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과 사망의 차이

1.
1993년 가을에 서해훼리(페리) 호 침몰 사고 때의 일이다. 탑승자들을 구조하고 수색하는데 웬일인지 이 배의 최고 책임자인 선장이 행방이 묘연해 보였다. 그런 와중에 일각에서는 "선장이 혼자 살아서 배를 탈출하여 몰래 튀는 게 목격됐다"라는 카더라 루머가 나돌았고, 언론은 이것을 확인도 안 하고 냅다 물어서 동네방네에 소문을 냈다.
이에 경찰조차 별 의심 없이 이 말을 믿게 되었으며 선장을 대문짝만 하게 공개 수배하고 가족들을 압박하여 선장더러 자수를 권유하게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러나 결말은? 선장은 수색 닷새 만에 기관장과 함께 배 안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서해훼리호의 선장은 세월호의 선장 같은 급의 인간말종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 예전의 선장 생존 보도는 국내 언론 역사에 길이 남을 오보 흑역사로 전락했다. 그리고 그 기자들은 선장의 유가족을 찾아와서 싹싹 빌었다. 범죄자를 숨겨 주고 있다는 누명을 이제야 벗은 유가족들은 "당신들이 선장이 살아 있다고 말했으니 이제 그 선장을 살려내 보시오"라고 그들을 꾸짖었다.

2.
1996년 가을,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때에는 싸리비를 만들기 위해 싸리나무를 벌목하러 혼자 나갔던 표 종욱 일병이 덜컥 실종됐다. 군에서는 제대로 수색도 안 하고 이걸 전시 무단 탈영으로 단정짓고 탈영병을 찾는다는 방송을 전국에 내보냈다. 그의 집엔 헌병대 사람들이 와서 표 일병 내놓으라고 마치 사채업자가 빚독촉 하듯이 수시로 온갖 민폐를 끼쳤다.

그러나 이 역시 결말은? 그는 무장공비에게 살해당했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이건 부끄럽게도 군 당국이 스스로 적극적으로 수색해서 찾은 게 아니라, 사살한 무장공비에게서 노획한 '일기'에서 의심스러운 점을 발견하여 그걸 토대로 추적한 덕분에 찾은 것이었다. 그 무장공비는 위장을 위해 표 일병에게서 국군 군복을 빼앗은 상태였으며, 그 대신 표 일병은 시신 발견 당시 속옷 바람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헌병대 관계자들은 표 일병의 유가족 앞에서 그야말로 석고대죄하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생사도 알 수 없는 치욕스러운 탈영병과, 현충원에 묻히는 영예로운 전사자는 그야말로 한 끗발 차이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전시 탈영은 평시 탈영보다 처벌이 훨씬 더 무겁다!)

무장공비는 그를 결박하고 목을 졸라서 살해했다. 총은 시끄러운 데다 걔네들 입장에선 안 그래도 총알 한 알이 극도로 아까운 지경일 텐데 당연히 총을 썼을 리는 없다.
또한, 생지옥 북한에서 태어나서 거기서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남파 간첩이나 무장공비까지 됐을 사람이라면 목표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간성이라고는 그야말로 완전히 제거된 인간 흉기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잠수함을 좌초시키고 비밀 작전에 실패했다고 동지들끼리도 무자비하게 처형을 했는데, 하물며 자신을 발견해 버린 민간인도 아니고 적군을 살려 둘 이유는 전혀 없었을 것이다. 생포해서 인질극 협상을 벌일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기록을 찾아 보니 표 일병은 군 복무 당시 계급이 이미 일병이었다.
“이제 일병을 달고 군생활에도 적응이 되었지만 원인모를 한숨과 동경이 계속되고 있다. 언제까지 이 신세타령을 해야 하는지 내자신도 한심하다.” (고인의 일기 중)

그럼 전사자니까 이제 공식 매체에서는 '표 상병'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는가? 제설을 하다가 사고로 죽어도 작전 중 순직이기 때문에 1계급 특진 추서인데.
탈영 중으로 잘못 알려졌을 때의 계급이 너무 깊게 인식돼 버려서 그런 것 같다. 이런 점에서 거짓 선동이라든가 오보의 해악은 더욱 큰 셈이다. 한번 생긴 사람의 편견은 쉽게 고쳐지지 않으니까.

* 그러게 사람이 없어진 듯이 보이면 덮어놓고 악한 추측부터 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하긴 출애굽기 32장의 금송아지 사건도 따지고 보면 그런 심성을 바탕으로 벌어졌다. 이때 모세는 시신이 발견된 게 아니라 멀쩡히 살아 돌아오기도 했고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5/06/24 08:30 2015/06/24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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