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사회에 계층간 갈등이라는 게 없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게 과거보다 훨씬 더 조직적이고 과격한 형태로 표출된 건 아무래도 산업 혁명 이후 19세기에 공산주의라는 게 생긴 뒤부터인 것 같다. 구호부터가 “만국의 로동자여 단결하라~~ 기존 체제를 다 뒤집어엎고 브루주아들을 다 타도하고 혁명 과업 완수하자” 이랬으니 말이다.

과거에는 왕부터 시작해서 귀족, 지주/영주 같은 계급만 떵떵거리며 살았다. 나머지 대다수 평민들은 농업 같은 1차 산업에 종사하면서 비슷하게 평등하게 못 살았다. 자기 신분과 출신이 원래 그렇고, 이웃들도 처지가 대동소이하니까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낄 여지가 별로 없었다.

농사가 풍년이어도 세금이나 소작료 명목으로 소출의 대부분을 삥뜯기는 게 참 뼈아팠다. 옛날에 노동력이 부족하고 백성들의 진짜 소득을 정확하게 측정할 행정력이 없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 머릿수에만 비례해서 너무 단순무식하게 세금이 부과된다면 어떨까? 출산이 진정한 재앙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게 싫다고 인간이 법과 공권력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무법지대에 혼자 떠나서 모든 걸 자급자족 하면서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게 진정한 딜레마였다.

사실, 중앙 정부에서 법으로 정한 세금 자체는 그렇게까지 살인적인 수준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론과 이상은 그러하지만 물자를 수송하는 과정에서 날리고 잃는 걸 감안해서 여분으로 더 걷는 것, 그리고 세리 같은 중간 관리들이 횡령· 착복하는 게 장난이 아니니 최하위 납세자들의 고통이 극심해졌다. 하청에 하청을 거치면서 실제 작업자에게 지급되는 보수가 급격히 쪼그라드는 것과 완전히 같은 이치이다.

물론 세금 착취가 너무 심해서 도저히 못 버틸 지경이 되면 죽창 들고 민란이 발생하고 '의적'이라는 게 나타나기도 했다. 로빈 후드, 임 꺽정, 홍 길동, 윌리엄 텔.. 이런 거 말이다.
그래도 이건 국가 체제 전복을 의도하는 건 아니었으며 그럴 재량도 없었다. 단순히 탐관오리를 벌하는 것까지가 끝이었다.

그랬는데.. 산업 혁명 물류 혁명이 일어난 뒤부터는 상황이 약간 달라졌다.
기계와 인간의 생산성 격차가 아득히 벌어졌고, 또 브루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격차도 정말 아득히 벌어졌다. 이거 덕분에 2차와 3차 산업이라는 것도 본격적으로 생겨나고 농산물과 공산품이 싸게 많이 보급되면서 인간의 ‘평균적인’ 삶은 크게 올라가긴 했지만.. 이건 다른 방면에서 큰 부작용도 야기했다.

산업화 초기에 영국 같은 나라에서 공장 근로자들의 근무 환경과 조건이 얼마나 열악하고 복지가 참혹했는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흑인 노예도 아니고 나름 자국민이었는데도 말이다.
시골에서 농업 대부분에 가내수공업 약간이나 하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공장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단순노동자로 처지가 바뀌었는데.. 삶의 질이 크게 좋아질 리가 없었다.

뭐 영국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도 산업화 초기엔 그랬다.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빈부격차는.. 과거의 통상적인 왕족 귀족과 평민 사이의 빈부격차와는 성격이 좀 다른 부류였다.
그리고 이런 초창기의 경제 시스템은 그야말로 '신자유주의' 시장 만능 방임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극치였다. 오늘날과 같은 인권 관념이라든가 취약 계층 복지 같은 건 없었다. 돌아가는 방식이 얼마나 살벌했겠는지 더 말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쪼기 서양은 문화 배경이 배경이다 보니, 돈 많은 상류층들 중에도 교회 댕기는 신자가 대다수 주류였다. 그러나 이때 유럽의 기독교회들은 뭐 해외로 선교를 하기도 했지만 제국주의의 첨병 역할도 많이 했다. 그리고 자국 사회에서 하나님 사랑 다음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제대로 충실하지 못했다. 보다못해 영국에서 자선 냄비 이러면서 "구세군"이라는 교파가 괜히 생긴 게 아니었다.

그래서 19세기 중후반과 20세기 초 사이의 문학 작품들을 보면 이런 인간성 상실 동심파괴 시대상이 적지 않게 반영돼 있다.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 작가는 기억이 안 난다만 <플랜더스의 개> 말이다.
스크루지 꼰대가 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롤>은 뭔가 옹고집전의 외국판 같기도 하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명작 소설도 이런 시국에서 교회가 사회에서 빛과 소금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반성에서 만들어졌다. 저 때 자기 생일과 크리스마스를 극혐한 빈곤층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러니 결국은 참다못해 마음 독하게 먹고 악한 쪽으로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탐욕스러운 자본가 부자는 한없이 자기 배만 불리면서 더 부자가 되고, 로동자들은 평생 뼈빠지게 일해도 가난을 절대로 탈출하지 못하면서 부자들의 노예로 대대로 비참하게 살다 갈 거라고 말이다.

이런 현실은 로동자들끼리 단결해서 악에는 악으로 대응하고 싸우고 투쟁해야 바꿀 수 있댄다. 그래서 노조에 파업, 사보타주, 붉은 머리띠, 꽹과리 등 살벌한 구호와 방법론이 등장했다. 그러면서 “자본가들을 타도해서 부를 다같이 강제 분배하자, 사람이 먼저이고 로동자가 주인인 세상을 만들자, 능력만큼 벌고 필요한 만큼 쓰는 체제를 만들자” 같은 구호를 외쳤다.

공산주의 사상에 입각해서 저런 걸 부추기고 추진하는 정치 단체를 흔히 '공산당'이라고 한다.
인간 사회의 근본 모순과 고뇌에 대해서는 기원전 500년에 가까운 옛날에 기록된 성경의 전도서에도 나와 있고, 비슷한 시기에 불교의 창시자인 싯다르타도 똑같이 고민했었다. 싯다르타는 번뇌를 떨치고 혼자 열심히 수련해서 해탈이라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던 반면, 공산주의자는 계급 투쟁과 혁명을 통해 좀 더 현실적인(?) 돌파구를 뚫은 듯하다.

마르크스인지 레닌인지 이런 아저씨들이 이 바닥으로 열심히 연구해서 이론적 근간(?)을 마련했다. 19세기 중후반에 이미 인터내셔널가라는 노래가 만들어지고 공산당 선언이라는 것도 만들어졌다.
현실 역사에서야 공산 혁명이 성공한 구소련과 그 주변 중국과 동유럽이 공산 진영으로 여겨지지만, 더 과거인 1871년엔 프랑스에서도 단 70일 남짓이지만 공산 혁명 정부가 집권한 적이 있었다. 프랑스가 뭔가 혁명, 저항 이런 쪽으로 영국· 독일보다 더 쎈 정서가 있기 때문에 그렇지 싶다.;;

이 사람들은 모든 게 과격했다. 자본가 프롤레타리아들이 고수하던 삶의 방식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적폐로 몰아 척결하고 뜯어고치고 지워 버리려 했다.
종교색은 말할 것도 없고.. (종교는 인민의 아편!!) 심지어 1주일의 길이도 7일은 종교색이 느껴진다면서 바꿔 버렸다. 파리 코뮌은 10진법을 존중해서 한 주의 길이를 아예 10일로 바꿨고, 나중에 소련은 약수가 더 많은 8일로 바꾸려 했던 걸로 기억한다. =_=;; 이런 반골 기질이 있으니 나중에 중공은 그 보수적인 정서법을 다 뜯어고치고 간체자와 한어병음을 과감히 도입했다.

일본은 나라가 잘 살고 철저하게 자유 진영을 롤모델로 삼으면서 서구화 근대화를 잘 해서 그런지, 대놓고 공산화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은 반사회 혁명분자야 당연히 있었고, 그건 심지어 한반도니 만주니 하는 식민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최 서해의 단편 소설 <탈출기>(1925)가 딱 그런 분위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런 공산주의 진영은 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거의 반세기 가까이 리즈 시절을 찍었다.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이라는 악역이 패망해서 고꾸라졌고, 소련은 엄연히 전승국으로 예우받으며 국제 위상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이 영향으로 인해 우리나라는 해방 직후에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헝가리· 불가리아· 체코 같은 소련 주변의 동유럽 국가들도 많이 공산화됐다.

그리고 소련의 반대편에서는 어쩌다 보니 미국.. 20세기에 서유럽을 제치고 승전국에다 세계 최강국으로 등극한 이 나라가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 시장 자본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하게 됐다. 2차 대전 추축국을 상대로는 총 쏘고 포 쏘면서 대놓고 싸웠는데, 공산 진영과는 대놓고 싸우지는 않는 대신 고삐 풀린 듯이 군비 경쟁 우주 개발 전쟁만 했다. 역사학자들은 이를 두고 '냉전'이라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 붙였다.

아프리카라든가, 오세아니아, 남아메리카 같은 남반구 지역은 너무 멀어서 그런지 공산주의와의 직접적인 접점은 없는 것 같다. 이런 곳을 제3세계라고 부르나??
하지만 쿠바가 무슨 계기가 있는지 골수 반미 국가였고(카스트로??), 그 아래 중남미도 몇몇 친미 노선 국가를 제외하면 '체 게바라'가 어떻고 해방신학에 종속 이론이 어떻고 하는 게 반미는 물론이고 공산혁명 냄새가 좀 난다. 그쪽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그렇게 느껴진다.

아 물론 미국이 다 잘했다는 말은 아니다. 걔들도 분명 자기 국익대로 몰래 비열한 짓 삽질 X신짓을 한 게 있긴 할 것이다. 그러나 남아메리카가 그 넓은 땅에 그 많은 농산물에 풍부한 자원이라는 잠재성 대비 그다지 잘살지 못하는 건.. 모든 걸 미국 탓만으로 돌릴 수는 없어 보인다. 뭔가 통치 체제나 이념, 개인의 가치관 세계관에 문제가 있긴 했다.

체 게바라는 골수 반미 반자본주의 혁명가였다. 하지만 그는 사후에 자본주의자들에 의해 공산주의 슈퍼스타처럼 이미지가 조작됐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엄청난 고인드립이 아닐 수 없다. =_=;; 마치 니콜라 테슬라가 아주 뛰어난 과학자 공학자였지만 훗날 음모론 오컬트계의 교주뻘 인물로 이미지가 조작된 것처럼 말이다.;;
저 장사꾼들은 돈만 된다면 정말 뭐든지 만들어 팔긴 하는가 보다. 하긴, 반미 시위 때 불태우는 용도의 성조기 내지, 성조기가 그려진 속옷· 걸레조차 다 미국에서 만들어서 판다고 하지 않는가? =_=;

우리나라, 남한, 대한민국이야 처음부터 할배의 영도력 덕분에 골수 미국 편에 붙어서 자유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 자본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삼았다. 그 반면, 우리나라를 대적하고 무너뜨리려 한 저 악의 무리들이 처음에 소련 편 공산주의를 밀었으니..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서 뼛속까지 반공을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미국이나 일본에서 과격 좌익 시위를 단속하는 정도하고는 레벨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상이다. 세계사나 인문학 따위 알못인 본인이 그냥 주워 들은 기억만 주섬주섬 늘어놓아 보았다. =_=;;
글쎄, 계급 갈등 투쟁 덕분에 진짜 적폐를 청산하고, 근로자의 인권과 복지가 크게 향상된 긍정적인 결과물도 없지는 않았다. 그 이념이 '수정 자본주의'에 많이 반영되어 들어갔다. 이게 양심적인 업주나 기독교회를 통해서 이뤄진 게 아니라 투쟁을 통해 이뤄졌다는 건 그쪽 편에 선 사람들이 반성해야 할 일이다. 성경에는 “종들은 주인에게 복종하라”뿐만 아니라 야고보서에 “착취되고 빼돌려진 근로자 인건비가 울부짖는다, 부자들에게 화 있을지어다”도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기능은 약간 조금이 끝이었다. 이 혁명가 운동꾼들은 오로지 광기와 선동만 있을 뿐, 이성이 없었다. 본질적으로 그저 음해하고 까내리고 부수고 죽이고 파괴할 줄만 알지, 어려운 걸 만들고 창조하고 설계하는 건 몰랐다.
걸핏하면 자기들끼리도 비판하고 '총괄'하고 '타도'하고.. 어제의 동지도 바로 스파이로 몰아서 고발하고 죽여 버리고..;; 총체적인 무질서와 팀킬에 빠졌다. 한 구악을 청산했다고는 하지만 그에 대한 대안은 내놓지 못하고 똑같은 짓을 하거나, 예전만도 못한 더 큰 신악을 만들어낼 뿐이었다.

저런 사고방식의 열매가 바로 소련의 대숙청, 중공 문화대혁명 홍위병과 대약진운동, 캄보디아 킬링필드 같은 것들이다.
쟤들은 옛날 문화재도 엄청 많이 때려부수고 박살내 버렸다. 중국의 경우, 오히려 장 제스가 타이완으로 도망가면서 싹싹 긁어간 문화재들이 문혁의 피바람을 피해서 살아남았을 정도이다. 인류가 20세기의 이런 참극으로부터 뭔가 교훈을 얻고, 다시는 저런 짓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나라도 운동권 내부에서 추잡한 성추행이라든가 프락치 오인 린치 같은 사건이 당연히 있었다. 보고 배우고 하는 짓이 저런 것밖에 없는 애들이 도덕적으로 자신들의 타도 대상보다 우월할 리는 절대 만무했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건 내로남불 위선이다. 남에게는 땀흘려 일해야 노동의 가치를 안다느니 헛소리를 지껄였지만, 공산당 고위 간부들은 절~~대로 자기 부를 남에게 분배하면서 자기 이념을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인은 '공산주의 사상'과 '공산주의자의 수법'을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소신을 오래 전부터 갖고 있다.
가령,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것처럼 초대 교회 때 교인들이 모든 재산을 공유했던 것은 결과만 보자면 공산주의대로 행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체제 전복 선동을 한 건 아니었다.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공산주의자들이 동원하는 수법은 초대 교회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민망할 정도로 온통 비인간적이고 비열하고 추악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공산주의자들이 빨갱이 소리를 들어 온 주 이유이다.

물론, 공산주의자들만 그런 수법을 사용하는 건 아니다. 군국주의 1당 독재, 통치자 우상화, 전체주의, 닥치고 숙청 같은 건 공산주의와 무관했던 구 일본 제국이나 나치 독일도 동원했었다. 프랑스 혁명 공포 정치도 통치자 1인 우상화만 없을 뿐, 조금 저런 분위기였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저런 군국주의 전체주의는 없어지고 최소한 주류에서는 완전히 밀려났으니 이제 저런 공산혁명 어쩌구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저런 짓을 하지 않고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일련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1990년대 이후엔 북괴를 제외한 거의 모든 공산권 국가들이 무너지거나 최소한 경제만은 개방했다. 세계는 다시는 저런 미친 혁명 실험을 하지 않고, 그냥 지금 같은 시장 경제에다가 세금으로 복지 보정만 하는 체제로 다들 수렴진화하고 있다.
하지만 경제를 개방했고 민주주의를 흉내만 낼 뿐, 중국과 러시아 같은 나라는 한국· 일본이나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 국가가 절대 아니라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도.. 저런 숨막히는 나라보다는 상황이 낫지만 20세기까지만 해도 과거의 상명하복 똥군기 문화의 여파로 인해 사회 분위기가 여전히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게 많았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미국은 단순히 크고 땅 넓고 자원만 많은 나라가 아니라, 세계에 정교분리, 삼권분립, 자유 민주주의와 현대적인 인권 이념을 퍼뜨린 정말 위대한 나라인 것 같다. 캐나다나 호주 같은 평범한 영연방 국가로 그치지 않고, 덕분에 인구도 그런 나라보다 훨~씬 더 많아져 있다.

아무쪼록 시민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 희생된 사람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고, 경제나 정치 쪽은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감각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산업혁명 초기에야 진짜로 근로자들의 처지가 너무 가혹했지만, 지금은 진짜 내로남불 귀족 노조를 더 비판해야 할 때가 아니겠는가?
부와 세금에는 똑같이 낙수효과가 있다는 걸 인지하고, 멀쩡한 역할 분담을 쓸데없는 계급 갈등으로 비화하는 이간질과 반기업 프레임 따위에 속지 말고.. 옛날에 실패가 진작에 입증된 실험을 또 하겠다고 덤비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오징어 게임 '혁명적인 개X끼'가 얼마나 끔찍한 욕설인지가  얼추 이해가 될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4/02/09 08:35 2024/02/0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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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1. 기원전 500년대 부근

유대인 바빌론 포로기 때 갑자기 불교와 유교가 생겼고, 중국 대륙에서는 제자백가 어쩌구 하면서 사상계가 리즈 시절을 찍었다.
이건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트렌드였으며, 뭔가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우연히 발생한 일이 아니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여담이지만, 지구 연대기에서 다뤄지는 선캄브리아 시대랑, 우리나라 고조선 시대가 뭔가 좀 비슷하게 느껴진다. ㅋㅋㅋ

2. 고대의 여성 군주

어째 서기 600년대에..

  • 당나라 측천무후(690-705).. 물론 황제로 정식 등극하기 전, 황태후 시절에도 사실상 여왕 포스였음
  • 신라 선덕여왕(632-647), 진덕여왕(647-654)
  • 일본 천황 스이코, 고교쿠(642-645), 사이메이(655-661), 지토(690-697)

한중일 모두 군주 내지 통치자에 여풍이 강하게 불었던 것 같다!!! 신기하지 않냐? 더구나 한중일 중에서 일본의 여성 천황이 최초이고 원조였다고 한다. 일본은 에도 시대에 예외적으로 잠깐 배출된 예외 2명을 말고는, 여성 천황이 600~700년대에 집중적으로 배출됐었다!
우리나라는 전 역사를 통틀어 여왕은 신라 시대에 3명만 나왔고, 800년대 말의 진성여왕이 마지막이다.

측천무후는 자기 아들도 죽였고, 남편의 첩인가 다른 여자도 정치적 라이벌이라고 사지를 짤라서 항아리.. 아, 그냥 항아리도 아니지. 술독에다 담아서 죽였었다.;;; 라이벌들한테는 악마 그 자체였지만 백성들 통치는 그리 나쁘지 않게 했댄다.
그리고는 죽을 때 다 돼서는 인생무상을 느꼈는지 자기를 황제라고 부르지 말고 황태후라고만 부르고, 묘비에 글 남기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특이한 여자다.;;

여왕이라 하니 성경에서 솔로몬을 알현했다는 스바의 여왕이 생각난다. 마치 제사장 멜기세덱만큼이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인물인 것 같은데.. 이게 웬걸, 예수님이 저 사람을 실존 인물로 언급하면서 "심판의 날 때 스바의 여왕이 너희를 책망할 것이다"라고 인증을 하셨다. 이는 그녀가 가공의 허구 인물이 절대 아님을 시사한다.

3. 전간기와 2차 세계대전

1933년부터 1945년은 일제의 폭주 흑화와 중일 전쟁,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집권기, 나치 독일의 집권기와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참 암울하던 시기였네.. 일본에 2· 26 쿠데타가 있었다면 독일에는 수정의 밤, 장검의 밤 같은 사건이 있었다.
미국은 경제 대공황을 뉴딜 같은 자체적인 공공 근로 일자리 창출을 통해서 그럭저럭 건전하게 극복했다. 그러나 추축국 전범국들은 이 시국을 남의 나라 침략을 통해 해결하려 했다. 그러면서 세계를 지옥의 불구덩이 나락으로 빠뜨렸다.

그 뒤 2차 세계 대전은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는 걸로 시작됐다. 여기에 영국과 프랑스가 얽히고 소련이 얽히고 일본과 미국 태평양 전선까지 얽히면서 캐 난장판이 돼 버린 거다. 폭탄만 유폭하는 게 아니라 전쟁 양상 자체도 확전으로 치닫기 쉽다.

이런 전훈 때문에 훗날 우리나라 6· 25 때도 트루먼 대통령은 너무 호전적인 장성들을 찍어누르면서 전쟁이 세계 대전급으로 번지는 걸 막으려 했다.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도 세계 각국이 확전 우려 때문에 우크라이나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못하고 있다.

일본 항복이 1945년 9월 2일이었으니.. 2차 세계 대전은 진짜 딱 6년 걸렸다. 8월 15일 이후에도 일부 전선에서는 짜끄레기 전투가 있었는데, 이때 전사한 군인은 정~~~말 운 없고 안타까운 사람이긴 하다. >_<
단, 2차 대전의 실질적인 시작에 대해서는 태평양 전쟁과 독소 전쟁까지 시작된 1941년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 더 이전 1937년 중일 전쟁까지 포함시키는 견해도 있다.

4. 전쟁의 종결과 지도자의 사망

  • 임진왜란의 말기엔 침략자이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
  • 2차 세계 대전의 말기엔 연합국 지도자인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죽었다.
  • 6· 25 전쟁의 말기엔 침략 전쟁을 승인하고 지원해 준 쏘련 스탈린이 죽었다.

5. 20세기 후반에 한중일의 정치 행태

  • 우리나라는 1960년대부터 1987년까지 25년이 넘게 군사 정권을 경험했다.
  • 대만은 1949년부터 1987년까지 무려 38년 동안 계엄 상태였다.
  • 일본은 1955년부터 1993년까지 자민당이 38년 동안 독주했다. 우리나라 입장에서도 1955년은 원조 쌍팔년도(단기 4288)라고 불리면서 뭔가 의미가 부여되어 있으니 흥미롭다.

※ 우리나라 -- 20세기

6. 20년 텀

20세기에 기가 막히게 정확하게 적중한 “20년 텀 예상/예언”이 둘 정도 있다.

(1) 먼저, “이 베르사유 조약은 영원한 평화는 개뿔이고 기껏해야 20년 정도의 시간밖에 못 벌어 줄 것이다” (by 페르디낭 포슈)
양 세계 대전 사이의 전간기는 정말로 20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1918~1938) 저 사람은 예언이 성취되는 걸 못 보고 1929년에 죽었다.

(2) 그리고 우리나라의 원자력 개발이다.
'워커 리 시슬러'(1897-1994) 박사는 1956년, 한국을 찾아와서 할배에게 "우라늄 1g이 석탄 3톤을 태운 것과 맞먹는 열량을 낼 수 있다. 이 자원 없는 나라에서 에너지 걱정 없이 사는 길은 원자력 육성뿐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지금부터라도 차근차근 인재를 육성하면 된다. 지금 시작하면 한 20년 뒤에는 결실을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예측했는데... 그 말이 진짜 씨가 되었다.

이 말을 들은 리 승만 할배는 서울대와 인하대에 원자력공학과를 신설하고, 없는 나라 살림으로도 국비 유학생을 보내서 원자력 전문가를 양성했다.
1959년 7월 14일에는 지금의 서울 과학기술대, 그 당시엔 행정구역상 경기도 양주이고 서울대 공대가 있던 자리에 한국식 원자로의 건설을 시작했다.
(거의 두 주 뒤인 7월 27일엔 인천-안산 앞바다에서 3단 로켓 발사 시험까지 한 건 덤.. 1959년 7월은 우리나라 과학기술사에서 기념비적인 시기였다)

이런 투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로부터 거의 20년 뒤인 1978년에 부산 고리 원자력 발전소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건설에 거의 6년이 걸렸으니 박통의 제8대 유신 임기 내내 건설된 거다.
경부 고속도로나 포철과 달리, 원자력 발전은 전임 대통령의 인재 육성 없이는 이뤄질 수 없었다. 아무튼 이것도 전간기만큼이나 기막힌 20년이었다는 거다.

7. 1982년의 반일 트렌드

이때 일본에서 고등학교의 역사 교과서에서 동아시아 근현대사 설명을 자기들에게 유리한 형태로 잔뜩 변개를 했는가 보다. 침략을 진출이라고 바꾸고 자기들이 한국과 중국을 근대화시켰다고 쓰기라도 했는지?
아무튼 이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난리가 났고, 오죽했으면 다음과 같은 일이 비슷한 시기에 한꺼번에 벌어졌다~!

  • 독립기념관 건립 시작
  • 조선어 학회 사건의 당사자였던 박 영희 여사가 커밍아웃하여 일본를 공개 규탄
  • 독도는 우리땅 노래 발표

물론, 82년에는 반일이었고, 이듬해 83년에는 아웅 산 테러와 007 피격 사건 때문에 반공으로 트렌드가 금세 바뀌었다. -_-;;

8. 1994~1996년 사이에

  • 1995년 1월부로 방위병 제도가 폐지되고, 대한뉴스가 없어졌다.
  • 그리고 이때부터 지금 당연시되고 있는 쓰레기 종량제가 시행되어서 유료 쓰레기 봉투라는 게 보편화됐다.
  • 행정구역이 개편되어 직할시가 광역시로 바뀌었고.. 서울에 광진구, 금천구, 강북구가 신설되었다.
  • 1996년부로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었고..
  • 우리나라는 WTO(세계 무역 기구, 1995)와 OECD(1996)에 가입했다.

9. 1999~2000년 세기말에 잠깐 불었던 이집트 트렌드

  • 만화영화 이집트의 왕자
  • 게임 툼 레이더 4
  • 영화 미이라 시리즈
  • 이 정현 3집 '너'

이건 우리나라에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니지만.. 신기하지 않은가? 옛날 추억 돋는다. ^^

※ 우리나라 -- 21세기

10. 2002년의 IT 업계

2002년은 월드컵과 제2 연평해전뿐만 아니라, 국내 컴퓨터 업계에서 이런 흑역사가 만들어졌다.

  • 이스트소프트에서 alz 포맷 도입 (정확히는 01년 말)
  • '다음'에서 온라인 우표(4월) 도입. 엄청난 반발과 부작용 끝에 3년쯤 뒤에 폐지
  • 프리챌 유료화 선언(11월).

하지만 결과는 다들 아시다시피.. 프리챌은 유료화를 잘못 밀어붙였다가 완전히 망했다.
한때 우리나라 압축 유틸을 선점했던 이스트소프트의 알집은 주도권을 반디소프트 반디집에게 완전히 빼앗겼다.
슬그머니 유료화해 놓고는 기업· 관공서를 상대로 불법복제 고소질=_=, 거기에다 알집과 알FTP는 한때 사용자의 데이터를 날려먹는 치명적인 안정성 버그까지 있어서 컴터 매니아들로부터 호감을 완전히 잃었다. 뭐, 이것도 다 10수 년 전 과거의 일이지만 말이다.
이스트는 이제 알툴즈 브랜드를 버리고, 온라인 게임이나 AI로 먹고 살려고 노력 중이다.

다음도 온라인 우표 때문 '만'은 아니지만 검색, 카페, 블로그까지 차례차례 경쟁사 네이버에게 점유율을 빼앗기고 현재는 2류 포털 정도의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다.
그 반면, 네이버는 저 2002년 10월경에 지식인이라는 걸 최초로 도입하면서 도약· 약진을 시작했다. 자연어 검색의 패러다임을 바꿔 놓은 저 서비스가 벌써 20+n주년이라는 게 믿어지는가?

저건 서포카 출신의 컴공 병특 엔지니어들을 갈아넣으면서 개발한 거라고 전해진다. 그 전엔 자연어 검색은 엠파스가 강자였었는데.. ㅎㅎ
다만, 네이버도 세계구 급의 영원한 강자는 절대 아닌지라, 구글과의 검색 결과 격차는 이미 너무 벌어진 듯하다. ㅠㅠㅠㅠ "아래아한글 vs 마소 워드"이던 게 지금은 "네이버 vs 구글"처럼 돼 간다.

11. 나머지 2000년대 국내 전반

2003년은 국내 과학기술인의 부고 소식이 내 기억에 남아 있다.
카이스트 풍동 실험실 폭발 사고, 그리고 그 해 말, 남극에서 전 재규 대원의 조난과 순직.

2005년에는 박 정희 대통령과 관련된 이념 논쟁이 갑자기 좀 불거졌다.
민문연에서 펴낸 "만화 박 정희", 시스템클럽 지 만원· 진 중권 토론,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2002~05년은 뭔가 우리나라 영화의 중흥기였던 것 같다. 본인의 대학 시절과도 일치하는데, "태극기 휘날리며", "지구를 지켜라"(!!!!), "살인의 추억" 등, 명작 영화가 유난히 많았다.
내가 생각하는 우리나라 영화 중흥기는 1966년 부근과 저 2004년 부근이다.

2004~08년 사이에 우리나라에서는 주40시간 근무, 일명 주5일제가 시행되고 정착했다. 그 전 44시간 시절에는 격주로 일토· 놀토 이러는 과도기도 있었던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대학 졸업 후에 직장 생활을 시작한 시기와 딱 일치한다.

2007년에는 "국기에 대한 맹세"가 개정됐다. 악명 높던(?)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이 '그냥 충성'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5000원부터 시작해 신권 지폐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2009~2010년 무렵엔 우리나라의 보행자 통행 방향이 우측통행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자전거의 핸들 브레이크도 오른손이 앞바퀴, 왼손이 뒷바퀴에 대응하다가 이때부터 반대로.. 오른손이 뒷바퀴로 바뀌었다.

2010~2011년엔 국군 전투복이 지금 형태로 싹 바뀌었다.
그리고 2010대 동안은 IE6 퇴출, 주민등록번호 수집 폐지, 플래시 퇴출, 도로명 주소 시행, 대체공휴일 도입 같은 일이 있었다. 2020년대에 와서는 IE 자체가 퇴출됐고 말이다. =_=;;

Posted by 사무엘

2023/12/25 08:35 2023/12/2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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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흑백 사진, 흑백 화면만이 더 옛날의 모습인 줄 알았는데.. 세월이 흐르니 이제는 컬러여도 4:3 종횡비에 저화질, JPG 깍두기 artifact, 아날로그 노이즈가 가득한 영상은 까마득한 옛날 역사의 흔적이 돼 간다. 오늘날의 초고화질 와이드 동영상에 비하면 저런 영상들이 너무나 초라하기 그지없게 보인다.

차라리 순 아날로그 영화 필름이면 재질 차원에서 리마스터링이라도 할 수 있지만, TV 신호나 VHS 신호는 정보가 저게 전부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 없는 주사선 수를 무슨 수로 더 늘리겠는가? AI를 동원해서 소실된 정보를 인위로 창작해서 재구성하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아무튼.. 우리로서는 2002년 월드컵조차 유튜브가 없던 시절, TV가 아직 아날로그이던 시절, 20년도 더 전의 아련한 과거가 되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시기이던 6월 29일 아침 10시 25분, 황해 연평도 부근에서는 남북 해군 간에 군인들이 피흘리고 배가 부서지는 전투가 벌어졌다. 그 당시 명칭으로는 서해교전, 현재 정정된 공식 명칭으로는 제2 연평해전이다.

1987년 6월 29일엔 민주화 선언이 있었고, 1995년 6월 29일엔 삼풍 백화점이 붕괴됐다. 그리고 2002년 6월 29일엔 저 사건이..;; 간격도 비슷하고 참 절묘하다.
제2 연평해전 때 보였던 북괴의 공격 패턴은 이랬다.

1.
모두들 잘 알다시피 우리 쪽에서 상대방을 정말 선의적으로 보고 배 옆구리까지 노출하면서 저지(차단) 기동을 했는데, 저놈들은 그때 비열하게 허를 찌르고 선빵을 날렸다.
이 일을 겪은 뒤에야 우리 측의 교전수칙이 개정되어 차단 기동이 삭제됐다.

이런 번거로운 기동 자체가 무슨 그 당시 대통령 때 처음으로 도입된 건 아니다. 하지만 1999년에 "NLL을 지키되, 우리 쪽에서 절대 먼저 공격하지 마라(강조), 나머지는 (그 번거로운) 교전수칙대로 해라" 이걸 골자로 하는 대통령 발 지시가 내려오기는 했었다.

2.
전투가 시작되자, 놈들은 기회가 되자마자 적장부터 바로 사살했다.
참수리 고속정 357의 정장이었던 윤 영하 소령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무슨 이 순신이나 넬슨 제독처럼 전투가 다 끝난 타이밍에 전사한 게 아니었다. 전투 초반에 몇 분 못 가 "저격"을 당해서 전사했다.

그는 처음엔 포탄 파편에 맞아서 다쳤고, 이때는 다시 일어나서 지휘를 계속했다. 허나, 함교가 부서지면서 자기 모습이 외부로 노출되었고, 이 때문에 조준 사격을 받고 완전히 숨이 끊어졌다. 단순히 눈 먼 총알이나 파편에 맞은 게 아니었다.
정장이 전사했기 때문에 교전 중에 실질적인 지휘는 부정장인 이 희완 중위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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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먼 총탄들 때문에 만신창이가 돼서 한참 나중에 병원에서 사망한 사람은 의무병인 박 동혁 병장이었다. 의무병은 여느 전투원들처럼 엄폐물 뒤에 숨어서 발포만 하는 게 아니라, 부상병을 나르러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했기 때문이다. 전투 중에 헤드샷 맞아 즉사했건, 나중에 부상 후유증 때문에 사망했건, 이것도 평범한 사고사나 순직 정도가 아니라 당연히 전사이다.

(참고로 1996년 강릉 무장공비 때도 무려 육군 대령이 공비에게 저격을 당해 전사한 적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는 전투복의 계급장도 멀리서도 잘 보이는 선명한 색이 아니라 눈에 잘 안 띄는 검정 계열로 바뀌었다.
물론 공비 입장에서는 아무 보급도 없이 적진에서 총알을 최대한 아끼면서 최대한 중요한 인물부터 제거하는 게 마땅했을 것이다.)

3.
우리 357 고속정이 이렇게 기습 공격을 당하자, 근처의 358이 허겁지겁 달려와서 북괴 684를 향해 사정없이 불벼락을 내렸다.
그러나 놈들은 배가 너덜너덜 박살나고 수십 명의 승조원들이 죽거나 다치는 와중에도 358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진짜 끝까지 집요하게 357만 때리다가 자기 배가 다 박살난 걸레짝이 된 뒤에야 간신히 예인을 받으며 퇴각했다.

이런 집념 때문인지, 우리 357 고속정은 손상과 누수가 너무 심해서 예인 도중에 결국 침몰해 버렸고, 나중에 다시 인양됐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 위의 1~3을 한 줄로 요약하면??
북괴놈들은 자기들이 피지컬이 딸리는 걸 알기 때문에 최~~대한 빠르게 효율적으로 치고 빠진다. 기습하고, 기회가 생기자마자 바로 적장의 목을 날리고, 한 놈만 집중적으로. 모든 공격을 최고의 가성비를 뽑을 수 있게.. 모든 타격을 철저히 계획적으로 한다는 거다. 제1 연평해전에 대한 보복으로 제2를, 제2에 대한 보복으로 천안함을.. 이런 식으로 우연이란 없다. 아랫것들의 돌발 일탈 따위는 더욱 없다! 알겠는가?

제2 연평해전 이후로 북괴는 잠수함 어뢰나 지뢰, 아니면 아예 미사일로 신경 거슬리고 있지, 저렇게 가까이 대면해서 총포 쏘는 방식으로 도발하지는 않고 있다.
저런 전투를 겪었기 때문에 북괴는 이런 식으로 바다에서 배로 찝쩍대서는 자기들이 더 크게 다친다는 걸 알게 됐고, 더는 그런 짓을 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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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수리 357의 영웅 같은 분들이 없었으면..?? 북괴는 계속 NLL 넘어 오고, 그 부근에서 조업하는 울나라 어선들을 수시로 나포하고 바다의 일진 양아치 짓을 계속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김씨 대통령 시절에만 해도 울나라 어선이 일본에 나포되기도 했던 거 같은데 요즘은 그런 소식은 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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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연평해전"은 너무 엄근진한 소재를 다루는 것 대비 영화로서의 연출력 완성도는 떨어진다는 평이 있었다. 클리셰가 너무 뻔하고 진부한 채 애국심만 억지로 주입한다고 말이다.
허나, 딴 얘기는 접고.. 다 끝나서 결말부에, 살짝 하얗게 밝아진 배경으로 "그때 교전이 없었고 357 승조원들이 평소처럼 임무 마치고 복귀했다면 그 날 밤은?"을 상상한 장면은.. 정말 울컥스러웠다.

평소에 주인공을 괴롭히고 가혹행위 비스무리한 것도 저지르던 고참도, 평소에 아주 엄격하고 깐깐하게 굴던 함장도.. 다같이 TV로 축구 경기 보면서 얼싸안고 응원하는 거.. 영화로서 굉장히 적절한 연출이자 마무리였던 것 같다.
실제로 우리나라와 터키의 무려 4강전 경기가 당일 저녁에 치러졌기 때문이다~! 이때는 양국의 선수 모두 제2 연평해전 전사자를 추모하는 묵념을 잠시 한 뒤에 경기가 시작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016년부터 3월 넷째 금요일을 '서해 수호의 날'이라고 제정해서 기념하고 있다. 날짜는 천안함 피격에서 유래되었다. 제1, 제2 연평해전에 이어 이 사건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제2 연평해전 때 부상만 입고 살아남았다가 천안함 때 전사한 분도 있으니 말이다. (박 경수 상사~!!! 1981-2010)

북괴가 황해에서 얼마나 많이 찝적댔으면 이런 기념일까지 따로 제정될 정도였겠나?
10여 년 전 박 근혜 시절엔 국군의 날 기념식이 정말 웅장하고 좋았는데, 올해는 서해 수호의 날 기념식이 완전 마음에 들었다. 대통령이 제2연평해전, 천안함, 연평도 포격 때 전사한 분들의 이름을 직접 다 불렀고, "댓가를 치르게 해 주겠다, 북괴가 도발하는 한 1원도 원조해 주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언급을 했으니 완전 사이다 아닌가? 이건 진정 대통령 잘 뽑은 덕분이다.

우리나라 국군은 엄연한 정규군임에도 불구하고 북괴의 도발에는 거의 일본 자위대 수준으로 왕창 소극적인 최소한의 대응밖에 못 하고 있다. 선빵은 상상도 할 수 없고 언제나 우리가 먼저 맞은 뒤에 대응하며, 찍소리 못 하게 만들 보복도 못 한다. 여기에는 확전 예방이라든가 미국 눈치 같은 여러 정치적으로 불가피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도 핸디캡을 감수하고 불리한 여건에서 너무 신사적으로 대해 주고 있는데 천안함이고 연평해전이고 간에 뭔 패잔병이라느니 군이 무능하다느니 이딴 소리는 안 했으면 좋겠다. 나는 정말 일본과 북괴에 대한 잣대가 같지 않은 걸 정말 눈 뜨고 못 보며 싫어한다.

Posted by 사무엘

2023/10/28 08:36 2023/10/28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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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한테 이토 히로부미야 뭐.. 을사조약을 밀어붙인 민족의 침략자 원쑤이며 악당이다.
원 태우 의사가 암살하려다 실패했지만, 나중에 안 중근 의사가 쏜 권총에 맞아 골로 갔다. 죽어서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걸로 인과응보를 받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놈은 “남자는 배꼽 아래부터는 인격이 없다”라는 명언을 남겼으며, 뒤지는 순간에도 女짜 포즈를 그리며 쓰러졌다는 풍자가 나돌 정도의 호색한이었다.
과연 악당 캐릭터에 걸맞은 성품이다. 울나라에서는 이 정도의 이미지가 전부이다. 코 옆에 점이나 있는 사악한 흰 수염 꼰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 반면, 이 사람을 암살한 안 중근 의사는 울나라에서 뭐.. 그야말로 초딩용 위인전에도 수록돼 있는 애국자에 민족의 영웅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항일 독립운동 업계에서 개인 테러 분야의 원조 ‘알파’이다. 피날레 ‘오메가’는 윤 봉길 의사이고. ㄲㄲㄲㄲㄲ

인생이 워낙 드라마틱하니 관련 영상물도 당연히 여럿 만들어져 나왔다.
바로 떠오르는 건 "도마 안 중근"... 아 이건 좀 작품성이나 감독의 자질에 논란이 많고..
검색을 해 보니 애시당초 해방되자마자 1946년에 바로 "의사 안 중근"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져 나왔다. 하지만 얘는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필름이 소실되어 현재 전해지지 않으며, 1972년에 동일한 제목으로 리메이크된 영화가 그나마 더 유명하다.

일제의 탄압이 얼마나 천추의 한이었으면 1940년대 말에는 열차 이름도 '해방자'호였으며, 유 관순이고 윤 봉길이고 안 중근이고 항일 독립운동가 전기 영화부터 먼저 잔뜩 만들어졌었다. 그나마 "검사와 여선생"이 그 시절에 비정치 순수 픽션 분야에서 흥행 성공한 얼마 안 되는 신파 영화였다고도 예전에 언급한 바 있다.

유 관순 영화와 마찬가지로 안 중근 영화도 1959년에 "고종 황제와 의사 안 중근"이 하나 더 나왔고..
심지어 북한에서도 "안 중근, 이등 박문을 쏘다"(1979)라는 영화를 만들기도 했었다. 유 관순은 북한에서는 듣보잡 취급을 받는 반면, 안 중근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알고 보니 지난 2016년에는 "마지막 간수"라고 울산 MBC에서 다큐 반, 영화 반쯤 되는 성격의 TV 프로를 방영했었다. (☞ 보기)
마치 "조피 숄의 최후의 날"처럼 안 중근이 거사 이후 체포되고 취조받는 장면만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공교롭게도 KBS에서 주 기철 목사 다큐 겸 전기 영화인 "일사각오"를 만든 때와 시기가 아주 비슷하다. 그런데 저거는 중앙도 아닌 지방 방송에서 전기 드라마를 자체적으로 만든 거라니 무척 흥미롭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2022년 말에는 "영웅"이라는 이름으로 또 21세기 안 중근 전기 영화가 만들어져 있다. ㄲㄲㄲㄲ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안 중근과 이토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다.
그래도 일본에서는 안 중근을 위인으로서 흠모하고 존경하는 사람이 일부 있는 반면, 한국에서 이토를 그냥 외국 정치인으로서 흠모하고 존경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다만, 이토는 그 당시 일본의 진짜 제국주의 정한론 침략자들에 비해서는 '온건한' 편이었고,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만 두면서 둘이 평화로운 공존을 바라고 있었다면서 이토에게 최소한의 실드를 치는 시각은 국내에도 일부 있다. 이 영상에서는 그런 얘기가 많이 나오는구나. (☞ 보기)

  • “조선 정도의 전통과 규모가 있는 나라를 일본이 완전히 합병해 버리는 건 일본의 입장에서도 매우 힘든 일입니다. 대한제국이 자치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합니다.”
  • “독자적인 문화를 1천 년 이상 가진 민족을 식민지로 병합한다면 일본으로서는 큰 후환을 만들게 됩니다”

  • “일본인 교사는 여가 시간에 틈틈이 한국어를 공부하십시오” (참고로, 이토 본인은 영국 유학파였고 영어를 아주 잘한 사람이었음)
  • “종교는 조선인들 자유에 속하는 문제이니 이렇다 저렇다 평론하지 마십시오”

근현대에 일본은 어느 때건 온건파와 강경파가 늘 대립했던 것 같다.
한국 식민지화에 대한 생각도 그렇고, 나중에는 천황에 대한 생각(황도파 vs 통제파), 더 나중엔 태평양 전쟁 때 미국에 대한 생각에서도 말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개인적으로야 살아 생전에 한복 코스프레 즐기고 조선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저 정도이기까지 했는지는 모르겠다. 이토가 진짜로 저런 생각을 갖고 저렇게 말했는데 울나라 국사에서 일부러 누락시키고 안 가르친 것인가?

이토가 한국의 잠재성을 믿었다느니 하는 말은 아무래도 오바 같다.
을사조약의 제5항에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한다”라고 적혀는 있다. 나무위키에서는 여기에 밑줄 치고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로 링크가 걸려 있다. -_-

그는 조선을 보호국으로 먼저 만들고 나서 천천히.. 그래도 영국이나 로마 제국을 흉내라도 내면서 조선을 온건하게 일본과 동화시키려 했던 것 같다. 영국 유학파답게..
이렇게 비유를 해 보니 이토한테서 뭔가 야마모토 이소로쿠 같은 인상이 느껴진다. 후자는 미국 유학파이군..

그러니 고종이 헤이그 밀사를 몰래 보내면서 허튼수작 부린 것에 대해서는 이토도 강제 퇴위로 대응하면서 칼같이 응징했다.
그 시절에 고종은 아무리 봐도 러시아와 청, 일본 사이에서.. 그리고 친일과 항일 사이에서 오락가락 여기저기 양다리 걸치다가 죽도 밥도 못 쑨 것 같다. ㄲㄲㄲㄲ

안 중근 의사는 이토가 한국을 배신하고 동양 평화를 깨뜨렸다는 이유를 들면서 그를 사살해 버렸다. 그러면서 이토의 구체적인 죄목 15가지를 법정에서 주장했다. 아무리 온건파니 뭐니 해도 조선인 사이에서는 이토가 완전 죽일놈이라는 공감대가 전국적으로 형성돼 있었기 때문이다.
'시일야방성대곡'만 봐도 "이토 히로부미가 우리 편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을사조약 결과를 보니 전혀 아니었구나~ 저놈이 우릴 낚았구나!! 아이고 우리 어이할꼬"라는 내용이 전부이지 않던가..?

물론 역사적으로 볼 때 안 중근이 주장한 아이템들이 100% 다 팩트이고 맞는 얘기는 아니었던 걸로 난 알고 있다. 집필 중이던 "동양 평화론"이 완성되지 못해서 그의 생각을 다 알 수 없게 된 것이 일면 안타깝다.

안 의사는 체포된 뒤에는 자기를 적장을 사살하고 잡힌 군 장성급 포로로 대우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총살이 아닌 교수형을 당한 건지도 모르겠다. 정작 윤 봉길 의사는 그런 요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본토로까지 압송돼서는 군 교도소에서 총살형을 당했는데 말이다.

이 정도면 이토와 안 중근에 대해 어지간한 얘기는 다 나온 것 같다.
객관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1) 이토는 일본 자국에서는 한국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존경스러운 인물이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안 중근이 존경받는 것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 않다.
단순히 조선을 침략한 것 같은 유치한 행적 때문이 아니다. 그는 일본 자체를 개조하고 근대화시킨 아버지 정도로 추앙받는다. 거의 울나라의 박 정희 수준? 괜히 지폐에까지 들어간 게 아니다.

그리고 하나 더. 김 옥균 암살과 효수(시즌 1), 거기에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은(시즌 2)..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에 대한 더 부정적인 인식을 심고, (2) 조선을 더 강하게 병탄하고 더 험악하게 취급하도록 하는 데 기여한 건 분명하다고 하겠다. 쉽게 말해 통감부가 총독부로 바뀌는 시기를 크게 앞당겼다.

대만의 일제 통치에 비해 한반도의 일제 통치가 더 가혹했던 것, 처음부터 무단 통치에 헌병이고 고문이고가 횡행했던 것에 이런 사건이 직· 간접적으로 기여했지 싶다.
해방 이후에 김 구가 갑자기 암살 당하는 바람에 1940년대 말에 서로 눈치만 보던 남북 관계가 더 싸늘해지고, 6 25 같은 전쟁이 더 빨리 벌어지게 된 것처럼 말이다. (이 사람의 다른 행적에 대한 가치 판단은 차치하고라도)

물론 을미사변이라든가(시즌 1) 의병에 대한 무자비한 토벌(시즌 2) 때문에 조선 쪽에서도 감정이 빡돈 게 있기는 했다. 하지만 애초에 조선이 일본을 완전히 몰아낼 군사력 국력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국지적인 저항과 도발만 하는 건 그냥 일본을 빡돌게만 할 뿐, "곱게 식민지 될래, 맞고 식민지 될래"의 상황을 근본적으로 뒤집을 수 없었다.;;

마치 진주만 공격이 그때 당시에는 일본의 대승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천조국을 빡돌게 해서 그 뒤로...!!@#@!#@! 됐던 것처럼 말이다.
결국은 그로부터 10년쯤 뒤, 3· 1 운동이 비폭력을 지향하면서 크게 벌어지니 그제서야 일제도 발톱을 쓱 감추고 좀 고삐를 풀어 주고 문화 통치를 하게 됐다.

안 중근이 1910년대 국제 정세를 얼마나 크게 바꿔 놓았는지는 반대로 안 중근의 거사가 실패했다고 가정하고 쓰여진 대체역사 소설 "비명을 찾아서" 같은 걸 읽어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일본이 저렇게 무식하게 가혹하게 통치를 했으니 반일 항일 감정도 강해지고 강한 독립 열망이 형성되고 그게 실제로 이뤄지기도 한 것이다. 이토 같은 사람이 오래 살아서 조선을 반발심 없이 교묘하게 잘 다스렸으면.. 한국이 진짜로 일본과 동화돼 버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 나머지 관련 잡학들

  • 일본은 우리나라와 달리 성이 이름 급으로 엄청 다양하고 많은데, '이토'는 그래도 그나마 흔한 축에 드는 성씨라고 한다.
  • 휴먼버그 대학교에 고정 출연하는 주인공 중에 불사신의 직장인 ‘사타케 히로부미(박문!!)’가 있다. 이 사람 이름도 좀 다시 보게 되겠다. ㄲㄲㄲㄲㄲㄲㄲㄲㄲ

  • 안 중근 의사가 거사를 벌이던 당시에는 하얼삔 역에 일본군보다는 러시아군이 훨씬 더 많았다. 안 의사도 러시아 헌병들에게 제압 당하고 체포됐다.

  • 이토가 마지막으로 "나를 쏜 자가 누군가? 조센징이라고? 이런 빠가야로.." 이런 말을 남겼다는 건 사실이 아니라고 후손의 증언에 의해 부정된 바 있다. 또한, 이토를 쏜 사람이 러시아 저격수라고 따로 있다는 황당한 낭설이 있는데, 이 역시 그냥 주작이다.

  • 우리나라는 35년에 달하는 일제 식민지 트라우마로 인해, 훗날 UN이 제안하는 신탁통치조차도 극렬 반대하고 차라리 이대로 미군정-소련군정을 거쳐 분단을 선택한 것에 가깝다.;; 신탁통치 오보 같은 황당한 사건도 울나라의 미래에 영원한 쐐기를 박아 버렸다.

Posted by 사무엘

2023/07/31 08:35 2023/07/3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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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토가 분단되지 않았을 때 예상되는 철도의 변화

우리나라 인서울에서 일반열차를 취급하는 거대한 시종착역은? 서울, 용산, 청량리이다.
영등포는 저런 역들에 밀려서 고속열차(KTX, SRT)는 취급하지 않게 됐다. '대구' 역이 동대구에 밀려서 KTX를 취급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노량진은 한때는 소수의 일반열차를 취급했지만 2000년대 초부터 이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일반열차를 취급하지 않지만 굉장히 큰 부지를 갖추고 있는 역으로는 경의선 방면의 수색, 경원선 방면의 광운대(구 성북), 그리고 중앙선 방면의 망우 정도가 있다. 수색과 망우는 애매하게 가까운 곳에 환승역이 또 놓여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DMC, 상봉).

만약 우리나라가 분단되지 않았다면.. 망우는 몰라도 수색과 광운대 역은 뭔가 강북의 영등포처럼 일반열차가 다니는 큰 역이 됐지 싶다. 경의선과 경원선은 일제 시대의 복선이 그대로 유지되고, 서울 부근은 아예 2복선도 됐을 것이다.
아울러, 경의선 개성과 경원선 철원은 수원이나 춘천 같은 아주 중요한 역이 됐을 것이다. 특히 철원은 금강산선이 분기하는 곳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상상만 해도 흥미롭지 않은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예로부터 춘천 사람, 정확히는 춘천의 지주· 유지들이 한 근성 했다.
경춘선은 일제 말기에 만들어진 사철인데..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 자본으로 만들어졌다~!
교통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일제가 강원도청을 춘천에서 철원으로 옮기려 하자 춘천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사재를 털어서 서울에서 춘천으로 가는 철도를 뚝딱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이것이 경춘선의 유래이다.
난 강원도청은 원주에 있다가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춘천이 뺏어 버린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렇지는 않은가 보다.

2. 1988년

지난 쌍팔년도 1988년은.. 서울 올림픽이 열렸을 뿐만 아니라, 철도나 안보 관광과 관련해서도 흥미로운 변화가 제법 있었던 해이다.

(1) 경북 청도에는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면서 주민들이 1967년에 직접 건립했던 '신거'라는 이름의 간이역이 있었다. 하지만 수요 저조로 인해 1988년경에 비록 완전 폐역은 아니지만 역 건물이 헐렸다. (날짜 불명)
그런데 공교롭게도, 경북 봉화에서 주민들이 직접 건립하고 철도청에다 열차 좀 세워 달라고 민원을 때렸던 영동선 '양원' 역이 이 해 4월 1일에 정식 개업했다~!
오지에 사는 주민들이 직접 세운 간이역이 비슷한 시기에 하나는 없어지고 하나는 새로 생긴 셈이다.

(2) 1974년 11월경엔 연천 고랑포에서 북괴의 남침 땅굴이 최초로(제1) 발견됐는데.. 얘는 1976년부터 한동안 일반인에게 공개돼 오다가 1988년부터 비공개로 바뀌었다고 한다. 다른 땅굴들과 달리 너무 얕고 전방과 가깝고, 단면적이 너무 작아서 다니기 힘든 점이 감안된 듯하다.
지금까지 발견된 남침 땅굴 4개 중에 1호인 얘만 유일하게 비공개이다. 그런데.. 1988년에 정확하게 언제부터 비공개로 바뀌었는지에 대한 기록이나 신문· 방송 보도 자료를 전혀 못 찾겠다.

(3) 아울러, 1988년에는 철원에서 안보 관광지를 크게 정비했다.
우리가 아는 그 월정리 역 건물을 처음으로 만들고 구 철원 역 터에다가 승강장을 꽂은 때가 이때라고 한다.
이것도 1988년의 정확히 언제 있었던 일인지 자료를 못 찾겠다. 올림픽 때문에 정신 없었을 하반기는 아니고 정황상 상반기에 있었던 일 같다.
이 철원의 이벤트와 제1땅굴의 봉인이 서로 연계해서 같이 발생한 사건인지는 잘 모르겠다.

3. 우주 개발과 각종 토목 건설

철덕과 우주덕이 결합하면.. 취소된 아폴로 18, 19, 20호 얘기를 읽으면서 취소된 구 서울 3기 지하철 10, 11, 12호선 계획이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다.;;
흠, 미국의 우주 탐사 계획에 제동을 건 게 베트남 전쟁이었다면, 한국의 3기 지하철 계획에 제동을 건 것은 IMF였구나.;;

그리고 역덕/밀덕과 우주덕이 결합하면.. 아폴로 8호와 함께 미드웨이 해전 정도가 떠오를 수 있을 듯하다.
미드웨이 해전은 2차 대전의 딱 중반이던 1942년 6월에, 미국이 기가 막힌 첩보를 통해 일본의 대형 항공모함 4척을 몽땅 격침시키고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이 일본을 역전하는 첫 계기를 마련한 전투이다.

그것처럼 아폴로 8호는 1968년 말, 유인 달 착륙 경쟁의 중반쯤 되던 시기에, 미국이 소련을 역전하는 첫 계기를 마련한 미션이다. 시간에 너무 쫓긴 나머지, 처음 시도하는 여러 위험한 실험들을 한꺼번에 과감하게 추진했는데, 그게 다행히 전부 멋지게 성공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지구 대기권뿐만 아니라 지구 중력까지 벗어난 우주에 역사상 처음으로 나가 본 것, 일부 윤곽이 아니라 완전히 동그란 지구의 전체 모습을 최초로 목격한 게 아폴로 8호 때이다~!

그리고 요즘은 고속도로나 지하철 모두, 국가가 주도해서 국비만으로 주요 굵직한 간선을 건설하던 시대는 끝났다. 이젠 여기저기 자잘한 지선이나 경전철을 만들고 있고, ‘민자’의 비중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그것처럼 오늘날은 우주 개발도 옛날 냉전 시절처럼 국가가 육성하고 체제 우월성 경쟁을 위해 인간을 달에 보내려고 미친 돈지랄을 하는 형태는 진작에 끝났다.
이제는 철저히 민간 기업 위주로, 실용적인 관점에서만 접근하고 있다. 그리고 1세계와 2세계가 경쟁하는 게 아니라, 여러 나라들이 힘을 합치고 협력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북한이 남한보다 1년 더 먼저, 1973년에 평양 지하철 천리마선을 개통한 것에도 체제 경쟁 입김이 분명 들어갔다고 생각한다. 그 시절엔 운동 경기 기록은 말할 것도 없고, 뭐든지 먼저 만들고 건물도 더 크게 올리고, 깃대를 올려도 더 높게 올려야 직성이 풀리던 정말 오글거리고 유치한 시절이었다.

남한과 북한은 겨우 대성동 기정동 깃대라든가 63빌딩 VS 류경호텔을 갖고 경쟁했지만, 미국과 소련은 우주를 갖고 경쟁했다는 스케일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또한, 남한은 그때 이후로 그야말로 눈부신 서울· 수도권 지하철과 광역전철망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반면, 북한 평양은 저 때 이후로 시간이 정지해 버렸다는 차이가 있을 뿐..

Posted by 사무엘

2023/05/09 08:35 2023/05/0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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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튜브 링크는 1942년 6월 13일, 리 승만 할배가 워싱턴 D.C.에서 Voice of America 단파 라디오를 통해 고국으로 내보냈던 7분 남짓한 길이의 항일 독립 투쟁 격려 선전 방송이다.

“나는 이 승만입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국내외 2300만 동포에게 말합니다.
나는 지금 지극히 기쁜 소식을 전하노니, 누구든지 귀가 있는 자는 듣고 주변 동포에게도 이 소식을 일일이 전해 주시오~ 일제의 학정에 신음 중인 우리 동포에게 자유의 소식을 전하시오. 철창 감옥에 갇히고 형틀에 묶여서 죽어가는 우리 동포에게 생명의 소식을 전하시오…” (약간 요약하고 각색)

내 개인적으로는 이런 방송이 있다는 건.. 지난 2007년 말에 출간된, “일본 그 가면의 실체”(청미디어) 책에 별첨돼 있던 음원 CD를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됐다.

저 방송이 나갔던 때는 할배가 Japan Inside Out 책을 저술해서 출판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그리고 1942년 6월이라는 날짜를 보면 알 수 있듯, 저 때는 이제 막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이 일본을 상대로 겨우 승기를 잡았던 시점이었다. 아직 카이로고 포츠담이고 그런 선언이 나오기도 1년 이상 전이었다.

하지만 할배는 배짱 장사를 서슴지 않았다. 그는 일본의 미국 침략을 반 년 이상 일찍 예언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패망도 남들보다 훨씬 더 일찍 예상하고 확신했던 것이다.

“저 악독한 왜적은 하와이와 필리핀을 일시에 침략하여 제 무덤을 팠으니 미국은 잊지 않고 보복할 것입니다.
왜적들은 지금은 의기양양해 있지만 이내 혹독한 불벼락으로 응징당하고 패망의 길로 갈 것입니다. 일황 히로히토는 필히 파멸당할 것이니, 이는 세상이 다 아는 이치입니다.”

“우리 독립군이 중국 및 영국 미국과 더불어 연합군의 일원으로 당당히 왜적을 타파할 기회가 주어졌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리요? 이 순신의 후예로서 우리 군인의 의기와 용맹이 세계에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 독립의 서광이 비치나니 일심 합력으로 왜적을 파하고 우리 자유를 우리 손으로 회복합시다. 분투하라! 싸워라! 우리가 피를 흘려야 자손 만대의 자유 기초를 회복할 것이다. 싸워라! 나의 사랑하는 2300만 동포여!”

아~~ 전시에 선전 선동은 이런 식으로 피끓는 말투로 하는 게 정석이구나 싶다. 전쟁에서 사기라는 게 기여하는 바가 정말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을 저 따위로 했으니.. 할배가 나중에 미국을 상대로도 광복군 규모를 말도 안 되게 부풀리고 개 뻥카를 쳤겠구나 싶다. 이제 이해가 된다.

1940년대 정도면 일제의 악랄 집요한 탄압 때문에 국내에서의 항일 독립 운동은 사실상 씨가 마른 상태였다. 본인이 전에도 얘기했지만..
“일제가 망할 일은 없을 것이고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는 건 영원히 물 건너갔구나, 이대로 세대가 교체되면 한국인의 정체성은 진짜 씨가 마르겠구나. 물론 최후의 발악을 하는 소수의 불령선인 민족주의자가 있긴 하겠지만, 말 그대로 최후의 발악일 뿐 대세를 뒤바꾸지는 못하겠구나.. 지금까지 30년을 애썼지만 아무 소득이 없는 걸 보면 우린 안 될 거야 아마” 이미 이런 생각이 퍼져 있었다.

항일 독립 운동은 무의미하고, 이제는 2등 신민 조선인의 권익 향상, 차별 철폐, 일본 내에서의 참정권 쟁취 운동이나 해야겠다는 게 그 당시 국제 정세를 알지 못하는 민족주의 지식인 상류층의 주된 생각이었다.

이런 와중에 단파에 실려 태평양 너머로 울려 퍼진 리 승만 할배의 독려 메시지는 정말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엥, 이건 뭐지..?? 울나라 임시정부인지 뭔지는 중국에 있는 걸로 들었는데 본부가 언제 미국으로 이사 갔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할배의 선전 방송은 일제의 입장에서는 어지간한 불순불온 삐라를 훨씬 능가하는 최악의 불온 유언비어였다. 그들은 자국민이건 조선인이건, 전쟁 중에 외국 단파 라디오의 청취를 엄금했다. 요즘으로 치면 서버가 외국에 있는 불법 도박이나 마약을 단속하듯이 단속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 당시 조선인 중에서 엄청난 고가였던 단파 라디오에 접근 가능해서 외국 소식을 직접 접할 수 있었던 사람은 방송국 기술자와 언론인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들은 혼자만 이 소식을 들은 게 아니라, 목숨 걸고 방송 내용을 주변에 퍼뜨리다가 결국 1942년 하반기부터 줄줄이 걸렸다. 수십~수백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코렁탕을 먹고 투옥됐다. 이것은 '단파 방송 밀청 사건'이라고 알려져 있다.

옛날에 전파 통신 기술이 미약하던 시절에는 전파 거리가 적당히 길고 지구 전리층에 반사되고 산란성 투과성도 적당하고.. 취급하는 기술 난이도도 아예 초단파 FM 방식보다는 낮던 ‘단파’ 라디오가 장거리 통신용으로 즐겨 쓰였다. 음질이야 메롱이기 때문에 천상 음성용이지, 음악은 안 된다. 그래도 이것만으로도 모스 부호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에 비해 지금 인터넷 기반 스트리밍은 대륙 간 전송은 거의 다 해저 케이블이 담당하고, 지역 내에서 무선 전송용으로는 곳곳에 기지국을 도배해 줘야 하는 극초단파가 쓰인다. 이런 기술의 변화도 참 격세지감이다.

* 여담: 반일 감정

요즘 본인은 채널 A도 아니고 채널 W라는 걸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랄까 분위기가 지난 쌍팔년도 이후로 참 많이도 달라졌다는 생각을 몇 년 전부터 해 왔다.
위성 방송 같은 걸로 외국 방송을 쌩으로 그대로 보는 것도 아니고.. 나름 정식으로 수입돼서 우리말 자막까지 붙은 일본 드라마와 다큐를 그대로 보다니..

거기에다 일본어 학습(한국인 화자 입장에서)이라든가 일본 연예인 얘기도 나온다.
노인과 바다처럼 망망대해로 나가서 낚싯대로 '마구로' 잡는 어부가 울나라로 치면 무슨 인간극장 다큐의 소재이다.
아무리 지상파가 아닌 케이블이라지만 저게 제도적으로 가능한가 궁금했다. 검색을 해 보니 채널 W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일본 방송 컨텐츠의 직수입 방영이 허가된 케이블 방송이라고 한다.

일제 시대의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했던 옛날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일 것이다.
오죽했으면 우리나라는 SKY 명문대에 일어일문학과가 없다. 아.. 내가 알기로, 그나마 셋 중 한국대에만 1980년대가 돼서야 일어일문 비스무리한 학과가 유일하게 추가됐다.

최근에 만들어진 '항거' 영화에서야 형무소장이나 간수, 헌병뿐만 아니라 조선인 죄수인 유 관순 본인까지도 현장에서는 현실 고증을 반영해서 일본어를 쓰는 걸로 나온다. 그러나 옛날 1950, 70년대에 만들어진 국내의 유 관순 영화들은 반대로 재판정에서 일본인 판사와 검사까지도 편하게 한국어를 쓴다.
그 시절에 일본어를 구사하는 배우를 구하지 못해서일 리는 절대 만무하고, 당연히 그냥 "왜색을 제거하기 위해서" 언어 고증을 무시한 것이었다.

찬송가조차 일본인이 작사한 건 슬쩍 '작사자 미상'으로 처리하고 넘기기도 했었다.
가라데?? 당연히 태권도라고 바뀌어서 소개됐다.
국어에 별 희한한 단어까지 다 일본식 한자어라고 추방해야 된다느니 마느니 그랬다.

역사, 지리, 언어 등 온갖 분야에서 "원래 잘 될 수 있었는데 일본놈들의 로비와 방해 때문에 못 된 거다" 식의 피해망상이..
적당하거나 그나마 동정하거나 이해 가능한 수준이 아니라, 병적으로 치달으려 했다.

그리고 피해의식에 비례해서 일본한테 너무 쫄아 있기도 했다.
나 학생 시절에 정신력 강조하는 선생들의 훈화 말씀만 듣고 있다 보면.. 이렇게 군기가 개 빠져 갖고는 얼마 못 가 우리나라가 쫄딱 망해서 다시 일제 식민지가 될 것만 같았다. -_- 일제 식민지가 아니면 다시 북괴가 남침해서 적화통일 되거나.. =_=

과장 좀 보태면 쓰레기 하나 없는 일본 길거리가 우리집 안방보다 더 깨끗할 것 같았다.
일본인은 진흙처럼 잘 뭉치고, 조선인은 엽전까지는 아니어도 모래알처럼 제 팔 흔들면서 안 뭉치다가 각개격파 당한다는 말을 수도 없이 많이 들었다.
이러니 1990년대 말까지 "일본은 없다", "일본은 있다" 같은 선정적인 책이 많이 팔리고 베스트셀러에 올랐었다.

그러던 게 세월이 많이 흐르기도 하고, 울나라도 일본의 경제와 과학기술을 많이 따라잡고, 다이쥬 대통령 때부터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됐고 월드컵은 어쩌다 보니 한일 공동 개최로 치렀고..
또 요즘은 일본보다도 중공이 훨씬 더 많이 깽판 치고 망언 어그로를 끌고 있기도 하니 원색적인 반일감정이 상대적으로 누그러졌다.

뭐, 아직도 반일 정신병자들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과거사 정도면 "일본이 이만치 유감이니 사과니 보상이니 했으면 많이 한 거다, 더 논하지 않고 퉁치기로 해 놓고 약속을 안 지키는 게 더 문제"라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요즘은 많이 눈에 띈다.
아직까지 일본이랑 대놓고 갈등하는 티라도 나는 아이템은 독도 하나만 남은 것 같다.

허나, 역대 울나라 대통령 중에 리 승만 할배만치 편집증적으로, 거의 트라우마 급으로 일본 싫어하고 반일 반일거린 지도자는 없었다. 북괴와 전쟁을 치르던 중에도 “어디 우리 집안 싸움에 개입하기만 해 봐라, 우린 왜놈부터 죽여 버린 다음에 괴뢰군을 쏘겠다” 이랬었다.

세상에 저런 방송을 했던 당사자가 대통령이 됐는데 반일을 안 하고 배기겠는가? 이건 당연한 귀결이니 우리가 이해해야 된다.
한편으로, 오죽했으면 이런 반일 대통령 밑에서조차 노 덕술이니 김 창룡 같은 간부가 있어야 했겠는지도.. 자세한 맥락을 살펴보고 이해해야 된다.

“우리나라는 세계 모든 나라들과 교류하며 가능한 한 화평하게 지내야 한다. 그러나 일본하고는 독특한 과거사 때문에 우리만의 고유한 외교 정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 -- 할배가 양자 이 인수에게 남긴 유언 중 일부

이건 성경으로 치면 마치 예수님이 구원을 위해 유대인에게만은 행 2:38 같은 회개의 침례를 추가로 요구하고, 베드로에게는 뭔가 특별한 회개· 회복 절차를 요구하신 것과 비슷한 맥락인 것 같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 직접적으로 기여했고, 또 베드로야.. 이와 관련해서 인생 최악의 사고를 한번 쳤었기 때문이다.;;;

나는 고래를 지키고 울창한 산림 환경을 지켜 준 것은 고래기름의 대체제와 화석연료 원자력을 개발해 준 과학자 기술자 공학자라고 믿는다. 알량한 환경팔이 파이터들이 기여한 건 거의 없다고 본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를 자랑스럽게 만들고 반일 항일 극일을 제일 잘 실현해 준 것은 횬다이 쌤숭 같은 기업이라고 믿는다. 국부를 창출하고 실력으로 일본을 이긴 주역들이 아닌가? 어설픈 반일정신병자들이 기여한 건 거의 없다.

아무쪼록, 독도가 일본땅이라고 대놓고 로비 한다거나, 일본 기업에다가 횬다이 쌤숭 기업의 기술 기밀을 팔아넘기는 간첩이 없는 한... 지금 우리나라는 친일파가 문제인 나라는 절대 아니라고 본다. (일본이 아니라 중공이나 북괴에다가 팔아넘기겠지!!)
과학기술과 팩트와 개방을 통해 양 나라가 과거의 앙금을 극복하고 털어냈으면 좋겠다. 침략한 쪽이든 침략당한 쪽이든 죄악이나 병크를 반복하지 말고 서로 손잡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

* 옛 중앙청 건물은 그 위치에 있지만 않았어도 개인적으로 더 강하게 존치를 주장했겠지만.. 광화문과 경복궁과 청와대를 다 틀어막는 건 좀 아니어서 철거 쪽 입장도 이해를 한다. 할배 대통령도 당연히 그 건물을 없애고 싶어했었다고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23/04/12 08:36 2023/04/12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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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지역 특성

1. 경부선 철도 연선의 도시들

우리나라는 경부선 라인에 광역시 대도시들이 콕콕 박혀 있어서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고~!!" 이러는 노래도 있다.
일본의 도카이도 신칸센이 도쿄-나고야-오사카-교토를 줄줄이 잇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런데 경부선 라인의 대도시들 중에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대도시인 '-주' 지명이 전혀 없는 게 참 신기하다.

제일 먼저 대전이야.. 원래는 이름에 대놓고 '밭'이 있을 정도로 깡촌이었다. 그랬는데 뜬금없이 철도가 생기고 호남선과 분기까지 되면서 정말 개천에서 용이 나 버렸다.
일제의 입장에서는 철도 건설비를 절약하려고 산을 최대한 피해서 평지를 찾다 보니 상주-충주-용인 대신 이쪽까지 우회한 것이었다.

부산은 우리나라의 직할시/광역시 1호인 데다 서울 다음의 대도시인데도 불구하고 구한말까지는 의외로 굉장한 듣보잡이었다.
일본인들이 드나드는 관문 통로가 아니었으면 그 지역은 절~~대로 지금의 부산 같은 도시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까놓고 말해.. 을미사변이 벌어졌을 때만 해도, 민비를 살해한 일본 자객 일행은 인천항으로 들어왔다. 걔들이 중국에서 출발한 것도 아니고, 조수 간만의 차이를 이용해서 상륙작전을 벌인 것도 아닌데 굳이 인천항을 이용한 이유는.. 한반도에 제대로 된 육로가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경부선 철길이 있었으면 걔들도 당연히 부산으로 입국했을 것이다.

부산이라는 이름 자체가 조선 시대엔 없었고 그냥 중심부만 '초량'이라고 불리는 정도였다.
일제 시대엔 부산 역이 지금의 부산 역보다 더 남쪽 바닷가 근처에 있었고, 열차 시각표에 일본 본토 연락선 셔틀의 시각표도 같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서울-경성 방향이 아니라 부산 방향이 '상행'이었다..!!

끝으로, 대구도... 정말 믿어지지 않지만 철도가 없던 시절엔 달구벌이 경주, 상주, 진주보다 더 작았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오히려 중앙선에 경주, 영주, 원주 이렇게 '주'짜 지명이 3개나 있다. 하지만 중앙선은 경부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낙후해 있다.
상주, 충주, 공주.. 이런 곳은 철도 간선에서 열외되면서 대전, 대구에 비해 정말 처참해졌다.

한때는 철도가 침략의 상징이라고 여겨졌지만 조선인들도 자기 지역에 철도가 있어야 하겠다는 자각을 하게 됐다.
일제 시대에 조선인 스스로 자주적으로 주체적으로(!!) 놓은 거의 유일한 철도는 바로 구 경춘선이다..!! 물론 이런 움직임은 1940년대 일제 말기가 다 돼서야 생겼다.

2. 광역시들

우리나라의 6개 광역시 중..
울산은 지하철이 없고 대전은 공항이 없고(그 대신 청주..), 인천은 아직까지는 KTX가 없다.
광주는 타 대도시에 비해 유명 브랜드 쇼핑몰 같은 게 없거나 개수가 빈약하다고 한다.
대구와 부산만이 그런 나사 빠진 게(?) 없는 광역시인 듯하다.

그리고 대전은 전국에서 중전철 도시철도가 마지막으로 건설된 광역시이며(그 이후엔 다들 경전철만),
울산은 우리나라 역사상 마지막으로 광역시로 승격된 도시이다(1997). 그래서 울산은 직할시 시절을 유일하게 겪지 않았다.
울산 이후로 수원이나 고양 같은 대도시는 더 가벼운(?) 특례시라고만 불리며, 여전히 주변의 '도'에 소속되어 있다.

아울러, 6개 광역시는 바다를 접하고 있는 곳(부산 울산 인천)과 그렇지 않은 곳(대구 대전 광주)으로 딱 반반씩 나뉘기도 한다.

3. 서해안의 유일한 명소

  • 우리나라 서쪽의 황해는 동해보다 물이 탁해서 해수욕장으로서의 인기가 아무래도 덜하다. 그래도 황해에서 딱 하나 전국구 급으로 유명한 해수욕장은 아무래도 대천이 유일하다.
  • 동해안이 아니라 서해안에 있는 원자력 발전소는 영광 한빛이 유일하다.
  • 당진의 왜목마을은 서해안 베이스이지만 동쪽으로 살짝 돌출된 해안선이 있어서 일출과 일몰, 월출까지 볼 수 있는 특이한 곳이다.

4. 외세 침략의 잔재

우리나라에 외세로부터 당한 침략의 상징 내지 흔적으로 남은 시설은.. 철원 로동당사(북괴), 조선총독부 청사 첨탑(일제), 그리고 더 옛날 삼전도비(청-_-) 같은 게 있다.

그런데, 일본과 관련해서는 전국 곳곳에 적산가옥이 아직 남은 게 있고, 또 왜성이라는 것도 있다. 이건 옛날 임진왜란 시절에 왜군이 우리나라 남부 지방의 강가나 바닷가에서 자기 스타일로 성을 쌓고 버텼던 흔적이라고 한다. 오오~
울산, 부산, 양산, 창원, 거제 등.. 여러 지역에 생각보다 널리 분포해 있다.
심지어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자기들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 한국의 왜성을 찾아온다고 한다. 자기네 본토에는 옛날 성곽이 별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건 자랑스러운(?) 문화재가 아니니 일부러 막 띄우고 세금 들여서 복원까지 할 필요는 없다. 허나, 반대로 일부러 부수고 없앨 필요도 없으며, 최소한의 보존과 관리만 하면 될 것 같다.
뭔가 이런 유형의 옛날 유적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던 적이 전혀 없는데 신기하다. 청도에서 옛날 경부선 터널을 봤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5. 문화 유적

(1) 경주에서 황룡사의 재건· 복원이 오랜 떡밥이라면, 서울에서는 서대문(돈의문)의 재건· 복원이 오랜 떡밥인 것 같다.
서대문은 주변이 너무 많이 개발돼서 부지를 확보하는 것부터가 문제이다. 황룡사는 주변이 온통 허허벌판이니 부지 걱정은 없는 반면, 건물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과 정보가 부족한 게 애로사항이다.

(2) 지난 2011년, 이 명박 시절에 우리나라에서 문화 유적들의 명칭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던 것 같다.
경주 안압지가 '동궁과 월지'라고 완전히 변경된 게 이때였고, 인서울이던 서울 성곽도 '서울 한양도성'으로, 삼전도비도 '서울 삼전도비'라고 명칭이 정착됐다.

(3) 과거에 리 승만 할배 대통령이 다른 많은 문화 유적들을 놔두고.. 왜 하필 남한산성에 꽂혔었는지는 참 의문이다. 무슨 계기로??
오죽했으면 1950년대 중반에 남한산성 주변에 큰길을 내고 거기에다 자기 호를 이름으로 붙였다(우남로). 그리고 남한산성을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허나 우남로라는 도로는 근처의 헌릉로와 합쳐졌으며, 국립공원 시스템도 1960년대에 완전히 재개편됐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야 할배의 흔적이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현재 남한산성은 국립이 아닌 도립공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3/03/29 08:36 2023/03/29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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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대도시의 도로가 다른 중소도시· 시골의 도로와 다른 점은 가장 먼저 (1) "차로가 많고 폭이 크다는 것", 그리고 신호 대기조차 없는 입체 교차 "자동차 전용 도로"가 많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즉, "무신호, 점멸 신호 내지 자그마한 로터리 < 일반 적록 신호 < 입체교차로"의 순으로 도로의 규모가 커진다.

여기는 엄청나게 많은 차들이 몰려들고 이들을 빠르게 소통시켜야 하니.. 다른 지역에는 해당되지 않는 시설 투자가 많이 이뤄진다. 국도나 고속도로가 아니고 평범한 시내 도로도 아니면서 '도시 고속화도로'라는 건 또 뭘까? 대도시가 아니면 볼 수 없는 물건일 것이다.

20세기 말까지는 단순히 폭이 큰 길을 넘어서 (2) 고가 차도라는 게 간지 나는 산업화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없는 길을 만들어 내는 제일 무난한 방법이 고가이기 때문이다. 강 위로든, 기존 도로 위로든..
하지만 21세기부터는 진출입로 주변이 여전히 심하게 막혀서 교통 혼잡을 부추김, 고가가 주변 건물이나 아래쪽의 거주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침, 환경이나 보행자에게 친화적이지 못함 등의 이유로 인해 고가 도로를 더 만들지 않으며, 이미 있는 것도 서서히 철거하는 추세이다.

물론 멀쩡히 잘 닦여 있는 고가를 일부러 때려부숴 없애는 건 아니다. 그런 것들은 한번 만들어 놓고 끝인 반영구적인 물건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유지보수를 해야 하는데.. 마침 수십 년 전에 만들었던 시설이 노후화가 너무 심해서 유지보수 비용이 너무 많이 들면 이 참에 그냥 없애는 것이다.
서울 시내에서는 서울 역 고가 차도, 그리고 서대문 고가 차도가 2015년경에 철거돼 없어진 것이 유명하다. 더 전에 2003년쯤엔 청계 고가 차도가 없어졌었다.

2000년대 이후부터 존재감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 중 하나는 (3) 산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긴 터널이다.
20세기에는 길이가 1km 남짓이나 그 이상 되는 메이저한 '인서울' 터널은 남산 터널 3형제가 전부였다. 얘들은 서울 시내에서 보기 드문 유료 도로이기까지 했다. 원효대교나 북악 스카이웨이가 처음에 유료였다가 한참 전에 무료로 풀린 것과 달리, 남산 터널만은 2호를 제외한 1호와 3호가 줄곧 유료이다.

그러나 남산 터널은 밤 시간대와 공휴일엔 무료이며, 차에 3인 이상이 타고 있어도 면제이다. 또한 아주 특이하게도 하이패스를 지원하지 않는다.
전국에 이런 특이한 시스템과 정책을 시행하고 있는 유료 도로는 저기 말고는 없지 싶다. 역사가 긴 만큼 남산 터널만이 지닌 독특한 점이라 하겠다.

남산 터널 이후로는 2004년 초에 우면산 터널이라는 유료 터널이 개통했다.
그 다음으로는 용마산· 아차산· 망우산의 중앙을 횡축으로 관통하는 용마 터널이 2014년에 개통했다. 비슷한 시기에 경주에서는 토함산 터널도 개통했기 때문에 본인의 기억에 더 강렬하게 남아 있다.

2010년대 후반부터는 산을 최단거리로 횡단하는 터널 수준을 넘어, 대놓고 (4) 산이나 시내의 아래를 지나는 장거리 지하 도로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첫 시작은 2016년 7월, 강남 순환로였다. 그 동네에는 남부 순환로라는 옛 도로가 있긴 하지만 이미 느린 시내 도로의 퀄리티로 전락해 있었기 때문에 대체 도로가 필요했다. 남부 순환과 강남 순환의 관계는 거의 통일로와 자유로와 비슷한 정도랄까..

그러니 호암산과 관악산 아래로 새 길을 뻥뻥 뚫어 버렸다. 특히 이 길은 안양 부근에서 서울 강남으로 접근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줬다.
그 뒤 이듬해엔 제2 경인 고속도로의 연장인 안양-성남 구간도 비슷한 방식으로 산 아래로 뚫렸다. 강남 순환로가 서울대와 가깝다면, 이 고속도로는 경인교대 근처를 지난다는 유사점이 있다.

2010년대 말~2020년경엔 서울의 좌우 양쪽에 17과 29라는 종축 고속도로가 만들어져서 한강 이북에도 무려 폐쇄식 요금 고속도로 시대가 열렸다.
그 전까지는 한강 이북에 존재하는 고속도로는 오랫동안 100 외곽순환(수도권 1순환)밖에 없었다. 얘는 말 그대로 순환선이고 개방식 요금 구간이기 때문에 다른 장거리 고속도로와는 느낌이나 성격이 많이 차이가 났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 무렵에 동부 간선 도로의 북쪽 구간이 통째로 지하로 들어갔고..
2021년에는 신월-여의 지하 도로(4월)와 서부 간선 복층 지하 도로(9월)가 개통했다.
신월-여의는 여의도에서 경인 고속도로(120)로 빠르게 연계하는 횡축 도로요,
서부 간선 지하는 월드컵대교에서 서해안 고속도로(15)로 빠르게 연계하는 종축 도로이다.

얘들은 건설 비용을 낮추고 싶었는지, 처음부터 작은 승용차들의 트래픽만 흡수하려 했는지, 터널의 높이를 겨우 3미터 남짓으로 아주 낮게 잡았다.
우리나라 도로교통법에서는 공도 주행 가능 자동차의 높이 한계를 4미터로 규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높이가 3미터를 초과하는 대형 버스나 트럭은 구조적으로 이런 곳을 지나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무슨 열악한 굴다리도 아니고 새로 건설한 번듯한 지하 터널이 높이가 이렇게 낮은 건 생소한 트렌드였다. 그래서 대형차가 별 생각 없이 여기로 진입을 시도하다가 천장을 긁는 사고가 계속해서 발생하곤 했다.
사실, 이 정도로 물리적인 높이 제한이 없더라도 우면산 터널이나 강남 순환로조차 수십 톤급 트레일러는 통행을 제한하곤 했다. 그리고 이게 고속도로와 시내 고속화도로의 큰 차이점이지 싶다. 고속도로는 건설 취지의 특성상 산업용 대형차들을 당연히 무조건 받아들여야 할 테니 말이다.

이제는 시내 고속화도로를 넘어서 (5) 기존 고속도로조차 경인과 경부는 수도권 일부 구간을 지하화하겠다는 말이 나오는 중이다. 특히 경인은 엄청 옛날에 만들어져서 지반이 어차피 만만한 평지이며 고속도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한 상태이니.. 고속도로는 통째로 지하로 내리고 기존 평지 도로는 시내 도로로 바꾼다는 것이다.

이건 마치 철도에서 지상의 용산선을 지하의 공항 철도/경의선으로 바꾼 것과 비슷한 발상 같다.
아 그리고 요즘은 대학교 캠퍼스나 아파트 단지도 지상을 몽땅 공원처럼 꾸미는 게 유행이다. 단지 내에서 지하 주차장 입구를 만드는 게 아니라, 그냥 단지 입구에서부터 자동차를 싹 지하로 넣어 버린다.

이런 식으로 아파트 단지 내 도로부터 시작해 간선 도로와 고속화도로, 심지어 고속도로까지.. 자동차 도로는 지하로 내려가는 것이 최후 테크가 될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부터 전깃줄이 지하로 내려가더니 이제는 도로까지 그 뒤를 따르는 듯..
물론 지하 차도는 고가 차도보다도 건설비와 유지비가 훨씬 더 비싸기 때문에 모든 도로가 그렇게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지하 차도는 화재에도 훨씬 더 취약하다는 걸 감안해야 할 것이다. 단순 고가나 교량은 옆으로 도망칠 곳이 없다는 점만 낭패이지만 지하나 터널은 숨까지 제대로 못 쉬게 될 테니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3/03/27 08:35 2023/03/2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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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 원일 전 천안함 함장은 손 원일 제독 같은 사람이 되라고 해군 병 출신인 부친으로부터 참 부담스러운 이름을 물려받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손 원일은 독립운동가 겸 대한민국 초대 해군 참모총장.. 그야말로 해군의 창설자 내지 아버지다. ㄲㄲㄲㄲㄲ 관심 있는 분이라면 저분은 투스타 신분으로 미국 가서 극한의 심리전 흥정 딜을 벌여서 가격을 후려친 끝에 각종 군함과 무장을 똥값 헐값에 도입해 온 에피소드를 아실 것이다.

이런 준비 덕분에 6 25 사변 초기에 울나라가 본토에서 참패와 후퇴가 이어지던 동안, 바다에서는 대한해협 해전에서 대승해서 북괴의 내륙 침투를 저지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전쟁 내내 재해권은 우리 아군이 차지할 수 있었다.


이분은 해군 사관학교를 나와서 저 손 제독처럼 해군 장교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우수한 성적과 근무 실적으로 진급도 금방 금방 하면서 아주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잘 아시다시피 2010년의 천안함 피격 사건으로 인해 인생이 싹 바뀌게 되었다.

이거 무슨 인디애나폴리스 호 피격의 조선판도 아니고.. 패잔병, 패장, 임무 소홀/실패..?? 함장으로서 할 일을 다 하고 나서 제일 나중에 정당하게 구조됐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세월호 선장마냥 혼자 빠져나왔다는 식의 망발.. 정말 말도 안 되는 개 헛소리들을 일일이 상대해야 했다.

그는 이 정신병자 미친놈들을 몽땅 다 소송으로 대응해서 참교육 시켰다. 전우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이 인생 최대의 과제가 돼 버린 것이다.
특히 지난 2021년 6월에 휘문고의 어느 또라이 교사를 데꿀멍 시킨 일화가 유명하다. 저분은 2021년 2월에 대령 진급과 함께 예편했으니, 저건 민간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벌어졌던 일이다.

2.
지난 2002년엔 아폴로 계획 자작극 음모론자이던 어떤 스토커가 무려 11호 승무원 출신인 버즈 올드린(닐 암스트롱 다음으로 달에 발을 디딘..)을 집요하게 쫓아다니면서 어그로를 끌었다. “당신이 달에 진짜로 간 거면 어디 성경책에다 손 얹고 맹세해 봐라~ 용용~ 이 거짓말쟁이 사기꾼놈아!” 이랬다.

허.. 올드린은 11호 착륙 당시에 “저희는 달에 착륙할 예정입니다. 지구의 각지에서 이 방송을 듣고 계신 여러분은 하시던 일을 잠시만 멈추고, 지금 이 순간을 심사숙고하면서 각자의 방법으로 ‘감사’를 같이 표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런 말을 했던 사람이었다.

1948년 울나라 제헌국회 때 리 승만 의장이 애드립으로 감사 기도 요청을 했던 것처럼 말이다.
다만, 반 년 전 아폴로 8호 때는 창세기 1장 애드립 낭독이 논란이 돼서 이번엔 종교색을 빼고 ‘각자의 방법으로’라고 표현만 바꿨을 뿐이다. 그는 정말 독실한 신자였기 때문에 달에서 개인적으로 몰래 주의 만찬까지 진행했었다..!! (대외적으로는 성찬식..)

근데 성경에 대고 맹세, 사기꾼? 처음엔 이 사람도 그냥 정신병자 취급하면서 무시하고 지나가려 했지만 이 새X가 계속 길을 막고 선을 넘으며 모욕적인 도발을 일삼으니 참다못해 70대 나이로도 죽빵을 날리게 됐다.
한국 같으면 폭행죄로 기소됐겠지만, 정당방위를 높게 평가하는 천조국에서는 “이 정도면 아예 폭행을 대놓고 유도한 거나 마찬가지”라면서 기소조차 하지 않고 무혐의 방면됐다.

자, 저 버즈 올드린의 심정과(달 착륙), 손 원일 함장(천안함 폭침)의 심정이 비슷했을 것이다..!! 내가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솔직히 이건 타이슨 핵이빨이나 박 찬호 가위차기 같은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이 참고 더 점잖게 대응한 것이었다.
참고로 버즈 올드린은 아폴로 11호 승무원 3명 중에서 2023년 현재까지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사람이다. 생존했을 뿐만 아니라 90대의 나이로.. 한 달쯤 전(2023년 1월)엔 리 승만-프란체스카를 능가하는 연하의 여자와 네 번째 결혼까지 했다~!! ㄷㄷㄷㄷㄷ
그 반면, 가장 유명한 암스트롱은 2012년에, 사령선 조종사인 콜린스는 2021년에 세상을 떠났다.

3.
다음으로, 국내엔 손 원일의 이름을 딴 인물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월북 독립 운동가인 박 헌영의 이름을 딴 인물도 있다. 임 헌영..;; 이 사람은 본명이 따로 있다가 훗날 스스로 개명한 것이다.

이 사람은 교사 출신으로 문학 평론 쪽으로 일하다가 나중엔 민족 문제 연구소, 친일 인명 사전.. 이름만 들어도 성향이 짐작이 되는 진영에서 뼈를 묻으며 지냈다.
군사 정권 시절엔 감방을 들락거리기도 했고 정부로부터 사찰 감시도 받았다고..

행적이 입체적이고 진짜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 시대를 잘못 만난 풍운아, 선친일 후항일이 낫냐 선항일 후친일이 낫냐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인물..
그 많고 많은 일제 시대 인물 중에 하필이면 남한과 북한으로부터 모두 버림받았고 재평가 가능성도 없는 최악의 인물의 이름을 땄을까? 취향이 참 이상한 것 같다.

하다못해 손 원일의 부친인 손 정도 목사는 남한의 입장에서도 독립 운동가였을 뿐만 아니라 북한으로부터도.. 김 일성 수령의 옛 스승이었다고 예우받고 인정받는 사람이다. 이건 당연히 현재 북괴의 정치나 이념과도 전혀 무관한 옛날 일이다.

마치 중국에서 ‘쑨 원’이 중공과 대만 모두에게서 인정받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도 민족이니 통일이니가 좋으면 차라리 저런 사람이나 재조명할 것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고 보니 친일파니 어쩌니 하는 저 바닥에는 독립 기념관 관장을 역임한 김 삼웅이라는 사람도 있고, 광복회 회장을 역임한 김 원웅이라는 사람도 있다. 인상이 좀 비슷하게 느껴지는데 물론 그닥 긍정적인 인상은 아니다. -_-;; 도 넘는 반일 정신병은 이제 좀 그만..

Posted by 사무엘

2023/02/20 08:34 2023/02/20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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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쪽 얘기 참 오랜만에 다시 꺼내 보네..
하고 싶었던 얘기들이 며칠 동안 버퍼에 차곡차곡 쌓여서 목구멍 바로 아래까지 올라와서 말이다.. 뭐, 옛날 레퍼토리들도 많이 재탕했다. =_=;;

1. 표현의 자유와 형평성

  • 광화문 한복판에서 김 일성 만세 외칠 '자유?권리?'랑, 금남로 한복판에서 전 대갈 만세 외칠 '자유?권리?'는 똑같이 보장하거나 똑같이 금지했으면 좋겠다. 회고록의 발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편파적 적용은 결사반대.
  • 6· 25는 북괴의 일방과실이고, 5· 18은 상대방을 오인한 민-군-관 쌍방과실에 가까운 비극이다. 그러니 5 18을 기념하려면 시민과 군경 희생자를 같이 기리고 서로 화해하게 해야 한다.
  • 5· 18 모독죄를 만들고 싶거들랑 천안함 모독죄와 리 승만 할배 허위비방 모독죄까지 같이 넣었으면 좋겠다.

6· 25에 대해서 쌍방과실, 남침 유도, 심지어 북침설까지 주장하며 국가유공자들을 모독하는 건 괜찮은데.. 5· 18은 어떤 이견도 용납 못한다?? 그러면서 "표현의 자유"? 정말 가소롭기 그지없다.

최근에 지 만원 박사가 징역 2년형이 확정된 것도.. 그 사람 말의 진위 여부와 무관하게 정말 천부당만부당하고 어처구니없는 판결이다. 광주에 북괴군이 아니라 외계인이 침투했다고 개소리를 퍼부었어도 실형을 때렸을 건가? 저게 감방 갈 죄이면 광우뻥, 세월호, 천안함 패잔병, 이 승복 "공산당이 싫어요" 주작설 등등도 전부 처벌했어야 한다.

2. 병적인 집착

  • 별 희한한 거, 아무 상관도 없는 걸 갖고 편집증적이고 변태적인 욱일기 논란은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 페미년들이 별걸 갖고 성차별이니 여혐이니 시비 거는 것과 비슷하다.
  • 소녀상에다가 옷 입히는 짓도 제발 좀..
  • 멀쩡한 6 25 노래, 멸공의 횃불 노래를 좀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악한 반일 장사꾼들은 하루속히 정체가 탄로나고 X졌으면 좋겠다.
아울러, 국군의 날 포스터나 행사에 웬 중공군 무기가 등장하고, 국내 철도 개통 포스터나 현수막에 웬 신칸센 그림이 등장하는 꼴도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건 강경하게 주장하는 사항은 아니지만 괜히 멀쩡한 일제 시대 대신에 ‘일제 강점기’, 을사조약 대신에 ‘을사늑약’, 한일합방 대신 ‘한일병탄’처럼 피해의식을 더 부추기는 말을 일부러 쓸데없이 만들고 바꾸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괜히 조약 대신에 늑약이라고 바꿔서 상황이 더 나아지는 게 있나? 민족 정신이 고취되고 구한말 선조들의 행적에 실드가 쳐지고 자부심이 생기고 하다못해 국뽕이 생기는 거라도 있나? 일본이 더 나쁜놈이 되고  속이 더 후련해지나?

6 25 사변은 자꾸 전쟁이나 한국 전쟁이라고 바꾸려 하고, 북괴라는 칭호를 안 쓰고.. 그쪽으로는 감정이나 가치 판단을 배제하고 한없이 ‘중립적인’ 용어를 쓰면서 일본 쪽은 왜 저러는데? 그 삐딱한 잣대가 몹시 거슬리고 마음에 안 든다.

3. 자유는 좋지만 자유주의는 좀..

나는 닥치고 시장 만능 방임주의는 경계하며, 지나친 자유뽕 성향도 극혐까지는 아니지만 싫어한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되지 / 싫으면 그냥 니가 때려치우고 나가던가"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하지만, 상황 봐 가면서 적용해야 된다고 본다.

가령, 자기가 제발로 종교 계열 고등학교-대학교에 지원하고 거기 방침에 동의를 하고 입학해 놓고는 거기서 채플 반대, 종교 강요 반대 짓거리 하는 건 미친 짓이다. 자기가 나가든지 해야지?
그러나 기업들이 다같이 비열한 담합을 하고 있는 와중에 마냥 파업만 욕하면서 귀족 노조 프레임을 씌운다거나.. 진짜 조직이 미쳐 돌아가는 중인데 소수의 양심적인 내부고발자한테 저딴 논리를 들이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바른 분별이 필요하다.

4. 윤석 열차

그림 한번 잘 그렸네. 고등학생이 벌써 머리에 뭐가 들어가서 저렇게 정치에 세뇌됐는지는 모르겠다만, 뭐 표현의 자유로 인정한다고 치자.
저 열차는 물 먹고 석탄 먹고 칙칙폭폭 더 폭주해서 이전 정권의 탈원전과 탈북자 북송 죄악을 다 까발리고 나쁜놈들 죄를 묻고 잡아 쳐넣었으면 좋겠다. 놈들이 예전에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 줬으면 좋겠다.

이 사람 다음으로 지금 법무부 장관이 바톤 터치를 해서 정권을 물려받으면 우리나라는 21세기 최고의 황금기 중흥기가 찾아올 것 같은데.. 과연 국운이 거기까지 따라 줄지 잘 모르겠다.

5. 북한을 제대로 도우려면

구제불능 알코올 중독자나 도박 중독자를 돕고 싶으면 당장 굶지는 않게 밥을 주거나, 중독 치료를 받게 병원에 보내 주든가.. 어쨌든 당장 필요한 현물 서비스를 줘야 한다. 정상적인 경제 관념이나 분별력이 없는 사람에게 생돈을 덥석 쥐어 줘서는 절대 안 된다는 건 상식 중의 상식이다.

개인을 돕는 것뿐만 아니라 민족이나 국가 차원의 원조를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북한 주민들이 굶주리고 있으니 돕고 싶다면.. 그 도움이 주민들에게 직접 가게 해야 한다. 그리고 핵이니 미사일 같은 쓸데없는 도발 따위는 꿈에서라도 엄두를 못 내게 해 놓고 도와줘야 된다.
쌀이나 의약품을 줄 건 주더라도 핵 시설 같은 거 짓는 기미가 보이면 드론 날려서라도 폭격으로 조져 버리면서 도와야지..

저 동네는 원조 물자를 빼돌려서 수괴들 자기만 배를 불릴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교통· 통신 인프라조차 없어서 주민들을 돕고 싶어도 물자가 그리로 가지를 못하는 지경이다.

북한에 백신 지원 사업을 벌였던 재미 한국인 과학자가 얼마 전 자신의 실패담을 들려줬다.
“백신을 주겠다니 북한이 좋다고 했다. 그런데 백신을 실어 나를 트럭이 없다고 했다. 트럭을 사주니까 이번엔 백신을 보관할 냉장고가 없다며 사달라고 했다. 트럭에 냉장고를 싣고 북한의 백신 접종 현장에 갔더니 이번엔 냉장고를 돌릴 전기가 없었다. 어쩔 도리가 없어 포기하고 돌아왔다.” (☞ 원문)


그러니 옛날에 원조가카가 괜히 고속도로부터 먼저 닦은 게 아니었다. 그 다음에야 제철소를 만들고, 그 다음에 그거 바탕으로 자동차나 조선소 만들고.. 할배 때 준비해 놓은 원자력 전문가를 이용해서 한참 뒤에야 원전까지 만들고..
다 순서가 있는 법이다. 이런 인프라가 없으면 만년 농업이나 경공업밖에 못 하기 때문이다.

본인은 새마을 운동도 1960년대가 아니라 생각보다 늦은 70년대 이후에 시작된 걸 알고서 좀 놀랐다.
이렇게 하고 싶은 게 많았으니.. 유신 독재 하던 심정이 이해가 된다.

6. 상호주의에 입각한 개방

내 개인적으로는 이제는 북한 컨텐츠도 그냥 있는 그대로 노출해도 되지 않나 싶다. 울나라가 물리적인 경제력 군사력이 북괴한테 딸리는 것도 아니고, 아무 거리낄 게 없지 않은가?
로동신문이나 고려항공 웹사이트를 warning.or.kr로 틀어막지 말고 개방하라는 거다. 뭐,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어른들의 사정이 있어서 여전히 틀어막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까 김 일성 회고록 얘기가 나왔었는데.. 이거 자체는 북한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언젠가는 다 개방되고 풀려나올 필요가 있다.
세월이 흐르니 하다못해 독일에서도 히틀러 "나의 투쟁"이 해금돼서 서서히 풀려나오니 말이다. 물론 책 내용을 오해하지 말라는 단서를 많이 달고서...

이렇게 우리나라에서 김 일성 회고록을 출간하는 대신, 북한에다가는 성경이나 전 두환 회고록, 리 승만 Japan inside out 같은 책을 보급하는 거다. 상호주의에 입각한 개방이라면 나쁠 게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남한에다가만 북한 방송? 그것도 북한에다가 중계료 왕창 주고 사 와서? 그런 짓거리라면 이건 완전 종북 이적행위이니 나로서는 목숨 걸고 결사반대다.

신앙에서도 주변으로 복음 전파, 전도를 못 하게 하고 너 혼자만 조용히 믿으라는 건 신앙의 자유가 아니다. (출애굽기, 다니엘서)
이와 비슷하게.. 남북이 서로 똑같이 선전방송을 안 하는 건 공평한 게 아니라 남한(+북한 주민)에게 손해인 거래라는 걸 명심해야 할 것이다.

내가 소위 햇볕정책이니 뭐니 하던 것에 분노하고 그게 정치쑈 사기극이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퍼주기만 하고서 정말 기본적인 것 하나 실제로 개방된 것이라고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 주민을 진짜로 제대로 도와주고 북한 체제를 개방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준비조차 한 게 없다.

그냥 정치쑈만 벌이다가 연평해전이나 박 왕자 피살 사건으로 뒤통수만 맞았으며, 그 뒤에 천안함이나 연평도 포격, 목함지뢰 사건이 줄줄이 이어졌다. 2010년대 이후로는 계속 핵과 미사일 도발만 하는 중..

제발 저것들이랑 통일 수작 벌이지 말고, 그냥 지원 끊고 고립시키고 굶겨 죽이는 거라도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전쟁 따위 안 해도 된다.
이 와중에 "우리 북한은 안 물어요" / "남측이 북한을 먼저 자극했기 때문에..." / "이건 좀 더 도와 달라는 신호" 이러는 정신병자 미친 새끼들은 정말 인도주의 차원에서 북으로 송환하든가, 추방 아니면 공개 처형에 삼족을 멸해도 시원찮을 것이다.

더 나아가, 북괴뿐만 아니라 이슬람 애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잣대를 적용할 수 있다. 쟤들은 "나는 너희 나라에서 포교 가능하지만 너희는 우리나라에서 포교 금지"를 고수하면서 세계 어디를 가나 상호주의를 제일 안 지키는 집단이다. 그러니 우리도 국내의 무슬림들에 대해 철저히 경계하고 필요 이상의 편의는 절대 봐 주지 말고, 세력이 절대로 커지지 못하게 감시해야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23/01/25 08:35 2023/01/2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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