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나 비행기, 열차 같은 모든 교통수단들은 진행 방향이 다른 교통수단과 한 지점에서 교차할 위험이 있는 곳에서는 신호 시설의 통제를 받으며 움직여야 한다. 비행기는 이륙이야 그냥 관제탑으로부터 허가가 날 때까지 활주로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되지만 착륙은.. 신호 대기를 할 수 없고 상시 선회 비행을 해야 하기 때문에 트래픽 대비 활주로가 부족한 혼잡한 공항에 착륙하는 게 다소 난감한 일이다.

그런데 동일 경로의 공유와 교차가 같은 종류의 교통수단끼리만 발생하는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옛날에 이종간의 하이브리드를 시도한 교통수단들을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교통수단들간의 이색적인 교차 양상에 대해 살펴보겠다.

1. 사람 vs 자동차

이건 자동차가 발명되면서 가장 먼저 생긴 갈등(?)일 것이다. 이 때문에 일단 횡단보도가 만들어졌으며, 아주 혼잡한 곳에서는 사람과 자동차를 공간적으로 완전히 분리하기 위해서 육교와 지하도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높이의 변화는 노약자, 혹은 짐이 많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는 악재이기 때문에, 귀차니즘에 충실한 보행자의 무단횡단을 완전히 막지는 못하고 있다.

사람들과 차들이 터져 나가는 교차로에서는 그냥 단순무식하게 일정 시간 주기로 빨간불과 파란불을 반복하면 되지만 한적한 시간과 장소에서는 점멸 신호 내지 주문형(보행자가 버튼을 눌러서 요청을 했을 때에만 잠시 후 파란불이 되는) 신호등이 운용되기도 한다.

2. 육상 vs 철도

육상 교통수단들 중 진행 우선순위가 가장 높은 놈은 단연 철도 차량이다. 차량이 무겁고 수송량이 압도적이며, 무엇보다도 너무 둔하고 지면 마찰도 작아서 가감속을 날렵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얘가 일단 속도가 붙어 버렸으면 아무도 감당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주변의 차와 사람들이 알아서 비켜야 한다. 우리나라는 대인 교통사고가 나면 무단횡단에 굉장히 관대하고 오로지 운전자에게만 과실을 뒤집어 씌우는 관행이 심하지만, 그래도 철길 주변 보행이나 철길 건널목 교통사고에서까지 보행자에게 무한 관대하지는 않다.

철길 건널목 사고가 나면 철도 당국은 여러 모로 골치아파진다. 2002년 5월에 어느 전라선 상행 새마을호에서 발생했던 3연속 건널목 사고는 요런 사고의 아주 극단적인 예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지금까지 꾸준히 전국의 수백, 수천 곳에 달하는 건널목들을 야금야금 모조리 정책적으로 입체화해 왔다. "열차를 급정거시킬 수 없다면 애초에 급정거해야 할 상황 자체를 봉쇄하자"라는 발상에 따른 것이다. 이런 조치 덕분에 오늘날 철도 건널목 사고는 3, 40년 전에 비해서 굉장히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이 아닌 서울에도 일부 건널목이 있다. 물론 무려 3복선이 된 경부선이나 2복선짜리 경인선 구간에 건널목이 있는 건 아니며, 그 이북의 경의선과 경원선, 특히 경원선 구간에 한정되어 있다.

먼저 서빙고 역에서 한남 역 방면으로 400미터쯤 전방 반포대교 근처를 보면 건널목이 있다(서울 용산구 서빙고로62길). 새마을· 무궁화 같은 열차도 아니고 전동차가 지상에서 차들이 기다리고 있는 건널목을 통과해 간다니 참 상상이 안 된다.
서빙고 역 인근에는 자동차 도로를 예각으로 가로질러서 미군 기지로 들어가는 단선 철도도 이따금씩 쓰이는가 보다. 이거 유명한 사진이다. 차단기도 없이 이거 정말 안습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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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회기 역에서 외대앞 방면으로 얼마 안 간 곳에도 건널목이 있으며(서울 동대문구 휘경로12길), 이웃 외대앞 역은 역 출입구에 대놓고 선로 횡단 건널목이 있다. 육교와 지하도로 대체 경로도 있으니 코레일에서는 여기를 못 없애서 난리이나, 인근 주민과 상인들은 거세게 반발하고 있어서 건널목을 완전히 못 없앤 상태이다.

심지어 육교에다가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까지 다 놔 줘도 주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고 한다. 아무리 최첨단 액세서리 기능들로 무장한 안경이나 휠체어가 있어도, 그런 게 애초에 필요하지 않은 건강한 눈과 건강한 다리보다 나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그런가 보다.
경원선 구간은 일반열차가 다니기도 하고 게다가 이렇게 건널목까지 있으니 전동차(운행 계통상으로는 경의중앙선)의 배차간격을 지금보다 더 줄이는 건 도저히 무리일 것이다.

경원선보다 상태가 더 안습한 건널목은 바로 서울 역 이북 경의선 구간에 있는 '서소문 건널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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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수색 기지에서 서울· 용산 역으로 입출고하는 KTX 포함 모든 일반열차들이 이 선로를 지나기 때문에 그야말로 크리티컬 중의 크리티컬이다. 그야말로 몇 분이 멀다 하고 차단기가 내려온다. 애초에 경의선 서울-신촌 통근열차/전동차가 1시간에 1대꼴밖에 못 다니고 지금도 경의중앙선의 지선으로 전락한 이유도 이런 열차들의 트래픽 때문이다.

그러니 이 건널목으로 정상적인 차량 통행은 곤란하다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을 완전히 틀어막고 건널목을 없애기에는 지상의 자동차 트래픽도 무시 못 하며(밤에는 열차 운행도 뜸해지거나 중단되니), 이 건널목은 입체화를 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바로 위로는 서소문 고가차도가 있고, 지하로는 서울 지하철 2호선이 지나기 때문이다(시청-충정로 사이. 서울 도시 구간에는 2호선이 별로 깊지도 않음). 여러 모로 진퇴양난이다.

3. 육상 vs 배

배는 물 위를 다니는 교통수단이며, 자동차는 수륙양용이 아닌 이상 다리가 놓여 있어야 물 위를 건널 수 있다. 그러니 자동차와 선박이 교차 가능한 상황이란 단 한 가지 경우뿐이다. 바로 다리가 도개교(bascule, 跳開橋) 형태인 것이다. 이게 철도로 치면 차단기가 내려오는 것과 개념적으로 동일하다.

요즘은 건축 기술이 발달한 덕분에 애초에 다리를 지을 때 어지간히 큰 선박도 아래로 지나갈 수 있게 왕창 높고 크고 기둥 간격도 넓게 만들곤 한다. 선박의 통과를 위해 다리를 통째로 들어올리게 되면 그 동안 자동차들의 통행이 막히는 큰 불편이 초래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는 요즘은 길거리에 자동차들이 좀 많나..;; 그러니 도개교는 노면 전차만큼이나 좀 과거의 유물이고 오늘날 찾아보기 힘든 물건이 돼 있다.
우리나라에는 도개교가 전국을 통틀어 딱 한 군데 있다. 바로 부산의 영도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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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는 일제 강점기인 1934년에 도개교 형태로 오리지널이 완공됐다. 부산은 일본과 가까운 항구 도시로서 그 시절부터 대도시였으며, 나룻배만으로 영도와 본토 사이를 오가기에는 트래픽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다리가 생기긴 했지만 그때엔 선박의 트래픽도 여전히 만만찮은 수준이어서 리즈 시절엔 다리 도개를 하루에 무려 7번이나 했다고 한다. 매회 도개 시간은 약 20분.

이렇게 자동차와 선박 사이의 평면교차가 이뤄졌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영도대교의 도개는 15분씩 하루 2회로 줄었다. 게다가 지금으로부터 무려 50년 전인 1966년 9월에는 다리 아래로 상수도관을 매달면서 도개가 중단되어 버렸다. 노면 전차(1968) 내지 증기 기관차(1967)와 비슷한 시기에 도개교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는 게 흥미롭다.
뭐, 도개는 사라졌지만 그래도 우리는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다리를 근 60년 가까이 잘 쓰면서 지냈는데.. 마침 1994년 가을,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터졌다.

이 때문에 나라에서는 혹시 성수대교 시즌 2가 벌어질 여지는 없는지 전국의 유명 교량들을 부랴부랴 긴급 점검했다. 이때 서울에서는 지하철 2호선이 다니는 당산철교가 시범 케이스로 제대로 걸렸다. 그야말로 "성수대교가 안 무너졌으면 얘가 무너졌을 것이다. 달리던 지하철이 다리와 함께 나란히 강으로 추락해서 초특급 대형 참사가 벌어졌을 것이다" 급의 막장이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산철교는 전면 철거 후 새로 만들어졌는데..

부산에서는 지은 지 너무 오래 된 영도대교가 '대대적인 긴급 보수, 혹은 아예 철거 후 재시공 필요' 판정을 받았다. 간이역 건물만큼이나 역사적인 가치가 크고 안전을 위해 여러 번 땜빵도 했지만, 넘쳐나는 교통량을 감당하고 근본적인 안전이라는 토끼까지 둘 다 제대로 잡기 위해서는 지금 다리는 철거해 버리고 다리를 더 큰 규모로 다시 놓을 필요가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됐다. 그래도 새 다리는 오리지널 영도대교와 최대한 같은 외형으로 만들고, 먼 옛날에 봉인되어 버렸던 도개 기능도 상징적인 차원에서 다시 부활시켰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영도대교는 지난 2013년 11월에 개통했다. 하루 한 번(오후 2시) 다리를 15분 동안 들어올린다.
그러고 보니 민방위 대피 훈련도 매달 15일의 이 시간대에 20분 동안 진행한다. 다리를 들어올리는 건 출퇴근 시간대를 피해서 벌건 대낮에 하는 게 아무래도 운전자들에게 민폐가 덜하기 때문일 것이다.

4. 육상+철도의 특수한 경우

음, 그러고 보니 전라남도 무안과 영암 사이에는 호남선의 지선인 대불선이라는 화물 철도가 있다.
얘도 종점 인근에 자동차 도로와 만나는 건널목이 있는데, 여기는 서울처럼 열차나 차량 통행량 자체가 너무 많아서 입체화가 필요한 곳은 아니다. 하지만 서울과는 전혀 다른 문제가 건널목에 존재한다.

대불선은 전철화가 돼 있다. 그런데 이게 고성능 전기 기관차를 운용 가능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는 호재이지만, 화물 수송 능률면에서는 큰 악재이기도 하다. 공중에 주렁주렁 매달린 전차선 때문에 크레인으로 컨테이너를 화차에다 선뜻 실을 수가 없으며, 게다가 전차선의 높이보다 더 높게 화물을 쌓은 트레일러가 건널목을 지날 수 없어지기 때문이다. 즉, 교량 때문에 높은 배가 통과할 수 없어 지는 것과 비슷한 양상의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여기 건널목에는 세계에서 최초로 개발됐고 전국에서 하나밖에 없는... 이동식 전차선이 존재한다. 마치 배가 지나가게 다리를 들어올리듯, 아슬아슬 간당간당한 대형 트레일러가 건널목을 통과할 때는 건널목 위를 지나는 전차선을 잠시 치울 수 있게 한 것이다. 마치 주문식 횡단보도 신호기처럼. 세상에 이런 것도 있다.

5. 육상 vs 비행기

자동차가 비행기의 항로를 침범한다는 건 불가능-_-한 일이고, 그 대신, 과거에 일부 자동차 전용 고속도로가 비상시에 군용기의 활주로로 쓰이는 경우는 있었다.
경부 고속도로에 신갈, 천안을 비롯해 몇몇 구간이 이상하리만치 곧고 길게 잘 뻗었으며 1990년대까지만 해도 붙박이 중앙분리대가 없이 페이크 이동식 중앙분리대만 있었다. 그런 곳이 바로 활주로 공용 구간이었다.

옛날에는 물론 자주는 아니었겠지만 공군이 가끔씩 경부 고속도로 일부 구간을 틀어막고 실제로 훈련을 했다.
동아일보 1988년 3월 30일자를 보면, "팀 스피리트 한미 합동 군사 훈련의 하나인 비상 활주로 이착륙 훈련이 30일 경부 고속도로 판교-신갈 구간에서 전투기 F4, F5, F15, F16, 대형 수송기 C123, 폭격기 B52 등이 참가한 가운데 실시됐다." 같은 보도가 있다. TV 뉴스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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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엔 지금 8차선, 10차선으로 확장되고 있고 24시간 차들로 터져 나가는 그 경부 고속도로의 일부를 틀어막고, 거기서 전투기 이착륙 훈련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지금이야 그런 비상 활주로들은 다른 한산한 도로로 옮겨지고 해제되고 있다. 특히 활주로 구간의 중간에 분기점이나 나들목을 만들다 보면 활주로 기능이 자동으로 상실되었다. 성환 활주로에 생긴 북천안 IC처럼 말이다.

그런데, 활주로+고속도로 공용보다 더 엽기적인 사례가 있다.
스페인의 남부에 있는 영국 속령인 '지브롤터'라는 지역에는 지브롤터 국제 공항이 있는데, 얘는 전세계의 공항들 중 유일하게 공항 활주로가 일반 도로와 수직으로 평면교차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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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가 이착륙 예정일 때는 마치 철도 건널목처럼 차단기가 내려오며, 운전자들은 눈앞에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걸 저렇게 빤히 지켜보게 된다.
활주로에는 이물질 하나 있어서는 안 된다. 일례로 2000년 7월에 발생한 에어프랑스 4590편 콩코드 여객기 추락 사고는 바로 전에 먼저 이륙한 비행기에서 떨어진 부품을 밟는 바람에 발생한 사고였다.

그런 와중에 여객기 활주로가 자동차 도로와 평면교차한다는 건 안전이나 보안 면에서 굉장히 아찔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활주로를 포함하는 공항 담장 외벽에 철조망이 괜히 쳐진 게 아닌데.;;
캄보디아의 씨엠 립 국제공항은 비행기 착륙 후에 여객 터미널까지 승객이 활주로 바닥을 걸어서 이동하며, 제주 국제공항에는 바람의 방향에 따라 X자 모양으로 평면교차하는 두 활주로를 바꿔 가며 운용하긴 한다. 일본의 나리타 국제공항은 지역 주민들의 알박기 때문에 반쯤 고자처럼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지브롤터 국제 공항은 그런 공항들보다 더 엽기적이다. 비보호 좌회전+평면교차가 있던 옛 88 올림픽 고속도로의 남장수 IC의 공항 버전이라 하겠다.
활주로는 지형과 역사적인 사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저렇게 만들어졌으며, 딱히 더 개선의 여지가 없다고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6/08/01 08:39 2016/08/01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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