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의 왕자와 황금도끼는 1989년에 처음으로 출시됐고 그 이듬해에 PC용도 나온 유명한 아케이드/액션 게임이다. 비슷한 시기에 출시됐고 본인도 30여 년 전의 초딩 시절에 재미있게 했던 게임이다.
전자는 미국산이지만 후자는 일본산이다.
전자는 뭔가 아크로바틱한 파쿠르 퍼즐 액션에다가 칼싸움이 보조로 가미된 정도이지만, 후자는 지형은 단순하면서 그냥 적들을 다양한 공격 기술로 죽여 없애는 전투 위주이다.
둘 다 굉장히 다양한 플랫폼으로 이식됐으며, 2편 같은 속편도 출시됐다.
그 당시의 흔한 관행이었겠지만, 둘 다 영화에서 리소스를 따 온 장면도 있다. (로빈 후드 칼싸움 / 악당들이 죽는 소리)
오늘은 이 두 게임을 나란히 비교해 보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1. 원작 제작자
(1) 페르시아의 왕자: 잘 알다시피 Jordan Mechner라는 미국 뉴요커이다(1964년생). 어느 엄친아 영화학도가 갑자기 컴퓨터에 꽂혀서는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모티브를 따 이런 게임을 혼자 뚝딱 만든 것이다. 그리고 제품의 유통사를 찾다 보니 브로더번드 소프트웨어와 계약을 맺었다.
단, 주인공의 동작 모션을 자기 남동생한테 연기시킨 뒤, 그걸 촬영해서 한땀 한땀 도트 노가다로 입력했다는 것,
그리고 음악 작곡은 심리학자이던 아버지가 했다는 건 유명한 일화이다. 그야말로 가족이 게임 개발에 참여한 셈이다.
(2) 황금도끼: SEGA에서 게임 개발자로 정식으로 근무하던 Uchida Makoto (마코토 우치다, 1955년생)라는 일본인이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대여섯 명 남짓한 팀을 이끌며 개발한 게임이다. 세계관이 '코난 더 바바리안'(1982)이라는 영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저 사람은 현재까지도 SEGA의 중역으로 근무하고 있는 모양이다. 닛산 자동차의 CEO라 하는 1966년생 동명이인과 혼동하지 말 것.
2. 원작의 개발 플랫폼
(1) 페르시아의 왕자: 잘 알다시피 8비트 Apple II였다. 열악한 8비트 컴터에서 뭘 바라겠는가..? 화면 해상도는 320*200이 채 되지 않았고, 색깔도 끽해야 최대 4색이었다. 1980년대 말이라는 당대 기준으로도 하드웨어 환경이 후져 있었다.
그러니 얘는 원판이 아니라 후대의 이식작에서 그래픽이 훨씬 더 개선되면서 인기를 끌게 되었다.
(2) 황금도끼: 페르시아의 왕자는 태생이 PC인 반면, 황금도끼는 태생이 오락실 오락기였다. SEGA System 16이라는 1985년작 오락기 전용 16비트 CPU를 기준으로 개발됐다.
8비트 대비 16비트라는 우월한 체급에다, 아마추어 프로그래머가 아닌 전문 개발자가 만들었지, 오락기 CPU는 PC보다 그래픽도 더 특화돼 있다 보니 황금도끼는 모든 여건이 페르시아..를 능가했다. 원작부터가 PC의 VGA를 능가하는 수백~수천 컬러 그래픽을 지원했다. 이식작들은 원판에 비하면 그래픽이 퇴보하면 퇴보했지, 더 나아진 경우는 별로 없었다.
페르시아의 왕자를 오락실에서 동전 넣고 플레이 했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ㅎㅎ
그게 오락실용이었으면 마릿수 잔기와 컨티뉴가 존재해서 죽을 때마다 press key to continue가 아니라 insert coin to continue가 됐을 것이고.. 애초에 "1시간 동안 무한대 잔기" 같은 시스템 자체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동전을 넣을 때마다 시간이 10분 더 추가된다거나..;;
3. PC (MS-DOS) 버전 포팅
(1) 페르시아의 왕자: Lance Groody라는 미국인 프로그래머가 작업했다. PC의 화려한 256색 VGA 그래픽은 게임의 가치를 한층 끌어올려 줬다.
타 플랫폼 중에서 SNES용은 게임 스케일이 리메이크· 마개조에 가깝게 커졌으며.. 매킨토시용은 색깔뿐만 아니라 그래픽의 해상도도 크게 향상되었다.
(2) 황금도끼: John & Ken Sanderson라는 미국인 친형제 프로그래머 2인이 작업했다. 하지만 그래픽이 단조로워진 건 그렇다 쳐도, 각종 공격 동작도 많이 삭제되고 단순화되어서 오락실 원판에 비해서 게임성과 재미가 많이 깎였다.
얘는 오락기 지향적이어서 그런지, 매킨토시용으로 포팅되지는 않았다.
한편, 저 사람들 모두 1980년대 8비트 어셈블리어 시절부터 현재의 모바일 시대에 이르기까지 3~40년째 컴터 프로그래머로 쌩쌩히 현역을 뛰고 있는 걸출한 엔지니어인 것 같다. 검색해서 사진을 보니 서로 좀 비슷하게 생겼다..;;
도스용 페르시아의 왕자는 실행 파일이 C 컴파일러로 만들어진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황금도끼는 내 기억이 맞다면 딱히 그런 정황이 없고 여전히 근성의 어셈블리어가 사용된 것 같다.
저 때는 16비트 컴만 해도 엄청 비싼 고급 기종이고 C 컴파일러조차 사치였으며, 메모리를 겨우 몇천~몇만 바이트를 할당하는 것에도 실패할 가능성을 따지면서 전전긍긍해야 했던 시절임을 기억하도록 하자.;;
4. 후속작
(1) 페르시아의 왕자: 2편이 나왔다. 원판 특유의 그 2D 방 기반의 진행 시스템은 2편이 마지막이었으며, 그 뒤부터는 3D로 바뀐 후속편이 더 만들어져 나왔다.
(2) 황금도끼: 2편과 3편이 나오고 3D 리메이크 및 대전 액션 에디션(duel)도 나왔다. 하지만 후속작들은 원판에 비해 그리 좋은 평을 못 들었다. 얘들은 PC와도 연을 끊었기 때문에 컴터로 즐기려면 MAME를 돌리는 수밖에 없다.
5. 여담: 페르시아의 왕자 제작자의 주변 인물들
조던 메크너가 이 게임을 만들던 당시에 그와 오랫동안 동업하면서 그에게 많은 영감을 준 지인 중 하나로는 Tomi Pierce (1953~2010)라는 일본계 미국인도 있었다. 여자이고, 조던 메크너보다 나이도 띠동갑에 가깝게 더 많았던 사람인데..
일례로, 이 누님이 그 당시 개발 중이던 페르시아의 왕자를 찬찬히 뜯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헐?? 난 그 정도로 폭력적인 건 좀.. 게다가 이제 그런 기능을 집어넣기에는 애플2에 메모리도 얼마 안 남았는걸..”
“아 됐고, 꼭 명심해~ combat, combat, combat!! ^^”
조던 메크너의 회고에 따르면, 토미 누님은 그야말로 combat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로 얼굴 마주칠 때마다 전투를 꼭 넣으라고 압박을 넣었다고 한다. (☞ 관련 동영상 링크 10분 45초 ~ 11분 사이 지점)
그렇다. 칼싸움은 원래 계획에 없다가 뒤늦게 추가된 것이었다. 이때는 동생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 모션 촬영을 할 수 없었던지라, 로빈 후드 영화에 나오는 칼싸움 장면을 따서 스프라이트를 만들었다.
이런 일화가 있었고, 나중에 1996년경인가, 조던 메크너가 Last Express라는 대작 게임을 만들 때는 아예 저 누님과 공동으로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그랬는데 Tomi Pierce 누님은 지병이 있었는지 어쨌는지.. 2010년, 50대 중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던 메크너의 개인 블로그를 보니.. 그 당시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억누르며 정말 엄청난 장문의 추모글을 올렸었다. (☞ 링크)
고인은 그야말로 어린 시절부터 천재 엄친딸이었고 SAT 만점에 아이비리그 자유이용권을 끊었었는데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느라 자유분방하게 살았고, 비록 문과 출신이지만 컴퓨터 게임 사업에 눈독을 들였고 어쩌구저쩌구..
투병 중에도 늘 쾌활하고 긍정적이고 유머와 위트와 센스가 넘쳤고, 나도 살아 생전에 이분과 더 오래 있으면서 지혜를 나눠 받지 못해서 아쉽다고.. 구구절절 애도의 글을 써 놨더라.
게다가 더 찾아보니 Tomi Pierce는 브로더번드 소프트웨어의 창립자인 더글러스 칼스턴(Douglas C. Carlston 1947~)이라는 사람과 결혼까지 한 사람이었다.
더글러스는 하버드 학부 출신에 모교의 로스쿨도 졸업한 수재였다. 빌 게이츠는 하버드 중퇴이지만 저 사람은 하버드 졸업생.. 그리고 조던 메크너는 예일대 졸업생..ㄷㄷㄷㄷ
그랬는데 컴퓨터라는 기계에 꽂혀서 안정된 진로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고.. 혼자만 한 게 아니라 자기 남동생 Gary Carlston 및 여동생까지 끌어들여서 삼남매가 나란히 동업을 했다. 그래서 회사 이름도 band of brothers을 살짝 바꿔서 broderbund라고 지은 것이었다..;;
다 이런 식으로 연결되는구나.
참고로 Tomi Pierce의 여동생은 Naomi Pierce (1954~)인데.. 이 사람은 하버드 대학교의 동물학과 교수가 돼 있다.
우리나라의 옛날 석 주명 박사처럼 나비 연구 쪽으로 세계구급 전문가라고 한다.
그리고 Tomi건 Naomi건 저분들은 딱 정확하게 본인의 부모님 연배이다.. ㅎㅎ
이렇게 Tomi가 세상을 떠난 뒤, 조던 메크너는 2011인가 2012년쯤에 페르시아의 왕자 애플 2 소스를 공개했었다. 휴~
그 반면, 황금도끼는 개인이 아닌 상업용 게임 개발사의 프로젝트로 처음부터 진행돼서 그런지.. 이런 정도의 재미있는 개발 에피소드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소스가 공개된 적도 물론 없었다. 아케이드 원판의 롬 파일이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듯..
그래도 페르시아의 왕자 게임을 만든 조던 메크너의 동생 데이비드 메크너.. 황금도끼의 도스판을 이식한 존과 켄 샌더슨.. 그리고 브로더번드 소프트웨어를 창립한 더글러스와 개리 칼스턴.
형제지간인 사람이 이 글에서 세 쌍이나 언급된 것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