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은 얼마 안 있으면 적성 검사를 받아야 할 정도로 면허를 딴 지 오래 됐지만, 지금까지 차를 몬 경험이 거의 없고 운전 실력 역시 그 이름도 유명한 장롱 면허 수준에 머물러 왔다. 명절 때나 아니면 다른 일로 인해 고향을 드나들 때는 당연히 선택의 여지가 없이 대중교통만 이용했다. 이런 상황은 앞으로도 한동안 변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이번 설에는 어떻게 여건이 잘 맞은 덕분에 21세기 이래로 최초로 자차를 이용했고, 더구나 꽤 장거리를 직접 운전까지 해서 무사히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맨날 고속버스에 의지해서 다니던 경로를 내 손으로 주파하니 무척 기분이 좋았다.
1. 천호대로를 타고 지하철 5호선 라인을 따라 동쪽으로 쭉: 천호대로는 서울 시내에서 중앙 버스 전용 차선이 가장 먼저 생겼을 정도로 넓은 도로이다. 직진만 하면 되지만 길 자체가 직선으로만 된 것은 아니다. 중간에 커브도 있고, 언덕도 꽤 있다. 이쪽 구간은 한강이 수평선 방향이 아니라 수직선 방향에 가깝게 흐르기 때문에, 동쪽으로 가는 과정에서 천호 대교로 한강을 건너게 된다.
2. 외곽 순환 고속도로의 상일 IC까지 43번 국도: 강동 역까지 통과하고 나면 5호선 라인을 벗어난다. 이때부터 차선이 좁아지고 지나가는 차들이 눈에 띄게 뜸해지며, 아파트 대신 각종 화원, 공원, 언덕이 나타나면서 시가지가 아닌 교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직진만 쫙 하면 고속도로가 나오니 이보다 간편할 수가 없다. 상일 IC로 진입하지 않고 또 직진을 하면 하남시가 나온다.지도로만 보던 지역을 실제로 구경할 수 있었다.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이 반포 IC 인근에서 경부 고속도로를 접수하고 있다면 강변 동서울 터미널은 중부 고속도로를 접수하고 있다. 사실 이 터미널 자체가 중부 고속도로의 활성화를 위해 정책적으로 세워진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동서울 터미널에서 출발하여 중부 고속도로로 진입하는 버스들은 알고 보면 굉장히 비효율적인 경로를 이용한다.
먼저 올림픽 대교를 이용하여 강남으로 건넌 뒤, 올림픽대로를 타고 한참을 동쪽뿐만 아니라 ‘북쪽’으로 주행한다. 남쪽으로 가야 할 차가 북쪽으로 가서 상일 IC가 아닌 강일 IC를 통해 고속도로로 진입한다. 버스 차창을 살펴보면 서울 지하철 5호선 고덕 차량기지 근처를 지나는 게 보이니, 얼마나 우회 경로인지 알 수 있다. 이번에는 자가용을 직접 운전한 덕분에 그런 우회 경로를 피할 수 있었다.
3. 외곽 순환 고속도로(100): 8차선으로 된 근사한 도로이다. 조금만 남쪽으로 내려가면 하남 분기점이 나오고 여기서 중부 고속도로(35) 쪽으로 가면 동서울 요금소가 나온다. 새벽에 출발했지만 고난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극심한 정체가 계속됐다.
4. 중부 고속도로: 이 도로는 처음엔 8차선인 것처럼 시작하지만 얼마 못 가 차선의 절반은 제2 중부 고속도로(37)로 빠져나가고 4차선으로 줄어든다. 제2 중부는 잘 알다시피 중부 고속도로의 용량 확장을 위해, 영동 고속도로(50)와 만나는 호법 분기점까지 오리지널 중부의 옆에다가 도로를 또 지은 것이다. 중부 고속도로는 경기도 남동부의 험악한 산지를 터널과 교량으로 연결한 험한 선형이기 때문에, 경부처럼 차선 확장을 도저히 할 수 없고 옆에 도로를 또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5. 영동 고속도로: 호법 분기점과 여주 분기점까지는 잠시 영동 고속도로 구간을 이용한다. 8차선의 아주 시원시원한 길이었지만 중부내륙 고속도로(45)로 진입하는 길부터는 다시 차들이 거북이걸음을 시작했다.
6. 중부내륙 고속도로: 가장 장거리 구간이지만 정체가 심해서 좀 답답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4차선이고 최고 시속이 100이 아닌 110이며 터널과 고가 교량이 많다는 점에서는, 중부 고속도로와도 비슷하다.
내가 운전하던 무렵엔, 정체에 시달리던 하행과는 달리 맞은편 상행은 차가 거의 없고 한산하여 극단적인 대조를 보였다. 정체는 거의 괴산 이남까지 가서야 풀려서 차가 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날씨가 정말 판타지 급이었다. 눈이 부슬부슬 내리다가 산악 지대로 가니 함박눈으로 돌변했는데, 터널을 하나 지나고 나오자 눈이 그치고 햇볕이 났다. 그랬는데 어느 샌가 또 잔뜩 흐린 날씨로 바뀌었다. 하지만 다행히 빙판길은 없었으니 눈 때문에 딱히 고생하지는 않았다.
7. 경부 고속도로: 김천부터 드디어 내게 아주 친숙한 경부 고속도로이다. 수도권이 아닌 곳에서 8차선이나 되는 유일한 고속도로이다. 물론 경산부터는 6차선으로 줄어들고 영천 이남부터는 4차선으로 줄어들지만 말이다. 경부 고속도로가 개통한 지 벌써 40주년이 돼 가는데, 아직까지 4차선을 유지하고 있는 극소수 구간이 그쪽이다.
여기부터는 가끔 서행 상태가 되긴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소통이 원활했다. 무척 인상적인 점은 아까와는 반대로 상행이 막히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 그나저나 포항으로 가는 길목인 도동 분기점에서의 극심한 혼잡이었다. 저 많은 차들이 포항을 드나드는 차들이라는 것에 적지 않게 놀랐다.
서울에서 경주까지 문에서 문까지 7시간 가까이 걸렸으니 그렇게 빨리 가지는 못했다. 워낙 정체가 심해서 이거 시속 100은 낼 기회가 있을까 궁금했는데 그래도 이따금씩 앞에 차가 없을 때는 순간적으로 130~140까지 밟은 적도 있었다.
영천에서 경주까지는, 중앙 분리대와 입체 교차로까지 갖추고 준 고속도로 급으로 변모해 있는 4번 국도를 이용했다. 시설 좋고 차도 거의 안 다니니 최적의 드라이브 코스였다. 최대 시속 80km로 설계되어 있지만 120까지 밟아 보기도 했다.
그런데 역시 고속도로와의 차이는 뭐니 뭐니 해도 커브의 반경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거친 어느 고속도로에서도 찾을 수 없는 급커브가 곧바로 느껴졌다. 국도와 고속 국도의 차이가 이런 것이구나. 도로의 설계 최대 시속은 이런 것까지 감안하여 산출된 것이다.
이렇게 무사고로 한번 완주는 했지만, 여전히 난 운전이 어렵게 느껴진다.
군대에서도 사고는 이병 시절이 아니라 어설프게 고참 행세를 시작하는 일병 시절에 많이 난다고 하듯, 자동차 사고도 완전 긴장이 바짝 든 왕초보 시절보다는 스스로 초보 딱지를 뗐다고 생각하고 방심할 때 가장 많이 난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지도 핸들을 잡던 기억이 머리에 선하다. 방심하다가 금방이라도 앞 차를 추돌할 것만 같은 그런 느낌 말이다. 차간 거리를 굉장히 길게 유지하면서 달리고 싶은데 그러면 내 뒤에 있던 차가 어김없이 앞으로 끼어드니 그렇게 하기도 쉽지 않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