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치 독일, 일본 제국, 차우세스쿠의 몰락

1945년 4월 말, 히틀러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처형 당하고 처참하게 시신 능욕을 당하는 걸 보고는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다.
자기는 절대로 저렇게 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으며, 자살한 자기 시신을 철저히 화장해 없애서 적에게 신원 확인이 안 되게 하라고 부하들에게 당부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지 못했으며, 치열 대조를 통해 히틀러의 시신이 확인됨)
무솔리니가 죽은 지 겨우 이틀 뒤에 히틀러도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 뒤 1989년 12월 말, 루마니아의 공산 독재자 니콜라 차우세스쿠가 시민 혁명에 의해 축출되고 처형 당했다. 20세기의 독재자 중에서는 그야말로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멍청한 짓을 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번엔, 이 사건을 접하고는 평소에 켕기던 게 많아서 “우리도 까딱 잘못했다간 이렇게 되는 거 아냐?”라고 와들와들 떨고 당황했던 인간들 중 하나는 북괴 김씨 일가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니 당연히 주민들이고 군인이고 서로 더욱 감시하고 밀고하게 만들고, 그런 비생산적인 짓거리에 세금과 공권력을 더욱 투입하고..
북한은 그야말로 역대급으로 폐쇄적이고 내부에서 항쟁, 혁명, 쿠데타 같은 게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형태로 사회 구조가 더욱 썩고 곪아 버렸다.

영화 “Downfall/몰락”(2004)은 히틀러가 전쟁에서의 패색이 짙어지자 부하들을 탓하며 광분하다가 결국 자살을 선택하는 행적이 잘 묘사되어 있다.
다음으로 “일본 패망 하루 전”(2016)은 역시 항복 열흘쯤 전부터 원자폭탄 두 방 맞은 것 하며, 히로히토 천황은 어린 신민들을 위하야 어엿비 너겨 항복을 결단하는데 밑에서 또라이 같은 장교들이 항명하여 쿠데타를 벌이는 과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일본에서 스스로 ‘일본 패망’ 이딴 식으로 영화 제목을 붙인 건 당연히 절대 아니다.. ㅋㅋ 저건 우리나라 개봉 때 붙은 로컬라이즈된 제목이다.
이 둘은 동양과 서양에서 제각기 2차 세계 대전의 추축국 전범국이었던 두 나라가 말기에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영화들이라 하겠다.
독일의 히틀러는 총통으로서 국가 원수와 군 사령관 역할을 겸한 반면, 일본 천황은 신민들에게 얼굴조차 안 비치는 신이고 밑에 육군과 해군이 제멋대로 놀면서 폭주했다는 차이가 있다.;;

독일이 패망하는 영화가 제목이 Downfall인데.. 일본이 원폭 두 방을 맞고도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을 때 일본을 상대로 시행되려 했던 특급 전면전 작전의 이름도 Downfall이었다.
북괴 정권이 일제나 나치 독일처럼 멸망하지 못하고 김씨 일가가 차우세스쿠 같은 최후를 맞이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2. 중요한 개념 정리

(1) 남한과 북한이 이산가족들의 눈물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서로 왕래를 금지하는 이유는..

  • : 간첩, 공작원들이 지령 받고 와서 불순한 짓을 할까 봐 두려워서
  • : 자기 주민들이 바깥 사정을 알게 되고 자기 체제의 치부도 알게 될까 봐 두려워서

그렇기 때문에 북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고 이념 앞에서 가족도 없고, 남한 체제에 동화되지 않을 정도로 멘탈이 강제 개조된 인간흉기만을 남한에 공작원으로 보낸다.
그리고 반대로 남한에서는 그 어떤 종북분자들도 아예 북으로 가서 눌러앉아 살라는 말은 절~~~대로 안 듣는다. OK???

이게 반박불가인 팩트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어디 반박할 테면 반박해 보셔~)
그러니 이 본질적인 방해 요인을 해소하지 않고서 남북 교류니 협력이니 개방이니 헛짓 하는 건 전부 그냥 돈지랄 정치 쑈 사기극일 뿐이다. 정권이 바뀌거나 국제 정세가 바뀌면 언제라도 파토 날 수 있다.
자유로운 서신 왕래나 전화 통화 하나 없이 무슨 개방이여 미친..

(2) 종북과 좌빨은 엄밀히 말하면 서로 다른 속성이다.

  • 좌빨: 북괴에 대한 호감도나 충성도와는 무관하게 그냥 우리나라 경제 구조를 증세, 공유 위주로 사회주의 공산주의처럼 바꾸고 싶어함. 부자들 증오하면서 자기는 부자가 되고 싶어함.
  • 종북: 우리나라 정치 경제 구도와는 무관하게 그냥 우리나라 정체성을 부정하고 북괴 수뇌에게 충성하고 저쪽에 못 퍼 줘서 안달. 미국/일본 잣대와 중국/북괴 잣대가 심각하게 일관성 없음.

그러니 서로 다르긴 하다. 종북은 아니고 좌빨만 강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둘이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하나만 해당하고 다른 하나가 완전 강경하게 정반대인 사람은 거의 없다. 미사일 아니면 발사체, 간첩 아니면 활동가(!!)라는 차이밖에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3) 오늘날의 북괴는 무슨 스탈린, 레닌이 어떻고 하는 공산주의 집단은 아님.
공산주의 이념보다는 '공산주의자의 수법'만 그대로 계승해서 자기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집단이다. 이게 핵심..

3. 현실 직시

(1) 고래잡이를 근절시켜 준 것은 그린피스의 무식 과격한 시위가 아니라 고래기름 대체재의 개발이었다.

(2) 고문과 강압수사를 이만치라도 없앤 건 DNA감식, CCTV 등의 과학수사이지, 민주팔이 데모꾼들의 깽판 시위가 절대 아님.
민주화를 골백 번 한다 해도 고문과 강압수사를 동원해서라도 용의자를 잡아내야 할 강력 범죄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3) 산의 나무를 베지 않아도 되게 하고 벌거숭이 민둥산을 푸르게 지키는 데 절대적으로 기여한 것은.. 무슨 자연 보호 운동 따위가 아니라 화석연료이다(땔감의 역할 대체). 그리고 그 더티한 화석연료조차 쓰지 않아도 되게 해 준 것은 정말 역설적이게도 원자력이다!!

(4) 1940년대의 일제를 굴복시킨 것은 사랑의 원자탄 fat man과 little boy이지, 무슨 아가리 파이팅이나 맨주먹 항쟁 따위가 아니었다.
(아 물론, 일제를 굴복 항복시켰다고 해서 한반도가 100% 자동으로 해방되지는 않을 수 있었고, 일제만 물러난다고 해서 거기가 자동으로 한국인 소유로 돌아간다는 보장은 없었다. 거기부터는 한국인의 독립 운동이 기여한 것도 약간 있음)

(5) 우리나라가 민주주의가 잘 정착한 건 그나마 독재 흉내나 좀 냈다는 대통령들부터가 사실은 민주주의를 적극 추구했으며, 호구에 가깝게 너무 착하고 선량하고 순진해 빠졌던 덕분이다. 세상에 어느 정신나간 바보 등신 독재자가.. 자기더러 물러나라고 시위를 하던 학생들이 다치자 문병을 갔으며, 너희들이 장하다고 칭찬을 했느냐 말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선량하지 않았다면, 제아무리 데모질 좀 해 봤자 옛날의 북한, 중공, 헝가리, 캄보디아처럼, 요즘 미얀마처럼 총칼과 탱크에 진작에 싹 다 진압되고 갈려 나갔을 것이다.

아이고 이런 예가 얼마나 더 있을까? 현실을 좀 똑바로 직시하도록 하자.
현실을 직시할 줄 모르니까 대한민국의 현대사에 오로지 "일제와 독재에 항쟁"밖에 없는 줄 안다.
그리고 북한 주민들은 민주 의식 저항 의식이 부족해서 김씨 왕조를 무너뜨리지 못했다느니, 열심히 일하지 않고 게을러서 남한보다 못살게 됐다느니(혹은 미국놈들이 경제 봉쇄를 해서-_-) 같은 개 헛소리가 찍찍 나오는 것이다. 이건 사상과 분별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뜻한다.

4. 사상 단속

본인의 지인 중에는 현역 군 장교도 있고 국· 공립대의 교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보아하니 이분들은 소속의 특성상 개인 SNS에서 정치· 종교 분야의 자기 사상과 견해를 표현하는 것에도 좀 제약을 받는 것 같다. 상부에서 자기들의 SNS 계정까지 모니터링이라도 하는지, 몸을 사리시는 게 느껴진다.

내가 알기로 공무원은 타 영리 활동 겸직(사교육 교사, 대리운전, 알바 등..)이나 노조 설립, 정당 활동 정도가 금지이다. 비영리로는 시인 등단까지도 가능한 걸로 아는데.. 왜 업무 외의 영역인 사생활에 저런 제약이 가해지는지 난 잘 모르겠다.

그리고, 저런 지엽적인 사상 단속은 그리도 꼼꼼히 하면서..
지금 공립 학교에서 어린애들한테 철저하게 정치 이념을, 그것도 매우 해롭고 악하고 불순하고 잘못된 쪽으로 주입해 넣고 있는 전교조 교사들 단속은 교육계에서 제대로 하고 있는가? 난 이에 대해 깊은 회의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요즘은 교사를 뽑을 때 인성 면접에서 다같이 “김XX 개XX”를 소리내어 복창하고 동의시키든가, 그게 민망하고 남사스러우면 임용 시험에서 필적 확인 문구로라도 저걸 필사시켜야 하지 않나 싶다.
민망하고 남사스럽다고 최소한의 인증을 안 하다 보니 지금은 교육계가 정말 심각한 수준으로 적화됐기 때문이다.

사상이 저쪽으로 불량한 놈들은 사형, 추방, 삼청 교육대, 정신병원 중 하나가 마땅하겠지만, 사정상 그럴 수 없다면 최소한 법조인, 성직자, 정치인, 교육자 같은 직업은 절대로 가질 수 없게 해야 한다. 그냥 사기업 월급쟁이나 자영업 장사로 자기 전공 기술만 이용해서 밥벌이를 할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권위와 영향을 행사하는 직업은 절대로 넘볼 수 없게 해야 한다.

5. 죄책감??

또한 본인은 군인(특히 일개 병사가 아니라 사관생도나 장교)이나 사형 집행관이라는 사람이 자기 직무를 수행하는 와중에 쓸데없이 죄책감 운운하는 게 굉장히 싫고 마음에 안 든다.
그건 의대생이나 현업 의사가 무섭거나 비위 상한다고 해부 실습 내지 수술을 못 하는 것과 비슷한 꼴이다. 그럼 애초에 그 업계로 가질 말았어야지..

사형수한테 밧줄 씌우고 교수대 버튼 누르는 교정직 공무원은 자기 감정이 아니라 불쌍한 피해자 유족을 대변하는 심정으로 일을 해야 한다. 어디 뱃대지가 불러서 갑자기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고 자빠졌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남북 통일이니 협력이니 하기 전에, 먼저 북한에 올바른 통치 체제를 이식하고 개방을 시키고 서신과 통신 왕래라도 시켜야 된다. 그게 억만 배는 더 중요한 일이다.
인과관계와 우선순위를 이렇게 따지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나?? 이런 게 정치 성향이나 종교관에 따라서 판단이 달라질 수 있는 사항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비정상인가..?? ㅡ,.ㅡ;;;

내 경험상 필요악을 없애자고 선동하는 놈들은 그놈들이야말로 진짜 절대악이 아닌 적이 없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1/08/18 08:35 2021/08/1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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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일 찬송가에 수록된 제일 최신곡

한때 우리나라 교회에서 널리 쓰인 찬송가는 잘 알다시피 558곡짜리 통일 찬송가였다.
(난 21세기 새찬송가라는 건 진지하게 사용하고 분석해 본 적이 없어서 얘에 대해서는 뭐라 단정적으로 말을 못 하겠음. 그래서 라떼 옛날 것 기준으로..)

통일 찬송가는 편찬 위원들의 창작곡을 일부러 집어넣은 것을 제외하면, 수록곡들 중에 제일 최근에 만들어진 것은 1938년작인 “온 세상 위하여” 정도였다. (명목상 이것보다 미묘하게 더 최근인 곡도 있긴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추후 다루도록 하겠음)

요컨대 이 클래식 찬송가들은 대체로, 사실상 전부 다 2차 세계 대전 이전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컴퓨터와 핵무기, UN 따위의 등장 이전 말이다.
난 개인적으로 저것들이 등장하기 전과 등장한 후의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관과 생활 방식은 서로 크게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또한 음악 자체만 해도.. 내가 잘은 모르지만 국민악파니 신고전주의니를 거친 뒤, 20세기 중반쯤부터는 이전보다 훨씬 더 실용/세속 영역에 속한 '현대 음악'이 주류로 등장했다. 통상적인 클래식 장르는 뭔가 매니악한 별개의 영역으로 바뀌었다.

성탄절을 소재로 하는 노래들도 1940년대쯤부터 예수 성탄 찬송보다는 세속적인 캐롤로 확 바뀌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the Christmas song 등..
한때는 롤스로이스가 엘비스 프리슬리한테도 “당신 같은 딴따라한테는 우리 차의 품격이 어울리지 않습니다”라고 퇴짜 놓고 차를 안 팔았을 정도였던 것 아시는가? (그래도 나중엔 결국 팔았다고 함)

그리고 분야를 완전히 바꿔서 과학 쪽으로 가면.. 지금 지구의 대기는 이산화탄소 농도만 증가한 게 아니라 방사능도 전지구적으로 극미량이나마 증가해 있다고 한다. 원자폭탄 투하와 각종 핵실험 때문에..
물론 그게 인체에 당장 해를 끼칠 정도는 아니지만, 그 정도 변화에도 민감한 초정밀 기계를 만들 때는 영향을 받는다.

이 때문에 오죽했으면 1945년 이전에 만들어진 강철이 필요하다고 태평양 전쟁 때 가라앉은 일본 전함의 잔해 고철을 끄집어내서 재활용할 정도라고 한다. 바닷물 속에 쳐박혀 있으면 다른 방식으로 부식될지언정, 방사선으로부터는 완벽하게 차폐를 받기 때문이다.
인간의 과학 기술은 공기 중에 정말 새 발의 피만치도 들어있지 않은 방사능을 감지하고, 방사성 원소를 이용한 연대 측정도 하고, 납 성분도 덤으로 감지해서 무연 휘발유까지 만드는 경지에 도달해 있다.

지질학에서 6500만 년 전, 46억 년 전 할 때의 before present 기준 연도는 바로 이런 관측이 시작된 시기 근처인 1950년 1월 1일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것처럼.. 1950년대 이전에 만들어진 찬송가들은 1945년 이전에 만들어진 철과 비슷한 대표· 상징적인 의미가 영적 분야에 있는 것 같다.
다만, 아까도 언급했듯이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산마다 불에 탄다 고운 단풍에” 같은 창작곡은 1967년작이다~~ ㅎㅎ

2. 앨버트 심슨, Once it was the blessing

앨버트 심슨은 찬송가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를 작사한 캐나다의 목사, 신학자이다.
이 사람이 작사한 찬송가 중에는 저것 말고도 "Once it was the blessing"이라는 게 있다.

"한때는 난 오로지 복만 잔뜩 받고 싶어했는데 지금은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합니다.
한때는 난 '필'에 꽂히는 걸 좋아했는데 지금은 말씀을 더 좋아합니다.
한때는 열심히 간구 기도하면서 내가 하나님을 이용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반대로 하나님이 날 사용해 주시길 원합니다.
...
한때는 내 혼자 뭘 열심히 해 보려 애쓰고 낑낑댔지만 지금은 난 그분 안에서 평안합니다.
모든 것이 그분께 속해 있고 그분이 모든 것이십니다."


송 명희 시 같은 대구로 가득하면서 신앙 생활과 영적 성숙의 본질이 잘 담긴 굉장히 훌륭한 시임이 틀림없다.
본인은 몇 년 전에 울 교회의 주보를 통해서 이 시를 처음으로 접했다. 담임목사님께서 엄청난 학구파 독서광에 거의 걸어다니는 신앙 서적 검색엔진 급이신 분이어서..; 온갖 출처로부터 신앙 생활과 관련된 유익한 글이 있으면 일부 excerpt를 소개하곤 하셨기 때문이다.

난 신앙 서적 검색엔진은 아니지만 회중 찬양 선곡과 인도 짬이 10수 년.. 내 찬송가 책이 다 낡고 성경책 이상으로 너덜너덜할 정도로 책을 많이 뒤진 상태였다. 걸어다니는 찬송가 검색엔진은 얼추 된다.
우리 교회에서 사용하는 '복음 찬송가' 책에 저 시와 비슷한 내용의 가사가 담긴 신곡을 본 적이 어렴풋이 있었다. 직접 불러 보거나 들은 적 없이, 악보를 눈으로 대충 읽고 지나갔던 기억만으로 말이다.

그걸 찾아냄으로써 "768장 복을 바라던 나 주를 바라고"가 울 교회에서 회중 찬송 때 최초로 소개되었다. 요런 것도 찬양 인도자가 경험하는 작은 보람이다.

기존 통일 찬송가에도 "은혜 구한 내게 은혜의 주님"이라고 곡이 실려는 있지만..
얘는 가사가 굉장히 딴판으로 번역되는 바람에 사람이 성숙하여 정반대로 바뀌었다는 원문의 저런 반전 역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은혜를 구했더니 은혜, 신유를 구했더니 신유..;;;; 바뀐 게 없잖아~~ ㅋㅋㅋㅋㅋ

3. 웬일인가, 웬 말인가

우리말 찬송가 중엔 ‘웬일~’ 이렇게 놀라움, 경악을 뜻하는 ‘웬’이라는 글자로 가사가 시작하는 곡이 두 개 있는데.. 작사자는 서로 다르지만 공교롭게도 멜로디가 동일하다. 가사가 5절까지 있는 것까지도 같다~!
하나는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라고 예수님이 감히 나 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어 주셨다니~! 그렇게 감격하고 놀라는 내용이다.

하지만 다른 하나는 “웬일인가, 내 형제여”라고 관점이 완전히 다르다. “너 그렇게 안 믿다가 죽어서 지옥 가겠구나, 마귀를 좇고 재물만 좇다가 나중에 쫄딱 망하겠구나, 불에 활활 타겠구나, 인실X을 체험하겠구나..;;” 이렇게 경고하는 굉장히 부정적인 내용이다. 찬송가에 속해 있지만 내용은 찬양이라기보다는 복음성가에 더 가깝다.

게다가.. 찬송가 가사라는 게 보통은 한국어 번역이 영어 원문보다 더 부드럽게 희석되고 미화되는 편이다. 영어에서 hell이 있다 해도 그대로 번역 안 하는 편인데..
“웬일인가 내 형제여”는 한국어 가사가 영어보다도 ‘지옥’이 더 많이 나온다~! 이건 굉장히 이례적인 번역 스타일인 것 같다.

이 정도로 청자에게 부정적인 경고, 책망조의 가사는 개인적으로 딴 데서는 주찬양 1집 “참 소경” 정도밖에 못 봤다.
“(말 못 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도를 못 하는 사람이 벙어리, 앞 못 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이 소경 등등등~) 당신은 소경이 아닌가 / 당신은 병신이 아닌가” 이런 가사이다.;; 이건 가사가 노래 없이 시의 형태로 먼저 존재했다는 걸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나저나 영어 찬송가는 tell과 롸임을 맞춰서 hell이 나오는 경향이 있다. “웬일인가..”뿐만 아니라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도 딱 저 롸임이 존재한다~!

4.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이 유명한 찬송가는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서 지금의 형태로 완성됐기 때문에 내력이 좀 복잡한 곡이다. 깔끔하게 단일 작사자나 작곡자에 의해 만들어진 게 아니다.

원곡은 스웨덴 민요 멜로디에다가 언어조차도 영어가 아니었다고 한다. 독일어와 러시어 가사부터 먼저 있다가 나중에 영어 번역이 몇 가지 나왔으며, 가사는 3절까지 있던 것이 추후에 4절이 추가됐다.
이 때문에 이 곡은 처음 1, 2절은 자연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편 8편 같은 분위기이지만 3절은 "살아 계신 주" 같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 얘기, 그리고 4절은 무려 재림 얘기까지 기독교 교리가 두루 등장하게 된다.

우리나라엔 1949년작 영어 가사가 채택되어 있다. 이거 가사를 번역한 사람이 4절을 추가하고 멜로디를 개작도 한 모양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곡은 연식에 비해 최종 작사· 작곡 연도가 2차 세계 대전까지 지난 굉장한 현대라고 기재되어 있다.
게다가 영어 가사만 바리에이션이 있는 게 아니다. 한국어 번역도. 가톨릭 쪽 번역과 개신교 쪽 번역이 서로 나뉜 상태이다.

이 곡의 영어 가사에서 주목할 부분은.. 2절에서 "그랜저"라는 단어가 나온다는 것이다.
grandeur는 우리나라에서는 자동차의 이름으로나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웅장함, 장관' 이런 뜻을 지닌 보통명사이기 때문이다. When I look down from lofty mountain grandeur.. 그랜저가 저렇게 쓰인 걸 본인도 난생 처음 봤다.

그랜저는.. 한때 지존파의 살생부에 이 차의 차주가 올라가 있을 정도였고 "어떻게 지내냐는 친구의 물음에 그랜저로 답했습니다" 이런 정신나간 CF도 만들어졌을 정도로 고급차의 상징이었다.;;
지금은 그랜저가 30년 전만치 고급차는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도 여전히 아무나 탈 수 있는 서민형 차는 아니다.

5. 샤론의 꽃 예수

멜로디가 굉장히 예쁜 곡답게, 현대에 속하는 1920년대에 발표된 곡이다.
얘는 4개의 절로 된 가사들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성결교의 4대 강령과 순서대로 대응하는 것 같다. 중생, 성결, 신유, 재림. 그래서 신유에 해당하는 3절을 보면 얘는 찬송가 중에서는 흔치 않게 “질병을 고쳐 주소서”라는 간구가 들어있다~!

아울러, 영어 가사는 똑같이 my life이지만 1절은 중생(거듭남)이라는 갓 구원 문맥이기 때문에 “내 생명”이고, 2절은 그 뒤의 성화되어 가는 모습(성결) 문맥이기 때문에 “나의 삶”인 것도 주목해 보자.
아 2:1 rose of Sharon은 ‘무궁화’라고 통용되는 단어인데.. 정작 무궁화를 국화로 쓰고 있는 나라에서는 장미나 무궁화도 아니고 수선화라고 더 널리 알려져 있다. ㅎㅎ

이렇듯, 어떤 찬송가는 아주 원론적이고 무난한 메시지만 있는 게 아니라 특정 노선이나 교파의 교리를 좀 더 부각시킨 경우도 있다. 이러니 종말이나 천국을 소재로 한 찬송가는 가사를 쓰기가 난감해진다.

그런데.. “주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대로 이 거역하는 인생을 은혜로 택했네 … 자랑하지 않게 함이요, 하나님 은혜로… 하나님의 선물!” 요 곡은..
개신교/기독교라면 차이가 존재할 리가 없는 구원과 은혜라는 공통 교리를 다룸에도 불구하고 예정론 냄새가 같이 느껴지는 듯하다. 하지만 이 정도는 꼭 장로교가 아니어도 크게 신경 안 쓰고 부르는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21/07/30 08:33 2021/07/30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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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탄 십용사

본인은 작년 말쯤에 본인과 같은 진영에 속한 이웃 교회 형제들과 교제할 일이 있어서 화성 동탄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반원 모양의 방사형으로 만들어진 시가지가 인상적이었는데.. 외곽의 도로에는 웬 '십용사로'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흠, 육탄 십용사 멤버 중 일부가 이 지역 출신이기라도 했나 보다.

3년쯤 전에 도로명을 통해서 우연히 이 윤탁 한글 영비를 알게 된 것처럼.. 도로명을 잘 지은 게 나름 지역 역사를 아는 데 도움이 된다.
저기는 아예 육탄 10용사 기념 공원까지 길목에 있는 걸 봤다. 다만, 시간과 동선 관계상 개인적으로 들러 보지는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군사 정훈 차원에서 기리는 여러 인물과 사건들 중, 육탄 10용사는 극히 드물게, 거의 유일하게 6 25 사변 "이전"의 굉장한 옛날이 배경이어서 이질적이다. 1년 남짓 전이던 1949년 5월, 지금 같은 휴전선이 아니라 38선이 아직 유효했고 개성 시내가 남한 땅이었던 시절이다.

문제는.. 38선에 따르면 개성 시내는 남한이지만, 바로 북쪽의 고지대인 송악산 중턱과 정상이 북한 땅이어서 남한이 방어하기가 매우 불리했다는 것이다. 북괴는 6· 25를 벌이기 전부터 여기에서 수시로 툭탁거리고 국지전 시비를 걸면서 남한을 귀찮게 했다. 그래서 그걸 견제하려면 북괴가 송악산의 남쪽 기슭에 만들어 놓은 벙커라도 파괴해야 했다.
(뭐, 그 시절 용어로는 벙커 대신 러시아어 '토치카'가 더 즐겨 쓰인다. 휴전선의 길이도 킬로미터가 아니라 꼭 155 '마일'이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때 특공대에 자원해서 혈혈단신으로 괴뢰의 토치카를 수류탄으로 까 버리고 전세를 뒤집고 송악산 고지의 탈환에 큰 공을 세운 용사들이 열 명이었고 '육탄 10용사'라고 전해진다. 이들은 적진에서 장렬히 산화했다고 한다.
그러니 나라에서는 이 사람들을 진정한 군인 애국자라고 아주 성대하게 기념했다. 동상 만들고 노래 만들고 학교에서 가르치고 이름을 딴 군부대와 상 등도 제정하고 별 짓을 다 했다.

전쟁터라는 게 한 사람의 뻘짓 때문에 수십 명이 몰살당할 수 있고, 반대로 한 사람의 희생 덕분에 수십 명이 목숨 건질 수도 있는 동네이다. 그리고 옛날에는 지금보다 인명 경시 풍조가 더 심했으며, "이기든지 죽든지", 멸사봉공 진충보국 같은 관념이 더 강했다는 것도 감안할 점이다.

하지만, 저 사람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송악산 기슭과 개성 시내는 6 25 전쟁 때 결국 지못미가 돼서 완전히 북한으로 넘어갔다.
게다가 저 사람들도 죽은 게 아니라 작전에 실패했으며, 전부나 일부가 포로가 되어 북으로 끌려갔다는 증언이 훗날 나오기도 했다. 심지어 북한의 대남 방송에서도 육탄 10용사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어느 병사가 출연해서 자기 고향과 가족 인증을 했댄다..;;

너무 옛날 일인지라 이제 와서 정확한 진실을 알기는 난감하다.
다만, 북한에서 존재를 인정하고 언급한다고 해서 걔네들 말이 언제나 다 맞는 건 아니다.
북한에서 뜬금없이 효순이 미선이 자리를 만들고 추모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걔들이 무슨 대공 안보 관련 사건에 휘말렸거나 미군의 '악질 범죄'에 희생된 건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무슨 광주에 투입됐던 대남 공작원의 묘지인지 위령비인지를 만들었다면서 5 18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 걔들은 자기와 아무 관계 없는 4 19 의거나 6 29 민주항쟁 등도 자기들이 이용할 가치가 있으면 제멋대로 기념하고 선동 자료로 써먹는다.
그리고는 정작 진짜로 침투했던 대남 공작원이나 6 25 공산군 병사들에 대해서는 나몰라라 하면서 존재를 부정하고 유해를 가져가지 않는다.

즉, 이런 쪽으로는 북괴의 대처가 일관성 없이 제멋대로인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쟤들의 반응만을 직접적인 근거로 받아들이기는 곤란하다. 육탄 10용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정황상 그 시절에 10명의 특공대가 조직돼서 폭탄을 들고 송악산 고지를 향해 달려갔다는 사실 자체는 팩트이지만.. 그 이상 정확한 사건의 결말을 알기는 어려워 보인다. 거기가 무슨 철원 백마고지마냥 6 25 때 피로써 수복해 내서 지금 전해지는 영토인 것도 아니고, 또 지금이 옛날처럼 카미카제 같은 전술이 마냥 미화되는 시기인 것도 아니니..

그러니 육탄 십용사는 문자적 적용보다는 '영적 교훈'이 더 의미를 갖는 영역인 것 같다. 북괴 몰아내고 개성 시내를 대한민국 국민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는 날이 오면 해당 장소에 대한 고증과 재조사 발굴이 대대적으로 필요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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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현충원에 있는 육탄 10용사 현충비. 굉장히 옛날(2007년!)에 찍은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또 달라졌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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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21/07/05 08:35 2021/07/0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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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죽다 살아나온 사람

"한글이 목숨"....;;; 이라는 압도적인 문구를 남긴 외솔 최 현배 선생(박사).
그리고 "죽으면 죽으리라"라고 한국 교회에 큰 족적을 남긴 안 이숙 여사.

이분들은 대놓고 정치· 군사· 외교 쪽으로 항일 독립 운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어 한글, 그리고 기독교 신앙이라는 자기 관심분야를 통해서 한국은 일본과 같지 않고 우리 민족은 일본이 강요하는 천황 숭배와 전쟁 프로파간다에 따를 수 없음을 주장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저것 말고도 굉장한 공통점이 있다. 무엇인지 아시는가?

일제 말기에 투옥됐고, 1945년 8월 18일에 형무소에서 처형될 예정이었는데 그 전날 17일에 극적으로 석방됐다는 일화가 전해진다는 것이다. ..;; 이건 검증 가능한 사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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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현배는 조선어 학회 사건 때문에 1942년에 체포· 투옥돼서 징역 4년형을 받고 함흥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안 이숙의 기록은 정확도가 더 떨어지는 것 같다. 1939년에 일본 국회의사당에서 불온삐라(?)를 뿌린 뒤 체포됐는데 굳이 조선의 서대문도 아닌 평양 형무소에 옮겨져서 해방될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무슨 죄로 징역 몇 년을 선고받았는지는 모르겠다. 둘 다 이북 지역이긴 하네..
(뭐, 주 기철 목사도 정식 재판과 형 선고 없이 그냥 경찰서 명의로 멋대로 구금 당한 채로 옥사함)

이 자리에서 모든 정황 근거를 나열할 수는 없지만.. 일제는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고 자기 나라가 망하는 최악의 상황이 올 경우.. 식민지의 형무소 죄수들을 몽땅 죽여 버리고, 본토 안에 있는 조선인들도 어떻게든 제압하고 해코지하고 같이 동귀어진할 시나리오 정도는 준비해 놓고 있었다.
히틀러가 전쟁에서 지자 프랑스 파리를 포함해 자기 휘하의 도시들을 몽땅 불살라서 없애려 했던 것과 정확히 같은 심리, 같은 이치이다. 북괴도 무력 싸움에서 지게 되면 저런 식의 자폭을 얼마든지 감행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은 원자폭탄 두 방으로 인해 일본이 8월 15일에 갑작스럽게 항복하고 허겁지겁 본토로 돌아간 건 우리 입장에서도 굉장한 호재이고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전쟁이 장기화됐으면 굳이 8월 18일이 아니었더라도 저 사람들 다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뭐 광복군이 참전을 못 해서 나라가 분단됐네..? 애걔 그 병력으로 싸우긴 뭘 싸우냐, 아무 영양가 없는 소리이다.

그런데 정말로 쟤들이 8월 18일에 최소한 함흥과 평양.. 전국의 모든/대부분의 형무소에서 사형 판결을 받지도 않은 죄수들을 제멋대로 한꺼번에 몽땅 죽여 버릴 계획을 세워 놓았었는지는 나로서는 판단을 못 내리겠다. 비밀 행정 명령 문서 같은 거 나오는 게 없으려나..?? 8월 18일이 또 다른 D-day이기라도 했는지 말이다.

2. 일제 말기의 한국 교회 강제 통합

안 이숙 여사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잘 알려지지 않은 그 시절 얘기를 하나 첨언하자면..
1945년 7월, 우리나라의 모든 기성 기독교 교파들은 일제에 의해 강제 통합되어 '일본 기독교 조선 교단'이라는 단일 교파로 잠시 들어갔던 적이 있었다. 이건 갑자기 하루아침에 된 게 아니라 거의 1940년대 초부터 일제가 한 교파씩 야금야금 회유시키거나 없애면서 집요하게 노력한 끝에 이뤄낸 것이었다.

이제 무슨 평양 봉수교회마냥 어용 단일 교파만이 공인 정통이고, 나머지는 몽땅 비인가 이단이 된 것이다. 주 기철 목사가 순교한 지도 1년 넘게 지난 때이고, 내가 보기엔 이건 신사참배 이상으로 교회의 정체성을 훼손한 더 심각한 문제 같은걸..? 그러나 다행히도 이 상태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일제가 그로부터 겨우 한 달 남짓 뒤에 완전히 패망했기 때문이다.

미군정이 시작되었던 1945년 9월 8일, 서울 새문안 교회에서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등 기존 교단 교파 지도자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다.
그리고 긴 토론 끝에 통합 상태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교파별로 다시 찢어지고 각자 제 갈 길 가기로 결의했다. 이것은 마치 정교분리만큼이나 불가피하면서도 바람직한 결정이었다. 그리고 이런 거야말로 진정한 일제 잔재 청산이었다.

3. 과거 커밍아웃

박 영희 여사는 함흥여고보에 재학 중이던 1942년경, 전혀 의도치 않게 조선어 학회 사건이 벌어지는 빌미를 제공했다. (자세한 내역에 대해서는 이전 글을 참고할 것.)
저분은 그 당시에는 경찰서에 연행돼서 고생 좀 했지만 곧 풀려나고 학교를 무사히 졸업도 했는데.. 그 뒤로 저런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엄청난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이 사건을 일생의 비밀 흑역사로 치부한 채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다.

그랬는데 40년이 지난 1982년 여름, 일본에서 자기네 역사 교과서를 개정해서 침략을 진출이라고 수정하고 일본어 강요를 자발적인 일본어 선택 같은 식으로 말을 이상하게 바꿨다는 게 알려지면서 한국과 중국이 크게 반발하게 됐다. 이때 이분은 자신이 조선어 학회 사건의 발단이 됐던 그 여학생 박영희였다고 커밍아웃을 했다.

“아직 나 같은 역사의 증인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일본놈들은 아직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너무 뻔뻔합니다. 나 때문에 고초를 겪으신 분들께 너무 죄송합니다” 라고 언론에다 인터뷰를 했다. 그게 1982년 8월 2일자 중앙일보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이것도 지금도 검색해 보면 나온다.

이분은 1982년 당시에 환갑을 앞둔 58세였다고 소개됐다. 그러니 한국식 나이라면 1925년생이겠다.
이분은 그 뒤로 딱히 다른 근황이나 소식 없이 평범하게 살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분이 지금도(2021년) 살아 있을 확률은 극히 낮을 것이다. 1982년 이후로 또 거의  4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러 있으니..

그리고 저 박영희 여사보다 훨씬 더 유명한 사람.
김 학순 할머니(1924-1997)는 1991년 8월 14일, 자신이 태평양 전쟁 기간에 타지에서 일본 군인들에게 납치와 윤간을 당하고 강제로 일본군 위안부 노릇을 하다가 살아서 나온 피해자라고 국내에서 최초로 공개 증언했다. 요즘 용어를 동원하자면 일종의 ‘미투’ 운동을 시작했다.

박 영희 여사와 거의 같은 연배이고, 위안부로 끌려갔다는 시기도 41~42년 사이.. 조선어 학회 사건과 아주 비슷한 시기이다. 그랬는데 전자는 그나마 학교를 다니던 중에 저런 사건을 겪었고, 후자는 그렇지 못하고 더 험한 일을 당했다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커밍아웃을 한 시기가 9년 정도 차이가 있다.

최 현배 박사 vs 안이숙 여사 다음으로는 박 영희 여사 vs 김 학순 할머니 비교가 나왔다. 판단은 각자 알아서..
그래서 나는 1980년대, 길어야 90년대까지 아직 암울하던 시절에 반일 하던 것은 그럭저럭 진정성을 인정하지만, 2010년, 2020년대에까지 뗑깡 부리듯이 되도 않은 반일 거리는 것은 진정성 신빙성을 굉장히 의심하고 반쯤 정신병으로 치부한다.
여사와 할머니라는 호칭은.. 중요한 커밍아웃을 하던 당시의 나이를 감안해서 서로 달리 붙였다.

4. 조선어 학회와 한글 학회의 사무실

정 세권(1888-1965)이라고 일제 시대인 1920년에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근대식 부동산 개발 회사인 ‘건양사’를 설립해서 건축 사업을 진행한 기업가가 있다. (☞ 관련 링크)

일제 시대에는 남산과 남대문에서 가까운 용산-중구 일대엔 일본인이 주로 살았고(지금의 서울/경성 역도 처음엔 이름이 남대문 역)..
좀 더 북쪽으로 서대문 근처 중-종로구 일대엔 조선인이 주로 살았다. 경부선 철도가 맨 처음 생겼을 때는 서대문 역이 경성 역 역할을 했는데 3· 1 운동 이후에 그 구간이 없어졌다.

이에, 정 세권은 일본인의 주거 구역이 서울의 북쪽으로 더 올라오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서 종로구 북쪽에 한옥 주택을 많이 지을 생각을 했다. 지금의 북촌 한옥 마을도 이때 그의 계획에 따라 조성된 주택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사업을 하면서도 항일 독립운동을 적극 도왔다.
특히 국어사전을 편찬하고 있던 조선어 학회에다 건물을 기부해서 사무실을 무료로 마련해 줬다~! 영화 <말모이>에서도 주된 배경으로 나오는 그 작업실 말이다.

딱 종로에다가 사무실을 마련해 줬기 때문에 거기서 일하던 간사장 이 극로 선생이 눈병에 걸렸을 때 근처의 공안과를 찾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공 병우 박사가 안과 의사에서 한글 덕후 세벌식 타자기 발명가가 되도록 동기를 불어넣을 수 있었다. 사건의 인과관계가 이렇게 연결된다.
정 세권은 건축과 자금으로 민족 정체성(!!)을 지킨 큰 공로가 인정되어 사후에 당연히 각종 훈장이 추서되었다.

그리고 조선어 학회는 해방 후에 한글 학회로 간판을 바꿔 단 뒤에도 장소와 관련된 혜택을 받았다.
지금까지 입주해 있는 광화문 근처의 빨간 벽돌 한글 회관은 1970년대에 지어진 것이다.
이거 건립을 위해 대한민국 초대 법무부 장관을 역임한 애산 이 인 선생이 사재를 무려 3천만 원이나 기부했고.. (당시 현대 포니 승용차 한 대가 230만 원 남짓) 그걸로도 모자라 죽을 때 자기 재산을 몽땅 한글 학회에다 기증했다.

그리고 박 정희 대통령이 1억 원을 기부하고 그걸 당시 영애이던 박 근혜가 직접 전해 줬다고 전해진다.
한글 회관은 이런 식으로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지어졌다. 4년쯤 전에 블로그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또 한번 이렇게 복습해 보았다.

Posted by 사무엘

2021/06/18 08:35 2021/06/1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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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 안의 마을들

우리나라 영토는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다. 휴전선이라고도 불리는 군사분계선이 중앙에 있고, 거기 곁을 비무장지대와 민간인 통제 구역이 감싸고 있다. 여기 주변은 위험하기 때문에 비행 금지 구역임은 물론, 지리 정보가 민간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다. 여기서 민간 지도란, 자동차 내비게이션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전자는 원칙적으로 군인과 민간인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고 가끔 GP를 지키는 소수의 군인들만이 경찰처럼 둔갑해서 몰래 들어간다. 그 반면, 후자는 민간인만 출입 금지이다. 거기에 조상 대대로 밭이나 묘소를 소유하고 있던 사람이 농사나 성묘 같은 정당한 볼일이 있을 때만 인근 군부대의 허가를 받고 낮 시간대에 한해 드나들 수 있다.

그럼 전국의 모든 민통선 안(= 민통선 이북)은 밤엔 군인을 제외하면 쥐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암흑 지대인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거기에 주민이 상주하는 마을도 있기 때문이다.

그 원조 1호는 판문점에서 제일 가까이 있고 휴전 직후부터 조성됐던 대성동 마을이다. 이 마을은 처음부터 이 근처에 존재했던 마을이며, 6· 25 정전(휴전) 협정에 따라 존재를 인정받고 보장받았다.
여기는 휴전 회담이 진행된 판문점의 근처인 덕분에, 1951년 하반기부터는 전쟁의 포화에 휘말릴 일이 없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 대신 여기는 우리나라가 땅을 수복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방어하기 불리한 곳을 포기하게 됐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해주 반도와 개성 시내를 내어주고 북한이 서울과 더 가까워졌다.

사실 대성동 마을 일대는 민통선과 남방한계선의 구분도 아직 없어서 코앞이 군사분계선이며, 강원도 전방에다 비유하자면 아예 비무장지대 안이나 마찬가지이다. GOP도 아니고 GP가 있을 곳에 민간인 마을이 있다는 뜻이다. 그만치 엄청나게 위험하고 거주민들의 행동과 이동에 제약이 크다.

한때 우리나라 대성동과 건너편 북한의 기정동에서 국기 높이 달기 병림픽(?)을 벌인 적이 있었고, 그게 초등인가 중인가 도덕/윤리의 마지막 단원 북한 통일 문제에서 언급되기도 했다. 나중엔 남한이 그냥 gg 치고 손 떼서 북괴의 160m짜리 깃대가 한동안 세계에서 제일 높은 깃대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는데.. 구체적으로 몇 년대에 벌어진 일인지는 아무리 찾아 봐도 정확한 기록이 나오는 게 없다. 팩트 확인이 잘 안 된다.

나중에는 저기 말고도 통일촌, 해마루촌, 횡산리 등 민통선 안 마을들이 몇 곳 더 조성됐다. 아래 그림을 보시라.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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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민통선 마을은 출입이 까다롭긴 하지만, 대성동만치 군사분계선과 북한이 코앞이고 위험하고 유엔군의 통제를 받을 정도로 수위가 높은 곳은 아니다. 그림에서도 대성동은 다른 마을들과는 성격이 다름을 언급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통일촌이나 해마루촌은 파주의 도라 전망대 및 제3 땅굴 임진각 안보 관광 패키지에도 포함돼 있어서 일반인이 비교적 쉽게 찾아갈 수 있다. 그러나 대성동을 아무 연고 없는 일반인이 단순 호기심 차원에서 관광..??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쪽의 관광 난이도는 판문점의 관광 난이도와 대등하다.

이런 마을들은 전쟁 때 원주민들이 다 피난 가면서 폐허가 되고, 그 상태로 민통선 구역으로 봉인됐다가 뒤늦게 마을로 재건되었다. 사람을 받아들일 거면, 밭은 몰라도 주택이 있는 곳은 그냥 민통선에서 해제해 주지 싶은 생각도 든다만.. 지형상의 한계나 군사 관리의 편의성 때문에 그리 하지 않은 것 같다.

철원에 이런 마을이 유난히 많은 이유는 저기가 넓은 평야를 낀 천혜의 곡창 지대이기 때문이다. 6 25 때 우리나라가 수복해 냈고 김일성이 빼앗긴 걸 통탄했을 정도인 금싸라기 땅이다. 그 유명한 민통선 안 메기 매운탕 식당인 '전선 휴게소'도 이 지대(정연리-유곡리) 사이에 있다.

그 반면, 철원보다 더 동쪽부터는 산세가 더욱 험해지고 지형이 너무 메롱이 되는 관계로, 민통선 마을 같은 게 없으며 거주민도 없다. 가령, 동쪽 끝의 고성군 수동면 같은 곳은 마을이 산과 휴전선으로 완전히 고립되게 생겼으니 주민들이 모두 이주하게 되었다. 그래서 거기는 주민이 전무하여 사문화된 행정구역으로 전락했다.

그림에 표시된 마을들 중에서 마현1리는 혼자 조성 시기가 1959년인 게 이색적이다. 얘는 바로 그 시기에 나라의 동남부 지방을 깡그리 삭제해 버린 태풍 ‘사라’의 피해 이재민들이 이주해서 개척한 마을이기 때문이다.
어느 지역이냐 하면 부산이 아니라 무려 울진이다. 1963년 이전엔 울진이 경북이 아니라 강원도 소속이었던 관계로, 강원도 도지사가 이재민들에게 이 참에 정부 지원금도 받아서 같은 강원도인 철원으로 이주를 주선했다..;;

그렇게 66세대 359명의 주민들이 군용 트럭 23대를 나눠 타고 저 마을로 가는 데만 3박 4일이 걸렸다고 한다. 그 시절에 울진에서 철원까지 가는 경로에 아스팔트로 잘 포장된 도로 따위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들은 한동안 군용 텐트에서 살면서 근성으로 황무지를 일궈서 밭을 만들었다. 여기가 한때 격전지였던 관계로 땅 조금 파면 탄피들이 무슨 광물처럼 튀어나왔나 보다. 그걸 주워 팔아서 입에 풀칠을 했다.

그랬는데 이듬해 봄엔 이 승만 정권이 갑자기 무너지면서 마을에 파격적인 지원을 약속했던 강원도 도지사와 철원 군수는 모두 교체됐다. 이 사람들이 마현1리에 정착한 때가 1960년 4월 7일이니 4 19 의거로부터 겨우 두 주 전... 말 다 했다. =_=;;
그리고 기껏 고생해서 밭을 일궈 놨더니 여기에 진짜 원래부터 살았던 원주민이 찾아와서 땅 내놓으라면서 소송을 걸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자금이 부족한 입주민은 여기서도 소작농 신세로 전락하기도 했다.

이 마현1리 이주민촌은 30년전 경상도지방을 휩쓸고 지나간 태풍 사라호 (59년9월17일)에 가옥과 전담을 모두 떠내려보낸 경북 울진군 일대의 농민 66가구가 정든 고향을 등지고 새 삶을 시작한 곳이다.
(...)
조국강토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동족상잔의 흔적만을 안은채 갈가리 찢겨버려져 있던 민통선 안쪽 황무지.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기름진 철원 평야의 한 부분이었지만 이들이 도착했을 때는 우거진 잡초더미와 6·25가 남겨준 온갖 잔재들만 눈앞에 가득할 뿐이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국군과 인민군의 훈련 포성에 몸을 떨며 군용 천막을 치고 개간의 삽질을 시작했다.
부르튼 손으로 잡목과 온갖 무기 파편·돌등을 제거하고 우거진 싸리숲을 없애기 위해 몸에는 상처가 가실 날이 없었다.

곳곳에 처박혀있는 불발포탄의 위험 속에서도 『이 땅을 일구어야만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개척의 삽질은 끝없이 이어졌다.
눈앞의 황무지가 옥탑으로 변할 생각을 하며1인당 2·5홉씩의 배급잡곡으로 허기진 배를 달랬다. (☞ 출처)


이때 선조들이 얼마나 고생했으면.. 그로부터 30여 년 뒤인 1989년, 마현리 주민의 세대가 바뀔 즈음에 건립된 입주기념비에는 "그대들은 알아야 한다. 조국강산의 가장 중심된 이 농토가 누구의 피땀으로 가꾸어졌는가를…. 괭이와 호미로 6·25 동란 이후 버려진 황무지를 옥토로 가꾼 개척 정신의 빛나는 업적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라는.. 정말 피를 토하는 듯한 비장하고 처절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

핵심은 대성동 말고도 민통선 안에 자리잡은 민간인 마을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중에서도 마현리 주민들은 실제 이곳 출신이 아니며 오히려 진짜 여기 원주민들과 분쟁을 겪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더 관심 있으신 분은 다음과 같은 다양한 기존 보도 자료들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 링크 1, 링크 2, 링크 3, 링크 4)

그리고 요즘은 마현리는 주변의 밭은 몰라도 마을 자체는 민통선 안이 아닌 것 같다. 국도 5호선에서 멀쩡히 진입할 수 있고 마을 내부도 버젓이 로드뷰가 제공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의 이길리에 소재한 마을은 민통선 안이다. 72~73년에 조성된 민통선 마을들, 특히 이름이 대놓고 통일촌이라고 지어진 저 마을은 임진각이 건립되면서 같이 만들어진 거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해마루촌은 시기가 시기인 만큼 김 대중 대통령의 햇볕 정책 내지 경의선 연결과 같은 맥락에서 조성된 실향민 마을이다. 상공에서 보면 마을 도로가 높은음자리표 모양으로 꼬불꼬불하게 만들어져 있는 걸로 유명하다.

끝으로, 철원도 아니고 서쪽 끝도 아닌 중간(연천)에 마을이 딱 하나 있는 게 연천의 횡산리이다. 시기도 혼자 1977년으로 따로 떨어져 있는데.. 얘는 임진강과 군사분계선의 선형이 굉장히 교묘하게 꼬이는 곳에 있어서 뭔가 섬 같은 느낌이 들며, 제2의 대성동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여기는 특별한 사연 없이 원래 여기서 살던 사람들이 나중에 민통선 마을이 조성됐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온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정확하게는 1977년, 1985년 두 차례에 걸쳐서이다.

이상이다.
대성동 마을의 주민이 납세와 병역의 의무가 면제된다는 건 이제 다들 알려질 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나무위키에는 거기뿐만 아니라 저런 다른 민통선 마을 거주민에게도 같은 혜택이 적용된다고 쓰여 있는데.. 실제로 그러한지 법적 근거를 잘 모르겠다.

병역법이나 병역법 시행령 등 관련 법을 아무리 찾아봐도 장애인이나 탈북자가 면제이지, 저 지역 출신에 대한 언급은 딱히 안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육지 말고 바다 쪽 민통선도 생각해 봐야 한다. 교동도는 통제가 아주 느슨하긴 하지만 그래도 민통선에 속한 곳이며, 백령도나 연평도 같은 서해5도도 개념적으로 대성동 및 타 민통선 마을에 준하는 특이한 오지이다. 그러니 면제 혜택을 주려면 그쪽과의 형평성도 생각해야 한다.

물론 저 정도로 특이하게 사는 극소수의 사람들한테, 부정 수급의 가능성도 전무한 혜택을 주는 것 자체야 형평성 불만이 제기될 여지가 없다. 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민통선 마을들과 대성동을 완전히 같은 급에 두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지난 2019년경엔 대성동 마을 토박이인 어느 친자매(유 수빈· 유 정빈)가 대학 졸업 후에 무려 여군 장교를 같이 나란히 지원해서 매스컴을 탔다. (☞ 관련 링크)
남자였어도 합법적으로 군대를 안 갈 수 있는 신분인데 여자가 그것도 언니와 동생 둘 다 군대 쪽으로 진로를 정했다니 매우 특이한 경우가 아닐 수 없다. 어릴 때부터 맨날 군인들을 보고 살았는데 자기도 그런 군인처럼 남을 돕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세상엔 이런 일도 있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1/05/09 08:33 2021/05/09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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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일제가 조선의 주권을 빼앗고 저지른 만행 중에서 물자나 노동력을 저렴하게 착취한 것, 사람을 차별 대우한 것, 독립 운동을 탄압한 것 자체는 아무래도 식민 통치를 하고 식민지에서 뽕을 뽑으려는 주체로서 당연히 할 만한 짓을 한 것이다.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우생학과 제국주의가 만연하던 그 시절에 일제만의 독보적인 악행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더구나 조선에서의 양반 쌍놈 차별이라든가 기존 탐관오리들의 악행도 같이 비교한다면 상대적인 수위가 더욱 낮아진다.

그 반면, 일제 말기의 태평양 전쟁 관련 뻘짓과 악행은 성격이 좀 다르며 별개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1) 일반적인 차별과 착취, 그리고 (2) 전쟁 준비에 속하지 않으면서 일제가 특별히 큰 죄악을 저지른 것, 정당하지 않은 명분으로 조선 민간인을 싹 학살한 만행을 추려내면 제암리 학살이라든가 관동 대지진 학살 정도가 남는다. 특히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위안부보다도 관동 대지진 학살이 죄질이 더 나쁘다고 본다.

뭐, 일제도 한 마을 사람을 아무 이유 없이 싸이코패스마냥 몰살시키고 마을을 지도에서 지워 버린 건 아니었다.
3· 1 운동 만세 시위를 진압하던 헌병인가 누군가 한두 명이 성난 군중에게 구타 당해 죽었다. 그러자 일제는 범인이 저 마을 사람 중에 있다는 명목으로 보복을 저렇게 저지른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처음엔 태극기만 들고 평화롭게 함성 지르며 행진하던 시위대가 격분· 흥분한 건 일본 헌병들이 실탄을 발사하고 피를 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유 관순 같은 시위대 리더들이 우리까지 폭력으로 나서면 안 된다고.. 그랬다가는 더 큰 보복을 당하고 만세 시위가 더 큰 참극으로 바뀐다고 군중을 말렸지만 혼란스러운 와중에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았다.

결과는 잘 알다시피.. 처음에 일부 헌병 주재소가 박살나고 유치장 수용자들이 풀려나긴 했지만, 일본 쪽의 추가 지원 병력이 도착한 뒤부터는 시위대는 공중분해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헌병들도 흥분해서 다 죽이거나 잡아 가두고, 마을 집까지 불지르게 되었다.

이때는 오늘날 민주 국가의 경찰처럼 폴리스라인 치고 공포탄 경고 사격부터 몇 발 한 뒤에 암염탄이니 테이저건이니 발사하는 신사적인 매뉴얼이 없었다. 일제 저놈의 입장에서도 남의 나라 식민 통치라는 건 처음 해 보고, 반항하는 애들에 대해서는 그냥 닥치고 총칼로 위협하고 고문하고 죽여서 제압한다는 매뉴얼밖에 없었다.
(하물며 우리나라조차도 해방 이후에 4 19 같은 시위를 진압할 때 잘 알다시피 경찰이 대놓고 시위대에게 총질을 할 정도였다. 그때는 보고 배우고 행한 관행이 그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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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제암리 학살은 이런 배경에서 벌어졌다.
석 호필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프랭크 스코필드 선교사가 제암리 학살 현장의 참상을 촬영하고 세계에 타전해 줬다.

우리 선조들은 민족 자결주의 하나만 달랑 믿고 무슨 "꿈은 이루어진다"마냥 "대한 독립 만세"를 열심히 외치면 진짜 일제가 물러날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냉정한 현실에 비춰 본다면야 3· 1 운동은 그냥 숱한 인명과 재산의 피해만 야기한 순진해 빠진 망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런 희생을 치른 덕분에 조선은 일본과 다른 민족이며 일제의 통치를 원하지 않는다는 메시지 하나는 세계에 확실하게 전하고 일제의 입장을 굉장히 난처하게 만들 수 있었다. 전술의 패배 대신 전략의 승리를 얻은 건지..?

강대국이 식민 통치를 하는 것 자체는 합법이고 관행이던 제국주의 시절에도 "당신 일본은 식민지를 얼마나 개판으로 관리했으면 10년을 못 채우고 저런 대규모 항쟁이 전국에서 벌어졌냐? 그리고 그걸 또 그 따구 방식으로 겨우 진압했냐?"라는 질타가 들어왔을 정도였다. 그러니 조선 총독도 본토로부터 당연히 내리갈굼을 먹었다. -_-;;

그래도 3· 1 운동 같은 발악이 있었던 덕분인지 일본 내부에도 조선의 식민 통치를 반대하고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는 소수의 일본인이 생겨났으며, 그 흐름이 지금까지 이어져서 자국의 만행을 사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거 마치 임진왜란 시절에 조선으로 귀순한 왜군 장수를 보는 듯한 느낌인데.. 이런 사람들이 제일 최근에 대대적으로 매스컴을 탄 건 2년 전, 2019년 2월경이다. (☞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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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과거 침탈을 깊이 사죄합니다.
'이젠 됐어요'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계속 사죄하겠습니다."

"주여, 식민 통치 시절 일본 관헌들에 의해 가장 험한 사건이 일어난 곳이 이곳 제암 교회였습니다. 당시 일본은 3·1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주민들을 고문하고, 학살하고 교회를 불태웠습니다.
일본 정치인들은 한 번도 사과하지 않고 있습니다. 나쁜 짓을 했으면 사과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주여, 우리 일본인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지금 최악의 한일 관계가 호전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이룰 수 없습니다. (저희 사죄는) 작은 일이지만 주께서 저희를 사용해 주시고, 인도해 주소서. 아멘."


우와, 읽는 내가 눈물이 나려 한다. (반어법이 아님!)
저 사람들이 다른 사회· 정치 쪽으로 다른 이상한 운동에 연루돼 있지 않고, 신학 노선이 그리 이상한 곳도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난 저 사죄가 진심 레알임을 인정한다.

정치인들의 정식 사죄?? 바라지도 않는다. 사실 외교적으로는 우리나라는 이미 일본의 까임권을 다 써 버린 지 오래다. 그걸 아직도 우려먹는 게 비정상이고, 외교 신뢰를 깎아먹는 바보짓이다. (이제 더 논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퉁쳤잖아! 그런데 이거 뭐 정권이 바뀔 때마다 말이 달라지니..)

정치인이 아니면 민간에서라도.. 저렇게 자기 나라 참전 때문에 남북 분단을 영구히 고착시켜 버린 것을 안타까워하고 미안해하는 대륙 사람이나 조선족이 어디 있나? 비열한 전쟁과 테러 공작에 대해서 진심으로 유감스러워하고 화해하고 싶어 하는 동족이 이북에 어디 있긴 하냐?
이러니 내가 종북이 친일보다 더 나쁘다고 논리적으로 정정당당하게 주장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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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대표 기도를 한 '오야마 레이지'(尾山令仁)라는 목사는 나이가 이미 90을 넘은 고령인데..
행적이 정말 엄청난 분이더라. 제암리 학살에 대한 사죄와 추모를 50년 이상 전부터, 1965년 한일 수교가 최초로 이뤄졌던 시절부터 일평생을 바쳐 해 왔다!
1969년 4월 15일, 인류가 아직 달에도 가기 전이었던 시절의 중앙일보 보도를 보자. (☞ 링크)

오야마 이마히도(미산금인).. 저 사람 맞다. 령을 금이라고 표기한 건 종이 신문 OCR의 한자 판독 오류일 테고..
그는 진작부터 하나님께 나아오기 전에 니 형제와 화해부터 먼저 하라(마 5:23-24)는 말씀으로부터 깊은 부담을 느꼈고, 60년대부터 "일본은 히로시마· 나가사키를 기억하기 전에 제암리부터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 링크)

"제암 교회 방화 사건 속죄 실행 위원회"라는 걸 만들어서 자국에서 성금을 1천만 원(50년 전 물가.. 책 한 권 가격이 백원대 단위이던 시절)을 모아서.. 제암리 교회를 재건하고 주민 의료 진료소까지 만들려고 했다...;;

감리교 교단에서는 이를 환영하고 동의했으나(오리지널 제암리 교회도 감리교였음).. 문제는 민심이었다.
제암리 학살 피해자 유족들은 "왜놈들의 더러운 돈으로 교회를 세우는 건 순국선열에 대한 모독이다. 죽어도 결사 반대!!" 이렇게 나오면서 성금 따위 한 푼도 안 받으려 했으며, 오야마 씨를 만나 주지도 않았다.

1960년대의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반공과 반일이 가히 하늘을 찌를 기세였던 시절이다. 일가족이 몰살당했던 유족들의 저 까칠한 반응에 대해서도 후손인 우리 세대가 뭐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오야마 목사는 저런 냉대조차도 담담히 감내하면서 몇십 년을 한결같이.. 2019년까지도 "일본의 과거 침탈을 깊이 사죄합니다. 주여, 우리 일본인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래 왔던 것이다. 한국, 일본 모두로부터 그다지 지지나 환영받지 못했는데도 말이다.

이 정도면 대인배만으로는 표현이 부족하고.. 예수쟁이로서 좀 거시기한 표현이긴 하지만.. 가히 보살 급이지 않은가..??
이 뿐만이 아니다. 쟤들은 무려 2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의사자 이 수현 씨를 아직도 기억하면서 매년 추모식을 연다.

JR 서일본(☞ 링크)은 2005년 후쿠치야마 선 탈선 사고에 대한 사죄와 반성 문구를 자사 홈페이지에다가 15년째.. 지금까지도 사실상 영구 박제 수준으로 걸어 놓고 있다. 이런 걸 보면 일본인의 근성에 참으로 놀라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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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야마 이마히도 목사도 신학을 한 구체적인 배경은 잘 모르겠지만.. 한국인으로서 꼭 기억할 만한 양심적이고 훌륭한 일본인이라 하겠다. 얼마 안 있으면 소천해서 근황을 못 보게 될 수도 있다.

그럼 제암리 학살과 관련하여 다른 이야기 하나만 더 꺼내고 글을 맺겠다.
미국 독립 전쟁을 배경으로 20년 전 옛날 영화 '패트리어트'에서는 영국군 레드 코트들을 개 싸이코 악마 병신으로 묘사하기 위해, 어디서 본 건 있는지 제암리 학살 사건을 오마주 한 듯한 장면이 들어갔다.
니들이 식민지군 반역자들을 숨기고 있다는 죄목으로 주민들을 예배당 안에 한데 모아 놓고 문을 못질 하고 건물을 불지른 것.

하지만 영국군이 그런 잔학한 짓까지 실제로 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영국은 이 장면에서 언짢은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심지어 제암리 학살조차도 여자, 아이들까지 다 예배당에다 가두고 문에 못질을 한 건 아니었다고 사료가 정정되고 있다. 키가 일정 수준 이상인 15세 이상 남자만 죽였다고.. 뭐 그것도 비무장 양민에 대한 반인륜적인 학살인 건 변하지 않지만 말이다.

심지어 그때 불타는 예배당 안에서 어떤 여인이 "제발 우리 아이만은 살려 주오"라고 담요에 둘러싸인 아기를 밖으로 내밀었는데 헌병들이 칼질을 했던가 총질을 했던가.. 그런 얘기까지 전해지는데.. 그것도 일단은 현실성을 의심해야 할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21/04/24 08:35 2021/04/2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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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특히 20세기 중반 이전)와 오늘날 사람들의 평균적인 가치관, 윤리관은 서로 적지 않게 달라 보인다.
뭐,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거나 도둑질과 살인이 나쁘다는 것 정도야 예나 지금이나 불변이겠지만,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처럼 어정쩡한 문제.. 예를 들어 사형 제도나 동성애 같은 것은 종교관이 개입하지 않은 상대주의 다원주의만 갖고는 확고한 답이 나오기 어렵다.

과거에는 지금보다 체면, 위신, 위계 질서, 명예를 따지는 성향이 더 컸으며 "안 되면 되게 하라, 이기든가 죽어라" 근성과 의지드립을 더 강조하는 편이었다.
그 반면 오늘날은 그때보다 실리, 인권을 더 따지는 편이다. "이길 수 없으면 살아서 돌아오기라도 해서 후일을 기약하자" 같은 관점이다. 그리고 집단보다 개인의 개성을 훨씬 더 존중해 주게 됐다. 두 관점은 서로 장단점이 있다.

먼저 옛날 얘기부터.. 옛날에는 우리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세상이 전반적으로 지금 같은 인권 의식, 복지, 자비심 넘치는 정신꽈 상담과 체계적인 아동 교육 같은 게 없었다. 진짜 아픈 것과 꾀병 부리는 걸 일일이 분간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 조직에서나 똥군기와 꼰대질, 까라면 까, "지금 이 정도 난관도 못 견디면 밖에 나가서 어떻게 버티려고?", "정신상태 개조엔 몽둥이가 약", 군대식 전체주의 사고방식이 횡행했었다. 학교에서는 뻑하면 연좌제 단체기합이었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없는 시절만큼이나 CCTV와 유전자 감식이 없던 시절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때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황 증거 앞에서 뻑뻑 우기는 질 나쁜 범죄자한테 물과 전기를 동반한 물리 치료까지 해 줘야 했다.

정신병원에 대한 인식은 당연히 지금보다 훨씬 더 부정적이었다.
그리고 자살...? "무슨무슨 죄를 속죄합니다.. 책임을 집니다 ㅠㅠ"라든가,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써서 "난 절대 결백합니다! 억울합니다!" 이런 호소라도 동반하는 게 아닌 이상, 단순 처지 비관 자살은 지금보다 훨씬 더 금기시되었고 불명예 치욕적인 짓으로 간주됐었다.

꼭 군대· 경찰이 아니어도 의대나 사법연수원 같은 어디 좁은 바닥 전문직 엘리트 코스라면 뭐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물며 군대에다 엘리트 집단을 합쳐 놓은 사관학교에서는.. 전투 중 전사나 사고로 순직도 아니고, 선배들한테 맞아 죽은 생도도 있었다. 맥아더가 당장 19세기 말에 미국 웨스트포인트를 다니던 시절에 비슷한 일이 주변에 있었던 건 유명한 일화이다.

기독교/성경적 세계관이 딱히 존재하지 않던 일본에서는 그게 특유의 사무라이(?)/신토 문화와 결합해서 더 심해지고 이상하게 변질됐다. 그리고 그걸 우리나라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일본은 그래도 전후에 GHQ로부터 참교육 받으면서 군국주의물을 쫙 빼냈지만, 한국은 상황이 반대.. 6· 25 사변을 계기로 오히려 상시 징병제가 시행되었고, 덤으로 군사 정권을 겪으면서 군대 문화가 더 깊게 파고들게 됐다. 국력의 차이가 "군대를 가질 수 없는 나라"와 "군대에 안 가면 안 되는 나라"의 차이를 만든 거나 마찬가지이다.

물론 그런 풍토가 나라 안보를 지키고 고효율 경제 성장을 가능하게 하고 기적을 만들어 낸 것도 있다. 그리고 옛날 세대도 악마나 짐승이나 괴물이 아니라 지금 우리와 똑같은 사람인 만큼, 그때는 오히려 지금 찾아보기 힘든 정보화· 전산화 이전 시대 특유의 인심이나 유도리, 상도덕(!!)과 명예 규율이 있었다. 일찍부터 철 들어서 어느 환경에서나 적응 잘하고 잘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즉, 다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었겠지만... 하지만 폭력이 지금보다 더 용인되고 남과 다름이 허용되지 않던 시절에 많은 사람들이 상처 받고 골병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평소에는 할배나 박통에 대해서 많이 긍정적으로 말하지만, 저런 부작용에 대해서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체적인 평이 긍정적인 이유는 그때는 의식 수준이 다 그랬고 다른 대안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 지옥 같은 여건에서 그래도 전반적으로 선하고 좋은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90년대부터 소위 좌파 민주화 바람이라는 게.. 그렇게 너무 경직됐던 옛날 군사 문화를 청산· 완화하고 약한 사람들 인권을 돌보는 것이었으면 나도 계속 지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 20년 겪어 보니 저것들은 역기능이 순기능을 넘어선 지 오래다. 숨겨진 억울한 죽음을 조명하는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역사를 왜곡하고 아예 아군과 적군에 대한 인식을 뒤바꾼다거나.. 교권을 완전히 박살 낸다거나, 범죄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 인권만 금이야 옥이야 챙긴다거나..

결정적으로 남한의 군사 정권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억압 폭력 비민주적인 이북 동네는 전~혀 비판하지 않고 저놈들도 실컷 퍼주면 착해질 거라고 우기는데, 내가 저런 놈들을 도대체 어떻게 지지해 줄 수 있겠는가? 이건 도저히 좌우 균형 따위로 퉁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또한, 체벌이나 사형 제도 같은 검증되고 성경적인 근거까지 있는 필요악을 없애는 실험은 조별 과제 공산주의 실험이 실패하는 것과 동급으로 무조건 실패하게 돼 있다. 인류의 본질이 바뀌지 않는 한 과학이고 진리이다.
"난 사형 반대 소신이지만 저놈은 인간도 아닌 짐승이니 상관없다" 이런 말장난 따위 하지 말고, 그냥 인간 사회는 사형 제도 없이는 못 돌아간다고 인정하는 게 옳은 판단이다.

그러니 오늘날의 관점도 마냥 좋기만 한 것이 아니다. 과거의 어떤 문제를 해결한 대신,또 다른 방식으로 하극상과 계층 갈등을 조장하고, 사회 기강을 교묘하게 야금야금 무너뜨리는 게 있다. 옛날과 지금을 비교해서 단점을 버리고 장점만 취합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야만· 폭력적인 체벌 없는 학교와 학교폭력 일진 없는 학교를 둘 다 이룰 수 없다면, 나는 후자가 더 우선순위가 높으며 그거라도 제대로 됐으면 좋겠다는 게 변함없는 생각이다.

지금까지 과거와 현재의 차이를 우리나라 기준으로 좀 살펴봤는데, 다음으로는 특별히 미국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고자 한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당시에 군사력 넘사벽, 정보력 넘사벽, 장병 복지 넘사벽이던 천조국이었다. 세계 최초로 병사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보급해 줄 정도였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허나, 1940년~50년대는 이런 초일류 선진국조차도 각종 인권이나 보건에 대한 관념이 지금과는 굉장히 달랐다는 것을 우리는 몇몇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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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담배..;; "의사들이 선택한 최고의 담배 카멜~!!" (1946년)
"엄마, 말보로 피우면서 기분 좀 푸세용~" (아빠도 아니고 엄마에게~!! ㅠㅠ) 이딴 광고가 버젓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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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50년대까지만 해도, 부모나 선생이 어린아이를 벌 주는 목적으로만 패는 게 아니라.. 그냥 남자가 같은 성인 여성(부인, 여친..!!)을 무릎에다 엎어 놓고 엉덩이를 줘 패기도 했다.;; 그게 평범한 시대상이었기 때문에 각종 영화에도 버젓이 촬영돼 들어갔다. 그래도 도구를 쓰지는 않고 그냥 맨손으로..
남존여비라는 게 동양 유교 문화권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당신은 여전히 부인을 때립니까?" 질문과 함께 "Why you should beat your wife"라는 글을 돈 주고 사서 읽어 보란다. 답이 없다.. -_-;;;
"여자와 북어는 삼일에 한 번씩 패야 맛이 좋아진다"의 미국판이나 마찬가지이다. 사실은 이런 성차별적인 발언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있어 왔다.
다만, 이런 건 가장이 집사람을 훈계하고 바로잡는다는 맥락이지, 술 쳐먹고 깽판 치면서 지 꼴리는 대로 구타하는 걸 말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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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제도가 필요한가, 학교에서 체벌이 필요한가, 낙태를 합법화하는 게 좋은가" 갖고 논쟁하듯이.. "필요하다면 여성(=부인)을 때려야 하는가?"에 대한 옹호 의견 중 하나가.. "Spanking might help get back some of ... respect they lost." 쉽게 말해 "가장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때릴 필요가 있다"이다. -_-;;;

다시 말하지만 저렇게 옹호 의견을 피력했던 사람은 여혐 싸이코 남성 우월주의자가 아니었다. 처자식을 먹여 살리고 가정을 책임지는 권위자로서 "부인의 행실이 지나치게 방자하다면 저런 극약 처방을 해서라도 저지할 필요가 있다" 이런 차원에서 옹호한 것이다.
물론 성경에는 자녀에 대한 체벌만 지지하지, 부인에 대한 스팽킹 같은 건 언급돼 있지 않다.. 오히려 여자는 남자보다 더 약한 그릇인데(골 3:19, 벧전 3:7), 모질게 대하지 말고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3) 그리고 끝으로..
저 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인종 차별이 여전히 심한 편이었다. 그래서 군대에서도 총 잡고 전투하는 보직에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웠으며, 기껏해야 취사병 등의 비전투 지원 병과에나 머물렀다. 물론 예외적으로 총 쏘고 전투기 조종한 흑인도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말 그대로 예외적인 경우였다.

그 시절 백악관 같은 관공서의 화장실은 남녀뿐만 아니라 흑백도 따로 구분돼 있을 정도였다.
군대에서 인종 차별은 2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차츰 없어지기 시작해서 70년대 월남전 타이밍 정도는 돼서야 완전히 근절됐다.

Posted by 사무엘

2021/03/05 08:35 2021/03/0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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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선 등 옛날 철도 역사

1. 수인선 옛 협궤와 관련된 역사 맥락

수인선은 일제 강점기의 중후반기인 1937년 7월 11일에 협궤 형태로 개통했다가 지난 1995년 12월 31일에 완전히 폐선됐다. 최후까지 운행하던 구간은 수원-한대앞이었다.

수인선이 사라진 때는 대한뉴스가 폐지되고 방위병 제도가 폐지된 때로부터 정확히 1년 뒤이다(1994. 12. 31.). 그리고 에쿠스가 단종되고 마이크로소프트웨어 잡지의 월간 발행이 중단된 때로부터 정확히 20년 전이다(2015. 12. 31.)

상록수 최 용신 선생이 아이들을 가르쳤던 샘골이 수인선의 역세권에 있었다. 하지만 이분은 수인선 개통보다 훨씬 일찍 요절했다. (1935)
그래서 신 상옥 감독의 1961년작 옛날 영화 "상록수"를 봐도.. 이분이 버스에서 내리는 걸로 영화가 시작된다! 수인선 철도가 한 10년쯤 더 일찍 개통했다면 열차에서 내리는 걸로 씬이 바뀌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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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영균 씨가 주연으로 나오는 1977년작 주 기철 목사 전기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를 보면, 주 목사 가족이 열차 타고 평양으로 이사 가는 장면에서 수인선 '혀기' 증기 기관차가 달리는 씬이 잠깐 나온다. 딱 봐도 폭이 정말 좁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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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으로 가는 경의선은 표준궤였을 텐데 자그마한 협궤 열차가 나오는 건 영락없는 고증 오류다. 하지만 그 당시에 국내에서 증기 기관차 운행을 저렴하게 컬러로 촬영할 수 있는 곳이 거기였으니 수인선이 대신 쓰였던 것이지 싶다. 증기 기관차는 달리는 모습을 컬러로 보기가 생각보다 어려운 물건이다.

1937-1995는 뭔가 사람 인생 연대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비록 자연사라고 보기에는 좀 짧은 감이 있지만..
내가 아는 유명인사 중에서 수인선 협궤와 lifespan이 가장 비슷한 사람은.. 이단 연구가 탁 명환 씨이다! (1937. 7. 8. ~1994. 2. 18.) 단, 이 사람은.. 병이나 사고로 죽은 게 아니라 살해당했다.;;
그리고 천문학자 겸 저술가인 칼 세이건(1934-1996)도 얼추 수인선 세대라고 볼 수 있다.

1995~96년은 철도청의 입장에서도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둥근 터널을 형상화한 Q 모양의 철도청 CI (보신 기억 있으신 분??)가 거의 30년 만에 폐지되고, 레일을 역삼각형 모양으로 형상화한 새 CI가 이때 도입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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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Q자를 형상화한 듯이 생긴 로고를 본 건.. 게임 퀘이크 로고랑 철도청 옛날 CI였다. ㄲㄲㄲㄲㄲ
그리고 노랑-초록의 철도청 도색이 등장한 것도 이때이다. 새마을호 열차가 새 도색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아서 바뀌었다.

수인선이 폐지되고 나서 얼마 안 된 96년 1월에 서울 지하철 3호선의 북쪽 연장선 격인 일산선 구파발-대화 구간이 개통했으며, 96년 3월엔 철도 기술 연구원이 창립됐다.
그리고 전철 개통식 때 대통령이 친히 참석하는 관행도 김영삼 시절 이때가 거의 끝물 마지막이었다.
아이고, 수인선 하나만 갖고 연대기 얘기가 얼마나 미주알고주알 쏟아져 나오는지~! ^^

2. 1940년 열차 시각표

어떤 철덕 용자께서 무려 1940년, 지금으로부터 딱 80년 전의 한반도(조선) 열차 시각표를 구해서 엑셀로 알아보기 쉽게 전부 입력해 놓았다. 우와~! (☞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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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선과 수인선도 있다. 수려선은 하루에 편도 5회, 수인선은 하루 6회 열차가 운행되었다.
말로만 듣던 금강산선은 하루 7회.. 경인선은 그나마 많이 다녀서 하루 15회였다. 참고로 경인선이 선로가 꼴랑 하나밖에 없는 단선이었다는 걸 감안하도록 하자.;;
지금보다야 시설이 열악하고 열차의 속도도 엄청나게 느렸겠지만.. 어쨌든 한반도 역사상 철도 노선이 제일 다양하게 뻗어 있던 시절은 일제 시대였다는 걸 부인할 수 없겠다.;

더구나 1940년은 일제 시대 중에서도 철도가 최고로 번창했던 시기이다. 건설될 노선들은 사실상 다 건설된 말기인 데다, 40년 이후부터는 전쟁 때문에 여객 열차 운행이 줄어들고 일부 비수익 노선은 레일마저 전쟁 물자로 공출돼서 없어진 악화일로이기 때문이다. 저 때는 금강산선이 종점까지 온전하게 남아 있던 시절이니 다행이다.

이런 귀한 자료를 보니 감회가 새롭다. 그럼 맨 앞 페이지 경부선을 살펴보도록 하자.
지금이야 경부선이 수도 서울과 제2의 수도 부산만을 잇는 정도이지만.. 일제 시대에 경부선은 북쪽이 경의선과 이어져서 평양과 중국으로 가고, 남쪽은 연락선과 이어져서 일본으로도 연결됐다. 그 중요도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뻘밭 천지였다던 대전은 경부선 덕분에 얼마나 발전할 수 있었을지를 짐작케 된다. 경부선 주요 정차역으로도 모자라서 호남선 분기 지점까지 됐으니 말이다~!
그 외에도 시각표를 보면 우리는 여러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다.

  • 아무래도 일본의 관점에서 작성된 것이다 보니, 시모노세키-부산 연락선의 스케줄도 같이 기재돼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산에서 서울(경성) 방면으로 가는 게 하행이다. 상행이 아님.
  • 그래도 일제 시절의 로망은.. 열차 타고 중국까지 직통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저기서 안동, 봉천, 신경, 북경은 한반도의 지명이 아니다.
  •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이 적은 열차 운행 횟수.. 그 시절에 열차라는 건 지금 우리가 여객기를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위상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 그래 봤자 저 때 다녔던 열차는 전부 '증기' 기관차였다. 디젤이나 전기 따위 없었다.
  • 경성-부산이 영업거리표 상 거리가 거의 450km에 달한다. 부산 역이 지금보다 바다에 더 가까이 있어서 1.7km 정도 더 길어졌고, 또 지금보다 선형개량이 덜 되어 길고 구불구불한 구간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열차로 매일 부산 7시 5분 출발, 경성 13:45 도착.. 증기 기관차로 중간에 대전과 대구에만 정차해서 서울-부산을 6시간 40분 만에 찍었던 '아카츠키' 호는 그 시절 정말 최강의 갑부 금수저만 타는 최고급 최고속 호화 사치 열차였다.
또한 이건 일본의 입장에서도 증기 기관차를 최강의 기술과 운영 노하우로 굴려서 산출한 속도였다.

한국은 해방 후에 1960년이 돼서야 증기가 아닌 '디젤 기관차'로 서울-부산 6시간 40분을 겨우 따라잡을 수 있었다(무궁화호 우등 열차). 물론 일본은 그때 이미 시속 200km짜리 신칸센을 세계 최초로 자체 기술로 개발하고 있었으니 격차는 또 벌어졌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에이트맨이 1963년, 신칸센 0계 열차가 정식 개통하기 1년 전에 출시됐는데.. 이때 벌써 신칸센처럼 생긴 열차가 나온다. 신칸센은 그만큼 개통하기도 전부터 국민적인 관심을 끌고 있었던 것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리나라는 철도가 아닌 고속도로에서는 바다 때문에 더 연장의 여지가 없는 부산 방면을 상행으로 일률적으로 정해서 시행하고 있어서 일본 방면과 얼추 비슷해졌다. 서울 방면을 상행으로 정하고 있는 철도와는 다른 관행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1/02/27 08:35 2021/02/2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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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의 건설과 개통 내력

서울 지하철의 건설 형태는
"1 / 2 / 3,4 / 5,6,7,8 / 9 (,10,11,12)"호선.. 이렇게 나뉘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1.
1960년대 말, 서울시의 높으신 분들은 이렇게 서울시가 팽창하고 인구가 증가하다가는 시내의 교통은 체증 때문에 완전히 끝장이 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래서 선택한 돌파구는 지하철.. 우리도 외국의 대도시들처럼 땅 아래로 길을 파서 지하철을 건설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까지 서울 시내에는 노면전차라는 게 있었다. 하지만 경영 수지가 안 좋아 적자가 쌓여 가고, 차량과 시설의 노후화도 심한 노답 상태였다. 얘는 지하철 건설을 위한 시범타로 완전히 폐선· 퇴출되었다.
전차가 없어진 종로 도로를 파헤쳐서 몇 년 동안 극심한 버스 혼잡과 교통 체증을 감내한 끝에, 서울 최초의 지하철 1호선은 철도청 광역전철 경인(인천)/경부(수원)/경원선(성북)과 직결된 독특한 형태로 건설되고 개통됐다. 차량 운행을 철도청(현 코레일)과 서울 지하철 공사(서울 교통 공사)라는 두 주체가 공동으로 하기 시작했다.

차량은 그 당시 유행이던 중문 달린 식빵 모양 '초저항'(초기 저항 제어 방식 전동차) 차량을 일본으로부터 수입해 와서 굴렸다. 철도청은 차량에 파란 도색을, 서지공은 빨간 도색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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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는 일본의 신칸센 0계 전동차만큼이나 우리나라 철도 역사의 상징인 매우 귀중한 차량이다. 그렇기 때문에 코레일과 서교공 모두 자기네 초저항 차량을 내구연한 경과로 인해 퇴역한 뒤에도 한 량씩 자기 방식으로 도색해서 정태보존 중이다. (각각 철도 박물관, 신정 차량기지 내부)

저런 식빵 모양의 디자인은 비슷한 시기에 일본 현지에서 다닌 도쿄 지하철 5000계 전동차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단지, 차폭은 일본 내수인 1067 협궤가 아니라 1435 표준궤로 커진 것이다. 이 때문에 한국의 초저항 전동차는 일본의 철덕들에게도 관심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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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저항 전동차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전방 중앙에 출입문이 있다는 것이다. 필요한 경우, 전동차를 그대로 중련 편성해서 기관사가 아니라 승객이 객차 사이를 지나다닐 수 있게 하려는 의도였다!

지하철 1호선이 첫 개통한 날엔 대통령까지 참석하는 성대한 개통식을 치를 예정이었지만.. 하필 개통식 당일의 이전 행사에서 영부인 육 영수 여사가 괴한에게 피격 당하는 바람에 지하철 개통식은 대통령 없이 아주 우울하고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치러지게 됐다. 그리고 서울 시장도 경질되고(양 택식 → 구 자춘) 향후의 지하철 건설 계획까지 확 바뀌게 됐다.

2.
서울 지하철 2호선은 1980년부터 84년까지 점진적으로 개통하면서 거대한 순환선으로 만들어졌다. 이때 굉장히 큰 변화가 생겼다.

  • 고유 노선색 패턴 (2호선은 초록색)
  • 저항 제어보다 조금 더 발전한 초퍼 제어 방식 전동차 (MELCO). 국영 공작창이 아닌 민간 기업 중심으로 차량 생산 시작
  • 매큔-라이샤워 로마자 표기법
  • 노인 무임승차(!!!)
  • 지금과 같은 지하철체
  • 최초의 우측통행 (조금 뻘짓 같지만), 최초의 지하철간 환승역 (신설동)
  • 8량 증결 (처음엔 6량 1편성이었음.. 역들의 건설만 10량 기준으로 해 놓고)

이 정도면 서울 지하철의 실질적인 기틀은 2호선 때 완전히 잡혔다고 봐도 되겠다.
용답 역 근처에 있는 군자 차량기지는 서울에서 중심부에 가장 가까이 있는 지하철 차량기지이다. 그러면서도 창동이나 구로 기지와 달리 이전 계획도 없고, 오히려 여기 주변에 서울 교통 공사 본사와 종합 관제센터까지 들어서 있다.

아, 그리고 1호선이 지상 광역전철과 직통 운행하는 지하철을 선보였다면, 2호선은 유의미한 구간을 계속해서 지상 고가로 달리는 지하철? 도시철도?를 최초로 선보였다. 타 노선들은 한강을 건널 때 내지 외곽 종점 차량기지에 다 왔을 때에만 잠시 지상에 나온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강변-뚝섬이라든가 신대방-대림 지상 구간은 서울 시내에서 보기 드문 형태이다.

3-4.
3호선과 4호선은..

  • 최초로 Y자형 분기(1호선)나 O자형 순환(2호선)이 아닌, 단순한 I자 선형..;;
  • 서울 올림픽에 대비하여 자금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최초로 두 노선이 동시에 건설· 개통되어 서울 중심부를 X자로 관통했다. 충무로 역은 최초로 2개 노선이 동시에 건설된 환승역이다.
  • 일본물이 아닌 유럽물을 먹은 광폭형 GEC 초퍼 전동차가 이때 도입돼 들어왔다.
  • 올림픽을 염두에 둬서 그런지 인테리어를 1· 2호선보다 더 신경쓴 역들이 제법 등장했다. 경복궁, 교대, 동대문운동장처럼..
  • 신호 시스템이 ATS보다 더 정교하고 발전된 ATC로 바뀌었다.
  • 얘들이 등장한 시기부터 전동차들이 드디어 10량으로 증결됐다.
  • 얘들은 일산, 분당, 과천 이렇게 새로 건설된 광역전철들과 직통 운행을 시작했다.

참고로 80년대 중반 올림픽 준비의 산물들로 다른 분야로는: 올림픽대로, 현대 그랜저, 유선형 새마을호 열차가 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안 되지만 과거에는 2호선에도 1호선의 초저항 전동차, 또는 3-4호선의 GEC 초퍼 전동차가 잠시 다닌 적이 있다. 그 반면, 2호선의 MELCO 초퍼는 2호선 외의 타 노선을 다닌 적이 없다.

5-8.
이제 1990년대에 서울 2기 지하철 노선 4개가 한꺼번에 계획되고 건설됐다. 세부적으로는 이것도 95~96년 사이(5호선 전체, 7호선 강북 구간, 8호선 남쪽 구간)와 99~01년 사이(6호선 전체, 7· 8호선 나머지 구간)의 두 타이밍으로 나뉜다만..
얘는 지난 15년간의 지하철 건설 노하우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변화가 생겼다.

  • 1기 시절보다는 환승거리를 최대한 줄이는 쪽으로 역들이 만들어졌으며, 심지어 더 미래에 건설할 3기 지하철까지 염두에 두고 환승 통로와 노반을 미리 만들어 놓았다! (5-9 여의도역처럼)
  • 전동차 외형의 표준화
  • 자갈 대신 콘크리트 노반
  • 재래식 삼발이 대신 깔끔한 개집표기, 무려 하저터널,
  • 롤지 대신 LED 전광판
  • 저항/초퍼보다 더 발전된 VVVF 제어: 자동차 내연기관으로 치면 가변 밸브 개폐량/개방 시간(VVL/VVT) 같은 기술을 떠올리면 되겠다.
  • ATS/ATC보다 더 발전된 ATO 신호 시스템. 차장을 생략한 1인 승무

이렇게 1기 지하철에 비해 정말 정말 많은 부분이 발전했다.
이때는 차량 외형은 다들 비슷해졌지만, 내부의 VVVF 인버터는 제대로 국산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조사별로 ABB, 미쓰비시, GEC 등 갖가지 개성 넘치는 전자악기 소리를 가속 구동음으로 들을 수 있었다. 이게 1990년대의 로망이다. 2기는 1기와 달리, 시각 대신 청각적으로 즐길 것이 다양해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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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건설이란 게 워낙 재정 등골 브레이커이다 보니 2기 지하철을 만들 때는 어떻게든 원가를 줄이려는 노력을 높으신 분들이 했는데, 그 아이디어 중 하나가 2기 지하철부터는 아예 무인 운전을 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테스트를 해 보니 자동 운전 시스템이 승강장 제 위치에 정차를 정확히 못 했다. 또한 이때는 아직 스크린도어도 없어서 완전 무인 운전을 하기엔 여러 애로사항들이 즐비했다. 이 때문에 현실에서는 2인 승무에서 차장만 뺀 1인 승무로 줄이는 수준에서 머물렀다.

서울 지하철 5호선의 최초 개통 구간이 왕십리-상일동이었으며, 천호대로 구간이 이때 파헤쳐졌다가 복구되면서 국내 최초의 시내 중앙 버스 전용 차로로 탈바꿈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응답하라 1997에서 나름 고증을 반영한답시고 지하철 노선도에서 5~8호선은 하얗게 지워 놨던데 그건 오류이다.
그 시절엔 5~8호선도 점선으로 그려 놓고 "건설 중, 개통 예정"이라고 표시해 놓는 게 올바른 고증이다. -_-;;

처음에는 5~8호선만 운영하는 '서울 도시철도 공사'라는 회사가 따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한 도시의 지하철에 사철도 아니고 공기업이 둘이나 있는 건 꽤 이례적인 경우였기 때문에 2017년부터는 두 회사가 하나로 합쳐져서 서울 교통 공사로 바뀌었다.
회사가 둘이서 따로 놀던 시절엔 한 회사 구간에서 파업이 벌어져도 다른 회사 노선은 영향이 없었는데.. 지금은 파업 발생 시에 지하철 1~8호선이 몽땅 멈춰 버릴 가능성이 생겨 있다.

9.
다음으로 서울 3기 지하철은 계획대로라면 9~12호선이 추가로 건설됐어야 했다. 하지만 외환 위기와 IMF, 이로 인한 긴축 재정 처방 때문에 지하철 건설 계획은 대부분 칼질 당했으며, 이 때문에 5~8호선 건설 때 미리 준비를 해 놨던 환승역 건설 공간과 노반도 상당수 잉여로 전락하게 됐다.;;
3호선과 7호선의 연장(오금 2010 / 부평구청 2012), 그리고 강남의 횡축 노선인 9호선만이 살아남았다. 나머지는 2010년대 이후에 서울 외곽 구간만이 광역전철(10은 신안산선, 11은 신분당선) 아니면 경전철(12는 우이신설선)로 실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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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호선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 광역전철이 아닌 단순 도시철도 지하철로서는 이례적인 전구간 급행열차 운행
  • 처음 건설 때부터 모든 역에 스크린도어 시공
  • 마분지 승차권의 완전 퇴출
  • 오 세훈 시장 서울 디자인 가이드라인이 적용된 덕분에 혼자 굉장히 이질적인 인테리어
  • 한국형 표준 전동차 규격. VVVF 인버터도 통합됐기 때문에 구동음은 대전 같은 최신 지방 지하철하고 pitch(음높이)만 다르지 음색은 같다.

그러므로 서울 지하철의 건설 계획이 대판 틀어진 계기는

  • 1기 지하철: 육 영수 여사 피격으로 인한 서울 시장 경질 (신설동 역 유령 승강장이 생긴 이유도 이 때문!)
  • 3기 지하철: IMF ...;;

라고 정리된다. 그리고 차량 운용 계획이 실현되지 않은 것은..

  • 1호선: 유동적인 열차 중련 편성 (그런 것 필요없고 지금은 언제나 10량 꽉꽉 채움..)
  • 2기 지하철: 무인 운전 (현실은 시궁창. 1인 승무만으로 감지덕지)

이렇게 정리된다.
유동적인 열차 중련 편성은 무인 운전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운용 계획이라는 게 흥미롭다. 철도 운영 이념이 세월에 따라 이렇게 바뀌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1/02/06 08:35 2021/02/06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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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일로

서울 역 북부에서 시작해서 서대문 역(5)과 독립문 역(3)을 찍고 지하철 3호선의 선형을 따라 고양· 파주 방면으로 가는 도로는 국도 1호선 구간인 한편으로 이름이 '통일로'이다.
이 길 자체는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그게 고양과 파주까지 4차선 도로로 한데 뚫리고 '통일로'라는 이름까지 붙은 건 1972년 봄의 일이라고 한다. '통일호'라는 열차 이름은 1950년대 할배 때부터 있었지만, '통일로'는 박통이 붙인 이름이다.

그리고 바로 이 타이밍에 맞춰서 통일로의 종점에 임진각 관광지가 만들어졌으며, 통일촌이라는 민통선 마을도 생겼다. 그로부터 몇 달 뒤인 7월 4일엔 우리가 학교에서도 배우는 7· 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됐다.
그러니 그때는 온통 통일, 통일 하던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진짜로 남북 통일이 이뤄질 줄 알고 많이 들떴었다.

지금이야 서울에서 파주 임진각 방면으로 갈 때 강변북로에서 이어지는 자동차 전용 도로인 자유로, 혹은 최근에 개통한 서울-문산 고속도로(17)가 즐겨 쓰인다.
자유로는 통일로 이후로 딱 20년이 지난 1992년에 개통했으며,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오두산 통일 전망대가 같이 만들어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자유로나 고속도로와 달리, 기존의 통일로는 자동차 전용 도로도 아닌 데다 차로도 너무 좁고 확장하기 어렵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그냥 그저 그런 시내 도로 내지 국도 레벨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임진각으로 가는 도로의 원조는 바로 이 길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통일로의 고양시 북쪽 지점에는 '통일로 휴게소'라고 온갖 기념비들과 공원이 들어서 있고 공릉천이라는 하천도 가까이 있다. 본인은 북극 한파가 전국을 강타했던 새해의 첫 주말에는 거기를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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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휴게소라고 해서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바로 근처에 식당이나 가게들이 들어선 건 아니고.. 그냥 공터 광장과 공원 정도만이 꾸며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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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 운동이니, 서울 올림픽이니 하는 왕창 옛날 냄새가 진동하는 기념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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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나 들어가서 올라갈 수 있는 정자 같은 게 아니어서 아쉽다. 자유롭게 개방된 2층 정자라면 올림픽대로에 있는 청담 도로 공원 같은 느낌도 났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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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휴게소'의 길 건너편에는 6· 25 사변 필리핀군 참전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기념비에 새겨진 문구에 따르면, 필리핀군은 488명이 참전했으며, 이 기념비는 1974년 10월 2일에 건립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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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군 기념비의 옆에는 고양시 출신 인물 중에 6· 25 참전 용사를 기리는 기념비가 있었다.
작년에 칠곡 왜관에서 봤던 애국 동산이 떠오른다. 거기서도 자기 지역 출신의 6· 25 참전 용사들을 잔뜩 기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안보 관광을 많이 다니고 나니, 과거에 비슷한 부류의 기념물을 봤던 것이 서로 연계가 될 지경이다.
이 기념비는 2004년 7월 27일에 여기 말고 다른 곳에 처음으로 만들어졌다가 2011년 1월 4일부로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통일로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런 볼거리도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통일로라는 이름의 도로는 경상북도 경주에도 있다.
신라의 삼국 통일을 남북 통일 염원과도 오마주한다는 취지로 1977년엔 경주 남산의 동쪽 기슭에 통일전이라는 기념비가 건립됐기 때문이다. 통일전 근처의 도로 이름이 통일로이며, 심지어 '통일전 휴게소'도 있다.

내가 보기에 경주시는 박통 시절부터 관광 도시로서 특별 지원 대상으로 지정되어 혜택을 아주 많이 받았다. 1968년 12월에 국립공원 지정, 1974년에 보문 관광단지 개발, 통금에서 진작부터 열외, 호화 귀족 열차이던 새마을호 정차 따위 말이다. 게다가 도시형 국립공원이라는 건 현재까지도 경주시가 전국에서 유일하다.

끝으로.. 통일로라는 길이 닦이던 그 시절에 결의됐던 7· 4 성명이라는 건.. 우리나라가 영원히 으르렁대면서 적대할 것 같던 북괴하고도 그나마 “눈 가리고 아웅으로라도 좀 싸우지 말고 서로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을 모색해 보자~”라는 제스처를 취해 봤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특히 1 21 김 신조 사태 때문에 서로 분위기가 얼마나 험악해져 있었던가?)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고 통일은 개뿔.. 남북 지도자는 애초에 서로 온전히 신뢰 가능한 대상이 아니었다.
전근대 시절 옛날에 유럽에서는 귀족 장교들이 자국 졸병들보다 적국 장교를 더 신뢰할 정도였다고 하더라만(적이지만 최소한 약속을 어기지는 않는다) 20세기 후반의 한반도엔 그런 거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못 가 남한은 통일은커녕 자기 내부에서도 유신 독재(ㅋㅋ)가 시작되었고, 북괴 역시 특히 74년을 기점으로 주체사상과 함께 더욱 흑화하게 됐다. 쟤들도 겉으로는 통일 통일 거리면서 한쪽에서는 땅굴이나 파고, 공작원을 보내 남한 대통령을 암살까지 하려 했다. 그러니 통일은 더욱 물 건너가고 반공 분위기만 더 강해졌다.

2. 캠핑

통일로 휴게소를 방문하던 당시엔 서울의 낮 기온이 -10도 아래로 내려가는 강추위가 며칠 동안 전국을 강타하던 중이었다. 오죽했으면 최남단의 제주도까지 한파 경보가 내려졌으며, 한강이 얼고 황해 바다조차 일부 얼어서 양식업(...;; )과 비닐하우스 화훼업(치솟는 난방비)이 큰 피해를 호소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본인은 평범한 산 속이나 물가가 아니라, 이번엔 아예 얼어붙은 강 위에서 텐트 치고 자는 것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장 통일로 휴게소 부근부터 찾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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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중앙까지 100% 언 건 아니지만 주변에는 물이 흐르다가 완벽하게 얼어 버린 곳이 있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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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호~! 주차장에서 그리 멀지 않으면서 텐트 치기 적합한 곳을 발견했다.
이불· 침낭 등 장비가 굉장히 많고 무거운 상태였기 때문에 도보 접근성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다.;; 이것들을 오래 들고 다니니 팔과 허리가 뻐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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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에는 통일로 IC 부근의 상류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는 전구간이 꽁꽁 얼고 위에 눈까지 쌓였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 공원 같은 것도 없어서 인적이 더욱 없었다. 다만, 나 역시 강물 쪽으로 가기 위해서 갈대더미들을 타넘는 수고를 감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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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세상에 이런 횡재가..
오도독오도독 눈 밟는 소리가 걸을 때가 아니라 누워서 몸 뒤척일 때 나는 그 느낌을 아시겠는가?
-15도도 이제 별 거 아닌 듯..^^ 아 그런데 다 좋은데 발은 좀 시렵다.. 이건 어쩔 수 없다..
믿음이 부족해서 강 중앙으로 더 가까이 가지 못했던 것이 아쉬울 뿐이다.

한숨 잘 잔 뒤 집으로 귀환했다.
그 당시엔 폰과 컴퓨터뿐만 아니라 차키의 버튼이 갑자기 먹히지 않기 시작했다. 키가 문제인지 차가 문제인지.. 차 문 못 열고 시동 못 걸면 어떡하나 깜짝 놀랐다. 키를 따뜻한 곳에 두니 다행히 다시 살아났다.

귀환할 때는 동부 간선 도로를 이용해 봤다.
의정부에서 서울 북부 구간이 싹 리모델링 돼서 확장되고 지하화가 된 걸 처음 봤는데.. 이게 딱 올해부터 개통한 거라고 한다.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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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천에서 야영을 한 뒤, 다음날 밤에는 중랑천 모처의 얼음판에서 또 야영을 했다.
여기는 공릉천보다도 얼음이 덜 생겨 있어서 중앙으로 접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텐트를 친 곳은 보다시피 명백하게 땅이 아니라 얼음이었다.

산천 어디서든 텐트만 치면 나만의 밀실이 생긴다는 게 좋다. 그리고 밖이 아무리 추워도 장비를 충분히 챙기면 체온 에어포켓으로 버틸 수 있다는 것도 좋다. 이렇게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1/01/29 08:35 2021/01/2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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