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가 세상적으로는 도저히 성공할 수 없고, 인간의 머리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종교(?)인 이유

1. 여타 종교들을 한 치의 타협도 없이 단호히 배척하여 '따'를 자처한다.

2. '원수를 사랑하라' 등, 육신적인 가식· 위선으로는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요구를 한다.

3. '부활' 같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황당한 걸 가르친다. 사실 교주가 부활해서 무덤이 비어 있다고 가르치는 종교도 여기 말고는 없고..;;

4. 잘 믿으면 부귀영화 성공은커녕, 박해를 받을 거라고 대놓고 버젓이 예고한다.


이건 내가 정리한 건 아니고 L.E.맥스웰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태어났다> 책에 있는 내용이다.

세상엔 복음에 반감을 갖고 있는 똑똑하고 '이성· 합리적인' 무신론자들이 엄청 많다. 인간이 만들어 낸 종교들의 각종 폐단들을 지적하면서 자신들은 반종교가 아니라 비종교를 표방한다고 그러는데...
그에 대한 나의 생각/반론은 이러하다.

1. 글쎄, 리처드 도킨스가 나처럼 있지도 않은 신을 무작정 쫓아다니는 불쌍한 무지렁이들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무신론을 설파하기 위해 나 대신 죽어 주기까지 했으면(그리고 부활까지 했으면).. 그 사람 주장도 좀 고려해 보겠다.

2. 내가 왜 태어났고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고 죽어서는 어떻게 되고, 절대적인 선과 악이 무엇인지.. 이런 것에 대한 관념이 없는 사람치고 건전하게 잘 살고 있는 사람은 난 못 봤다. 절대자 없이 인간이 과연 그렇게 자기끼리 질서정연하게 잘 살고 있었을까? 글쎄? 난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ㅎㅎ

3. 위에도 잘 설명돼 있지만, 인간이 자기 머리로 종교를 만들었다면 나 같으면 단언하건대 철도교를 만들었지 기독교 같은 건 미쳤다고 만들겠나. 절대로 안 한다.

Looking for you 같은 마약 같은 황홀경 음악이 있고, 수인선 복선 전철과 동해남부선 광역전철의 부활 신앙이 있고, 국토 사랑 정신과 희락과 화평과 사랑이 넘치는 철도교를 믿으면 되지 뭐 하러 쓸데없이 사탄 마귀, 지옥, 심판, 휴거 같은 걸 논하겠나? 왜 골치아프게 영적 전투를 치러야 하나? 나도 종교에 대해서 도킨스만치는 그래도 생각을 해 보고 예수 믿는다. ㅎㅎ

이성· 합리적인 무신론자라면 이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필요하다. 세상에 인간들이 당신보다 똑똑하지 못해서, 머리 쓸 줄 몰라서 기독교가 안 없어지고 있는 게 아니다.

※ 크리스천이 겪는 슬픔과 고통

크리스천이 아무리 죽음에 대한 준비가 다 된 사람이라 해도, 이와 별개로 죽는 과정은 충분히 두려울 수 있다. 그리고 고통 때문에 울부짖을 수 있다. 예수쟁이도 총 맞으면 죽는 보통 사람이며, 고문 당하면 괴로운 건 마찬가지다.
또한 크리스천이 아무리 부활의 소망이 있고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걸 기약한다 해도, 사랑하는 사람이 당장 죽었는데 당연히 슬퍼서 울 수 있다. 성경에도 그 유명한 Jesus wept가 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뭔가 천추의 한이 맺히고 서러워서, 혹은 증오심과 원망이 맺혀서 “이놈/이것만 아니었으면 내가 요 모양 요 꼴 되지는 않았을 텐데” 같은 식으로 울 일은... 영적으로 잘 성장했다면 없는 게 정상일 것이다.

물론, 크리스천 중에 여전히 그런 것 때문에 세상 비관하고 앓는 소리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무작정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모 아니면 도 식인 것은 진리이나, 그렇다고 해서 “이러지 못할 거면 걍 때려치워라” 같은 돌직구는 정말 신중하게 날려야 한다. 그런 걸로 기껏 자라려던 남의 믿음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실족하게 해서는 안 된다.

Posted by 사무엘

2013/11/16 08:30 2013/11/16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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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 자가진단

※ 나는 왜 예수님을 믿는가 -- 크게 작용한 요인들
  • 세상 그 어느 종교도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가르치지 않으며, 교주가 부활했다고 가르치지 않고, 또 이 정도로 역사적으로 방대한 증거와 증인들을 갖추고 있지 않으므로
  • 인간이 자기 노력과 근성으로 신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신이 먼저 인간을 찾아주고 은혜와 사랑을 베풀었다고 가르치므로
  • 없어졌으면 애시당초 진작에 씨가 말라 버렸을 정도로 황당하고 믿어지지 않는 교리를 갖고 있는데, 아직까지 당당히 존속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최소한 무시할 수는 없고 한번 살펴볼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으므로
  • 이 정도로 무수히 많은 이단들이 압도적으로 집착할 정도이면, 웬지 이 바닥에 분명 진리가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어서
  • 성경은 그 논조와 내용을 볼 때 인간이 쓸 만한 책이 절대 아니라는 확신이 들어서 (가령, 정치적으로 치우침이 없음. 인간 자신에게 절대 이롭지 않은 내용이 지나치게 장황하게-_- 많이 들어있음)
  • 그래도 몇몇 증명 불가능하고 이해가 안 되는 사항들만 일단 믿고 나면, 이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각종 교리와 윤리관은 아주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인간에게 건전하다는 게 너무 분명하게 확 느껴져서
  • 죄 문제라는 인간에 대한 상태 진단과, 그 해결책에 너무나 공감이 가서. 최소한 줘도 못 먹는 사람이 되지는 말아야지?
  • 차라리 예수 그리스도라는 절대적인 의의 기준이 온갖 상대주의· 다원주의보다는 훨씬 더 명확하고 깔끔하고 건전하고 뒤끝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 사회 구조 탓이다, 그 상황에서는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다 등등)

그래서 내가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 글을 참고할 것.

※ 나는 왜 예수님을 믿는가 -- 조금 작용한 요인들

  • 개독안티들의 무례하고 표독스러운 말투에, 사실 여부를 떠나 괜히 반발심과 환멸을 느껴서 (다른 건 몰라도 저놈들 말은 절대로 듣지 말아야겠다는 식)
  •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과오라고 알려진 것들이 상당수가 기독교와는 아무 관계가 없고, 사실은 크리스천들도 오히려 피해자라는 걸 알게 되어서
  • 파스칼의 팡세에 나오는 수준의 간단한 변증론. 가령,
    “지금 예수 믿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실 없는 게, 지금 안 믿었는데 진짜로 지옥이 있어서 낭패 보는 것보다 더 안전하고 리스크가 적다.”
    “신이 없다고 단정짓기엔 인간의 지식은 너무 좁고 빈약하다” 같은 식.
  • 내세와 심판이 있을 거라는 양심의 자극. 죽음에 대한 두려움
  • 성경이 과학적으로도 옳다는 걸 뒷받침하는 몇몇 자료들
  • 이 정도 교리면, 정말 만에 하나 성경의 내용이 다 거짓이고 허구이고 설령 근거 없이 맹목적으로 믿는다 해도, 크게 손해 볼 게 없다고 생각되어서. 성경은 최소한 날 골탕먹이려고가 아니라 날 '위해서' 기록된 책이라는 느낌이 와서

※ 내 신앙관에 영향을 거의 끼치지 않은 것들

  • 좋든  싫든, 주변 교회 사람들의 행동과 평판
  • 잘한 것이든 못한 것이든, 해당 종교계에서 유명한 사람들의 언행 (그 사람들이랑 나랑 도대체 무슨 상관이냐? 나는 베르테르 효과 같은 것과는 담을 쌓고 지냄)
  • 세상 불신자들로부터의 평판, 매스미디어에 묘사된 이미지
  • 육신을 들뜨게 하거나 흥분시키거나 만족시키는 종교심. 나는 그런 부류의 종교심은 이미 철도교로 다 충족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종교에다 내 영원을 걸지는 않는다.
  • 기복신앙

하지만 현실에서는 저런 것들을 보고 교회를 나가거나 종교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무진장 많다. ㅜㅜ

※ 지금은 발현되지 않고 있지만, 언젠가 깊은 시험에 들고 신앙 면역 체계가 무너졌을 때 큰 위험이 될 수 있는 잠재적인 암적 요소들

  • 성경에서 여전히 잘 이해되지 않고 해결이 안 된 의문이나 논리적 모순(처럼 보이는 것들) 몇 군데. 목사님에게 여쭈거나 주석서를 봐도 알 수 없는 것들
  • 성경이 밥 먹여 주냐... 같은 부류의 유치하지만, 좁은 길을 가는 성도에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시험. 현실의 염려 (눅 8:14)
  • 신앙생활이 매너리즘으로 변질돼 가는 것
  • 하나님의 뜻을 도무지 알 수 없을 때. 이것도 하지 말고 저것도 안 하면 도대체 뭘 하라는 건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들이닥치는 것

Posted by 사무엘

2012/05/21 19:28 2012/05/21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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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상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리고 불에 타 죽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죽음인지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불은 사람에게 공포를 주고 대중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잘 쓰이곤 했다.

작게는 담뱃불, 크게는 다리미나 인두로 생살을 지지는 것은 고문 방법으로 통용되어 왔다.
그리고 중세에는 화형이란 게 있어서 반역자나 종교적 이단 같은 죄질이 굉장히 나쁜 죄인은 이 방법으로 처형했다.

동양의 조선이나 중국은 거열형이나 능지처참 같은 다른 끔찍한 형벌이 있을지언정, 화형은 없었나 보다. 그래서 화형 하면 일단 중세 유럽이 떠오른다.
게다가 그 당시는 지금처럼 불에 활활 잘 타는 천연 가스나 석유· 석탄이 개발되어 쓰이기 전이었음을 생각해 보자. 그러니 사형수를 완전히 확 불태우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으며, 집행 시간은 길었고 그만큼 사형수의 고통도 더했다.

근현대에 와서는 먹고 살 만해지고 인권(?) 의식이 향상되면서 그런 잔인한 형벌은 사라졌다. 그러나 사회 구조가 막장인 곳에서는 열사의 길을 가기 위해 분신 자살이라는 엄청난 방법을 선택한 사람이 이따금씩 나오곤 했다.

우리나라는 대표적인 예로 전 태일이 있다(1948-1970).
노동청에 탄원서를 보내고 대통령 면담을 요청하는 등, 노동자의 권익 보호를 위해서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봤지만 바뀌는 게 전혀 없으니,
이놈의 있으나마나한 근로기준법에 사망 선고를 내리자는 차원에서 자기 몸에다 기름을 끼얹은 뒤 불을 지르고 만 것이다.

난 어렸을 땐 우리 민족은 6· 25 폐허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룩해 냈다고까지만 배웠는데, 그 과정에서 이런 희생자도 있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을 때,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세계적으로 분신 자살/자결의 예로 가장 유명한 사건은, 틱 광둑이라는 환갑이 넘은 베트남의 어느 불교 승려의 죽음이다.
그는 남베트남의 부패 독재 정권(응고 딘디엠 대통령)의 학정을 세계에 알리고 이에 항거하는 뜻을 전하고자 1963년 5월 29일, 수백 명의 불자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휘발유 화염에 휩싸였다.

아니, 불교에는 대의를 명분으로 하는 이런 행위에 대해서 '소신공양'(燒身供養)이라고 용어가 따로 있다고 한다.
에밀레종 같은 얘기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하긴, 한국인에게는 김 동리의 소설 <등신불>을 통해 이 개념이 비교적 널리 소개되기도 했다.

세상에 사람이 라이브로 불에 타 죽는 장면은 영화로도 보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틱 광둑 스님의 충격적인 자결 장면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영상과 정지 사진으로 촬영되어 전세계에 알려졌다. 이것이 국제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독재 정권의 명을 재촉했음은 물론이다.
동영상을 보면 알 수 있듯, 그는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고통에 울부짖거나 바둥대지 않았고 꼿꼿하게 책상다리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절명해서 몸에 힘이 완전히 빠진 뒤에야 뒤로 벌렁 넘어갔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반세기 가까이 전인 1963년의 일인데 동영상이 컬러로 남아 있고 오히려 정지 사진은 흑백이다.
동영상 (1:34 지점부터 불이 확! 2:21에 시신이 쓰러짐)
정지 사진
비위가 약하신 분은 열람 금지.

동영상은 멀리서 찍은 것이고 활활 타는 불밖에 안 보이는 반면, 정지 사진은 고인의 모습을 비교적 가까이서 여러 장 찍은 듯하다.

처음에 밝은 색 계열이던 승복이 시간이 흐르면서 새까맣게 탔다.
화마가 얼굴 피부까지 검붉게 할퀸 모습은, 흑백이 아닌 컬러 사진이라면 훨씬 더 참혹하고 끔찍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안면 화상을 입은 이 지선 씨 모습만 해도 얼마나 끔찍했던가?

응고 딘디엠 정권은 막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불교를 대놓고 탄압까지 했다. 뭐 그렇다고, 시대가 20세기인데 멀쩡한 불자들을 잡아 죽인다거나 한 건 아니고, 사찰을 파괴하고 석가탄신일을 금지하는 등 불교를 제도적으로 디스하고 불이익을 준 정도이다.

그런데 여기서 굉장히 이상한 점이 있는데, 응고 딘디엠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는 점이다! 정부 관료들도 전부 가톨릭 신자만 등용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개신교 계열이 절대 아니다. 그런데 불교를 탄압했다고라...
응고 딘디엠의 아내, 즉 베트남의 영부인이라는 사람은 틱 광둑 스님의 죽음을 보고는 아예 “바베큐 파티”라고 천하의 개쌍놈급의 개드립을 공공연히 치기도 했다.

난 정말 이상함을 느꼈다.
우리나라는 가톨릭과 불교가 얼마나 사이가 좋은가?
성탄절과 석가탄신일 때 천주교계와 불교계가 서로 축하해 주는 건 뭐 관행으로 정착한 지 오래이다.
그러면서 천주교는 타 종교에 대해서 관용과 화합 잘 한다고 폭풍 칭송을 받고 있는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개독 먹사들이 담대하게 복음 전한 것도 아니고 타 종교인들에게 무례한 무개념 병크 저질러서 간증 상실하고 욕 바가지로 얻어먹고 있지 않은가?

물론 가톨릭의 전략을 아는 사람에게야 이런 차이가 그리 새삼스럽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각 국가와 문화에 따라서 자신이 약자일 때나 경쟁자와 아직 동급일 때 취하는 전략이 다르고, 마침내 그들이 진짜 주류가 되고 정치· 종교적 갑이 되었을 때 시행하는 전략이 또 완전히 다르다. 섬뜩할 정도로 다르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뭔가를 배우고자 한다면, 이런 패턴을 배워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교회 역사상 순교자가 셀 수 없이 많이 나왔으며, <폭스의 순교사> 같은 책을 보면 '흠좀무'라는 말밖에 안 나오는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겉보기로) 아무 고통 없이 화형 당한 사람 얘기가 나온다. 토머스 헉스(Thomas Haukes)라는 사람은 1555년, 피의 메리 시절에 유아 세례 반대라는 죄목으로 화형을 당해 순교했는데, 불에 타 죽는 고통이 견딜 만하면 위로 손을 뻗어 손뼉을 치고 죽을 테니 손은 묶지 말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진짜로 손뼉을 세 번 친 뒤 숨을 거뒀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사건 자체는 기독교에만 있는 사건이 아닌 것 같다. 불에 타 죽는 고통조차도 인간의 극한의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인지 신기한 일이다.

틱 광둑에 이어,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010년, 문수 스님이라는 노승이 이 명박 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4대강 사업의 전면 중단을 촉구하면서 소신공양으로 생을 마감했다. <민중의 소리> 같은 진보 성향 언론에서는 진짜 문자 그대로 새까만 숯덩이가 되어 버린 고인의 시신까지 사진으로 공개했다. 이것 역시 비위가 약한 분은 클릭 금지.

그런 사람들이 인간적으로야 정말 숭고한 뜻으로 자기 목숨을 그렇게 비장하게 초개처럼 버렸을 수는 있다. 허나 인간의 의로 참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의 기준을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은 실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의 육신의 몸이 불타면서 느끼는 고통은 정말 끔찍하긴 해도 그래도 길어야 수 분이 채 안 되어 끝이겠지만, 그 동일한 고통을 죽음으로 종결지을 수조차도 없이 영원무궁토록 겪어야 하는 '그곳'에 또 가게 된다면 얼마나 안타까울까??

마가복음 9장 끝부분에 기록된 “거기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느니라” 3콤보의 경고를 이 시간에 되새기도록 하자.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진짜로 정죄받은 죄인의 최후인 것이다. (단, 3콤보는 KJV에만 있음)

이런 얘기를 접하노라면, 이와는 반대로, 맹렬히 불이 붙었는데도 재가 되지 않고 멀쩡히 살아있는 떨기나무(출 3:2-3)가 얼마나 대단한 기적인지 실감하게 된다. 또한, 평소보다 연료와 공기를 7배나 더 공급해서 달궈진 맹렬한 용광로 불길로부터 멀쩡히 살아서 돌아온 다니엘의 세 친구들 이야기가 얼마나 경이로운지도 또 실감하게 된다. 하나님은 불을 만드신 분이고, 연소라고 불리는 급격한 화학적 산화 현상을 제어하여 예외로 적용할 능력도 응당 갖추고 계시기 때문이다.

성경에 따르면 결박만 없어졌을 뿐 그들은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았고 옷도 전혀 타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단 3:27). 오히려 그들을 용광로에 집어넣으려던 병사가 허둥대다가 불에 타 죽었다. 그러나 용광로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곧 성육신 전의 예수님이 그들을 미리 기다리고 있다 맞이했다니 얼마나 경이로웠을까? (세 명이 아니라 네 사람이 용광로에 있었다. 단 3:25) 그들은 왕이 부르기 전까지는 오히려 용광로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상 수많은 순교자들 중에 다니엘의 세 친구들에게만 예외적으로 기적을 허락해 준 것은 하나님의 경륜상의 특별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하나님께서 설령 자기를 불에서 구해내지 않고 죽게 허락할지라도 그래도 느부갓네살 왕의 형상에는 절을 하지 않겠다고, 한 치의 타협도 하지 않고 순교를 불사할 생각으로 단호하게 자기 신앙을 “먼저” 지켰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할 필요가 있다. (단 3:17-18)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찬양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지금까지 불, 화상, 화형, 분신자살, 순교 등 여러 섬뜩한 주제로 어찌 보면 두서없을 수도 있는 형태로 얘기가 나왔다.
글을 쓰면서 더욱 느꼈는데, 나는 인간의 알량한 의를 내세우지 않는 나의 종교, 아니 나의 신앙이 좋다. 복음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그 아무리 큰 죄를 짓고 그 어떤 급으로 하나님이나 교회, 기독교의 명예를 실추시켰다 하더라도 진심어린 눈물의 회개만 하면 다 용서하고,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사람을 다시 사용해 주신다. 그래서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과 회개 장면이 더욱 드라마틱하게 읽히는 것이다.

성경에는 너희(크리스천) 몸을 하나님께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는 권면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만(롬 12:1) 그건 무슨 신앙의 자유를 위해 세상 정부를 상대로 투쟁하고 시위대의 불화살이 되거나, 명예 회복을 위해 할복을 하라는 소리가 절~대로 아니다. 너도 십자가형 체험을 일부러 해 보라는 소리도 결코 아니다. 남이 먼저 날 죽여서 순교를 하면 했지, 기독교는 그 어떤 명분이라도 자해나 자결 같은 열사의 길을 권장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티를 내 봤자 우리 의가 설마 예수님의 의를 능가하겠는가?

기독교가 세상의 여느 시민 단체, NGO 단체와 다를 바가 없다면, 매 예배 때마다 아마 순교선열들에 대한 묵념도 하고, 각종 유명한 순교자들의 동상도 세워서 떠받들고 숭배하는 게 정상일 것이다. 그래서 천주교에서 하는 게 딱 이러한 발상에서 비롯된 성인 시성과 성인 숭배이다. 수많은 크리스천들을 잡아 죽인 종교이지만, 자기네들이 내세우는  자기네 순교자도 없는 건 아니어서..=_=;; 그러나 성경을 믿는 기독교는 애시당초 그렇게 사람을 떠받들지 않으며, 그건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죄 때문에 인간이 정말로 죽어야 할 때도 동물을 대신 피 흘려 죽게 해 주고,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성육신하여 인간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가르친다. 심청전에도 나오는 인신 공양 같은 게 절대로 없다. 다른 종교와는 차원이 다르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방 민족들을 전부 죽이고 흔적도 남기지 말고 파괴하고 멸하라는 잔인한 명령을 왜 내렸는지 아는가? 이 방법이 아니면 이방 민족들의 그런 악한 관행들을 뿌리뽑을 수가 없어서였다!

아무쪼록 육신의 장막을 벗고 사망도, 슬픔도, 고통도, 울부짖음도 없는(계 21:4) 세상이 올 것을 염원해 본다. 여기에는 불에 의한 사망, 고통, 울부짖음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불 및 불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을 생각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길을 다시 생각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오면 좋겠다.

NOTE:

'스님'은 님짜 때문에 높임의 뜻이 들어가기 때문에, 공식적인 글에서는 '승려' 정도가 적절하다는 지적이 있다. 그에 대해서 나는 좀 회의적이다. 그런 식의 논리이면 '장님'도 분명히 높임말이다. 그런데도 그건 또 정서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성경에 나오는 장님이나 소경도 요즘은 다 그냥 '맹인'이나 심지어 시각 장애인으로 바뀌는 추세이다.

님짜를 뗀 '스'는 말이 되지 않으며, '장'도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하나님'도 님짜를 떼면 말이 되지 않는다. 본인은 그런 단어들은 단어 전체를 한 형태소로 보며, 그렇게 의도적인 존칭이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본문에서 '스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음을 밝힌다.

그 반면에 '예수님' 다음의 님짜는 명백하게 존칭어미이다. 그래서 우리끼리는 글 쓸 때 예수님이라고 하지만 다른 불신자들은 그냥 예수라고만 부른다.

Posted by 사무엘

2012/04/19 19:22 2012/04/19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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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과 통합

요즘이야 학문간의 경계를 허물고 융합 내지 통합이 대세라고들 다들 그런다. 특히 인문계와 이공계의 통합 시도가 두드러지고 있으며, 본인도 일종의 그런 계열로 학업을 계속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대학에서 학과간 협동 과정이라는 개념이 생긴 건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라고 한다. 생각보다 꽤 최근이다.

그 전엔 그럴 수가 없었다.
대학 내부의 각 학과들은 자기 과가 좀더 연구비를 많이 타 내고,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더 많은 세력을 확보하려고 서로 싸우는 구도였다.
융합은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융합 뭥미? 그거 먹는겅미? 우걱우걱..." 이었다.

어디 학계뿐이었을까?
요즘도 그렇기도 하지만 종교 때문에 서로 지지고 볶고 싸우고,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유럽 강대국들은 식민지를 더 차지하려고 불꽃 튀는 경쟁을 벌였다.
가끔은 체력이 비슷한 국가들끼리 불가침 동맹을 맺기도 했지만, 힘의 균형이 깨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조약 그딴 거 없었다. 바로 침략.

그런 마인드로 과학 기술만 급속도로 발전하니, 그 결과는 인류의 비극이었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 ㄷㄷㄷ;;
아마 그때 종교에 좀 심취해 있던 사람들은, 이걸 분명 요한계시록 재앙에다 갖다붙이면서 인류가 이렇게 멸망하고 말 거라고 호들갑도 떨었을 것이다. 역사상 최초로 원자 폭탄의 버섯 구름을 본 사람들이 경험했을 충격과 공포는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 * * * * *
독특한 사례로 일본을 들 수 있다.
그때 일본은 아시아 국가들 중 나름 일찍 근대화에 성공하여, 한때 미국과도 맞장 뜨고 전쟁을 벌일 정도로 성장하긴 했다.
그러나 그 내막을 살펴보면, 일본의 내부 조직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막장이었다.

아마 전에도 블로그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일본군이 존재하던 시절, 일본의 육군과 해군이 서로 얼마나 사이가 나빴는지 말이다. 그냥 나쁜 게 아니라 서로 거의 적군에 가까운 수준이었으며, 서로 스파이를 보내서 상대편 근황을 알아볼 정도였다..!!

(르누와르와 세잔을 일본 육군과 해군으로 바꿔서 개그만화일화 만들어도 될 듯.. ㄲㄲㄲㄲㄲ)

육군과 해군이 각각 천황 직속이었던지라 육· 해군 통합 사령부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았다.
2차 세계 대전 때 나중에 하도 상황이 안 좋아져서 해군이 보다못해 "육군아, 과달카날로 보병 좀 파견해 주셈" 하자, 육군 왈, "과달카날이 어디야?" -_-;;;
서로 작전을 알려주지도 않았으며, 둘 중 하나가 싸우다 다 죽어가고 있어도 상대편은 그냥 '생깠다'.

전투기나 장비조차도 똑같은 걸 서로 중복 투자하여 따로 개발했으며, 들어가는 부품의 나사 규격조차도 서로 달랐다고 한다. =_=;;

이 정도면, 지 만원 박사의 지론대로라면, 일본은 '시스템'에서 졌기 때문에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다. 정확한 표현이다.
본인이 공 병우 박사를 공부하던 시절엔, 전쟁 당시 일본의 주된 비효율 요인으로 '한자'를 비중 있게 살펴봤었다. 미군은 군함 곳곳에 영문 타자기가 비치되어 있어서 아주 빠르게 교신을 주고받았던 반면 일본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
그런데, 한자보다도 저런 막장 군대 조직이  더 큰 비효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일본의 이런 막장 시스템은 헌병과 특별 고등 경찰에서도 찾을 수 있다.
당시 일본 헌병은 여타 군대의 헌병과는 달리, 군사 치안뿐만 아니라 민간인 치안까지 담당했다. 자기 마음대로 민간인을 상대로 사상 검문을 하고 구금, 체포, 고문이 가능했다. 우리 같은 피지배인뿐만이 아니라 일본 본토인조차도 자기네 나라 헌병을 싫어할 정도였다.

그런데 불순분자를 잡아내는 일은 어차피 일본이 만들어 낸 특별 고등 경찰과도 거의 겹치는 업무였다. 일례로,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한 건 올린 조직은 헌병이 아니라 고등 경찰이었다.
하지만 둘 사이에 업무 협조나 첩보 정보 공유? 그딴 건 전혀 없었고 둘 사이도 극도로 나쁘긴 마찬가지였다.
왜냐고? 육군· 해군 사이와 마찬가지로 실적 쌓기 천황 충성 경쟁 때문이었다. ㅋㅋ
* * * * * *

그랬는데,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부터 인간 사회에 과거와는 뭔가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트렌드가 나타났다.
컴퓨터가 발명되고, 이스라엘이 건국되고,
전쟁으로 인해 발달한 과학 기술을 기반으로 민간 여객기가 지구촌 시대를 개막하고...
그리고 전쟁을 예방하기 위해, 예전의 국제 연맹보다 더욱 강력한 범국가 기구인 UN이 생기고..;;

지금은 분야를 불문하고 협력과 통합이 대세이다.
서로 협력해서 파이의 크기를 키울 수만 있다면, 어제의 적국도 오늘의 친구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역시 영원히 생까고 지낼 것 같던 일본하고도 문호 개방하고, 6 25의 원흉이던 북한하고도 이 정도로 개방하고, 심지어 정치 이념적 우방이던 대만 대신에 시장 크기가 더 큰 중국과 수교하고.. 북한의 친구였던 러시아하고도 수교하고...;;
좋게 말하면 실용적인 것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기회주의일 수도 있다. 세상에 돈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세상이 얼마나 지옥 같은(같을 수도 있는) 세상인지는, 겪어 보지 않고서는 잘 모를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당연시되고 있는 각종 국제 규모의 올림피아드나 대회..;; 100년 전에는 상상하기 쉽지 않던 개념이었다.
자, 학문간의 융합도 이런 맥락에서 살펴볼 만한 트렌드인 것 같다.

이제는 그런 식으로 종교까지 통합 중이다. 성탄절 때 절에서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합니다" 현수막 걸어 주고(안 해 줘도 되는데! ㄲㄲㄲㄲ), 석가탄신일 때 성당에서 "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합니다" 해 주는 게 요즘 관행이라며?
물론 근본주의 크리스천들은 이런 에큐메니컬 운동을 굉장히 싫어한다. 성경에 예고된 대로 말세에 있을 큰 배도와 타락이라고 갖다붙이며, 그 의견에는 본인 역시 동의한다.

세상 정세에 더 민감한 미국 크리스천들은 UN도 굉장히 싫어한다. 하나님의 경륜은 국가와 민족을 나누는 것인데, 그걸 인간이 멋대로 힘을 합치고 통합하면 그걸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짓밖에 안 할 거라고 말이다. 그래, 그것도 맞는 말이다.
다만, 6 25 때 UN의 절대적인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우리나라 사람, 특히 반공 정신이 투철한 한국 교회 성도가 느끼는 UN 이미지와, 미국이 느끼는 UN 이미지는 같을 수가 없을 것이다.

아무쪼록, 해서 나쁠 것 없는 융합과, 영적으로 불순한 동기의 융합을 잘 분별하는 것도 오늘날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닌가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0/10/24 18:38 2010/10/24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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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 종교) 이야기

1. 대학 특색

올해 상반기에 대학원을 한번 준비해 보고서야,
대학들도 다 똑같은 대학이 아니며, 간판이라는 게 학부뿐만이 아니라 대학원 세계에도 엄연히 존재한다는 걸 느꼈다.
또한 단순히 인지도 서열뿐만이 아니라, 캠퍼스 면적부터 시작해서 지원되는 학과 내지 강세인 학과도 학교마다 다 다르다는 걸 처음으로 실감했다.

한양대나 인하대 하면 공대, 홍익대 하면 미대 같은 식으로. 옛날처럼 수능 점수에 맞춰 자동으로 학교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이제야 진짜로 내 면학 계획에 부합하는 학교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반대로 서울대와 연세대엔 일어일문학과가 없으며 연세대엔 미대도 없다는 사실에 깜놀.

내가 가는 학교는 간판 자체는 국내에서 상당한 인지도와 역사, 전통을 자랑하지만 각 과에 대해서는 학교 간판에 '비해' 의외로 인지도가 별로 없는 것 같다. 특히 공대는 잘 알다시피 서울대, 카이스트, 포항공대 등에 밀려서 상당히 약한 듯. 학부는 여길 나왔더라도 대학원까지 거길 가는 사람은 못 봤다. 하지만 난 공돌이 공부를 계속하는 게 아니니 상관없음. (그럴 거면 애초에 학부 모교 대학원을 지원했어야지!)

이곳은 그 대신 국어학 쪽이 서울대와 더불어 양대 산맥이며 최 현배 박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어?) 곳이다. 다른 학교는 비교 문학, 한국학, 문화 컨텐츠 같은 협동 과정은 있어도, 딱 여기처럼 자체 국어사전 연구소를 위시로 하여 국어학+전산학 협동 과정을 개설한 곳은 없었다. 사실, 이런 학제간 연구를 국내에서 제일 먼저 시도한 곳임. 과가 이보다 더 맞는 곳이 없으니 결국 서울대 같은 다른 학교는 더 미련을 둘 필요도 없이 여기에만 지원했다.

그래서 결론은, 본인은 지금 학교에 잘 지원해서 잘 합격했다는 말이 되겠다. 이제서야 지방 소재 단과 대학이 아닌, 인서울 종합 대학에서 제 2의 학생 인생을 시작하겠다. ㅎㅎ

2. 고학력 실업자가 되지 않으려면;;

이제 상당한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대학원으로 체제 전환을 하기로 했다. 히드라 럴커를 운용하다가 뒤늦게 스파이어를 올리는 기분이다. 이제야 교수가 얼마나 위대하신-_- 자리인지를 느끼게 됐으며, 누가 박사라고 하면 출신 학교와 학위 취득 나이 같은 프로필을 더욱 유심하게 보는 버릇이 생겼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박사라고 해서 다 같은 박사가 아니다. 국내 지방대 인문계 박사부터 시작해서 골수 유학파 20대 박사도 있고... 40대가 넘어서까지 거의 10년째 시간 강사 보따리장수 신세인 박사가 있는가 하면, 공대에는 무려 30대 초반에 본격 교수가 되어 자기 랩 동기들을 떡실신시킨 유학파 박사도 있다. 아놔...;

나는 이제 대학원에 가면 저 두 극단의 중간에 가까운 길을 갈 듯하다. (전자에 더 가까울지도ㅜㅜ) 일찌감치 대학원을 간 주변 동기들은 이제 박사까지 따고 나올 때가 됐는데 본인은 이제 들어간다. 학사 취득과 석사 취득 사이에 7~8년 정도 긴 간극이 있는 사람이라면 중간에 군 복무와 직장 생활을 좀 한 경우이며, 본인도 딱 거기에 속한다.

이 승만도 36세인가 그 무렵에 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지금 시작해도 저 사람보다는 늦지 않을 거다. 할 일 없어서 가방끈이나 늘리러 진학한 건 절대 아니고, 논문 쓸 건 다 생각해 놨다. 이제 특정 플랫폼에 종속적인 노가다 코딩은 밑의 후임에게 맡기고, 나는 더 고차원적인 걸 공부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3. 종교 특색

연세대: 대표적인 장로교 계통
동국대: 불교
서강대: 천주교
원광대: 원불교
우리나라 국군이 인정하는 4대 종교별 대표 학교이다. ㄲㄲ

내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부류를 꼽자면,
해당 종교에 속하는 사립 대학교에 자기가 제 발로 가 놓고는, 거기서 부과하는 채플이나 종교 의식이 ‘종교의 자유 침해’라면서 딴지 거는 애들.
종교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는 종교별로 다양한 건학 이념도 존재하며, 그 학교에 간 학생이라면 일단 그걸 존중은 해 줘야 하지 않는가? 자기가 거기에 신념상 동의는 안 하더라도 말이다!

동의할 수도, 존중할 수도 없다면, 그럼 그 학교엔 애초에 가지 말아야 한다. 본인은 동국대나 서강대 같은 학교는 안 갔을 것이다. KJV 믿는 지역 교회가 주변에 없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런 오지에 있는 학교조차 꺼려지는 마당에, 하물며 건학 이념이 대놓고 타 종교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학교엘 가겠는가?

오히려 기독교 학교라고 불리는 학교들조차도 내가 보기에는 지금은 완전히 세속화할 대로 세속화해서 진짜 성경대로 믿는 교리는 거의 찾을 수 없으며 껍데기만 남았다. 그러면서 불신자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잘못된 인식만 심어 주고 있다.

포항에 있는 한동대는 대표적인 기독교 사학이란 걸 독자 여러분도 잘 아실 것이다. 연세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종교 성향이 더 노골적이다.
그런데 몇 년 전(한 2007년?)엔 여기에 어느 무슬림 학생이 갑툭튀 유학 왔다. 물론, 입학 전에 한동대의 종교적 이념에 동의한다는 각서도 다 쓰고 말이다. 공부 잘하고 아주 똑똑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이 친구... 한동대 내부에서 적극적으로 이슬람을 포교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개독들처럼 빨간 조끼와 붉은 십자가의 이슬람 버전으로? 아니, 천만의 말씀이다. 아주 정중하고 다소곳하고 예의 바르게(이슬람의 극단적인 두 얼굴을 명심하라), 교칙 전혀 안 어기면서... 주변 친구들에게 무려 성경을 펴서 논리정연하게 이슬람을 전했다. 그러면서 교내 기도실에서는 혼자 메카를 향해 알라 신에게 기도를 드렸다.

포교는 “봐라, 성경에 이런 구절도 있는데 어떻게 예수가 하나님일 수 있느냐? 예수는 하나님의 대언자일 뿐이지 삼위일체는 잘못됐다.” 아마 이런 식이었을 것이다. 기독교 안티질을 한 것도 아니다. 아니 그랬는데, 룸메이트를 포함한 상당수의 주변 학생들이 그 포교에 넘어가서 신앙 정체성을 잃고 교회를 떠났다고 한다. 교수들조차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을 정도. 그 기독교 학교에 들어간 그 많은 학생들이 이슬람 학생 겨우 한 명을 신앙 논리로 못 이긴 것이다. (마 17:17 같은 주님의 탄식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래 놓고 백 날 음주가무만 금지하고 종교 생활만 율법적으로 강요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 금연 금주 금녀는 종교색이 전혀 없는 사관학교에서도 시행하고 있는 규칙이다.

주님께서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신 것처럼(눅 16:8), 저 이슬람 학생도 지옥 자식으로서는 임무를 정말 잘 수행했다. 작정하고 타 종교인을 계몽(?)할 목적으로 나와 종교가 다른 학교에 일부러 들어갔다면, 차라리 저 이슬람 학생처럼 행동해라! 합법적으로 노력해서 당신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 보라는 것이다. 괜히 종교의 자유 운운하면서 인권위 진정 내지 1인 시위, 소송 따위나 하지 말고 말이다. 또한 반대로, 허접한 한국 기독교회와 교인들도 반성해야 할 게 무진장 많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대학+종교 얘기하다 말이 엄청 길어졌다.
끝으로 한 마디. 전라남도에 있는 대불대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이미지와는 달리 불교 계열이 전혀 아니며, 오히려 기독교 계열이라고 한다. 정말 충공그깽.

Posted by 사무엘

2010/07/15 08:24 2010/07/15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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