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상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리고 불에 타 죽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죽음인지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불은 사람에게 공포를 주고 대중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잘 쓰이곤 했다.

작게는 담뱃불, 크게는 다리미나 인두로 생살을 지지는 것은 고문 방법으로 통용되어 왔다.
그리고 중세에는 화형이란 게 있어서 반역자나 종교적 이단 같은 죄질이 굉장히 나쁜 죄인은 이 방법으로 처형했다.

동양의 조선이나 중국은 거열형이나 능지처참 같은 다른 끔찍한 형벌이 있을지언정, 화형은 없었나 보다. 그래서 화형 하면 일단 중세 유럽이 떠오른다.
게다가 그 당시는 지금처럼 불에 활활 잘 타는 천연 가스나 석유· 석탄이 개발되어 쓰이기 전이었음을 생각해 보자. 그러니 사형수를 완전히 확 불태우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으며, 집행 시간은 길었고 그만큼 사형수의 고통도 더했다.

근현대에 와서는 먹고 살 만해지고 인권(?) 의식이 향상되면서 그런 잔인한 형벌은 사라졌다. 그러나 사회 구조가 막장인 곳에서는 열사의 길을 가기 위해 분신 자살이라는 엄청난 방법을 선택한 사람이 이따금씩 나오곤 했다.

우리나라는 대표적인 예로 전 태일이 있다(1948-1970).
노동청에 탄원서를 보내고 대통령 면담을 요청하는 등, 노동자의 권익 보호를 위해서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봤지만 바뀌는 게 전혀 없으니,
이놈의 있으나마나한 근로기준법에 사망 선고를 내리자는 차원에서 자기 몸에다 기름을 끼얹은 뒤 불을 지르고 만 것이다.

난 어렸을 땐 우리 민족은 6· 25 폐허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룩해 냈다고까지만 배웠는데, 그 과정에서 이런 희생자도 있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을 때,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세계적으로 분신 자살/자결의 예로 가장 유명한 사건은, 틱 광둑이라는 환갑이 넘은 베트남의 어느 불교 승려의 죽음이다.
그는 남베트남의 부패 독재 정권(응고 딘디엠 대통령)의 학정을 세계에 알리고 이에 항거하는 뜻을 전하고자 1963년 5월 29일, 수백 명의 불자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휘발유 화염에 휩싸였다.

아니, 불교에는 대의를 명분으로 하는 이런 행위에 대해서 '소신공양'(燒身供養)이라고 용어가 따로 있다고 한다.
에밀레종 같은 얘기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하긴, 한국인에게는 김 동리의 소설 <등신불>을 통해 이 개념이 비교적 널리 소개되기도 했다.

세상에 사람이 라이브로 불에 타 죽는 장면은 영화로도 보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틱 광둑 스님의 충격적인 자결 장면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영상과 정지 사진으로 촬영되어 전세계에 알려졌다. 이것이 국제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독재 정권의 명을 재촉했음은 물론이다.
동영상을 보면 알 수 있듯, 그는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고통에 울부짖거나 바둥대지 않았고 꼿꼿하게 책상다리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절명해서 몸에 힘이 완전히 빠진 뒤에야 뒤로 벌렁 넘어갔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반세기 가까이 전인 1963년의 일인데 동영상이 컬러로 남아 있고 오히려 정지 사진은 흑백이다.
동영상 (1:34 지점부터 불이 확! 2:21에 시신이 쓰러짐)
정지 사진
비위가 약하신 분은 열람 금지.

동영상은 멀리서 찍은 것이고 활활 타는 불밖에 안 보이는 반면, 정지 사진은 고인의 모습을 비교적 가까이서 여러 장 찍은 듯하다.

처음에 밝은 색 계열이던 승복이 시간이 흐르면서 새까맣게 탔다.
화마가 얼굴 피부까지 검붉게 할퀸 모습은, 흑백이 아닌 컬러 사진이라면 훨씬 더 참혹하고 끔찍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안면 화상을 입은 이 지선 씨 모습만 해도 얼마나 끔찍했던가?

응고 딘디엠 정권은 막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불교를 대놓고 탄압까지 했다. 뭐 그렇다고, 시대가 20세기인데 멀쩡한 불자들을 잡아 죽인다거나 한 건 아니고, 사찰을 파괴하고 석가탄신일을 금지하는 등 불교를 제도적으로 디스하고 불이익을 준 정도이다.

그런데 여기서 굉장히 이상한 점이 있는데, 응고 딘디엠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는 점이다! 정부 관료들도 전부 가톨릭 신자만 등용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개신교 계열이 절대 아니다. 그런데 불교를 탄압했다고라...
응고 딘디엠의 아내, 즉 베트남의 영부인이라는 사람은 틱 광둑 스님의 죽음을 보고는 아예 “바베큐 파티”라고 천하의 개쌍놈급의 개드립을 공공연히 치기도 했다.

난 정말 이상함을 느꼈다.
우리나라는 가톨릭과 불교가 얼마나 사이가 좋은가?
성탄절과 석가탄신일 때 천주교계와 불교계가 서로 축하해 주는 건 뭐 관행으로 정착한 지 오래이다.
그러면서 천주교는 타 종교에 대해서 관용과 화합 잘 한다고 폭풍 칭송을 받고 있는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개독 먹사들이 담대하게 복음 전한 것도 아니고 타 종교인들에게 무례한 무개념 병크 저질러서 간증 상실하고 욕 바가지로 얻어먹고 있지 않은가?

물론 가톨릭의 전략을 아는 사람에게야 이런 차이가 그리 새삼스럽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각 국가와 문화에 따라서 자신이 약자일 때나 경쟁자와 아직 동급일 때 취하는 전략이 다르고, 마침내 그들이 진짜 주류가 되고 정치· 종교적 갑이 되었을 때 시행하는 전략이 또 완전히 다르다. 섬뜩할 정도로 다르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뭔가를 배우고자 한다면, 이런 패턴을 배워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교회 역사상 순교자가 셀 수 없이 많이 나왔으며, <폭스의 순교사> 같은 책을 보면 '흠좀무'라는 말밖에 안 나오는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겉보기로) 아무 고통 없이 화형 당한 사람 얘기가 나온다. 토머스 헉스(Thomas Haukes)라는 사람은 1555년, 피의 메리 시절에 유아 세례 반대라는 죄목으로 화형을 당해 순교했는데, 불에 타 죽는 고통이 견딜 만하면 위로 손을 뻗어 손뼉을 치고 죽을 테니 손은 묶지 말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진짜로 손뼉을 세 번 친 뒤 숨을 거뒀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사건 자체는 기독교에만 있는 사건이 아닌 것 같다. 불에 타 죽는 고통조차도 인간의 극한의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인지 신기한 일이다.

틱 광둑에 이어,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010년, 문수 스님이라는 노승이 이 명박 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4대강 사업의 전면 중단을 촉구하면서 소신공양으로 생을 마감했다. <민중의 소리> 같은 진보 성향 언론에서는 진짜 문자 그대로 새까만 숯덩이가 되어 버린 고인의 시신까지 사진으로 공개했다. 이것 역시 비위가 약한 분은 클릭 금지.

그런 사람들이 인간적으로야 정말 숭고한 뜻으로 자기 목숨을 그렇게 비장하게 초개처럼 버렸을 수는 있다. 허나 인간의 의로 참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의 기준을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은 실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의 육신의 몸이 불타면서 느끼는 고통은 정말 끔찍하긴 해도 그래도 길어야 수 분이 채 안 되어 끝이겠지만, 그 동일한 고통을 죽음으로 종결지을 수조차도 없이 영원무궁토록 겪어야 하는 '그곳'에 또 가게 된다면 얼마나 안타까울까??

마가복음 9장 끝부분에 기록된 “거기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느니라” 3콤보의 경고를 이 시간에 되새기도록 하자.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진짜로 정죄받은 죄인의 최후인 것이다. (단, 3콤보는 KJV에만 있음)

이런 얘기를 접하노라면, 이와는 반대로, 맹렬히 불이 붙었는데도 재가 되지 않고 멀쩡히 살아있는 떨기나무(출 3:2-3)가 얼마나 대단한 기적인지 실감하게 된다. 또한, 평소보다 연료와 공기를 7배나 더 공급해서 달궈진 맹렬한 용광로 불길로부터 멀쩡히 살아서 돌아온 다니엘의 세 친구들 이야기가 얼마나 경이로운지도 또 실감하게 된다. 하나님은 불을 만드신 분이고, 연소라고 불리는 급격한 화학적 산화 현상을 제어하여 예외로 적용할 능력도 응당 갖추고 계시기 때문이다.

성경에 따르면 결박만 없어졌을 뿐 그들은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았고 옷도 전혀 타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단 3:27). 오히려 그들을 용광로에 집어넣으려던 병사가 허둥대다가 불에 타 죽었다. 그러나 용광로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곧 성육신 전의 예수님이 그들을 미리 기다리고 있다 맞이했다니 얼마나 경이로웠을까? (세 명이 아니라 네 사람이 용광로에 있었다. 단 3:25) 그들은 왕이 부르기 전까지는 오히려 용광로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상 수많은 순교자들 중에 다니엘의 세 친구들에게만 예외적으로 기적을 허락해 준 것은 하나님의 경륜상의 특별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하나님께서 설령 자기를 불에서 구해내지 않고 죽게 허락할지라도 그래도 느부갓네살 왕의 형상에는 절을 하지 않겠다고, 한 치의 타협도 하지 않고 순교를 불사할 생각으로 단호하게 자기 신앙을 “먼저” 지켰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할 필요가 있다. (단 3:17-18)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찬양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지금까지 불, 화상, 화형, 분신자살, 순교 등 여러 섬뜩한 주제로 어찌 보면 두서없을 수도 있는 형태로 얘기가 나왔다.
글을 쓰면서 더욱 느꼈는데, 나는 인간의 알량한 의를 내세우지 않는 나의 종교, 아니 나의 신앙이 좋다. 복음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그 아무리 큰 죄를 짓고 그 어떤 급으로 하나님이나 교회, 기독교의 명예를 실추시켰다 하더라도 진심어린 눈물의 회개만 하면 다 용서하고,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사람을 다시 사용해 주신다. 그래서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과 회개 장면이 더욱 드라마틱하게 읽히는 것이다.

성경에는 너희(크리스천) 몸을 하나님께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는 권면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만(롬 12:1) 그건 무슨 신앙의 자유를 위해 세상 정부를 상대로 투쟁하고 시위대의 불화살이 되거나, 명예 회복을 위해 할복을 하라는 소리가 절~대로 아니다. 너도 십자가형 체험을 일부러 해 보라는 소리도 결코 아니다. 남이 먼저 날 죽여서 순교를 하면 했지, 기독교는 그 어떤 명분이라도 자해나 자결 같은 열사의 길을 권장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티를 내 봤자 우리 의가 설마 예수님의 의를 능가하겠는가?

기독교가 세상의 여느 시민 단체, NGO 단체와 다를 바가 없다면, 매 예배 때마다 아마 순교선열들에 대한 묵념도 하고, 각종 유명한 순교자들의 동상도 세워서 떠받들고 숭배하는 게 정상일 것이다. 그래서 천주교에서 하는 게 딱 이러한 발상에서 비롯된 성인 시성과 성인 숭배이다. 수많은 크리스천들을 잡아 죽인 종교이지만, 자기네들이 내세우는  자기네 순교자도 없는 건 아니어서..=_=;; 그러나 성경을 믿는 기독교는 애시당초 그렇게 사람을 떠받들지 않으며, 그건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죄 때문에 인간이 정말로 죽어야 할 때도 동물을 대신 피 흘려 죽게 해 주고,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성육신하여 인간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가르친다. 심청전에도 나오는 인신 공양 같은 게 절대로 없다. 다른 종교와는 차원이 다르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방 민족들을 전부 죽이고 흔적도 남기지 말고 파괴하고 멸하라는 잔인한 명령을 왜 내렸는지 아는가? 이 방법이 아니면 이방 민족들의 그런 악한 관행들을 뿌리뽑을 수가 없어서였다!

아무쪼록 육신의 장막을 벗고 사망도, 슬픔도, 고통도, 울부짖음도 없는(계 21:4) 세상이 올 것을 염원해 본다. 여기에는 불에 의한 사망, 고통, 울부짖음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불 및 불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을 생각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길을 다시 생각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오면 좋겠다.

NOTE:

'스님'은 님짜 때문에 높임의 뜻이 들어가기 때문에, 공식적인 글에서는 '승려' 정도가 적절하다는 지적이 있다. 그에 대해서 나는 좀 회의적이다. 그런 식의 논리이면 '장님'도 분명히 높임말이다. 그런데도 그건 또 정서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성경에 나오는 장님이나 소경도 요즘은 다 그냥 '맹인'이나 심지어 시각 장애인으로 바뀌는 추세이다.

님짜를 뗀 '스'는 말이 되지 않으며, '장'도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하나님'도 님짜를 떼면 말이 되지 않는다. 본인은 그런 단어들은 단어 전체를 한 형태소로 보며, 그렇게 의도적인 존칭이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본문에서 '스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음을 밝힌다.

그 반면에 '예수님' 다음의 님짜는 명백하게 존칭어미이다. 그래서 우리끼리는 글 쓸 때 예수님이라고 하지만 다른 불신자들은 그냥 예수라고만 부른다.

Posted by 사무엘

2012/04/19 19:22 2012/04/19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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