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 11일.
테러리스트에 의해 납치된 여객기가 저공비행 후 세계 무역 센터 건물에 자폭 충돌하는...
미국 건국 이래 초유의 대형 테러 참사가 벌어졌을 때의 일이다.
여객기를 이용한 테러였음을 인지한 미국 정부는, 당시 미국 영공을 날고 있는 모든 여객기들로 하여금 지금으로부터 3시간 이내에 인근의 공항으로 비상 착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대상은 미국뿐만 아니라 캐나다 영공으로까지 확대되었으며, 이때 무려 5천여 대에 달하는 비행기들이 비행을 중단해야 했다고 한다.
이들은 긴급 명령을 받고서 인근 공항으로 허겁지겁 다 내려갔는데... 유독 태극 마크가 선명한 대한 항공 소속의 모 여객기만이 215명의 승객을 태운 채 명령을 씹고 나홀로 계속 날고 있었다. 흠좀무. 도쿄를 출발하여 앵커리지로 가던 보잉 747기였다.
이 때문에 테러를 당한 지역인 미국 동부뿐만 아니라 서부도 비상이 걸렸다. 중무장한 F-15 전투기 두 기가 즉시 출격했다. 초음속으로 날아가서 여객기를 따라잡고 바짝 붙었다. 미국 공군 사령관의 명령 한방이면 그 여객기는 테러리스트에게 장악 당한 걸로 간주되어 격추 당할 수도 있었고, 1983년의 피격 사건의 비극이 소련에 이어 미국에서 재연될 뻔했다.
이건 마치 무장 탈영병의 사살을 군대에서 허락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탈영 자체는 비록 무겁긴 해도 사살할 정도로 죽을죄는 아니다. 그러나 개인 무장으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민간인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저항하는 탈영병을 어쩔 수 없이 사살하는 것이다.
그런 것처럼 테러리스트에게 탈취 당한 비행기는 도심에서 추락하거나 사고를 치면 더욱 큰 피해를 끼칠 수 있다. 그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조기에 격추하는 것이다. 작년(2009) 성탄절 때 미국 여객기 테러를 시도했던 빈 라덴 배후의 테러리스트도, 다른 때가 아니라 비행기가 딱 미국 시가지 상공에 진입하고 착륙 직전 상태가 됐을 때 폭탄을 터뜨리려 했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저런 사람이 버젓이 탑승 보안 검색대를 통과했다니, 911 때 당하고도 미국이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보다. 뭐, 이제 관광 비자도 면제되고 좀 편해지나 했는데, 우리 입장에서는 그 사람 덕분에 미국 가는 절차가 더욱 복잡하고 까다로워졌지만 말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그래도 다행히 비행기가 격추 당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먼젓번의 관제 지시는 씹었지만 그래도 전투기의 “위로, 아래로” 같은 명령에는 순응했기 때문이다. 대한 항공 여객기는 영문을 모른 채 전투기의 인도를 받으면서 캐나다의 어느 작은 공항에 비상 착륙했다. 보잉 747 같은 초대형 여객기를 취급하기엔 좀 버거운 규모. 이미 다른 수많은 여객기들이 착륙하고 난 뒤였기 때문에 이 여객기가 앉을 공항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이때는 이미 대한 항공 여객기가 납치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쫙 퍼진 상태였던지라, 앵커리지는 물론이고 캐나다 공항 인근 주민들이 죄다 대피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여객기는 무사히 착륙했고, 이 비행기를 끝으로 북미 영공은 일시적으로나마 완전 폐쇄 상태가 되었다.
비록 상황은 평화적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이 모든 소동과 오해의 원인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우리나라 조종사가 영어가 딸려서 비상 착륙 명령을 못 알아들었던 것이다!
평소에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교신이 아니라 처음 듣는 메시지가 긴급한 속도와 억양으로 흘러나오니 조종사는 어리둥절해했다. 게다가 메시지 도중에 hijack transponder 이런 단어가 나오니까 그걸 누르라는 소리인 줄 알고 ‘피랍’ 신고를 두 번이나 하는 센스. ㅠ.ㅠ
납치라는 단어가 뭔지도 모르고서 “납치됐니?” “납치됐어”라고 회신을 해 준 꼴이다. 그러니 미국으로서는 500% 테러리스트 피랍 인증으로 간주하고 전투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아찔한 순간이었겠는가?
국제선 항공업계는 영어 못 알아들으면 영락없이 고문관 신세가 되는 분야임을 입증하는 계기였다.
그 최강의 엘리트 집단이라는 비행기 조종사라고 해서 다 영어 잘 하는 건 아니다. 한국과 일본이 특히 그런 불명예스러운 면모로 인해 영어권 국가들로부터 주목 대상이며, -_-;; 영어 실력이 어느 수준 이상 안 되면 조종사 뽑지 말라고 압력까지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 같은 나라가 아니라 영어와 언어 구조가 비슷한 나라들끼리도, 같은 영어 표현을 알아듣는 방식이 서로 달라서 더 위험한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테네리페 참사는 딱 그것 때문에 발생한 사고의 대표적인 예이다.
이 사건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는 사이트를 링크하며 글을 맺는다.
http://iloverossi.egloos.com/tag/911/page/1
다음은 덧붙이는 아이템들.
1. 고속버스 회사들은 고속도로 통행료를 도로 공사에다 지불한다. 여객 열차를 운영하는 코레일은 선로 사용료를 철도 시설 공단에다 지불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톨게이트만 없을 뿐이지 국제선 항공사들은 영공 통과료를 해당 경유 국가에다 꼬박꼬박 낸다. 이것도 기름값이나 주기료만큼이나 은근히 무시 못 할 비용이다.
한 국가가 걷은 영공 통과료 수입은 아까와 같은 그런 관제 업무에 쓰인다. 우리나라는 최근 천안함 사태 때문에 북한과 사이가 제대로 틀어지고 항공기들의 북한 영공 보이콧 결정이 났을 때, 잠시 북한 영공 통과료에 대한 얘기가 나온 적이 있다.
2. 국제선 비행기의 내부는 법적으로 도착 국가의 영토로 간주된다고 한다. 미국에서 태어난 아기가 누구라도 자동으로 미국 시민이 될 수 있다면, 미국 행 비행기 안에서 태어난 아기도 미국 시민이 된다는 뜻이다. 흥미로운 사실이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