하게 활용하는 게 한글의 특성도 살릴 수 있고, 공간 활용 면에서 더 효율적이지 않냐 하는 정도의 견해를 갖고 있다. 옛날 사람들은 저렇게 읽기 불편한 세로쓰기 책들로 도대체 어떻게 독서와 공부를 했을까?

마치 요즘 자동차들이 전부 자동변속기로만 나와서 운전자들이 수동변속기 운전의 묘미를 경험할 기회가 없는 것처럼, 가로와 세로쓰기가 모두 가능한데 오로지 가로쓰기만 함으로써 우리가 다른 방면에서 얻는 기회비용이 무엇일지에 대해서 열린 가능성을 생각해 볼 의향은 있다는 뜻이다. 그렇잖아도 요즘은 컴퓨터도 온통 와이드 화면이 대세인데, 이런 곳에서는 세로쓰기가 공간 활용이 더 효율적이기도 할지 모른다. (가독성 같은 다른 요소는 제끼고 오로지 공간 효율만)

오늘날 국내엔 세로쓰기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사람이 극소수 있긴 하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강경한 한자 혼용론자이고 세로쓰기를 거의 종교적인 숭배에 가까운 수준으로 미는 경향이 있는데, 본인은 그런 주장에까지 공감하지는 못한다. 가령,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 때문에 남한의 지식· 학문의 수준과 깊이가 하락하고, 사상까지 온통 좌경화되었다는 식의 드립. -_-;;

원래 한자의 종주국이 세로쓰기의 종주국이기도 한지라 한국과 일본의 세로쓰기 관행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이 20세기 중반에 간체자를 만들고 가로쓰기를 전면 시행하면서 어문 규범이 크게 바뀌었고, 한국 역시 스타일이 상당 부분 서구화했다. 현재는 일본만이 세로쓰기를 아주 활발하게 활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소프트웨어의 국제화에서까지 진지한 고려 대상이 되어 있다.

윈도우 운영체제의 경우 한글 글꼴의 이름 앞에 ‘ @ ’가 붙은 세로쓰기 바리에이션 글꼴을 제공하고 있으며, 현재 편집 중인 텍스트의 방향이 가로인지 세로인지 운영체제 IME에게 알려 주는 프로토콜도 제공한다.  MS 워드에서 MS IME나 <날개셋> 한글 입력기로 한글-한자 변환을 해 보면, 세로쓰기 중일 때는 한자 후보 리스트도 세로쓰기로 나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날개셋> 타자연습은 아예 세로쓰기로 타자 연습도 가능하다. ㄲㄲ

일본은 자기 이름을 로마자로 표기할 때 이름-성 순으로 표기하는 건 일찌감치 서구화했으면서, 세로쓰기는 서양 스타일을 따르지 않고 자기 식으로 고수하고 있으니 흥미로운 차이인 것 같다. 미국이 관습상 110V 전압과 비표준 단위계를 못 벗어나고 있는 것만큼이나 일본 역시 세로쓰기를 언제까지나 고집하게 될지 두고 볼 일이다.

서양의 라틴 알파벳 문화권에서는 진짜 크로스워드 게임 같은 데서나 세로쓰기를 볼 수 있는 듯하다. 애초에 단어의 일부가 양 줄에 걸쳐서는 안 되는 정서법이니, 세로쓰기와는 더욱 어울리기 힘들다고 볼 수 있겠다.

문득 드는 생각은, 한글에도 세로쓰기 용도로 잘 튜닝된 글꼴이 개발되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가로쓰기용 가변폭 글꼴이 ‘이’보다 ‘빼’가 더 길쭉한 것처럼, 반대로 세로쓰기용 가변폭 글꼴은 ‘이’보다 ‘봅’이 더 길쭉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가, 개 같은 글자가 세로로 배열되었을 때 구조적으로 중심이 잘 잡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당장 가로쓰기용으로도 가변폭 글꼴이 연구된 게 잘 없는데, 벌써 세로쓰기까지 생각하는 건 사치인 것 같다. ㅋ

Posted by 사무엘

2012/03/07 08:25 2012/03/07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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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주의사신 2012/03/07 09:01 # M/D Reply Permalink

    전에 교보문고에서 영문 책들 구경한 적이 있었는데, 한 영어 책이 제목이 세로쓰기였답니다.(가로로 써서 눕힌 것이 아니고요!) 무척 어색하고 이상해 보였던 기억이 납니다.

  2. 박철현 2012/03/07 14:48 # M/D Reply Permalink

    세로 쓰기 이야기가 나올 때는 기본적으로
    옛날 종이의 유통에서
    두루마리 방식이었고

    이 부분을 붓글씨로 쓸 때
    완쪽으로 두루마리를 펴면서
    오른손으로 붓을 잡고 쓰는 방식으로
    그 당시에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었습니다.

  3. 사무엘 2012/03/07 15:19 # M/D Reply Permalink

    주의사신: 그 경우, 각 글자가 최소한 모두 대문자이긴 할 겁니다. 그리고 아마 가변폭이 아니라 Courier 같은 불변폭 글꼴일 가능성도 있고요. 소문자로 세로쓰기는 정말 안 어울리죠..;;

    박철현: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글씨 쓰는 방향의 내력에 대해서 거슬러 올라가면, 그런 식으로 내력이나 사연이 다 나오긴 할 것 같네요. 교통수단의 좌측/우측 통행 방향도 과거에 마차의 통행 환경과 관련하여 더 유리한 점이 있는 방식이 표준으로 정해진 거라는 해설이 있듯이 말입니다.

  4. 백성 2012/03/07 22:27 # M/D Reply Permalink

    저도 한자를 좋아하고, 세로쓰기를 좀 더 선호하기는 하지만(그래도 가로쓰기가 익어서 가로쓰기중) 조갑제씨의 의견은 도통 이해할 수 없더군요.

    1. 사무엘 2012/03/08 09:18 # M/D Permalink

      그렇잖아도 생소한 한자어 학술 용어들을 의미도 모른 채 한글로 소리만 붕 뜨는 듯이 적어 놓으니까 뭔 말인지 못 알아듣고 학문적 깊이가 떨어진다는(아래의 이 광근 교수 글 참고. 만유인력과 '어디서나 있는 끄는 힘'의 차이) 지적은 완전히 잘못된 말은 아닙니다. 세상이 시간이 흐를수록 영적으로 타락하고 문화도 뭔가 질과 수준이 떨어진다는 것 역시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건 문자하고는 개연성이 있지 않을 뿐더러, 학술 용어 문제는 그렇다고 한자가 해결책인 건 전..혀 아니지요.
      지 만원 박사조차도 한글 전용 좌경화 운운은 개드립이라고 일갈한 적이 있습니다. http://systemclub.net/bbs/zb4pl5/zboard.php?id=new_jee&no=5350

  5. 엘리프 2012/04/05 13:19 # M/D Reply Permalink

    랄까 세로쓰기용 한글 폰트라면 이용제 선생님의 꽃길이 이미 있지 말입니다.

    1. 사무엘 2012/04/05 18:07 # M/D Permalink

      좋은 정보를 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런 서체와 서체 디자니어도 있었군요..!
      전속 서체나 튀는 서체 쪽이 아니라 아주 평범하고 베이직하면서 완성도 높은 본문용 서체를 만든다는 건 어지간한 사명감과 근성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데, '꽃길'은 무척 잘 만들어진 서체 같습니다. 제가 원래 본문에서 의도한 건, 가변폭까지 세로쓰기 기준으로 가미된 것이긴 합니다만.

      이곳에서는 처음 글 남기신 손님 맞죠? 언어학에 관심 많으신 분 같습니다. 인터넷으로 그 정도로 신앙관 공개하는 사람은 정말 드문데 여러모로 비범함이 느껴집니다. 반갑습니다. ^^

    2. 엘리프 2012/04/10 12:53 # M/D Permalink

      이전 홈페이지에서는 댓글 여러개와 글 하나를 남겼었을 겁니다. 따라서 맨 처음은 아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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