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체계 대통령 대수 대통령 개헌 내력 북괴
미군정 존 하지   소련정
1공 (1948) 1 이 승만 제헌헌법, 대통령 4년+1중임, 부통령, 간선 김 일성
2 1차, 대통령 직선제 (부산 정치 파동, 발췌개헌)  
3 2차, 초대에만 중임 제한 폐지 (사사오입) 8월 종파 사건 (정적 숙청)
2공 (1960) 4 윤 보선 3차, 의원내각. 최초의 졸속 아닌 합법적 개헌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4차, 1공 시절 잔재 청산??  
3공 (1962) 5 (vs 윤 보선) 박 정희 5차, 대통령 중심제로 회귀. 지방자치 사실상 사문화  
6 (vs 윤 보선)    
7 (vs 김 대중) 6차, 3선 개헌  
4공 (1972) 8 단 7차, 유신, 대통령 6년+무제한 중임, 간선 주체사상 명문화 (자가신격화)
9 독
10 출 (1979) 최 규하    
11 마 (1980) 전 두환    
5공 (1981) 12 8차, 대통령 7년 단임  
6공 (1988) 13 노 태우 9차, 대통령 5년 단임, 직선; 지방자치제 부활  
14 김 영삼   김 정일, 고난의 행군 (경제 파탄)
15 김 대중    
16 노 무현    
17 이 명박  
18 박 근혜  3공과 6공 그 어떤 선거 때보다도 많은 득표율로 당선됐지만..;; 탄핵소추 파면 김 정은

대한민국, 남한이라는 이 나라는 다음과 같은 점들로 인해 여느 나라들과 같지 않은 독특한 현대사를 보유하고 있다.

  • 20세기 중반에 주변 나라들과는 달리 매우 이례적으로 공산화되지 않았다.
  • 일본의 덴노 같은 정신적인 지주나 중심점이 있지 않으며, 그나마 있던 것도 조선이 망하면서 싹 사라졌다.
  • 미국처럼 초대 대통령이 2선만 하고 깔끔하게 물러났다거나, 쿠데타 한 번 없이 평화적으로 정권이 교체되어 오지 않았다. 미국은 도중에 중임 관련 규정만이 살짝 바뀌었을 뿐, 대통령의 임기 체계 자체가 우리나라 헌정사 같은 급의 큰 변화나 굴곡을 겪은 적은 없다.

본인은 노 태우 대통령 내지 서울 올림픽 시기가 스스로 경험한 기억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가장 먼 과거이다. 그 이전은 기록을 통해 간접 체험만을 한 선사시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은 5공 시절을 직접 경험한 기억이 없다. 노 태우의 바로 전임까지만 해도 대통령을 5년마다 한 번씩 뽑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라의 정치 체계가 완전히 달랐다는 얘기가 대단히 충격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잖아도 그땐 도대체 선거를 어떻게 했기에 이 승만이나 박 정희는 1~3대, 5~9대로 대통령을 그렇게 오래 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굳이 왜 기간과 대수를 나누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각 대통령에 대한 호불호야 개인의 정치 성향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런 들쭉날쭉한 자국의 헌정사 자체는 역덕후에게 뭔가 유사점과 차이점을 정리하고 분석할 만한 좋은 아이템인 것 같다.

가장 먼저 미군정부터 생각해 보자. 미군정은 기간이 짧고 존재감 없는 과도기여서 잘 부각되지 않지만, 알고 보면 단군의 후손들이 거의 전무후무하게 백인(미군정 사령관인 존 하지 장군)의 통치를 받은 시절이라는 점에서 굉장히 독특하다. 마치 신미양요가 분단 이전에 단군의 후손이 무려 미국과 군사 교전을 벌인 전무후무한 사건인 것처럼 말이다.
한국은 일제 식민지가 됐을지언정 제국주의· 군국주의에 입각한 서양 백인들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다는 점에서 전세계적으로 매우 드문 나라이다. 영국이라든가 스페인이라든가... 대한민국 역사상의 미군정은 저런 이념에 따른 지배는 아니었다.

그 뒤 우리나라 역사상 통치 기간이 가장 길었던 대통령 톱 3(쓰리)는 이 승만, 박 정희, 전 두환이다. 이 승만은 선출은 선거를 통해 무리 없이 됐지만 훗날 장기 집권을 위한 꼼수 개헌을 했으며, 박 정희는 쿠데타에다가 장기 집권 개헌을 모두 자행한 인물이다. 마지막 전 두환은 집권을 위한 쿠데타만 저질렀으며 임기 만료 후에는 군소리 없이 물러나긴 했는데.. 이것도 전국민적 저항이 없었으면 물러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분석이 있긴 하다.

초대 제헌헌법이 규정하는 대통령 체제는 보다시피 완전 미국 스타일인 걸 알 수 있다. 이 승만은 1~3대 대통령을 역임했는데, 위의 표에서 보다시피 매번 헌법을 자신의 당선에 유리하게 약간씩 뜯어고쳤다. 직선제는 그 자체는 나쁠 것 없는 선거 제도이지만, 아마도 꼴보기 싫은 야당 의원이 아니라 무지몽매한 민중을 돈과 서커스로 꾀어서 직접 투표를 시키면 여당에게 더 유리할 것 같아서 도입한 듯하다. 그래도 2선 때는 우리나라가 아직 전쟁 중인 관계로 정서적으로 어지간해서는 집권 여당을 바꾸지 않으려고 하니 이 승만의 당선에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3선 이상까지 하는 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심지어 롤모델 국가인 미국에서도 대공황에서부터 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경험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같은 사례 말고는 찾기 어렵다. 그러니 단순한 정치깡패 동원이나 부정선거만으로는 안 되고 또 헌법을 고쳐야 했다.

다른 대통령도 아니고 초대 대통령이 벌써 저런 짓을 하면 얼마나 안 좋은 선례가 남겠는가? 개인적으로는 그 고령에 그 검소한 구두쇠 대통령이 다른 돈과 권력, 명예를 탐해서 저런 짓을 한 건 아니고, 그냥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내가 꽉 붙들지 않고 야당에게 정권을 선뜻 넘겨 줬다간 남조선이 또 공산당 손에 넘어갈 것 같다."라는 자격지심 똥고집 때문에 저렇게 된 것 같다. 그게 아무 근거 없는 황당한 망상도 아닐 뿐더러 인의 장막은 그 기질을 더욱 부추겼을 테고. 게다가 신 익희(1956), 조 병옥(1960) 같은 야당 라이벌 정치인이 알아서 없어져 주기까지 한 덕분에 3선과 4선은 더욱 수월하게 넘겼다.

허나 도를 넘는 부정선거가 폭로되면서 12년 독재를 참다못한 국민들로부터 전국적인 혁명이 일어나자, 이 승만은 현실을 직시하고 하야를 선택하게 됐다. 제1 공화국은 자신은 부정부패와 독재를 저지르면서도, 참 아이러니하게 국민들에게는 국민학교에서부터 자유 민주주의를 가르치면서 오히려 자신을 무너뜨릴 만한 사상적인 기반을 듬뿍 마련해 줬다. 비록 현실이 시궁창이었을지언정 최소한 방향만은 올발랐던 셈. 이로 인해 남한과 북한은 서로 완전히 다른 길을 가게 됐다.

이 승만 얘기가 갑자기 좀 길어졌는데, 그 다음 출범한 제2 공화국은 우리나라 헌정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인 의원내각제 정부이다. 군부나 독재자의 입김이 개입하지 않고 나름 최초로 합법적(?)인 절차로 개헌도 이뤄 냈다. 이게 제대로 시행됐으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이 승만 시절과는 굉장히 딴판인 나라가 됐을 수도 있지만 박 정희 군사정권으로 인해 송두리째 뒤집어엎어지면서 이건 정말 짧고 존재감 없는 흑역사 헌정 체제가 됐다.

2공이 계속 유지되는 배경을 설정해서 대체 역사물 소설이나 영화가 충분히 나올 법해 보이지 않는가? 아예 조선이 망하지 않아서 입헌군주제가 계속 유지되는 상황을 가정하는 것보다야 더 현실적일 것 같지만.. 그래도 현실에서는 고종· 명성황후가 장 면· 윤 보선보다 존재감이 더 크고 대중적인 인기가 더 좋다.

2공은 '장 면 내각'이라고도 불린다. 다만, 장 면은 국무총리였고 대통령은 엄연히 윤 보선이었다. 이때 행해진 4차 개헌은 친일 반역자..는 아니고 1공 시절의 정치 깡패나 부정 선거 주동자 같은 반민주(반민족이 아님) 행위자를 처벌하고 청산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개헌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과거의 행위를 새로운 법으로 처벌하는 것이니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그때부터 있었다. 4공 시절 박통의 긴급조치 중 3호만은 그리 정치적이지 않고 생뚱맞은 민생 분야인 것과 비슷하게 4차 개헌은 나머지 개헌들과는 성격이 좀 다르다.

그 다음으로,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바뀌었다"의 주인공인 박 정희가 등장한다. 그는 대통령 선출은 훗날 전역 후 민간인 신분으로 된 것이고, 쿠데타 직후에 아직 군인 신분일 때는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도 역임했었다.
이때는 아직 나라가 워낙 못살고 사회 기강이 불안하고 6· 25 시즌 2가 또 벌어질지 모르는 지경이었기 때문에 "다 갈아엎자" 식의 군사혁명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지지를 많이 받았다. 지금처럼 길거리에 뛰쳐나와 촛불 들고 "민주주의가 죽었습니다" 이럴 상황이 아니었다. 전땅크의 쿠데타 때와는 달리 박통의 쿠데타 때는 누가 막 심하게 저항하거나 죽지도 않았다.

박통은 차근차근 자본을 유치하고 경제 개발을 해 나갔다. 경부 고속도로도 3공 시절에 완공되었다. 하지만 겨우 한두 대만으로는 임기가 너무 짧았다. 온갖 공작으로 야당 후보를 간신히 이겼는데 3선을 하자니 진짜 이 승만 시절의 사사오입 개헌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헌법을 또 날치기로 고쳐야 하게 됐다. 그리고 나중에는 헌정 체계를 전반적으로 다 자기 독재에 맞게 뜯어고치는 유신 헌법을 제정하게 되었다.

4공 체제에서는 단독 후보가 혼자 출마해서 꼭둑각시 의원들의 만장일치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할 수 있지만 국회는 대통령을 탄핵할 수 없었다. 그리고 대통령은 앞서 언급했듯이 긴급조치라는 필살기도 내릴 수 있었다.
우리나라 정치 제도가 이렇던 시절이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이건 정치적으로 엄청난 모험이었기 때문에 반발을 최소화하려면 경제 개발, 민생 안정, 굳건한 반공 안보, "우리식 민주주의" 등 뭔가 좋은 명분을 만들어서 '유신'이라는 브랜드명(?)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세뇌를 시켜야 했다.

박 정희가 암살당하지 않았으면 이 4공 체제가 도대체 얼마나 갔을지 모르겠다. 사실, 그가 9대 대통령의 예정 임기만 다 마쳤어도 이미 1984년이 되기 때문이다.

서울 지하철에서 5~8호선뿐만 아니라 3호선 양재-수서와 4호선 당고개도 시기적으로는 2기 지하철에 속하듯, 10대 최 규하와 11대 전 두환도 시기적으로는 이런 4공 체제에서 선출된 것이다. 그러나 박통 당사자 말고 다른 정치인들이 이런 무지막지한 독재 헌정 체제를 받아들일 리 없었으므로 이내 쿠데타가 일어났고 헌법도 업데이트 됐다. 그래서 4공 중에서 8~9대는 유신 시대이지만, 10~11대는 "국가보위 비상대책 위원회"라는 기구 휘하에 있었다.

박통이 암살 당한 뒤에도 1980년 서울의 봄은 오래 가지 못했다. 독재자가 물러났다고 해서 군대가 필요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대통령 임기와 관련된 개헌은 그 당대의 대통령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라는 가히 "신의 한 수" 소급 적용 금지 조항이 5공 시절 8차 개헌 때에야 드디어 추가되었다. 뭔가 "자백만이 형사 피고인에게 불리한 유일한 증거라면 그 자백은 인정되지 않는다", "피고인에게 유리한 법 개정만 소급 적용되고, 불리한 것은 적용되지 않는다"와 비슷한 맥락이다.

이런 우여곡절 시행착오를 겪은 뒤, 우리나라는 1987년 6월 항쟁을 계기로 6· 29 선언이 이뤄졌으며, 박 정희 유신 시절 이래로 없어졌던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하고 5년 단임제가 정착했다. (5공 12대 대통령 선거도 유신 시절 같은 노골적인 단독 출마만 아니지, 주요 야당 후보들은 감금당한 채로 관제야당 후보들이나 참여한 답정너 선거였기 때문) 당장 13대 때는 후보 단일화 실패로 인해 또 전 두환의 육사 후배인 노 태우가 당선됐지만, 14대 이후부터는 순수 민간인 대통령이 나오고 있다.

이 1987년 9차 개헌이 우리나라 역사상 유일하게 10년 넘게, 아니 30년 가까이 장수하고 있는 헌정 체계이다. 과연 이 상태에서 헌법이 부분 또는 전면 개정돼서 7공화국이 나올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총평

1. 본인은 위와 같은 내력을 감안하고도 이 승만과 박 정희 대통령을 매우 긍정적으로 본다. 전자는 0에서 1을 만든 사람이고 후자는 1에서 100을 만든 사람이다. 그 절망적인 가난과 시궁창인 국민 의식, 북괴의 위협 속에서 그만치라도 이룬 게 용하고, 그 정도 독재는 막 잘했다고 칭송할 수는 없어도 이해와 수긍이 된다. 지금 역으로 의회와 언론의 막장 횡포를 생각하면, 옛날에 그 상황에서 그 정도 의회· 언론의 통제와 독재 없이 적화통일을 어떻게 막고 경제 성장이고 민주주의고를 어떻게 이룰 수 있었을까? 독재 정권이 뭘 그렇게까지 망쳐 놓을 게 있었는지 이상한 피해의식 선동에 공감하지 않는다.

2. 물론 경제 성장을 이룬 뒤에 이 정도 국민의 희생으로 '직접 민주주의'를 이룬 것 역시 그 의미와 가치를 폄하하고 싶지 않다. 우리나라 역사는 충분히 자랑스러운 역사이다. 군사 정권이 잘한 것을 실드 치더라도 그들의 쿠데타에 희생된 사람들을 잊고 싶지는 않다(장 태완 같은).
하지만 오늘날은 민주화라는 게 그냥 별 명분도 없이 그저 권위에 대항하고 반역하는 걸 합리화하는 데 쓰이고 국가 체제를 부정하고 필요악을 없애자고 하고 더 심하게는 반정부 종북 세력에게 선동되고 이용당하는 추세가 명백하여 본인은 이를 경계한다. 옛날에는 민주화 운동을 하는 운동꾼들도 태극기를 들고 나오곤 했는데 요즘 어떤 사람들은 태극기와 애국가를 싫어하는 것 같다.

3. 북괴의 존재로 인해 대한민국은 무슨 분야든 천천히 여유롭게 발전을 할 수가 없어졌다. 여기서 우리나라 20세기 중후반의 대부분의 비극이 시작됐다. 또한 북괴 같은 저질이 존재함으로써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수준까지 하향평준화되었음도 명백히 사실이다. 뭔 무능과 비리를 저지르더라도 최소한 안보관· 사상 자체가 썩었거나 대놓고 북괴에다가 퍼주고 교류하자, 말만 번드르하게 포장해서 공산주의 하자는 놈들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그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니까. 이건 우리나라 정치판의 고질병으로 남거나, 아니면 진짜 나라가 망해서 고생해 봐야 해결될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7/05/28 08:33 2017/05/28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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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종 어차(1903)

황제의 즉위 무려 40주년을 기념하여 도입됐으며(참고로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60년이 넘었다만..), 이게 한반도 땅에서 최초로 달린 자동차이다. 차종은 '포드 모델 A'이라는 2도어 오픈카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 확실치 않으며, 자동차 역사 연구자 사이에서 그게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이런 거야말로 고종 실록 같은 데에 수록되지 않았나?

허나, 이 차는 얼마 못 가 러일 전쟁 기간 중에 소실된 관계로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 시절에 자동차는 얼마나 비싼 물건이었을 텐데, 명백한 사고 폐차도 아니고 러일 전쟁 자체가 한국 땅에서 벌어진 것도 아닌데(청일 전쟁이 아님), 도대체 그 당시에 국가 자산 관리가 얼마나 막장으로 되고 있었는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그래서 얘는 가정사로 치면, 첫째 자식보다 먼저 태어났지만 이름도 없이 일찍 죽은 형· 누나 정도의 존재감으로 취급된다.

2. 순종 어차(1913)

일제 강점기가 된 뒤에 데라우치 총독이 자기 차와 더불어 조선 황실에 대한 예우를 위해 선물해 준 차라고 한다. 1911년엔 고종 어차 시즌 2로 영국제 다임러 리무진이 들어왔고, 1913년에는 순종 어차 명목으로 더 큰 캐딜릭 8기통 리무진이 들어왔다. 고종-순종 부자가 타라고 차를 두 대 구매했으나, 실소유자는 곧 순종-왕비 부부로 바뀌었다. 도입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운전대는 명백하게 오른쪽에 있다.

이 차들에 대해서도 도입 시기에 대해서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는 건 아니다. 1911-1913년 도입이라고 하는데 다른 자료에서는 한참 나중인 1918년식이라는 얘기도 있고. 저래 뵈어도 엔진의 배기량은 5000cc가 넘는데 제원상 최대 출력은 30몇 마력밖에 안 됐다는 것 역시 참 안습하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자동차 기술의 한계가 거기까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차들은 엄연히 현재까지 국내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 된 자동차 실물이다. 그리고 저 차종 자체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차량이 전세계적으로 극소수인데, 한국에 있는 물건은 보존 상태가 양호해서 세계 자동차 역사의 관점에서도 유물로서 가치가 대단히 높다고 한다. 6· 25 전쟁의 포화까지 견뎠을 정도이니, 얼마 타지도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고종 어차 최초 도입분과는 운명이 정반대이다.

일단 아래 사진에서 왼쪽 것이 1911년도 다임러 리무진이고 오른쪽 것이 1913년도 캐딜락 리무진이다. 범퍼와 라디에이터 그릴의 모양이 서로 미묘하게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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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한때는 흙 묻고 빛 바래고 먼지가 수북이 앉은 채로 창덕궁 차고에 방치돼 있었으나, 1990년대 말에 현대 자동차와 영국의 올드카 복원 전문 업체가 협력해서 표면을 광 내고 대대적으로 보수를 했다. 복원하는 덴 시간이 5년에 가깝게 걸렸으며 비용도 10억 원가량이 들었다고 한다.

복원 작업은 2001년 말에 완료됐으며, 이 덕분에 어차는 완전히 새 차처럼 변했다. 캐딜락의 경우 원래 검정이었는데 표면 도색도 빨강으로 바꾼 듯하다. 현재 이들은 경복궁 안의 국립 고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아래 사진은 캐딜락 리무진의 before과 after를 대조한 것이다. 그야말로 환골탈태를 했다. 저 차들이 191X년대에 갓 들여 온 직후에는 저렇게 반들반들 윤이 났을 것이다. 자유의 여신상이 지금 시퍼렇게 녹이 슬었다고 해서 그게 처음 만들어지던 당시에도 퍼렇지는 않았으며(동상은 원래 갈색· 구리색임), 옛날 사진이 지금 누렇게 바래 있다고 해서 옛날 그 당시의 풍경 자체가 누렇게 바랬던 건 아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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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 일성 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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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다름아닌 북한의 수괴인 김 일성이 몰고 다니던 승용차이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구소련 시절의 자동차이다.
구소련이라 하면 총(AK47!)과 비행기(AN-??)와 우주선은 만들었어도 정작 고유 모델 자동차를 만들었다는 정보는 영 생소하다. 저건 ZIS 110이라는 모델로, 1948년에 김 일성이 스탈린으로부터 선물받았다고 한다.

김 일성은 이 차를 즐겨 몰고 다녔다. 6· 25 전쟁 중에는 안전한 후방에서 보고나 받고 명령만 내린 게 아니라, 경북 왜관까지 남하해서 전선을 시찰하고 북한군 병사들을 지휘했다고 한다. 고속도로도 없던 와중에 참 멀리까지도 내려왔다. 낙동강을 사수하네 마네 하던 리즈(?) 시절엔 그야말로 한반도 전역의 적화통일이 코앞에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랬는데 1950년 가을, 인천 상륙 작전으로 인해 전세가 역전되었고 김 일성은 시급히 후퇴를 해야 했다. 평양까지 빼앗기고 계속 북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앞은 강으로 가로막혀 있고 다리가 없고 차량으로는 도저히 건너갈 수가 없었다. 다른 길로 뺑뺑이를 칠 수도 없고.. 그래서 김 일성은 (아마 눈물을 머금고) 자기 애마를 어쩔 수 없이 버리고 도망쳤다고 한다. 난 차량이 남한에서 노획되었는 줄 알고 있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이 차량은 1950년 10월 22일, 평양에서 동북쪽으로 약 100km쯤 떨어진 청천강 근처에서 남한 국군(6사단 수색대)에 의해 발견되고 노획됐다. 국군이 38선을 최초로 넘어서 국군의 날이 시초가 된 10월 1일 이후로 정확히 3주 만의 일이다.
이걸 최초로 발견하고 신고한 병사가 누군지를 인터넷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검색은 더 귀찮아서 안 하련다. 그 병사는 당연히 큰 포상을 받았다.

김 일성의 리무진은 대한민국의 국고로 귀속됐다. 김 일성은 차만 버렸지 차키까지 놔 두지는 않았겠지만, 그 시절의 옛날 차들은 지금 같은 첨단 이모빌라이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스타터 모터의 배선만 연결하면 강제 시동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차가 그때 이후로 줄곧 한국에서 애지중지 보존되어서 반공 안보 교육(?) 아이템으로 쓰였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이 승만 대통령은 1951년, 미 8군 사령관이던 월튼 워커 장군의 부인에게 이 차를 선물로 줬다. 워커 장군은 잘 알다시피 1950년 12월에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교통사고로 한국 땅에서 순직했기 때문이다(교전 중 전사는 아니고..).

부인 되시는 분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차를 인수했지만 차는 곧 고장 났다. 냉전 중에 미국에서 적성국인 구소련제 차량은 부품을 구해 유지 보수를 하기도 어려웠던 관계로, 그녀는 차를 또 처분해 버렸다. 그렇게 김 일성 리무진은 미국 땅에서 정처 없이 30년 가까이를 방황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차가 사고가 나고 폐차됐다면 김 일성 리무진은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그랬는데 사단법인 유엔 한국 참전국 협회라는 단체에서(대표: 지 갑종) 1970년대에 백방으로 수소문을 한 끝에 이 차의 소재를 미국에서 찾아 냈으며, 뉴저지에 소재한 어느 자동차 수집상으로부터 거금을 주고 1982년에야 그 차를 한국으로 도로 역수입을 해 왔다. 먼 나라로 수출되었던 포니가 20여 년 뒤에 드라마 촬영을 위해 도로 역수입된 것처럼. 그때 고맙게도 대우 그룹 김 우중 회장이 재정적인 지원을 해 줬다고 한다.

또한, 그때 이래로 지 회장이 러시아 엔지니어까지 초청해서 관리를 잘 한 덕분에, 김 일성 리무진은 현재도 간단한 정비만 하면 곧장 주행이 가능할 정도로 상태가 좋다고 한다. 이분은 6· 25 전쟁 휴전 60주년을 얼마 남기지 않았던 2013년 7월 16일, 차량을 전쟁 기념관에다 기증했다. 덕분에 우리는 전쟁 기념관에서 김 일성 리무진과 동시에 곧 소개할 이 승만 리무진도 나란히 관람할 수 있다.
참고로 6· 25 전쟁을 계기로 김 일성은 자기 애마뿐만 아니라 강원도 고성에 있던 자기 별장도 빼앗겼다.

4. 이 승만 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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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일성 차량에 비해 이 승만 리무진은 설명할 게 훨씬 없다. 1956년에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으로부터 선물받은 의전용 방탄 캐딜락이다. 그러므로 전쟁 중에 굴러다닌 건 아님. 애초에 이 승만은 6· 25 때 피난도 자차가 아니라 열차를 타고 갔다.

얘는 어차처럼 창덕궁에서 보관되어 오다가 2000년부터 전쟁 기념관으로 옮겨져 전시되었으며, 2013년경에는 역시 때 빼고 광 내는 부분적인 복원 작업을 거쳤다고 한다. 이 작업은 당연하지만 구한말 어차를 복원하는 것만치 힘들고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차 역시 당장 시동 걸고 주행이 가능할 정도로 정태를 넘어 동태보존 상태라고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6/04/28 08:31 2016/04/28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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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0월 26일은 안 중근 의사가 중국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쏘아 쓰러뜨린 날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딱 70년 뒤, 1979년 10월 26일은 박 정희 대통령이 부하인 중앙정보부장 김 재규의 권총에 맞고 절명한 날이다. 10.26 사태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우리나라의 이후 역사를 크게 바꿔 놓은 사건이었다.

박통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1961년부터 시작된 18년간의 군사 독재가 이제 좀 끝이 나는가 싶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애초에 우리가 우리 힘으로 일제로부터 해방된 게 아니었던 것만큼이나 이것도 시민의 힘으로 직접 독재 정권을 끌어내린 게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박 정희가 남긴 뒷자리는 그의 심복이던 전 두환이 냉큼, 날름, 덥석 차지하게 됐다. 어차피 사람만 바뀌었지 또 다른 군사 독재인 건 마찬가지다. 오늘은 그 얘기를 좀 더 늘어놓아 보겠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박통은 삽교천 준공식을 마치고서 서울로 돌아와서 피로도 풀 겸 궁정동 안가에서 회식을 했다. 최측근 참모들과 더불어 20대 중반의 어여쁜 여대생, 그리고 비슷한 연배의 잘나가던 여자 가수까지 데려 와서 말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이 회식은 누가 박통에 대해 험담하는 것처럼 그 정도로 사치스럽고 음란방탕한 자리는 아니었다. (저걸 갖고 험담하는 사람들은.. 반대로 여자와 관해서 일체의 난잡한 면모가 없었고, 극도로 근검절약 검소했으며 회식 자리에 기생이 아니라 각자 자기 부인을 데려 오게 한 전직 대통령을 좋아하느냐 하면, 그것도 어차피 아니다.)

박통은 알다시피 수 년 전에 영부인을 불의의 사고로 잃은 뒤부터 멘탈이 많이 피폐해졌다. 곁에서 쓴소리 조언을 해 주는 사람이 없어지면서 자제력을 잃고 예전보다 점점 더 과격 고집불통 폭주끼도 보이기 시작한 건 사실이어 보인다. 박통은 육 영수 여사를 두고 "지금 내 옆에 제일 상대하기 까다로운 골수 야당 총수가 있소" 이런 농을 치기도 한 바 있다.

이 와중에 암살 가해자인 김 재규 중앙정보부장은 경호실장이던 차 지철과 박통에 대해서 쌓인 앙금이 많은 상태였다. 그러다 무슨 자극을 받았는지 이 패거리들을 오늘 회식 자리에서 해치워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안 그래도 권총까지 챙겨 가서 죽일 기회만 노리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회식 자리에서 차 지철과 박통은 합심해서 김 재규를 코너로 몰아 넣었다. "야당이며 반대파들이 이렇게 정권에 대항하면서 날뛰고 있는데 중정은 지금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좀 더 강하게 짓밟아 버리지 못해?" 이렇게 갈구고 있으니 김 재규가 속이 얼마나 뒤집어졌을까?

결국 김 재규는 차 지철과 박통을 권총으로 쏘고 말았다. 그에게서 지시를 미리 받은 그의 부하들은(박 선호, 박 흥주 등) 총소리를 듣고서 주변의 경호원들을 사살해서 궁정동 안가를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김 재규는 사살 계획 자체는 이렇게 치밀하게 준비해서 결국은 성공했다. 그러나 일을 저지른 뒤에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멘붕· 당황· 우왕좌왕 하고 패닉에 빠져 버렸다.

그는 차 지철이 하극상을 벌여서 원조각하를 살해했으며, 자기는 이를 저지하다가 정당방위 차원에서 그를 사살했을 뿐이라고 얼~~마든지 의심 안 사고 조작과 은폐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위장과 조작의 달인인 중앙정보부의 최고 수장이었으니 말이다. 왜 저렇게 하지 않았는지는 정말 제1의 미스터리이다.

그리고 더 따지고 보면, 박통은 암살 안 당했으면 대통령을 도대체 언제까지 해 먹었을지도 궁금해진다. 이건 제2의 미스터리이다. 할 거 다 하고, 1990년대에 수도 이전과 올림픽 유치까지 다 해 놓은 뒤, 7· 80대 나이쯤 됐을 때 물러나겠다고 증언한 기록도 있다고 하는데 출처는 지금 기억이 안 난다. 뭐 어쨌든..

김 재규는 일을 저지른 뒤 상황을 자기에게 최대한 유리하게 조작하기 위해서는 자기 휘하의 남산 중정으로 갔어야 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보안을 위해서는 군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중정 대신 육본으로 가는 일생일대의 패착을 뒀다. (정확히는 현장에 같이 초청했던 정 승화 육군 참모총장의 제안을 별 생각 없이 따른 것)
그는 누가 각하를 죽였는지 대놓고 거짓말은 차마 못 한 채, 어영부영 나라가 위기에 빠졌다고 계엄드립만 늘어놓다가 군 수뇌부 앞에서 탈탈 털렸다.

원조각하의 죽음이 확인되고 더구나 이게 북한이 아닌 내부 소행임이 확실시되자, 군 내부에서는 평소에도 월권과 하극상을 일삼던 차 지철의 도발을 먼저 의심했다. 그리고 혹시 군 내부에 다른 차 지철 파 쿠데타 세력이 있는지 의심했다. 그러나 입막음을 당부받았던 김 계원 비서실장이 양심의 가책을 견디다 못해 김 재규의 단독 범행(= 중정 말고 군 내부에 다른 배후 세력은 없는)을 정 승화 장군에게 몰래 실토하는 바람에, 김 재규는 그대로 인생 운지하고 말았다.

김 재규의 패착은 북한에서 6·25 전쟁을 조장했던 박 헌영의 패착과 거의 동급 수준이었다.
사건을 제대로 은폐하지 못한 채 저런 허술한 행동에 뜬금없는 기승전 계엄 얘기만 한 걸로 미뤄 보면, 그는 대통령을 살해한 와중에도 일말의 국가 안보 걱정은 최우선으로 한 듯하다. 다만, 무슨 민주화를 위해서 각하를 쐈다는 말은.. 글쎄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사건 당일엔 차 지철에 대한 증오심이 더 컸지, 그런 거창한 이념까지 생각할 겨를은 없었을 것 같다.

갑자기 철권 독재 대통령이 없어지고 경호실장과 정보부장까지 없어지니 나라에는 엄청난 통치 공백이 생겼다.
이 와중에 최 규하는 우리나라 역사상 제일 존재감 없는-_- 대통령으로 기록됐지만, 한편으로 정당 활동이 없이 학자와 관료 테크만 거쳐서 국무총리-대통령 권한대행-대통령에 오른 유일한 사람이다. 덩치 크고 엄청난 학식과 인품의 소유자이고.. 그는 스펙은 참 훌륭했지만 국가 지도자로서는 지지 기반이 너무 없고 우왕좌왕했다.

뭐, 결과적으로는 김 재규의 요청대로 전국에 계엄이 선포됐다. 그리고 10.26 사태의 수사권을 쥔 군부가 사실상 권력의 실세가 됐다. 미우나 고우나 군부 말고 다른 대안이 없으니...
정 승화가 계엄 사령관이 됐고, 그 밑에 육사 동기들 중에 제일 잘나가던 전땅크가 10.26 수사본부장이 됐는데... 그는 이 엄청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적절히 활용하여 뒤통수를 쳤다.

"어? 정 승화 저 사람도 그때 현장 근처에 있었다면서 왜 김 재규를 적극적으로 저지하거나 신고하지 않았을까? 혹시 이 사람도 쿠데타 가담 세력 아냐? 김 재규에 대한 체포 명령을 내린 당사자라지만 좀 냄새가 나는데?"
이렇게 어거지를 씌운 게 12.12 군사반란의 본질이다. 군대 인사 발령이 끝나고 10·26 사건에 대한 수사도 끝나 가던 12월 12일이 사고 치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였다. 이후 스토리는 다들 아시는 대로...;;

쿠데타를 일으키는 주범이 다른 멀쩡한 사람을 도리어 쿠데타범으로 몰아 가다니.. 역사적으로 정치판 싸움은 이런 식의 암투로 진행된 듯하다. 선배고 후배고, 내 부대 네 부대 구분 따위도 없었다.
제5 공화국 드라마의 명대사인 "야 이 반란군놈의 새X야! ... 내 지금 전차를 몰고 가서 네놈들 머리통을 다 날려 버리겠어!"(장 태완 장군)도 정 승화 참모총장이 반란군에게 억류 당해 있을 때 나온 대사이다.

전대갈· 전땅크, 29만원 아저씨는 독재(?)를 했다지만 전임인 이통, 박통에 비해서야 존재감이 덜하며 우파로부터도 그 전임들만치 긍정적인 평판은 못 받는 전직 대통령이다. 군대를 장악한 뒤에 정권도 장악하고(5· 17 쿠데타) 최 규하 대통령까지 완전히 사임시키기까지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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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16년 1월 현재 일단 생존 중인 최고 오래 된 전직 대통령이다. 몸 관리 잘한 군인들이 대체로 그런 것처럼(1920년대생인 백 선엽 장군도 아직 살아 있다!) 그는 역시 얄밉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안전한 저택에서 잘 먹고 잘 살면서 천수를 누리다 갈 것으로 예상된다. "나한테 당해 보지도 않고 말이야" 드립을 칠 정도의 여유와 멘탈갑 센스-_-도 갖추신 지 오래다.. 저 기백과 배짱을 보라. 그러니 하야· 암살과는 차원이 다른 가성비를 얻었다.

전땅크에 대해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아저씨는 권좌에 앉기 위해서 쿠데타를 일으켰지, 일단 대통령이 된 뒤에는 7년 단임만 하고 진짜로 물러났다는 점이다. 집권 도중에 장기 통치하려고 헌법을 뜯어고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1987년의 6월 항쟁도 개헌을 통해 '5년 단임 직선제'라는.. “후임 대통령의 선출 방식”을 민주화하기 위한 시위였지, 전땅크의 장기 집권 자체를 규탄하는 시위가 아니었다.

독재자 타이틀이 있는 전임들의 행적과 비교하면 이렇다.

  • 이 승만: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 자체는 적법하게 됐지만, 2대· 3대에 4대까지 연임하는 과정에서 사사오입 개헌에다 야당 정치인 탄압 등 지저분한 짓거리가 끼어 들어갔다. 결과적으로 12년 동안 1~3대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이 시기를 헌정 시스템 기수로는 제1 공화국이라고 부른다. 이 사람은 하야 후 명목상 노환으로 자연사하긴 했지만 타지에서 최후를 맞이했으며, 귀국이 좌절되면서 더 건강이 나빠지기도 했다. (쿠데타 ×, 장기 집권 목적 개헌 )
  • 박 정희: 정말 통 크게 해 먹었다. 집권 때도 그 당시에는 혁명이라고 불린 5· 16 쿠데타를 일으켰고, 집권 중엔 유신 헌법 버프를 자가발동하여 총 무려 18년 가까이 집권했다. 5~9대 대통령을 역임하고 제3과 제4 공화국을 새로 썼다. 대한민국의 헌정 역사상 전무후무할 것이다. 말년엔 잘 알다시피 부하에게 피격 당했다. (쿠데타 , 장기 집권 목적 개헌 )
  • 그리고 전땅크: 이 승만과는 반대로 집권 과정에서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집권 중에는 다른 뻘짓 없이 임기를 채우고 물러났다. 아주 해피하게 살다가 갈 것으로 예상. (쿠데타 , 장기 집권 목적 개헌 ×)

(어느 나라건 독립 운동가 출신 초대 대통령은 독재자로 흑화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어떻게 해서 이룬 독립이고 어떻게 해서 세운 나라인데, 불안해서 선뜻 후임에게 놔 주고 싶지 않은 심정을 본인도 나이가 드니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처음부터 2선만 딱 하고 물러난 미국의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참 이례적인 대인배라고 봐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저렇게 XO, OO, OX를 거친 뒤에야 현재의 대통령들은 일관되게 XX가 유지되고 있다.
뭐, 전땅크는 명목상 11, 12대 대통령이지만, 중간에 연임을 해서 두 대가 커버된 건 아니다. 집권 초기에 헌정 시스템이 바뀌었기 때문에 대수가 올라간 것이다. 5공이라고 불리는 이 사람의 실질적인 통치 기간은 12대가 전부인 게 맞다.

박통에서 전땅크로 넘어간 과정을 살펴본 본인의 생각은 이러하다.
10.26 사태는 남한 내부에 정말 심각한 수준의 권력 공백과 혼란을 그것도 너무나 갑작스럽게 야기했다. 이 승만이 하야하던 시절보다도 상황이 훨씬 더 심각하다. Windows API에다 비유하자면 ExitProcess와 TerminateProcess의 차이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틈을 노려 북한이 도발을 하지 않은 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또한 정치 불안으로 인해 상황이 얼마든지 더 나빠지고 혼세마왕 강림 급의 헬게이트가 열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나마 피해가 저 정도밖에 발생하지 않은 쿠데타(?)로 그럭저럭 내부 수습과 권력 이양이 된 것도 무척 다행이다.

이 시절에 벌어졌던, 일부 반공을 빙자한 인권 유린은 당연히 욕 쳐먹어야 하고 두고두고 까여야 함이 마땅하다. 그 중 최악의 흑역사는 영화를 능가하는 병맛을 자랑하는 수지 킴 간첩 조작 사건이 아닐까 한다. 어휴..;; 성경에서 다윗이 아무리 성군이었다 해도 우리야의 유족에게는 석고대죄해야 할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전땅크 정권도 특정 개인에게 씻을 수 없는 큰 잘못을 저지른 게 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땅크를 비롯해 5공 주역들이 일차적으로 근본적으로, 민생을 생각하고 여전히 경제를 일으키는 독재를 했다는 건 감사할 점이다. 5공 시절의 물가 안정과 경제 호황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

우리나라가 뭐 언제부터 그렇게 성숙한 민주주의를 시행해 왔다고.. 군부 말고 무슨 탄탄한 대안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들 군인 출신 정치인들이 뭐 잘했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반대로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민주주의를 치명적으로 유린했다는 식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난 개인적으로 신앙의 자유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정치 체계는 높으신 분들이 뭐 어떤 방식으로 다스리든 별 상관 안 한다. 일단 독재자의 개막장 자기우상화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뜻이므로.).

이런 이유로 인해 본인은 "옛날에는 지금처럼 대통령을 5년마다 한 번씩 뽑는 게 아니었다. 군사 독재가 횡행했다. 반공을 빌미로 억울한 사람들이 빨갱이로 몰려서 고초를 겪었다." 이런 말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옛날에는 위생이 안 좋아서 집집마다 머릿니를 잡고 쥐를 잡아서 꼬리를 할당량 채워서 학교에다 제출해야 했다. 자동차는 물론이고 텔레비전도 사치품 중의 사치품이었다. 결핵이나 천연두, 콜레라 같은 후진국형 질병이 횡행했다. 서민이 해외 여행을 하기도 훨씬 더 어려웠다. 사회· 조직 문화가 지금보다 훨씬 더 험악하고 폭력적이었다." 이런 말하고 하등 전혀 다를 바 없다.

과학 기술 없고 돈 없고 못 살던 시절에 무슨 일인들 없었겠는가? CCTV도 유전자 감식도 없고, 공산주의자의 흉악한 이간질에 서로 믿을 수가 없고, 한두 사람의 잘못이나 악행 때문에 집단 전체가 망하게 생겼는데 언제까지나 신사적이고 인간적으로만 사람을 대할 수가 있었겠나? 그땐 어쩔 수 없이 그랬고 일부 부작용도 있었지, 그 시절의 정치 행태가 그~렇게까지 이를 물고 비관할 정도가 아니었다는 게 본인의 지론이다. 원래부터 현실이 시궁창이었지, 뭔가 잘되려는 걸 누가 망쳐 놓은 게 아니라는 거다. "김 구만 대통령 됐으면, 장 준하만 대통령 됐으면 민주주의가 뭐 어떻고, 친일 척결만 잘했으면.." 이런 식으로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라는 건 정치 제도이고, 정치 제도는 생각보다 아주 상대적인 개념이다. 까놓고 말해 세종대왕 급의 아주 유능한 1인 독재자가 있으면 굳이 n년 주기로 대통령을 힘들게 새로 뽑아야 할 필요가 있겠나.. =_=;; 하다못해 지금도 이 사회 시스템으로는 답이 없으니, 확 다 갈아엎고 강력한 독재자가 좀 나와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물며 그 못살던 시절에는 어떠했겠는가.
대통령 직선제라는 건, 뭐 이뤄낸 건 잘한 일이다만, 이게 무슨 북괴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거나 5천 년 가난을 물리친 것만치 그렇게까지 위대하고 훌륭한 일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일면 독재 미화 발언처럼 들릴지 모르는 말이나, 세계 역사에서 '진짜 악의 악질적인 독재자'가 하는 짓거리를 객관적으로 관찰해 보면 저건 절대로 근거 없는 실드가 아니다. 정말 작정하고 몇천~몇만 명 이상 짓밟아 버리면 민중 항쟁, 시위? 그런 건 애초에 일어나지도 못한다. 북한과 캄보디아를 생각해 보아라. 우리나라가 저 상황에서도 예외적으로 복 받은 거 맞다. 함부로 여기나 북한이나 똑같다는 소리 하지 마라.

10여 년 전에 MBC에서 방영했던 제5 공화국 드라마는 지금 다시 봐도 굉장히 고퀄로 잘 만들어지긴 했다. 실제로는 5공보다 여전히 4공 시절 이야기가 더 많긴 하다만..
또한, 논조가 그냥 일방적으로 전땅크와 신군부를 병크 저지른 것, 잘못한 것만 부각시키는 게 목적이라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정말 객관적으로 그 시절의 역사를 다룰 의도라면 최소한 1983년의 아웅산 테러라든가 이 윤상 군 유괴 사건도 다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유괴범은 듣거라. 아이가 살면 너도 살고 아이가 죽으면 너도 죽는다"라는 대사를 이 덕화 씨가 읊었으면 재미있지 않았겠는가?
그럼 다음 잡설들을 추가로 늘어놓으면서 글을 맺도록 하겠다.

(1) 난 박통의 최종 계급이 투스타인 걸로 지금까지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전역 직전에 명목상 포스타로 쾌속 진급을 한 뒤에 전역했다. 이건 전땅크, 심지어 후임 노 태우도 마찬가지. 다 예비역 대장이다.
이러니 김 영삼이 자기 정권 코드 네임을 '문민정부'라고 지었겠다 싶다. 군인 출신이 아니라 순수 민간 정치인이 정권다운 정권을 역사상 처음으로 잡았다고 말이다.

몇 달 전에 고인이 된 김 영삼 전대통령은 교회 장로여서 그런지 이 승만에 대해서는 좋게 말한 반면, 직접적으로 자기를 탄압했던 박 정희에 대해서는 늘그막까지도 혹평과 악담 스탠스를 바꾸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박통 말기에 이 정권은 얼마 못 가 무너질 것이고, 그것도 아주 비참하게 무너질 거라고 저주를 내리기도 했다.
보통은 둘 다 좋아하거나 둘 다 싫어하고, 하나만 고르라면 차라리 박 정희를 이 승만보다 더 선호하는 경우가 많은데 김 영삼과 같은 성향은 좀 흔치 않아 보인다.

(2) 이 승만, 장 면, 윤 보선, 최 규하, 노 태우는 다 영어를 작살나게 잘한 정치인이었다. 학구파 기질이 있었다. 거기에다 지금 레이디 가카도 영어를 포함해 외국어에 일가견이 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고.
그에 반해 전땅크는 공부 타입은 아니고 체력, 리더십, 인맥 연줄, 사회성처럼 사업가나 정치인에게 어쩌면 더 필요한 아날로그스러운 자질이 충만했던 타입이다.

(3) 전땅크는.. 좀 얄미운 구석은 있다만, 그래도 대통령으로서 인사 배치와 리더십은 나쁘지 않았다. 군인이던 시절엔 1.21 사태 때 큰 전공 세우고 나중에 그의 주도하에 제3 땅굴까지 발견했다. 그리고 아까도 잠시 언급했지만, 집권 중에 이 윤상 군 유괴 사건을 잘 해결하고 사형 집행 잘해서 사회 정의를 실현한 것도 잘한 점이다.
잘한 건 잘한 거다만.. 돈 많은 거 알고 있다, 선고받은 뇌물 추징금은 빨랑 뱉어라. -_-;;

Posted by 사무엘

2016/01/29 08:44 2016/01/29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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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여러 번 글을 통해 내 의견을 피력했듯이.. 대한민국의 건국/초대 대통령인 이 승만 박사를 매우 존경하며 그는 잘못한 것보다 잘한 것이 훨씬 더 많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는 지엽적인 병크나 비리에도 불구하고, 정말 기적적으로 건국되고 지켜지고 유지된 자랑스러운 나라이다.

김 구의 <백범일지>만 읽다가 이 승만의 <독립정신>도 접하고 나면, 정말 독자의 지성과 품격, 안목까지 한 단계 올라갈 수 있다. 그 꼬질꼬질하던 옛날 구한말에 벌써 자유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 경제를 생각하고 한 나라의 이상향을 옳은 방향으로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니. 사악한 공산주의자들의 흉계를 외교력으로 저지하고 나라의 반쪽이라도 붉게 물들지 않게 지켜 낸 것을 감사하게 된다.

이 박사에 대해서 독립 운동가 시절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악의적인 흠집과 필요 이상의 온갖 중상모략에 대해서 본인은 거의 대부분 실드가 있고 대응책이 있다. 임시정부 시절에 부린 똘끼라든가 친일파 등용(?) 정도는 얼마든지 해명 가능하다.

중국의 마오 쩌둥을 생각해 보자.
그는 잘못된 경제 정책으로 수천만 명의 인민을 굶겨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대약진운동에 문화혁명 홍위병 등 온갖 삽질 개뻘짓을 자행하여.. 196, 70년대에 우리나라가 반사 이득으로 경제 도약을 할 기회까지 줬다. 6·25 때 일본이 덕을 본 것만큼이나 우리도 결과적으로는 중국의 삽질의 덕을 본 거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오 쩌둥은 중국 내부에서 여전히 공7 과3 정도의 국부로 예우받고 있고, 심지어 국내에서도 마오 쩌둥 존경한다는 사람까지 있다. -_-;; 정신 좀 차리시길. 마오 쩌둥은 6·25 때 중공군 파병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멸공 북진통일의 기회를 영원히 박탈해 버린 적장이다! 이 사실을 절대 잊지 말라.

“비록 적장이지만 훌륭하다” 급의 다른 실드는? 내가 보기엔 글쎄...??
그리고 인간적으로 훌륭한 면모가 있다고 해서 당신은.. 히틀러까지는 아니더라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이토 히로부미 같은 사람을 존경하고 흠모하고 위인전에까지 선뜻 올리시겠는가? -_-;;

아무리 사람마다 가치관과 견해가 차이가 날 수 있다 해도, 마오 쩌둥은..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그 누가 보더라도 이 승만보다 더 존경할 만한 인물은 절대로 아니다. -_-;;;; 최소한 한강 다리 폭파 병크보다는 우리에게 훨씬 더 큰 해악을 끼친 인물이다.
저건 6·25 때 보도연맹인지 국민방위군 같은 거 일일이 다 끄집어내서 때리는 잣대와 동일한 잣대라고는 절대로 볼 수 없다. 내 말 틀렸나?

이런 잣대하고만 비교해 봐도 이 승만에 대한 잣대만 비정상적으로, 불순한 의도로 지나치게 가혹하다고밖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 걍 건국하지 말고 간판 내리고 김 일성 치하에서 통일 조국 이루며 살았어야 했다”가 아닌 이상.. 그 시절에 불가능했던 일을 못 이뤘다고 헛소리 하는 건 건전한 생각이 아니며 이성적인 판단도 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난 이 승만을 미화, 우상화, 숭배 따위를 하지 않는다. 단지, 멀쩡한 애국자 초대 대통령에게 별 희한한 생트집 구실로 부관참시를 하고, 그냥 긍정적인 면모를 얘기만 하면 미화네 숭배네, 일베충 뉴라이트 수꼴 이 따위 헛소리를 해 대며, 저 사람 독재가 김 일성 독재와 똑같았다는 둥의 역사 왜곡, 능멸, 난도질을 하는 꼴을 보니 피거솟을 느끼며 그걸 극도로 혐오하여 반박할 뿐이다.

뭐 아무튼.
그렇다고 해서 이 승만이 대통령으로서 실책이 없는 건 당연히 아니며 잘못한 것도 적지 않다. 설령 아랫사람 부하 잘못이라고 해도, 그런 병신 같은 부하들을 통제를 못 하거나 인재 등용을 제대로 못 한 건 대통령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노 무현 전대통령을.. 법조인으로서는 좋아하지만 그는 대통령 그릇이 아니었다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듯, 이 승만도 외교 독립 운동가로서만 좋아하고 대통령으로서는 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그 정도야 충분히 정당한 비판이고 이견이다. 그 사람이 외교를 잘한 것만치 내치를 잘하지는 못했다는 것은 나도 응당 동의하는 바다.

다만, 내가 주장하는 것은 이 승만의 정치적 과오는.. 최소한 누가 자꾸 헐뜯는 것처럼 절대 악의적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과정에서 발생한 돌발행위나 과잉진압, 너무 위급하고 나라가 가난하고 열악해서.. 피아 식별도 안 되고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 여건이 아니어서, 인재를 도무지 구할 수 없어서, 지금 뭐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들을 대상으로 당장 뭐든지 다 보장하고 허용하기에는 빨갱이들의 거짓 선동이 너무 위험해서 등등등...으로 대부분~~ 실드가 쳐진다.

옛날에 했던 비유를 또 들겠다. Windows 95가 32비트 선점형 멀티태스킹 OS임에도 불구(자유 진영 민주주의)하고 도스와 16비트 코드가 섞인(구시대 악습, 친일 경찰 간부, 일부 자유 제약 등등) 불안정하고 BSOD가 만연한 이상한 제품으로 만들어졌던 건.. 그 당시 일반 “사용자들의 컴”이 Windows NT / OS/2를 도저히 돌릴 수 없는 환경이었고 도스 호환성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 없다. 지금 컴퓨터 환경을 갖고 옛날에 Win95를 만든 엔지니어를 욕하는 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냐? 그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 승만이 악의적이지 않았다는 건 차라리 햇볕 정책이 비록 실패이지만(북한 체제나 주민 인권 개선에 아무 도움도 안 됐고 우리 돈만 엄청나게 축났고, 도리어 그게 다 핵 개발로 돌아왔고.. -_-) 악의적이지는 않았다고 믿는 것보다는 100배 이상 훨~씬 더 쉽게 믿을 수 있다. 자, 더 흥분할 것 같으니, 개인의 정치색이 들어간 논쟁은 여기에서 커트하도록 하고.

본론으로 돌아오면, 잘 알다시피 북한의 갑작스러운 6·25 남침 때 우리나라 정부와 군대는 우왕좌왕 허둥대다가 영남 지방까지 밀려나면서 졸전을 거듭했다. UN군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그때 대한민국이 지도에서 지워질 뻔했다. 그런데 이게 우리 입장에서는 꼭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던 사건이기만 한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이 승만 대통령은 저 북한 빨갱이들이 조만간 전쟁을 일으킬 거라고 미국에다가 추가 군사 지원을 끊임없이 요청했지만 미국이 그 요구를 묵살하고 쟤들이 설마 그러겠느냐고 안이하게 대처한 것도 있었다. 또한 우리나라 군부 역시 대통령의 선견지명과는 반대로, 국지전에서 더 나아간 전면전 남침 조짐이 거듭 보고되는 걸 무시하고 태평하게 지내기도 했었다. (그렇게 안이하게 대처하다가 천하의 군사 강국 미국조차도 옛날에 진주만 기습 폭격을 당하고 9·11 테러를 당했듯이..)

개전 당시에 대통령 수뇌부가 서울을 너무 금방 포기해 버린 것, 국민들에겐 페이크를 치면서 마치 세월호 선장이 도망치듯이 먼저 피난을 가 버린 것 때문에 여론이 안 좋아졌다. 이건 오늘날까지 이 승만을 씹는 사람들이 단골로 꺼내는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건 그렇게 쉽게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A. 이 승만 대통령은 6월 27일 새벽에 측근들로부터 피난을 안 가면 안 되겠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난 국민을 버리고 서울을 떠날 수 없다”라고 완강하게 고집을 부렸다. 프란체스카와 측근들이 1시간 가까이 설득한 뒤에야 비로소 피난을 갔다.

B. 반대로 무초 대사가 26일 밤쯤에 대통령을 찾아가 벌써 서울을 버리고 떠나서는 안 된다고 1시간 가까이 설득했다. 그러나 “내가 잡혀서는 안 돼. 좀 안전하게 피난 가야겠어”라는 대통령의 말에 더 설득을 포기했다.


이 두 모순되는 이야기가 인터넷을 찾아보니 공존한다. 누가 무슨 얘기를 갖고 대통령을 1시간째 설득했다는 건지? 둘 다 책 인용이고 여러 군데에 동일한 형태로 복붙이 돼 있어서 신뢰도는 충분히 갖춘 source이다.

그런데, 내가 잠시 리서치를 한 바로는.. 교차검증이 잘 안 된다.
A 문헌에서는 무초 대사는.. 참모진이 이미 대전으로 내려간 뒤부터에나 등장하며, B 문헌은 반대로 A 정도의 디테일로 26~27일 사이의 대통령의 구체적인 전후 행적이 나와 있지 않다.
한밤에 국제 전화를 걸어서 “군사 지원이 필요하니, 자고 있는 맥아더를 깨워서라도 당장 불러 달라. 안 그러면 한국에 있는 수천 명의 미국인들이 한 명씩 죽을 줄 알아라” 이렇게 대통령이 협박조로 강하게 얘기한 것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맥아더는 그 당시 미국이 아닌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과 시차가 비슷함)

“A 사건에 의해서 피난이 결정된 뒤에 B에 기록된 대로 무초가 최후에 피난을 만류했다”.. 라고 퍼즐 조각을 끼워 맞추는 게 자연스러울 듯하지만, 그렇게 종합하기에는 A가 말하는 시간대가 너무 늦다.

설마 진짜로 B와 A가 나란히 시간 순으로 벌어진 걸까? 이 승만이 그렇게까지 우왕좌왕 변덕쟁이였을 것 같지는 않은데. (처음엔 피난 가기로 결심 → 무초와 싸우고 난 뒤 피난 안 가기로 슬그머니 마음을 고쳐먹음 → 다시 측근의 제안을 받아들여 피난)

참고로 이 승만에 대해 '덜 긍정적'으로 진술하는 B도 조 갑제 닷컴 같은 우파 논객 홈페이지에 소개되고 인용돼 있다.
또한, 엔하위키조차도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와 함께 A안과 B안을 모두 소개하고 있으니 이 정도면 혼란이 객관적으로 입증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인터넷에서 사람들은.. 팩트가 아니라 이 승만에 대한 호불호에 따라서 각자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A 또는 B를 미는 촌극이 벌어지고 있다. 나도 한때는 A 설만 있는 줄 알았으나, B도 신뢰도가 무시 못 할 수준이어 보인다.
이건 정치 성향이나 정치인 호불호 문제가 아니라 역사 팩트 문제이기 때문에 편견 없이 자료를 나중에 좀 더 조사해 봐야겠다. 어느 쪽이든 역사 왜곡과 조작이 부디 없기를.

Posted by 사무엘

2014/08/24 08:33 2014/08/24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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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 국회 기도문

대한민국이 기도로 시작한 나라라는 걸 정치적으로 좀 우파 성향인 크리스천이라면 어렴풋이 들어서 알 것이다.
본인은 수 년 전, 우리나라 초대 겸 건국 대통령인 이 승만 박사의 옛 저서 Japan Inside Out의 번역판인 <일본 그 가면의 실체>가 국내에 출간됐을 때, 그 책을 통해서 저 기도문을 처음으로 접했다.

잠시 역사 배경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대한민국의 제1대 국회인 대한민국 제헌국회는 대한민국 헌법을 첫 제정한 국회이며 1948년 5월 31일 구성되고 1950년 5월 30일까지 활동하였다. 대한민국에서 국민의 직접 투표로 선출된 국회의원을 구성원으로 한 최초의 국회이다. (한국어 위키백과 설명)

그 당시는 우리나라에 국회 의사당 건물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서울 광화문 근처의 옛 중앙청 홀--김 영삼 정권 때 헐린 그 튼튼한 건물--에서 국회의원들이 모였다.
국회의원들은 정확히 세 주 전에 열린 5· 10 총선거 때 선출된 사람들이다. 남한만 단독으로 총선거를 해 버려서 남북 분단이 고착화되었다는 우려도 받았으나, 북한은 어차피 그 전에 이미 조선로동당 대회를 자체적으로 치렀으니 통일은 애초에 물 건너간 상황이었다.

자, 그래서 1948년 5월 31일 아침 10시경이 되었다.

* 임시 의장 이 승만

대한민국 독립 민주국 제 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 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 이 윤영 의원 기도 (일동 기립)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사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성시하신 것으로 저희들은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풀어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원치 아니한 민생의 도탄은 길면 길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가 확대되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은 이 땅에 오지 않을 수밖에 없을 줄 저희들은 생각하나이다.

원컨대 우리 조선 독립과 함께 남북통일을 주시옵고 또한 우리 민생의 복락과 아울러 세계평화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여 저희들은 성스럽게 택함을 입어가지고 글자 그대로 민족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러하오나 우리들의 책임이 중차대한 것을 저희들은 느끼고 우리 자신이 진실로 무력한 것을 생각할 때 지와 인과 용과 모든 덕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이러한 요소를 저희들이 간구하나이다.

이제 이로부터 국회가 성립이 되어서, 우리 민족의 염원이 되는, 모든 세계만방이 주시하고 기다리는 우리의 모든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며 또한 이로부터 우리의 완전 자주독립이 이 땅에 오며 자손만대에 빛나고 푸르른 역사를, 저희들이 정하는 이 사업을 완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이 회의를 사회하시는 의장으로부터 모든 우리 의원 일동에게 건강을 주시옵고 또한 이겨서 양심의 정의와 위신을 가지고 이 업무를 완수하게 도와 주시옵기를 기도하나이다.

역사의 첫걸음을 걷는 오늘의 환희와 감격에 넘치는 이 민족적 기쁨을 다 하나님에게 영광과 감사를 올리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기도하나이다. 아멘.

이 기도문은 이 윤영 목사가 원고를 미리 써 와서 읽은 게 아니라는 걸 유의하자.
이 승만 의장이 현장에서 갑작스럽게 즉흥으로 요청을 해서 기도가 시작된 것이다. 즉, 이건 애드립이다. 텍스트는 속기사가 받아 적어서 만들어졌다.
이런 건 좀 공신력 있는 사이트에 문헌으로 좀 기재되어 있어야 할 텐데 국회 홈페이지나 위키문헌엔 없나?
<날개셋> 타자연습에는 저 글이 연습글로 수록되어 있다.

뭔가, 아폴로 8호 승무원의 창세기 낭독 사건 같은 걸 보는 느낌이지 않은가.
이런 거 읽을 때만큼은 제발 후천년주의니 정교일치니 그딴 삐딱한 시선은 잠시 집어치우고, 일단 감격하고 감사할 줄 좀 알자.
누군 뭐 국가나 정치와 관련된 성경적 입장을 모르는 줄 아나..?

한쪽에서는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 오늘 같은 날을 있게 하신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속히 오기를 축원하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기도하나이다” 이러면서 나라를 세웠다.

이 국회를 통해 1948년 7월 17일에 대한민국의 첫 헌법이 공표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공휴일에서 빠진 국경일 제헌절이 이 날로 제정된 것이다.

그 반면, 반대편에서 비슷한 시기에 벌인 북조선 로동당 2차 대회(1948년 3월 27일~30일)는 분위기가 아마 어땠을까? -_-;;
그때는 워낙 초창기이기 때문에 북한도 내부에 여러 파당이 있었으며 노골적인 김씨 우상화는 지금보다 덜했었다.
하지만 이미 인간성 말살이 시작되고 반대파 '반동'들을 비판하고 숙청하고, “동무들, 인민 해방을 위한 과업을 어서 완수하시오” “소련으로부터 지원 받아서 미 제국주의 남조선 원쑤들 다 쓸어버립시다” 이런 권모술수와 추악한 음모가 진행 중이었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북한이 태극기 대신 자체적인 인공기를 제정해서 쓴 게 1948년 초쯤부터이고, 애국가도 자기네 애국가를 1947년 하반기부터 채택했으니, 이미 남북 영구 분단 고착은 그 무렵부터 예고된 귀결이었다. 쟤들은 소련의 군사· 경제력을 등에 업고 시민들은 공산주의 지상락원으로 선동하고, 서로 비판하고 감시하고 못 믿게 만들고 팀웍을 해체시키는 방법으로 권력을 꽉 장악해 갔을 것이다.

난 이걸 생각하면 소름이 확 돋는다.
어디 누가 누굴 보고 대한민국이 처음부터 더럽게 시작되고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고 정체성을 부정하고 앉았는가? 괘씸한 놈들!

난 우리나라가 건국 이래로 예수 믿고 교회 댕기고 예배드리고 심지어 거리설교까지 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던 것 하나만으로도.. 우리나라의 자유는 정말 넘치도록 잘 보장되어 있었고, 극소수 있었던 부조리와 제약은 종북 불순분자 빨갱이들 빼고는 하나도 걸릴 게 없었다는 생각이 변함없다.

이 승만 전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건국 대통령으로 충분히 예우받고 존경받아야 한다. 그가 대통령으로서 잘못한 것들은 잘한 것에 비하면 정말 사소하고 불가피하고 최소한 악의는 없었던 것들이다. 특히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친일파 드립은 내 눈에 띄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다 조직적으로 반박해 줄 것이며, 앞으로 기회가 되면 이 주제만으로 또 블로그에다 글을 쓸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아무에게나 정말 양심에, 가슴에 손을 얹고 솔직하게 물어 보고 싶다. 종북 빨갱이들조차 적으로 안 보이고 혁명가 투사로 보일 정도로 우리나라가 아직까지 그렇게도 엿같고 개판이고 다 갈아엎어야 하고, 국민들에게 해 준 게 없는 나라인가?

Posted by 사무엘

2013/09/29 08:36 2013/09/29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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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 '보수, 우파'라고 하면 대체로 이런 성향을 싸잡아 일컫는 게 아닐까 싶다.

  • 역사· 이념적으로는 이 승만· 박 정희 전대통령에 대해 매우 옹호적이다. 이런 진영이 우리나라를 열악한 여건 속에서 비록 일부 과오도 저질렀지만 그건 위태롭던 시대 정황상 불가피한 것들도 많았고 전반적으로는 잘한 게 훨씬 더 많다. 폐허 속에서 경제 부흥과 자유 민주주의를 일군 대한민국 역사와 정체성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 정치· 군사 방면으로는 북한에 대해 적대적이고 그들의 안보 위협을 좌시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종북 좌익들의 선동 때문에 매우 위태로운 지경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반사 심리로 북한 주민 인권에도 관심이 많다.
  • 도덕· 윤리 측면으로는 동성애 반대, 사형제 찬성, 체벌 옹호 등 말 그대로 과거의 보수적인 가치관을 그대로 존중한다.
  • 경제 쪽에서는 사유 재산과 시장에서의 자유 경쟁(정부의 규제나 개입이 최소화된), 작은 정부, 선별적 복지를 최대한 민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이듯, 성장이 최선의 복지이다. 그리고 친기업 정책이 최선의 일자리 창출 방법이다.
  • 종교 쪽은 꼭 일치하라는 법은 없지만 어쨌든 대체로 친기독교 성향이고, 최소한 기독 안티는 아니다.

이런 것들을 보수라고 부른다면 나는 꼴보수이다. 그리고 이걸 우파라고 부른다면 난 극우라 불려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사회 통념적으로 지극히 건전하고 바람직하며, 성경과 하나님 앞에서 한 치 부끄러울 게 없는 이념을 수꼴이라고 부른다면 난 기꺼이 수꼴이 돼 주겠다.

이런 방면엔 여러 유명 논객들이 있다. 저마다 프로필이 화려하며, 과거에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서 자기 분야에 기여하고 국가를 발전시킨 이력들이 있는 분들이다.
그런 분들 중, 본인은 최근에 정 창인 박사의 블로그를 알게 되었는데..

1. 북한으로 자유를 확산시켜 북한 동포를 억압적 독재 체제로부터 해방하는 것이 바로 자유 통일입니다.
2. 우리가 대한민국을 사랑한다면 건국 대통령 이 승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우리가 바른 의사 소통을 원한다면 한글만 쓰기를 생활화하여야 합니다.


우와! 블로그 소개글에 기재된 문장 하나하나가 지극히 공감되고 너무 마음에 들어서 박사님께 페이스북 친구 신청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건 곧장 성사됐다. 내가 먼저, 그것도 오프라인에서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페친 신청을 하는 경우는 매우 극히 드물다.

사실, 1940년대생에 육사 출신의 유학파 박사 군사 평론가라는 점에서 이분은 지 만원 박사와도 프로필이 비슷하다. 대북 강경론, 이 승만· 박 정희 빠, 한글 전용이라는 지론도 동일하다. 지 박사 역시 필요 이상의 한자 교육은 필요하지 않으며 한글 전용을 지지한다는 것을 글로 표명한 바 있다. (왜냐 하면 보수 진영에 잘 알다시피 유명한 한자 혼용론자 논객도 있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 박사는 '보수'가 지니는 여러 속성들 중 저 세가지 세부 분야를 더욱 특화하여 미시는 듯하다. 박 정희의 경제 성장보다 이 승만의 반공 이념 건국을 더 밀고, 특별히 한글 전용도 더 강하게 주장한다는 뜻이다. 본인과는 그런 세부적인 취향까지 일치한다. 그러고 보니 정치· 철학 박사이면 이 승만하고 전공 분야도 아주 비슷하다?

난 사실 거의 15년 가까이 전의 고등학교 시절에 한글 학회 소식지 <한글 새소식>을 통해서 이분에 대해 사실 먼저 알고 있었다. 1999~2000년 사이에 한글 전용을 강한 호소력으로 지지하는 글을 투고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글 하나가 아니라 <한글 사랑은 곧 나의 사랑>이라고 아예 시리즈로 아주 길게 글을 연재하셨다. 물론 저 블로그에서도 글을 다시 볼 수 있다. 이제는 문자관뿐만 아니라 다른 이념까지 일치하는 분이 되었으니 더욱 존경스럽게 보일 뿐이다.

지금 정 박사의 블로그는 첫 화면부터 <백년 전쟁>이 거의 성경 변개나 황 우석 논문 조작 급의 저질 퀄리티라는 걸 낱낱이 까발리는 반박 자료들로 가득하다.
여기서 백년 전쟁이란 중세에 영국과 프랑스가 싸우고 잔 다르크가 활약한 그 전쟁이 아니라, 이 승만에 대해 완전히 있지도 않은 사실 왜곡과 날조로 인격 살인과 난도질을 해 놓은 쓰레기 영상물의 이름을 일컫는다. 유튜브를 통해 이미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보고 퍼 날랐다고 한다. 내가 이 승만을 좋아한다는 걸 아니 몇몇 좌파 성향(?)의 지인들이 나보고도 그걸 좀 보라고 권하기도 했었다.

앞부분 조금만 봐도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오던데, 저분은 실제 미국 유학 생활을 토대로 더욱 조직적으로 <백년 전쟁>을 어디서 내밀지도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반박해 놓았다. 이 사람들이 정말로 켕기는 게 있으니 이런 조잡한 방법으로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을 능멸하고 대한민국 정체성을 부정하려고 한다는 게 느껴진다.

여러분들에게도 일독을 권한다. 이유야 어쨌든 우리나라가 친일 청산 문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기에 본인 역시 어린 시절엔 민문연 같은 단체가 존재의 의미가 있고 뜻 깊은 일을 한다고 인정을 했었으나.. 이런 걸 보면 정이 완전히 확 떨어지고 만다. 군사 정권 시절 같았으면 모조리 빨갱이로 몰려서 대표가 사형 당했어도 할 말이 없고 자업자득이었을 것이다..

이런 엉터리들이 이 승만 박사를 음해하기 위해 이런 엉터리 영상물을 만들었다. 이 승만 박사가 지하에서 통곡할 것이다. 이 승만 박사의 신발끈을 맬 자격도 없는 놈들이 감히 이 승만 박사에게 막말을 하고, 그것도 있을 수 없는 인격 모독과 인격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 이런 저질들이 바로 민족 문제 연구소--그 소장은 임 헌영이며 이사장은 함 세웅이다. 그리고 4.9 평화 재단, 그 이사장은 문 정현이다--의 실체다. (본문 중에서)


(* 본인 주: 사실, 이 승만 박사는 지하가 아니라 지금 하늘에 있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5/14 08:27 2013/05/14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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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크리스천

※ 이 승만

크리스천답게 술· 담배 안 하고 사생활 깨끗했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관료들 회식 때, 기생 대신에 각자 자기 부인을 데려 오게 한 사람이다. 여대생· 여배우 끼고 술판을 벌이던 박 정희와는 완전히 다른 타입.

그에게는 프란체스카 이전에 엄청 옛날에 조혼했다가 헤어진 조선인 전처가 있었고 나중엔 임 영신 같은 사람과 스캔들 루머가 나돌기도 했으나, 루머는 루머일 뿐이다. 이 승만은 자기는 이미 유부남이라고 오히려 임 영신을 찼으며, 불륜을 원천적으로 저지르지 않았다. 전처와의 흑역사는, 마치 성경 시대에 일부다처가 용인되었던 것만큼이나 당시 정황상 어쩔 수 없는 것이었고.

이는 같은 크리스천이고 똑같이 천재 엄친아이던 여 운형과는 좋은 대조를 이뤘다. 여 운형은 왕년에 여자들 끼고 바람 잔뜩 피웠던 호색한.. ㄲㄲㄲㄲ
김 구도, 여 운형도, 이 승만도 다 명색이 기독교 신자인 민족 지도자였지만, 이들이 정치적으로 간 노선은 잘 알다시피 스타크래프트 세 종족 내지 윈도우/맥/리눅스만큼이나 서로 달랐다.

※ 차 지철

알고 보니 상당히 특이한 사람이다. 박 정희 전대통령의 경호실장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면서 박통의 다른 부하들로부터조차도 미움을 살 정도였고, 결국 10. 26. 사태 때 박통과 함께 김 재규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만... 이 양반도 의외로 상당히 독실한 '신자'였다고 한다.

'각하'에게는 예쁜 연예인들 데려 와서 시중 들게 했어도 자기 자신은 부인 말고는 다른 여자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늙은 어머니에게 극진한 효자였으며, 의외로 비리와도 담을 싼 타입. 은행 대출 청탁을 받자, 의뢰인과 함께 기도실에 들어가 기도만 한 후 청탁은 들은 체도 안 했다는 흠좀무스러운 일화가 전해진다. 꿍쳐놓은 재산이 없이 청렴했다는 건 사후에 그의 유족들에 의해 잘 입증되어 있고... 지나쳤던 권력욕만 빼면 사후 평판이 싹 달라졌을 사람이다.

※ 조지 W. 부시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사생활에 관한 한 클린턴과 180도 다른 타입인 건 두말 할 나위도 없고, 모 목사님의 증언에 따르면, 재임 중에 백악관으로 인턴 온 어느 학생에게 “학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개인적으로 영접했나요? 만약 그렇다면 백악관 직원들이 참석하는 기도 모임에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요?” 같은 말까지 했다고. 개인적으로 만날 때야 부시만치 다정하고 공손하고 정중한 사람이 별로 없었댄다. -_-;;

내가 몇 차례 글로 썼듯이 저 사람은 약간 띨띨하고 어렸을 때 좀 놀기도 했다가, 교회 다니면서 신앙의 힘으로 '교화'되고 나서 그나마 저렇게 바뀌고 나중에 미국 대통령까지 한, 유능보다는 '그냥 착한 사람' 타입이다.

※ 스티브 유

담배 끊은 걸로 금연 홍보 대사도 하고, 여타 연예인들과는 달리 사생활 깨끗하고, 교회 다니는 거 공언도 하고 다니고... 거기에다 노래와 춤은 덤. 20세기 말까지만 해도 가히 아름다운 청년이라는 타이틀이 아깝지 않은 연예인이었는데...

그 후 이미지 완전히 말아먹고 한국에 못 들어오는 미국인이 되어 버린 건, 누가 봐도 자업자득이고 욕 얻어먹어도 싸다. 동정표를 줄 수가 없다. 워낙 이미지가 좋아서 병무청에서도 그를 믿고 병역 미필자로서 미국에 선뜻 보내 줬는데 거기서 정면으로 배신을 때린 거니까. 어차피 4급이어서 현역 가지도 않았을 사람이 왜 그런 식으로 병역을 회피했는지 모르겠다. 한국의 남자들이 군대에 대해서 얼마나 민감하고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지를 잘못 짚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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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예수 믿는다는 사람 중에도 일반 불신자와 똑같이 행동하고, 특히 불륜 저지르고 가정 말아먹은 사람이 많다. 이것 때문에 파면-_-당한 목사 내지 CCM 작곡가 겸 가수도 부지기수이고..
하지만 위에서 열거한 네 사람은, 대외적으로 자기 종사 분야에서는 욕 얻어먹을 짓을 좀 했고 잘못을 저지른 것도 있지만, 의외로 개인과 가정의 측면에서는 예수쟁이로서의 간증을 꽤 잘 지켜서 두 분야가 서로 잘 어울리지 않는 사례이다. 뭐, 사생활만 깨끗하다고 해서 대외적으로 무능하거나 욕 먹을 짓을 한 게 용서되지는 않겠지만. -_- 그래도 세상에는 한 잣대만으로는 제대로 평가하기 곤란한 사람이 많다.

Posted by 사무엘

2011/07/19 08:45 2011/07/19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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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클럽과의 인연

2005년 초의 일이다. 그때 본인은 인터넷 상으로 짜증나는 소식을 하나 접했다.
고려 대학교의 한 모 교수(정확히는 이미 명예 교수 랭킹인)가 일본의 무슨 출판물에다가 “일제 식민 통치는 조선에게 축복”이었다고 기고를 했다고 한다. 한국인치고 상식적으로 이 한 줄만 딱 접하고서 열받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이 사람을 옹호하고 나서는 사람이 등장했다. 본인도 그때까지만 해도 소위 친일파 문제라는 것에 대해서 평균적인 국민들이 생각하는 수준의 막연한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던지라,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쪽 패거리들이 또 고루고루 나서서 ㅈㄹ을 하는군.. 이번엔 대체 누구야?’ 정도의 생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필 2005년에는 연초부터 일명 ‘박 정희 배틀’이 벌어졌다. <그때 그 사람들> 같은 영화도 개봉해서 고등학교 동기들과 여차여차 하다 보니 관람하게 됐고, <만화 박정희>라는 책도 나왔다. 박 정희 전대통령이 한글로 써 놓은 광화문 현판을 철거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한글 진영 내부에서도 대립이 있었다. 다 비슷한 시기이다! 이게 다 우연일까?

게다가 압권이었던 것은 CBS 방송국에서 벌어진 공개 토론. 바로 이를 계기로 본인 역시 지 만원이라는 사람을 알게 됐으며, 시스템 클럽이라는 사이트에도 들어가 보게 됐다. 그런데 그 공개 토론을 계기로 지 박사는 젊은이들에게 완전히 미친 수꼴 개새끼로 확실하게 인증 받게 됐으니 참 안타까운 노릇이다. 사회자조차 그다지 중립적인 위치에 안 서고 진 중권 씨와 한 패가 되어 지 박사를 멸시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좀 보기 안 좋았다. (성공회대 교수라는데 성향 면에서 뭘 더 바라겠는가.)

도대체 지 만원이라는 사람은 어디서 갑툭튀한 사람인가? 당사자에게는 좀 죄송한 얘기지만, 솔직히 인상이 좀 얍실한 족제비-_- 같고 영화로 치면 주동 인물보다는 반동 인물, 진짜 친일파처럼 보이긴 했다. O<-<
궁금해졌다. 그래서 시스템 클럽 글을 읽고 그의 프로필을 찾아보았다. 외부로도 보도가 되어 그의 이미지를 더욱 골수 수꼴로 굳히는 데 일조한 글로는,

<민족, 외세만 아는 바퀴벌레들>: 공산주의, 좌익, 운동권에 대한 무조건적인 혐오감
<역대 대통령의 자질 추이>: 이 승만, 박 정희, 전 두환만 우왕ㅋ굳ㅋ이었고  그 후대 대통령들은 타락일로

이런 것도 있다.
그러나...
그는 친일파가 결코 아니며 그런 글들을 쓰는 것이 애국심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본인은 느낄 수 있었다. 김 완섭 같은 싸이코 부류가 절대 아니다! 일본 내지 친일파 후손하고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며, 군 복무도 월남전 참전까지 하면서 명예롭게 마쳤다. 공부도 정말 열심히 해서 미 해군 대학원에서 응용 수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그의 말마따나 자신만의 정리와 알고리즘을 만들었다. 일평생을 자기 계발과 교양 수련에 투자하고 살았으며,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정말 대쪽같은 분이다. 본인은 진 중권 씨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상적으로 지 박사의 반대편에 선 사람 중에, 저 정도로 대인배가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라.

지 박사는 20세기까지만 해도 시스템 공학자 내지 군사 평론가를 비롯해 자기 전문 분야의 프리랜서로 자유분방하게 살고 있었는데 이놈의 김 대중 정권 때부터 나라에서 하는 짓을 보니까 이 반역 행위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서 본격적으로, 한 2002년부터 본업을 버리고 시사 논객으로 악역을 자처하며 활동하기 시작했다. 전혀 청렴하지도, 도덕적이지도 않은 민주화 패거리 저질 정치인들이.. 능력면에서는 자기보다 훨씬 더 뛰어났던 옛날 정치인의 도덕성(?)을 욕하면서 그들이 만들어 놓은 나라 기강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 살짝 수구 극우 성향이고 시국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하게, 음모론스럽게 확대 해석하는 면모가 좀 있긴 하다. 그러나 그 정도는 사상의 자유가 있는 우리나라에서 허용할 만한 수준이다. 음모론이야 반대편 진영도 어차피 만들어 내기는 마찬가지이다. 천안함에 대해서, 미국에 대해서 등등등.. 지 박사의 주장이 선동조라면, "우리가 읽는 성경에서 13구절이나 통째로 삭제되고 무려 6만 개의 단어가 변개됐다"는 주장도 충격적이고 선동조이긴 마찬가지이다.

고려대 교수의 문제의 발언도 “조선이 러시아에게 안 먹히고 일제에게 먹힌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는 요지였다. 그에 대해서 “차라리 러시아가 낫지 일제는 훨씬 더 막장이었다”라고 정당한 반론을 할지언정, 앞뒤 문맥 다 떼어내고 “자립할 능력이 없는 조센징을 일제가 보살펴 준 건 축복이었다”고 말을 완전히 곡해하여 사람 매장하는 건,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짓이지 않은가!

본인은 예전에 “그나마 숙군 작업부터 한 뒤에 6 25가 터진 건 천만다행이었다”라고 글을 쓴 적이 있다. 이걸 마치 “김 용묵이라는 작자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6 25가 터진 게 잘 되었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떠벌리고 다닌다”라고 왜곡하는 것과 똑같은 맥락인 것이다. 난독증의 결과는 이렇게 무섭다.

본인은 지 박사의 행적에서 공 병우 박사의 정신을 새삼 느꼈다. 본업을 버리고 생뚱맞은 분야로 뛰어든 점, 공권력의 탄압을 받은 점(공 박사는 남산으로, 지 박사는 광주로. -_-)이 말이다. 특히 지 박사가 5 18 사태에 대해서 야사를 캐고 자료 모으는 건, 공 박사 버전으로 치면 과거 글자판 제정 과정의 흑역사를 추적하는 수준과 맞먹는다.

물론 본인은 이 승만과 박 정희에 대한 견해 외에 너무 전문적인 분야에 대해서는 그의 견해에 다 동감하지는 않는다. 솔직히 말해 잘 모르며,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단지 그의 자세를 높게 사고 존경할 뿐이다. 요즘 세상에 색깔 구분을 명확하게 하고서 ‘빨갱이를 빨갱이라고 하지 않는 자가 바로 빨갱이이다’ 같은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이 얼마나 될까? 비록 빨갱이의 기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저렇게 분명한 흑백논리 자체는 성경적으로 매우 바람직한 사고방식이다. 빨갱이 대신에 죄나 지옥 같은 개념을 집어넣어 봐라. (게다가 지 박사는 예수 믿는 사람도 아닌데!)

일제 강점기가 ‘러시아 강점기에 비해서’ 축복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본인은 아직 이 나라에 지 만원 박사 같은 분이 있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심지어 북한 주민 중에도 지 박사를 알고 존경하는 사람이 다수 있다는 건 상식. 지금 내가 이 정도 수준으로 지 박사를 지지하고 존경하는 티를 공개적으로 낸 것만으로도 본인을 싫어하게 되고 떠나고, 심지어 <날개셋> 사용마저 보이콧한 사람이 좀 있다. ^^;;; 지 만원 박사의 사상이 뭐가 그렇게도 악하나? 정말 이해가 안 되는데... 얘기나 좀 들어 보고 싶지만, 그들은 그런 대화조차도 원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을 꽉 닫아 놓고 있을 것이다. 그럼 평생 그렇게 살지어다!

Posted by 사무엘

2010/07/02 08:30 2010/07/02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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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사람의 모습이 남아 있는 방법은?

1. 초상화로만 (컬러^^)
2. 흑백 사진으로만 (19~20세기 초중반)
3. 흑백+컬러 사진 공존 (20세기 중반)
4. 컬러 사진으로만 (20세기 후반~)

역대 미국 대통령의 초상화만 봐도 1, 2를 거쳐 4로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19세기 중· 후반과 20세기 초· 중반을 살았던 우리나라의 이 승만 초대 대통령은 컴퓨터만 빼고 과학 기술의 급변화를 경험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처음엔 한학만 공부하다가 나중에 영어를 비롯한 신학문을 섭렵했고,
미국으로 유학 갈 때는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넜겠지만 커서는 비행기도 탔다.
조선 땅에서 말을 타 본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에서는 차도 몰아 봤다. 그는 정말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의 산 증인이었다.

이 승만의 사진은 흑백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컬러 사진도 있다니 놀랍다.
심지어 그 유명한 1948년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 사진도 컬러 버전이 있다.
사실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한 컬러 사진 자체는 무려 구한말 시절 것부터 있긴 한데, 그 당시 컬러 사진은 비싸고 흔치 못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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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대한민국 건국은 정말로 중국이나 소련이 아닌 미국을 끌어들인 이 승만의 공로가 가히 절대적이다.
뭐, 김 구 대통령으로 우리끼리 통일 조국 운운하는 떡밥이 있는데,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 우리끼리 그렇게도 쉽게 원하는 대로 나라 세우는 게 가능했다면, 애초에 우리끼리 살던 나라를 외세에 허무하게 뺏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요즘도 '노란 대통령'을 추모하는 리본을 걸어놓고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하는 게 유행인 것 같다. 그 사람에게도 공적과 과오가 공존하며, 그런 유형의 사람이 대통령을 함으로써 국민에게 나름 의미를 남긴 것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 사람보다야 훨씬 더 프로필이 우수하고 훨씬 더 대인배이고 훨씬 더 민족을 사랑하고,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상황에서 더 훌륭한 업적을 이뤄 놓은 초대 대통령이 나는 더 존경스럽고 그립다. 한글, 세벌식, 새마을호뿐만 아니라 이런 것도 내게 이 나라에 대한 일말의 자부심과 애착을 제공하는 근거이다.

대한민국 건국,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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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0/06/25 07:57 2010/06/25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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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예전에 쓴 적이 있는 <일제 강점기의 드라마틱한 크리스천 커플>이라는 글을 이 블로그뿐만 아니라 몇몇 크리스천 커뮤니티에다가도 올렸다.
이런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는 두 위인 커플의 일대기와 연애 생활에 대해서 그냥 재미로 읽으라고 글을 올렸고, 정치색 같은 건 전혀 표방하지 않았다.

그러나, 글을 올린 곳에서 모두.. 이 승만에 대해서 내가 묘사한 표현이 심기가 불편하다는 댓글이 꼭 하나씩은 올라왔다.
그 댓글을 읽어보면 이 승만에 대한 진정어린 혐오와 증오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혐오와 증오심의 근거는 본인이 보기에 일고의 가치가 없는 것들...

4· 19에 대한 기억이 워낙 짙어서 독재자까지는 그렇다 치는데, 그 밑으로 해방 직후와 심지어 일제 강점기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고인에 대한 원색적인 비방과 험담은 도대체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 모르겠다.
“전후 상황과 문맥 다 무시하고 오로지 이 승만 개새끼 만들기”이다.

이 승만이 대통령 해 먹으면서 그렇게까지 죽을 죄를 지었나? 정말 김 일성이나 이 완용 욕도 저렇게 할까 싶을 정도이다.
평생을 기독교 정신으로 술· 담배 안 하고 검소하게 살았고 교리적으로 배도하지 않았으며, 딸 같은 서양 여자와 결혼한 게 특이점일 뿐이지 그래도 섹스 스캔들 전혀 없으며, 고위 관리들 회식 때 기생 끌어들이지 말고 대신 각자 자기 아내를 데리고 오게 하고..

그 정도로 행실상의 선한 간증이 있는 사람이 뭔가 잘못을 저지른 게 있다면, 일단 좌우 정황부터 좀 살펴야 하지 않는가? 왜 저 사람에게만 유달리 평가의 잣대가 그리도 가혹한가?
부정 선거, 부산 정치 파동, 보도 연맹 등을 줄줄 외우는 사람들이 평화선, 반공 포로 석방, 원자력 협정 같은 건 얼마나 알까?

지식이 편파적인 것으로밖에 안 보인다. 개독안티들도 얼마나 지식이 뛰어나고 논리정연한가? 그 문맥 안에서만 말이다. 걔네들 글대로 논리에 이끌려 가기만 하면 정말로 야훼는 완전 미친 변태 같은 무능한 신이고, 바이블 같은 ㅂㅅ 같은 책이 어떻게 수천 년간 존재해 왔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게 된다. 단지 그들이 전제로 깔고 있는 설정들이 전혀 사실이 아니어서 문제일 뿐이지.

이 승만에 대한 주된 오해와 나의 반박을 열거한다.

1. 독립 운동가 시절부터 싸가지 없고 고집불통 안하무인이어서 파벌이나 만들었다
이 말만 들으면 언뜻 그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 대신 실력으로 용서된다” 수준이다.
집안에서만 싸가지가 없었던 게 아니라, 미국 정치인들에게도 싸가지 없고(?) 콧대가 높았기 때문이다. 이 승만은 너무 똑똑하고 세계를 보는 눈이 다르고 다른 독립 운동가들과는 레벨이 넘사벽으로 달랐다. 이 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이 특이한 것만큼이나 특이한 사람이었다.

2. 무력 독립 운동 노선을 반대했다
신념과 관점의 차이일 뿐이며 정황상 그는 반대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애초에 우리나라가 무력으로는 일본을 이길 수 없음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해명은 본인의 이전 글 <안 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참고하라.

3. 남북 분단의 원흉이다
정말 말이 안 된다. 대다수 사람들이 UN이 뭔지 공산주의가 뭔지도 잘 모르던 시절에, 스탈린과 기회주의자 김 일성의 흉계를 간파하고 미국을 설득해서 남쪽에만이라도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세운 외교력을 두고두고 칭송해도 시원찮을 판에, 어떻게 헐뜯어도 저렇게 치졸하고 민망하게 헐뜯을 수 있을까?
이 승만을 분단의 원흉이라고 헐뜯는 건 우리나라가 북한 김 일성 손아귀에 들어가지 못해서 안달 난 것과 같다. 정말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고 선과 악 관념이 날조된 것이다(사 5:20).

4. 친미 (나쁜 의미의)
전혀 사실이 아니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로 이 승만만치.. 그 보잘것없는 허약한 국력으로도 외교 능수능란하게 잘 해 내고, 미국 정치인들을 쩔쩔매게 만들고 미국으로부터 최대의 국익을 얻어낸 정치인은 없었다. 일본하고만 짝짜꿍이 잘 맞던 미국을 한국의 친구로 바꾼 게 이 승만이다. 그 옛날에 중국이나 소련이 아닌 미국을 바라본 것이다. 이게 욕 얻어먹을 짓이란 말인가?
아니, 그보다도 그는 독립 운동가 시절부터 미국에서 40여 년을 지내면서도 미국 시민권을 일부러 거부하고 무국적자로 버텼다. 이게 친미인가? “대한민국은 곧 독립할 거고 나는 대통령이 될 것이기 때문에 미국 시민권 같은 건 없어도 됩니다”가 그의 지론. 나라가 쌩쌩 잘 돌아가고 있을 때 이런 말을 하면 대통령병 권력욕이지만, 나라가 없던 시절에 이런 말을 한 건 지극한 애국심이다.

5. 친일 (나쁜 의미의)
이건 본인도 처음엔 궁금했다. 일제로부터 지명수배를 받은 독립 운동가 출신이며 평생 일본을 그렇게도 싫어하고 지냈다는 사람이, 왜 반민특위를 해체하고 친일파 출신 관료들에게 기회를 줬는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나이가 들고 세상 물정을 좀 알고 나니까, 안타깝지만 그 당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걸 적극 공감하기 시작했다. 나치에게 겨우 3, 4년 남짓 점령당했다는 프랑스도 아니고 무려 한 세대에 가깝게 일제의 손아귀에 있던 나라가 그럼 일본 경찰· 군인 출신 인재를 활용 안 하고 어떻게 당장 치안과 국방을 유지하겠는가? 더구나 국군 수뇌부에조차도 ‘빨갱이’들이 있어서 적과 내통하는지, 사상이 어떤지 알 수가 없었고 이북에서는 수시로 폭동을 일으키고 건국을 음해하고 방해하던 마당에 말이다.

우리나라의 건국 초기에 친일파 청산을 가장 방해하고 그들이 설 빌미를 제공한 장본인은 다름아닌 북한이라는 게 본인의 지론이다. 박 정희도, 안 두희(김 구 암살범)도 다 6 25 덕분에 면죄부가 주어지고 복직할 수 있었는데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하리요?

6. 6· 25 때 혼자 도망치고는 다리 폭파나 했다
그런 적 없다. 이 승만은 “국민을 버리고 서울을 떠날 수 없다”고 쌩고집을 부렸고, 그걸 영부인과 측근들이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피난길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서울 시내에 국군이 이기고 있다는 거짓 방송이 왜 며칠째 울려 퍼졌는지, 결정적으로 한강 다리를 누가 폭파하라고 시켰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휴전선 인근의 늘 있던 교전이어서 전쟁을 대수롭지않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고, 다리 폭파의 경우 손발이 안 맞은 작전 실수였을 수도 있으며, 정말로 군부를 장악했던 불순세력이 자기네가 싼 똥을 남한 정부에다 전가시킨 것일 수도 있다.
단 하나, 이 승만이 “용용 난 먼저 피난 가지롱. 너희는 엿 먹어라” 하면서 다리 폭파한 건 절대 아니다!

쉽게 말해서 이 승만의 업적과 잘못 내지 한계는 컴퓨터 식으로 말하자면 윈도우 95 정도에다 비유할 수 있다. 윈도우 95는 도스와 16비트 윈도우에 머물러 있던 평범한 사람들에게 순식간에 무려 32비트 선점형 멀티태스킹 OS를 선사함으로써 생활을 완전히 바꿔 놨다(민주주의 주권 국가)! 하지만 도스에서 잘 살고 있던 사람들의 반발이 만만찮았으며, 윈95 역시 내부에는 상당수 16비트 코드를 답습할 수밖에 없었다. 호환성을 맞추다 보니 태생적으로 안정적일 수가 없었다. 불안정하다고 까이고, 또 확장완성형 때문에 한글 파괴라고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아주 그럴싸한 비유이다.
그러나... 그러나 우리나라 IT가 윈도우 95 없이 세계 무대에서 나란히 설 수 있었을까? 그 당시에 윈도우 NT 돌릴 수 있는 컴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됐을까?

그 후, 나라의 기틀이 잡히고 외교력보다는 이제 진짜 국내 민생을 살피는 지도력이 더 필요해지면서, 너무 늙어 버린 이 승만의 통찰력은 한계를 보인다. 인의 장막에 휩싸여 여당의 부정부패를 척결하지 못하고, 부하들의 감언이설에 속아 부정 선거에까지 연루되어 독재자로 낙인 찍힌 불운한 말년을 맞이한다.

그는 그래도 “나는 이럴 생각이 없었는데 내 부하놈들에게 속았다”, “고의적인 실수이다, 오해이다” 궁시렁궁시렁.. 요즘 정치인들처럼 입만 열면 거짓말로, 찌질한 변명과 험담으로 일관하지 않았다! 그냥 아무 말 없이 “국민이 원하면 하야한다” 한 마디로 모든 책임을 지고 권좌에서 물러났다. 남들이 욕하건 말건 역사의 평가에 모든 걸 맡기고 마지막 순간까지 고매한 품위와 명예를 지킨 것이다.

솔까말 본인은.. 본격적으로 우리나라 근현대사나 정치 놀이(?)-_-에 발을 들여놓기 전부터도 이 승만에 대해서는 “독립 운동가 출신의 초대 대통령이다. 잘은 모르지만 그 사람은 아주 똑똑하고 고집 세고.. 훌륭한 분이긴 한데 욕심 부리다 좀 추하게 끝났지.. 그 나이 먹도록 그렇게까지 오래 권력 맛을 보고 싶어서 징징댔던 걸까? 그래도 나중에라도 정신이 들어서 스스로 물러난 덕에 더 험한 꼴은 안 봤다” 정도만 알고 있었고 그 정도만으도 그럭저럭 상당히 정확한 진술이라고 생각한다.

이 승만은 후대의 전· 현직 '장로 대통령'보다 신앙면에서도 앞섰고 인물의 그릇 크기와 프로필도 월등히 앞선 분이다. 심지어 미국의 초대 대통령조차도 사실은 크리스천이 아니고 그냥 이신론자일 뿐이라는 설이 지배적인데, 이 승만은 확실하게 구원 받은 크리스천이다. 최소한 "우리 가족은 종교가 제각기 다 다르지만 싸우지 않고 잘 지냅니다" 이러던 에큐메니컬 전직 대통령보다야 100배는 더 낫다! 그런데 세상적인 불신자도 아니고, 크리스천이 어떻게 이 승만을 그렇게까지 싫어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미국 건국 초기에 살았던 법학자인 사이먼 그린리프 박사(Simon Greenleaf; 1783-1853)는 성경은 훼이크이고, 예수의 부활도 다 허구라고 여겼다. 그런데 자신의 법학 지식을 동원하여 문헌 조사를 해 보니 세상에 예수의 부활만치 정확하게 잘 기록된 사건도 없고 이 정도면 법적으로도 아무 하자가 없는 완벽한 증언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으며, 결국 자신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것처럼 처음엔 멋도 모르고 이 승만 욕만 하다가 공부를 하면서 생각이 바뀌어 그를 존경하게 되고, 그 사람의 스케일과 인품에 감명 받은 지식인이 적지 않다. 알고 나니 '까'에서 '빠'로 돌아선 것. 그의 업적은 비가시적이고 하다못해 박 정희의 경제 개발보다도 더욱 수준이 너무 높아서 그게 업적인지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이 승만보다 훨씬 더 형편없는 통치자 밑에서 탄식하고 신음하기 전에(우린 이미 이걸 경험 중이다!), 위인과 영웅의 업적부터 바로 알아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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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0/05/31 08:35 2010/05/3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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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이제 애호박, 단호박, 늙은호박 이 셋은 항상 있으나, 그 중에 제일은 늙은호박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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