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 상묵(1916-1984)이라는 사람은 살았던 시기와 젊은 시절 행적과 프로필이 원조가카(1917-1979)하고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기 때문에 같이 비교해 볼 만하다. 대구 사범학교를 졸업해서 교사를 몇 년 하다가 그만두고 일본군에 들어갔다는 점에서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교사만 해도 수입 안정적이고 명예와 처우가 좋은 매우 훌륭한 직업인데.. 그걸로 만족하지 않고 호랑이굴에 제 발로 들어갔다는 점에서 이건 이례적이었다.

물론 이건 1930년대 말 이후가 돼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일제가 전쟁을 벌이느라 일손이 부족해졌기 때문에 조선인까지 징병제로 징집하기 시작했으며, 더 나아가 황족이 아닌 평민 조선인에게도 일본군 간부가 될 기회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입장에서 조선인에게 총을 믿고 쥐어주고 자기 군대를 맡기기 위해서는.. 내선일체와 조선 민족 정체성 말살 프로파간다를 미치도록 밀어붙여야만 했다.

이 와중에 신 상묵과 원조가카 같은 사람이 나타났다. 이들은 교사가 된 덕분에 또래 청년들과 달리 군대 걱정을 별로 할 필요가 없었다. "징병제 때문에 기왕 군대에 끌려갈 거라면, 더 공부하고 준비해서 병이 아닌 간부로 다녀오자"가 아니었다. 전적으로 자발적으로 입신양명을 위해 일본군 간부에 지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세부 디테일은 좀 차이가 있었다.

신 상묵은 부사관을 지원해서 오장/조장, 지금 국군으로 치면 거의 상사· 원사급에 올랐다. 근무지도 조선의 일본군 헌병대로, 정말 대놓고 항일 인사들을 고문하고 동족을 괴롭히는 경찰 같은 군인 보직을 맡았다.

1940년대 일제 말기에는 한반도 내부에서 옛날 같은 수준의 독립 운동이야 이미 씨가 마른 상태였다. 그저 일부 자잘한 비밀 결사 수준의 국지적 저항이나 있을 뿐이었는데.. 그 중 하나였던 "무궁당 사건"의 수사와 피의자 취조를 이 사람이 했다. 당연히 악랄하게 했다. 이런 바닥에서 조선인이 단순히 헌병 보조원 끄나풀을 넘어서 최상위 간부 계급에 짧은 시간 만에 도달한 것은 아무래도 구린 실적이 좋았던 덕분일 것이다.

2.
그에 비해 박 정희는?
부사관보다 더 되기 어려운 장교가 되기 위해서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만주 군관학교를 거쳐 일본 육사를 들어갔다.
그는 거기서도 성적 우수자여서 온갖 특혜가 주어졌지만, 최소한 조선 본토에 오지 않았으며 타지에서도 있지도 않은 동족 독립군이 아니라 중공군과 싸우러 갔다. 하긴, 한 나라의 육사까지 나온 장교에게 겨우 헌병은 완전 재능낭비의 비전투 한직 병과일 테니..

요컨대 원조가카는 신 상묵보다 더 노력해서 더 높은 지위에 올랐지만, 신 상묵보다 훨씬 덜 악질적으로 일본군 복무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긴 칼 차고 돌아와서 교사 시절에 자기를 깔보고 무시하던 일본인 동료들에게 설욕을 했다.

이 정도면 그의 의도는.. 본인이 누차 강조하지만 그냥 현실 불만족으로 인한 출세욕, 신분 상승 욕구였을 뿐이다.
오늘날로 치면 카이스트 졸업하고 나서 국내 공돌이들의 처우가 불만족스러워서 로스쿨, 의전을 다시 들어갔거나,
유명 운동 선수가 여러 처우 문제 때문에 외국으로 귀화한 것 정도의 일탈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1940년대에 무슨 스포츠팀처럼 한국군과 일본군을 선택 가능하기라도 했었나? (광복군은 뭐...;; 논외로 하자. -_-)
그 시절에 일제로부터 월급 받는 업종에 종사했던 모든 조선인을 싸잡아 친일파 매국노라고 욕할 게 아니라면, 이 이상의 쓸데없는 친일파 헛소리는 논할 가치가 없다.

3.
그러고 보니 이 종찬(1916-1983)도 저 두 사람과 거의 같은 연배이고 일본군 복무 경력이 있는 사람이다. 다만, 이 사람은 부역자 수준을 넘어 진짜 매국노급 친일파인.. 이 하영의 후손이어서 집이 귀족 금수저 가문이었다. 그는 그런 빽 덕분에 박 정희보다 훨씬 더 수월하게 일본 육사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기를 쓰고 거기 들어가려고 누구처럼 멸사봉공 혈서 따위 안 써도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해방 후에 참 군인 소리 들을 개념 행적을 많이 남겼으며, 이에 대해서는 할배나 원조가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저 사람은 애초에 일본군 복무하던 시절에도 비윤리적인 명령에 대해 "본인은 천황 폐하께서 그런 명령을 내리셨을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소신껏 항명을 할 정도로 강직했다.

4.
또한, 먼저 언급했던 저 신 상묵의 아들이 바로.. 국회의원 출신에다 열린우리당, 더불어민주당 진영에서 지금도 잘나가고 있는 정치인 신 기남이다.
이 사람은 다른 건 모르겠고 지난 2000년대에 한글날의 국경일 재지정에 관심을 많이 갖고 애썼던 덕분에 한글 학회 등 관련 운동 단체로부터 애국자라고 칭송받고 상도 잔뜩 받았었다. 그랬는데 부친의 과거 이력 흑역사가 뒤늦게 알려져서 곤혹을 치렀다.

5.
두 사람 얘기만 하려다가 세 사람 얘기가 돼 버렸는데..
내가 이런 얘기를 다시 꺼내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는 한쪽에다가만 친일파 프레임 씌우는 불순하고 멍청한 수작에 속는 사람이 없길 바라기 때문이다.

이것도 본인의 오래된 생각이고 누차 강조하는 사항인데.. 우리나라가 겨우 1940년대 말 건국 초기에 일제 군경 경력자를 재등용한 것은 Windows 95가 그때 컴터 환경의 한계상 도스/16비트 코드를 그대로 수용했던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당장은 신 상묵 같은 사람이 없으면 안 됐다. 항일 인사를 잡던 그 수사 기술이라도 재활용해서 일본놈보다 더 질 나쁜 빨갱이들을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 상묵은 해방 후에 대한민국에서는 원조가카 같은 군인이 아니라, 경찰 간부가 됐다.

오죽했으면 그 시절에 반민특위를 해체했던 법무부 장관조차도 골수 친일파이기는 개뿔, 항일인사 독립운동가 출신이고 한글 학회에 엄청난 사재를 기부한 민족주의자였다.
필요 이상의 쓸데없는 망상을 30대 나이가 넘어서까지 갖고 있어서는 심히 곤란하다.

Posted by 사무엘

2020/03/04 19:35 2020/03/04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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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에서 ‘만’은 굉장히 요주의 품사통용어이다. 다음 예문을 통해서 구체적인 용례와 띄어쓰기 요령을 익혀 보자. 국어 정서법에서 띄어쓰기는 한자 없이 한글 전용을 주장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잘 숙지해야 하는 개념이니 말이다.

  1. 시간을 사흘만 주십시오.
  2. 사흘 만에 일을 다 끝내겠습니다. (이거 얼마 만인가!)
  3. 그건 충분히 할 만한 일입니다.
  4. 소일거리로 이것만 한 게 없습니다. (집채만 한 파도. 짐승만도 못한..)

해설.
1. 주격 또는 목적격으로 only, just의 뜻을 담고 있는 보조사이다. 제일 쉽다.

2. 이때는 의존명사이기 때문에 띄어 쓴다. 괄호 안의 문장처럼 쓰이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명사라는 게 감이 올 것이다. 접사인 '쯤'하고는 상황이 다르며(이제 얼마쯤 왔지?), '오래간만/오랜만'도 그 자체가 한 단어 명사이다.

3. ‘만하다’가 보조형용사이다. “할 만하지?”처럼 활용도 된다.
참고로, 중간에 ‘도’가 붙어서 “그럴 만도 하다”라고 쓰면 이때 ‘만’은 의존명사이다. 사실상 ‘도’밖에 붙는 게 없는 어정쩡한 의존명사인데, 아까 2번 의존명사와는 별개인 다른 의존명사이다.. ㅡ,.ㅡ;;

4. 이 ‘만’은 1번과 마찬가지로 다시 보조사이다. 다만, ‘-하다/-못하다’와 연결됐을 때는 do ONLY this가 아니라 뭔가 no/nothing more than 같은 비교의 뜻이 될 뿐이다.
심리적으로는 자꾸 ‘만하다’가 한 단어인 것 같이 느껴지는데, 솔직히 나도 그렇다. 하지만 일단 규정상으로는 ‘만하다’는 3번처럼 용언이 이어질 때에만 허용되고, 체언 뒤에서는 ‘하다’뿐만 아니라 ‘못하다’도 올 수 있다는 점이 감안되어 둘을 띄우게 되었다.

끝으로, 위의 모든 규정에도 불구하고 형용사 ‘볼만하다, 이만하다, 쥐방울만하다, (고만)고만하다, 웬만하다’ 같은 단어는 용례가 굳어진 한 단어로 간주되어서 사전에도 등재되어 있고, 몽땅 붙여 쓴다. ㅡ,.ㅡ;;

그러므로 한 단어가 아닌 일반적인 상황에 대해서 총정리를 하자면..

  • 기간 한도를 나타내는 체언 뒤에서는 띄우고(2번)
  • ‘-ㄹ’로 끝나는 용언 뒤에서도 띄운다(3번).
  • 그 밖에 한정이나 비교의 뜻으로 체언 뒤에 나올 때는 보조사이기 때문에 붙인다고 생각하면 되겠다(1, 4번).

그러고 보니 '뿐'도 조사(너뿐..)도 되고 의존명사도 돼서(그럴 뿐) 띄어쓰기를 아주 복잡하게 만드는 단어이며, '한', '못' 이런 것도 어디서는 각각 독립적인 관형사와 부사였다가 어디서는 그냥 한 단어의 어근/어간이어서 사람 헷갈리게 하기 딱 좋은 단어이다.
글이 좀 짧은 것 같으니, 보너스로 이런 문법 놀이를 몇 가지 좀 더 하고 글을 맺겠다.

(1) 가량: 접미사이다. '쯤'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명사가 아님.

  • 사람이 열 명쯤 모였다.
  • 사람이 열 명가량 모였다.
  • 사람이 열 명 정도 모였다. (정도程度: 일반명사)
  • 사람이 열 명 남짓 모였다. (남짓: 의존명사 겸 형용사! '남짓한'일 때는 형용사이지만 '남짓 되는'일 때는 명사이다.)

(2) 커녕: 이것 자체가 조사(보조사)이다. 부사가 아님.

  • 사람커녕 쥐새끼 한 마리 안 보인다. (원래 이렇게 쓰는 단어임.)
  • 사람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 안 보인다. (강조의 의미로 앞에 은/는이 붙었음)
  • 사람은 물론 쥐새끼 한 마리 안 보인다. (물론: 부사)
  • 사람은 고사하고 쥐새끼 한 마리 안 보인다. (고사하고: 부사. 학교 문법에서는 이건 불완전동사도 아니고, 통째로 단독으로 부사로 친다.)

오늘날은 '막론'도 '막론하고'의 형태로만 쓰이는 것 같지만 이건 '고사하고'처럼 완전히 이 형태만으로 굳어졌다고 보지는 않는 듯하다.

그리고 기왕 생각난 김에 보너스로...
언어학에는 구(phrase)와 절(clause)처럼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다르고 헷갈리는 용어 pair가 있다. 어근과 어간도 그런 예에 속하는데..

어근(뿌리 root)
단어에서 접사를 제외한 핵심 부분을 말한다. 어근은 단독으로도 쓰일 수 있지만 접사는 그렇지 않다. 접사는 붙는 위치에 따라 접두사(un-, de-, en-) 또는 접미사(-less, -ness)로 나뉘며, 접사가 붙은 단어를 흔히 파생어라고 부른다.
영어의 경우, 화자가 생소한 파생어를 일부러 필요에 따라 창조해 냈다면 접사와 어근을 하이픈으로 연결하거나, 둘 중 하나를 대문자로 쓰곤 한다. 이게 한국어 관행으로 치면 한자를 괄호 안에 병기하는 것과 비슷하다.

어간(줄기 stem)
얘는 한국어에서 동일 용언(동사와 형용사)이라면 온갖 활용 형태와 무관하게 변함없이 고정돼 있는 앞부분을 말한다. 어절에서 어미를 제외한 핵심 부분이다. 가령, ‘먹으면, 먹어서, 먹다’에서 ‘먹’ 부분이다.
어간은 그 자체가 접사과 어근으로 더 쪼개지는 파생어일 수 있다. 그러므로 어간은 어근보다 더 큰 구분 단위이다.

근이니 간이니 하니까 소리도 비슷하게 들리고 헷갈린다. 하지만 용어가 모두 식물의 외형을 본따서 만들어졌다는 걸 생각하면 곧바로 직관적으로 이해가 될 것이다. 지하의 뿌리에서 지상의 줄기가 자라고, 줄기로부터 가지들이 뻗어 나가는 걸 떠올려 보라.

어근과 어간은 말 그대로 언어의 ‘근간’을 형성하는 구성요소이다. 내장 간(肝)도 아니고 줄기 간(幹)은 좀 생소한 한자 같지만 우리 주변에서 생각보다 자주 볼 수 있다. 뿌리-줄기뿐만 아니라 줄기-가지 관계도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교통에서 얘기하는 간선-지선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0/03/02 08:35 2020/03/0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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