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20년 전의 윈도우 3.0 이래로 한글판 운영체제가 내장해 온 한글 글꼴은 바탕, 돋움, 굴림, 궁서의 4종류였다. 그리고 한자 글꼴은 바탕, 돋움에만 존재하여 2종류였다. 지극히 교과서적인 기본 글꼴에만 한자 글립이 있었다는 뜻.
그때는 fallback 글꼴이라는 개념조차 없었기 때문에 궁서나 굴림 같은 글꼴을 쓰면 한자가 아예 나타나지도 않았었다.
그러던 것이 윈도우 95에서부터는 상황이 크게 개선되어 궁서의 한자는 바탕으로, 굴림의 한자는 돋움으로 좀더 유사한 글꼴의 한자 글립을 공유하게 되었다. 이것은 별도의 fallback 글꼴을 지정한 게 아니라, 아예 한 글꼴 파일이 collection으로 바탕과 궁서를 나타내고 있고 한자 글립을 내부적으로 바탕의 것으로 공유하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윈도우 비스타에서 새롭게 추가된 글꼴인 ‘맑은 고딕’도 한자 글립을 갖고 있지 않다. 한자를 찍으려고 하면 돋움체의 글립이 자동으로 쓰이는데 이것은 fallback 글꼴이 쓰인 게 맞다.
한자 자체도 윈도우 95 시절까지는 고작 KS 완성형 코드에 있는 상용 한자 4888자밖에 없었다. 그러던 것이 98부터는 확장 한자 2856자가 추가되었고, XP 무렵에는 유니코드의 ‘한중일 통합 한자’ 영역의 한자가 모두 기본 제공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스타부터는 ‘한중일 통합 한자 확장 A’까지 굴림/돋움 같은 글꼴에서 기본 제공되기 시작했고, 심지어 surrogate 영역에 존재하는 확장 B도 외국에서 제작된 별도의 글꼴을 자동으로 fallback 하여 표현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이렇게 PC 환경이 좋아지면서 컴퓨터에서 문자를 표현하는 능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돼 왔는데 본인이 늘 아쉽게 생각하는 게 있다. 기본 제공되는 한자 서체 자체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바탕과 돋움 두 종류뿐이라는 점이다. 이제는 굴림과 궁서도 고유한 한자 글립을 제공할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21세기가 된 지 무려 10년 가까이 지나고 온갖 기발하고 현란한 한글/영문 글꼴이 넘쳐나는 지금도, 한국에서 소위 명조와 고딕 계열 이외의 한자 글꼴을 찾기란 의외로 매우 어렵다! 사실은 신명조와 중고딕 말고 견명조, 견고딕조차도 드문 실정이다.
어지간한 운영체제나 워드 프로세서가 번들로 제공하는 글꼴에서는 거의 찾을 수 없고 최소한 별도의 글꼴 확장팩에서나 제공된다. 이런 의미에서 과거 아래아한글 2.5 확장팩은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신명 궁서’는 아래아한글이 최초로 제공한 궁서 계열 한자 글꼴이었다.
그나마 견명조, 견고딕, 궁서는 좀 사정이 나아졌다. 아래아한글이 번들로 제공하는 HY견명조, HY견고딕에도 한자 글립이 같이 들어있다. 하지만 굴림 계열의 한자 글꼴은 정말 없다. 무려 아래아한글 3.0대 내지 96의 확장팩부터 제공된 한글맵시 글꼴에서 그런 한자 글꼴을 본 기억이 나고 HFT가 아닌 범용적인 TTF 방식은 아직까지 구경조차 못 해 봤다.
둥근고딕, 세나루, 디나루 등의 명칭으로 불리는 이 굴림 계열 글꼴은 원래는 그래픽이나 헤드라인처럼 일반 PC에서 보기가 쉽지 않은 글꼴이었으며, 아래아한글도 2.5 확장팩에서부터나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윈도우 95가 이 글꼴을 확 퍼뜨려 준 덕분에 굴림은 그때부터 그야말로 길바닥에 차이는 돌멩이마냥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웹과 인쇄물 등에서 제일 흔하게 쓰이는 글꼴이 되었다. ^^
워낙 흔하다 보니 굴림 말고 별도의 굴림 계열 글꼴은 거의 나오거나 쓰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흔한 기본 글꼴에 한자 글립이 없었고, 따라서 한자 글립이 추가된 다른 둥근고딕 글꼴도 거의 볼 수 없게 된 게 아닌가 한다.
사실 굴림체 계열의 한자 글꼴이 가장 널리 쓰이고 있는 곳은 일본이다. 둥근고딕 한자로 쓰인 문장만 봐도 일본이 바로 떠오를 정도이다. 한국에서 이런 글꼴을 볼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뭔가 소프트웨어를 동아시아 환경에 맞게 localize할 때 기준으로 삼는 언어 역시 단연 일본어이다. 국력도 국력이거니와, 워낙 일본의 문자 체계와 문자 입력법이 복잡하기 때문에 일단 일본을 기준으로만 프로그램을 고쳐 놓으면 한국이나 중국어 버전은 약간만 추가 조치를 취하면 되기 때문이다.
굴림체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굴림체가 한글답지 못하고 일본 한자 서체의 스타일을 그대로 베꼈다고 주장한다. 사실, 한글 윈도우 95가 돋움이 아닌 굴림을 기본 글꼴로 내세우고 나온 것도, 굴림 계열 글꼴을 즐겨 쓰는 일본 쪽 문화를 참고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실제로 각종 컴퓨터 용어를 제정하거나 심지어 한글 코드과 글꼴 같은 걸 정할 때도 우리나라 엔지니어들은 일본은 localize를 어떻게 했는지를 엄청 많이 참고해 온 것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 그렇게 굴림체를 도입해 놓고도 정작 둥근고딕 스타일의 한자 글립은 아직까지도 없다는 게 아쉽다. 예전이야 메모리 용량이 아깝고 하드디스크 용량이 아까워서 뺐다 치지만 지금은 전혀 그런 걱정이 없고 평생 쓸 일 없을 것 같은 유니코드 상의 온갖 외국어 문자도 다 글꼴이 내장되어 있다. 현실적으로 한글과 로마자 다음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문자인 한자를, 많이도 필요 없고 상용 한자 4888자만이라도 바탕과 돋움이라는 단조로움을 벗어나게끔 운영체제가 배려를 해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