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몇 언어 현상 관찰 -- 下

* 上에서 이어짐

5. 동사와 형용사가 오락가락 하는 단어

영어의 correct/incorrect 및 right/wrong은 형용사이다. 그 반면, 국어의 '맞다/틀리다'는 영어에서 같은 의미에 대응하는 단어들과는 달리, 품사가 동사이다.

국어에서 동사와 형용사는 똑같이 활용이 일어나는 용언으로 분류되나, 서로 차이점도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동사는 현재 시제 선어말 어미인 '-ㄴ-/-는-'이 붙을 수 있지만 형용사는 그렇지 않다. '맞다'는 동사이기 때문에 “맞은 답을 고르시오”라고 안 하고, “맞는 답을 고르시오”라고 쓰인다. 형용사인 '낮다'(low)는 '낮은 언덕'이라고 활용된다는 점을 같이 생각해 보시라.

그런데 '맞다'와는 달리 '알맞다'는 형용사이다. '맞다'일 때는 “맞는 답을 고르시오”인데, '알맞다'를 쓰면 “알맞은 답을 고르시오”라고 써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맞다' 역시, 동사임에도 불구하고 가끔 형용사처럼 즐겨 쓰이기도 한다. “A가 하니라 B처럼 하는 게 맞다”라고 표현하지, “B처럼 하는 게 맞는다”라고 쓰면 굉장히 어색한 건 나만의 생각인지?

반의어인 '틀리다'도 마찬가지여서 '틀리다', '틀린다', '틀렸다' 등의 쓰임이 오늘날은 굉장히 뒤죽박죽이 돼 있다. 그런 와중에 잘 알다시피 '다르다'의 의미까지 들어왔으니 카오스 그 자체. 최신 말뭉치를 통해 용례를 뽑아 보면 아주 가관이지 싶다.

동사와 형용사가 오락가락 하는 단어로 또 '웃기다'가 있다. 원래는 누구를 웃게 한다는 뜻의 사동사인데, '웃긴'이라고 하면 '우스운'이라는 형용사로 사실상 보편적으로 통용 중이기 때문이다. 이런 예가 국어에 좀 더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6. 영단어 발음의 한글 표기와 관련된 혼란

첫째, 음절 말미의 자음을 별도의 음절로 빼내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내가 아는 한 규칙성 따윈 없으며, 진짜 case by case이다. 이 요소를 이용해 똑같은 영단어의 다의성을 구분하는 경우까지 있다.

타이프, 타입(type): 전자는 인쇄 분야 용어, 후자는 그냥 보통명사
네트, 넷(net): 전자는 스포츠 분야 용어, 후자는 컴퓨터 쪽 용어
태그(tag), 백(bag), 랙(lag), 개그(gag)
빅(big), 버그(bug)


둘째, 단모음을 읽는 방식이다. 과거에는 일본이나 영국, 심지어 독일의 영향을 받아서 A는 쿨하게 ㅏ로, O는 ㅗ로 표기하는 색이었지만, 지금은 미국식 발음에 더 가깝게 A는 ㅐ로, O는 ㅏ로 바꾸는 추세이다. 특히 단모음 O의 혼란이 심하다.

도트, 닷(dot): 전자는 그래픽 용어(도트 노가다, 도트 프린터), 후자는 인터넷 용어(닷컴, 닷넷 등)
톱, 탑(top) / 톰, 탐(Tom)
알레르기, 앨러지 / 게놈, 지넘 같은 예도..


셋째, 모음을 장모음으로 읽느냐, 단모음으로 읽느냐이다. 한 단어에 모음 두 개가 있을 때 첫 모음을 장모음으로 읽을지 단모음으로 읽을지 문제는, 로마자 알파벳을 쓰는 영어권에서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혼란으로 남지 싶다.

프로필, 프로파일(profile): 전자는 누구의 신상 정보인 반면, 후자는 정밀 검사를 뜻한다.
디렉트, 다이렉트(direct): 전자가 영어권에서 더 널리 쓰이는 발음이지만, DirectX는 유독 후자의 발음으로 불린다.
ASUS: 아수스, 에이서스
Radeon: 레이디언, 라데온
LATEX: 라텍스-_-, 레이텍. 전자 발음을 꿋꿋이 고집하는 분들도 국내에 여럿 계신다.


인도 식 영어에는 data도 라라 크로프트(Lara)를 읽듯이 자기네끼리 '다타'라고 읽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7. 숫자의 한자음에 존재하는 두음법칙

국어의 한자어 숫자 0(영)부터 9(구) 중, 유일하게 자음이 ㄹ이어서 두음법칙이 적용되는 숫자가 있으니, 바로 6(륙)이다. 얘는 원래 육이 아니라 륙이 맞는 독음이지만, 이게 어두에서의 대표음이다 보니 '륙'은 존재감이 굉장히 줄어들어 있다.

이번 <날개셋> 한글 입력기 6.7은 '숫자를 한글로' 텍스트 필터의 알고리즘을 수정하여, 천 단위와 소숫점 단위에서 처음 등장하는 6은 '육'으로, 그리고 그 단위 안에서 그 뒤부터 등장하는 6은 '륙'으로 변환하게 했다.

숫자 하니까 떠오르는 여담이다만, 영어 number는 일반적으로 연속적인 양 내지 개수를 나타내는 '수'를 뜻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산적인 개체를 식별하는 '번호'도 된다(telephone number).

성경에서 이런 이중적인 개념 때문에 중의적인 심상이 만들어지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계 13:18의 그 이름도 유명한 짐승의 수 666임이 틀림없다.
666은 짐승의 number라고 하는데 수일까 아니면 일련번호의 성격이 더 강할까?

8. 접두사와 접미사

같은 접사나 단어라도, 단어나 문장의 앞에 등장할 때와 뒤에 등장할 때의 뉘앙스는 서로 달라진다. 예를 들어 女를 생각해 보자.

여형사(female)
형사녀(-ess 여성형 접미사)


요즘 '쩍벌남', '된장녀'처럼 남-녀를 꼭 접미사처럼 쓰는 게 유행이다 보니 위의 두 단어는 뭔가 쓰임이 달라져 있다. 접두사 '여'는 전통적인 female이라는 관형어 역할을 하는 반면, 접미사 '녀'는 웬지 단어 뒤에 붙은 여성형 접미사 역할을 하는 듯이 느껴지지 않는지?

난 영어에서 비슷하다면 비슷한 현상을 발견하는 게 뭐냐 하면 대명사에서 주격과 목적격의 관계 같다.
영어는 SVO형 언어라는 특성상, 도치 형태가 아니라면 주어는 언제나 문장의 처음에 나오고, 목적어는 언제나 문장의 끝에 등장한다. 그러다 보니 주격이 문장의 말미에 등장하는 게 되려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바로 이런 심리 때문에 “나예요”가 It's I 대신, 구어를 중심으로 자꾸 It's me로 바뀌는 게 아닐까?
“He's taller than I.” 같은 문장도 자꾸 than me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I는 문장을 시작하는 단어이고 me는 문장을 끝내는 단어라는 편견이 내게만 있는 건 아니라 생각된다.

그러고 보니, 옛날에 봤던 월트 디즈니 만화영화에서 둘의 차이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발견된다. <미녀와 야수>와 <알라딘>은 1991년과 1992년, 아주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전자는 결말부에서 저주의 마법이 풀린 야수가 벨에게 “자기야, 나야!” 정도의 뉘앙스로 말할 때 “Bell, it's me!”라고 me를 썼다.
그 반면 후자에서는, 갓 잠에서 깨어나 심기가 불편한 신비의 동굴(Cave of Wonders)이 “Who disturbs my slumber?”이라는 아주 유명한 질문을 할 때, 알라딘이 쫄아서 “어.. 접니다. 알라딘이에요.”라는 의미로 “It is I, Aladdin.”이라고 me가 아닌 I를 써서 대답한다. I가 me보다 격식을 차린 말투라는 뜻 되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2/11/08 08:30 2012/11/08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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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주의사신 2012/11/08 08:57 # M/D Reply Permalink

    1. Data는 토익 지문 같은 것 들을 때, "다라"에 비슷하게 읽는 것을 자주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2. Tom과 같은 예로 Bob이 있습니다. 밥으로 발음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번역하고 싶어도, 보브로 번역해야 말이 되는 경우가 있어, 자주 그런 것을 봤습니다. Don이라는 이름도 그렇게 되고요.

    3. He's taller than me라고 영어 작문 시간에 썼다가 감점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교수님이 원어민이셨는데, "그렇게 많이들 쓰길래 그랬는데,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라고 질문했더니, 원어민도 자주 틀리는 문법이라는 말씀을 해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1. 사무엘 2012/11/08 10:12 # M/D Permalink

      1. 헉, 토익은 international 영어를 표방해서 그런가요? 단모음 data 발음을 실제로 들려 주는군요.
      2.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스크루지네 회사의 조수의 이름이 ‘보브’이죠. 아직도 기억합니다.
      3. 그렇게 me와 I가 문란해지는 게 한국어로 치면 다르다/틀리다 문란 현상에 대응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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