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상 교통수단에는 도로나 철도 같은 길이 있다. 열차는 레일을 벗어나면 끝장이고, 자동차도 열차보다야 자유도가 높지만 평평한 길이 없는 곳은 못 다닌다.
그에 반해 비행기나 선박은 광활한 창공 아니면 바다 한가운데를 다니니, 딱히 길이라는 개념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얘들도 눈에 당장 보이지 않고 민간 지도에 표시돼 있지만 않을 뿐, 가상의 경로를 설정하고 항상 정해진 길만 다닌다.
배야 물 위만 다닐 수 있지만 비행기는 무엇이든 위로 타넘을 수 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움직임의 자유도가 가장 높다. 그러나 자동차만 해도 소유와 운전을 위해서 각종 등록에, 보험에 면허 등,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까다로운 규제와 제약들이 존재하듯.. 비행기도 마찬가지이다. 일정 중량 이상의 비행체가 일정 고도 이상을 비행하기 위해서는 미리 근처의 항공 관제 시설 내지 군부대에 비행 스케줄과 경로를 신고해서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허가받은 대로만 다녀야 한다. 이걸 어기면 생각보다 꽤 무거운 처벌을 받는다.
우리나라 영공에는 사전 신고만 하면 트래픽이 허용하는 한 그럭저럭 OK가 나오는 구역이 있고, 반대로 그렇지 않은 '비행 제한/금지 구역'도 있다. 금지 구역은 국방부 장관 차원에서의 아주 예외적인 승인이 나지 않는 한, 싸제 비행기가 절대로 얼씬거릴 수 없는 곳이다. 이거 뭐, 하늘 위도 사실 온통 민통선 지대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게 속 편하다.
물론 인간은 새가 아니며 자기 힘만으로 하늘을 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보니, 제약을 하든 말든 이쪽 업계의 사정은 공항이나 군 관계자가 아니면 민간인이 신경을 쓸 일 자체가 없었다. 그러나 요즘 들어서 이런 규정이 갑자기 부각되고 있는 이유는.. 일명 '드론'이라고 불리는 장난감 무인기를 취미로 날리는 사람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드론'이라고 하면 한때는 저그의 일꾼 말벌 유닛이 1순위로 쓰였지만 이제는 무인기라는 뜻으로 더 많이 쓰이는 듯.
옛날에는 하늘로 뭔가 장난감을 띄우고 싶은 사람은 연을 날렸다. 혹은 자기가 직접 하늘로 뜨고 싶으면 기구를 띄우거나 멀리 언덕으로 가서 글라이더 정도는 탔던 것 같다. 그 반면, 자체 동력을 갖춘 초소형 비행체를 띄우는 건 확실히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다. 격추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으면서 그래도 스스로 자세와 방향 조절이 가능할 정도로 동력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불순한 용도로 얼마든지 활용이 가능하다. (도촬이나 폭탄 투하 같은..)
이런 특성을 이용해 요즘은 북한조차도 심심하면 무인기를 날려서 남조선을 정찰하는 게 심심찮게 보도된다. 옛날의 땅굴과 무장공비에 이어 트렌드가 바뀌었다. 그래서 무인기 비행은 결국 안보상의 이유로 인해, 무조건 전면 금지까지는 아니어도 규제· 제약이 크게 걸릴 수밖에 없는 행위가 됐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비행기 관련 취미는 무선 전파나 총기 관련 취미하고도 유사성이 있어 보인다(한쪽은 교통, 한쪽은 통신. 한편, 총기는.. 더 말이 필요하지 않고.).
국내의 비행 금지 구역들은 내부적으로 이름 내지 식별자가 부여되어 있다고 한다. 일단 휴전선 근처는 동· 서부를 막론하고 0순위로 비행 금지이며, 평지의 민통선보다도 영역이 더 넓다.
서울 강북에는 청와대로부터 반경 3.8km까지가 P-73A이라고 명명된 금지 구역이고, 거기에서 추가로 반경 4.6km까지가 P-73B라는 완충 지대이다. 여기는 드론은 물론이고 민항기조차도 못 다닌다. 전쟁이라도 나지 않는 한 하늘 위로 비행기가 다니는 걸 구경할 일은 없다는 뜻이다.
항덕이라면 친숙할 그림이 드디어 나왔다.
P-73을 벗어나서 강북에 노원· 중랑, 강남에 영등포· 강남· 서초구는 금지보다는 수위가 좀 덜한 R-75 '제한 구역'이다. 비행을 위해서는 하루 전에 신고해서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강동· 송파 정도의 외곽은 돼야 서울에서 그럭저럭 드론을 띄울 수 있다.
용산구는 강북이고 P-73B의 반경에 포함되는데도 저기만 예외적으로 금지가 아닌 제한 등급인 이유는.. 미군 기지인 관계로 국군의 통제를 덜 받기 때문이지 싶다.
지난 2013년엔 김포 공항을 출발한 한 헬리콥터가 안개 때문에 서울 강남 삼성동에서 아파트와 충돌하여 추락한 사고가 났었다. 이때 헬리콥터는 마치 한강 수상 택시처럼 한강 위로만 다니면서 서울을 횡단했다. 규정상 거기로만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김포 공항에서 잠실까지 서울 동서를 횡단하는 예상 소요 시간은 10분이 채 되지 않았다. 자동차밖에 안 타는 땅개의 입장에서는 가히 시공간 워프 수준이긴 했다. 그냥 지하철 두세 정거장 지나듯이 강서구에서 송파구로 슈욱~
청와대나 인구 밀집 지대 말고 드론을 띄울 수 없는 곳은 전국의 민간 및 군 공항의 반경 9.3km 이내이다. 기존 비행기들과 충돌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구로구· 금천구 같은 서울 남서쪽 외곽은 경부선 철도가 지나며 하늘로도 R-75에도 속하지 않는 관계로 김포와 인천 공항을 드나드는 민항기의 항로이다. 그렇기 때문에 열차뿐만 아니라 비행기가 수시로 드나드는 걸 볼 수 있다.
내 기억으로는 용인 고기리 유원지에서도 하늘에 비행기를 지나다녔으며, 관악산 중턱의 서울대 공대 인근에서도 비행기가 보였다. IT 기업들이 입주해 있는 판교 테크노 밸리에는 민항기는 없고 군 수송기가 수시로 날아다닌다.
고양시에 있는 한국 항공 대학교는 수도권이라는 위치는 괜찮지만 R-75를 포함한 온갖 제약들 때문에 정작 본캠에서는 비행 실습을 제대로 하기 어렵다. 조금만 삐끗하면 민항기 항로 침범에다 청와대 근처, 군부대 근처, 휴전선 근처 등의 태클이 걸리기 때문이다. 실수로 거기를 침범했다간 곧장 경고 방송에 갈굼과 욕이 쏟아진다. 그래서 비행 실습장은 멀긴 해도 공간 제약이 없는 지방으로(울진이라든가..) 옮겼다.
자, 항공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면서 국내에서 특별히 비행이 추가로 금지된 곳은.. 바로 원자력 관련 시설 주변이다. 전국의 원자력 발전소들 인근은 엄격한 비행 금지 구역이다.
수도권을 벗어나 전국 단위의 비행 금지 구역 지도를 보면 대전 일대가 수도권 이상으로 꽤 넓게 비행 금지 구역인 것을 알 수 있다. 그것도 중심지가 세종시도 아니고 정부 청사도 아니고 군 본부가 있는 계룡시도 아니고 대전 북부인데...
그 주인공은 바로 '한국 원자력 연구원'이다. 건물 한두 채가 아니라 대학 캠퍼스 급의 거대한 단지이며 고속도로 나들목과도 가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간 지도에는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은 최고급 보안 시설이다. 똑같이 민간 지도에 안 나와 있지만 국방 과학 연구소, 국정원 등에 비해서도 굉장히 인지도가 없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얘 때문에 대전에서는 하늘에 비행기를 볼 일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승객의 입장에서도 서울에서 부산(혹은 그 반대)을 비행기로 가면 육로로 갈 때와는 달리 대전을 구경할 일이 없다. 참 신기하지 않은가? 사실, 서울에서 부산의 직선 경로 자체도 대전이 아니라 충북 중앙을 관통하는 과거의 영남대로가 더 지름길이기도 하고 말이다.
지방으로 나가서 이런 거 저런 거 다 제낀 명시적인 비행 허용 구간에서는 별다른 절차 없이 개인이 싸제 무인기를 띄울 수 있다. 단, 이것도 고도 150m 이내 한정이기 때문에 건물로 치면 4, 50층 정도 높이까지만 가능하다. 더 높이 띄우려면 여전히 허가를 받아야 함. 그리고 시간대 제약도 있는지라 해가 떨어진 뒤에는 비행을 할 수 없다. 아까도 말했지만 영락없이 민통선 출입 제약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비행체들은 땅으로 뭘 떨어뜨린다거나 인구 밀집 지역으로 추락하는 초대형 민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무인기의 경우, 원칙적으로는 원격 조종자가 자기가 조종하는 비행체를 눈으로 식별할 수 있는 거리까지만 비행체를 보낼 수 있다. 땅에 있는 사람들은 밤에 날아다니는 헬리콥터 같은 비행기를 향해 장난으로라도 레이저 포인터를 쏘지 말아야 하듯(조종사의 시력과 비행기의 안전을 크게 해치는 범죄임), 싸제 무인기를 띄우는 사람에게도 지켜야 할 것이 있는 법이다.
자동차야 반드시 등록시키고 번호판을 달게 해서 통제한다지만, 비행체들은 일일이 그렇게 할 수도 없으니 더 강력한 규제가 불가피한 것이다. 꼭 무인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디 여행 갈 일이 있으면 여기는 비행기 항로 근처인지 아닌지를 본인은 더 눈여겨보게 될 것 같다.
* 비행 관련 여담:
1. 과거 항공의 선구자들은 참 엄청난 자유를 개척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찰스 린드버그 같은 사람은 기술적으로는 참 미약하고 허접했겠지만, 그래도 지금 같은 대공 레이더, 비행 신고와 허가, 영공 통과료 같은 복잡한 물건이나 제도가 없던 시절에 자작 비행기로 대서양을 건너서 다른 나라로 가는 데 성공했으니 말이다. 겨우 KTX 비슷한 속도밖에 못 내는 프로펠러기로 30몇 시간을 잠을 안 자고 혼자 비행기를 조종했댄다. 그리고 파리에 도착해서 환영 인파들에게 최소한의 인사만 한 뒤 곧장 호텔로 돌아가서 잠부터 잠..;;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돌아올 때는 군함을 타고 왔다.
2. 영어로 fly는 '날다' 이상으로 날아서 '이동하다'의 뜻이 더 많이 담긴 단어 같다. 그래서 fly to New York 같은 말도 쓰이고 비행기 운항편을 일컬을 때도 저 단어 자체를 명사화해서 flight라고 부른다.
무하마드 알리의 명대사 "나비처럼 날아가서 벌처럼 쏜다"의 영어 동사는 fly가 아니라 의외로 float이다. 굳이 물에만 뜨는 게 아니라 공중에 붕 뜬다는 뜻.
본인은 개인적으로 저 문장을 FPS Quake의 매뉴얼에서 처음 봤다. Scrag라는 몬스터에 대해서 무하마드 알리의 말을 인용해서 설명해 놓았는데 저게 딱 정확한 묘사이다. 공중에 둥둥 떠 있기만 한 놈이므로.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