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뒷북이긴 하다만.. 본인은 요 근래에 <건국전쟁>을 보면서 국뽕을 한 사발 잘~~ 흡입하고 왔다.
제목이 뭔가 낯익어 보이던데? 10여 년 전 옛날에 정반대 성향의 진영에서 만들었던 좌빨 다큐 영화는 <백년전쟁>이었구나. 그걸 의식해서 저 영화가 제목을 저렇게 지은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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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나라는 딴 게 국뽕이 아니라 리 승만 보유국이었다는 거, 초대 국부가 할배 같은 사람이었다는 게 너무 과분한 국뽕이었다.
SNS에서는 애국우파 네티즌들이 자기도 이 영화를 봤다면서 티켓 인증샷을 막 올리더라만.. 난 그런 릴레이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영화 내용 요약 내지 영화를 보면서 떠올랐던 관련 생각을 올리련다. ㄲㄲㄲㄲㄲ

1. 패턴

  • 조선은 말기에 일본까지 끌어들여서 동학을 진압하고 나서는 그 일본한테 나라를 통째로 빼앗겼다.
  • 태평양 전쟁 말기에 미국은 소련까지 끌어들여서 일본을 항복시켰다. 그러나 이게 훗날 한반도 남북 분단의 화근이 됐다.

미국은 저 끈질긴 쪽발이 일본놈한테 학을 떼 버려서 진짜 될 대로 돼라~ 핵도 터뜨리고 "소련까지 끌어들여서" 어떻게든 전쟁을 끝내고 싶어했다. 제3자가 보기에 그 심정이 솔직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리 할배는 아무리 그래도 소련은 끌어들이지 말고 한반도에 미국이 단독 진출해야 한다고 그렇게도 당부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이것 때문에 미국도 두고두고 고생하게 됐다.
하긴, 미국은 일본이 쳐들어올 거라고 경고했던 할배의 선견지명도 업신여겼다가 된통 당했었다. ㄲㄲㄲㄲ

  • 박 정희는 기업을 육성하려고 민간 사채를 싸그리 정리하려다 보니(1972년 8 3 사채 동결 조치) 시간이 부족해서 유신 독재를 감행했다.
  • 그것처럼 리 승만은 재일 교포 북송을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어서 일본으로 공작원도 보내고(1959년).. 이걸 결판 내려는 욕심이 이듬해에 무리해서까지 4선 출마를 강행하는 데 영향을 줬던 것으로 보인다.

오~~ 둘이 요렇게 연결된다니 신기하다.

2. 할배의 업적

  • 혁명적이었던 농촌 토지 개혁 -- 단군의 후손들을 단순히 나라 있는 백성으로만 만든 게 아니라, 자기 땅도 있는 백성으로 만들었다.
  • 그 가난하고 못살던 시절에도 교육에 투자하고 쓸데없이 민주주의 정신을 너무 많이 함양시킴
  • 반공 포로 석방과 한미 상호 방위 조약. 50여 년 전에 조선이 미국으로부터 버림받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걸 겪었으니.. 울나라는 이젠 두 번 다시 미국에게 버림받지 않으려고 외교 역사상 최고의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약을 맺어 버렸다.

3. 누명

(1) 한강 다리 폭파 관련 거짓 날조 누명은 이제는 최초로 거짓말이 유포된 배후를 추적해서 학술적으로 다 까발려야 하지 않나 싶다.
건국전쟁 영화를 싫어하고 내용을 반박한 사람들 글을 검색해 보니 맹 사사오입 개헌이나 조 봉암, 최 능진.. 이런 사람들 사형 당한 것만 거론할 뿐, 이 런승만 날조의 반박에 대해 또 재반박을 하지는 않더라.

(2) 말단의 군경 간부라면 모를까, 우리나라 초대 내각은 친일파 반민족주의자 출신이 개뿔 절대 아니었다. 이 시영 가문이야 두 말하면 잔소리이고, 애산 이 인??
이 사람은 독립운동가 변호하고 한글학회에 재산 엄청 기부했던 애국자 법조인이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이런 식의 친일파 단죄는 비현실적이고 무리라고 생각해서 반민특위의 해체에도 앞장섰었다!

(3) 리 승만 할배는 4 19 시국을 뒤늦게 파악하고는 "내가 맞아야 했을 총을 우리 젊은 친구들이 맞았구나" 그러면서 4 19 시위 부상자들을 위문하러 갔다.
선뜻 하야하겠다고 그러자 오히려 시위대며 시민들도 도로 같이 울었고 "리 박사님, 만수무강하십시오" 그랬다. 세상에 참 이상한 바보같은 독재자다.
오히려 그 시절 언론 기레기들이 할배와 시민 사이를 마구 이간질했다. 그리고 전직 대통령의 짤막한 여행을 무슨 죄 짓고 도피 망명이라도 가는 양 부풀려서 조작 보도를 했다.

4. 어처구니없는 현실

(1) 김 구는 단순히 남북 분단을 반대하고 남북 간 오해를 풀러 북한을 방문한 게 아니었다. "우리는 쏘련으로부터 지원을 받아서 조만간 남조선에 쳐들어갈 거고, 그러면 쟤들은 꼼짝없이 함락당할 것이다" 그는 이런 소리까지 뻔히 들어서 아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남한에 돌아와서는 "북한은 절대 쳐들어오지 않습니다~ 미군 없어도 괜찮습니다" 이런 거짓말을 했다고?
이게 사실이라면 김 구는 우리가 아는 그 애국자 김 구라고 볼 수 없다. 이런 사람을 10만원 지폐 도안에 넣겠다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 주미 한국 대사관에는 할배가 아니라 서 재필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딴 나라들은 간디 등 정상적인 자기 국부들 동상)

(3) 하와이에서 리 승만의 날 기념일을 제정하려고 했는데 본토 조선인들이 하도 분노하고 반발· 반대하는 바람에 시도가 무산됐다고.. 허 참 기가 막힌 일이 많았다.

건국전쟁은 정말 국뽕 충만하면서 울컥하면서 너무 훌륭하고 아름다운 다큐 영화였다.
영화가 다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오고 상영관 불이 켜지자..  누가 시작했는지 절로 박수가 터져나왔다. 기립이었는지 착석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만.. 곧장 상영관을 빠져나가는 사람이 없이 거의 5초~10초는 박수를 치고는 나갔다.
할배가 1953년인가 54년인가 미국 상원 연설을 해서 열혈 기립박수를 받은 것처럼 말이다.

나는 박수 정도가 아니라 중간 중간에 몇 번이나 “옳소!” “아멘!” 이럴 뻔했다. 말은 차마 못 하고 그냥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걸로 격한 공감을 대신 표현했다.

왜, "세상을 바꿔 놓은 책" 킹 제임스 성경 400주년 다큐와도 오버랩됐다.
그 위대한 성경의 번역을 지시한 왕은 정작 유해라고 해야 하나 정말 보잘것없이 어디 쳐박혀 있던데..
우리나라 국부도 저렇게 존재감 없는 취급을 받고 있구나..

이 조선? 한국이라는 나라는 중국처럼 쪽수 많은 대국도 아니고, 일본처럼 일찌감치 근대화 잘해서 열강 반열에 든 나라도 아니었다.
얼마든지 식민지가 되든 공산화가 되든 이상할 게 없었고, 필리핀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 같은 국력의 나라로 남는대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나 그 듣보잡 한구석에 미국을 너무 잘 알고 미국의 이념을 적극 따르는 지도자를 둔 ‘깨어 있는 나라’가 있으니 “미국 니들도 여기를 다시는 무시하거나 저버리지 마라~~ 니들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 나라도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될 거다”이걸 각인시켜 놓은 주역이 바로 그 할배다. 이 능력을 겨우 킬구 아재랑 비교하냐? 허 참~~~

이런 영화 보는 것엔 돈 아깝지 않다. 다들 보고 그냥 파일 소장해라. 누구든지 꼭 봐라 두 번 봐라.
그야말로 할배가 잘한 것을 논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하고 불편해하는 거.. 진짜 정신병이다.
외국 나가서 교양과 상식 있는 사람들 앞에서 할배를 비하하고 부정하면 그냥 남한이라는 나라 품격 자체가 그냥 통째로 폄하되고 깎일 것이다.

크리스천인 가수 나얼이 이 영화 포스터를 개인 SNS에 올렸는데 그걸 갖고도 미친놈들이 욕하고 악플 달고 난리를 쳤었다. 기도 안 차서 원..
하지만 그 대신, 나얼이 누군지 모르고 기독교인도 아니던 사람들 중에서도 "나얼? 저 사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애국자군. 음반을 구매해야겠다" 이러는 사람이 생겼다. =_=;;; 팩트만 늘어놓은 다큐가 도대체 왜 정치색 논쟁이 돼야 하는지 모르겠다.

사실 건국전쟁 같은 영화는 극장에서 상영할 게 아니라 공중파 방송국에서 매년 국경일에 틀어 줘야 한다.
실제로 옛날에(2015~2016년) KBS TV에서는 주 기철 목사의 일대기를 다룬 '일사각오' 다큐를 무려 전국구로 방영한 뒤에 이듬해에 증보판(?) 영화까지 만들었던 적이 있었다. 영화에서는 '죽으면 죽으리라' 안 이숙 여사 얘기까지 추가해서 말이다.
난 그때 솔직히 놀랐다. 어떻게 KBS에서 CBS 같은 성향의 다큐를 저렇게 방영할 수 있었지?

아무리 일제에 의해 투옥과 고문을 당했다지만, 주 목사는 둘 중 하나만 고르라면 항일 독립운동이 아니라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한 것에 더 가깝다.
우리나라가 국교가 있는 나라가 아니거늘, 광고 없는 국· 공영방송 급이라면 솔직히 주 목사 얘기보다는 리 박사 할배 얘기를 더 우선적으로 방영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일사각오와 비슷한 시기에(2016) 울산 MBC에서는 '마지막 간수'라는 안 중근 다큐를 독자적으로 만들어서 방영한 적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방송사에서 마음만 먹으면 할배에 대한 진실을 전하는 애국 다큐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텐데. 방송사 관계자들의 마음과 의지가 아쉽다.

Posted by 사무엘

2024/02/21 08:35 2024/02/2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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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회에 계층간 갈등이라는 게 없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게 과거보다 훨씬 더 조직적이고 과격한 형태로 표출된 건 아무래도 산업 혁명 이후 19세기에 공산주의라는 게 생긴 뒤부터인 것 같다. 구호부터가 “만국의 로동자여 단결하라~~ 기존 체제를 다 뒤집어엎고 브루주아들을 다 타도하고 혁명 과업 완수하자” 이랬으니 말이다.

과거에는 왕부터 시작해서 귀족, 지주/영주 같은 계급만 떵떵거리며 살았다. 나머지 대다수 평민들은 농업 같은 1차 산업에 종사하면서 비슷하게 평등하게 못 살았다. 자기 신분과 출신이 원래 그렇고, 이웃들도 처지가 대동소이하니까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낄 여지가 별로 없었다.

농사가 풍년이어도 세금이나 소작료 명목으로 소출의 대부분을 삥뜯기는 게 참 뼈아팠다. 옛날에 노동력이 부족하고 백성들의 진짜 소득을 정확하게 측정할 행정력이 없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 머릿수에만 비례해서 너무 단순무식하게 세금이 부과된다면 어떨까? 출산이 진정한 재앙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게 싫다고 인간이 법과 공권력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무법지대에 혼자 떠나서 모든 걸 자급자족 하면서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게 진정한 딜레마였다.

사실, 중앙 정부에서 법으로 정한 세금 자체는 그렇게까지 살인적인 수준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론과 이상은 그러하지만 물자를 수송하는 과정에서 날리고 잃는 걸 감안해서 여분으로 더 걷는 것, 그리고 세리 같은 중간 관리들이 횡령· 착복하는 게 장난이 아니니 최하위 납세자들의 고통이 극심해졌다. 하청에 하청을 거치면서 실제 작업자에게 지급되는 보수가 급격히 쪼그라드는 것과 완전히 같은 이치이다.

물론 세금 착취가 너무 심해서 도저히 못 버틸 지경이 되면 죽창 들고 민란이 발생하고 '의적'이라는 게 나타나기도 했다. 로빈 후드, 임 꺽정, 홍 길동, 윌리엄 텔.. 이런 거 말이다.
그래도 이건 국가 체제 전복을 의도하는 건 아니었으며 그럴 재량도 없었다. 단순히 탐관오리를 벌하는 것까지가 끝이었다.

그랬는데.. 산업 혁명 물류 혁명이 일어난 뒤부터는 상황이 약간 달라졌다.
기계와 인간의 생산성 격차가 아득히 벌어졌고, 또 브루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격차도 정말 아득히 벌어졌다. 이거 덕분에 2차와 3차 산업이라는 것도 본격적으로 생겨나고 농산물과 공산품이 싸게 많이 보급되면서 인간의 ‘평균적인’ 삶은 크게 올라가긴 했지만.. 이건 다른 방면에서 큰 부작용도 야기했다.

산업화 초기에 영국 같은 나라에서 공장 근로자들의 근무 환경과 조건이 얼마나 열악하고 복지가 참혹했는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흑인 노예도 아니고 나름 자국민이었는데도 말이다.
시골에서 농업 대부분에 가내수공업 약간이나 하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공장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단순노동자로 처지가 바뀌었는데.. 삶의 질이 크게 좋아질 리가 없었다.

뭐 영국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도 산업화 초기엔 그랬다.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빈부격차는.. 과거의 통상적인 왕족 귀족과 평민 사이의 빈부격차와는 성격이 좀 다른 부류였다.
그리고 이런 초창기의 경제 시스템은 그야말로 '신자유주의' 시장 만능 방임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극치였다. 오늘날과 같은 인권 관념이라든가 취약 계층 복지 같은 건 없었다. 돌아가는 방식이 얼마나 살벌했겠는지 더 말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쪼기 서양은 문화 배경이 배경이다 보니, 돈 많은 상류층들 중에도 교회 댕기는 신자가 대다수 주류였다. 그러나 이때 유럽의 기독교회들은 뭐 해외로 선교를 하기도 했지만 제국주의의 첨병 역할도 많이 했다. 그리고 자국 사회에서 하나님 사랑 다음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제대로 충실하지 못했다. 보다못해 영국에서 자선 냄비 이러면서 "구세군"이라는 교파가 괜히 생긴 게 아니었다.

그래서 19세기 중후반과 20세기 초 사이의 문학 작품들을 보면 이런 인간성 상실 동심파괴 시대상이 적지 않게 반영돼 있다.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 작가는 기억이 안 난다만 <플랜더스의 개> 말이다.
스크루지 꼰대가 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롤>은 뭔가 옹고집전의 외국판 같기도 하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명작 소설도 이런 시국에서 교회가 사회에서 빛과 소금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반성에서 만들어졌다. 저 때 자기 생일과 크리스마스를 극혐한 빈곤층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러니 결국은 참다못해 마음 독하게 먹고 악한 쪽으로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탐욕스러운 자본가 부자는 한없이 자기 배만 불리면서 더 부자가 되고, 로동자들은 평생 뼈빠지게 일해도 가난을 절대로 탈출하지 못하면서 부자들의 노예로 대대로 비참하게 살다 갈 거라고 말이다.

이런 현실은 로동자들끼리 단결해서 악에는 악으로 대응하고 싸우고 투쟁해야 바꿀 수 있댄다. 그래서 노조에 파업, 사보타주, 붉은 머리띠, 꽹과리 등 살벌한 구호와 방법론이 등장했다. 그러면서 “자본가들을 타도해서 부를 다같이 강제 분배하자, 사람이 먼저이고 로동자가 주인인 세상을 만들자, 능력만큼 벌고 필요한 만큼 쓰는 체제를 만들자” 같은 구호를 외쳤다.

공산주의 사상에 입각해서 저런 걸 부추기고 추진하는 정치 단체를 흔히 '공산당'이라고 한다.
인간 사회의 근본 모순과 고뇌에 대해서는 기원전 500년에 가까운 옛날에 기록된 성경의 전도서에도 나와 있고, 비슷한 시기에 불교의 창시자인 싯다르타도 똑같이 고민했었다. 싯다르타는 번뇌를 떨치고 혼자 열심히 수련해서 해탈이라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던 반면, 공산주의자는 계급 투쟁과 혁명을 통해 좀 더 현실적인(?) 돌파구를 뚫은 듯하다.

마르크스인지 레닌인지 이런 아저씨들이 이 바닥으로 열심히 연구해서 이론적 근간(?)을 마련했다. 19세기 중후반에 이미 인터내셔널가라는 노래가 만들어지고 공산당 선언이라는 것도 만들어졌다.
현실 역사에서야 공산 혁명이 성공한 구소련과 그 주변 중국과 동유럽이 공산 진영으로 여겨지지만, 더 과거인 1871년엔 프랑스에서도 단 70일 남짓이지만 공산 혁명 정부가 집권한 적이 있었다. 프랑스가 뭔가 혁명, 저항 이런 쪽으로 영국· 독일보다 더 쎈 정서가 있기 때문에 그렇지 싶다.;;

이 사람들은 모든 게 과격했다. 자본가 프롤레타리아들이 고수하던 삶의 방식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적폐로 몰아 척결하고 뜯어고치고 지워 버리려 했다.
종교색은 말할 것도 없고.. (종교는 인민의 아편!!) 심지어 1주일의 길이도 7일은 종교색이 느껴진다면서 바꿔 버렸다. 파리 코뮌은 10진법을 존중해서 한 주의 길이를 아예 10일로 바꿨고, 나중에 소련은 약수가 더 많은 8일로 바꾸려 했던 걸로 기억한다. =_=;; 이런 반골 기질이 있으니 나중에 중공은 그 보수적인 정서법을 다 뜯어고치고 간체자와 한어병음을 과감히 도입했다.

일본은 나라가 잘 살고 철저하게 자유 진영을 롤모델로 삼으면서 서구화 근대화를 잘 해서 그런지, 대놓고 공산화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은 반사회 혁명분자야 당연히 있었고, 그건 심지어 한반도니 만주니 하는 식민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최 서해의 단편 소설 <탈출기>(1925)가 딱 그런 분위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런 공산주의 진영은 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거의 반세기 가까이 리즈 시절을 찍었다.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이라는 악역이 패망해서 고꾸라졌고, 소련은 엄연히 전승국으로 예우받으며 국제 위상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이 영향으로 인해 우리나라는 해방 직후에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헝가리· 불가리아· 체코 같은 소련 주변의 동유럽 국가들도 많이 공산화됐다.

그리고 소련의 반대편에서는 어쩌다 보니 미국.. 20세기에 서유럽을 제치고 승전국에다 세계 최강국으로 등극한 이 나라가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 시장 자본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하게 됐다. 2차 대전 추축국을 상대로는 총 쏘고 포 쏘면서 대놓고 싸웠는데, 공산 진영과는 대놓고 싸우지는 않는 대신 고삐 풀린 듯이 군비 경쟁 우주 개발 전쟁만 했다. 역사학자들은 이를 두고 '냉전'이라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 붙였다.

아프리카라든가, 오세아니아, 남아메리카 같은 남반구 지역은 너무 멀어서 그런지 공산주의와의 직접적인 접점은 없는 것 같다. 이런 곳을 제3세계라고 부르나??
하지만 쿠바가 무슨 계기가 있는지 골수 반미 국가였고(카스트로??), 그 아래 중남미도 몇몇 친미 노선 국가를 제외하면 '체 게바라'가 어떻고 해방신학에 종속 이론이 어떻고 하는 게 반미는 물론이고 공산혁명 냄새가 좀 난다. 그쪽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그렇게 느껴진다.

아 물론 미국이 다 잘했다는 말은 아니다. 걔들도 분명 자기 국익대로 몰래 비열한 짓 삽질 X신짓을 한 게 있긴 할 것이다. 그러나 남아메리카가 그 넓은 땅에 그 많은 농산물에 풍부한 자원이라는 잠재성 대비 그다지 잘살지 못하는 건.. 모든 걸 미국 탓만으로 돌릴 수는 없어 보인다. 뭔가 통치 체제나 이념, 개인의 가치관 세계관에 문제가 있긴 했다.

체 게바라는 골수 반미 반자본주의 혁명가였다. 하지만 그는 사후에 자본주의자들에 의해 공산주의 슈퍼스타처럼 이미지가 조작됐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엄청난 고인드립이 아닐 수 없다. =_=;; 마치 니콜라 테슬라가 아주 뛰어난 과학자 공학자였지만 훗날 음모론 오컬트계의 교주뻘 인물로 이미지가 조작된 것처럼 말이다.;;
저 장사꾼들은 돈만 된다면 정말 뭐든지 만들어 팔긴 하는가 보다. 하긴, 반미 시위 때 불태우는 용도의 성조기 내지, 성조기가 그려진 속옷· 걸레조차 다 미국에서 만들어서 판다고 하지 않는가? =_=;

우리나라, 남한, 대한민국이야 처음부터 할배의 영도력 덕분에 골수 미국 편에 붙어서 자유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 자본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삼았다. 그 반면, 우리나라를 대적하고 무너뜨리려 한 저 악의 무리들이 처음에 소련 편 공산주의를 밀었으니..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서 뼛속까지 반공을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미국이나 일본에서 과격 좌익 시위를 단속하는 정도하고는 레벨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상이다. 세계사나 인문학 따위 알못인 본인이 그냥 주워 들은 기억만 주섬주섬 늘어놓아 보았다. =_=;;
글쎄, 계급 갈등 투쟁 덕분에 진짜 적폐를 청산하고, 근로자의 인권과 복지가 크게 향상된 긍정적인 결과물도 없지는 않았다. 그 이념이 '수정 자본주의'에 많이 반영되어 들어갔다. 이게 양심적인 업주나 기독교회를 통해서 이뤄진 게 아니라 투쟁을 통해 이뤄졌다는 건 그쪽 편에 선 사람들이 반성해야 할 일이다. 성경에는 “종들은 주인에게 복종하라”뿐만 아니라 야고보서에 “착취되고 빼돌려진 근로자 인건비가 울부짖는다, 부자들에게 화 있을지어다”도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기능은 약간 조금이 끝이었다. 이 혁명가 운동꾼들은 오로지 광기와 선동만 있을 뿐, 이성이 없었다. 본질적으로 그저 음해하고 까내리고 부수고 죽이고 파괴할 줄만 알지, 어려운 걸 만들고 창조하고 설계하는 건 몰랐다.
걸핏하면 자기들끼리도 비판하고 '총괄'하고 '타도'하고.. 어제의 동지도 바로 스파이로 몰아서 고발하고 죽여 버리고..;; 총체적인 무질서와 팀킬에 빠졌다. 한 구악을 청산했다고는 하지만 그에 대한 대안은 내놓지 못하고 똑같은 짓을 하거나, 예전만도 못한 더 큰 신악을 만들어낼 뿐이었다.

저런 사고방식의 열매가 바로 소련의 대숙청, 중공 문화대혁명 홍위병과 대약진운동, 캄보디아 킬링필드 같은 것들이다.
쟤들은 옛날 문화재도 엄청 많이 때려부수고 박살내 버렸다. 중국의 경우, 오히려 장 제스가 타이완으로 도망가면서 싹싹 긁어간 문화재들이 문혁의 피바람을 피해서 살아남았을 정도이다. 인류가 20세기의 이런 참극으로부터 뭔가 교훈을 얻고, 다시는 저런 짓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나라도 운동권 내부에서 추잡한 성추행이라든가 프락치 오인 린치 같은 사건이 당연히 있었다. 보고 배우고 하는 짓이 저런 것밖에 없는 애들이 도덕적으로 자신들의 타도 대상보다 우월할 리는 절대 만무했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건 내로남불 위선이다. 남에게는 땀흘려 일해야 노동의 가치를 안다느니 헛소리를 지껄였지만, 공산당 고위 간부들은 절~~대로 자기 부를 남에게 분배하면서 자기 이념을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인은 '공산주의 사상'과 '공산주의자의 수법'을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소신을 오래 전부터 갖고 있다.
가령,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것처럼 초대 교회 때 교인들이 모든 재산을 공유했던 것은 결과만 보자면 공산주의대로 행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체제 전복 선동을 한 건 아니었다.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공산주의자들이 동원하는 수법은 초대 교회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민망할 정도로 온통 비인간적이고 비열하고 추악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공산주의자들이 빨갱이 소리를 들어 온 주 이유이다.

물론, 공산주의자들만 그런 수법을 사용하는 건 아니다. 군국주의 1당 독재, 통치자 우상화, 전체주의, 닥치고 숙청 같은 건 공산주의와 무관했던 구 일본 제국이나 나치 독일도 동원했었다. 프랑스 혁명 공포 정치도 통치자 1인 우상화만 없을 뿐, 조금 저런 분위기였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저런 군국주의 전체주의는 없어지고 최소한 주류에서는 완전히 밀려났으니 이제 저런 공산혁명 어쩌구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저런 짓을 하지 않고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일련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1990년대 이후엔 북괴를 제외한 거의 모든 공산권 국가들이 무너지거나 최소한 경제만은 개방했다. 세계는 다시는 저런 미친 혁명 실험을 하지 않고, 그냥 지금 같은 시장 경제에다가 세금으로 복지 보정만 하는 체제로 다들 수렴진화하고 있다.
하지만 경제를 개방했고 민주주의를 흉내만 낼 뿐, 중국과 러시아 같은 나라는 한국· 일본이나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 국가가 절대 아니라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도.. 저런 숨막히는 나라보다는 상황이 낫지만 20세기까지만 해도 과거의 상명하복 똥군기 문화의 여파로 인해 사회 분위기가 여전히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게 많았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미국은 단순히 크고 땅 넓고 자원만 많은 나라가 아니라, 세계에 정교분리, 삼권분립, 자유 민주주의와 현대적인 인권 이념을 퍼뜨린 정말 위대한 나라인 것 같다. 캐나다나 호주 같은 평범한 영연방 국가로 그치지 않고, 덕분에 인구도 그런 나라보다 훨~씬 더 많아져 있다.

아무쪼록 시민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 희생된 사람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고, 경제나 정치 쪽은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감각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산업혁명 초기에야 진짜로 근로자들의 처지가 너무 가혹했지만, 지금은 진짜 내로남불 귀족 노조를 더 비판해야 할 때가 아니겠는가?
부와 세금에는 똑같이 낙수효과가 있다는 걸 인지하고, 멀쩡한 역할 분담을 쓸데없는 계급 갈등으로 비화하는 이간질과 반기업 프레임 따위에 속지 말고.. 옛날에 실패가 진작에 입증된 실험을 또 하겠다고 덤비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오징어 게임 '혁명적인 개X끼'가 얼마나 끔찍한 욕설인지가  얼추 이해가 될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4/02/09 08:35 2024/02/0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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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

1.
19세기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외륜선 달린 증기선이 떠 다니는 미시시피 강을 배경으로 “톰 소여의 모험”이라는 동화? 소설을 집필한 작가로 유명하다.
‘허클베리 핀’은 거기 나오는 톰 소여의 친구의 이름인데, 원작 동화가 큰 히트를 치자 친구 캐릭터만 갖고 소설을 또 쓰면서 이름이 제목에 등장하게 됐다.

이 사람은 얼마 전에 이 블로그에서 소개했던 패니 크로스비 여사와 동시대 인물이다. 검색을 하면 무슨 아인슈타인처럼 백발에 수염도 북실북실한 노신사의 모습이 주로 걸려 나온다. 그리고..

2.
그는 시대를 정말 엄청나게 앞서간 좌파 진보(?) 성향이었다.
무슨 공산당 빨갱이 성향이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 시절에 인종 차별 반대하고 제국주의 반대하고 저딴 일들이 신과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걸 극혐 거부했다. 심지어 자국에서 과거에 인디언들 땅 빼앗고 죽인 것까지도 신랄하게 비판했다. 놀랍지 않은가?

사회 상류층들의 위선을 싫어하고, 불의와 거짓이 알량한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되고 퉁쳐지는 걸 반대했다. 자기가 싫어하는 걸 비판할 때는 온갖 신랄한 독설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프랑스에서 드레퓌스 누명 조작 사건이 벌어졌을 때, 드레퓌스 진영을 온몸으로 옹호했다. 드레퓌스를 실드 쳤던 프랑스의 소설가 ‘에밀 졸라’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극찬했었다. 그 유명한 n명 출생 드립을 동원해서 말이다.

“세상에 위선자 사기꾼 돌팔이 겁쟁이 기회주의자 따위는 1년에도 수백 명씩 태어난다. 그러나 에밀 졸라 같은 양심적이고 용감하고 정의로운 지식인은 몇백 년에 한 명 태어날까말까다.”
글쎄, 영국은 저런 사람이 정치판에 부족해서 결국 19세기 중반에 아편 전쟁을 벌이게 됐는가 보다.

3.
마크 트웨인은 성향이 성향이다 보니 사회 풍자 소설도 많이 썼다.
이건 “걸리버 여행기”의 저자인 영국 조나단 스위프트와 비슷한 면모인 것 같다.

걸리버 여행기야말로 걸리버가 무슨 ‘하멜 표류기’마냥 난쟁이들과 부대낀다는 내용의 초딩용 가벼운 판타지 동화라고 생각하면 그건 정말 경기도 오산이다.
거인국 등 나머지 에피소드 3개를 다 봐야 된다. 제일 유명한 첫 에피소드 소인국 편은 전체 소프트웨어의 기능 중에서 셰어웨어 비등록판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건 영국 사회에 대한 블랙코미디 풍자를 넘어 거의 인간 본성에 대한 혐오와 회의 자괴가 담긴 참신하고도 심오한 소설이다.
이런 소설이 1800년대도 아니고 1720년대에 출간됐으니 얘도 시대를 엄청 많이 앞선 것이었고, 작가는 굉장한 천재였다.

여담이지만 작가의 이름 Swift는 오늘날 애플의 iOS/macOS 프로그래밍 언어의 이름으로 등극했으며,
걸리버 여행기 소설 중에 등장하는 미개 종족 이름 Yahoo는 한때 시대를 풍미했던 검색 엔진의 이름으로 쓰이기도 했다.;;;
CPU 아키텍처별 비트 배열 순서의 차이를 나타내는 big/little endian이라는 것도 저 소설에서 등장하는 '계란 깨는 방향'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어이쿠~ ㄲㄲㄲㄲㄲㄲ

4.
이렇게 마크 트웨인과 웬 걸리버 여행기가 오버랩 됐는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마크 트웨인은 참 신기하게도 핼리 혜성이 지구를 찾아온 때에 거의 맞춰 태어나고(1835년 11월), 그 다음 핼리 혜성이 지구를 찾아온 때에 거의 맞춰서 죽었다(1910년 4월)!!

저 사람 본인도 이에 대해 진작부터 신기하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자기는 다음 혜성 방문 타이밍 때 죽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농반진반으로 했다고 한다. 그런데 말이 씨가 돼 버렸는지, 70대 중반의 나이로 진짜로 그 시기에 죽었다..;;

그는 이런 출생 배경 때문인지 문돌이 소설가인 것치고는 자연과학 쪽으로도 일반인들 이상의 관심과 조예가 있었다. 그리고 저런 골수 진보 성향(!!) 때문인지, 자기 살아 생전에 발표되어서 교계를 뒤흔들었던 따끈한 학설인 진화론에 대해서도 응당 호의적인 입장이었다.

그렇다고 저 사람은 무슨 볼테르 급의 완전 개독안티 무신론자 반종교.. 까지는 아니고, 명목상 신자이긴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전형적인 “예수는 믿지만 (인간한테 실망해서) 교회는 안 다닌다”, “예수님이 지금 인간들 교회를 보신다면 빡쳐서 또 다 뒤집어엎고 불호령을 내리실 것이다” 성향이었다.
개인적으로 저런 사고방식에 대해서는 그냥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정도의 생각으로 간주한다. 이해는 하지만 완전 동의는 안 한다.

(당신들도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그 예수님이 자기 피까지 비용으로 치러서(!!) 교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는걸? 그 사람들로 뽁짝거리고 시끄럽고 정신 없는 교회에 주일마다 발품 팔아 출석하는 신자들이.. 바보 멍청이어서 그러는 건 아닌데..?? ㄲㄲㄲㄲ)

뭐, 저 정도 말은 크리스천이 전혀 아니었던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도 했던 걸로 잘 알려져 있다. 저런 성향이 좋게 발전하면 히틀러한테도 당당히 항거했던 행동하는 양심 본회퍼 목사처럼 될 수 있을 것이고, 나쁘게 발전하면 그냥 자유주의 해방 신학처럼 될 것 같다.

5.
끝으로, 1910년엔 5월 중순엔 실제로 핼리 혜성이 지구를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이때는 “다가오는 핼리 혜성의 꼬리 부분을 관찰해 보니 이건 분명 독가스 성분이다. 이때는 지구 전역에도 독가스가 잔뜩 퍼질 예정이다. 지구의 인류는 꼼짝없이 멸망할 것이다~~” 이런 황당한 종말론 설레발이 많이 나돌았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참 웃긴 얘기지만 그 당시엔 1908년 퉁구스카 대폭발의 충격 때문에 저런 선동도 통했던 것 같다.

현실에서는 그런 종말은 당연히 없었다. 단지, 그로부터 100일쯤 뒤에 조선 왕조 하나만 종말을 맞이했을 뿐이었다..!! =_=;;

Posted by 사무엘

2023/01/28 08:35 2023/01/2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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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XXX파 조폭이 있고 일본에 야쿠자가 있다면, 유럽과 미국에는 마피아라고 불리는 범죄 조직이 있었다.
미국 마피아는 1920~30년대.. 세계사에서 '전간기'라고 부르고 미국에 금주법이라는 게 있던 시절에 '알 카포네'(1899-1947)라는 두목의 휘하에서 활동하던 시카고 마피아가 유명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와바리를 접수해서 보호비 자리값을 뜯고, 자기 조직으로부터 술을 사지 않는 업소한테는 처절하게 보복하고.. 자기 나와바리를 노리는 적대적인 조직은 칼뿐만 아니라 총과 폭탄까지 동원해서 작살을 내 버리고.. 그런데 법조인까지 매수해서 잘 구슬렸는지, 두목이 어지간한 사고를 쳐도 혐의가 제대로 입증되지 않아서 감옥에는 절대 안 가고.. 정말 악랄하기 그지없었다.

얘네들이 지금 2020년대에도 잘나가고 있는지, 아니면 이제 공권력에 의해 다 토벌되어서 겨우 명맥만 유지하며 찌그러져 있는지는 난 잘 모르겠다. 내 개인적으로는 영화 '대부'와 그 패러디작에서 묘사된 마피아 정도밖에 아는 게 없다.
저 시절, 미국 마피아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지는 게 있다.

1. 술과 우유

저 시절에 미국 마피아들은 밀주를 몰래 불법 유통시키며 악명을 떨쳤다. 하지만 얘들은 한편으로, 금주법은 무리수가 많은 조치이기 때문에 몇 년 못 가 폐지될 것이라는 점도 예상했다. (1933년, 루스벨트 때 폐지) 이렇게 술 특수를 누리는 나날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고, 이는 자기네 조직의 미래와도 직결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술 말고 다른 물 장사를 개척했는데 그건... 우유였다. 이건 술과 달리 전국민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마시는 음료이다. 낙농업을 접수해서 독점해 버리면.. 마피아들이 보기에도 이게 더 안정적이고 더 돈이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술보다야 더 건전하기도 하고. ㄲㄲㄲㄲ

이때 미국에서는 우유가 품질 관리가 안 되고 유통망이 개판이었다. 상온에서 오래 방치되어 시큼하게 상하고 앙금까지 생긴 우유가 버젓이 공급되기도 했으며, 어제 팔고 남은 우유를 새 우유에다 섞는 건 예사.. 그걸 밀가루나 심지어 분필 가루까지 넣어서 도로 하얗게 보이게 만들기도 했다.

당연히 이딴 우유 마시고 배탈 나는 사람이 속출했으며, 심지어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사람도 소수나마 있었다. 허나, 이게 우유 때문이라는 걸 입증하는 건 요즘으로 치면 자동차 급발진을 소비자가 입증하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았나 보다. 돈 먹은 의사들은 적당히 삭아서 시큼한 우유가 몸에 더 좋다고 비양심적인 궤변 언플까지 늘어놨다고 한다.
상한 우유가 무슨 늙은 호박처럼 허연 가루가 앉으면서 영양분이 더 많아지기라도 하냐 젠장..

그랬는데 마피아가 개입하자 오히려 이런 관행이 개선되었다. 천조국 마피아들은 자릿세 뜯는 건 악랄했어도, 사람 입에 들어가는 음식물에 대해서는 나름 신념이 있었는지 선 넘지 않고 양심적으로 일을 처리했다.
원유를 채취하는 농장에서부터 조직적인 품질 관리를 시행했으며, 심지어 제조되는 우유 병에다가 유통기한을 찍는 관행이 이때 처음으로 생겼다나 어쨌다나.. 마피아 지들이 돈 되는 일을 하려다 보니 우유의 품질이 개선되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나치 독일이 1933년에 현대적인 동물보호법을 세계 최초로 제정하고 뜬금없이 동물 복지에 기여를 했다면, 미국 마피아는 뜬금없이 우유의 품질과 유통망을 개선했다.
큰 악이 초기에 작은 악을 좀 척결하는 건 그리 이상하게 볼 일이 아닌 것 같다. ㄲㄲㄲㄲㄲ

사실, 미국은 20세기 초에는 정말 자유 시장 경쟁 방임의 극치 상태였다. 그래서 이 글에서 다 열거하지는 않지만 기업-기업(경쟁사에 대한 흑색선전 거짓 비방), 기업-근로자(가혹한 노동 조건), 기업-소비자(저런 불량품), 기업-정치/법조인(매수, 뇌물) 간에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 추악하고 부도덕한 일이 많이 벌어졌었다.
걔네들이 조폭 같은 기업이라면, 저런 마피아는 기업화된 조폭이나 마찬가지였다.

* 여담

  • 우리나라에서 '장군의 아들 김 두한' 패거리가 행색이나 인상, 이미지가 이런 미국 마피아 두목의 한국 버전과 좀 비슷하게 느껴진다.;;; 뭐, 처한 여건이나 행적이나 신분이 둘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 일본 야쿠자야.. 100여 년 전, 관동 대지진 때문에 미친 학살극이 벌어졌을 때 조직원 중에 조선인이 있으면 쟤들이 그 조선인을 보호해 줬을 정도였다. 이런 뒷동네 조직에 최소한의 의리는 있었던 셈이다.

2. 법무팀 변호사

알 카포네는 무력을 담당하는 칼잡이 총잡이 건달뿐만 아니라, 변호사 브레인도 부하로 고용해서 법률을 자문하고 법망을 요리조리 피하는 일에 써먹고 있었다.
그의 법률 참모는 에드워드 조셉 오헤어(Edward Joseph O'Hare 1893-1939)라는 아일랜드 출신의 변호사였다. 그는 해박한 법률 지식을 동원해서 알 카포네를 변호하고, 그가 감옥에 가는 일을 막아 줬다. 반대로 알 카포네 역시 그에게 엄청난 연봉을 지급하고 으리으리한 집과 차도 장만해 주고.. 물질 하나는 정말 끝내주게 보상했다.

그 에드워드 변호사에게는 어린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가 이렇게 돈을 악착같이 많이 번 건 아들을 물질적인 부족함 없이 최고로 잘 키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정작 아들이 머리가 굵어지고 "아버지 뭐 하시노?"에 대한 관념이 형성될 때가 되자 그는 고민에 빠졌다. 돈을 많이 벌긴 하는데.. 그닥 떳떳한 거래를 통해서 버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애비가 스스로 그렇게 생각을 한 건지, 아니면 아들이 "저는 아버지가 부끄럽습니다~" 이런 말을 해서 현타에 빠져서 자괴감이 든 건지.. 그건 잘 모르겠다.
어쨌든 에드워드는 양심의 가책을 심각하게 느끼게 됐다. 아들은 자기처럼 범죄자와 거래하는 더러운 돈의 노예로 만들지 말고, 깨끗한 양심으로 정의롭게 살게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아들을 사관학교에 보내서 군인으로 키우고.. 급기야는 자기에게 후한 월급을 주던 조직을 정면으로 배신해 버렸다. 이놈의 알 카포네 일당이 저지른 짓, 그리고 자기가 은폐한 악행을 경찰에 조막조목 고발하고 자백해 버리는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그의 증언과 증거 자료 덕분에 사법 당국은 오랜 기간 잡지 못했던 알 카포네를 1931년에 체포해서 다른 혐의는 모르겠다만 '탈세'라는 중범죄 혐의를 적용해서 투옥시킬 수 있었다.

에드워드는 양심의 자유를 얻은 대신, 자기 목숨을 대가로 치르게 되었다.
1939년, 알 카포네가 만기 출소가 임박했을 즈음에.. 에드워드는 자동차 운전 중에 주변 괴한들로부터 샷건을 난사당했다. 그는 40대 중반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그의 아들 에드워드 '헨리' 오헤어(1914-1943)는 애비의 바람대로 군인이 되어서 의인에 애국자에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잘 자랐기 때문이다.

최대한 간단히 요약하자면.. 그는 찰스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 비행 소식에 꽂혀서 비행기 덕후가 되었고, 해군 항공대 소속의 장교 신분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탁월한 상황 판단력에다 우수한 비행기 조종술과 사격술을 동원해서 위급한 상황에서 혼자 일본 적기를 6기나 떨구고, 수천 명이 탑승 중이던 아군 항공모함이 빈집털이 당하는 걸 막았다.

패닉에 빠질 법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적기의 엔진과 연료 탱크만 저격하듯이 쏘며 공중전을 벌인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고 무사히 살아서 돌아왔다.
이런 엄청난 무공 덕분에 그는 명예 훈장을 받았고 중위에서 2계급을 건너뛰어 바로 소령으로 진급하고, 그야말로 전국적인 영웅으로 등극했다.

이게 1942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로부터 1년 뒤인 1943년 11월 어느 밤에 짧고 굵었던 삶을 마쳤다.
길버트 제도 부근에서 야간 경계 임무 수행 중에 적기와 마주쳤는데.. 이때 갑자기 적기로부터 피격을 당했는지 어두운 바다 수평선으로 사라지면서 아군 기지와 연락이 끊어졌다. 그 뒤 시체도, 기체 잔해도 못 찾은 채 영원히 실종되어 버렸다.

시카고 시민들은 2차 세계 대전 영웅이었던 아들 에드워드 오헤어, 그리고 의로움을 몸으로 실천했던 아버지 에드워드 오헤어를 기억하기 위해.. 시카고에 있던 '오차드 디포'라는 국제공항을 1949년 9월부로 '오헤어' 국제공항이라고 개명했다.
이스라엘에서 우주왕복선 사고로 순직한 아버지와, 전투기 훈련 중에 순직한 아들을 기리기 위해 '일란 & 아사프 라몬' 국제공항을 만든 것과 아주 비슷한 사례인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22/12/09 08:35 2022/12/0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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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라는 건 어째 2차 세계 대전 전범국인 일본과 독일이 잘 만든다고 전통적으로 호평이 자자하다. 도요타, 벤츠, BMW 등..
하지만 세계 최강의 과학기술 선진국인 미국도 이들 만만찮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자동차 생산국이다. 단지, 땅 넓고 물자가 풍족하고 내수 시장도 크다 보니, 오랫동안 한국 같은 외국의 사정에 맞는 차를 수출형으로 굳이 잘 만들지 않았을 뿐이다. 가령, 미국이 유럽 같은 급의 고효율 디젤 엔진은 그냥 '안' 만든 거지, 못 만든 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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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딜락 엘도라도. 이런 큼직한 머슬카가 아메리칸 스타일 자가용의 상징이었다. 1950~60년대엔 저게 얼마나 하이테크 디자인의 최첨단 문명의 이기였을까..??? ㄲㄲ)

가만히 생각해 보니 미국 자동차는.. 제조사 이름과 자동차 브랜드 이름이 많이 헷갈리는 형태인 것 같다. 이는 그 브랜드의 자동차를 만들던 회사를 다른 회사가 인수 합병해서 그렇게 된 것도 있다.
미국의 3대 메이저 자동차 제조사는 GM, 포드, 크라이슬러이다. 나머지 캐딜락, 쉐보레, 링컨, 뷰익 같은 건 브랜드 이름이다.

그런데 이런 자동차 제조사들이 너무 거대해지면서, 시장을 독점하고 동일 업종의 경쟁 기업을 비윤리적인 방법으로 말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과거에 스탠다드 오일(정유)이라든가, 20세기 말의 마소 IE 웹브라우저 끼워 팔기처럼 말이다. 이런 게 드문 일이 아니다.
그래서 공룡 자동차 제조사, 그리고 어쩌면 공룡 정유 회사들까지 교묘하게 로비를 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들 한다.

1.
노면전차를 없애 버렸댄다. 미국은 극소수의 대도시를 제외하면 1950년대 이후부터 대중교통이란 게 없는 나라가 돼 버렸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같은 작품은 그때 이후로는 더 나올 수 없다.
꼴랑 중학교 졸업하고는 면허를 따야 되고, 마트를 가거나 햄버거 가게 알바 출퇴근을 위해서라도 차가 없으면 안 되는 지경이 됐다. =_=

프리웨이의 중앙 카풀 전용 차로는.. 버스나 승합차 전용도 아니고 꼴랑 2인 이상만 타도 이용 가능하거늘.. 그 막히는 출퇴근 시간대에도 텅 비어 있다. 이런~~!! 전부 그 큰 차에 혼자 타고서 길바닥에다 기름을 뿌리고 있다.

2.
1990년대에 일찍이 친환경 전기차가 개발되고 있던 것도 잘근잘근 없애 버렸댄다. EV1이 대표적인 예다.
그래도 저기는 한국하고는 상황이 다르다 보니, 성능 좋은 유사휘발유가 개발되고 있는 것을 잘근잘근 없애 버린 사례는 없는가 보다. (차량에 악영향, 환경 문제, 세수 확보 애로사항)

3.
사실, 위의 1과 2는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 식의 근거 부족 음모론에 가깝다. 전기차나 노면전차는 그 시절 그 기술만으로는 대기업 로비가 아니었어도 다른 이유로 인해 어차피 몰락이 어느 정도 예상돼 있기도 했다.
하지만 기성 자동차 제조사가 과거에 '터커 모터스'라는 스타트업을 (사실상) 교묘하게 잘근잘근 밟아 없앤 것은 음모론이 아닌 것 같다.

설립자인 '프레스턴 터커'는 모터 스포츠부터 자동차 정비와 제조까지 정말 뼛속까지 자동차에 미친 덕후, 자동차밖에 모르는 바보 공돌이였다.
그때 기록에 따르면 1948년에 '터커 48 톨피도(어뢰)'라고 도대체 어떻게 만들었는지 기성 자동차들보다 성능과 연비가 훨씬 더 뛰어나고 안전벨트와 브레이크 같은 안전까지 지금 관점에서 10~20년은 시대를 앞섰던 마법 같은 승용차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투자를 더 받아서 이걸 대량생산해서 미친 가격으로 판매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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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에도 헤드라이트가 달려 있어서 좌우 핸들을 틀면 불빛의 방향도 바뀌는 거.. 우와 완전 참신한걸..??????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서는 어느 자동차 덕후가 회사 차리고 미군 지프를 조립해서 시발 자동차를 겨우겨우 만들었는데, 천조국에서는 자동차 덕후가 포니 같은 고유 모델 승용차를 뚝딱 만들었다는 걸 생각해 보자..

그랬는데 '터커 48'이 매스컴을 탄 지 얼마 되부터, 은행에서는 장래가 촉망되는 이 회사에 갑자기 대출을 안 해 주기 시작했다. 오히려 빌려 간 사업 자금을 상환하라고 압박했다. 그리고 언론 보도도 싹 부정적으로 바뀌었다. 이 사람은 버티질 못하고 경제사범 사기꾼으로 몰려서 경찰서와 법원을 드나들게 됐다.
비록 무죄 판결을 받아 명예는 건졌지만, 그는 경제적으로는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원대한 꿈을 다 펴지도 못한 채, 스트레스와 지병으로 인해 50대 중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대놓고 드러나는 물증은 없지만, 이런 사건의 배후에는 자기들의 나와바리를 위협하는 강력한 라이벌인 터커 모터스를 교묘하게 말려 죽이려는.. 기성 자동차 회사들의 알력이 있었다는 것이 기정사실로 여겨진다. '터커 48'은 겨우 수십 대밖에 생산되지 못했으며, 심지어 터커 모터스를 짓밟았던 포드 사에서 설립한 자동차 박물관에도 한 대 전시돼 있다. (☞ 링크)

하긴.. 공돌이의 천국인 천조국에서조차도 라이트 형제가 20세기 초에 비행기를 처음 발명했을 때는 기득권층들로부터 시기 질투와 음해를 왕창 받았다. 당사자들은 불필요한 고생을 잔뜩 해야 했고, 오죽했으면 비행기 양산 공장을 자국이 아닌 외국에 먼저 짓게 됐다. 그 과정에서 제조 기술이 외국으로 알음알음 유출되기까지 한 건 덤..

더 옛날 1700년대엔 미국에서 실용적인 증기선이 처음으로 발명됐다. 이를 만든 존 피치는 뼛속까지 공돌이에 불세출의 기계 천재였으며, 증기선 덕분에 발명가로서 불멸의 이름을 남기게 됐다. 하지만, 이 사람 역시 사업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서 말년엔 아편 중독으로 인한 자살을 당하고 말았다. 어찌 보면 디젤 엔진 발명자의 최후와 비슷한 최후인 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 다른 나라가 아니라 그나마 천조국이니까, 혹은 서양이니까 공돌이들이 그 옛날부터 저 정도라도 꿈을 실현했던 것 같다.
생각하는 방식이 뭔가 현실적이고 실용적이어서 개척자 정신· 기업가 정신이란 게 있고 기술자가 존경받았으니까. 그리고 과학기술 자체뿐만 아니라 상업 교류를 하고 경제 제도가 발전했기 때문이다. 비록 걔네들도 하는 짓이 다 선했던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 위대한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조차 남해 회사인가, 주식 투자 잘못해서 현재 시가 기준으로 수십억 원에 달하는 재산을 말아먹은 적이 있었다. 그는 기가 차서 "내가 우주 천체의 운동을 기술하는 법칙도 발견했지만, 빌어먹을 사람의 심리와 돈의 흐름은 도저히 기술이나 예측을 못 하겠다" 라고 디스했다고 전해진다.

서양엔 겨우 1700년경, 조선에서 병자호란 끝나고 영조 탕평책 이러던 시절에 벌써 기업이란 게 있고 저런 경제 제도가 있었다는 게 핵심이다. 최소한 "기술이나 배운 쌍것들 에헴" 선비질을 하지는 않았다.

전에 얘기했던가..?? 조선은.. 상상을 초월하는 미주알고주알 기록덕후 관료제 국가였다.
조선왕조 실록이 나름 유네스코 세계 유산이고, 수원화성도 지금 실물이야 1도 역사적 가치가 없지만 제작 과정이 너무 상세하게 잘 기록돼 있었던 덕분에 역시 세계 유산으로 등재됐다. 지금 실물도 오리지널과 동급의 가치가 있음이 인정된 것이다.

근데, 그런 나라에서 장 영실(기술), 김 정호(지도) 같은 한 분야 전문가 덕후가 생몰년조차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되냐? 임진왜란 때 도자기 기술자들 잔뜩 유출시킨 건 어떻고..??
이게 관점이 글러먹었다는 거다. 미국처럼 기업들끼리 비열한 싸움이나 담합, 독점이 벌어진 걸 비판하는 단계로 갈 여지조차 없이 그 앞단계에서 막혔다~!!

* 여담

(1) 미국에서는 이미 19세기부터 철강왕 카네기, 석유왕 록펠러 같은 사람이 있었던 반면, 우리나라에서 뭔가 기업다운 기업은 해방 후 박통 때 1960년대에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더 옛날 일제 시대에 한국인으로서 기업을 경영한 사람들은.. 참 존경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단순히 유한양행의 설립자 유 일한 회장은 너무 대단한 분이 아닐 수 없다.

(2) 기업 얘기는 아니다만.. 저 1940년대 말, 터커 자동차가 있던 시절에.. 미국에서는 전쟁이 끝났으니 군대를 대폭 칼질하고 덩치를 줄이게 됐다.
태평양 전쟁 시절 같은 거대한 규모의 해군이 필요하지 않게 됐고, 이제 막 공군다운 공군이라는 게 태동해서 기존 육· 해군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고, 바다에서는 전함 대신 항공모함을 띄워서 함재기끼리 싸우게 하면 되겠고..

이때가 뭔가 전쟁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격변기였다. 그래서 군 수뇌부에서는 독립된 군종으로서 해군과 해병대를 통째로 없앨 생각까지 했었는데.. 이건 컴퓨터로 치면 마치 2000년대 중반에 IE6이 고인물 썩은물이 돼서 마소에서 브라우저 팀을 없애고 Windows 팀으로 통합하려는 생각을 했던 것, 2010년대 초반에 Windows 8에서 시작 메뉴를 앲앴던 것과 비슷한 발상인 것 같다.

20세기 중반에 미국에서 대중교통도 전멸하고 설마 해군도 전멸할 수 있었던 걸까? 물론 실제로 그렇게 되지는 않았으며, 미군이 세계를 제패하는 원동력은 여전히 해군이다. 해군 해체설이 제기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1950년대엔 대형 항공모함이나 잠수함의 동력원에 원자력이라는 치트키도 등장했다. 그렇게 기술은 발전해 왔다.

Posted by 사무엘

2022/05/23 08:35 2022/05/23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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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관련 여러 이야기들

1. 천조국 군대의 기상

미군은 무슨 중국이나 북괴처럼 대규모 거위걸음 열병식이나 매스게임, 특수부대 차력쇼를 벌이면서 자국의 군사력을 과시하지 않는다. 독립기념일이나 대통령 취임식 때 옛날 군대 코스프레 퍼레이드 정도나 하지..
이건 서울대나 육사가 "취업률 xx%" 이러면서 학교 홍보하고 지하철역 안에다가 광고를 붙이지는 않는 것과 정확하게 같은 이치이다.

지금이야 중공과 러시아가 많이 성장해서 미국 패권을 위협 중이긴 하다. 그러나 미국은 단순 국력 물량이 아니라 기독교 세계관과 자유 민주주의 인권 이념을 바탕으로 세계를 석권하고 세계 질서를 확립한 나라이다. 저 사회주의 독재 국가--겉으로 법은 자유 민주주의 표방이지만, 여전히 옛날물이 많이 묻어 있는 경우도 포함--들이 미국의 이런 진정한 저력을 흉내 내지는 못할 것이다.

2. 한국과 일본과 미국의 과거

1980년대: 우리나라로서는 5공 시절이요, 일본은 쇼와 말기요, 미국은 레이건 대통령 시절이었다. 이때는 세계적으로 경제가 안정되고 오일 쇼크도 끝나고, 엄청난 호황기였다고 회자된다.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 정보화 시대, 과학 기술에 대한 장밋빛 희망, 우주나 사이보그를 소재로 한 온갖 기발한 SF물들.. 우리나라의 경우 마이카 시대, 일본은 특유의 버블 경제.. 이런 걸 생각해 보자~!

1960년대: 한국은 이때 ‘경부’라는 간선 고속도로 하나를 겨우 간신히 만들었다.
일본은 이때 시속 200km짜리 고속철도 신칸센을 세계 최초로 자체 기술로 개발했다.
미국은 거의 같은 시기에 로켓을 쏴서 인간을 달로 보냈다.;;

(1940년대: 바로 다음에 올라올 글에서 이 시대를 좀 다룰 것이다. ㄲㄲㄲㄲ)

그런데 더 옛날,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전간기이던 1920년대도 이와 비슷하게 세계적으로 좋은 추억이 남겨진 시기였다.
우선 한반도는 3· 1 운동 이후에 문화 통치가 시작됐다. 이때는 그 전의 무단 통치나 그 이후의 민족 말살 통치에 비해서는 훨씬 더 살 만했던 때였다. 항일 독립 운동만 아니면 여러 다양한 사회 활동이 허용되고 온갖 신문물도 들어왔다.

본거지인 일본도 정치판의 분위기가 아직 군국주의로 폭주하기 전이었고 그나마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분위기가 살아 있었다.
하물며 천조국은..?? 라디오 방송과 할리우드 영화, 뉴욕에 초고층 마천루, 포드 T 자동차 마이카.. 전부 얼추 이 시기에 등장했다. 또 국제 연맹도 세계 곳곳에서 마이너한 국가들의 분쟁은 잘 중재하면서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좋은 시절은 대공황과 함께 완전히 끝났으며, 이를 계기로 1930년대부터는 세계는 다시 분위기가 슬슬 험악해진다. 국제 연맹은 2차 세계 대전이 터지는 걸 막지 못했다. 미국에서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정확하게 이 험난한 기간 동안 통치했었다.

3. 미국 남북전쟁 당시의 징집 관련 일화

미국 남북전쟁은 밀덕의 관점에서 보면 최초로 철도를 통한 보급, 후장식 총기와 저격수, 초보적인 단계의 기관총과 철갑선, 잠수함이 등장한 첨단 과학 기술 전쟁이었다. (풍경 사진과 종군기자는 남북전쟁보다 미묘하게 전인 유럽의 크림 전쟁 때 최초로 등장했고..)

일개 내전 주제에 탱크와 비행기만 없는 1차 세계 대전 급으로 시대를 앞섰던 것이다.
기술적으로는 그런데.. 이 남북전쟁은 징집과 관련된 일화가 전해지는 게 좀 있다. 둘 다 남군과 북군 중 어느 진영의 이야기인지는 확실치 않은데, 어차피 그게 중요한 사항은 아니었다.

(1) 전사
나라가 전시 상황이 되니 모병이 아닌 징병제가 시행됐다. 그런데 이때 부유층들은 300달러라는 돈을 내고 다른 사람을 대신 입대시키는 것으로 징병 의무를 회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는 대리 입대자도 어차피 징집 대상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럼 어찌 되는 거지? 아무튼..

A라는 어떤 사람이 B라는 다른 사람을 대리 입대시켰는데, 그렇게 참전한 B는 전장에서 그만 전사하고 말았다. 문제는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A에게 징집 영장이 또 날아왔다는 것..
이때 그는 "나는 B라는 사람의 명의로 이미 전사하고 죽은 목숨이다. 이거 뭐 한군두도 아니고, 나는 또 징집되거나 또 국방세 내고 대리인을 내세워야 할 국방의 의무가 없다"라고 항변했다. 이 논리가 인정되어 그는 두 번 다시 징집되지 않았으며, 그게 판례로 정착했다고 한다.

이건 무슨 일사부재리의 원칙처럼 들리는데.. 예수님이 인간을 위해 대신 죽으신 것, '대속'이라는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기독교 쪽에서 복음 전할 때 종종 인용되는 예화라고 한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겠다만, 출처가 불분명하고 그렇게 막 도덕적으로 본이 될 만한 일화까지는 아닌 것이 아쉽다. 부자들은 돈으로 군대를 다 빠진다고 그 당시에도 원성이 자자했었기 때문이다. 전사자를 예우하는 연금도 당연히 A의 유족이 아니라 B의 유족에게 지급돼야 할 것이다.

(2) 포로
옛날에는 전쟁도 현재보다 명분과 체통과 원칙을 따지면서 훨씬 더 신사적이고 고지식하게(?) 하는 면모가 있었다.
미국 남군과 북군이야 비록 지금은 총 들고 싸우지만 상대방이 같은 나라 같은 언어 같은 기독교 문화권인 사람이고, 전쟁이 끝나면 다시 화해해야 할 이웃이었다.

그래서 적군을 포로로 잡았는데 당장 포로를 번거롭게 관리할 여건이 안 되면..
포로를 죽이는 게 아니라 그냥 무장만 해제하고는 풀어 주는 경우가 있었다. 단, 이런 각서를 쓰고 동의를 받게 하고 말이다.

"우리가 사정이 여의찮아서 너를 석방해 주지만 너는 여전히 법적으로 우리 측의 포로이다. 그러니 훗날 포로 교환이 이뤄질 때까지 너는 군사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장교가 적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이런 절차를 거쳐서 풀려났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전선으로 곧장 복귀하고 전투를 지휘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그는 그 각서를 제시하면서 자기는 정식으로 포로 교환을 하기 전엔 군복무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군에서는 그 정황을 인정하고 그를 진짜로 내버려 뒀다고 한다.

이거 뭐, 감독 없이 시험을 쳐도 아무도 컨닝을 안 하고, 땅에다 금만 그어 놓고는 감옥이라고 해도 죄수가 거기 얌전히 앉아 있을 것 같은 샤방샤방 분위기이다.
저 때는 적이라도 약속을 지키기는 한다는 신뢰가 있으니 이런 '서류 상으로만 포로'가 가능했음이 틀림없다.

이런 분위기와 정반대였던 전쟁은 아무래도 80년 남짓 뒤의 태평양 전쟁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일본이고 미국이고 모두 상대방을 인간이 아니라 악마 괴물로 취급했다. 극도의 스트레스에다 악이 받친 나머지, 한쪽에서는 적군 포로를 말 그대로 잡아먹었으며(식인).. 다른쪽에서는 적군 시체에서 두개골을 뽑아서 아이템으로 갖고 다니는 Savage 실사판 '인외마경'이 벌어졌던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2/05/20 19:34 2022/05/20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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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킬도저 사건

세상에서 벌어지는 범죄들의 동기를 살펴보면 그냥 돈 때문에, 혹은 주변 누군가가 미워서, 그냥 나쁜짓 하는 것에 쾌락을 느끼게 돼서, 세상 살기 싫고 다 같이 죽여 버리고 동귀어진하고 싶어서 등 다양하다.
그런데 드물게 공권력에 의해 부당· 불공평한 침해를 당한 걸 받아들이지 못해서 화풀이하는 유형도 있다. 각종 행정 처분이라든가, 민사 재판에서의 패소 말이다. 물론 실제로는 부당한 침해가 아닌 자업자득일 뿐인데 당사자만 망상에 빠져 혼자 잘못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지난 2008년 2월에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숭례문 방화 사건을 기억하시는가? 어떤 정신 이상한 60대 후반의 노인네가 토지 보상 비용에 불만을 품고 저지른 짓이었다. 보상비가 너무 저렴해서 억울하다고 청와대에 민원을 넣고 언론에다 제보도 해 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는 여기에 앙심을 품고 2006년엔 창경궁에다 불을 지르다 걸려서 집행유예를 받았다. 그랬는데 집행유예 기간 중에 그 다음으로는 숭례문까지 불지르는 대형 사고를 쳤다.

5년 전, 노 무현 대통령의 취임 직전에는 어느 늙은 미치광이 때문에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가 벌어지더니, 공교롭게도 딱 5년 뒤에 이 명박 대통령의 취임 직전에는 저런 화재가 벌어진 것이다. 숭례문 방화범은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2012년 9월에는 진주시에서 주차 단속(... 설마 겨우 이것 때문..??)에 앙심을 품은 어느 40대 중장비 기사가 술 한 잔 거하게 마신 뒤, 포크레인을 몰고 파출소로 난입해서 거의 40분 가까이 난동을 부렸다. 자기 중장비로 건물 외벽과 주차장, 가로수, 가로등, 버스 정류장 등을 부쉈으며, 집게로 순찰차를 들었다가 지구대 입구로 내던지며 찌그러뜨렸다. 난동은 가해자가 경찰이 발사한 권총 실탄을 허벅지에 맞고 제압당한 뒤에야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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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는 이미 주폭 등의 전과 3범이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인해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기소됐고, 징역 3년에다 6900만 원이 넘는 물피 배상을 청구받게 됐다. 굴삭기 몰고 난동이라니.. 이건 국내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꽤 엽기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천조국은 이런 식의 분풀이 범죄도 스케일이 반도를 아득히 능가한다. 2004년 6월, 콜로라도 주에서는 일명 '킬도저' 사건이란 게 벌어졌다.

이 사건의 가해자는 자기 가게 인근에 입주할 예정인 시멘트 공장 때문에 자기 가게로 진입하는 경로가 막히고 자기 생계가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고 공장장과 시청에게 여러 번 탄원 청원을 넣었다. 뭐 이런 형태의 분쟁 자체는 세계적으로 드문 게 아니다. 그런데 그 요청은 석연찮은 이유로 인해 줄곧 묵살됐으며, 이 과정에서 오히려 자신이 자기 사유지에서 다른 사소한 법을 어긴 게 드러나서 과태료를 먹었다.

이 사람도 다 잘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 포크레인 난동꾼보다는 빡치는 사유가 훨씬 더 정당했다.
수 년 간 노력했던 합법적이고 평화로운 방법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자.. 그는 개인의 권리가 국가에 의해 부당하게 침해당한 것에 앙심을 품게 됐다. 그렇잖아도 처자식 없는 미혼에다 부모님도 돌아가신 홀몸이다 보니, 오늘만 살고 더 잃을 게 없는 복수귀로 완전히 돌변해 버렸다.

그는 전재산을 털어 불도저를 한 대 구입하고는 불법 개조(?)를 시행했다. 오랜 시간을 들여 차체에다 총알을 방어하는 두꺼운 철판· 콘크리트 장갑을 둘렀다. 유리창 대신 자그마한 비디오 카메라를 달았으며, 카메라 렌즈 주변도 강화 투명 플라스틱을 씌워서 보호했다. 이 애마의 이름은 졸지에 불도저에서 킬도저(!!)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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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그는 2004년 6월 4일에 킬도저를 몰고 나가서 시멘트 공장 사장, 시청, 경찰서 서장, 판사 등 원한 관계인 사람들의 집을 들이받고 밀어 버렸다. 지방 경찰과 SWAT 특공대가 출동했지만 소총이나 수류탄 수준의 개인 화기로는 킬도저를 도저히 제압할 수 없었다. 난동은 거의 2시간이나 계속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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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우리나라 포크레인 난동꾼처럼 술 거하게 마시고 우발적으로 깽판 친 게 아니었다. 양덕후 공돌이 기질을 발휘하여 오랫동안 차근차근 진지하게 복수의 칼을 갈다가.. 훨씬 더 대규모로 사고를 친 것이었다.

하긴, 건설기계 중에서는 포크레인과 불도저가 무한궤도도 달려 있고 탱크와 가장 비슷하게 생긴 물건이긴 하다. 전땅크 할배 같은 사람이 이런 걸 타고 다닌다면 어울릴 것 같다.. =_=;;
한편으로 기계 대신 대형 동물에다 비유하자면.. 1994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폭발해서 결국 사람을 죽이고 난동을 부리다가 사살된 코끼리 '타이크' 같은 생각도 든다.

물론 킬도저도 천하무적 만능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중엔 반격을 받아서 라디에이터가 망가졌다. 냉각수가 증발해서 증기 기관차마냥 김이 모락모락 새어 나왔으며, 엔진도 방열이 안 되어 과열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킬도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깽판을 쳤다.
나중에는 어쩌다 삐끗해서 이동 능력을 상실하고 무장 경찰들에 포위되고 말았는데.. 그러자 킬도저를 운전하던 가해자 아재는 차내에서 권총 자살로 깨끗이 50대 중반의 인생을 마감했다.

킬도저는 한번 탑승하고 무장한 뒤에는 입구가 완전히 밀봉돼 버리는지라, 안에서 문을 열고 내릴 수 없는 구조였다고 한다. 무슨 일본 카미카제도 아니고.. ㄷㄷㄷ
경찰이 떡장갑을 절단하고 가해자 시신을 꺼내는 데는 2시간도 아니고 무려 12시간이나 걸렸다고 전해진다.

이 난동 때문에 10여 채가 넘는 건물이 파괴되면서 700만 달러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났다. 하지만 이 사람은 아무 친지 없이, 재산도 킬도저를 제조하느라 대부분 탕진한 빈털터리 상태로 죽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해자나 가해자 유족을 족쳐서 피해 배상금을 뜯어낼 수도 없었다. 700만 달러이면 아까 그 7천여만 원의 거의 100배에 달하는 규모이지 않은가? -_-;;

그래도 이 사람은 완전히 선을 넘고 싶지는 않았는지, 원한이 없는 주변 주민들에게는 이 날 멀리 대피하라고 언질을 줬다. 덕분에 이 사건은 엄청난 피해 규모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인명 피해는 전무했다.
즉, 말만 '킬도저'이지 이 기계가 실제로 킬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이게 여느 총기 난사 사건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하지만 킬도저는 누군가에 의해 또 조립되어 사고를 치지 못하게 잘게 분할 해체되어 고철로 매각됐다.

이렇게 싸제 장갑차까지 만들어서 난동을 부리는 건 천조국 스케일이니까 가능한 것 같다. 그 경제력에다 그 개인주의 의식 덕분에 말이다. 하긴, 천조국은 옛날에 자기들끼리의 내전인 남북전쟁을 벌이던 시절부터 싸우는 스타일과 방식이 다른 나라들보다 앞서 있었다. (1860년대에 이미 철도에 저격수에 초보적인 잠수함까지 등장했을 정도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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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이성적인 사람이 비이성적인 행동을 해야 할 때가 있다" ㄷㄷㄷㄷ
이건 윤 봉길 의사, 그리고 나치 독일 시절에 히틀러 암살을 추진했던 그 상이 군인도 거의 똑같은 말을 했지 싶은데.

북한에서는 옛날에 이 웅평 씨가 바닷가에 떠내려 온 남조선 라면 봉지에 쓰여 있는 "유통 과정에서 변질된 제품은 구입처에서 무료로 교환해 드립니다" 이런 너무 당연한 권리 안내 문구만 보고도 큰 현타를 경험하고 탈북을 결심하게 됐다지 않는가..??
천조국은 그런 식으로 개인의 권익에 대한 관념, 그리고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같은 의식이 더욱 투철한 것 같다.

그러니 신념에 따라 저지른 범죄는 다른 범죄와는 성격이 좀 다르다. 물론 무식 멍청한 사람이 맹목적인 신념을 갖게 되면 엄청 끔찍한 결과가 초래되지만 말이다.
저 사람은 신념에 따라 장갑 달린 불도저를 몰았지만.. 반대로 신념에 따라 불도저를 가로막고 서서 시위를 벌이다가 불도저에 치여 죽은 사람도 있었다. 2003년 3월, '레이첼 코리'라는 가녀린 인권 운동가.;;  2004년 기준으로는 얼마 되지도 않은 가까운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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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저런 게 아니라 그저 "마스크 써라", "담배 피우지 마라" 이런 말 듣고 자기가 무시 당한다고 생각해서 남의 가게를 찾아가서 해코지 하고 멀쩡한 직원에게 행패 부리는 건.. 신념하고는 1도 관계 없으며 그냥 분노 조절 장애에 막돼먹은 짓일 뿐일 것이다.
킬도저 사건 하나 갖고도 인생사에 대해서 많은 걸 생각하게 된다.

Posted by 사무엘

2022/04/12 08:35 2022/04/1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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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 대전은 미국-일본이건(태평양 전선), 영국/소련-독일이건(서부 전선) 각색해서 영화 만들 것들이 차고 넘치는 것 같다. 이 글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 두 영화를 주목하며 독자 여러분께도 추천하고자 한다.

(1) 핵소 고지 Hacksaw Ridge (멜 깁슨 감독, 2016) -- 데스몬드 도스(1919-2006)의 일대기
(2) 언브로큰 Unbroken (안젤리나 졸리 감독, 2014) -- 루이스 잠페리니(1917-2014)의 일대기


보다시피 이 두 실존 인물은 거의 동갑내기였다. 그리고 전쟁터에서 적병이나 적함· 적기를 공격해서 무력화시키는 통상적 무공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초인적인 행적을 남기고 영웅이 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두 영화도 나름 비슷한 시기에 나왔다. 그리고 유명한 배우 출신의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는 것, 나름 기독교 색채를 집어넣었다는 것, 평이 꽤 좋다는 것이 일치한다.

1.
핵소 고지는.. 주인공이 제칠일안식교 신자였다. 무정부 반전 평화주의자는 아니어서 진주만의 복수를 하고 싶고 군 복무는 하고 싶은데, 그렇다고 집총은 거부하는 좀 이상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엔 항명죄로 군사재판에 회부됐지만.. 여차여차 해서 의무병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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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45년, 오키나와 상륙 전투에서 총 대신 구급상자를 들고 위험한 적진을 종횡무진하면서, 수십여 명의 부상병들을 혼자 구출해 냈다. 그들은 구출되지 못했으면 다들 그대로 죽거나 적의 포로가 됐을 것이다.
의무병은 전장에서 의사나 간호사가 아니라 119 구급대원 같은 역할을 한다. 이게 얼마나 위험한 보직인지는 2002년 제2 연평해전 때 박 동혁 병장이 다쳤던 걸 생각해 보시라.

이 공로 덕분에 그는 순식간에 영웅이 됐다. 동료와 상관들이 다 너를 얕잡아 봐서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사죄를 했다. 나중에는.. 레알인지 각색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네 소대는 왜 아직 진격하지 않는 거냐? / 아, 도스 이병의 기도가 아직 안 끝났지 말입니다." 이렇게 신앙까지 당당히 인정받는 지경이 됐다.
이 영화에서는 일본군 측 인물이 뭔가 말을 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더라.

2.
다음으로 언브로큰은.. 주인공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했던 육상 선수 출신이었다. (흠 육상 선수라니 뭔가 에릭 리들 같은 느낌이..)
그는 그 다음 1940년 도쿄 올림픽에도 출전하려 했지만 이제는 올림픽 경기 대신 전쟁터에 나가게 됐다. 게다가 올림픽 개최 예정국이 아예 적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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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폭격기 승무원으로 복무했는데.. 하루는 격추를 당한 것도 아니고 정비 불량으로 인해 기체가 태평양 망망대해에 추락했다. 구명보트에서 무려 7주를 근성으로 버티다가 구조됐지만, 운 나쁘게도 아군이 아니라 일본군에게 구조되어서 포로로 전락했다.

그는 일본 해군 수용소에서 2년 넘게 고생했다. 일본한테도 얼굴이 알려진 유명한 운동 선수여서 더 고생했다. 특히 수용소의 간수 일본군이 그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어서 그를 아주 가혹하게 대했다.

하이라이트 장면은.. 주인공이 혹독한 노동에 기진맥진했던 상태에서 무거운 통나무를 들고 땡볕에 서 있는 가혹행위까지 감당해 낸 것이다. (통나무를 떨어뜨리면 총살이라고 위협..) 주인공은 그 상태로 무려 40분 가까이 초인적인 힘으로 버티면서 간수를 노려보며 압도해 버렸다. 주 기철 목사 전기 영화라면.. 솟은 못 위를 맨발로 걸은 일화가 이 장면에 대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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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전쟁이 끝난 덕분에 주인공은 해방되고 무사히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기독교 신앙에 근거해서 심신의 장애와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적국인 일본을 용서하는 경지에 다다랐다.
일본에서 나가노 동계 올림픽이 열렸던 1998년엔 노구를 이끌고 일본을 방문도 했었다. 그러나 예전에 그를 학대했던 간수 등 일본군 출신 인물들은 짱박혀 숨어서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천조국은 "미드웨이" 같은 전투 분야에서도 짱이고, 저런 휴먼 드라마 분야에서도 그냥 짱이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2/02/03 19:33 2022/02/03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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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나치 경례 거부

  • "주변에서 모두가 '예, 예' 할 때 혼자만 양심껏 소신껏 '아니요'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
  •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한다" (사관 생도 신조 중)

이런 것의 예시로 요런 짤방이 종종 인용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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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군중들이 오른팔을 뻗치면서 '하일 히틀러'를 외치고 있을 때 혼자 생까고 가만히 있었던 이 사람은 정체가 무엇일까?
그는 아우구스트 란트메서(1910-1944)라는 독일인이며, 사진은 의외로 전시가 아니고 히틀러의 집권 초기이던 1936년, 나치 독일의 모 군함의 진수식 때 촬영된 거라고 한다.

구체적인 사연은 검색해 보면 다 나오니 여기서 일일이 소개하지 않겠다.
핵심은 이 사람은 유대인 여자와 결혼해서 딸까지 생겼는데 하필 거의 같은 타이밍 때 나치가 집권하면서 유대인에게 축객령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그는 저 군함을 제조한 조선소의 직원이었다. 그러니 진수식 행사엔 사실상 강제 동원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나치 당에도 가입하긴 했지만, 유대인이니 정치니 이념 그딴 건 별 관심 없고 그냥 취업 때문에 가입한 것에 가까웠다.

그랬는데 나치 당에서 유대인들을 못 살게 굴기 시작했으며, 자기에게도 멀쩡한 아내를 버리라고 이혼을 종용한 것이다. 그러니 당이 좋게 보일 리가 없고 경례를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게 전부였다. 이 사람은 단순히 사랑하는 자기 아내를 버리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훗날 등장한 백장미단 조피 숄 같은 급으로 전시에 거창한 신념이나 소신을 갖고 나치 경례를 거부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저런 포즈로 대외 공개용 사진이 찍혀 버리자 나치 당에는 저 괘씸한 놈이 누군지 곧장 추적을 시작했고, 당사자 역시 신변의 위협을 진지하게 느끼게 됐다.
그는 가족을 데리고 스웨덴으로 도피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발각됐다. 인종오염법으로 기소되어서 수용소 행..;;

아내는 전쟁 중에 여러 수용소에 끌려 다니다가 1942년쯤에 결국 살해당했다(아마 가스실에서). 저 사람은 살아서 풀려나긴 했지만 이미 비국민 불령선인으로 낙인 찍혀 있었다. 어느 죄수 부대에 징집되었다가 1944년쯤에 전쟁터에서 실종 내지 전사로 최후를 맞이했다.
그래도 어린 딸 둘은 고아원 내지 친인척 집을 거치면서 다행히 살아남아서 자기 부모의 사연을 후세에 전해 줄 수 있었다. 저 사진도 오랫동안 숨겨져 있다가 1991년에 딸에 의해 공개된 거라고 한다.

2. 미국의 태평양 전쟁 참전 거부 (입법)

미국은 1941년 말에 일본으로부터 선전포고도 없이 진주만 공습을 당한 것으로 인해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그래서 새끼 빼앗긴 암곰을 능가하는 복수귀로 각성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엄청난 빡침이 담긴 대국민 담화인지 연설을 한 뒤, 의회로부터 대일 선전포고와 참전 승인을 받았는데.. 상원에서는 전쟁 개시 관련 법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그러나 하원에서는 388:1로 반대가 딱 하나 있었다.

전미가 왜놈에 대한 증오심과 복수심으로 눈이 시뻘개졌던 험악한 시국에서 홀로 반대표를 던진 용자는 바로.. 미국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자 여호와의 증인 급의 반전주의 소신이던 '지넷 랭킨(1880-1973)'이라는 사람이었다.
이 아줌마는 1차 대전부터 시작해서 2차 대전, 6 25 사변, 월남전까지 일체의 전쟁에 대해 자국이 참전하는 것을 일관되게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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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위기에서 이런 아웃사이더가 당장 테러· 협박을 당하지 않고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 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미국이 다양성이 존중받으며 사회적으로 얼마나 성숙한 나라였는지를 알 수 있다. 일제나 나치 독일에서 누군가가 저런 반전 운동을 공개적으로 했다간 그 사람은 어찌 됐겠는가? (군중 속에서 팔 뻗어서 같이 경례 안 한 것만으로도 아까처럼 가정이 풍비박산 나는 뒤끝이 뒤따랐거늘..)

하지만 천조국이라도 선 넘을 정도로 이상한 소신을 포용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그 아줌마는 이를 계기로 소속됐던 공화당에서 퇴출되고, 정치판에서의 커리어가 통째로 끝장 났다고 한다.
결국 2차 대전 이후의 반전 운동은 정치인이 아니라 사회 운동가로서 개인 단위로 진행됐다. 분야는 다르지만 개고기 반대하면서 이상한 똥고집 부리던 프랑스의 그 아줌마 생각이 문득 난다.;;

3. 곁가지: 미군의 일본군 시체 훼손

이건 참 경이롭고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드는 사진이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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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1944년 5월, 미국의 어떤 아가씨가 남자친구로부터 웬 해골바가지를 선물로 받고는.. 잘 받았다며 감사 답장을 보내는 모습이 보도된 것이다.
남친은 해군에 입대해서 태평양 전쟁터에서 한창 고생 중이었는데.. 전사한 어느 적군 병사의 유해에서 두개골을 추출해서 여친에게 선물로 보낸 것이다.
전시이니 저 여친도 군수공장에서 근무 중이었으며.. 저 때 나이는 겨우 20살이었다.

그 당시에 일본에 대한 미국의 증오심은 일선의 병사들이 일본군 시체에서 해골바가지를 뜯어내서 장신구로 쓰고 연인에게 선물로 보낼 정도로 극심했다.
최악의 증오스러운 적을 상대로 싸우는 데다, 억만 리 떨어진 망망대해의 섬에 상륙해서 밀림 속에서 전투를 벌이던 태평양 전쟁터는 환경도 최악의 생지옥이었기 때문이다.

이 일본놈들도 상대방에 대해 "저놈들은 귀축영미, 항복했다간 무조건 죽음" 이딴 소리에 골수까지 세뇌된 괴물들이었다. (얼마나 세뇌됐으면, 훗날 전쟁이 끝났으니 귀환하라는 말조차도 안 믿고 섬에 틀어박혀서 거지꼴로 몇 년을 버틴 사람들조차 있었을 정도..)
같은 백인 코쟁이에 기독교 배경이 있고, 말과 문화가 일말의 통하는 구석이라도 있는 서부 전선의 나치 독일 같은 부류가 아니었다.

그러니 이 전쟁터에서는 최악의 조건이 서로 맞아떨어지면서 그야말로 인외마경이 펼쳐졌다. 그 살벌함은 포카혼타스 Savages를 아득히 능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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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해 보시라. 천조국 군인들이 차라리 평시에 군기가 빠져서 민간인을 상대로 외국에서 범죄를 저지른 경우는 있지만..
전시에 적군의 시체를 훼손해서 저렇게 갖고 놀고 그게 저 정도로 대대적으로 매스컴까지 탔던 건 남북 전쟁, 미영 전쟁, 1차 대전, 월남전, 이라크전 등등등을 통틀어서 저 태평양 전쟁이 전무후무할 것이다. 물론 군 수뇌부에서 이런 짓을 금지하고 단속하긴 했지만, 악이 받칠 대로 받친 군인 개개인의 감정을 다 통제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고 천하의 미군이니까 이 정도로 정신줄을 놓은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해골바가지만 득템해서 장식품으로 써먹는 정도의 짓밖에 안 한 것이다.
일본군은 뭐.. 연합군 포로들을 훨씬 더 잔혹하게 고문하고 학대해서 다 죽이고, 100인 참수 경쟁을 벌이고, 어떤 곳에서는 심지어 대놓고 식인까지 했다.

이런 악랄한 경험으로 인해, 미국은 쟤들은 안 되겠다고 원자 폭탄까지 터뜨릴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훗날 전범 재판에서도 일제 전범들을 반드시 사형에 처하고, 총살도 아닌 그냥 교수형을 집행할 것을 건의하게 됐다. 교수형은 군인으로서의 예우를 박탈한다는 걸 뜻한다.
반대로 나치 독일 전범에 대해서는 독소 전쟁의 트라우마가 있는 소련이 더 강하게 교수형 사형 집행을 요구했다.

4. 일본 전범의 사형 거부 (사법)

태평양 전쟁이 일본의 패배와 무조건 항복으로 끝난 뒤엔, 다들 잘 알다시피 일본의 군인 지휘관과 정치인 중에 전쟁 범죄자를 가려내어 단죄하는 재판이(극동 국제 군사 재판) 열렸다. 침략 전쟁을 벌이고, 전투 중에 적군을 죽이는 게 아니라 민간인이나 포로를 고문하고 학살한 짓거리들 말이다.

그런데 이때 재판을 진행했던 연합국--미국, 중국, 영국, 프랑스, 소련-- 판사들 중에 '라다비노드 팔'이라는 인도인은 유일하게 아싸 행세를 했다.
다른 판사들은 전범들을 처형하는 것에 다 동의했고 총살이냐 교수대냐를 갖고 논쟁하는 정도였던 반면, 저 인도인 판사는 혼자 강경하게 처형을 반대하면서 노골적으로 일본을 실드 쳤다.

그는 단순히 인본주의 박애주의자로서 사형 제도를 반대한 게 아니라, 정치적으로 민족 감정상으로 엄청난 친일 성향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에다가 법을 뒤늦게 끼워 맞춰서 적용하는 건 부당하다, 왜 일본에 대해서만 일관성 없이 가혹한 잣대를 적용하느냐, 연합국은 가혹한 전쟁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는 줄 아느냐, 너는 왜 그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고 인제 와서 일본 탓을 하느냐" 등..
법리까지 거의 무시하면서 말 같지도 않은 궤변을 늘어놓으며 일본을 적극 옹호했다.

그러니 일본에서는 저 사람이.. 우리 한국으로 치면 후세 다쓰지--조선의 독립을 지지했던 일본 변호사-- 같은 취급을 받으면서 극진한 예우와 존경의 대상이 됐다.;;; 야스쿠니 신사에 추모비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도 진작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일본이 자국 인도를 식민지로 부려먹은 영국과 맞서 싸웠기 때문에 저 사람도 '적의 적은 친구' 논리로 일본을 옹호했던 걸까 싶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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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인도는 나치 독일이나 히틀러에 대한 국민 정서도 오늘날까지 굉장히 우호적이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지만 애 이름까지 ‘아돌프 히틀러’라고 지어서 Adolf Lu Hitler Marak라는 이름의 1958년생 정치인도 있을 정도이다~!
하긴 인도인들은 영국인으로부터 탄압을 받았지 나치 독일에 의해 수용소 가스실로 끌려갔던 적은 없으니까.. 일면 수긍이 간다.

Posted by 사무엘

2021/11/01 08:35 2021/11/0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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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특히 20세기 중반 이전)와 오늘날 사람들의 평균적인 가치관, 윤리관은 서로 적지 않게 달라 보인다.
뭐,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거나 도둑질과 살인이 나쁘다는 것 정도야 예나 지금이나 불변이겠지만,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처럼 어정쩡한 문제.. 예를 들어 사형 제도나 동성애 같은 것은 종교관이 개입하지 않은 상대주의 다원주의만 갖고는 확고한 답이 나오기 어렵다.

과거에는 지금보다 체면, 위신, 위계 질서, 명예를 따지는 성향이 더 컸으며 "안 되면 되게 하라, 이기든가 죽어라" 근성과 의지드립을 더 강조하는 편이었다.
그 반면 오늘날은 그때보다 실리, 인권을 더 따지는 편이다. "이길 수 없으면 살아서 돌아오기라도 해서 후일을 기약하자" 같은 관점이다. 그리고 집단보다 개인의 개성을 훨씬 더 존중해 주게 됐다. 두 관점은 서로 장단점이 있다.

먼저 옛날 얘기부터.. 옛날에는 우리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세상이 전반적으로 지금 같은 인권 의식, 복지, 자비심 넘치는 정신꽈 상담과 체계적인 아동 교육 같은 게 없었다. 진짜 아픈 것과 꾀병 부리는 걸 일일이 분간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 조직에서나 똥군기와 꼰대질, 까라면 까, "지금 이 정도 난관도 못 견디면 밖에 나가서 어떻게 버티려고?", "정신상태 개조엔 몽둥이가 약", 군대식 전체주의 사고방식이 횡행했었다. 학교에서는 뻑하면 연좌제 단체기합이었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없는 시절만큼이나 CCTV와 유전자 감식이 없던 시절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때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황 증거 앞에서 뻑뻑 우기는 질 나쁜 범죄자한테 물과 전기를 동반한 물리 치료까지 해 줘야 했다.

정신병원에 대한 인식은 당연히 지금보다 훨씬 더 부정적이었다.
그리고 자살...? "무슨무슨 죄를 속죄합니다.. 책임을 집니다 ㅠㅠ"라든가,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써서 "난 절대 결백합니다! 억울합니다!" 이런 호소라도 동반하는 게 아닌 이상, 단순 처지 비관 자살은 지금보다 훨씬 더 금기시되었고 불명예 치욕적인 짓으로 간주됐었다.

꼭 군대· 경찰이 아니어도 의대나 사법연수원 같은 어디 좁은 바닥 전문직 엘리트 코스라면 뭐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물며 군대에다 엘리트 집단을 합쳐 놓은 사관학교에서는.. 전투 중 전사나 사고로 순직도 아니고, 선배들한테 맞아 죽은 생도도 있었다. 맥아더가 당장 19세기 말에 미국 웨스트포인트를 다니던 시절에 비슷한 일이 주변에 있었던 건 유명한 일화이다.

기독교/성경적 세계관이 딱히 존재하지 않던 일본에서는 그게 특유의 사무라이(?)/신토 문화와 결합해서 더 심해지고 이상하게 변질됐다. 그리고 그걸 우리나라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일본은 그래도 전후에 GHQ로부터 참교육 받으면서 군국주의물을 쫙 빼냈지만, 한국은 상황이 반대.. 6· 25 사변을 계기로 오히려 상시 징병제가 시행되었고, 덤으로 군사 정권을 겪으면서 군대 문화가 더 깊게 파고들게 됐다. 국력의 차이가 "군대를 가질 수 없는 나라"와 "군대에 안 가면 안 되는 나라"의 차이를 만든 거나 마찬가지이다.

물론 그런 풍토가 나라 안보를 지키고 고효율 경제 성장을 가능하게 하고 기적을 만들어 낸 것도 있다. 그리고 옛날 세대도 악마나 짐승이나 괴물이 아니라 지금 우리와 똑같은 사람인 만큼, 그때는 오히려 지금 찾아보기 힘든 정보화· 전산화 이전 시대 특유의 인심이나 유도리, 상도덕(!!)과 명예 규율이 있었다. 일찍부터 철 들어서 어느 환경에서나 적응 잘하고 잘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즉, 다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었겠지만... 하지만 폭력이 지금보다 더 용인되고 남과 다름이 허용되지 않던 시절에 많은 사람들이 상처 받고 골병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평소에는 할배나 박통에 대해서 많이 긍정적으로 말하지만, 저런 부작용에 대해서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체적인 평이 긍정적인 이유는 그때는 의식 수준이 다 그랬고 다른 대안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 지옥 같은 여건에서 그래도 전반적으로 선하고 좋은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90년대부터 소위 좌파 민주화 바람이라는 게.. 그렇게 너무 경직됐던 옛날 군사 문화를 청산· 완화하고 약한 사람들 인권을 돌보는 것이었으면 나도 계속 지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 20년 겪어 보니 저것들은 역기능이 순기능을 넘어선 지 오래다. 숨겨진 억울한 죽음을 조명하는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역사를 왜곡하고 아예 아군과 적군에 대한 인식을 뒤바꾼다거나.. 교권을 완전히 박살 낸다거나, 범죄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 인권만 금이야 옥이야 챙긴다거나..

결정적으로 남한의 군사 정권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억압 폭력 비민주적인 이북 동네는 전~혀 비판하지 않고 저놈들도 실컷 퍼주면 착해질 거라고 우기는데, 내가 저런 놈들을 도대체 어떻게 지지해 줄 수 있겠는가? 이건 도저히 좌우 균형 따위로 퉁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또한, 체벌이나 사형 제도 같은 검증되고 성경적인 근거까지 있는 필요악을 없애는 실험은 조별 과제 공산주의 실험이 실패하는 것과 동급으로 무조건 실패하게 돼 있다. 인류의 본질이 바뀌지 않는 한 과학이고 진리이다.
"난 사형 반대 소신이지만 저놈은 인간도 아닌 짐승이니 상관없다" 이런 말장난 따위 하지 말고, 그냥 인간 사회는 사형 제도 없이는 못 돌아간다고 인정하는 게 옳은 판단이다.

그러니 오늘날의 관점도 마냥 좋기만 한 것이 아니다. 과거의 어떤 문제를 해결한 대신,또 다른 방식으로 하극상과 계층 갈등을 조장하고, 사회 기강을 교묘하게 야금야금 무너뜨리는 게 있다. 옛날과 지금을 비교해서 단점을 버리고 장점만 취합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야만· 폭력적인 체벌 없는 학교와 학교폭력 일진 없는 학교를 둘 다 이룰 수 없다면, 나는 후자가 더 우선순위가 높으며 그거라도 제대로 됐으면 좋겠다는 게 변함없는 생각이다.

지금까지 과거와 현재의 차이를 우리나라 기준으로 좀 살펴봤는데, 다음으로는 특별히 미국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고자 한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당시에 군사력 넘사벽, 정보력 넘사벽, 장병 복지 넘사벽이던 천조국이었다. 세계 최초로 병사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보급해 줄 정도였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허나, 1940년~50년대는 이런 초일류 선진국조차도 각종 인권이나 보건에 대한 관념이 지금과는 굉장히 달랐다는 것을 우리는 몇몇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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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담배..;; "의사들이 선택한 최고의 담배 카멜~!!" (1946년)
"엄마, 말보로 피우면서 기분 좀 푸세용~" (아빠도 아니고 엄마에게~!! ㅠㅠ) 이딴 광고가 버젓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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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50년대까지만 해도, 부모나 선생이 어린아이를 벌 주는 목적으로만 패는 게 아니라.. 그냥 남자가 같은 성인 여성(부인, 여친..!!)을 무릎에다 엎어 놓고 엉덩이를 줘 패기도 했다.;; 그게 평범한 시대상이었기 때문에 각종 영화에도 버젓이 촬영돼 들어갔다. 그래도 도구를 쓰지는 않고 그냥 맨손으로..
남존여비라는 게 동양 유교 문화권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당신은 여전히 부인을 때립니까?" 질문과 함께 "Why you should beat your wife"라는 글을 돈 주고 사서 읽어 보란다. 답이 없다.. -_-;;;
"여자와 북어는 삼일에 한 번씩 패야 맛이 좋아진다"의 미국판이나 마찬가지이다. 사실은 이런 성차별적인 발언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있어 왔다.
다만, 이런 건 가장이 집사람을 훈계하고 바로잡는다는 맥락이지, 술 쳐먹고 깽판 치면서 지 꼴리는 대로 구타하는 걸 말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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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제도가 필요한가, 학교에서 체벌이 필요한가, 낙태를 합법화하는 게 좋은가" 갖고 논쟁하듯이.. "필요하다면 여성(=부인)을 때려야 하는가?"에 대한 옹호 의견 중 하나가.. "Spanking might help get back some of ... respect they lost." 쉽게 말해 "가장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때릴 필요가 있다"이다. -_-;;;

다시 말하지만 저렇게 옹호 의견을 피력했던 사람은 여혐 싸이코 남성 우월주의자가 아니었다. 처자식을 먹여 살리고 가정을 책임지는 권위자로서 "부인의 행실이 지나치게 방자하다면 저런 극약 처방을 해서라도 저지할 필요가 있다" 이런 차원에서 옹호한 것이다.
물론 성경에는 자녀에 대한 체벌만 지지하지, 부인에 대한 스팽킹 같은 건 언급돼 있지 않다.. 오히려 여자는 남자보다 더 약한 그릇인데(골 3:19, 벧전 3:7), 모질게 대하지 말고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3) 그리고 끝으로..
저 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인종 차별이 여전히 심한 편이었다. 그래서 군대에서도 총 잡고 전투하는 보직에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웠으며, 기껏해야 취사병 등의 비전투 지원 병과에나 머물렀다. 물론 예외적으로 총 쏘고 전투기 조종한 흑인도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말 그대로 예외적인 경우였다.

그 시절 백악관 같은 관공서의 화장실은 남녀뿐만 아니라 흑백도 따로 구분돼 있을 정도였다.
군대에서 인종 차별은 2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차츰 없어지기 시작해서 70년대 월남전 타이밍 정도는 돼서야 완전히 근절됐다.

Posted by 사무엘

2021/03/05 08:35 2021/03/0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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