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운전자들

1. 최초의 여성 운전자

조선에서 갑오개혁이 일어나기도 한참 전이던 1886년, 독일의 공돌이 발명가 칼 벤츠는 인류 최초로 상용화된 내연기관 자동차를 개발해서 세상에 내놓았다. 증기 기관차만치 거대하지 않고, 그렇다고 말이 끌지도 않는 아주 기괴한 디자인의 수레?를 선보인 것이다.

'벤츠 페이턴트 모터바겐'이라는 이름의 삼륜차는 954cc짜리 단기통 휘발유 엔진으로 최대 출력은 겨우 0.75(초기형)내지 2마력(후기형??), 변속기는 2단에 최대 속도 16km/h 남짓밖에 안 됐다.

20여 년 뒤에 조선 땅에 들어온 순종 어차도 거의 5000cc급 배기량으로 최대 출력은 3~40마력대밖에 안 됐던 걸로 기억한다. 요즘 승용차가 저런 배기량이면 마력수 뒤에 0이 하나 더 붙을 텐데..;;
그리고 요즘 954cc면 그냥 경차 배기량이고, 그걸로도 70마력 정도는 나올 것이다. 이게 바로 100년이라는 세월이 만들어 낸 기술력의 차이이다.

그 시절의 자동차 발명가들은 기술적인 난관뿐만 아니라 교통사고의 증가로 인한 규제, 기존 마차 업자들과의 마찰, 사람들의 회의적인 반응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그런데 그때 칼 벤츠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 조력자는 그의 아내인 '베르타 벤츠'였다.

약혼 시절부터 결혼 자금까지 동원해서 남친의 창업 자금을 대 주고, 결혼해서 애도 다섯이나 낳아서 키우고..
남편의 발명을 격려하기 위해 1888년 8월 5일엔.. 애들 둘만 태우고 남편 몰래, 성인 남자 없이 혼자 직접 '모터바겐'을 몰고 약 106km 떨어진 친정집까지 다녀오는 근성의 대장정을 감행했다! 이 기괴한 자동차만 있으면 나 같은 아녀자도 간편하게 장거리 이동을 할 수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서.

사용자 삽입 이미지

중간에 차가 퍼지면 "어머 오또케 오또케.. ㅠㅠㅠ" 퍼질러앉은 게 아니라, 직접 뚜껑 열어서 차를 수리하고 땜질하고.. 연료가 떨어지면 주변 약국에서 휘발유인지 벤젠인지를 사 와서 해결했다. 덕분에 이분은 세계 최초의 여성 운전사.. 그리고 그 약국은 세계 최초의 자동차 주유소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획득했다.

베르타는 남편에게 "자기야, 나 자기 차 혼자 몰고 친정집에 잘 갔어!"라고 전보를 보냈고, 사흘 뒤에 자가운전으로 귀환도 무사히 했다.
칼은 너무 감격해서 일기에 "She drove more than a car, she drove an industry" 라고 썼다고 한다.
거의 "One small step for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같은 대사가 아닐 수 없다.

그 뒤로 벤츠는 성능이 더욱 개량된 자동차를 개발하고 갖가지 특허를 따면서 승승장구 했다. 세상을 바꿔 놓은 자동차 산업의 태동기를 주도했던 여걸의 이야기가 어찌나 멋있게 들리는지!
그나저나 요즘 벤츠 승용차에 4MATIC은 승용차 주제에 찦차처럼 사륜구동도 된다는 뜻이었군. 처음 알게 됐다.;;

  • 차량 제작사에서는 진작에 이 일화를 짤막한 광고 영화 두 편으로 각색한 바 있다. The First DriverThe Journey That Changed Everything을 참고하자. 그 당시 상황에 대한 실감나는 현장감을 경험할 수 있다.
  • 메르데세스-벤츠에서 '메르데세스'도 여자 이름에서 유래됐다. 다만 이 여인은 차량의 개발에 직접적으로 영감을 주거나 기여한 인물이 아니다. 자세한 것은 타 사이트의 글을 참고하라.
  • 벤츠는 저런 훌륭한 부인의 내조를 받으면서 자동차를 개발했지만, 그로부터 10~15년쯤 뒤에 미국의 라이트 형제는 "비행기와 부인을 둘 다 신경 쓸 시간은 없다"...;;는 지론과 함께 평생 독신으로 살며 비행기를 발명했다. 단지, 교사이던 여동생의 내조를 받긴 했다. 공돌이들의 인생은 그냥 케바케인 것 같다.
  • 독일에는 어째 유명한 약국이 몇 군데 있다. 세계 최초의 주유소 역할을 한 약국뿐만 아니라, '티거 전차'에서 모티브를 딴 '호랑이 약국'을 운영했던 독일군 탱크 운전수 오토 카리우스도 있기 때문이다. ㅎㅎ (전후에 약사가 됨)

벤츠가 최초로 만들었던 페이턴트 모터바겐 원품이야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기계의 설계도가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에 원품과 100% 동일한 레플리카, 그것도 시동 걸리고 주행 가능한 레플리카가 여러 대 만들어져 있으며, 그게 굴러가는 유튜브 동영상도 있다. 이런 팔팔한 레플리카가 있는 게 후세들에겐 차라리 더 나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자필 원본 따위야 진작에 다 소멸되고 없지만, 원본과 동등한 권위를 갖고 지금도 동일하게 살아 역사하는 필사본과 번역본이 고스란히 보존되어서 전해지고 있다. 다 낡아빠진 죽은 골동품의 형태가 아니다.

2. 최초의 한국인 폭주족

한국인 중에 자동차 과속 폭주족의 원조는 바로 초대 대통령인 이 승만 할배다. 오토바이 말고 사륜 자동차 말이다. 다음 글을 보자.

"... 84세의 프란체스카 여사는 낙엽 뒹구는 이화장 뜨락에서 10월 8일의 ‘결혼 50주년’을 앞두고 대통령과의 카라이프를 회고한다." (☞ 링크)

그이는 난폭에다 지독한 과속운전을 했죠. 그러나 나를 보고는 ‘당신은 실키 드라이버야’라고 칭찬을 했어요.
독립운동을 하느라 밤낮없이 넓은 미국 땅을 돌아다닐 때였어요. 그이는 여기 저기 약속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운전대만 잡았다 하면 과속에다 난폭 드라이버로 돌변했어요. 시속 140km 이상은 예사였지요.

“제발, 오 제발... (please)”
“여보, 뒤를 보지 말아요. 나를 믿으시오.”

이때 순간적이지만 ‘이분과는 헤어져야겠다’라고 생각했어요. 차를 탈 때마다 간이 콩알만 해지니 살 수가 있어야죠.


참고로 프란체스카는 할배 이전의 독일인 남편도 '카레이서'였다. (헬무트 뵈룅.. 이혼)

경찰은 연설을 마치고 나오는 우남은 쳐다보지도 않고 나를 향해 말했어요.
“기동경찰 20년에 내가 따라잡지 못한 최초의 교통법규 위반자는 당신 남편이오. 일찍 천당 안 가려거든 부인이 조심시키시오.”


인터넷에 굴러다니는 이 일화의 출처는 월간 자동차생활 1984년 10월호이다.
자동차생활은 바로 전인 1984년 9월에 창간됐다! 창간되자마자 거의 곧장 할배의 폭주족 일화를 소개했다는 게 매우 흥미롭다.
표지를 보면 "특별 취재 -- 대통령의 첫 번째 운전사는 나, 프란체스카였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제로 올라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저 시절 미국의 자동차들은 성능과 제원이 어느 정도였을까?
미국 GM에서 1936년에 제작했던 수동 변속기의 원리 고퀄 강의 동영상을 보면.. 서민용 승용차에 변속기는 꼴랑 3단까지 있고, 속도계 눈금은 시속 100마일, 160km/h까지 적혀 있었다. (9분 18초 지점)

진정한 선각자는 1800년대 말에 이미 민주주의를 생각하고 감옥에서 영한사전을 만들고 독립정신 책을 썼다. 그리고 1930년대 자동차로도 시속 140~160을 밟았다. 그러면서도 교통사고는 당연히 전혀 내지 않았다.

할배 대통령을 존경하는 후예라면 무슨 나라를 세우거나 구하는 일은 못 하더라도.. 할배가 남겨 준 자유를 누리면서 훨씬 더 성능 좋은 자동차와 훨씬 더 잘 닦인 고속도로에서 못해도 시속 200은 밟아 줘야 하지 않겠는가?

3. 최초의 경부 고속도로 폭주족

세월이 흘러 대한민국도 산업화 근대화의 길을 갔으며, 원조가카의 영도력 하에 경부 고속도로라는 게 개통했다. 이 도로에서 악셀을 사정없이 밟은 최초의 폭주족은 바로.. 20세기 중반을 풍미한 톱스타 배우인 신 성일 씨였다. 이 사람도 한 스피드 했었다.
그는 겨우 34세의 나이로 얼마나 성공해서 억만장자가 됐는지.. 1960년대 말에 이미 집값보다 더 비싸던 빨간 외제차 포드 머스탱(무스탕)을 자가용으로 뽑았다.

그 옛날에 남한에서 8기통에 7300cc가 넘는 배기량의 차량이라니.. 그 시절에 새나라 내지 도요타 코로나 같은 일반적인(?) 승용차가 20~30만 원대였고 이것만으로도 서민들이 범접할 수 없는 사치품이었는데, 신 성일의 애마의 가격은 그런 차량의 2~30배에 달하는 무려 640만원이었다고 한다. 지금으로 치면 람보르기니 포르셰를 넘어 롤스로이스니 부가티 급이나 마찬가지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경부 고속도로가 전구간 개통됐던 1970년 7월 7일에 원조가카 일행은 부산에서 서울로 고속도로를 타고 올라왔다.
그런데 신 성일은 그 날 반대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고속도로를 시속 200으로 밟으면서 딱 중간 지점인 영동-추풍령 일대에서 대통령 일행을 쌩~~~~~ 하고 지나쳐 가 버렸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1970년에 한국 땅에서 말이다. 대통령의 스케줄과 동선을 알기도 쉽지 않던 시절에 시간 계산을 꽤 절묘하게 해서 일부러 대통령 일행을 마주보며 초고속으로 쓱 스쳐 지나가는 똘끼를 부린 것이다. (☞ 관련 기사)
버스나 트럭이 아니라 웬 외제 승용차가 고속도로 개통 당일에 대통령이 보는 앞에서 이 따위로 과속 폭주를 하다니.. 원조가카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뭐야 저건..? 저 차 운전자를 잡아 왓!" 호통을 쳤다.

그렇잖아도 무려 1970년에 대한민국 땅에서 저런 짓을 할 수 있는 갑부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차량 번호를 몰라도 대략의 차종과 색깔만으로도 곧장 추적해 낼 수 있었다.
운전자가 배우 신 성일 씨라는 얘기를 듣자, 원조가카는 고개를 저으며 "젊은 친구가 ㅉㅉㅉ.. 오래 살고 싶으면 운전 좀 살살 하라고 그래" 하면서 넘겼다고 한다.

자기 말고는 자동차가 없다시피하고 과속 단속 카메라 따위도 하나도 없었을 그 긴 도로를 혼자 200을 밟으며 달렸다니.. 정말 부럽지 않은가? 1970년이면 안 그래도 콩코드 초음속기에 아폴로 우주선이니 하던 시절이었는데..
나도 야밤이나 새벽에 그렇게 풀 악셀 밟으면서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싶다. 과속과 과식은 매우 훌륭한 스트레스 해소 수단이기 때문이다.

단, 얼마 못 가 석유 파동이 벌어지자 국가에서는 고배기량 차량을 사치품으로 간주하여 온갖 방법으로 규제했으며, 극도의 기름 절약과 내핍을 강조했다. 꼴랑 2000cc 배기량을 6기통으로 구현하기도 하던 시절에 장관들의 관용차를 4기통 엔진 차량으로 제약했을 정도이니 말 다 했다.
그때는 신 성일 씨도 어쩔 수 없이 머스탱을 처분하고 자가용을 작은 국산차로 바꿔야 했다고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21/01/02 08:36 2021/01/02 08:36
, , , , , , , ,
Response
No Trackback , 2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838

서울 지하철 6호선 역촌 역의 4번 출구로 나가면 ‘은평 평화 공원’이라는 자그마한 공원이 있다. 지하철역 출구에 곧바로 자그마한 도시공원이 꾸며져 있는 건 대전 서대전네거리역과 비슷한 느낌이다.
저기는 2010년부터 공원으로 개장했고 그 전엔 그냥 평범한 건물 부지였던 것 같다만.. 은평구에서 무슨 생각으로 공원을 만들었나 모르겠다.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데 말이다.

아무튼, 은평 평화 공원의 한쪽 구석에는 윌리엄 해밀턴 쇼(1922-1950).. 라는 6 25 참전용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 대단한 집안에 너무 존경스럽고 대단한 분이었다.
일단 부모가 한국에 온 감리교 선교사였고, 저 사람을 평양에서 낳았다.
그는 한국에서 자라서 대학교까지 들어갔는데 2차 세계대전 땐 해군 장교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했다. 그 뒤에 한국에서 또 6· 25 사변이 터지자 대학원 박사 학업까지 미루면서 해병대 장교로 참전했다.

1950년 9월 22일,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고 서울 수복 전투가 벌어졌을 때.. 이분은 녹번동.. 바로 이 일대에서 전투를 수행하다가 적으로부터 저격을 당해 전사했다고 한다. 김 재현 기관사(1923 ~ 1950. 7. 20. 대전)와 비슷한 연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부모, 그리고 저 사람(아들)까지 모두 현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혀 있다. 호머 헐버트처럼 말이다.

“내 친구 나라 한국이 위기에 처했는데 같이 도와주지 않고 나중에 전쟁이 끝났을 때 슬그머니 선교사로 들어가는 것은 제 양심상 도저히 용납할 수 없습니다.
성경도 ‘사람이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라고 말하지 않습니까(요 15:13)? 공부는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 뒤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같이 적힌 약력과 소개글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런 사람이 소개돼 있다는 것만으로도 은평 평화 공원은 찾아가 볼 가치가 충분하다. 우연인지 뭣 때문인지, 은평은 이름을 구성하는 한자부터가 grace & peace 굉장히 성경적인 심상이 담겨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저분은 천수를 누렸으면 하버드에서 한국학 전문 연구자의 커리어를 쌓았을 것이고, 아마 그 당시 하버드에서 한국학을 개척하고 있었던 서 두수 교수(서 남표 카이스트 전 총장의 부친!) 같은 분과도 인연이 분명 생겼지 싶다. 이를 생각하면 더욱 아쉽고 안타깝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응? 이 완용..????)

위의 저 말은 두고두고 기억되고 영원히 감사와 존경과 칭송을 받았으면 좋겠지만...

“적이 핵이나 미사일 얘기를 할수록 우리는 더욱 강하게 평화를 외쳐야 한다.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 한복판에서도 평화를 외치는 사람만이 더 정의롭고 정당할 수 있다”


잠깐 욕 좀 퍼부어야겠으니 독자 여러분의 너그러운 양해를 구한다.
이런 하드코어 빨갱이 씨발새끼의 저주받을 암 유발 망언은 두고두고 박제되어서 영원무궁토록 규탄과 개쌍욕을 쳐먹었으면 좋겠다. 저런 새끼는 애국시민과 자유를 되찾은 동족 북한 주민들의 분노의 돌탕질에 맞아 대가리가 깨져 뒈지기를 개인적으로 간절히 바랄 뿐이다.

만약 이 땅에서 정의가 실현되지 못해서 저런 놈이 천수를 누리고 편하게 죽고 무덤까지 만들어진다면.. 묘비에다가는 저 말이라도 꼭 새겨 넣어 줬으면 좋겠다.

나는 다시 말하지만 온라인 공간에서 빨갱이가 아닌 다른 사유로는 결코 욕설을 노출하지 않는다. 뭐 독도는 일본땅? 저런 진짜 개씹창 망언부터 참교육 시켜 주고 난 다음에 대응해도 전혀 문제될 것 없다.

Posted by 사무엘

2020/12/14 08:35 2020/12/14 08:35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830

1. 할배에 대한 밴 플리트 장군의 인물평 / 증언

본인은 맹목적인 사대주의를 권장· 조장할 의도는 없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외국(특히 미국)에서 좋은 평판과 예우를 받는 사람이나 물건은 실제로도 매우 훌륭한 인물이거나 우수한 물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국의 정치인과 군인들이 더 깍듯이 받들어 모시던 백 선엽 장군이라든가.. 이 글에서 다룰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건국 대통령 할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resident Syngman Rhee is worth his weight in diamonds. That describes him in a nutshell. (리 승만 대통령은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자기 체중만 한 다이아몬드의 값어치가 나가는 인물이다.)

저 문구를 오래 전부터 어디선가 보긴 했었는데.. 출처를 찾아보니 바로 나온다. 주작이 아니었다~! ㅠㅠㅠㅠ

  • Christian gentleman
  • his whole life has been devoted to the liberation of his country
  • the true meaning of a long and selfless life devoted solely to the welfare of other people -- Korean people) 오로지 동족의 안녕을 위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기 인생을 통째로 바친 위인
  • great patriot 위대한 애국자
  • the immortal Messiah of Korea 한국의 구세주
  • 한국의 마하트마 간디
  • I deem it a very great honor to be called friend 내가 할배의 지인이라는 사실이 영광스럽다.
  • has so much wisdom ... it makes us feel like small boys around him. 워낙 노련 현명한 사람이어서 우리가 그냥 허접 쪼렙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리고 그 유명한 '고문관'이라는 단어가 여기서 유래됐구나~!! ㅋㅋㅋ Komunkuan

"세계에선 극찬하는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을
우리나라만 독재자라고 쌍욕한다.
더 심각한 건,
현재 존재하는 북한 김 정은에 대해선
평화적으로 함께 가야 한다고 말한다.
악마 김 정은보다 자국 건국 대통령을
죽일 듯 흥분하는 나라
는 우리나라가 유일무이하다.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다..."


난 이런 착한 독재가 있다면 단임 직선제 그런 거 없어도 되니 독재 치하에 좀 있고 싶다. 북괴 같은 독재 말고.

할배 대통령에 대해서 꼬리처럼 따라다니는 매우 저열한 중상모략 누명 낙인을 둘 꼽자면 단연 (1) 친일파 청산(?) 문제와 (2) 6 25 개전 초기의 피난과 한강 다리 폭파 타이밍 문제이다.
이에 대해 본인은 (1) Windows 95가 램 4~8MB짜리 PC에서 도스 호환성까지 맞추면서 겨우 돌아가기 위해서 16비트 코드를 재등용했던 것하고 완전히 똑같은 현상이다. 조 병옥, 이 인 같은 애국지사도 괜히 반민특위를 해체시킨 게 아니다.

(2) 방송국의 피랍 등 여러 착오들이 겹쳐진 불운이었지만 악의적인 짓은 절대 아니었고 저 사람은 자기 고국을 절대로 버리지 않았다는 것 위주로 변명과 실드를 갖추고 있다. 특히 중공 입국을 고의로 막지 않아서 우한 폐렴 초기 방역을 완전히 망친 현 정부를 비판하지 않는 진영논리 정치병자라면 6 25 개전 초기의 실책도 비판할 자격이 없다.

이것들은 반일정신병과 합쳐져서 사람들 정신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는 망상 정신병이며 망국병이다.
사람 뇌를 컴퓨터에다 비유하자면 저건 친중종북이라는 악성코드가 침투하는 주요 보안 취약 지점이다. 정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짓을 반박해 주고 헛소리들을 잠재워야 한다.
좌좀좌빨의 잘못되고 왜곡된 역사관과 가치관의 거의 전부가 할배에 대한 증오심에서 시작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2. 금별과 똥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 물론 "정말로" 밑에 것들이 지휘 재량을 넘어서는 영역까지 극도로 잘못했거나 자질이 없었을 수도 있다.
군대에서 탈영이나 자살 사고 났다고 닥치고 다짜고짜 무조건 윗대가리 모가지만 쳐서 정말 유능하던 장교의 인생을 망쳐 놓는 것은 문제가 있는 조치이다.

하지만 당사자가 직접, 습관적으로 대놓고 변명이나 틱틱 하면서 아랫사람 탓 핑계 늘어놓는 것.. 짧은 시간 동안 그런 패턴이 계속 반복되는 건.. 우연이나 예외가 아니다. 옛날과 비교했을 때 명백하게 유의미한 변화이다. ---
"높으신 분들이 질이 점점 떨어지고 인성이 타락하고 있다는 것" 말이다.

북괴에서 사격 과녁에 얼굴이 그려지기까지 했던.. 참 군인 금별이 계시던 시절이 너무  그립다.
"니가 중대장이구나? / 고생 많다. 긴장하지 마. 내가 그리 겁나냐? / 적이 도발을 하면.. '쏠까요' 이렇게 묻지를 마. 일단 닥치고 그냥 쏴. 무자비하게 응징해서 도발할 엄두를 못 내게 하라고. 뒤에 책임은 내가 진다." (☞ 그 당시 동영상. 이를 두고 평소에 늘 실망만 하던 중대장이 바짝 쫄아서 긴장했다는 개드립이 나돌았다. ㄲㄲ)

사용자 삽입 이미지

3. K 방역? 과연?

(1) 1950년대 말, 독일에서 '탈리도마이드'라고 임신 여성의 입덧을 기가 막히게 가라앉혀 주는 약을 선보였다.
효과 탁월하고 독성 없고 동물 대상 실험에서 부작용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 당시엔 정말 기적의 발명품으로 여겨졌지만..
알고 보니 얘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었다. 산모는 괜찮은데 정작 배 속 태아가 약의 성분 때문에 사지의 혈관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아 사지가 짤막 뭉툭 오그라든 기형아가 된 것이다!!

이 약 때문에 전세계에서 수천 명에 달하는 기형아가 태어나 버렸지만 그 시절 미국에서는 피해 사례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전혀까지는 아니겠지만..). '프랜시스 켈시'라는 약학자 출신의 FDA(미 식품의약국) 관료가 인체 임상실험 근거 불충분을 이유로, 온갖 집요한 외압을 뿌리치고 이 약의 수입 판매를 끝까지 거부· 불허했기 때문이다.

이분의 소신 판단이 미국에서 기형아 대재앙을 예방했다는 것이 판명되면서 이분은 케네디 대통령으로부터 훈장까지 받게 됐다.

(2) 더 옛날 태평양 전쟁 당시에.. 미국의 해군 정보장교이던 에드윈 레이튼 소령은 일본군이 여러 정황상 진주만을 공습할 것이라고 수차례 보고하고 건의했으나, 상부로부터 의견이 묵살당했다. 결국 진주만은 예고대로 처절하게 털렸다.
물론 이건 전적으로 결정권자이던 상부의 책임이지, 레이튼 소령의 잘못은 아니다. 그래서 태평양 전선 사령관이던 허즈번드 킴멜이 책임을 지고 짤렸다.

그러나 레이튼 소령은 "그때 상부에 더 강하게 건의하고 설득했어야 했다. 나는 건국 이래 가장 처절한 정보전 패배에 책임을 져야 한다"라며 자신을 자책했고.. 더욱 분발하여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하고 분석했다. 그래서 훗날 미드웨이 해전에서는 일본군이 언제쯤 어디로 쳐들어올지를 거의 점쟁이 수준으로 정확하게 알아 맞혀서 전세를 뒤집는 데 성공했다.

(3) 위의 두 사람은 미국의 사례이구나.
자, 그럼 다음으로 지금 우리나라의 질병본부장을 맡아 왔고 이젠 청장으로 승격도 된 그분은..
정치색이나 악의가 없다고 가정한다면 성실한 성격에 고생 많이 하고 있어 보이긴 한다. 세금 아까운 어지간한 먹튀 관료들보다야 나은 건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대기업 인사고과로 치면 B 정도인 평타 월급값만 하고 있는 것이지,
무슨 특출난 선견지명, 희생, 헌신이라든가 천재, 기적 같은 단어로 수식해야 할 영웅 행적으로까지 보이지는 않는다. 특히 저 1, 2번의 인물이 막아낸 것과 이뤄낸 것을 같이 비교한다면 더욱 말이다. 심지어 '악의 평범성'의 범주에나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우려하는 사람도 있는데, 관련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 정 은경과 아이히만)

4. 로스쿨 교수 출신의 점쟁이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떤 중년 여인은 구치소에 갇혀서 아픈 몸을 이끌고 주 4회 꼬박꼬박 재판을 받았구만 저년은 무슨 엄살이냐?
그리고 성경 이후로 이 정도로 완벽한 교리적 적용과 문자적인 예언 성취는 처음 본다. 설마 저것도 영감 받아서 기록됐나...???

난 진짜 많이도 안 바라고..
저 악의 무리들이 딱 심은 대로만, 자기들이 남을 판단하고 남에게 행했던 대로만 정확하게 거뒀으면 좋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쟤가 무슨 군대를 불법으로 빠졌나, 로스쿨 의대 공기업 대기업 같은 본격 신분 상승 코스에 엄마 아빠 찬스 특혜로 들어갔나?
원래부터 등골 브레이커 종목이고 월급쟁이 서민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듣보잡 승마 정도나 기업 협찬 받아서 했던 게 뭐가 그리 잘못인가?

기소조차 못 할 혐의를 가지고 온 국민이 애꿎은 유부녀를 마녀 사냥을 하고 해외 인터폴에 수배까지 하고 얼굴 다 까고 수갑까지 채워서 언론에 대서특필까지 하게 만든 새끼들이... 자기 비리에 대해서는..? 진짜 악마가 따로 없다.
내가 좌빨좌좀 대깨문 부류를 극도로 혐오하며, 죽여야 한다는 급의 극언까지 불사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다.

  • 내로남불 위선이 때려죽이고 싶도록 싫어서(악한 것): 한 70%
    최숭실 vs 조둑 애미추, 북괴 중공 vs 일본 미국.. 잣대가 전혀 일관되지 않음
  • 사상이 옳지 않고 잘못됐으며, 거짓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틀린 것): 약 25%
    우리나라 근현대사 왜곡, 반일 정신병, 동맹과 주적을 서로 뒤바꿔서 인식
  • 나와 생각이 다른 것 자체 때문에 싫은 것(다른 것): 5% 미만

반대편도 비리 저지르고 위선적이기는 마찬가지라고? 말 잘했다. 그러면 네놈들도 똑같이 대통령직 짤리고 교도소 가면 된다. 공평하게 동일한 취급 받으면 나도 이런 글 안 쓴다.
틀린 것만 있으면 나도 정중하게 반박만 하고 말지, 감정적인 반응까지 하지는 않는다.

저 철면피 인간 악마들이 자기들이 입으로 씨부렸던 것, 남에게 들이댔던 잣대를 이제 그대로 되돌려받게 해야 한다는 말(주장, 생각)은.. 악한 생각이 전혀 아니며 정치 편향적인 발언도 절대 아니다.
오히려 음주운전 교통사고 가해자에게 유족들이 엄벌을 탄원하는 것과 비슷한 거라고 봐야 한다!

미국에서 평소에 민간 화재 보험 안 들고 기고만장하다가 자기 집에 불 나니 보험 조합에서 불 안 꺼 주고,
"보험료 몇 배라도 줄 테니 제발 불 꺼 줘 plz" / "안 돼. 그런 요청을 들어 주면 평소에 아무도 보험을 안 들어 놓게 됨."
이렇게 대꾸하는 게 악하거나 비인도 가학적인 사고방식인가? 그게 전혀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와 거의 똑같은 논리 내지 사고방식은 성경에도 있다. 잠언 1장 뒷부분 말이다. 하나님도 남을 조롱하고 비웃을 줄 아신다.
아니, "살아 있을 때 복음 안 받아들이면 죽어서 지옥"이라는 기독교의 그 시스템 자체도 철저하게 이런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깔고 있다.

5. 군함도의 낙서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일제의 군함도 강제 징용 조선인의 애절한 낙서라고 전해지는 이 그림 말이다.
실상은 이 승복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든가 성경의 요한의 콤마(요일 5:7), ‘없음’ 구절 따위가 아니라, 이런 문구야말로 진짜로 “후대”에 “추가”된 주작이다.

“이 낙서는 조선총련 산하 단체인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이 한일수교에 대한 반대 운동의 일환으로 1965년에 제작한 영화 ‘을사년의 매국노’를 촬영하는 가운데 연출된 것이다.
이 영화에 강제연행의 흔적을 담기 위해 제작진 4명이 치쿠호 탄광촌에서 현장 촬영을 했다. 그때 폐허가 된 징용공 합숙소에서 제작진 가운데 녹음을 담당한 여성이 나무를 꺾어 벽에 문제의 낙서를 새긴 것이다.
위조 사실을 상세히 밝힌 西日本新聞의 취재에 대해, 영화 제작진 가운데 한 사람은 당시 폐허가 된 합숙소에서 촬영할 것이 없어서, 제작진이 모두 합의하여 낙서를 새기도록 했으며, 부드러운 필체로 하기 위해 여성에게 쓰도록 했다는 사실을 자백했다.”


쉽게 말해 저건 진실성 신뢰성이 로스웰 외계인 해부 필름의 그것과 동급이라는 뜻이다!!

  • 백범일지의 허위 주작 의심 기록,
  • 청산리 전투의 전과 주작 의심 사항
  • 유 관순 열사의 진짜 사인
  • 만주에서 심지어 일본군이 조선인을 빨갱이들로부터 보호해 줬던 사실

이런 것들도 알 만한 사람들한테는 조금씩 알려지고 있다. 만천하에 다 밝혀져야 한다.
지금은 무려 2020년이다. 아직까지도 거짓 주작까지 서슴지 않는 미개하고 저주받을 반일 정신병은 이 땅에서 제발 좀 근절되고 추방돼야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20/10/20 08:34 2020/10/20 08:34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810

이념 쪽의 여러 생각들

1. '필요만큼 분배'의 허구성

예전에 한번 얘기했던 것이지 싶은데..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만큼 분배한다" 이건 보면 볼수록 절대 실현 불가능하고 잘못됐고 섬뜩한 거짓 선동 구호라는 생각이 절실히 든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의 완벽한 예시 중 하나이다.

저런 문맥에서 '필요'라는 단어는 "하나님은 님에게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님에게 필요한 걸 응답해 주신다" (빌 4:19)이럴 때에나 쓰인다. 마치 '복수/보복'이라는 게 일반적으로 신의 전담 영역이라고 여겨지는 것처럼 말이다. (법과 공권력에 의한 형벌 집행은 제외)
인간이 무슨 하나님인가? 인간이 인간의 필요를 하나님만치 정확하게 알고 하나님만치 공정하게 분배할 수 있나??

하나님이 지금까지 너에게 필요한 것만치 먹을 것과 입을 것 공급해 주신 것(딤전 6:8..;; )에도 지금까지 만족해 본 적이 전혀에 가깝게 없었을 인간들이 어디 필요에 따른 아름다운 분배 운운하고 있는가?

인간이 자기 소유에 대한 책임감이 없이 남의 소유를 지 꼴리는 필요에 따라 분배했다간 무슨 꼴 나는지는.. 대학교 조별과제 해 보거나 각종 공공물품을 자율 비치해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목욕탕 여탕의 수건과 비누, 비행기 기내의 담요, 양심 자전거..) 필패가 입증된 실험을 굳이 또 해 볼 필요가 없다.
마치 인류 최고의 부자 겸 천재였던 솔로몬이 "헛되고 헛되다"라고 결론을 내린 그 실험을 또 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성경 신자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지 않은가?

저건 "사람이 먼저"만큼이나 불순한 무리들의 유명한 기출 문제이다. 그러니 우리는 두고두고 잊지 말고 곱씹으면서 다음에는 쟤들이 또 무슨 문제를 낼지를 생각하고 대비해야 한다.

2. 감언이설

  • 나라에 돈이 없는 게 아니라 세금 도둑이 많은 거다:
    그런데 보통은 그런 말을 하는 놈이야말로 진짜 세금 도둑, 아니 좀도둑을 넘어 세금 대도에 나라 등골 브레이커이다.
  • 성적보다 인성이 더 중요하다:
    부분적으로는 일리가 있는 구석도 있긴 하지만, 이걸 무슨 자랑인양 대놓고 떠벌리는 놈들은 대체로 성적과 인성 둘 다 엉망이고, 특히 인성은 더 쓰레기인 경우가 허다하다.

수천 년 유구한 짬밥을 자랑하는 인간의 죄성이란 걸.. 같은 죄인인 일개 인간이 그렇게 호락호락 순식간에 쉽게 척결 가능할 거라고는 절대 기대하지 마시길. 기대했다간 반드시 실망하고 좌절하게 된다.
개천에서 용 나는 것만 더 어려워진 게 아니라, 방망이 깎던 노인 타입의 외곬수 장인도 앞으로는 더욱 자취를 감추고 찾아볼 수 없어질 것이다.

3. 파벌? 중립?

"나는 정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고 오로지 예수파다" 이러는 사람치고 진짜 중도인 사람을 나는 평생 거의, 전혀 본 적 없다.
저건 "능력만치 벌어서 필요한 만치 분배한다"처럼 그냥 아무한테나 적당히 듣기 좋으면서 현실성 없고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는 궤변으로 오· 남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언덕길에서 자기 혼자만 N으로 해 놓고 브레이크 하나 안 밟고 있으면서 "난 어디로도 치우치거나 끌려가지 않는 중립" 이러는 것과 같다.
고전 1:12 같은 일갈은 어중이떠중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4. 그들의 진짜 관심사

"사회/공산주의자들은 사실 가난한 사람에겐 “전혀” 관심이 없다. 그냥 부자와 잘난 사람들을 증오할 뿐이다."

우와 정말 최고의 팩트폭격 명언인 것 같다.
환경 단체는 사실 환경에 관심이 있는 게 전혀 아니고..
여성 단체는 사실 진짜 여성 인권에 관심 있는 게 절~대 아닌 것과 동일한 이치이다.

똑같이 환경을 파괴하거나 똑같이 여성을 유린해도 그 주체가 누구 편이냐에 따라서 반응이 극과 극으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중국/북한 vs 일본/미국? 여당 야당?

단적으로 말해 그 어떤 골수 페미나 여성 인권 단체도, 위안부 할머니 타령 늘어놓는 그 어떤 박애주의자도, 민주당 정치인이 저지른 성추행이나 중국 국경에서 처참하게 착취당하는 북한 불쌍한 여성들에 대해 목소리를 낸 적이 있던가..?? 전혀 절대 없다.

맨날 분배니 평등이니 외치는 공산주의자들은 실제로는 부의 독식을 추구하는 계급주의자일 뿐이다.
그냥 평범하게(?) 혼자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기만 한 자본가 기업가보다 훨씬 더 교활하고 나쁜놈이다.
내가 대외 이미지 깎이는 것까지 감수하고서 가장 좋은 빨갱이는 죽은 빨갱이라는 극언까지 괜히 공개적으로 하는 게 아니다.

5. 남한과 북한

북한은 자유와 개방과 사유재산과 올바른 통치 체제가 훨씬 더 먼저 절실히 필요하지, 그에 비하면 통일은 0이 몇 개쯤 더 붙을 정도로 덜 중요한 후순위의 문제이다.

마치 옛날에 남한이 북괴의 침략을 막아내고 가난을 떨쳐내는 게 억만 배 이상 더 중요했지, 그에 비하면 대통령 직선제나 민간인 출신 대통령 같은 건 훨~~~~씬 덜 중요한 후순위였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저것만 이뤄지면 민주화 따위는 꼭 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되면 좋지만 굳이 안 돼도 상관없는 옵션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건국 초창기의 할배 시절이건, 군사정권 시절이건 북한에게 아직도 존재하지 않는 사유재산, 신앙의 자유 같은 기본적인 건 애초에 진작부터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하게 절대적으로 명심해야 한다. 그래야 국가관과 이념 논쟁에서 쓸데없는 소리에 '어 그런가 보다' 하고 끌려가지 않을 수 있다.
애초에 통일이라는 것은 당연히 북한을 저렇게 개선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수 없다면 통일 따위 전혀 할 필요 없으며, 꼭 남북 통일을 해야만 북한을 저렇게 개선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6. 전제조건

좌빨들의 선동은 대체로

  • 북한은 아주 평범하고 정상적인 체계이며, 지도자가 백성들을 먹여 살리려고 최선을 다하고 노력하는데도 불가항적으로 불가피하게 못살고 있다
  • 자본가가 근로자들을 강제 감금하고, 때려치우고 나가려는 사람까지 해코지 하면서 부려먹고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다 (진짜 그러고 있는 곳은 따로 있는데??)

이 두 전제조건이 성립해야 말이 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저건 전혀 성립하지 않으므로 그 선동들도 그냥 bullshit이다.

종북 무리들이 "북한이 그렇게 좋으면 그냥 거기 가서 살아라"라는 말을 절대 듣지 않는 것처럼,
악성노조들은 "악덕업주가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그 직장이 그렇게 싫으면 당장 사표 쓰고 때려치우고 나와라"라는 말도 절대로 듣지 않는다. 삼성은 싫지만 삼성이 주는 월급은 좋기 때문이다.

7. 정상적인 외국부터 돼야..

5번의 연장선인 얘기인데.. 남한이 북한과 통일을 하고 싶거들랑 북한을 정상적인 외국으로 만들 생각부터 해야 한다. 정상적인 외국조차 아닌 나라/집단하고 제대로 통일해서 정상적인 한 나라 한 체제를 만든다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
이 생각을 어떤 논객은 "통일의 지름길은 영구분단이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일본이나 중국에 갈 때와 동일하게 북한도 외국으로서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해야 한다. 인터넷도 되고 서신 왕래와 전화 통화도 돼야 한다. 다시 말해 북한은 켕기는 게 없이 개방돼야 한다.
"민간에서는 북한하고 이미 할 거 다 하고 있고 불편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굳이 수뇌부를 합쳐서 정치적으로 통일할 필요가 있나?" 정도가 되면 그때야말로 그놈의 우리 민족끼리 명분으로 슬슬 통일을 논의해도 괜찮다.

개방은 하나도 된 것 없이 북괴 체제는 70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면서 그냥 북에다 퍼주자, 무조건 오냐오냐..
이건 순도 99.99%의 간첩 역적 매국노 빨갱이이니 저러는 놈들은 몽땅 다 쳐죽여야 된다.

8. 같은 잣대

지금 사회 공산주의 친종북 정치인 패거리들이..

(1) 북한에게 무한 관용과 아량을 베풀듯이 어디 한번 "같은 민족"인 탈북자라든가 이명밝근혜 및 그 지지자들도 동일하게 대해 봤으면 좋겠다. 안 그럴 거면 민족드립 좀 집어치우든가..

(2) 맨날 재벌들 삥뜯어서 분배하자고 떠드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지들도 자기 사재 한번 1%라도 기증· 기부 하는 꼴 좀 봤으면 좋겠다.
니들도 왕창 부자인 거 다 알고 있다. 남의 돈을 갖고는 무슨 생색을 못 내겠냐?
자기 돈으로 분배하는 건 선거법 위반이고, 세금으로 분배하는 건 합법인 식인 거...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인다.

9. 대북 전단

대북 전단이 아직도 굉장히 큰 효과를 발휘하고 있으며, 북괴 수뇌부에서 아주 무서워하고 골치아파 하고 있다는 걸 남쪽 빨갱이 정치인들의 저 히스테리한 반응을 보니 간접적으로나마 확신할 수 있다.
연체동물에다가 소금 뿌렸을 때 같은 본능적인 거부 반응 말이다.

그 전에는 솔직히 나조차도 “아이고 저래 가지고 북한으로 제대로 날아가긴 하냐? 보는 사람이 있긴 하냐?”
회의적이었는데.. 정신이 번쩍 든다. 진짜로 가고, 보는 사람이 있고 마음이 움직이는 경우가 있구나.
거리설교 때 나눠주는 전도지 이상으로 효과가 있다.

물론 정치인 말고 접경지역 주민들은.. 조금만 더 애국심이 있었다면 “우리 걱정은 말고 마음껏 뿌려라. 어차피 저놈들도 재래식 병력은 와해된 지경이고 우리 위협 못 한다. 지금 좀 불편 불안을 감내하더라도 저 북괴 정권을 빨리 끝장내야지.”

그랬겠지만.. 호의를 권리로 요구할 수는 없는 법이고, 현실에서는 안 중근 아들 같은 변절자를 마냥 비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건 넘어가자.

일제 시대 때도 권총이나 폭탄 의거 한 건 터지면 그거 보복으로 인근 주민들이 엄청난 불편을 겪었고.. 심지어 독립투사를 숨기고 있다는 누명을 쓰고 마을이 통째로 순삭 몰살당하기도 했다. 그 시절엔 독립투사들도 인근 주민에게 민폐 많이 끼쳤다, 그지?

10. 5 18

생일은 부모님께 감사하는 날이고
5 18은 나라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친 분들을 추모하는 날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1. 일관된 판단

본인은 다음 pair들이 논리적으로 완벽하고 정확하게 동치라고 생각한다.

(1) 교리 일치 없는 종교 통합 에큐메니컬 운동
vs 이념 일치 없는 불순한 남북 화해(?) 협력 짓거리, 퍼주기

(2) 킹 제임스 성경이 소위 original보다 더 낫고 더 우수한 이유 (전자는 실물이 존재, 후자는 현재 실물 없음)
vs 친중종북이 친일보다 더 나쁜 이유 (전자는 실물 존재, 후자는 현재 실물이 사실상 없음)

(3) 사탄 마귀 같은 건 없다. 지옥은 없다.
vs 종북 간첩 같은 건 없다.

(4)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일 3:18)
vs 아가리와 주둥이로만 자기도 김 xx 싫어하고 북한 체제 싫어한다고 말하지 말라. 정말 싫다면 저놈들이 원하는 행동을 하지 말고 반일반미 친중종북 거짓 선동에 끌려가지도 마라.


아이템이 또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일단 여기까지.
예수밖에 구원의 길이 없다고 말하는 종교를 믿는데.. 그 교리를 텍스트로 명시하는 성경도 단 한 종류만 맞고 나머지는 틀렸다고 믿는 게 이치에 맞다. 그리고...

  • 예수님께 그냥 무릎을 꿇느냐 아니면 "경배"를 하느냐, (마 8:2 등 복음서에서 여러 곳)
  • 예수님이 하나님의 종이냐 "아이"이냐, (행 4:27)
  • 사탄의 왕좌냐, 아니면 그냥 "자리"이냐 (계 2:13)

이것처럼,

  • "자유 민주주의"냐 그냥 민주주의냐(혹시 인민 민주주의??),
  • "건국"이냐 정부 수립이냐,
  • "북한 공산 괴뢰"냐 조선 민주주의 공화국이냐

본인은 성경의 변개를 관찰했던 양심과 판단력을 완전히 일관되게 동일하게 적용했을 때, 오늘날 역사 교과서의 변개도 동급의 매우 불순하고 악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저 문맥에서 기어이 '자유'를 뺐다고라..
골 1:14에서 '그분의 피를 통하여'를 삭제한 것과 같은 급의 변개가 아닌가?
6· 25 사변 때 수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뭘 지키려고 그렇게 많은 피를 흘렸는데?

난 늘 강조하지만, 이 바닥은 동일한 방법론을 재귀적으로 일관되게 적용하여 판단한다. 참고로 성경과 역사를 합친 '교회사'도 진영과 관점에 따라 왜곡이 아주 심한 분야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0/09/12 08:35 2020/09/12 08:35
, , ,
Response
No Trackback , 2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795

1. 유 관순 열사의 모습

유 관순은 겨우 100여 년 남짓 전의 근현대 사람이고 초등학교 위인전에서도 언급되는 톱 네임드급 위인인 것치고는.. 검증되지 않은 myth와 알 수 없는 mystery가 의외로 많은 인물이다.
그래서 비교적 최근까지도 추가적인 사료 발굴을 통해 정정된 사항들이 적지 않다. 오랫동안 1904년생으로 알려졌다가 1902년생으로 정정되고, 징역 7년형이던 게 5년으로 바뀌고, 형무소에서의 정확한 사인도 2013년에야 기록을 통해 밝혀졌지 않던가?

그 뿐만이 아니다. 이분은 멀쩡히 서울에서 순국했음에도 불구하고 유해가 남아 있지 않고 생전 모습이 담긴 사진도 극히 드물다.
의열단 내지 한인애국단 소속의 독립투사들이 거사를 벌이기 전에 근사하게 혹은 비장하게 포즈를 취한 사진을 남기곤 했지만(안 중근, 윤 봉길, 이 봉창..) 유 관순은 그렇지 않다.

물론 그녀는 학생이었고, 만세 운동 자체를 "난 오늘만 산다" 급으로 무조건 죽을 각오를 하고 벌인 건 아니었다. 애초에 "난 오늘만 산다" 같은 항일 투쟁 패러다임 자체가 3· 1 운동이 실패하고 이런 만세 시위만으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겠다 싶으니까 등장한 것이다. 또한 그때는 경제력 없는 어린 학생이 사진을 쉽게 남길 수 있는 시절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 1 운동 전날 밤에 유 관순이 자기가 직접 그린 태극기 하나 들고 동지나 친구들하고 포즈를 취한 인증샷 하나 없는 것은 일면 아쉬운(?) 점이다.
오죽했으면, 얼마나 사진이 없었으면 유 관순의 공신력 있는 독사진--단체로 같이 찍힌 것 말고--이랍시고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은 일제가 찍은 죄수 머그샷밖에 없다! 이게 유일하다. 신기하지 않은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뭐랄까, 맹목적인 국뽕 반일 종족주의를 배격하고 조선 시대를 극혐하고 식민지 근대화론을 옹호하는 모 진영에서는 이 사진에 대해서 이렇게 의혹을 제기했다.
그 시절에는 미혼 소녀는 댕기머리이고 기혼 여성은 비녀+쪽머리가 보편적이었는데, 미혼인 유 관순이 왜 유부녀 헤어스타일이냐는 것이다.

유 관순은 안 그래도 저렇게 온통 의혹투성이인 인물인데 저 사진은 애초에 이화학당 학생 유 관순이 아니라 아예 다른 유부녀 동명이인 아줌마가 아니냐는 극단적인 의문까지 제기한다..;; 헐..
황당해 보이지만 완전 터무니없는 얼토당토않은 소리는 아닌 것 같다.

다음은 유 관순의 형무소 동기이던 임 명애 열사의 머그샷이다. 이분은 1886년생으로 유 관순보다 띠동갑 이상으로 나이가 더 많았고 진짜 유부녀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임 명애와 비슷한 연배의 유부녀인 어 윤희 열사도 머그샷이 이와 비슷한 풍이다.
그 반면, 1919년 말과 이듬해에 만세 시위 시즌 2를 일으켰다가 경찰서 정모를 했던 비슷한 연배의 여학생들 사진을 보자. 박 양순, 박 신삼은 명백하게 댕기머리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 경화라는 학생은 댕기를 머리 위로 감아올린 것을 확인 가능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저런 10대 학생들은 얼굴이 명백하게 앳되어 보이는 반면, 오늘날 전해지는 유 관순의 얼굴은 꽤 노안이다. 내가 보기엔 인상으로나 헤어스타일로나 학생보다는 아줌마와 더 어울리는 것 같다. =_=;; 물론 우리는 그 이유가 고문과 구타를 너무 많이 당해서 얼굴이 부어 터졌기 때문이라고 배워 왔다.

그럼 학생과 아줌마의 중간에 속하는 이 사람은 어떨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노 순경 열사는 1902년생으로 유 관순과 동갑이다. 다만, 투옥되었던 당시에 학생은 아니었고, 학교를 졸업해서 세브란스 병원의 간호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딱 1920년 당시에 이분이 벌써 결혼까지 한 상태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아니었던 것 같다. 유명한 사람이 아니어서 구체적인 개인사가 전해지지는 않으나, 이분의 장녀라는 사람이 1920년대 중후반생으로 추정된다. 그 시절의 결혼 생활이 아이 없이 신혼만 5~6년씩 지속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 순경의 헤어스타일은 유 관순과 비슷한 쪽머리이다. 이 정도라면 저 시절 머그샷 사진의 헤어스타일과 당사자의 결혼 여부에 딱 유의미한 상관관계는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겨우 그 정도 의심스러운 정황만으로 유 관순 사진 자체가 가짜라는 결론을 내리는 건 좀 무리일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때는 윤 봉길의 체포 장면 사진을 갖고도 저건 진짜 윤 봉길 사진이 아니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가 재반박되고.. 그 정도 합리적인 의심과 의혹 제기 및 검증은 건전한 학문 발전을 위해서라도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특히 유 관순은 10대 소녀라는 특이한 프로필로 인해 지금까지 잘못 알려진 게 너무 많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최근에 추가로 발견되었다는 유 관순의 이화학당 입학 초기 사진을 첨부하며 이 주제의 이야기를 마치겠다. 이 얼굴이랑 불과 몇 년 뒤의 형무소 머그샷이 동일 인물이라 간주할 수 있겠는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겠다. 이거 무슨 광수 얼굴 찾기 게임 같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2. 주 기철 목사의 일화

예전부터 여러 번 언급한 적 있는 사항들을 다시 정리하자면..
본인은 예수쟁이 신자로서 주 기철 목사를 매우 존경한다. “다섯 가지 나의 소원”이라는 그의 설교문은 오래 전부터 내 타자연습 프로그램의 연습글로도 들어가 있었을 정도이다. 다만,

(1) 저 사람이 대단한 거지, 그 당시에 가족을 동반한 집요한 협박에 못 이겨서 신사참배에 타협한 다른 사람들을 ‘도를 넘게’ 욕하거나 매도하지는 않는다.
그 시절에 총독부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서 윤 봉길 의사를 비난하는 보도를 냈던 국내 언론사들을 친일매국(?) 어용언론이라고 욕하는 게 아무 쓰잘데기없는 어리석은 짓인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2) 전설처럼 따라다니는 ‘맨발로 못 위를 걸은 일화’는 도대체 언제 어느 형무소(의성? 평양?)에서 벌어진 일이고 출처가 누구의 증언이며, 신빙성이 있는 사건인지 내 노력으로는 분별과 검증을 더 못 하겠다.
일본으로부터 저 정도로 비슷한 레벨의 끔찍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어떤 분야의 지조를 지킨 건 신라 박 제상 이래로 처음이 아닌가 싶은데..?

(3) 한국의 기독교 수난사 순교사가 오로지 일제 말기밖에 없었던 것처럼 분위기가 흘러가는 것을 매우 불편하고 불쾌하게 생각한다.
1950년 가을~겨울에 전국 각지에서 온갖 냉병기로 두들겨맞고 머리에 총알 박혀 순교한 더 많은 순교자들을 언급하는 건 무슨 정치 발언으로 매도돼 가니.. 정말 어이가 없다. 정상적이고 건전한 분별력을 지닌 상태가 아니다. 3· 1 운동 당시에 유 관순 말고 다른 여성 독립 운동가들도 재조명되어야 하듯, 이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3. 신념형 친일파 박 중양

세상에 유 관순이나 주 기철 같은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구한말부터 일제 말기에 이르기까지 조선인 중에는 아무 사심 없이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가깝게 지내기를 원했던 친일파도 있었고, 돈과 벼슬까지 받으면서 나라를 팔아먹은 나쁜놈, 마냥 생계형 부역이라고 실드 치기에는 도를 넘은 부역자 등 여러 종류의 친일파가 존재했다.

특히 세월이 흐르면서 1930년대쯤부터는 일본은 절대 망할 일이 없고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주권을 회복하는 건 아예 불가능하겠다는 인식이 짙어졌다. 그건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니 인정하고, 일본 내에서 2등 신민인 조선인의 인권과 권익을 향상시키는 운동을 하는 게 순리이겠다고 노선이 바뀌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와중에 박 중양(1872-1959)이라는 인물은.. 부귀영화와 개인 영달 기회주의형이 아니라 그냥 조선을 자기 신념상 너무 혐오해서 충성의 대상을 일본 정부로 바꾼 좀 이례적인 사람이었다. 김 옥균 같은 친일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개화파들이 잔혹하기 그지없게 가족까지 몽땅 숙청되는 걸 보고는 이놈의 X같은 야만적인 나라는 답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나라를 팔아먹는 일에 앞장서지는 않았고, 독립운동가들을 밀고하고 괴롭힌 것도 아니고.. 일제 시대 때 일본으로부터 월급 받는 관료로서는 아주 강직 청렴하게 처신했다고 한다. 다른 일본인들을 부하로 부릴 정도로 높은 등급의 관료가 됐으니 원... 윤 치호와 비슷한 위치 같은데.. 그 사람보다는 한 타이밍 더 일찍 신념이 저렇게 바뀐 셈이다.

해방 후에 반민특위에 회부됐을 때도 이 사람은 "일제가 그렇게 폭삭 망할지 몰랐어~! 그래도 처자식 먹여 살려야 했잖아!" 같은 구차한 변명 따위 없었다. "조선인들은 더 고매한 일본인의 통치를 받는 게 객관적으로 더 이익이다"라는 자기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저 팩트가 마음에 안 들어서 굳이 날 죽여야겠다면 죽여라. 난 아무 미련 없다. 하지만 나 말고 일제 시대 유능한 인재들을 친일파로 몰아서 해코지하지 말고 오히려 잘 이용해 먹을 생각을 해라. 그리고 애국자의 탈을 쓴 다른 위선자들에게 속지 마라."라고 당당하게 덧붙였다..;;

그러니 이 양반은 돈과 권력을 좇는 여느 기회주의형 악랄 친일파는 아니라는 것에 조사관들의 견해가 일치했다. 그리고 그들이 내린 결론은 "저 양반은 투옥과 처벌이 아니라 정신 감정이 필요하다"였다.

뭐, 조선 정부에서(고종과 민 씨 일가..) 개화파를 완전히 박살을 내는 현실을 똑같이 보고서 박 중양은 신념형 친일로 돌아섰다. 윤 치호도 자국민의 국민성에 절망한 나머지 변절해 버렸다. 하지만 구한말 때 직접 죽을 위기를 겪었던 이 승만은 그리하지 않았다. 우리는 솔직히 할배에 대해서는 그의 독선을 욕할 게 아니라 무슨 뚝심과 근자감으로 조선이 망한 후에도 외국에서 무국적자로 살면서 줄곧 독립 운동을 했는지.. 그걸 더 대단하게 여겨야 하지 싶다.

4. 이 승만 정권 때 처형 당한 최 능진, 조 봉암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첫 헌정 체제이던 이 승만 1공화국은 군사정권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단과 6· 25 전쟁을 직접 겪었던 만큼 반공 성향이 매우 강했으며, 나라 분위기가 그쪽으로는 극도로 민감하고 경직돼 있었다. 통일이라는 건 당연히 북진 멸공 통일을 해야지, 감히 화해와 평화 통일 운운하는 것만으로도 빨갱이로 몰리고 잡혀갈 수 있었다.

난 개인적인 신념으로는 그게 이해가 되며 일면 옳다고도 생각한다. 김 일성 같은 사악한 저질 집단은 애초에 대화고 화해 따위가 가능한 상대가 아니다. 놈들의 개수작에 속지 말고, 힘으로 완전히 없애 버릴 수 없다면 단호하게 분리와 격리라도 하는 게 백 번 옳다. 통째로 적화통일이 될 뻔했던 것을 온갖 개지랄 발광 발악을 한 끝에 겨우 반반으로 퉁친 것이다.

다만, 모든 애국자나 독립운동가들이 국제 정세를 보는 안목이 할배와 같지 않았으며, 공산주의와 공산주의자에 대한 정확한 분별력을 지니지는 못했다. 저것들은 지금 나라의 여건상 친일 부역자 출신 군경을 동원해서라도 몽땅 제거해야 한다는 것까지 생각이 일치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최 능진의 경우 경찰 고위 간부로서는 아주 이례적으로 친일 부역자 청산을 부르짖었고, 이 때문에 이 승만뿐만 아니라 조 병옥과도 크게 대립하여 갈등을 빚었다. 최 능진은 과거의 일제 시절부터도 안 창호 라인이었고 독불장군인 이 승만을 싫어했다.

결국 이 사람은 이 승만 정권의 눈밖에 나고 종종 체포되고 투옥되다가.. 결국 6· 25 전쟁 중에 '혁명의용군 사건'에 연루되어 빨갱이 부역 혐의로 처형당했다.
훗날 비슷한 연배의 조 봉암(1898-1959)이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된 것과 비슷해 보인다. 이들은 통일도 대화와 평화 노선을 주장했다.

자, 지금 할배를 정치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 승만의 국제연맹 위임 통치 청원을 보고도 나라를 팔아먹네 뭐네 매국노네 하면서 날뛴다. 그렇지 않은가?
1950년에 조 봉암이 제안했던 "UN 감시 하의 총선거를 통한 평화 통일"은 그들이 국제연맹 위임 청원을 싫어하는 것만큼이나 빨갱이로 몰리기 딱 좋은 혐오 발언이었다. 두 케이스 다 발언 당사자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오해가 있었다.

솔직히 이 승만이 외교 노선을 아무리 펴봤자 국제 연맹 시절의 강대국들이 일본의 합법적인 식민지이던 조선의 독립에 관심이 없었다. 그와 완전 동급이다. 저런 민족주의자 애국자들도, 개인으로서는 훌륭한 인물이었지만 그 사람들이 그렇게 노력한다고 해서 북괴가 공산 적화 흉계를 내려놓을 리는 만무했으며 남북 평화 통일 따위는 애초에 가능하지 않았다.

우리 끼리 친일 청산도 다 하고 공산화도 되지 않은 깨끗한 나라..? 도대체 무슨 수로 가능하다는 건가? 이렇게 국민성 더럽고 국력은 쥐뿔도 없던 헬조선 반도 땅에서? 이 승만 없이 김 구나 여 운형만 대통령 됐으면? 광복군이 제대로 참전만 했으면? 그러면 김 일성도 이렇게 흑화하지 않고 개과천선했을까? 허 참.. 난 내 사고실험의 결과를 봐서는 전혀 상상이나 동의가 되지 않는다.

세상에는 이렇게 다양한 관점에서 인생을 산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나라가 앞으로는 7, 80년 전 같은 무지와 야만의 시대를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반쯤 불가피, 반쯤 지나친 오바). 그리고 빨갱이 자체가 없어진다면 억울하게 빨갱이로 몰려서 고생하는 사람도 없어질 테니 이 나라의 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Posted by 사무엘

2020/09/09 08:33 2020/09/09 08:33
, , , , ,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794

5. 낙동강 일대 관광

칠곡 관광의 제1부는 전적 기념관 구경이었고, 제2부는 왜관 지구 전적 기념관에서 낙동강을 따라 남쪽으로 2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왜관 소방서 앞 사거리" 일대 답사 형태로 진행됐다.
여기는 경부선 철길이 단선이던 시절에 쓰였던 구 철교(지금 "호국의 다리")와 구 터널이 남아 있으며, 이것 말고도 아기자기한 의미를 지닌 공원들이 가까이 밀집해 있었다. 주차 걱정도 전혀 없어서 더욱 좋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것은 구 경부선 왜관 터널의 입구이다. 경부선이 단선이던 시절, 1905년부터 적어도 1930년대 말까지 약 30년 동안은 철길이 여기를 지났다는 뜻이다. 지금은 터널 바로 옆에 식당 건물이 들어섰다.
이런 폐터널은 사유지의 창고로 개조되어 방치되는 편이다만.. 얘는 등록문화재로 정식으로 등재되고 터널의 양방향이 뚫려서 공원으로도 이어지게 개조되었다. 지방 정부 차원에서 보존을 위해 나름 노력한 셈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래서 아무나 터널 안에 들어가 볼 수도 있다. 바닥에는 일부 빗물이 떨어지고 고인 곳도 있었다.
터널의 유래를 설명한 표지판 그림도 옆에 같이 첨부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터널은 근처의 "왜관 소공원"이라는 아담한 공원으로 이어졌다. 공원은 여기 저기에 공터와 정자가 있어서 경치가 좋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무슨 사과 같은 열매가 열린 가로수도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왜관 소공원의 길 건너편에는 '애국 동산'이라고 칠곡 출신의 독립운동가 10여 명이 으리으리한 묘비와 함께 소개돼 있는 묘지 언덕이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도 병철(1903-1945). 유 관순과 거의 동갑내기로 10대 중반의 나이로 칠곡에서 3· 1 운동에 참여했다가 경찰서 정모 한번 했고..
그 뒤로 임시정부와 신간회에 후원, 야학 교사, 그리고 이미 다 와해되어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독립군(?) 군자금 모집까지 다양한 분야 계열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한 분이다. 이 때문에 3· 1 운동으로부터 거의 20년 가까이 뒤인 1938년에 한번 더 경찰서 정모를 당하기도 했다.

이 정도 이력만으로 그는 일제 말기에 불령선인으로 찍히기에 충분했다. 감시를 받으며 지내던 와중에 1945년 여름, 사실상 마지막 의거인 "부민관 폭탄 투척" 사건이 터지자 또 어거지 같은 꼬투리를 잡혀 왜경에게 체포되었다.
그래서 아마 호송 열차를 타고 대구로 끌려가는 길이었지 싶은데.. 그는 열차가 낙동강 철교를 달리고 있을 때.. 비록 손은 결박 당했겠지만 경찰들을 몸으로 뿌리치고 확 뛰쳐나가서 다리 아래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순국한 때는 8월 7일.. 경부선이 전구간 복선화가 완료되어 새로운 낙동강 철교가 개통한 지 겨우 1년 남짓 된 시절이었고, 저 때는 무엇보다도 히로시마에 작은 꼬마가 떨어진 바로 다음날이었다.
1주일~열흘 남짓 동안 조금만 수모를 참고 버텼으면 조국의 광복을 보고 석방돼 나왔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에 서울도 아닌 지방에서 그런 바깥 소식, 게다가 일제에게 불리한 소식을 접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저 사람이 무슨 총칼 폭탄으로 일본인을 죽인 것도 아니고, 저 정도 행적은 사형 당할 정도의 죄도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일제가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이런 시기에 또 잡혀 들어가면 무슨 꼬투리를 잡혀서든 살아서 나오기 힘들 거라고 예상했던 것 같다. (영원히 행방불명된 김 익상 의사의 최후와 비슷..)
아니면 고문 당하면서 동지들의 신변까지 실토하게 될 것을 염려했거나..

내가 여러 번 강조하지만 일제가 원폭 맞아서 갑작스럽게 항복하고 허겁지겁 빠져나온 것은 미국에게나 우리에게나 매우 엄청난 행운이었다.
자국민한테도 1억 옥쇄 X랄하던 미친놈들이 시간이 충분했으면 나가더라도 감옥에 갇혀 있던 항일 애국지사들을 다 죽이고 증겨 인멸하고 파괴하고 나갔을 것이다.

동남아에서 도망칠 때도 위안부들 다 죽이고 나갔던 것처럼. 히틀러가 패전을 앞두고 파리를 몽땅 불지르려고 했던 것처럼..
도 병철 같은 사람이 체포되던 중에 괜히 자결을 한 게 아니었다. "1주일만 참았으면 됐을 텐데" 같은 아쉬움도.. 결말을 다 아는 후손들이나 할 수 있는 얘기이지, 당대를 살았던 사람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기념비의 뒷면에는 여기에 무덤은 없지만 어쨌든 칠곡 출신의 애국지사들 수십 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리고 언덕의 꼭대기에는 UN이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진 왜관 지구 전승비가 놓여 있었다. 여기는 정식 현충원은 아니지만 참 독특한 보훈 시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폐터널, 소공원, 애국 동산 다음으로 경부선 구교량이라 할 수 있는 '호국의 다리'를 반쯤 건너 보는 것으로 칠곡 관광을 마무리했다. 날씨가 날씨이다 보니 강물은 온통 흙탕물이고 풍경은 뭐 이랬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래의 강변 공원도 금방이라도 침수될 듯 물바다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경주에도 중앙선의 옛 시내 관통 구간이 교량(장군교)에서 폐터널로 바로 이어지는 구간이 있는데.. 마치 그런 걸 보는 것 같았다.

Posted by 사무엘

2020/08/27 08:35 2020/08/27 08:35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789

4. 칠곡 다부동/왜관 지구 전적 기념관, 호국 평화 기념관

다음으로 1시간이 좀 넘게 운전해서 칠곡에 갔다. 꼬불꼬불 해변길과 포항 시내를 거친 뒤, 20번 고속도로(포항-익산)를 처음으로 달려 봤다. 다만, 여전히 몹시 피곤해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거의 30분 가까이 기절하듯이 쉬기도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리고 가장 먼저 백 선엽 장군의 공훈이 남아 있는 다부동 전적 기념관에 도착했다. 55번 고속도로 다부 IC의 바로 옆에 있어서 찾아가기 쉬웠다. 기념관의 뜰에는 탱크와 미사일이 전시돼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1950년 8~9월에 낙동강 전선에서는 인천 상륙 작전을 앞두고 가히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한 혈투가 벌어졌다. 여기서 물러나고 대구까지 북괴에게 빼앗기면 더 물러날 곳도, 더 확보할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됐다면 남한 수뇌부는 진짜로 제주도나 외국 망명까지 고려하는 지경이 됐을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주변은 비가 내려서 온통 물바다인데 마침 비가 전혀 들어오지 않는 쉼터가 있었다.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느낌이었다. 여기서 새참도 먹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구국 경찰 추모비와 무명 용사 묘지가 있었다.
백 선엽 장군은 종북 반역 매국 세력의 패악질로 인해 자신이 현충원에 못 들어간다면 차라리 자기를 여기 다부동 전적지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남겼던 바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정작 기념관은 지난 6월부터 10월까지 리모델링 공사 중이어서 안에 들어가 보지 못했다. 규모도 작고, 홈페이지를 보니 막 특별한 것이 전시돼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하필 백 선엽 장군의 서거로 인해서 이곳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높아진 시기에 기념관이 개방되어 있지 않은 것은 일면 아쉬운 점이다. 리모델링 자체는 백 장군의 서거 이전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제 본인은 서쪽으로 10여 km 정도 더 이동해서 낙동강 근처까지 갔다. 왜관 지구 전적 기념관과 호국 평화 기념관은 서로 가까이 붙어 있는데, 후자가 뭔가 전쟁 기념관의 칠곡 버전처럼 제법 규모 있게 꾸며져 있었다. 여기부터 먼저 들어가 봤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런 곳이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정의의 편과 악의 무리들이 나란히 대조되어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다시 말하지만 칠곡은 6· 25 사변 당시에 남한이 영토의 90%를 빼앗기는 위기에 처했을 때, 낙동강을 마지노 선으로 잡고 최후의 접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관심 있는 분들은 이 기념관을 직접 방문해서 관람해 보시기 바란다.
일일이 사진을 소개하지는 않지만 1950년 8월 하순에 벌어졌던 유학산 전투, 수암산 전투, 가산산성 전투 이런 것도 다뤄져 있다.

이랬는데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한 덕분에 불과 한 달 뒤인 9월 하순엔 남북 영토가 전쟁 이전 시점으로 되돌아갔으니 정말 고맙고 다행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주인공의 실제 모델 인물. 그랬구나.
다만, 내 기억으로 영화에서는 형이 중공군에 합류했고 강원도 산간의 금성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뭔가 각색이 있었던 듯하다.
중공군이 칠곡까지 남하한 적은 없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기념관의 꼭대기 층에서는 아래의 낙동강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경부고속선 철길이 근처를 지나는데, 마침 주행 중인 KTX를 굉장히 괜찮은 구도로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왜관 지구 전적 기념관의 입구이다. 저 언덕 위에 자그맣게 보이는 건물이 방금 관람했던 호국 평화 기념관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적 기념관은 평화 기념관보다 규모가 작고 볼거리가 적었지만 최소한 전투 장면을 인형으로 재현해 놓은 모습은 유익했다. 김 재옥 기념관과 장사 상륙 작전 기념관에도 이런 레플리카가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좀 유치하고 원색적인 북괴 비난 같지만.. 솔직히 틀린 말은 하나도 없다.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북괴의 체제가 바뀌지 않는 한, 쟤들이 전면 개방되지 않는 한 우리도 저런 놈들과 협력, 통일 같은 수작에는 절대로 응하지 말아야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리고 야외엔 이런 전적비도 있었다. 둘째 날 오전에는 이렇게 전적 기념관들을 관람하며 시간을 보냈다.

Posted by 사무엘

2020/08/24 19:34 2020/08/24 19:34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788

2. 영덕 장사 해수욕장, 장사 상륙 작전 기념관, 동해선 장사 역

이렇게 충주 동락 전투 관련 유적을 구경한 뒤, 본인은 곧장 영덕으로 떠났다.
작년에 영양· 봉화로 가기 위해서 이용했던 30번 고속도로(당진-영덕)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고맙게도 본인이 차를 타고 이동을 시작하자 이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주변에 차가 없고 길고 곧게 뻗은 터널 안에서 순간 최고 속도를 193km/h까지 내는 과업을 달성했다. 2년 전의 185km/h를 갱신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고속도로를 나온 뒤 7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좀 내려가니, 장사 해수욕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장사 상륙 작전 기념관은 보다시피 문산호의 모양을 한 선박 같은 모양으로 지어졌다.
언제부턴가 계곡 옆에는 평상이, 해수욕장 바닷물 코앞엔 파라솔들이 점령한 것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비가 언제까지 내리지 않고 있으려나 의아했는데.. 결국은 비가 슬슬 내리기 시작했으며 빗줄기는 갈수록 굵어졌다. 그래도 본인은 비를 맞으면서도 개의치 않고 물놀이를 했다.
물은 적당히 차가우면서 맑고 파도도 잔잔한 편이고,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서 아주 좋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물놀이를 마친 뒤엔 비 내리는 해변과 캠핑장을 거닐다가 장사 상륙 작전 전적지와 기념관을 구경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해변이 해수욕장이 아니라 전쟁터였던 고딩 나이의 학도병들을 생각하며 묵념..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바다로 잔잔히 흘러가던 이 도랑은.. 본인이 기념관을 관람하고 돌아온 1시간쯤 뒤엔 흙탕물이 콸콸 넘쳐 흐르는 헬게이트로 변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장사 상륙 작전은 인천 상륙 작전의 바로 전날 행해져서 진짜 통수를 치는 인천 상륙에 대한 훼이크 역할을 했다. 게다가 훼이크가 얘 하나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훼이크일 뿐이니 막 정예 병력까지 투입할 필요는 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소년병을 투입하다니.. -_-;;

문산호는 민간 선박이다가 군용으로 징집된 물건이다.
그런데 얘가 가던 중에 좌초해 버리고 구조선이 제때 못 온 바람이 애들의 희생이 더 커졌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기념관의 옥상(갑판)에도 올라가 볼 수 있다. 비가 철철 내리고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해수욕장에서 볼일을 다 본 뒤엔 지금까지 말로만 듣던 동해선 장사 역을 찾아가서 내부를 구경했다.
동해선은 일제가 1940년대에 한반도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건설하고 있던 철도였는데 21세기가 돼서야 드디어 철도가 들어오게 된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얘는 상주하는 직원이 없는 무인역이고, 선로도 본선과 측선 두 가닥에 섬식 승강장 하나밖에 없는 아주 단순한 구조였다. 하루에 열차가 방향별로 7회밖에 정차하지 않지만 공교롭게도 내가 갔을 때 열차가 도착하는 걸 볼 수 있었다.
뭐, 아직까지는 포항에서 영덕 사이를 오가는 3량짜리 RDC 무궁화호가 단선 선로를 오갈 뿐이다. 앞으로 더 발전해야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로써 오후 6시쯤에 오늘의 모든 일정이 끝났다. 집에서 싸 간 과일 말고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니 곧장 저녁을 먹으러 갔다. 휴가 가서 전통적으로 늘 하듯이 해수욕장 근처의 어느 식당에서 회를 배불리 먹었다. 여기서 컴퓨터와 폰을 충전도 잔뜩 할 수 있었다.

3. 포항 사방 기념 공원

이제 여행의 첫째 날이 저물고 숙소를 잡을 때가 됐다. 바닷가나 한가한 교외의 정자, 해수욕장 캠핑장 등 텐트를 칠 곳이야 많다만, 문제는 비가 밤에도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머리 위의 비는 피할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했다.
고민 끝에 다음 목적지인 사방 기념 공원에 미리 가서 거기 내부에 짱박혀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그렇잖아도 다음 둘째 날의 일정은 오늘보다도 더욱, 매우 빡빡할 예정인데 이건 괜찮은 선택이었다.

장사 해수욕장은 영덕의 최남단에 있고 사방 기념 공원은 포항의 최북단에 있다. 그러니 차로 2~30분 거리인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가는 경로에는 곧게 뻗은 국도를 벗어나서 온통 좁고 꼬불꼬불 굽은 산길과 해변길도 있어서 눈이 즐거웠다. 이렇게 폭우가 내리는 중에도 해수욕장에서 캠핑을 하는 사람이 많이 보였다.

비는 밤새도록 정말 시원스럽게 내렸다. 공원 내부의 어느 건물 근처에서 텐트를 치고 비를 피하면서 한숨 잔 뒤, 아침 6시쯤 날이 밝아 오자 우산을 들고 공원 주변을 산책하고 언덕을 올라 봤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넓은 정원이 정말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날씨가 좋으면 저 멀리 바다까지 보였을 텐데 아쉬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방(砂防)이란 높은 지대에서 모래가 비바람에 씻겨 무너져 내리는 것, 쉽게 말해 산사태를 예방하는 정비 과업을 말한다. 이게 박통 시절에 여기 포항 북부 지역에서 처음으로 시행됐는가 보다.

안 그래도 지금 당장 기록적인 폭우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산사태가 났는데, 현 시국과 관계가 있는 적절한 장소를 잘 찾아간 것 같다. 나도 이런 용어와 심지어 이런 과업을 기념하는 공원까지 있다는 걸 몰랐는데.. 지도를 뒤지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됐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포항 흥해 일대가 사방 사업의 최초 시범 추진 지역이었던가 보다. 박 정희 대통령이 사방 사업을 특별 현지지도(?) 하는 장면이 이렇게 동상으로 꾸며져 있다. 우와~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여기는 밤과 새벽 시간대에 잠깐만 머무를 수 있어서 기념관 안에는 못 들어갔다. 더구나 날씨가 맑고 좋으면 여기서 바다까지 보이는 멋진 풍경 사진을 남길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도 못했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넓고 경치 좋고 박 정희 대통령 동상까지 있는 공원을 혼자 독차지하면서 비 내리는 밤을 보낸 것 자체만으로도 좋은 추억이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0/08/21 19:37 2020/08/21 19:37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787

0. 들어가는 말

본인은 지난 4월말 황금 연휴 동안의 근거리 여행에 이어, 8월에도 매년 해 온 것처럼 하계 휴가 여행을 다녀왔다.
올해는 교회 수련회가 없었던 것을 감안하여 개인 여행을 기존의 1박 2일이나 2박 3일보다 긴 3박 4일로 잡았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도 더 멀리 나가고 다양한 곳을 둘러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코로나바이러스 말고도 이번 여행에서의 큰 복병은 이례적으로 길게 지속된 장마였다. 이 때문에 원래 7월 말~8월 초에 다녀 오려던 것을 한 주 미루기도 했다.
하지만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광복절 연휴나 그 이후까지 계획을 질질 미루고 싶지는 않아서 그 다음 주에는 출발을 강행했다. 사실, 비가 내리던 날도 해만 안 날 뿐 땀 뻘뻘 흐르고 덥기는 마찬가지였다.

본인이 처음에 생각했던 올해의 여행 계획은 통영-대전 + 중부 고속도로(35)를 끝까지 타고 남하해서 남해안 정도를 다녀오는 것이었다. 평소에 서울에서 거기까지 갈 기회는 잘 없었으니까.. 다도해 해상 공원을 구경하고 남해안의 해수욕장에서 물놀이를 하고, 경전선 폐역이나 88 올림픽 고속도로 구도로를 답사하는 것 정도를 생각했다.

그러나 그 계획은 7월쯤 되면서 좀 수정됐다. 백 선엽 장군의 서거 소식을 계기로, 올해는 강원도를 전혀 경유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안보 관광의 비중을 매우 크게 잡게 됐다. 바로 1950년 여름의 격전지였던 칠곡 일대의 답사가 추가된 것.. 거기에다 작년에 관람했던 영화 <장사리>에 대한 기억이 살아나면서 물놀이 장소도 그쪽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남해안까지 가기는 하지만 전반적인 경로가 당초 계획보다 더 동쪽으로 기울어졌다. 역대 휴가 여행 중, 본인의 고향과 가장 가까이 가게 됐다.

1. 충주 동락 전투 승전 기념 공원, 동락 초등학교

사용자 삽입 이미지

출발해서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충주의 서쪽 끝인 동락 전투 승전 기념 공원이었다. 경유한 고속도로는 50, 45와 40의 순으로 번호가 작아졌다. 넓고 한적하고 으슥한 공터에 일찌감치 도착한 뒤, 잠도 여기서 한숨 잤다.
해 안 나고 덥지 않고, 아직 비도 안 오고 화장실과 수돗물이 바로 옆에 있기까지 해서 첫 야영을 아주 기분 좋게 마쳤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동락 전투는 6· 25 전쟁 중에 국군의 육군이 최초로 승리를 거둔 전투이다. (해군의 승전은 후방 동해에서의 대한해협 해전)
김 재옥 교사가 동락 초등학교 운동장을 점령한 적의 동태를 아군에게 침착하게 잘 신고한 덕분에 승리한 것으로 매우 유명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기념 공원이 있는 곳에서 300미터 남짓 떨어진 저 동락 초등학교 지점으로 아군이 박격포를 쐈다. 현장엔 그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도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승비도 있고 참전 유공자 기념비도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공원으로 들어오는 짤막한 길은 도로명이 "김재옥길"이라고 명명돼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주변은 맑은 물이 흐르고 경치도 좋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제 동락 초등학교로 들어가서 김 재옥 교사 기념관에 들어갔다.
방학 기간이고 평소 방문 인원이 매우 드물어서 그런지, 교무실을 찾아가서 교직원에게 요청을 해야 문을 열어 줬다.
이 학교 자체도 2020년 현재 전교생이 몇십 명 남짓밖에 안 된다고 본인은 들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6 25 참전 기념비와 김 재옥 교사 현충탑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 재옥 교사에 대한 소개 문구.
이분은 요즘으로 치면 거의 대학생 나이로 교사로 부임했다가 거의 곧장 전쟁을 맞이했다. 그리고 군인과 결혼하면서 교사 커리어는 얼마 쌓지도 못하고 퇴직하여 전업주부가 됐다.
그 뒤엔 겨우 30대 초반의 나이로 범죄에 희생되어 세상을 떠났다..;;
가족 대부분이 싸이코패스에게 몰살 당했지만 당시 집에 없던 아들 딱 한 명만 살아남아서 대를 이을 수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동락 초등학교 운동장. 뭔가 정겨워 보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기념관 안은 생각만치 볼 건 없었다. '동락리 전투'를 '리' 자를 떼어내고 '동락 전투'라고 고쳐 부르려는지, 글자를 땜빵한 흔적이 보였다.
동락 전투에 참전했던 주역들이 1988년 7월 7일에 이 학교에 모여서 회고 간담회를 개최했던 사진이 걸려 있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0/08/19 08:33 2020/08/19 08:33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786

지성과 문명을 갖춘 인간 사회라면 어디건 전통이란 걸 만들고 자신의 족보와 역사 기록을 남겨서 후세에 전하는 걸 중요하게 여겨 왔다. 그래서 대한민국 이전의 조선만 해도 왕조 실록이라는 게 있고, 궁중 유물 중에는 왕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가 있다. 이걸 '어진'이라고 한다. '어명, 어용' 이럴 때의 御에다가 '진리, 사진' 할 때의 眞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건 조선의 태조 이 성계의 어진이다.
어진은 비록 사진은 아니지만, 여느 그림과 달리 최고존엄의 초상화인 만큼 국가 공인 최고의 화가를 최고의 보수를 주고 고용하고, 최고 품질의 종이와 물감과 도구를 동원해서 그린 것이다. 그만큼 과장 좀 보태면 "머리털 하나라도 그대로 가감 없이 사실적으로 그려 넣어라.. 안 그러면 죽는다" 급의 책임감이 부과되기도 했다.

그러니 어진은 호락호락 만만한 퀄리티가 아니며, 역사적인 가치도 그만큼 크다.
유대인 맛소라들이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까다로운 방식과 검증 시스템 하에서 성경 말씀을 필사했듯이, 그리고 조선 사서들이 "폐하께서 '이건 좀 실록에 기록하지 말고 우리끼리 하는 말로..'라고 말씀하시였다"까지 몽땅 다 실록에다가 옮겼듯이.. 어진도 그에 준하는 근성의 산물인 것이다.

아 물론 어진은 글이 아니라 그림인 관계로 무조건 사실적으로 그려지지는 않을 수도 있다. 얼굴 주인공의 취향이 반영된 뽀샵질도 들어간다거나.. 하지만 그것도 '정도껏'만 가능하다.

실록을 기록하고 어진을 그리고 보관하는 것은 조선 이전의 고려도 했던 관행이다. 오히려 조선이 고려의 시스템을 그대로 이어받고 약간만 더 강화· 보완했을 뿐이다. 하지만 고려의 실록은 임진왜란 때 거의 다 소실돼 버렸고 이를 참조해서 조선 시대 때 따로 편찬된 역사 기록만이 전해진다.

그에 비해 조선은 기록의 끝판왕인 나라였고 이중 삼중으로 백업도 많이 한 것, 제일 최근에 멸망한 왕조인 것, 조선의 도읍 한양이 현재 우리나라의 수도 서울로 그대로 계승된 것으로 인해.. 실록을 포함해 압도적으로 많은 역사 기록이 남아서 전해진다. 고종과 순종은 심지어 흑백이나마 얼굴 사진도 남아 있다. 그러고 보니 고종의 부친인 흥선대원군도 사진이 있으니 이 사람은 사진이 찍힌 가장 오래된 조선 정치인인 걸까?

그 유물들 중에서 조선 어진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기존 그림이 소실되고 다시 그려진 것이 있긴 하다. 이건 초상화라기보다 상상화에 더 가까워진다.
허나, 조선 시대 어진은 일제 시대와 6· 25를 거치면서 끈질기게 살아 남았다가 대한민국 초창기 시절의 참화 한 방에 상당수가 완전/부분 소실되어 버렸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왼쪽은 왕자 시절의 영조, 오른쪽은 조선 후기의 철종. 둘 다 왕복 차림은 아니다.)

이건 찢어진 게 아니라 불에 그을리고 탄 부분을 도려낸 것이다. 전부 1954년 12월, 부산 용두산 대화재의 상흔이다. 이 정도면 2008년 숭례문 방화 화재는 애교 수준이다.

6· 25 전쟁 때 서울을 빼앗기게 생기자.. 공무원들이 다른 돈다발이나 식량이나 군사 무기뿐만 아니라 이런 유물까지 챙겨서 열차에 싣고 부산으로 허겁지겁 피난 보낸 것 자체는 잘한 일이었다.
그런데 안 그래도 부산은 판자촌에서 대형 화재가 몇 번이나 나서 1953년엔 국제시장이고 부산 역이고 몽땅 태워먹을 정도였는데, 휴전 이후에도 이 사람들이 뭘 깜빡 했는지 유물들을 다시 서울로 옮길 생각을 1년 넘게 하지 않았다. 이 지역은 화재에 취약하고 언제 또 불이 날지 모르니 어서 창고를 정리해야 한다고 경고했던 소수의 사람이 있긴 했으나.. 그 경고는 묵살당했다.

그러다가 1954년 12월, 용두산 대화재 때 결국 재앙이 벌어지고 말았다.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안 되지만 저 때는 촛불을 켜 놓고 자다가 화재 사고가 많이 났다. 용두산 대화재, 그리고 1977년 이리 역 폭발 사고의 원인이 바로 이것이었다.;;

불 자체가 문화재 창고에서 시작된 건 아니었으며, 불이 거기까지 번지기 전에 짐을 미리 뺄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어이없게도 창고 열쇠를 못 찾아서 그러지 못했다. 부서별로 "문교부: 야, 너한테 열쇠가 있는 거 아니었어?" / "구황실 재산 관리 총국: 아닌데? 그거 원래 너네 관할 아냐?" 하면서 우왕좌왕했다고 당시의 경향 신문 보도 자료가 남아 있다.

장비를 동원해서 창고를 부술 여건도 못 됐고.. 결국 창고가 통째로 불길에 휩싸이는 걸 사람들이 뻔히 지켜보면서 발만 동동 굴려야 했다고 한다.
맹렬한 불길 때문에 창고의 한쪽 벽면이 붕괴된 뒤에야 짐을 빼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위의 빨간 옷은 순조, 아래는 문조, 정원군 원종..)

어진이 불에 탄 모양이 그로테스크하기 그지없다. 돌돌 말려 있는 상태에서 불이 붙어서 저렇게 된 것이다. 지폐가 불에 탄 모습을 비교 참고용으로 소개한다. 지폐도 단순 종이를 넘어 섬유에 가까운 튼튼한 재질로 만들어진다는 걸 생각해 보자.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 당시에 창고에 어진 말고 무엇이 더 보관돼 있다가 소실됐는지조차도 파악이 제대로 못 되고 묻혔다. 그걸 기록해 놨던 문서가 1960년 6월, 다른 화재로 인해 소실됐기 때문이다.. -_-;;

일제 시대에 기존의 조선 황실은 일제로부터 귀족 정도 등급으로 대접 받았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다 해방 후 한반도에는 대한민국이라고 황실이나 귀족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 민주 공화정 국가가 세워졌다. 기존 조선 황실은 아주 최소한의 기본적인 예우만 받을 뿐, 신분은 일반 평민 시민으로 모조리 조정되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들은 항일 독립 운동을 도운 것보다 일제로부터 떡고물 받으면서 그냥 편하게 산 비중이 훨씬 더 컸다. 그러니 해방 후에 대한민국 땅에서 옛 조선 황실 복원 떡밥 따위는 단 1도 거론되지 않고 싹 묻혀 버렸다. 이 사람들은 새 나라에서는 그 어떤 정치적인 목소리도 낼 수 없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그냥 찌그러져 있어야지..

조선 시대 궁궐을 비롯해 조선 황실의 재산도 깔끔하게 국가 소유로 넘어갔다. 그리고 나라에서는 건국 극초반부터 ‘구황실 재산 관리 총국’이라는 행정 기관을 설립해서 이것들의 수효와 규모를 파악하고 체계적으로 보관· 관리하려 했다. 그랬으나...

관리 조직 내부의 부정부패 비리로 인해 구황실 재산이 부동산과 동산을 가리지 않고 개인의 자산으로 야금야금 유출되기 시작했으며, 그 정황이 윗선에도 포착되었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제1공화국이 무너진 혼란 가운데에서도 암행어사 급의 외부 인사를 파견해서 모든 황실 재산이 잘 남아 있는지, 서류상의 목록과 실물이 일치하는지 전수조사를 지시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창경궁 안에 소재해 있던 구황실 재산 관리 총국 본사에 원인 모를 화재가 나서 관련 증빙 서류들이 소실돼 버렸다. 6년 전에 부산에 보관돼 있던 궁중유물 목록도 이때 사라졌다. 그래서 그때 구체적으로 무엇이 보관돼 있다가 소실되었는지조차 현재로서는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

이 화재는 재산 유출 관련 비리가 탄로나지 못하게 하려고 내부 관계자가 저지른 방화일 가능성이 정황상 매우 높았다. 하지만 그때는 주변에 CCTV 같은 게 없고 행정이 전산화돼 있지도 않았고.. 이렇다 할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이 사건은 화재의 원인이나 범인을 밝혀내지 못하고 미제 사건으로 흐지부지 묻혀 버렸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1년에 황실 재산 관리 총국은 폐지되고, 문화재 관리국이라는 상위 호환 조직으로 흡수되었다.

그럼 다시 어진 얘기로 돌아온다.
어진은 우측 상단에 그림의 주인공 내지 그림이 그려진 날짜 같은 식별 정보가 기록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른쪽이 소실된 어진은 얼굴이 남아 있더라도 누구의 얼굴인지 몰라서 애를 먹으며, 고고학자들이 각종 추리를 동원해서 어진의 정체를 추적한다. 파일로 치면 뒷부분의 데이터가 아니라 앞부분의 헤더를 날린 것과 비슷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손상된 원래 순종 어진(좌) vs 2014년경에 복원된 버전(우). 얘 정도면 우측의 헤더가 날아갔어도 주인을 식별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저 때는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페이스리프트(?)된 뒤이기 때문에 군주가 왕을 넘어 황제 취급을 받았다. 그래서 고종과 순종은 어진에 그려진 옷의 색깔부터가 노랗다.

비록 불의의 사고 때문에 수십, 수백 년째 전해지던 어진이 불에 타 버렸지만.. 요즘은 추가적인 사료 내지, 옛날에 어진을 흑백 사진으로라도 찍어 놨던 것 등 조금이라도 단서가 될 만한 건 몽땅 싹싹 긁어모아서 어진을 용케 복원하기도 한다.

하긴, (1) 어린 시절에 비무장 지대 안에 시뻘겋게 녹슨 채 버려진 증기 기관차라고만 사진으로 봤던 그 열차는 그럭저럭 녹 벗기는 복원 작업을 거쳐 임진각에 전시돼 있다. 지금은 복원을 했기 때문에 약간 짙은 갈색이지, 그 전엔 진짜 시뻘갰다.

(2) 어린 시절에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채 방치된 낡은 모습으로 봤던 순종 어차는.. 2000년대에 정교하게 복원 재도색 리마스터링을 해서 아주 반들반들 광택 나는 새 차처럼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그리고 (3) 1950년대에 만들어졌던 시발 자동차조차 실물은 다 소실되어 버려서 지금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건 레플리카뿐인데, 순종 어차는 오리지널 진품인지라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사례이다. 그러고 보니 이건 전부 교통수단들이구나..

뭐든지 기록이 보존되고 복원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가령, 수원 화성은 뻔히 후대에 재건된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그 기록이 너무 상세하게 고퀄로 잘 돼 있던 덕분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됐을 정도이다.

과학 기술이 발달하고 등 따시고 배부르고 먹고 살 만하니까 그 다음으로 이런 문화재 복원 같은 정신적인 만족 분야에도 관심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얘기했던 바와 같이, 실록이나 어진 같은 걸 만드는 방식, 기록과 보존 같은 개념은 성경 말씀의 기록과 보존과 관련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Posted by 사무엘

2020/07/23 08:34 2020/07/23 08:34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776

« Previous : 1 : 2 : 3 : 4 : 5 : 6 : 7 : 8 : 9 : ... 16 : Next »

블로그 이미지

그런즉 이제 애호박, 단호박, 늙은호박 이 셋은 항상 있으나, 그 중에 제일은 늙은호박이니라.

- 사무엘

Archives

Authors

  1. 사무엘

Calendar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Site Stats

Total hits:
2678973
Today:
1057
Yesterday:
24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