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구. 나 완전 고전 게임 덕후 인증이다. ㅎㅎ

1.
옛날의 액션/아케이드 게임 중에는 주인공을 죽게 하는 각종 트랩들이 적(몬스터)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게 있고, 그렇지 않은 게 있다. 동일하게 적용되는 게 더 공정하고 현실 고증에 더 충실한 시스템이겠지만, 그 경우 적의 AI를 더 똑똑하게 만들어야 게임성이 성립할 테니 개발자에게는 더 큰 난관이 된다. 안 그러면 적을 정당하게 싸워서 죽이는 게 아니라 AI 헛점을 이용해서 트랩으로 죽이는 꼼수가 너무 횡행하여 게임 밸런스가 무너질 것이다.

이런 한계로 인해 id에서 개발한 둠, 퀘이크 등의 몬스터는 용암이나 화학 용액 같은 데에 들어가도 체력을 잃지 않으며 물에 들어가도 익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잘 알다시피 자기끼리 팀킬을 벌이는 몬스터 내전(monster infighting)이 있을 뿐이다. 둠에서는 몬스터들이 정말 무식한지라 내전이 정말 잘 벌어졌지만, 퀘이크에서는 몬스터와 주인공 사이에 다른 몬스터가 일직선으로 있을 때는 공격을 안 하게 일말의 AI 개선이 이뤄졌다.

위험한 데이브에서는 몬스터는 트랩 같은 건 쌈싸먹으며 잘만 날아다니고..
과거의 툼 레이더 게임들은 주인공이 혼자 트랩 퍼즐을 풀어야 하는 구역과 몬스터와 싸우는 구역을 완전히 철저하게 분리하여 논란의 여지를 차단한 사례에 가깝다.
Rick Dangerous 2는 이 점에서 독특하다. 몬스터도 미사일, 전깃줄 같은 트랩에 걸리면 얄짤없이 죽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죽이는 게 전기총(50점), 폭약(100점) 같은 주인공의 일반적인 공격으로 죽이는 것보다 점수도 더 높게 준다(150점).

자, 서론이 너무 길어졌는데.. 페르시아의 왕자는 잘 알다시피 로토스코핑 기법으로 스프라이트를 만들었을 정도로 극도의 현실성을 추구한 게임이다. 악당도 딱히 초현실적인 괴물이 아니라 그저 검을 든 똑같은 인간이며, 이들을 상대로도 가시와 톱날 같은 트랩은 똑같이 동작한다. 악당 역시 트랩에 걸리면 피투성이가 되어 끔살당한다.

악당을 죽이는 방법으로는 (1) 칼 공격으로 HP를 다 깎아서 죽이는 가장 평범한 방법 외에도,
(2) 2층 이상의 높이에서 추락사시키기. 주인공은 이 경우 HP 하나만 잃지만, 악당은 의외로 즉사한다. 그 대신 악당은 1층 높이에서 떨어졌을 때 주인공처럼 무릎을 굽혀 엎드리지 않으며 바로 자세를 잡는다. 일당일단? 그리고 악당이 지금보다 아래 화면으로 떨어진 경우, 시체가 남지 않는다.
(3) 가시 꼬챙이가 있는 곳으로 떨어뜨리기. 한 층 높이에서만 떨어져도 주인공이든 악당이든 다 죽는다.
(4) 허리 자르는 쇠톱날..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악당을 죽이고 나면 '빰 빠밤 빰' 하면서 승전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칼로 찌르든, 떨어뜨리든 어떻게 죽이든지 말이다.
그런데... 페르시아의 왕자에서 악당을 (3)번, 즉 가시에다 밀어넣어 죽인 뒤에 승전 멜로디를 들은 적이 있으신 분 손..??
난 한 번도 없다. 20년 전부터 지금까지 이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가곤 했는데, 갑자기 문득 이상한 점이 느껴진다.

페르시아의 왕자 레벨에서 악당을 (3)번처럼 죽이는 건 레벨 2, 4, 8, 9(두 번), 11에서 총 6군데가 가능하다. 특히 마지막 레벨 11의 경우, 아예 왼쪽과 오른쪽에 모두 가시 트랩과 절벽이 존재하니 악당을 재미있게 요리하는 맛이 더욱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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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을 정상적인 (1)번 방식으로 죽였을 때는 승전 멜로디가 무조건 나온다. (2)나 (4) 같은 트랩으로 죽였을 때는 아주 가끔 음악이 안 나오기도 했던 것 같다.
그 반면 (3)은... 지금까지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 죽든 악당의 HP가 0이 되어 전투가 끝나고 주인공이 칼을 집어넣을 때 승전 멜로디를 연주하면 될 텐데.. 로직을 상황별로 다 따로 처리했나? 그리고 저기서만 if문이 하나 실수로 빠진 건지? 진실은 그 당시 코딩을 했던 프로그래머만이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
자, 이제부터는 가시 말고 톱날 얘기가 줄곧 나올 것이다.
페르시아의 왕자의 일부 던전에는.. 톱날을 통과해 들어간 뒤에 곧바로 칼을 뽑고 악당과 싸워야 하는 곳이 있다. 레벨 4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적과 싸우기 시작했을 때는 게임 진행이 조금 느려지고, 심지어 톱날의 톱질 주기도 약간 길어지는 것 같다.

이것은 시스템 성능 같은 다른 외부적인 문제일 뿐, 게임 메카닉 자체가 느려지는 건 아니다.
페르시아의 왕자는 참 좋은 게, ESC를 눌러서 게임을 일시 정지시키고 나서 계속 ESC를 누르면 게임을 한 프레임 단위로 천천히 진행시킬 수가 있다.
이걸로 측정을 해 보면, 톱날의 톱질 주기는 언제나 15프레임으로 동일하다. 전투 중일 때든, 평시든 말이다.

그리고 심지어 톱날이 여러 개 연달아 동작할 때도 동일하다.
각각의 톱날이 한 번씩 연달아 톱질한 뒤에 첫 톱날의 다음 주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주기가 좀 길 것처럼 느껴지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원작 게임에서야 톱날이 한 층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게 레벨 3의 대형 물약이 있는 방이다. 3개짜리가 최다이다.
유튜브 같은 데서 톱날이 5개가 넘게 있는 이상한 방을 가 보면, 모든 톱날들이 15프레임 안에 한 번씩 순회를 하는 게 불가능하다. 이런 데서는 뒤쪽의 톱날이 미처 톱질을 하기 전에 15프레임을 다 채운 앞쪽 톱날이 또 톱질을 시작한다.
게임 메카닉이 이러하다는 걸 알 수 있다.

3.
또한, 톱날은 주인공이 톱날과 같은 층에 진입한 경우 곧장 동작한다.
그런데 주인공이 그 층에서 다른 이유로 인해 죽어 버리면, 톱날은 일반적인 경우 동작을 멈춘다. 가령, 그 층에 있는 악당과의 전투에서 져서 죽거나, 칼을 뽑지 않은 상태에서 악당의 칼빵을 맞아 죽은 경우 말이다. 톱날이 있는 층에 주인공이 추락사를 했다면 톱날은 역시 더 동작하지 않는다.

하지만 주인공이든 악당이든 누군가가 그 톱날 자체에 찍혀 죽었다면 톱날은 계속 동작한다. 다시 말해 누군가를 한번 죽인 적이 있는 톱날은 그 층에서 주인공이 추락사하든 악당의 칼에 맞아 죽든, 주인공이 그 층에 어떤 형태로든 있다면 계속 동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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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치트까지 써 가면서 다양한 상황에서 테스트를 해 보니 대략 그러하다. 알고리즘 차원에서 이런 미묘한 차이도 존재한다는 게 흥미롭지 않은가?

4.
그리고.. 주인공이 톱날이 존재하는 층에 있긴 한데, 추락하느라 잠시 지나는 형태라면 톱날은 어떻게 동작할까?
톱날은 이때도 반응한다. 레벨 9에서는 심지어는 주인공이 아니라 악당이 떨어지는데도 톱날이 한번 동작하니, 참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아래 그림을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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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면, 주인공이라 해도 이렇게 지나갈 때는 톱날이 동작하지 않는다. megahit 치트를 써서 천천히 떨어지게 하는 낙하산 효과를 줬는데도 톱날이 동작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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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보면, 톱날의 동작 여부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복잡한 로직이 들어간 건지도 모른다. 심지어 던전의 지형별로 톱날의 동작 여부를 제어하는 메타데이터가 수작업으로 들어간 건 아닌지?

5.
아까도 잠깐 얘기했던 레벨 3으로 돌아간다. 여기는 알다시피 최대 HP를 늘려 주는 대형 물약이 있지만, 그 길목을 저렇게 톱날이 무려 3개가 가로막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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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의 왕자에서 레벨 3은 중간 waypoint가 존재하는 유일한 레벨이기도 하다. 죽으면 얄짤없이 처음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라, 타임어택 절벽 관문은 통과한 뒤의 시점부터 시작한다는 뜻. 페르시아의 왕자 2야 각 레벨이 워낙 방대해진 관계로 waypoint가 존재하는 레벨이 더 생긴 편이지만, 1에서는 레벨 3이 유일했다.

레벨 12에도 그림자 인간과 합체하고 나서 Jafar를 만나기 직전 위치에 일종의 waypoint가 있긴 하지만, 이건 내부적으로는 완전 별도인 레벨 13으로 간주된다. 그렇기 때문에 레벨 3의 waypoint와는 약간 성격이 다르다.
관문을 통과하기 전에 대형 물약을 먹었다면, 그렇게 해서 늘어난 HP도 다음에 waypoint에서 게임을 다시 시작할 때 반영된다.

그런데, 여기에 약간의 버그 내지 exploit가 있다.
waypoint에서 게임을 다시 시작하면, 레벨 3의 모든 요소들이 원래대로 되돌아간다. 딱 하나, 그 타임어택 절벽 관문의 한쪽에서 우리가 도움닫기를 위해 밟아 떨어뜨려 없애던 발판만 계속 없는 채로 남아 있다.

그것만 빼고 나머지는 전부 원상복귀. 심지어 타임어택 절벽을 넘기 전에 먹었던 대형 물약도 다시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 레벨로 넘어가는 관문을 열고 해골도 처지한 뒤, 다시 그 방으로 돌아와서 대형 물약을 먹으면.. 이론적으로 레벨 3에서 대형 물약을 두 번 먹어서 HP를 2개나 확장하는 게 가능해진다.

레벨 3 시작 → 대형 물약 → 타임어택 관문 통과 → 그 뒤 Ctrl+A 눌러서 waypoint 지점부터 게임 재시작. 예전에 대형 물약 먹은 게 반영됨 → 되돌아와서 대형 물약 또 먹음 → 클리어

물론 실제로 이렇게 하는 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는 노가다이기 때문에 현실성은 별로 없지만..
이건 아마 조던 메크너(오리지널 게임 설계자, Apple II용 개발자)와 랜스 그루디(도스용 게임 포팅 개발자)조차 그 당시 예상을 못 했던 꼼수일 것이다.
차라리 waypoint 이후에 도달하는 위치에다 대형 물약을 놔 뒀다면 이런 exploit가 틈탈 여지가 없었을 텐데.

자, 이런 글을 보니 나도 도스박스 깔아서 페르시아의 왕자를 실행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드시지는 않는가?

Posted by 사무엘

2014/06/29 08:21 2014/06/29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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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진 2014/06/29 13:29 # M/D Reply Permalink

    이런 신기한 게 있었군요. 당시 여러 번 즐기면서도 몰랐던 것이 많네요. 이제는 조던 메크너의 소스코드가 공개되었으니 애플2 어셈을 알면 분석할 수도 있겠지만 만만치 않겠네요 :)

    1. 사무엘 2014/06/29 15:51 # M/D Permalink

      그 코드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고..ㅎㅎㅎ
      원판을 PC 도스로 포팅한 랜스 그루디 옹에게는 옛날 소스가 없으려나 궁금합니다. PRINCE.EXE는 MS C로 빌드됐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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