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에는 남산, 북악산, 청계산, 관악산, 아차산, 용마산,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인왕산, 안산(무악) 등의 산이 존재한다.
그리고 강은 한강이라는 거대한 횡축 간선을 필두로 해서 청계천, 중랑천, 안양천, 탄천, 불광천, 홍제천, 양재천, 성내천, 성북천, 도림천, 정릉천, 우이천 등 다양한 개천이 존재한다.

한강은 강폭만 1km가 넘는 거대한 강이며, 강에 놓여 있는 하중도라든가 교량을 순서대로 나열하는 것이 지리덕들의 지적 욕구를 자극한다. 한강 다음으로 서울에서 가장 크고 긴 강은 동부에서 종축으로 흘러서 한강으로 흘러드는 중랑천이다.
이렇게 산과 강 다음으로 본인은 문득 '호수'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서울과 거기 주변엔 호수는 얼마나 있을까?

호수는 강도 바다도 아닌 고인물이다. 너무 작으면 연못, 너무 얕으면 늪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겠지만.. 왕창 커서 파도가 치고 건너편의 육지가 보이지 않는 체급도 있다. 이 정도면 사실상 '바다/sea' 같은 취급을 받는다.
산 정상의 호수는 화산 분화구가 변해서 만들어지는 게 많다. 우리나라의 백두산과 한라산만 해도 그렇다. 그 높은 지대에 출렁출렁 물이 고인 호수가 있다는 건 분명 보통일이 아니어 보인다.

산 말고 평지에서는 인간의 토목 기술을 동원해서 땅 파고 물 부어서 호수를 일부러 만들 수도 있다. 시골에서는 농업 용수를 조달하기 위한 저수지가 이런 인공 호수의 범주에 든다. 그 반면, 서울에 있는 호수는 농업과 무관한 토목 공사의 산물들이다.

(1) 건국대 일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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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대학교의 명물로, 인서울에서는 손꼽히게 크고 넓은 호수라고 한다. 습지를 개조해서 만든 인공 호수인데, 나름 여기에서 발원해서 나가는 성수천이라는 개천도 있다고 한다(현재는 전구간 복개됨).
서울 지하철 2호선이 남서쪽(신대방, 구로디지털..)이 도림천을 따라 가느라 지상이라면, 북동쪽(건대입구, 강변..)은 이 성수천을 따라 가느라 지상이다.

(2) 석촌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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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원래 한강의 본류 중 하나인 '송파강'이 흐르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강의 물줄기를 바꾸면서 여기는 강이 없어졌고, 물이 흐르던 일부 구역이 웅덩이로 남아서 이 호수가 형성된 것이다. 이거 무슨 철길의 이설 및 선형 개량 공사로 인해 폐선된 흔적을 보는 것 같다. 경부선 서동탄 역 일대처럼 말이다.
롯데월드 매직 아일랜드가 이 호수 위의 섬에 지어져 있다.

(3) 서서울 호수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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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과거에 한강물을 정수해서 만든 수돗물을 인천 쪽으로 쭉 흘러내려 보내기 위해 고지대에 만들었던 '배수지'(配水池)였다. 전기로 치면 고압 변전소인 셈인데, 그게 2009년부터 호수 공원으로 자연스럽게 조성된 것이다. 정수 시설이었다가 공원으로 변한 '선유도'와 비슷한 변화이다.

얘는 현재 서울에서 '호수 공원'이라는 명칭이 유일하게 붙은 공원이다. 서울은 한강 공원이 인지도가 훨씬 더 높지, 호수 공원은 아무래도 생소할 수밖에 없다. 위의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 이 호수는 김포 공항 근처의 이착륙 비행기의 항로 상에 있는 것도 특징이다. ㄲㄲ

순수한 인서울은 이 정도가 전부인 것 같다. 다음으로..

(4) 일산 호수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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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와는 아무 접점이 없던 농경지에다 일부러 작정하고 인공 호수를 만들고, 신도시와 연계해서 '호수 공원'이라는 걸 꾸민 국내 최초의 사례라고 한다(1996년). 실제로 크기가 굉장히 크고 주변 산책로가 잘 꾸며져서 일산의 명물 역할을 하고 있다.

(5) 삼육대 제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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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상 서울을 아주 약간 미묘하게 벗어났다. 얘는 불암산 기슭 삼육대의 부지 내부에 있는 자그마한 호수인데, 크기보다는 주변 자연 경치가 대단히 아름답다. 그래서 인근 주민, 등산객, 삼육대 재학생 등 여러 사람들의 산책로와 데이트 코스로 사랑받고 있다.
얘는 어찌해서 생겨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공이 아닌 천연 호수라고 한다.

다음으로, 얘들은 서울 밖에서 저수지였던 곳이 호수 공원으로 꾸며진 사례이다.

  • 의왕 왕송: 의왕 역 근처에 있는 그 호수이다.
  • 군포 반월: 근처에 KTX 고속선 철길이 지나는 것으로 유명하다.
  • 수원 광교, 용인 기흥, 화성 동탄: 경부 고속도로 부근에 은근히 저수지가 여럿 있다.

얘들은 모두 행정구역상 '성남시'에 있으며, 호수 공원보다는 저수지라는 명칭이 더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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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 저수지는 분당 율동 공원이라고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나머지 셋은 개발되지 않은 전원적인 곳에 있어서 자연의 정취가 물씬 느껴진다.

  • 분당 저수지
  • 대왕 저수지
  • 운중 저수지
  • 서현 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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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 저수지)

뭐, 부천과 안산에도 호수 공원이 있다고는 하는데,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호수는 물 덕분에 도심의 열섬을 억제하는 긍정적인 효과가 크다고 한다.
서울에 연못보다 더 큰 호수가 저것들 말고 더 있는지 궁금해진다. 하긴, 대전 카이스트의 오리 연못은 말 그대로 연못일 뿐, 호수라고는 불릴 수 없을 것이다.

본인은 경주 출신이다 보니 태어나서 제일 먼저 실물을 본 호수는 아무래도 '보문호'였던 것 같다. 몇 년간 가뭄이 심했을 때는 바닥이 보일 정도로 물이 바짝 마르기도 했다.
'수심이 깊으므로 위험. 수영을 금함'이라는 표지판이 완전히 무색할 정도였다. 마치 막혀서 차들이 엉금엉금 서행하는 와중에 과속 단속 카메라가 돌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2/11/10 08:35 2022/11/1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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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압사 사고

1. 사고 개요

지난 10월 30일 아침엔 우리나라 전국민이 정말 충격적이고 경악스러운 소식을 접하며 일요일을 맞이했다.
할로윈, 그것도 마스크를 안 써도 되는 자유로운 할로윈을 기념해서 이태원 클럽 일대에 10만 명에 가까운 젊은 청년들이 몰려와서 파티를 벌이며 놀았다. 그런데 발 디딜 틈도 없이 혼잡하고 비좁은 경사 골목길에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대규모 압사 사고가 났다.

앞쪽 사람이 밀려 넘어지면서 뒤쪽 사람들에게 몇 겹으로 깔렸다. 이 때문에 150명이 넘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밟혀 죽고 부상자도 이와 비슷하게 발생했다. 무려 1960년의 서울 역 압사 사고가 어설픈 풋 사과로 밀려났을 정도로..
사상자는 대부분 20대였으며, 여자가 남자보다 2배 가까이 더 많았다.

총기 난사나 폭탄 테러가 아니고 건축물 붕괴나 추락, 화재 따위도 아니고 미치광이 차량 돌진도 아니고..
주변 시설이나 지형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오로지 인간이 자기들끼리 깔고 깔려서 이렇게 많이 죽거나 다칠 수 있다니..
나라에서는 소방 대응 단계를 최고로 올리고 이태원 일대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난리가 났다. TV에서도 뉴스 속보와 특보를 내보내며 하루 종일 이 사고만 보도했다. 이 소식은 외신까지 타면서 세계로 전파됐다.

이때 현장이 얼마나 혼잡한 생지옥이었냐 하면.. 발이 둥둥 뜬 채 주변 군중에게 떠밀려서 이동하는 지경이었고, 사람이 숨을 들이쉴 수 없어서 말을 못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거 무슨 물에 빠진 것도 아니고.. 그리고 발이 둥둥 뜬다는 곳의 원조는 평일 출근 시간대에 신도림 역 환승 통로가 아니었던가? =_=;;

소지품이 땅에 떨어지면 그건 그냥 포기해야 했다. 주우려고 고개를 숙였다가는 다시 일어설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꼴랑 1제곱미터 면적 안에 사람이 15명? 엥...??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극단적인 상황임이 틀림없다.

근데 이 할로윈 파티는 주최 측이라는 게 존재하는 정식 행사나 집회가 아니어서 책임소재를 따지기도 더 난감했다. 교황 방한 행사라든가 여의도 불꽃 축제, 태극기 집회 같은 부류가 아니라는 것이다.

2. 할로윈

할로윈인지 핼러윈인지는 수십 년 전 라떼만 해도 영어 회화 학원에서나 배우는 마이너한 이벤트였다. 재꼴랜턴이라는 건 파닉스 영어 교재의 밖에서는 볼 일이 없던 단어였고.. 그랬는데 그게 갑자기 우리나라에까지 퍼져서 무슨 발렌타인 데이, 빼빼로 데이 같은 문화가 됐다. 이런 건 꼭꼭 챙겨서 놀아야 애들 집단에서 인싸가 될 수 있다.

원래 할로윈의 본고장인 천조국에서도 이 날은 그냥 초딩 얼라들이 귀여운 귀신 분장을 해서 이웃집을 돌면서 trick or treat! 이러면서 재롱 부리고 사탕이나 얻어먹는 날이었다.
그런데 그게 울나라에서는 얼라가 아니라 20대 청년들이 코스프레 해서 클럽에서 술 마시고 춤추며 노는 날이 됐다. ㄲㄲㄲㄲ

일본도 서양 문화 동경하고 귀신 좋아하는 코드가 맞아떨어져서 할로윈 같은 거 아주 좋아할 것 같은데..? 거기는 분위기가 어떤지 모르겠다. 할로윈의 본동네 애들이 보고도 경악하지 않을지??

물론 예수 믿는 사람이야 할로윈의 반기독교적인 기원과 유래에 대해서 더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것에 의도적으로 동참하지 않으며, 본인 역시 그 입장에 동의한다.
10월 말쯤이면 늙은 호박 하나 장만해서 호박죽이나 맛있게 쑤어 먹을 시기이지 않겠는가? 이 사랑스러운 호박한테 그저 못생겼다는 프레임도 모자라서 흉측한 귀신 얼굴이나 새긴다니.. 나로서는 분통 터질 노릇이다.;; (글쎄, 이 따위 용도로라도 호박을 잔뜩 많이 구매하느라 호박 농가의 매출이 늘었다면 다행이지만, 아예 식용이 아닌 할로윈 전용 호박 품종을 따로 만들어서 재배하는 건 반대 소신)

깐깐한 신자는 할로윈이 아니라 성탄절조차도 실제 예수 탄신일이 아니고 기원이 태양신 숭배라면서 세상 분위기에 놀아나지 않는다. 그러니 하물며 할로윈이야 뭐.. 날짜가 루터의 종교개혁일과도 겹치니 더욱 배척할 수밖에 없다.

아 그러고 보니.. 굳이 기독인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언제부터 우리 민족이랑 아무 상관 없는 저딴 얄팍한 서양 귀신놀이 상술에 놀아나고 있냐? 전통 명절 하나 제대로 안 지키면서..?" 이런 보수적이고 좀 꼰대적인(?) 생각으로 인해 할로윈을 반대하는 경우도 있다. 뭐 그건 그렇다만..

한 가지 생각할 점은.. 할로윈 때 흥청망청 노는 애들이 다~~ 그 할로윈/반기독교 정신에 진지하게 동조해서 노는 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성탄절 이브 때 흥청망청 노는 애들이 예수 탄생을 동조하고 기뻐해서 노는 게 전혀 아니며, 광복절 폭주족들이 조국의 광복을 축하해서 날뛰는 게 전혀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 아해들한테는 성탄절이건 할로윈이건 유래나 의미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그냥 노는 날 명분이 필요했던 것일 뿐이다. ㅡ,.ㅡ;;
도대체 할로윈이 울나라 울문화랑 무슨 관련이 있다고 저렇게까지 몰려가서 미친 듯이 노는 건지.. 스트레스가 그리도 많이 쌓였는지는 솔직히 본인도 이해가 잘 안 가지만 말이다.
과연 내년엔 이태원에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흥청망청 할로윈 파티가 또 열리고 젊은이들이 많이 몰려들지 궁금하다.

3. 불순불온 정치 선동이 제발 근절되기를

꽃다운 나이의 수많은 청년들이 정말 황당하고 어이없는 사고로 저렇게 많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건 국가적인 비극인 건 맞다. 허나.. 이와 관련해서 본인이 정말 듣고 싶지 않은 말이 있다.

(1) 그노무 대통령 때문, 서울시장 때문이다 부류의 미친 정치병.
안전 통제를 강화했으면 안 그래도 검찰총장 출신 대령통의 공안시국이라고 욕했을 거면서.

(2) 이게 다~~ 악하고 음란 퇴폐적인 할로윈 문화에 대한 ㅎㄴㄴ 심판이다.. 지긋지긋한 종교병.
할로윈을 종교적으로 반대하는 건 반대하는 거지만, 재난 사건 사고를 자꾸 그렇게 갖다붙이지 말라고.
지금까지 이런 식의 경솔한 발언들이 야기했던 부작용과 어그로에 대해서 아직도 깨달은 게 없냐..?
이럴 때 보통은 눅 13:4-5를 생각하면서 자중하는 게 더 건전한 대응이다.

내가 보아하니 종교병 병크가 터진 건 별로 없었다. 그 대신 벌써부터 남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는 못된 악귀들이 내 예상보다 더 일찍 더 대규모로 날뛰기 시작한 것 같다.
한 건 거하게 터졌으니 이 개새X들은 얼마나 좋을까? 어떻게든 정부와 여당과 경찰을 욕하려고 혈안이 돼 있다.
지들이 지지하는 정치인 시절에 온갖 대형 화재와 사건 사고들이 터졌을 때는 입 한번 뻥긋하지 않았으면서 말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좀 민망하지 않냐?

벌써부터 촛불시위 하겠다는 놈들.. 이것들은 진짜 인간도 아니다. 내전 벌여서라도 이런 놈들을 다 청소해야 이 나라가 살 수 있지 싶다. 광우뻥과 세월호 때 한번 데였으면 됐지 사람들이 설마 두 번 속을까보냐?
왜, 지하철 운행을 방해하면서 시위하던 모 장애인 정치 단체가.. 자기랑 아무 상관도 없던 어느 장애인 가족이 반지하방에서 폭우 때 죽으니까 그걸 추모한다고 난리였었다. 그거랑 딱 같은 유형의 시체 장사이다.

저것들이 또 뭐라고 지껄였더라? "경찰이 마약 단속이나 대통령 경호 따위에만 너무 치우쳐서 진짜 필요한 군중 통제에 인력이 투입되지 못했다"....;;;
대통령이야 지들이 원래부터 싫어하니까 그렇다 치지만.. 마약.. 저 많은 인파가 밀집해서 노는 이태원 클럽이야말로 마약 단속을 집중적으로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당신, 마약이 나라 근간을 무너뜨리는 얼마나 심각한 범죄인지 모르냐? 사람 혈압 올리고 암 유발시키려고 정말 아무 개소리나 의식의 흐름대로 쳐 씨부리는 것 같다.

4. 과다한 미화를 하지 말고 감성팔이와 남 탓 좀 하지 말길

사고로 죽은 청년들에 대해서 "쳐 놀다가 잘 죽었다"처럼 비난· 비하를 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그건 개념 밥 말아먹은 인간말종 짓거리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을 무슨 나라를 구하다가 순국 순직한 사람만치 떠받들고 애도할 필요도 없다. 인간들이 왜 이렇게 균형을 안 맞추는지 모르겠다.

어떤 사망자의 모친이 "아니 애들을 무슨 그런 좁은 곳에 몰아넣어서..."라고 통곡했다. 자녀를 잃은 것은 슬프고 애석한 일이지만, 그 자녀는 무슨 군대에 강제로 끌려갔다가 의문사한 게 아니다! 그 좁은 곳에 가라고 정말 아무도 전혀 강요하지 않았다. 제 발로 간 거지.. =_=;;;

사상자· 피해자가 아니라 희생자라고 불러야 된대.. 이건 뭔 유체이탈 화법이야..??
영어로는 victim 한 단어이지만 우리말로는 뉘앙스와 어감에 따라서 뜻이 더 세분화돼 있다.
정말 악의적인 범죄를 당해서.. 아웅산 폭탄 테러로 순직한 관료라든가, 007편 격추, 858편 테러에 당한 정도는 돼야 희생자이지.. 이태원 압사 사고는..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어감으로는 희생자는 아니다. -_-;;
옛날에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나 삼풍 백화점 victim한테 희생자라는 워딩이 선뜻 통용됐던가..? 그렇지 않다.

"예고된 참사" 이딴 소리도 쌍팔년도와 90년대까지 진짜로 나라 시스템이 미개하고 후진적이고 비리와 부실공사가 넘치던 시절에 통용되던 클리셰이지.. 이젠 지겹지도 않냐? 그리고.. 이미 다 예고되고 예견 가능했으면, 할로윈 분위기를 즐겁게 잘만 보도하던 이전 보도 자료는 또 뭐가 되는 건데?
지금은 저건 정치병이랑 결합해서 남에게 떼쓰고 징징대는 수단으로(나이 20~30씩이나 쳐먹고도!), 그리고 누구 하나 마녀로 몰아서 조지는 광기로 굉장히 이상하게 변질된 비중이 더 크다.

군대에서 누가 고참의 가혹행위를 견디다 못해 자살했으면.. 그 유가족에게 보상을 하고 가해자를 잡아 처벌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렇게 죽은 병사를 굳이 계급 특진을 시키고 육군장을 치러서 예우하고 현충원에다가 안장할 필요까지는 없다. 내 말 틀렸는가?

지금 벌어지는 일도 저런 부류의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안전 통제 규제를 하겠다고 하면 공안시국이라고 난리 쳤다가, 사고가 나면 국가 탓 남 탓 떼쓰는 이 고약한 관행은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
아무쪼록 이런 사고가 퍼졌을 때 나도 화내지 않고 순수하게 피해자만 생각하면서 슬퍼하고 안타까워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Posted by 사무엘

2022/11/07 08:35 2022/11/0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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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8 3 사채 동결 조치

1972년, 박 정희 시절에 국내에서 시행됐던 8 3 사채 동결 조치는

  • 그린벨트와 마찬가지로 국가가 개인의 재산과 시장 구조를 인위로 좌지우지했던.. 반시장적이지만 필요악 성격이 있는 조치였다.
  • 김 영삼 때의 '금융실명제'와 더불어, 우리나라 헌정사상 제일 마지막에 행해졌던 대통령 긴급명령이다. 둘 다 금융· 경제 분야라는 공통점이 있다. (마지막 계엄과 마지막 국민투표는 5공 시절)
  • 우리나라가 그때까지만 해도 국가 기반이 얼마나 허술하고 경제 구조가 얼마나 취약했는지, 오죽했으면 경제 개발을 위해서 그런 통제가 필요했는지를 감안할 필요가 있다. 얘는 10월 유신과도 관계가 있다.

박 정희 시절에 우리나라는 무슨 공산주의 식으로 사유재산을 없앤다거나 땅을 몽땅 국유화한다거나 통치자를 우상화하거나 인민의 거주 이전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산업· 경제 구조가 완전히 자유 방임인 것도 아니어서 국가가 이것저것 통제를 많이 했다. 이건 분명히 짚고 넘어갈 점이다.

그때는 국가 차원에서 돈줄이 끊어지지 않게 하고, 그리고 공급이 충분치 않은 원자재나 농수산물에 수요가 너무 쏠리는 것을 분산시켜야만 사회 안정을 유지시킬 수 있었다. 가령, 혼· 분식 장려 운동은 쌀 소비를 제어하려는 취지였으며, 연탄 보급은 산림을 보호하고 비싼 석유의 소비를 억제하기 위함이었다.

2. 수도 이전 계획

과거에 일제 강점기가 태평양 전쟁과 일제 패망 같은 이변 없이 20세기 중후반까지 계속됐으면 한반도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정황상 조선인에게도 참정권이 주어졌을 수 있고, 철도의 관점에서는 만들다가 말았던 동해중부선이 완공됐을 것이다. 경부-경의선뿐만 아니라 경인선과 경원선의 복선화는 그 시절에도 이미 논의됐던 계획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1960년대 자료에 따르면, 쟤들은 식민지 조선의 수도를 경성에서 근처의 용인으로 옮길 계획이 있었던 것 같다. (출처: <국토종합개발의 역사>, 일본 국토계획협회, 1961) 음.. 도대체 왜?
하긴, 서울 구시가지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한데 엉켜 살기엔 너무 비좁아지긴 했다. 북쪽은 산으로 가로막혀서 더 확장을 못 하고..

그런데 지금 서울처럼 한강 이남을 개발하고 다리를 잔뜩 건설하는 게 아니라, 다른 장소를 개척할 생각을 했다는 게 흥미롭다.
심지어 조센징들은 만주로 쫓아내고 일본인들 뉴타운을 조성하려 했다는데.. 현실성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교통 연계는 어찌 될까? 수려선이 있긴 하지만 얘는 협궤였다. 얘가 당장 표준궤로 개궤되고 복선화도 되고, 경부선과의 연결선이 만들어져야 했을 것이다.

한편, 해방 후 리 승만 할배 시절에야 '경성부'가 서울 '특별시'로 바뀌었고 수도 이전 따위는 전~~혀 논의될 가치가 없는 주제였다. 하지만 1970년대에 박 정희는 남한의 중심부인 충청도쯤으로 수도 이전을 염두에는 두고 있었던 것 같다. 국토 균형 개발이라기보다는 서울이 북한과 너무 가까워서 불안하다고 말이다.
무장공비들이 청와대 코앞까지 침투했던 1 21 사태가 큰 트라우마를 남겼지 싶다.

(내 개인적으로, 박통 시절에 훗날 통치 스타일에까지 영향을 줬을 정도로 비극적이었던 사건 둘은 1 21 (1968), 그리고 영부인 피격(1974)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이를 계기로 박통은 어디 멀리 가지는 못하더라도 차선책인 강남을 적극 개발했다. 강북 여기저기에 난립해 있던 고속버스 정류장들을 통합해서 마침 경부 고속도로와도 가까이 있는 서초구에다가 전용 터미널을 만들었다.
여기는 일제 시대에는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허허벌판 논밭이었다. 리 승만 때까지만 해도 경기도 광주군이었지, 애초에 인서울 자체가 아니었다.

박 정희는 유신 헌법 하에서 9대 임기만 채웠어도 1984년까지는 했을 텐데..
여러 기록에 따르면 자신의 마지막 과업으로 (1) 행정 수도 이전, (2) 1996년쯤을 목표로 올림픽 유치 준비, (3) 핵무기 개발을 목표로 잡았던 듯하다. 각색이 들어간 오글거리는 낭설일 수도 있겠지만, "핵무기를 국군의 날 기념식 때 짠~ 공개하고는 미리 점찍어 둔 후임에게 정권을 물려주고 퇴임한다~~" 급이었다고 한다.

저 사람 이후 행정수도 이전은 세종시로 그럭저럭 실현됐고, 이제는 대통령 집무실이 경복궁 뒤의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옮겨졌다.
올림픽은 뭐.. 바로 후임인 전땅끄가 의욕적으로 추진해서 결국 잘 해냈다. 다만, 핵무기는 미국의 강력한 견제와 반대 때문에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뭐.. 일제의 '용인 철도'와 마찬가지로, 계획만 했다고 해서 진짜 실현된다는 보장이 있지는 않다는 걸 유의하자.
완전히 180도 틀어져 버린 서울 지하철 1~5호선 초창기 계획처럼 말이다.
그리고 경제 개발 5개년 정도는 박 정희 이전의 장 면 내각도 생각했던 것이고, 심지어 박 정희도 그걸 참고하긴 했었다. 그러나 그걸 실제로 추진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3. 청와대 주변의 잠금해제 내력

청와대 부근은 1968년, 북괴 무장공비가 청와대 코앞까지 침투했던 김 신조 사태를 계기로 주변 경비가 역대 최고로 강화됐다. 주변의 산길까지 몽땅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고 묶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간첩 식별을 위한 주민등록번호(지금과 같은 번호 체계는 아니지만), 5분대기조, 실미도 공작원 양성 등 엄청 많은 일이 있었으며, 특히 군복무 중이던 사람들은 복무 기간 역대 최장(3년)으로 연장이라는 날벼락을 제대로 맞았다.

이런 것들에 비하면 청와대 주변 등산로의 전면 봉인쯤은 아주 작은 변화에 불과했을 것이다.;;
평창동 마을이 이때 육성됐으며 북악스카이웨이 도로도 1968년 9월에 개통했다. 그 당시엔 유료 도로였다;;

그로부터 무려 25년이나 지난 1993년, 김 영삼 대통령 취임과 함께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 등산로가 개방됐다.
단, 주요 전망대 포토존에는 공익인지 의경인지 어쨌든 군인까지는 아니지만 경찰에 준하는 아재들이 상주하고 있어서 청와대 쪽으로는 사진을 못 찍게 감시하곤 했다. 본인은 그 시절에 인왕산을 올랐던 경험과 기억이 있다.

청와대를 촬영하지 못하게 하는 게 목적이니, 차라리 해 떨어지고 시야가 불량해진 밤에 인왕산을 오르는 건 괜찮았던가 보다.
그리고 매주 월요일인가? 1주일에 한 번은 감시 요원들이 사정이 있어서 그런지 여전히 입산 금지였다.

1993년 말엔 창의문(a.k.a. 자하문) 일대 구간이 개방됐다고 한다. 헐~ 옛날엔 거기도 민간인 접근 금지였어?? 하긴 북악산 쪽은 월담하지 못하게 높은 담장이 쳐져 있긴 하더라.

한양도성의 북쪽에 있는 숙정문 일대는 2006년 4월, 무려 노 무현 시절에야 개방됐다고 한다. 식목일이 공휴일에서 제외되면서 거의 동시에 저기도 해금됐다는 뜻이다.
그 뒤 2007년은 1월 1일부로 전국의 국립공원들이 무료화되어 입장료 징수가 폐지됐다.
2007년 식목일엔 북악산의 한양도성 구간 산책로가 개방됐다. 단, 신분증 까고 목걸이를 받아야만 출입 가능하다. 남쪽의 청와대 방면은 말할 것도 없고, 북쪽의 기존 북악스카이웨이와 팔각정 방면으로도 왕래는 불가능하다.

2009년 7월 10일엔 북한산과 도봉산 사이에 있는 우이령길이 매일 최대 500명에 예약제 형태로 민간에 개방됐다. 사실, 안보보다는 환경 문제 때문에 오랫동안 선뜻 개방을 못 하고 있었다. 서울 지하철 9호선이 첫 개통을 앞두고 있고, 용인-서울 고속도로가 개통했던 시절의 일이다.
그리고 그 해 10월 24일엔 북악산에서 "성북천 발원지 - 하늘마루" 사이의 제2 산책로, 일명 김 신조 루트가 추가로 개방됐다.

그렇게 규제가 차츰차츰 풀리다가 2019년쯤..?? 인왕산의 촬영 감시요원이 없어졌다. 그리고 북악산 목걸이는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지만, 개인 정보까지 수집하지는 않고 그냥 드나드는 인원 집계만 하는 출입 태그로 바뀌었다.
2020년 11월부터는.. 산중턱의 북악스카이웨이에서 한양도성 청운대 - 곡장 사이를 오가는 등산로가 추가로 개방됐다.

그리고 2022년.. 대통령의 집무실 자체가 청와대 말고 용산 국방부 청사 안으로 이사를 감으로써.. 청와대를 경호하기 위해 취해졌던 온갖 봉쇄· 금지 조치들도 모두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북악산 등산로는 모두 개방되고 목걸이 자체가 폐지되고, 북악산은 지금의 남산이나 인왕산과 별 차이 없는 서울 중심부의 친근한 야산으로 바뀔 것이며, 청와대 기존 건물은 청남대의 서울 버전뻘 될 것이고 흠.. 큰 변화가 예상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제 구글 지도가 아닌 국내 지도 사이트들에서도 청와대의 전체 구조가 멀쩡히 다 표시된다.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경복궁이 조선 시대의 궁궐이라면, 청와대는 대한민국 초기의 궁궐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2020년대 이전의 과거를 배경으로 영화나 드라마 찍을 때 "청와대 세트"를 따로 차릴 필요가 없겠다.

Posted by 사무엘

2022/07/05 08:35 2022/07/0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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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러일 전쟁과 경부선 건설 시절

1900년대 초의 경부선 철도 건설은 러일 전쟁과 거의 같은 타임라인이다.
그런데 일본군 군복이 아직 블랙이었고-_- 러시아를 완전히 쫓아내서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기 전이던 이 시절엔..
미래 판도가 어찌 될지 모르니 쟤들도 조선을 생각보다는 신사적으로 대했다.

애초에 이때의 일본군은 40여 년 뒤 태평양 전쟁 때의 그런 미쳐 폭주하던 일본군이 아니었다.
조선 땅을 거쳐 진군할 때도 민폐 안 끼치고 보급품을 꼬박꼬박 제값 주고 사 먹었다!
러일 전쟁 때 여러 조선 지배층 및 지식인들이 **괜히 일본을 응원했던 게 아니다**. 이건 팩트다.
이 인간들이 반민족 친일파 매국노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러시안스키들보다는 인종적으로 더 가까운 일본 편" 같은 논리일 뿐이었던 거다.

그러나 1905년, 경부선 완공되고 러일 전쟁이 끝나거나 최소한 일본의 승기로 기울고, 을사조약까지 맺어진 뒤에야 일본은 본격적으로 조선(인)을 하대하기 시작했다.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생기고, 일본이 우리의 친구가 아니라는 현타가 뒤늦게 전해진다.
을사/정미의병이 조직돼서 최후의 발악을 해 보지만 끝내 다 토벌되고 무장해제됐다.

오죽했으면 몇 년 뒤에 안 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동기· 배경도 한 줄로 요약하면 딱 이거다.
"일본이 우리의 친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네, 이토 이 비열한 자식~!" 더 말이 필요한가?

"조선총독부 토지 조사 사업"이라 하면 곧바로
홍보도 제대로 안 한 채 눈곱만치 짧은 기간 동안에 절차대로 신고 안 한 땅은 몽땅 날강도처럼 몰수 국유화 → 농민들 몽땅 땅 뺏기고 소작농으로 전락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니다.

그런 것처럼 흔히 경부선 철도 건설이라고 하면 곧바로
"대대로 전해지던 땅을 강제로 헐값 처분 → 조선인 노동자를 저렴하게 강제(!!) 징용해서 착취 → 철도 건설 반대 사보타주 하던 항일분자들 총살 처형.." 이런 게 떠오르는데..

과연 그게 그림의 전부일까..??
경부선 철도 건설 여건이 벌써부터 무슨 40년 뒤에 일본 탄광이나 남태평양 섬에서 교량/비행장 건설과 같은 여건이었을까?
그건 일단 물음표로 남겨 두고 자료를 더 찾아 봐야겠다.

2. 관동 대지진 학살

일제 시대 때..
항일 운동을 했기 때문에 일제가 지배자로서 그에 상응하는 탄압· 응징이나 보복을 한 거,
전쟁 때문에 조선인을 강제로 일본인으로 개조시키려고 뻘짓 한 거, 물자 착취한 거,
이런 정치· 군사· 경제적인 요인을 싹 빼고도 제일 실드의 여지가 없이 일본이 치명적인 반인륜 범죄를 저질렀고 욕 쳐먹어야 하고 사죄하고 유족 후손에게라도 배상해야 하는 건 관동대지진 대학살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지들이 자연재해를 겪은 걸 갖고, 또 조선인들한테 켕기는 게 있어 놓으니 "지진 시국을 이용해서 조선인들이 반정부 폭동을 일으킨다, 우물에 독을 탄다" 이런 유언비어 정도는 그나마 일말의 현실성이라도 있고 양반이다. 그런데..
"조센징들이 일본에 지진 좀 일어나라고 매일 축시의 참배를 벌였다, 조센징들이 모두 우리 혼슈 땅을 영차영차 밀고 흔들어서 지진을 일으켰다.."

이건 뭐.. 세월호 7시간이나 닭근혜 굿판, 광우뻥 미친소, 천안함 자침설을 능가하는 미친 짓거리 아닌가?
그때 자경단 폭도들은 항일 운동도 안 하고 그저 평범하게 먹고 살던 조선인들을 무차별 붙잡아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끔찍한 방법으로 학살극을 벌였다. 죽창으로 찌르고 사지 자르고 불태우고..

근처의 강이 며칠 동안 시뻘건 피로 물들었고, 조선인들이 목숨 부지하기 위해서 일본 경찰서에 제 발로 도망쳐 와서 제발 유치장 안에라도 집어넣어서 신변을 보호해 달라고 부탁을 했을 정도였다.
일본군 수뇌부에서는 "미약한 조선인들이 그런 짓을 할 리는 전무하다. 이것들이 정신력이 부족하고 군기가 빠져 놓으니 그딴 황당한 유언비어 선동에 넘어가는 것이다. 너희 일본인들은 정신 차려라잉~" 그렇게 훈시하는 장군도 있긴 했다. 하지만 일본의 공권력은 정작 이런 상황에서는 조선인들을 그닥 적극적으로 보호하지 않았다.

이거야말로 정말 심각한 사항인데 그 어떤 반일 장사꾼도 이걸 진지하게 재조명 거론한 적은 내가 알기로 없다.
정치색이 너무 없어서 별로 선동할 거리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난 반일정신병을 매우 혐오하고 공격하지만, 한편으로 과거 일제의 만행에 대해서도 어지간한 반일정신병자들보다 더 많이 정확하게 자세히 알고 있다. ㄲㄲㄲㄲㄲ

3. 2 26 쿠데타

1936년, 일본의 2. 26 쿠데타에 대해 들어보니 꽤 흥미롭다.. 우리나라에서 배우는 국사나 심지어 세계사에서는 접할 일이 없었던 사건이니 말이다.
구 일본제국에서 육군과 해군이 사이가 극히 안 좋았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만, 육군 안에서도 황도파와 통제파라는 두 파벌이 나뉘어서 서로 사이가 안 좋았다.

쉽게 비유하면 통제파는 좀 기득권 수구 세력에 가까웠다. 그러나 황도파는 진보 성향의 젊은 장교들이 “썩어빠진 것들 다 갈아엎자, 우리도 잘 살아 보자. 특히 천황 폐하께서 얼굴마담만 하면서 간신배에게 놀아나지 말고, 용단을 내려서 우리를 직접 통치해 달라” 이런 걸 주장했다. 그 당시 일본 사회도 모든 계층이 마냥 행복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황도는 누런 복숭아가 아니라 황제의 길을 뜻하는 皇道.. ㄲㄲㄲ

그랬는데 여차여차 하다 보니 황도파 장교들은 자기 뜻을 펴고 실현하려면 좀 더 과격하고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조선인들이 항일 독립 운동을 하듯이 일제히 궐기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녹치 않았으며, 심지어 천황조차도 그들의 기대와 달리 쿠데타 진영에게 전혀 협조해 주지 않았다.
“아무리 짐에게 충성을 바치네 어쩌네 하더라도, 명령 없이 군이 움직인 것부터가 짐에 대한 하극상 반역이다. 더구나 고관대작들을 살해까지 해?? 역적노무 색히들 당장 꺼져”라고 응수하면서 군부에다가도 강경 진압을 명령했다. 히로히토 천황도 이럴 때는 꽤 단호박 같은 구석이 있었다.;;

황도파는 이상은 좋았을지 모르지만 방법론이 너무 서툴렀다. 이런 사건을 계기로 장렬히 자폭하고 와해되고 소멸해 버렸다.
덕분에 군부는 통제파가 아무 경쟁자 없이 완전히 접수하게 됐는데, 통제파의 수장이 바로 도조 히데키.. 일본은 그때부터 더욱 군국주의로 브레이크 고장 난 내리막길 버스처럼 폭주하게 됐다. 이거 뭐 일본판 8월 종파 사건 같기도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강 우규 의사가 1919년 가을,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던 ‘사이토 마코토’를 죽이려 했지만 실패했었다. 3. 1 운동 이후로 문화 정책을 폈다는 그 사람 말이다.
사이토는 훗날 일본 내각총리대신으로 영전을 받아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강 의사의 의거 이후로 17년이나 뒤, 바로 저 2. 26 쿠데타 때 총을 수십 발 맞고 벌집이 되어 죽었다. 그래도 이미 70대 후반의 나이였으니 요절은 아니었다.

일제 시절 동안 맨날 일제가 조선인을 탄압했네 착취했네 어쩌구뿐만 아니라, 적들의 소굴/본부 내부에서는 어떤 변화와 갈등이 벌어지고 있었는지를 아는 것도 역사의 전체 그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4. 일본군 위안부 문제

우니나라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거론한다면 다음 세 가지만 집중적으로 공략하면 될 것이다.

  • 본인과 가족의 의사를 무시하고 강제로 납치해서 끌고 갔는가? 혹은 공장 취업, 취학 등으로 속이고 사기를 쳐서 모집했는가?
  • 미리 계약했던 정당한 화대를 주지 않고 착취했는가? 위생 보건 복지가 심각한 막장이었는가?
  • 패전으로 인해 철수· 후퇴할 때 증거 인멸을 위해서 여인들을 집단 학살했는가?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인멸하려 한 증거는 무엇이었는가?

중일/태평양 전쟁 당시에 일본군이 연합군 포로는 말할 것도 없고 자국민과 아군한테도 반인륜 범죄를 잔뜩 저지른 미친 집단이었다는 걸 본인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니 위안부의 처우도 극악이었을 거라는 선입견을 갖는 것 자체는 정당한 가설이다. 그 가설을 객관적으로 입증하든가 아니면 부정 반박하면 된다.

허나, 위안부의 모집과 운영 방식만 문제삼으면 되지, 무슨 위안부 자체가 인류의 전쟁 역사상 일제만의 최초· 독보적인 죄악인양 헛소리를 해댈 필요는 전혀 없다.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인간의 유구한 역사가 반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벼룩의 간을 빼 먹지, 위안부 할머니한테 빨대 꽂아 있는 사악한 반일 장사꾼 위선자 사기꾼도 당연히 걸러내고 쳐내야 한다. 걔 주변에 있다가 자살 당했다는 어떤 사람의 사인도 철저하게 진상 규명해야 한다. 걔야말로 생계형 친일파 김 뭐시기보다 더 나쁜 놈이다.

일제 초기의 토지 조사 사업도 그렇고, 말기의 강제 징용(?) 노동자도 그렇고..
불법 갈취 착취가 전혀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그 착취나 피해의 정도, 강압/강제성은 우리가 쌍팔년도 반일 항일 국뽕 패러다임대로 배웠던 것보다는 덜했다는 것이 여러 정황상 차츰 입증되는 추세이다.

이런 걸 남이 바로잡기 전에 우리가 먼저 바로잡아야 다른 팩트까지도 우리가 주도할 수 있다.
식인 호랑이를 동물 보호 운동가들이 앞장서서 사냥하고 제거해 줘야 다른 야생 맹수들을 보호하자는 명분이 설 수 있듯이 말이다.

5. 6 25 때 일본의 기여

징병제를 시행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신념에 따른 병역 거부자에게 집총 대신 시킬 만한 대안 작업으로 지뢰 제거가 즐겨 거론되곤 한다. 엄연히 군사 활동이지만 남을 죽이는 일이 절대 아니고, 오히려 자기만 사고를 당해 죽을 수도 있는 어렵고 위험하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6 25 사변 중에 일본이 딱 정확하게 그런 일을 했다는 건 무척 흥미로운 점이다.

일본이야 그 당시엔 UN 회원국도 아니고, 한창 연합군(=미군) GHQ로부터 참교육을 받으며 자숙과 반성 중이던 일개 패전국일 뿐이었다.
그러니 UN군 명목으로 전투병 파병 같은 건 정말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리고 일본군이라면 우리나라의 할배 대통령부터가 “우리는 괴뢰군과 싸우기 전에 왜놈부터 먼저 쏴 죽여 버릴 것이다”라고 맹렬한 거부감과 적개심을 표현한 바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한국과 적당히 가까운 섬나라로서 UN군의 병참 기지 역할을 하기에 너무 좋은 곳이었기 때문에 마냥 놔 둘 수만도 없었다.
그래서 미국이 일본을 적당히 구슬리며 투입시킨 일 중 하나가 기뢰 제거였다. 동해 바다에서 북괴가 매설한 것들 말이다. 굉장히 적절한 활용이었던 것 같다.

지금이야 한국과 일본 모두 인정하기를 민망해하고 꺼리지만, 일본이 자의로든 타의로든 6 25 때 우리나라를 전혀 안 도와 준 건 아니었다. 당장 개전 초기에 은행을 털린 뒤에 돈을 다시 만들어서 찍어내는 시급한 임무도 일본에서 진행됐다.
쟤들이 남의 전쟁 덕분에 물자 많이 팔아서 자기만 일방적으로 부자가 된 건 아니라는 것이다.

6 25는 8월 15일을 광복절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도 아닌 적화 혁명 과업 완수일로 만들려고 50일쯤 전의 더운 초여름에 일부러 침략을 벌인 '김 일성의 난'이었다. 동시에 인류 역사상 거의 전무후무하게 세계의 수많은 나라들이 이 작고 좁은 한 나라를 도와준 전쟁이기도 하다.

Posted by 사무엘

2022/06/27 08:35 2022/06/2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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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 팩트

1. 조선~구한말

  • 김 정호는 지도를 만든 죄로 대원군의 노여움을 사서 주리를 틀리고 옥사한 게 아니다. 한편으로, 훗날 일제는 자기들이 최신 장비로 더 정확하게 한반도 지형을 측량해 갔지, 굳이 김 정호의 작품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최 남선은 1920년대에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역사왜곡을 저지른 걸까..??)
  • 김 구(그 당시는 김 창수?)는 무슨 칼 찬 육군 장교를 격투 끝에 제압은.. 개뿔, 그냥 무고한 민간인 상인 일본인을 강도살인 저지른 것이었다.

  • 우금치 전투 때 관군과 일본군이 기관총을 동원해서 동학 농민군을 학살하긴 했는데..
    **기관총을 쏴 제낀 진영은 일본군이 아니라 조선 관군이었다!!!** 이때 같이 있던 일본군은 그냥 보병 예비군 수준의 부대여서 중화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청나라와 일본이 싸웠는데(청일 전쟁) 정작 전쟁터는 조선 땅이었던 것만큼이나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안 중근 의사도 소싯적에 동학군의 토벌에 참여했었다. 동학 고위 간부였던 김 개남의 경우, 다른 항일 의병장이었던 임 병찬의 신고로 잡혀서 처형 당하기까지 했다. 여러 정황상 그 시절엔 반드시 “동학 = 구한말 의병 항일 독립운동”도 아니었던 것 같다.

조선은 초기에 고려 왕족들을 학살한 것부터 잔혹했는데 훗날 홍 경래의 난을 진압한 것도 잔혹했고(단순 가담자까지 몽땅 처형), 외세까지 끌어들여 동학 운동을 진압한 것에 이어 갑신정변 개화파를 축출한 것도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잔혹했다.
태평양 전쟁의 책임이 도조 히데키 같은 군 수뇌부뿐만 아니라 히로히토 천황에게도 있듯, 고종은 외제 기관총으로 외적인 일본군이 아니라 자국민을 학살하는 참극이 벌어진 것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동학뿐만 아니라 개화파도 마찬가지다.
서 재필은 그야말로 삼족이 완전히 멸문지화를 당했으며, 고종은 김 옥균에 대해서는 국외로까지 집요하게 자객을 보내서 결국은 암살해 버렸다. 청과 일본으로부터 야만적이라는 지탄을 받으면서까지 기어이 김 옥균의 시신을 송환해서는 이 지경을 만들었다. (혐짤 주의)

more..

"대역부도옥균" -- 천하의 개쌍놈 김 옥균 역적패당놈의 최후 ... 정도의 뜻이다. 글씨는 암살범인 홍 종우가 썼다. 아무리 실패한 쿠데타였기로서니, 젊은 개화파 브레인들이 그 정도로 나쁜짓을 한 것이었을까..?? 고종이 다른 건 등신이어도 자기 권력 지키는 일엔 귀신이었다.

이런 선례를 남겼으니 "일본도 조선 저 나라는 국력은 쥐뿔 없는 주제에 완전 무법 야만인들 동네이군. 신사적으로 대할 필요 없고 우리도 마음놓고 더 적극적으로 무력으로 제압해도 되겠다"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로부터 얼마 못 가 을미사변이 일어난 건 우연이 아니었지 싶다.

그리고 이야기가 이게 끝이 아니다. 하나 더 생각할 점이 있다.
1880년대 중반에는 갑신정변 때문에 친일 성향의 개화파들이 멸문지화를 당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10년쯤 뒤인 1890년대 중반엔, 고종의 아관파천 조치와 함께 이번에도 친일 성향의 김 홍집과 몇몇 대신들이 희생양으로 버림받고 역적으로 몰려 비참하게 죽었다.

저기서 친일이라는 건 일제 시대 이후에 등장한 악질적이고 부정적인 친일이 아니다. 고종의 어영부영 오락가락 양다리 행보 때문에 애꿎은 유능한 인재들만 화를 입곤 했다.

2. 일제 시대

  • 일제의 제암리 학살은 무슨 싸이코패스마냥 여자와 갓난아기까지 다 죽인 건 아니었고, 소총보다 키가 큰 15세 이상의 남자만 가둬서 죽인 것으로 증언과 기록이 정정되었다.
  • 유 관순 역시 시체 토막설은 주작으로 판명되어 폐기되었다. 애초에 생년과 형량조차도 형무소 동기들의 증언과 기억이 아니라 기록의 발견으로 인해 2000년대가 넘어서도 막 정정되곤 했다.

  • 청산리 대첩이라는 말은 이제 폐기됐고 그냥 청산리 전투라고 부른다. 사기 진작과 희망고문을 위해서 전과가 터무니없이 너무 부풀려져 보고되었으며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일제라고 해도 그 정도 대패 참패의 책임소재를 따지는 군 내부 보고서까지 은폐 조작할 수는 없다.
  • 그나마 1920년대 초에 잠깐 있었던 독립군이 왕창 와해된 건 학교에서 잘 안 가르치는 자유시 참변 때문이다. 일본의 적이니까 우리의 친구일 거라는 생각에 소련 공산당을 과신했다가 낭패 본 격이다.

  • 조선어 학회 사건은 일제의 고등경찰이 아주 어이없는 꼬투리를 잡고 한 건 꾸며서 국어학자들이 필화를 당했던 사건이다. 그 당시의 민족 말살 정책과는 별개로, 국어사전을 편찬하는 것 자체는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놨던 상태였다.

3. 해방 후

  • “일본이 좀 더 늦게 항복해서 광복군이 제대로 참전만 했으면 우리나라도 2차 대전의 정식 승전국이 돼서 분단도 되지 않았을 텐데...”라고 아직까지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이제 없을 것이다.

  • 건국 초기에 반민특위를 해체한 주역 중 한 사람은 우리나라 초대 법무부 장관을 역임한 애산 이 인이다.
    일제 시대 때 독립운동가들을 무료 변호했으며,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기도 하고, 훗날 한글학회 건물 건립에 엄청난 사재를 기부했던 이 민족주의자 법조인이 보기에도.. 건국 초기엔 꼴리는 감정대로 남을 단죄하는 것보다, 군경 경력자 간부들을 이용해서 빨갱이 잡고 사회 혼란을 바로잡는 게 더 중요했던 것이다~!

  • 6 25 개전 초기에 피난민들이 위에서 멀쩡히 건너고 있는 중에 나라에서 한강 다리를 폭파한 건 아니었다. 단지, 폭파 후에 사후수습이 제대로 안 돼서 깜깜한 밤에 앞을 못 본 피난민 행렬이 주루룩 앞의 낭떠러지로 떨어진 경우는 있었다.

하다못해 1500년대 말의 기록인 이 순신의 난중일기는 당대의 타 문헌과 고증이 일치하고 교차검증이 되어 사료로 인정받고 있는 반면, 300여 년 뒤의 기록인 백범일지는 일본인 강도살인이나 전화 개통 등 여러 부분이 역사 고증과 맞지 않고 과장· 주작이 의심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우리나라 정체성을 탐구하려면 백범일지보다 독립정신이 훨씬 더 중요하게 다뤄지고 읽혀야 할 것이다.

※ 여담 1: 일제 부역자가 등장하는 문학 작품

내가 소싯적에 접했던 국내 현대 문학 작품 중에서 대놓고 주인공이 친일 부역자 악역으로 등장하면서 친일파 척결(?)을 주제로 내세운 작품은 둘 정도이다.
하나는 희곡 <살아 있는 이 중생 각하>(1949), 다른 하나는 소설 <꺼삐딴 리>(1962).

그나마 전자는 주인공이 재산이 몰수되고 자식한테까지 버림받고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걸로 끝난다. 발표된 시기도 해방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는 걸 생각해 보자.
그러나 후자는 정반대. 주인공이 얄밉게도 일본· 소련을 거쳐 미국으로 빌붙는 처세가 탁월하고, 본업이던 의술도 비현실적으로 너무 뛰어났다. 그래서 끝까지 승승장구하며 잘나가는 동심파괴 엔딩으로 끝난다.

저렇게 나라 정세가 통째로 엎치락뒷치락하던 시절엔.. "앞으로 미국이 뜰 거다, 소련이 뜰 거다" 예측하고 대처하는 게 지금으로 치면 앞으로 어느 지역 집값이 오르느냐 마느냐, 주식을 하냐 코인을 하냐 하는 것과 딱 정확하게 대응했지 싶다.
이건 대놓고 나라를 팔아먹고 보상도 일제로부터 직접 받아서 부귀영화를 누린 구한말 매국노 윗대가리라든가, 완장 차고 현장에서 동족을 대놓고 고문하고 괴롭히는 지저분한 짓을 한 부역자하고는 성격이 다르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박 정희가 1940년대가 다 돼서야 만주군을 거쳐 일본군 장교로 입대한 것은 전시 상황에서 조선인에게 단순 순사 보조원-_- 이상으로 정식 군문이 슬금슬금 열리고 있었고, 그게 흙수저 조선인에게도 출세의 기회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일 뿐이었다. "기왕 갈 거면 더 노력해서 병이 아니라 간부가 돼서 가자~! 실력만 좋으면 진급해서 심지어 왜놈들을 자기 부하로 부리게 될 수도 있다" 같은 생각?

더 현실적으로 비유하면, 과학고에 국립대 공대를 나와서 취업했는데, 불만족스러워서 의대나 로스쿨로 진로를 바꾸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일탈일 뿐이라는 것이다. 자기들도 똑같이 사리사욕이 있기는 마찬가지이면서 '도 넘게' 남을 욕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 여담 2: 관과 민의 관계

우리 선조들도 마냥 평화만 사랑하는 게 아니라 엄청난 전투종족이었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자기들끼리 싸우든 외적과 싸우든 무엇이든 말이다.

임진왜란 때 임금이 피난을 가고 관청이 항복하고 튀었을 정도이면, 밑의 백성들은 보통은 당연히 항복하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조선 백성들은 윗대가리의 부재 상태에서도 자체적으로 의병을 조직해서 잡초같이 끈질기게 저항해서 왜군에게 트라우마를 심겼다고 한다. 보스를 죽였는데도 곁의 졸개 잡몹이 끝까지 버티고 저항하는 게임처럼 말이다. 구한말 의병은 시즌2 정도 되려나?

그래서 한국인은 윗대가리가 아니라 민초가 늘 위기 때 일어나서 나라를 지켰네 마네 이런 말이 나돈다. 본인은 이런 말을 예비군 정신교육 때도 여러 번 들었다.

하지만 군대라는 엄청난 먹튀 소비 조직이 보급과 지원이 없이 어찌 유지되겠나..?
조선 정부가 처음부터 유사시를 대비해서 예비군/민병대 비스무리한 조직을 꾸려 놓은 상태였으며, 민간인의 전투력(?)을 석전 훈련을 통해서 유지시키고 있었고, 이런 민병대 자경단에게 국가적으로도 지원을 알음알음 했기 때문에 저런 대응이 나온 거라고 한다.

요컨대, 민초들이 나라를 지킨 것에도 윗대가리들이 평소에 기여를 전혀 안 한 건 아니라는 뜻이다. 하다못해 그 무능한 암군 고종도 구한말 의병을 일제 몰래 알음알음 지원하긴 했다.
그런 지원 없이 조선의 정치인· 관리들이 몽땅 무능한 탐관오리밖에 없었다면 20세기까지 갈 것도 없이 임진왜란 때 백성들은 옳다구나 왜군에게 진짜로 모조리 투항해 버렸을 것이다. 실제로 임진왜란 때 나라가 통째로 망하지는 않았지만, 도자기 기술자들은 처우의 차이로 인해 일본으로 많이 유출 당하게 된 게 사실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2/04/15 08:35 2022/04/1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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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군 철수와 피난

작년 8월 여름엔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이 완전히 철수하고, 나라 전체가 탈레반 집단에게 점령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50여 년 전, 남베트남이 망할 때와 상황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저 나라는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해방된 뒤에도 역사가 참 파란만장했다. 한때는 여기에 웬 소련 공산당 빨갱이들이 들어와서 1980년 무렵엔 전쟁이 벌어졌었다. 그러고 보니 미국 등의 자유 진영에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대거 보이콧 했던 이유가 이 전쟁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엔 여기는 이슬람 꼴통들 천지로 전락했다.
1970년대에 나라가 잘 살고 여성도 자유로운 복장으로 길거리를 활보했는데, 2010년대가 되니 옛날에 건물이 있던 곳은 폐허가 되고 여성은 부르카인지 히잡인지를 뒤집어쓴 답답한 복장으로 바뀌어서 혼자 함부로 길거리를 다니지도 못하게 됐다. 둘을 비교한 사진을 보신 분이 있을 것이다.

이런 걸 생각하면.. 약소국 신생 독립국들이 2차 대전 이후로 무작정 강대국으로부터 해방만 되는 게 장땡이 아니었겠다 싶다. 그럼 이제 식민지 착취나 인종 차별 같은 건 없겠지만, 그 뒤로도 내전이 벌어져서 동족끼리 지지고 볶고 싸우고, 식민 통치보다 더 악랄한 싸이코 폭군이 등장해서 나라 말아먹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당장 이북이 저 지경이 돼 있다. 그 반면 우리나라의 건국과 역사 흐름은 감사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제아무리 천하의 미국 천조국이 쬐끄만 자유 진영 국가를 지원하고 도와준다 해도.. 그 지원 대상 국가가 도를 넘게 부패해 있고 자기들 스스로 자기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의사가 없다면 아무 소용 없다. 무기를 지원해 봤자 그 무기가 빼돌려지거나 심지어 적에게 넘어간다면 미국이라도 미쳤다고 그 나라를 도와주겠는가.

이 패턴은 우리나라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6 25의 극초반에는 군기가 잔뜩 빠져서 허겁지겁 후퇴만 하는 오합지졸 국군을 보고는 미국의 반응은 “이 자식들 노답~~”이었다. 후퇴 금지 즉결처분이라든가 제주도 망명 정부 계획이 최후의 수단 차원에서 괜히 나왔던 게 아니었다.

그랬는데 서울 한강 이남에서는 어느 무명 용사가 “저는 명령이 내려올 때까지 이 자리를 절대 뜨지 않고 지킬 것입니다. 부디 탄약을 더 주십시오”라는 명대사로 맥아더 장군을 감동시켰다. 다음으로 낙동강 전선에서는 무려 사단장이라는 백 선엽 장군이 야전에서 직접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날 쏴 죽여도 좋다” 이런 모습을 보였으니 미국도 다시 적극적으로 한국을 도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이고, 얘기가 또 옆길로 많이 샜다. 다시 아프가니스탄 얘기로 돌아오면..
알고 보니 저 나라는 영해라는 게 없는 내륙국이더라. 어쩐지 그래서 탈출하는 사람들이 배가 아니라 수송기를 타려고 난리를 쳤던 것이었다.

그런데 비행기는 빠르기는 하지만 선박보다 수송 능력이 훨씬 부족하다.
그런 데다, 비행기는 타 교통수단과 달리 외벽 같은 데에 껴서/붙어서/몰래 짱박혀서 탑승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조건은 피난민에게는 굉장한 악재이다. 그래서 어디 못사는 나라에서는 어떻게 몰래 탔는지 “여객기의 랜딩기어 수납 공간에 어느 밀입국자가 숨진 채 발견” 이런 사건이 보도될 때가 있다.

그런데 하물며 비행기의 외벽에 끼어 탔다가 비행 중에 떨어져서 죽는 건.. 정말 희대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건.. 9 11 테러 때 창 밖으로 뛰어내린 희생자 이후로 거의 20년 만에 처음 봤다.

2.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국 화물기 추락 사고

지금 저 동네의 정치 시국하고는 아무 관계 없는 일이긴 하지만..
9년 전, 2013년 4월에는 무거운 미군 장갑차를 싣고 아프가니스탄 소재의 미 공군 기지를 이륙했던 보잉 747-400 개조 화물기가 갑자기 추락하는 대형 사고가 났었다. (내셔널 항공 102편 추락 사고) 원인은 화물 적재 불량이었다. (☞ 사고 영상)

육상 교통수단은 짐을 제대로 묶지 않으면 가다가 짐이 떨어지는 바람에 “주변 차”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
그러나 비행기나 선박은 엄청 무거운 짐을 제대로 묶지 않으면 비행/항해 중에 짐이 한쪽으로 쏠리고 기울어져서 자기가 추락이나 침몰 같은 사고를 당할 수 있다.

저 사고의 경우, 비행기가 이륙해서 기수가 살짝 위로 들렸을 때.. 화물칸 장갑차의 결박이 풀려 버렸다.
15톤이 넘는 무거운 장갑차는 뒤로 굴러가서 벌크헤드를 쳐 버렸고, 이 때문에 비행기의 미익을 조종할 수 없게 됐다.

그리고 무게중심이 기체의 뒤쪽으로 급격히 쏠리면서 기체의 받음각이 치솟고, 이로 인한 항력도 엔진의 출력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올라갔다.
이 때문에 그 화물기는 이륙한 지 얼마 되지도 못해서 실속에 빠진 채 지상으로 힘없이 추락했다. 승무원 7인 전원 사망.

추락하지 않았더라도 조종을 못 하니 1985년의 JAL123편 같은 꼴 나서 언젠가는 자세가 어긋나고 추락했지 싶다.
에.. 자동차에다 비유하자면 몇십 톤짜리 강철 코일을 실은 트레일러가 겁도 없이 교차로에서 고속 급선회를 하다가 원심력을 이기지 못하고 강철 코일 따라 차량이 통째로 옆으로 뒤집힌(전도) 걸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자동차는 그냥 뒤집히는 걸로 끝나지만, 비행기는 양력을 잃고 추락한 것이다.
이제 앞으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 군용기 또는 미군에서 외주 준 민항기가 뜰 일은 없어지는 건가..?? 문득 저 사고 생각이 났다.

3. 전투기의 호위

지난 2018년에는 6· 25 사변 장진호 전투 현장에서 발견된 국군 전사자들 유해를 하와이에까지 가져가서 신원 확인 후, 다시 우리나라로 송환한 일이 있었다.
유해를 실은 수송기가 우리나라 영공에 진입하자 우리나라에서는 그에 맞춰 전투기들을 무슨 보디가드처럼 출격시켜 수송기의 양쪽을 엄호했다.

전투기 조종사들은 수송기를 향해 거수경례를 하고 이렇게 인사했다.

“오랜 시간 먼 길 거쳐 오시느라 대단히 수고하셨습니다. 지금부터 대한민국 공군이 안전하게 호위하겠습니다.” (☞ 영상)

이게 영화나 드라마의 대사가 아니라 현실이었다니..

태양의 후예에서 “성공한 인질 구출 작전에 무슨 책임을 지겠다는 말씀입니까? 정치와 외교는 제 책임입니다. 우리 국민을 무사히 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대사처럼 사이다이고..
현충원에 있는 할배 묘지에 새겨져 있는 헌시 “민족의 독립을 되찾아 우리를 나라 있는 백성 되게 하시고”처럼 감동적이다. 그리고 2013년 레카 시절 국군의 날 기념식 영상처럼 뭉클하다.

지난 8월에 모종의 계기로 홍 범도의 유해가 카자흐스탄에서 우리나라로 돌아올 때에도 전투기들이 똑같이 수송기를 호위했다. 이때는 3년 전에는 안 했던 섬광탄까지 폭죽처럼 쏴 줬다. (☞ 영상)
홍 범도는 독립군 활동을 하다가 자유시 참변을 겪고, 그 뒤엔 소련 인민으로 살았던 사람이다. 헤이그 밀사 중 하나였던 이 위종처럼 말이다. 소련으로 가긴 했지만 딱히 한국에서의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이나 북한의 건국과 연루된 것은 없다.

우리나라는 이렇게 독립운동가나 6· 25 참전 용사의 유해가 귀환할 때 전투기 호위를 했는데, 지난 도쿄 올림픽 때 대만에서는 선수들이 귀국할 때 이런 이벤트를 시행했었다.
대륙을 꺾고 좋은 성적을 거둔 선수들이 너무 기특하다면서, 귀국하는 선수들이 탄 여객기의 주위에 미라주2000 전투기를 네 대 띄워서 호위해 준 것이다. 총통 각하가 특별 지시를 내린 거라고 한다. 공군이 이런 의전에도 동원될 때가 있는 셈이다.

4. 세계에서 제일 큰 비행기의 최후

인류가 만들어 낸 역대 가장 거대한 비행체야 나치 독일 시절의 힌덴부르크 비행선이다. 허나, 부력이 아닌 양력으로 날면서 가장 많은 payload를 싣고 이륙 가능한 세계 최대 비행기는 바로.. 구소련에서 지난 1988년에 개발했던 An-225였다. 여객기가 아니라 화물기 겸 군 수송기 용도로 만들어졌다.

얘는 그 큰 보잉 747은 말할 것도 없고, A380보다도 더 컸다. 요즘은 저런 4발(엔진 수) 비행기조차 경제성이 떨어진다고 단종되는 추세이지만 An-225는 무려 6발이었다. 그리고 예비용 자매기가 구소련의 붕괴 시국으로 인해 끝내 만들어지지 못한지라, 얘는 동형의 다른 기체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 유일 유니크 아이템이었다.

워낙 덩치가 큰 덕분에 부란 우주왕복선도 실어 나르고 다른 여객기의 벌크헤드 같은 대형 부품도 수송하고.. 우리나라를 방문한 적도 있었다.
30년 넘은 낡은 비행기이다 보니 내부 기기들이 지금 관점에서는 낙후했으며, 조종을 위한 승무원이 좀 많이 필요하긴 했다.

하지만 세계의 항덕들이 주목해 온 이 역사적인 비행기가 그만 소실되었다. 다른 사고도 아니고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 수리 불가능한 손상을 입고 대파 당했다. 비행 중 격추는 아니고, 공항 격납고에 가만히 주기 중이었는데 공습을 받아 같이 박살 난 것이다. 전쟁이 야기한 참으로 안타까운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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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우리나라 내부에서의 최대 항공 사고

그나저나.. 우리나라 국적의 여객기가 옛날에 겪었던 네임드급 사건· 사고로는 북괴가 저지른 대한항공 858편 폭파(1987), 소련에 의한 007편 격추(1983), 괌에서 801편 착륙 실패 추락(1997) 등 여럿 있다. 이것들은 사고 장소는 다들 외국이었다.
정작 대한민국 내부에서 벌어진 역대 최대 규모 항공 사고는.. 의외로 국적기의 사고가 아니어서 인지도가 별로 높지 않다. 바로 2002년 4월 15일에 악천후 속에서 부산 김해 공항에 착륙하려다 실패하고 인근 야산에 추락한 중국 국제항공 129편 사고이다.

이 사고로 승객 155+승무원 11명 중에 130명이 사망하고 36명만 살아남았다. 승객들은 대부분 한국인이었다.
이건 1993년에 발생한 아시아나 항공 733편 추락보다 더 큰 사고였다(68명 사망, 48명 생존).
이 두 사고는 지형 때문에 착륙 난이도가 높은 공항에다, 악천후와 조종사 과실까지.. 발생 원인이 서로 좀 비슷하다. 하지만 아시아나 733은 추락 후에 다행히 화재와 폭발이 없었던 반면, 저건 그렇지 않아서 더 처참한 사고가 되었다.

요컨대, 우리나라는 일본처럼 여객기 한 대의 추락만으로 무려 500명이 넘는 사람이 몰살 당했다거나..=_=, 천조국처럼 여객기가 납치 당해서 고층 건물과 충돌하는 엽기적인 일을 자국 내부에서 당한 적은 없다.
본인조차도 2002년 5월 25일, 대만의 중화항공 611편 공중분해 추락 사고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정작 저 사고는 한참 뒤 나중에야 뒷북으로 접했다.

이 사고를 계기로 부산에서는 김해 공항을 대체할 더 크고 안전한 동남권 공항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여론이 대두되었다. 게다가 김해는 군 공용이기까지 한 관계로, 민항기의 운용에 제약이 더 크다.
굉장히 오랫동안 진통이 많았는데 결국은 가덕도에 신공항의 건설이 확정되었는가 보다.
서울에 공항이 여의도-김포-인천의 순으로 확장되었다면, 부산은 공항이 수영-김해-가덕도의 순으로 확장되는 모양새이다.

한편, 우리나라 국적기에서 사망자가 수십 명 이상 발생한 심각한 대형 사고는 저 801편 사고 이후로 현재까지 20년이 넘게 전무하다.
메롱 상태인 나라 말고, 세계를 통틀어 나름 선진국의 플래그십 항공사가 낸 '마지막' 대형 사고 기록은 현재로서는 2009년 에어 프랑스 447편 추락 사고가 차지하고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22/03/16 08:35 2022/03/16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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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민국의 역대급 흑역사

우리나라는 1990년대에 전국 곳곳에서 안전불감증으로 인한 참사· 재해를 겪곤 했다. 그런데 사고 공화국이라는 별명까지 만들어졌던 김 영삼 말고, 김 대중 시절에 특별히 정말 가슴 아픈 비극이 벌어진 게 있었다. 바로 1999년 6월 30일,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 화재 참사이다.

이건 본인이 고등학생이었던 시절의 일이다. 그때 현장에서 구조됐던 유치원생이 지금은 20대 후반의 성인 사회인이 됐을 정도이니, 세월이 많이 지났다.
작년 12월 9일엔 SBS 꼬꼬무에서 이 사건을 다뤘었다. (☞ 링크)
이야기꾼이던 장 도연 씨는.. 그 당시에 새까맣게 타고 녹은 숯덩이 시신만으로도 부모가 자기 아이를 바로 알아봤다는 말을 하다가, 자기도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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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습이 편집되지 않고 그대로 방송을 탔다..)

씨랜드 참사는 보면 볼수록 어쩜 이렇게 최악에 최악의 상황만 골라서 일이 터진 건지 경악스럽기 그지없다.

  • 소망 유치원에서는 하필 며칠 전에 서울 강동 교육청 주관의 "여름방학 생활 지도를 위한 원장 회의"에서 유아 숙박 수련 활동을 하지 말라는 지침을 받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대놓고 무시하고 캠핑을 보냈다.
  • 그런데 캠핑 보낸 곳은 하필 온갖 불법과 비리를 감행해서 용도 변경하고, 싸구려로 허술하게 지어지고 화재에도 엄청 취약한 수련원이었다.
  • 그 많고 많은 방 중에서 하필 그 유치원생들이 자고 있던 3층 방 301호에서 화재가 났다.
  • 그리고 하필 그 방에만 화재 발생 당시에 인솔 교사가 전혀 없었다.
  • 하필 그때 화재경보기도, 소화기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초기 진화가 안 됐다.
  • 하필 그 수련원은 교통도 엄청 불편한 곳에 있어서 소방차가 오는 데 시간이 굉장히 많이 걸렸다.

그 (가)건물은 온통 가연성 단열재로 둘러져 있었기 때문에 화재는 기름에 불 붙은 듯 순식간에 건물 전체로 번졌다. 건물은 어지간한 목조건물 이상으로 정말 활활 잘 타서 깡그리 잿더미로 변했다. 목조건물보다 훨씬 더 짙은 유독가스를 내뿜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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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씨랜드 수련원엔 전국 각지에서 모인 초등학생과 유치원생, 인솔 교사들이 무려 544명이나 있었다. 그 중 소망 유치원은 방 두 개를 사용했는데, 그 중 하나인 301호에서 자던 유치원생 18명은 한 명도 구조되지 못하고 울부짖다가 전원 몰살 당했다.
거기에다 2층에서는 부천에 소재한 어느 유치원 여자애 한 명만 유일하게 구조되지 못하고 사망했고, 애들을 구조하다가 순직한 교사와 강사가 4명까지 추가로 총 23명이 목숨을 잃었다.

2. 화재의 원인

그런데 정작 이 처참한 화재가 최초로 발생한 원인은 의외로 썩 명확하게 규명돼 있지 않다. CCTV 기록이나 목격자 같은 것도 없다.
국과수의 공식적인 조사 결과는 모기향 불이 실수로 번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피해자 유족을 비롯해 씨랜드 건물의 구조를 불신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으며, 아마 누전 합선 때문일 것으로 추측한다. 모기향설은 화재 책임 면피를 위한 구실일 뿐이라고 말이다.

불이 복도 같은 엄한 데가 아니라 애들이 자던 301호 안에서 시작됐다는 건 명백한 팩트이다. 이게 성립하는 한, 본인은 전기설도 무작정 신뢰하지 않는다. 그럼 거기서 추워서 전열기라도 가동했거나 더워서 에어컨을 틀었거나 뭔가 전기를 써야 누전 화재가 발생할 수 있지 않겠느냐 말이다.

그런 저렴한 가건물에 에어컨이 있었을 리는 없고, 전등이나 선풍기 하나 남김없이 다 끄고 잤을 테고.. 요즘처럼 개인 스마트폰을 충전할 것도 없던 시절에 그 방에서 전기 화재가 발생할 껀덕지가 내가 보기엔 별로 없다.
실제로 그 애들은 갯벌 체험에 물놀이 등 하루 종일 노느라 정신없었고, 숙소에 들어가서는 덥네 춥네 따질 것도 없이 곧장 몽땅 기절했다고 한다. 쟤들은 중고딩이나 초딩도 아니고 겨우 6~7살짜리 유치원생임을 기억하자. 야영 캠프 수련회 같은 건 아무리 못해도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는 된 뒤에 보내는 게 일반적이다.

그 반면, 촛불이나 모기향이 재수 없어서 밤중에 곁의 가연성 물질에다 엎어지기라도 하면 대형 화재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씨랜드의 경우도 불이 난 것 자체보다는 건물 자체가 가연성 자재로 뒤덮여 있었던 게 더 문제였을 뿐이다.
그러니 국과수나 법원에서 있지도 않던 모기향을 대놓고 주작한 게 아니라면, 이건 국가 기관의 공신력 있는 기록을 심하게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것도 무슨 한강 의대생이 실족사 했냐, 아니면 타살 당했냐 같은 문제처럼 보인다...

………라고 썼는데, 사진을 다시 찾아보니 저 수련원의 방마다 에어컨 실외기처럼 보이는 물건이 있긴 하다. 평양 아파트에도 없다는 물건이 그래도 저 씨랜드 수련원 컨테이너 가건물에는 있었던가 보다. 그걸 가동하고 있었다면 진짜 전기 화재였을 수도 있고..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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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작동하지 않은 소화기

그리고 그 당시 뉴스 보도 영상을 보니..
씨랜드 수련원 현장에서 나뒹굴던 소화기는 그래도 압력 게이지가 달려 있는 신형 축압식 소화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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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형 가압식 소화기는 폭발 위험 문제로 인해 1997년 무렵부터 국내에서 판매와 유통이 금지됐다. 축압식 소화기는 더 안전하고, 스프레이처럼 손잡이를 쥐고 있는 동안만 소화액을 끊어서 분사할 수 있으며, 분출력이 고갈되어 고장 났으니 교환해야 된다는 걸 게이지를 통해 바로 알 수 있어서 여러 모로 좋다.

씨랜드 수련원은 1998년에 개업했다고 한다. 그러니 쟤들도 나름 폐급이 아니라 법적 기준을 충족하는 신형 소화기를 갖추긴 했던 것이다. 무슨 10년 묵은 쌍팔년도 폐급 가압식 소화기도 아닌데 왜 저것마저 불량이어서 동작하지 않았는지는 개인적으로 좀 이해가 안 된다.
설마 실제로 동작하는 소화기가 아니라 처음부터 인테리어 가짜 소품을 갖다놨던 걸까..??

즉, 이 건물은 용도 변경 부실 시공이 문제이지, 시설의 노후화가 문제일 여지는 별로 없다는 것이다. 소화기도 그렇고 전기 시설도 그렇고.. 그래서 본인은 화재의 원인에 대해서도 무슨 피복 벗겨진 전선이 떠오르는 전기설을 선뜻 공감하지 않는 것이다.
관례적으로는 원인 불명의 화재는 몽땅 전기 때문으로 적당히 얼렁뚱땅 때우고 조사를 끝내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긴가민가한 원인을 조사하느라 미관에 좋지도 않은 현장을 마냥 세월아 네월아 보존하고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모기향이라는 다른 원인을 굳이 찾아낸 게 조사를 더 꼼꼼히 한 것에 가깝다.
이 시체가 소사· 익사를 한 건지, 아니면 먼저 죽고 나서 물불에 던져진 건지를 판별할 수 있듯, 전선도 여기서 직접 불이 난 건지 아니면 다른 화염에 휩싸여서 불탄 건지 정도는 육안 판별이 가능하다고 한다. 진짜로 누전 때문에 발생한 화재는 통계 수치보다 드물다.

4. 관련 인물의 처분과 근황

소망 유치원은 사고가 매스컴을 탄 당일 곧바로 허가가 취소되고 폐쇄됐다. 30대 중반이던 유치원 원장은 1심에서 금고 5년이 선고됐지만, 훗날 감형되어 2년 반만 복역하고 2001년 말에 출소했다.
이 사람의 잘못은 교육청의 지침을 무시하고 수련원 입소를 강행한 게 작고, 화재 때 애들을 제대로 구조하지 않고 먼저 대피한 게 크다고 하겠다. (직무상 긴급피난 불허)

사고 10주기인 2009년경엔 이 사람의 근황 인터뷰가 월간조선에 실렸다. 유아교육 쪽 일은 완전히 연을 끊은 채, 딸 키우는 주부로 잠적하며 살고 있댄다. (☞ 링크)

그 사건에 대해서는 지금도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고, 차라리 그때 자기도 화재 현장에서 죽거나 화상이라도 입었어야 했다고 자책했다. 하지만 그때 교사들은 301호의 바로 맞은편 314호에 있었고 불이 났다는 걸 정말로 몰랐을 뿐이라며.. 특히 밖에서 삼겹살과 쏘주 회식 중이었던 건 절대 아니라고 여전히 강하게 부인했다. 본인 포함 교사들은 다 교회 다니는 신자여서 술을 마시지도 않는다면서..

물론 건물을 이탈하지 않았다고 해도 애들을 구조하지 않고 혼자 빠져나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며, 이에 대한 형사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그리고 저 주장은 본인이 보기에도 신빙성이 의심스럽다. 그냥 "이디 아민이 개싸이코 망나니 폭군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식인까지 한 건 절대 아니다~"(요리사의 증언) / "내가 보기로 타이타닉 호는 침몰 후 두 동강이 난 건 절대 아니었다"(사고 후 청문회에 불려간 모 승무원의 증언) 이런 부류의 실드처럼 들린다.

다음으로, 이 따위 건물을 갖고 영업을 한 씨랜드 수련원 사장은 죄가 당연히 더 무거우니 더 큰 벌을 받았는데.. 보도 자료에 따르면 처음엔 금고 5년에다 징역 2년 6월.. 도합 7년 6월이 선고되긴 했다. 금고와 징역을 조합할 수도 있는 건가?
기간으로만 따지면 삼풍 백화점 이 준 회장의 형량과 동일하지만, 이것도 나중에는 5년 정도로 감형됐다.

삼풍 그룹 회장이야 만기 출소 후에 얼마 못 가 죽었다. 그러나 저 사람은 출소 후에도 같은 부지를 갖고 어떻게든 편법으로 돈 벌려고 난리를 치다가 지금은 거기 바로 근처에다 제주도 컨셉의 '야자수 카페'를 만든 것 같다. 이거 경영자가 씨랜드 사장과 동일 인물이라는 게 정황상 거의 확실해 보여서 뒤늦게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동일 이름, 동일 나이, 동일 지역!!

하긴, 그 사람이 씨랜드와 무관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씨랜드와 전혀 무관합니다. 악의적인 허위 사실 유포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엄정 대응하겠습니다"라고 공지를 진작에 당당히 했을 것이다.
전재산을 피해자 보상금으로 뜯겨서 파산· 몰락하고 타지에서 조용히 찌그러져 귀양살이를 하는 게 아니라.. 멀쩡히 재기해서 같은 곳에서 희생자 위령비 하나 없이 다른 장사나 하고 있는 건.. 파렴치가 선을 넘는 것 같다. 이 사실이 꼬꼬무의 보도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알려져 버렸으니 이제는 저기도 사업에 애로사항이 꽃피지 싶다.

5. 씁쓸한 결말

요컨대 씨랜드 참사의 주범은 (1) 건물주, (2) 건물주와 결탁하고 뇌물 받아서 건축과 사업 허가를 내 준 부패 공무원, (3) 구조 조치 제대로 안 한 교사 정도의 세 그룹으로 나뉜다. 1과 3의 처벌도 너무 가볍거니와 2는 처벌이 없다시피했던 게 울화통이 터진다. 그나마 2를 구속이라도 시키는 데 일조한 어느 양심선언 공익제보 공무원은 눈총을 견디다 못해 이듬해에 퇴직을 하게 됐다. 이게 암담한 현실이다.

우리나라가 열나게 노력해서 보릿고개는 탈출했어도 사회 관행은 8, 90년대가 되도록 여전히 미개했다. 법과 원칙과 안전 의식이 없고 온갖 적당히 편법이 만연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게 아니라, 공무원들을 접대하고 기름칠 하면 되게 만들 수 있다. 남들은 다 그렇게 하는데 혼자 안 하고 있으면 자기만 바보가 된다. 법이라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있는데, 보안 취약점을 이용해서 해킹해서 악성 코드를 주입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합숙 캠프에 보내지 말라는 교육청 지침도 딱히 교통사고나 화재 가능성까지 내다보는 선견지명 차원에서 만들어진 건 아니었을 것이고, 그 정도는 꼬우면 생깔 수도 있었을 것이다. 주변에 차가 전혀 없는데 빨간불 신호 기다리는 게 귀찮아서 무시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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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애들을 화장해서 서해안의 씨(sea)랜드 수련원과는 정반대 방향의 강원도 동해 바다에다 뼛가루를 뿌리고, "OO야, 하늘나라에서 꼭 만나자~~"라고 부모가 울부짖는 걸 보니 나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고 보니 301호는 제일 끝이고 탈출 계단도 엎어지면 코 닿는 곳에 있어서 탈출하기 제일 쉬운 위치이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저렇게 됐던 걸까! 이걸 생각하니 나도 괜히 또 열받는다.. >_<

서울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시절에 메달을 땄던 유명 아이스하키 선수 아주머니가 이 사고로 아들을 잃었다. 그 뒤의 조치로 인해 더 상처를 입고 나라에 대한 애정이 싹 사라져 버렸으며, 이 때문에 메달을 반납하고 뉴질랜드로 이민 간 게 매스컴을 탔다.
미개한 관행은 집권 여당이 누군지하고는 별 관계 없는 총체적인 문화, 의식, 분위기, 풍조 문제였다. 긴 시간 동안 많은 수업료와 진통을 치르면서 차차 개선되었을 뿐이다. 그동안 달라진 게 없는 건 아니다.

확실히.. 옛날엔 세월호보다 더 처절하고 더 큰 사건 사고가 벌어졌어도 2010년대 같은 미친 유언비어 정치 선동과 반정부 시위 폭동 따위는 없었던 것 같다. 이건 지금이 옛날보다 더 퇴보한 게 명백한 사항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2/01/20 08:35 2022/01/2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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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일

(1) 외세 때문에 못 하고 있는 게 절대 아님
내가 정말 양심에 손을 얹고 진지하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야..
이 지구상에서 정말 중공만치 한국의 남북 통일을 온몸으로 반대하고 북괴 체제의 존속을 지지하는 악한 나라가 또 있냐..??
6 25 사변이 벌어졌던 시절이나, 그로부터 70여 년 뒤의 지금이나 한결같이 말이다.

유엔군이 38선 넘어서 북진을 하니까 칼같이 개입해서 저지한 게 저놈들 아니었냐?
그걸 놔두고 도대체 무슨 염치로, 무슨 양심으로, 무슨 유체이탈 정신승리 화법으로.. 통일이 웬 얼어죽을 일본 미국의 반대와 방해 때문에 안/못 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2) 이제는 남북 통일 한다고 해서 국력이 더 강해질 수 있지 않음
그리고 이 인간들은.. 남한 북한이 합쳐지면 한국이 순식간에 일본 미국을 능가하는 강대국 부자 나라가 될 거라고 진짜 진지하게 생각하는 걸까? 허 참..

남한과 베트남이나 필리핀이 합쳐지면 일본을 능가하는 강대국이 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엔 남한과 독일 정도가 합쳐져야 이제 일본과 맞장뜰 만할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런데 하물며 북괴가 베트남· 필리핀보다 더 잘사는 나라이기라도 하나?? 어이구..

본인의 정치 성향이 마음에 안 드는 애들, 싫은 애들.. 그 누구든지 입이 있으면 말해 봐라. 변명이든 반박이든 해 보셔~ 도전장 날린다.
이래서 반일정신병은 정상적인 지능과 양심으로는 절대 걸릴 수 없는 병인 거다.

(3) 이제는 통일이 아니라 그냥 북한의 개방과 민주화를 바라야 함
사실, 우리나라가 남북통일을 할 거면 쌍팔년도 이전의 할배나 원조가카 시절에 무력· 흡수통일 형태로 했어야 했다.
그러나 남북 분단은 이제 사람들 세대가 바뀌어 버릴 정도로 장기화돼 버렸고, 북한 체제가 저절로 무너질 수 있던 기회까지도 다 놓쳐 버려서 이젠 때가 너무 늦었다. 골든타임을 놓쳤다.

이제는 무리하게 통일을 바랄 게 아니라 북한의 개방과 민주화부터 먼저 바라야 한다. 사실, 통일을 하려는 이유도 북한 주민들에게 저걸 주는 것 말고 다른 의도가 없다.
북한을 평범하게 왕래할 수 있는 중국· 일본 같은 정상적인 외국으로라도 먼저 만드는 게 절대적으로 선행돼야 한다.

(4) 북괴의 흉계
남조선이 멸공통일, 반공통일, 승공통일, 평화통일의 순으로 기조가 바뀌는 동안,
북괴는 전면 남침, 무장공비, 납치 폭파 테러이다가 그 다음으로 잠수함, 핵과 미사일로 기조가 바뀌었을 뿐이다!

일본은 패전 후에 GHQ한테서 교육받고 군국주의 쫙 빼내고 나라 체제가 싹 개조되기라도 했다. 그 뒤 일부 소수 또라이들이나 되도 않은 독도 갖고 트집잡고 지랄하는 정도이다.
하지만 북괴는 진짜 70년 전이나 지금이나 어림 반푼어치도 바뀐 게 없는뎁쇼..?? 과거의 망령이랑 현재의 적을 구분할 줄도 모르냐?

우리나라한테 저지른 짓에 대해 일본이 한 것만치라도, 영혼 없는 립서비스 사죄 보상이라도 한 것조차 단 1도 없고..
그렇게 퍼주고 평화 지랄해서 지금 북한 주민이랑 검열 없는 편지 왕래, 전화 통화, 북한 내부로 개방된 인터넷..
도대체 뭐 어느 거 하나 이뤄진 게 있나..??

민주당 간첩과 북괴 체제야말로 진짜 시대착오적인 애들일 뿐..
그나마도 아주 좋게 점잖게 신사적으로 말했을 때 시대착오적인 거고, 감정대로 현실대로 말하면.. 바로 가스실로 보내고 대가리에 총알 구멍 내야 될 애들이다.
굳이 목숨은 부지하고 싶거들랑 삼청이 아니라 오청 백청교육대라도 보내서 두뇌 구조를 개조시켜야 된다.

'공산주의' 와 '공산주의자'는 같지 않으며 '좌파'와 '종북'도 전부 다른 개념이긴 하다. 하지만 어쨌든 다들 나쁜놈이거나 아니면 나쁜놈의 사상적 근간으로 오· 남용되고 있는 건 다 동일하다.

2. 사악하고 불순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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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저런 상황에서

"자유라는 게 왜 중요할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왜 피흘려 가며 이를 지켜내야 했을까요?"


이렇게 묻는 게 정상적이고 도덕적이고 인륜에 부합하고 올바른 질문이란다, 이 머저리 바보천치 등신아.
저기서 한 발짝만 더 나가면.. 곧바로 민족 해방 항쟁이 미제 원쑤들에 의해 좌절됐다는 말 튀어나오겠지.

의병이고 독립군이고 싹 다 토벌되고 없어진 일제 식민지도 전쟁 없는 평화 상태였고,
학교에서 죄없고 약한 애가 양아치한테 고분고분 삥뜯기는 것도 싸움질 없는 평화 상태라구.. 안 그래, 이 사악한 위선자야?

3. 자살 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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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이 한두 번만 있었으면 그냥 우연일 수 있겠지만.. 줄줄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건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정권에 반대했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코렁탕 먹는다거나.. 심지어 장 준하, 최 형욱처럼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하는 사건이 민주화 이전 군사 독재 시절에나 있는 줄 알았지?

반세기 전 버전은 그나마 반공과 경제 개발을 위한 선한 독재이기라도 했다.
하지만 이건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독재이다. 진짜 지들만 해쳐먹고 나머지는 다 거지 되는 진짜 악한 독재란 말이다.

차이점을 모르겠으면..?? 니들만 책임지고 고생하면 내가 이런 글 올리지도 않는다. 정상인들까지 싸잡아서 고생하게 만들지는 말라고..!!
반대편 야당 진영에서 허구헌날 이런 자살 릴레이가 터졌어 봐라.. 무슨 난리를 쳤을까..?? 이걸 생각하면 소름이 쫙 돋는다.

지난 5년? 10년? 남짓한 시간 동안 내가 지켜본 바로는..
선의 편, 정의의 편에 섰던 사람들은 딱 인상을 보면 양심에 거리낌이 없고 떳떳하고 당당하다는 게 느껴졌다.

“그저 정권이 바뀌는 바람에 애국이 하루아침에 매국으로 뒤집힌 거라면 차라리 내가 죄인이 되고 말겠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 내 명령에 따르기만 한 부하들은 아무 잘못 없으니 건드리지 마라. 나는 또 같은 상황에 처하더라도 동일하게 행동하고 처신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딱~ 이러니 가슴이 다 뭉클해지는 것 같았다.

다른 어떤 사람은 그 어떤 변명도 없이 너무 순진할 정도로 고매하고 도도하게 “나는 애초에 죄가 없다. 세월이 흐르면 결국 역사가 공정하게 평가해 줄 것이다. 어차피 살 만치 다 산 인생인데, 구차하게 항소니 탄원이니 하는 것 자체가 적들이 짜 놓은 유죄 프레임에 말려드는 추한 짓이다” 이랬다.

그러나 그러나..
악의 편에 선 놈들은 정말 오로지 남 탓, 뭐시기 때문, 누구 때문.. 왜 나만 갖고 그래... 이었다. 그저 주둥아리로 말이 많고 변명이 많았다.

아니면 자살이나 싹 해서 책임 회피하고 수사를 흐지부지 시키고 혼자 도망가곤 했다. 아니면 자살 '당하거나' 말이다.
이건 정황상 결백 호소, 억울함 호소나 자기 명예 설욕을 위한 자결이라고도 절~~대로 간주할 수 없는 죽음이었다.

각 사람들이 누군지는 차마 대놓고 얘기하지 않겠다.
올해 봄엔 대통령이 바뀔 예정이긴 한데.. 이번엔 제발 악의 무리가 아니라 정의와 선의 편에 선 사람이 지도자로 선출되었으면 좋겠다.
'멸공'이니 '우리의 주적은 북한' 같은 너무 상식적이고 당연한 소리가 논란거리 조롱거리가 되지 않는 세상이 좀 왔으면 좋겠다.

군대도 안 갔다 온 사람이 멸공을 외치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잖아!
-- 그럼 군대 갔다 온 대통령이 북괴를 옹호하는 건 말이 되고?
-- 그럼 일제 시대를 직접 겪지도 않은 사람이 반일 거리는 건 말이 되고?


멸공은 당연한 절대선이다.
멸공 갖고 전쟁 선동 지랄하는 건 절대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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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22/01/17 08:35 2022/01/1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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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시대에 일본은 한반도에서 토지 조사 같은 것만 한 게 아니다. 자기가 다스리는 조센징들이 옛날에 무슨 찬란한 문화재 유물들을 만들었는지도 아주 면밀히 조사했다.
그래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跡圖譜)라는 총 15권짜리 방대한 도감을 1915년부터 1935년까지 무려 20년에 걸쳐 편찬해 냈다.

왜, 1910년대에 돌덩이가 다 무너진 폐가 흉가 수준의 불국사와 석굴암의 모습 사진을 보신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거 출처가 이 도감이다. 일본인들이 촬영해서 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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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은 제5권, 불국사는 제4권에 수록돼 있다.)

그리고 각종 역사 만화나 교과서를 보면, 북한 지역에 있는 문화재들은 마치 시간이 정지하기라도 한 듯 흑백 사진인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역시 일제 시대에 일본이 촬영한 저 도감의 옛날 사진을 인용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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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1990년대부터야 냉전이 끝나고 남북 민간 교류가 잦아지고 정보 통신 기술도 눈부시게 발달하면서 예전에 비해서는 북한의 현지 정보도 훨씬 더 풍부하게 얻을 수 있게 됐다(현대에 컬러로 찍은 사진도 포함..). 하지만 그 전에는 개성의 선죽교 사진조차도 일제 시대에 찍힌 흑백 사진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대한민국은 말할 것도 없고 구한말 조선/대한제국의 공권력으로 이런 것들을 파악하고 기록을 남긴 게 아니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우리나라 네임드급 독립운동가들이 대대적으로 발굴되어 각종 훈장이 추서된 게 1962~63년, 원조가카의 집권 초기라면,
우리나라 네임드급 문화재들이 대대적으로 조사되고 사진이 처음으로 찍힌 건 1910년대 일제 시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저건 “식민지에 원래 이런 문화재들이 있었는데 이제 이것들도 다 우리 일본 것이 됐다. 그러니 우리가 철저히 관리해야지” 그런 정치 행정적인 차원에서 조사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걔들도 최소한 이상한 감정--심지어 조선에 대한 열등감까지!!!--을 갖고 “다 때려부숴 버려야지, 없애서 조센징들 민족 정기를 말살해 버려야지” 이러지는 않았다.

일제 시대의 초대 조선 총독인 데라우치 뭐시기 하는 그 아저씨는.. 정치 쪽은 가혹한 헌병 무단 통치 때문에 우리 쪽에서 썩 좋게 볼 수 없는 인물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정말 의외로 불상 덕후에 문화재 덕후 기질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한반도의 문화재들을 보존하고, 그게 일본 본토로 무단 반출되지 않게 하는 일에 나름 애쓰기도 했다.

일례로, 그 당시의 석굴암 복원 작업은 졸속 날림으로 진행된 게 비판의 여지가 있을지언정, 최소한 악의적인 고의 훼손은 절대 아니었다. 폭탄 맞은 듯한 폐허 상태에 비하면 그 기술과 자금 하에서 조금이라도 더 낫게 만든 거지, 악화시킨 건 아니었다는 것이다. 애초에 석굴암이 저런 막장 상태가 되도록 수백 년째 방치한 건 숭유억불의 조선 왕조였으니 말이다.

석굴암이 옛 신라인들의 넘사벽 lost technology를 동원해서 만들어졌는데 왜놈들이 어설프게 콘크리트를 쳐발라서 망가뜨리는 바람에 습도 조절이 안 되고 내부 상태가 꼬였네 뭐네 하는 소리는 2020년대에는 좀 안 나와야 할 것이다. 걔들은 문화재를 진짜로 다 때려부순 중공 문화대혁명 홍위병이나 요즘 탈레반 집단보다는 정신 세계나 행정 시스템이 더 나은 애들이었다.

심지어는 이런 일도 있었다.
조선 임금들의 초상화인 '어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 6· 25 사변 중에 소실된 것, 그리고 결정타로 부산 용두산 대화재 때 전부나 일부가 소실된 것이 대부분이다. 현재까지 원본이 제대로 보존된 게 별로 없는 지경이다.
그런데 순종을 비롯해 일부 왕의 어진은 2010년대에 그림을 다시 그려서 복원이 완료되기도 했다. 이때는 소실된 부분을 무엇을 토대로 유추해 냈을까?

바로 일제 시대에 조선총독부에서 어진을 흑백으로나마 사진을 찍어 놓은 자료가 있어서 이를 참조해서 복원했다.
일부 소실인 경우, 색깔이야 불타지 않고 남은 부분으로부터 유추가 가능하니까 흑백 사진만 있으면 전체 복원이 가능해진다.
심지어 순종의 경우, 김 은호 화백이 어진을 그리는 모습까지 촬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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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저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자료인지, 아니면 다른 별개의 촬영 기록인지 본인은 잘 모르겠다.

※ 여담: 문화재 관련 박물관

문화재 관리 얘기가 나왔으니, 이것들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 얘기도 같이 안 할 수가 없겠다.
박물관이야 워낙 분야가 다양하긴 하지만 무슨 국립 박물관이라 하면 일단은 상술했던 옛날 전근대 시절의 국보/보물 문화재를 전시해 놓은 곳을 말한다. 역사 박물관이라든가 아예 미술관하고는 영역이 약간 겹칠 수 있겠지만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일제 시대에도 한반도엔 총독부 박물관이니, 이왕가 박물관이니 하는 전시 시설이 있었다. 그러나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국립 중앙 박물관’이 그 역할을 대체하게 되었다. 서울뿐만 아니라 경주, 제주, 전주 등 10여 곳에 국립 박물관 에디션이 있긴 하지만.. ‘중앙’이라는 타이틀까지 붙은 박물관은 서울 에디션이다.

엄청 옛날에는 국립 중앙 박물관이 경복궁이나 덕수궁 같은 고궁 안에 있었다. 1980년대에는 조선총독부 청사에 입주하기도 했었으나, 훗날 그게 헐리면서 지금과 같은 용산 부지에 새로 자리를 잡게 됐다. 전에는 거기가 미군 골프장이었다고 한다.

※ 여담: 과학관

다른 관련 주제를 하나만 더 열거하자면..
이런 옛날 문화재 박물관 말고 나라에서 직접 운영하면서 여러 지역에 ‘파생 에디션’까지 존재하는 또 다른 관람 시설은.. 바로 ‘과학 박물관’, 일명 과학관이다.

얘 역시 나름 일제 시대부터 전신이 존재했었다. 조선총독부가 광화문 청사로 이전하자 남산 기슭에 자리잡은 기존 건물이 ‘은사 기념 과학관’으로 바뀌었는데, 이게 해방 후에도 이름만 ‘국립 과학 박물관’으로 바뀌어서 운영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는 와룡동, 혜화 역 근처 지금의 위치에 ‘국립 서울 과학관’이 건립되었다. 하지만 부지가 너무 좁기도 하고 나중에 대전 엑스포가 개최되기도 했으니 대전에 엄청 큰 과학관이 새로 건립되면서 얘가 ‘중앙’ 타이틀을 대체하게 됐다. 즉, 국립 중앙 박물관과 달리, 국립 중앙 과학관은 대전에 있다.

지금은 수도권의 과천을 포함해 대구, 부산 같은 몇몇 대도시에 국립 과학관이 몇 곳 더 있다. 기존의 서울 과학관은 ‘어린이’ 과학관으로 리모델링 됐으며, 이와 별개로 강북에 서울 시립 과학관이 추가로 더 개관해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21/12/19 19:35 2021/12/19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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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노 태우

이 사람은 민주화가 이뤄지고 지금 같은 6공 체제(5년 직선 단임제)가 출범한 뒤에 최초로 선출된 5년 단임제 대통령이다.
이때 야당 후보들이 단일화가 제대로 못 돼서 여전히 군인 출신 대통령이 선출됐다는 게 특이한데.. 이 시기는,

  • 무연 휘발유와 유연 휘발유의 과도기 (1987년 7월 ~ 1992년 말. 대통령 집권 기간과 거의 일치)
  • 범죄와의 전쟁
  • 분당과 일산 신도시 개발
  • 각종 교통 인프라들 건설 시작: 판교-구리 고속도로 건설(현 수도권 1순환 고속도로의 먼 전신), 서해안 고속도로, 인천 공항, 경부 고속철...!!
  • 지방자치제 시행 (개구리 소년 사건이 벌어진 때가 이거 선거일..)
  • 북괴가 의외로 인명 사상자가 발생할 정도의 유의미한 도발을 한 적이 없음

요런 게 인상적이라고 느껴진다. 제4 땅굴이 1990년 봄에 발견되긴 했지만, 이때는 군견만 죽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때는 냉전이 끝나고 소련이고 동독이고 차우세스쿠고 다 운지하던 시절이었으니.. 북괴도 몸 사렸던 건지도 모른다. 오히려 이땐 남한과 북한이 나란히 UN에 가입했다(1991).

아울러, 이 시기에 미국-이라크 걸프 전쟁이 벌어졌던 것, 그리고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독립 국가 연합'이라는 선수단이 출전했던 것이 본인의 기억에 어렴풋이 남아 있다.

7. 김 영삼: 많은 변화들

김 영삼은 우리나라 역사상 초대 할배나 마이너(윤 보선, 최 규하..)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선거를 통해 군 출신이 아닌 민간 정치인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첫 사례이다. 별명을 괜히 문민정부라고 지은 게 아니었다.

지금은 매우 믿어지지 않지만, 이때는 현직 대통령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대통령을 희화화하면서 "YS는 못 말려" 같은 유머 책까지 출간될 정도였다.
그리고 이 사람 때 나라 분위기가 실제로 굉장히 많이 바뀌었다.

  • 금융실명제 시행
  • 대전 엑스포
  • 고속도로 통행료 후불제
  • 쓰레기 종량제
  • 행정구역 개편 (직할시가 광역시로..)
  • OECD, WTO 기구 가입. 슬슬 선진국 인증?

역사· 정치와 관련해서는 이런 것도..

  • 군 내부 사조직이던 하나회를 전격 해체
  • 조선총독부 구 청사 철거
  • 전 두환과 노 태우 비자금 재판...;;;

이 사람 재임 때 있었던 북괴 관련 사건은 다음과 같다.

  • 김 일성 사망 1994. 7. 정말 최대 압권
  • 국군 포로 조 창호 중위의 귀환 1994. 10.
  • 이 철수 대위 귀순 1996. 5. 현재까지 최후의 전투기 비행 귀순자
  • 강릉 무장공비 침투 1996. 9. 현재까지 잠수함 공작원 기반의 최후 대남 도발 (알려진 것)

이것들도 벌써 30년 전에 가까운 과거가 돼 간다.
이제 흑백뿐만이 아니라 컬러도 4:3 종횡비의 VHS급 저화질 사진/영상은 희뿌연 과거의 역사 기록이 돼 간다는 게 신기하기 그지없다.;;

8. 김 영삼: 대형 참사와 흉악 범죄들

그런데 1990년대 김 영삼 시절은 다른 면으로도 정말 판타스틱하긴 했다.

  • 구포 무궁화호 열차 전복 1993. 3.
  • 아시아나 항공 733편 추락 1993. 7.
  • 서해훼리호 침몰 1993. 10. (1993년 한 해에만 육해공이 나란히..)
  • 성수대교 붕괴 1994. 10.
    (당시 대한뉴스에서는 조 중위 얘기만 다뤘고, 성수대교는 보도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차피 그 해 12월 말을 끝으로 폐지를 앞두고 있기도 했고, 사건 사고 보도는 이미 싸제 방송사들이 훨씬 더 신속하게 자세히 해 주고 있었으니까.)
  •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1995. 3.
  • 삼풍 백화점 붕괴 1995. 6.
  • 대한 항공 801편 괌 추락 1997. 8. (현재까지도 대한 항공 최후의 여객기 인명 사고!!)
  • 기업들 줄도산, **외환 위기 IMF** 1997. 12.

보다시피, 한 대통령의 재임 기간 동안 아시아나와 대한 항공에서 나란히 여객기 추락 사고가 났었다.
이것들이 당연히 당대 대통령의 잘못은 아니겠지만.. 사고가 겹치는 빈도가 이때 유난히 너무 높았다. 무슨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겉으로 보기에만 경제가 성장하고 우리도 이제 선진국이네 마네 하지만, 사회 시스템은 원칙이 없고 미개하고 부정부패 편법이 만연하다고.. 이래서는 안 된다고, 우리 제발 좀 늙어 죽어 보자고 난리가 났었다. 우리나라는 저런 사건 사고들로부터 배우고 시스템을 개선해서 옛날에 비해 그나마 많이 나아지고 청렴해지고 안전해졌다.

그리고 이땐 대형 사고 참사뿐만 아니라, 흉악 범죄도 장난이 아니었다.

  • 부친 방화 살해 금수저 패륜아 박 한상 1994. 5. (사형 미집행)
  • 택시 강간 연쇄살인범 온 보현 1994. 9. (사형 집행)
  • 지존파 1994. 10. (사형 집행)
  • 부친 살해 패륜 대학 교수 1995. 3. (무기징역)

그나마 김 영삼은 1997년 12월 30일, 자기 집권 이전부터 확정돼 있던 사형수들을 몽땅 사형 집행을 하고 물러났다. 이게 현재까지 우리나라 최후의 사형 집행이 돼 버렸다.
단지, 온 보현과 지존파는 당대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흉악해서 예외적으로 1995년 11월에 바로 집행을 해 버렸다.

9. 김 대중: 행적에 대한 괴담

이 사람은 IMF 시기를 경험한 것, 북괴의 수괴를 직접 만나고 어쨌든 노벨 평화상을 받은 것,
시기도 새 밀레니엄 전환기이고 고속 인터넷에다 휴대전화가 막 보급되던 때였던 것으로 인해, 역시 중요도와 존재감이 크다.

지금은 너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의약 분업이 2000년 이 사람 집권 때 이뤄졌다.
그리고 서울 2기 지하철 전구간 개통, 인천 국제공항 개항, 서해안 고속도로 전면 개통도 덤..

그런데.. 이 사람은 유난히 노래와 관련된 괴담이 많이 나도는 경향이 있다.
'독도는 우리땅' 노래를 금지시키고 6· 25의 노래조차 악의적으로 개사해서 원곡을 금지시켰다는데..
일단 내가 알기로 이것들은 사실이 아니다.

그때가 무슨 국가 공권력 차원에서 특정 노래를 못 부르게 하는 게 가능한 시절은 아니었다. 물타기 된 불순한 6· 25 노래가 우연히도 그때 민간 차원에서 발표된 것은 맞지만, 나라에서 그걸 채택해서 강제로 밀어붙이지는 않았었다.
단지, 남북 정상 회담뿐만 아니라 신 한일 어업협정도 그 당시엔 엄청난 논란이 많았다는 것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 제2 연평해전 당시의 불리한 교전 수칙이 이 사람 집권 때 일부러 개정된 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그 전부터 그랬다.

  • 1999년 제1 연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함장이 종북세력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정치 보복을 당했다는 썰 역시 내가 아는 바로는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박 정성 제독, 송 영무 제독. 내가 무슨 군 출신인 건 아니니 내가 잘못 아는 게 있다면 재반박 환영)

  • "북한은 핵을 개발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 만약 그런 짓을 한다면 내가 책임 진다"라는 두고 두고 까이는 엄청난 발언도.. 2001년경의 발언이라고 하는데.. 내가 아는 한은 의외로 정확한 최초 출처가 잘 나오지 않는다. 마치 6 25 개전 초기에 할배 대통령의 행적처럼 말이다.

  • 국정원의 대북 휴민트들을 적에게 몽땅 누설하고 와해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고도 하는데 이 역시 구체적인 증거는 잘 모르겠다.

주된 팩트와, 그 팩트 속에 교묘히 섞여 들어간 자잘한 과장 왜곡 주작은 잘 분별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저 세부 팩트가 그렇다고 해서 저 사람이 저런 오해가 불거지고도 남을 정도의 이상한 행적을 남기지 않았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적에게 퍼 준 거 하며, 제2 연평해전이 벌어진 날 태연히 축구 보러 일본으로 뜬 건 뭐.. 욕 먹어도 할 말 없다. 특히 그 세월호 7시간 갖고 지랄하던 그 잣대를 적용한다면 더욱 말이다.
더구나 백 보 양보해서 저 사람의 의도가 악의적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물은 결코 좋게 나오지 않았다. 뭐 그건 그렇고..

* 총평과 여담

(1)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을 제일 많이 배출한 대학은 육사...;;;이다.
그런데 2021년 현재까지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한 서울대 출신 대통령, 그리고 유일한 노벨 상 수상자라고 하면 의외로 사람이 금방 떠오르지 않는 것 같다.
유일한 박사학위 소지자라고 하면 할배, 아니면 반대로 고졸 출신이라고 하면 김 대중· 노 무현이라고 금방 떠오르는데, 저건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약하게 느껴진다.

(2) 우리나라의 대통령들은 어째 재임 순서와 사망 순서가 완전 역순이다.. 무슨 스택도 아니고..
노 무현 09. 5.
김 대중 09. 8.
김 영삼 15. 11.
노 태우 21. 10.
그 다음 전 두환 21. 11. (후배를 따라 나란히 갔구나. 그래도 전직 대통령들 중 퇴임 후에 제일 오래 길게 살았음!!)

(3) 대전 현충원 국가원수 묘역은 만들어진 지 30년이 훌쩍 넘은 현재까지도 최 규하 한 명밖에 없다.;; 그것도 역대 최단기, 제대로 재직하지도 못했던 대통령만..

Posted by 사무엘

2021/11/27 08:35 2021/11/2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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