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글 운동꾼
평생을 '한글 운동'에만 몸바친 어르신이 한 분 계신다.
한글 운동이 뭐냐고? 일상생활이나 대외적으로(도로 표지판, 간판, 출판물 등) 최대한 한글을 많이 쓰게 하고 드러나게 하고, 세종대왕을 밀고, 덤으로 바른 한글 맞춤법과 순우리말을 가능한 한 미는 일체의 활동을 일컫는다. 한국어와 한글은 서로 다르지만, 그렇다고 완전 무관한 별개도 아니니...
일부 운동은 국문과 전공자가 보기에도 좀 과격하고 융통성 없어 보이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국수주의· 전투종족스러운 인상이 느껴지기도 할 정도이다. 허나 이런 분들의 헌신 덕분에 CJK 중 한국만이 한자를 일상생활에서 사실상 완전히 떼어 낸 편리한 자국 문자 전용을 이뤄 냈고, 끈질긴 전투 기질 덕분에 한글날을 빨간날로 추가하는 데 성공했다.
그 열정과 노력을 폄하하지 말지어다. 이거 그냥 된 게 아니다. 문자 습관이라는 건 인간 문화에서 굉장히 보수적이고 안 변하는 분야 중 하나이다.
내가 그분에 대해서 놀라는 면모는 인맥 네트워크이다. 한글 운동계에서 연륜과 짬밥에 관한 한, 이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만렙이다 보니, 언어학, 공학, 역사학 등 갖가지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가 뭔가 깨달은 게 있어 한글 덕후가 된 후학들은 알아서 이분을 제 발로 찾아가서 무릎 꿇고 “선생님, 한 수 가르쳐 주십쇼”를 한다. 자기 전공에서는 자신이 그 선생님과 비교가 안 되는 더 전문가인데도, 자기가 쓴 책이나 논문을 그분께 알아서 “드.. 드리겠습니다!”도 한다. 나 자신도 그분께 그랬고, 다른 사람들이 그러는 것 역시 내가 종종 봤다.
이쯤 되면 그분이 누구신지 눈치 채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본인의 아버지보다도 연세가 더 많으신 그 운동꾼 선생님께서 쓰시는 글이나 주장은 내용이 거의 한글교 교리 수준이다. 내가 내 스스로 철도교 신자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비하나 비꼬는 의미가 절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길.
그분은 늘 강조하셨다. “한글에 희망이 있다. 한글을 잘 활용하여 이 나라를 일으키고 잘 살아 보자. 한글 속에 (심지어) 돈벌이 아이템도 있다.”
과연 그럴까?
한글은 어린 시절부터 나의 오덕질 장난감이었다.
내가 비록 언어학이나 세계 문자학의 권위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주변의 메이저 문자들을 살펴봐도 세상에 조형적으로 이렇게 오묘한 문자는 없다. 단군의 후손들이 세계에 가장 강렬하게 내세울 수 있는 자기 정체성이자 고유 아이템은 아무리 봐도 한글밖에는 없는 게 분명해 보였다.
게다가 이런 문자가 그 정도의 수난사를 겪고 변모해 왔다니 피끓는 젊은 청춘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수준이지 않은가?
2. 나의 적성과 진로 고민
그 원동력으로 본인은 지난 13년간 <날개셋> 한글 입력기를 만들었다.
이 분야와 관련된 완전 독자적인 노하우와 기술만 빼면 나는 그렇게까지 뛰어난 프로그래머가 아니며, 어쩌면 IT쪽 체질 자체가 아닌지도 모른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10년쯤 뒤에 난 철도로 업종을 바꿔 있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남들은 다 대기업, 공무원, 의사 등등을 노리는데 난 도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바라고서, 사용자가 1억도 안 되는 자국 문자를 위해 이런 일을 한 걸까?
난 지인들로부터 내 능력에 비해 내가 다닌 대학원이나 지금 다니는 회사의 수준은 아깝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 사람들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허나, 예전에도 이미 내 심경에 대해 토로한 바 있듯, 내가 지금과 같은 처지에 있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그것보다 더 수준 높은 대학원이나 연봉 캡숑 많이 주는 회사에서 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런 게 적성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평양 감사도 자기가 싫으면 그만이다. 내가 박사 진학에 괜히 실패했겠나?
<날개셋> 한글 입력기를 만드는 것 말고 다른 스마트폰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거나, 더 빠른 컴퓨터를 만들거나, 대박 내는 온라인 게임을 만드는 일엔 아무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건 나보다 더 똑똑한 공돌이들이 알아서 실컷 발전시켜 줄 분야들이다.
그렇다고 초창기 몇 년만 좀 허세 부리며 편하게 살자고 나의 피와 땀이 담긴 날개셋 핵심 기술을 대기업에다 홀랑 다 넘긴 뒤, 나중에 토사구팽 당하는 건 더욱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현실과 이상을 나름 가장 잘 절충한 지금과 같은 상황에 있게 된 것이다.
덕업일치를 바라지 않을 거면 차라리 나도 애초에 IT와 무관하면서 적당히 편하게 칼퇴근이 보장되는 공무원 사무직 같은 거나 구한 뒤, 퇴근 후의 개인 시간에 오덕질을 실컷 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은 한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공무원 사무직이 무슨 동네 개 이름처럼 쉽게 구해지는 직업도 아닐 뿐더러, 그랬으면 또 그거 준비하느라 잃었을 기회비용도 만만찮고, <날개셋> 버전 자체가 애초에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올라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 세상에 거저 되는 쉬운 일은 없다.
3. 글꼴 공부 시작
그래서.. 나도 나이가 있고 사회적인 책임이 있으며, 언제까지나 돈 안 되는 오덕질만 붙들고 있을 수는 없다. 어떻게든 내가 하는 일로 부와 명성을 쌓고 싶다. 나도 결혼도 하고 가정도 좀 꾸려야지 이제? -_-;;;
한글을 변형해서 무슨 외국어를 표기하는 문자를 만들고 보급..? 그런 건 지금까지 시행착오를 하도 많이 봐 왔고 이젠 바라지도 않는다.
무슨 맹목적인 한글 쇼비니즘 따위도 허상과 오류를 지금까지 이골이 날 정도로 경험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은 scope을 한국/한국어로 한정한다 해도 정말 뛰어나고 멋진 문자이다. 그냥 관습상 쓰던 것처럼만 활용하는 건 너무 아깝다.
한글로 이런 것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세계에 선보일 만한 아이템이 '아직까지는' 있으며, 남이 먼저 발견한 적은 없는 것 같다.
이걸 발굴하면 아까 그 운동가 선생님께서 부르짖으신 메시지가 실현될 가능성이 단 몇 퍼센트라도 더 높아지지 않을까?
그래서 한글 입력기로 시작한 연구를 출력에 해당하는 한글 글꼴로 끝낼 계획이다. 그래서 한글 공학의 종지부를 찍고 그랜드슬램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박사 과정에 진학을 못 한 대신 자그마한 학원을 다니면서 수업을 듣고, 멘토 교수님과 종종 만나면서 연구를 할 생각이다.
2013년은 본인에게 한글 글꼴 연구의 원년이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