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랜만에 진지한 우리말 관련 글.

여러분은 중국이나 일본의 고유명사 한자음을 어떤 식으로 표기하는 걸 선호하는가?
예를 들어 타이 / 태국, 타이완 / 대만, 베이징 / 북경 같은 것.

a. 우수한 표음문자인 한글 뒀다 뭘 하나. 여타 유럽 언어와 마찬가지로, 너무 힘들지 않은 한도 내에서 최대한 현지음에 가깝게 읽어야 한다. 그게 속 편하고 일관성도 있다.
b. 엄연히 한국식 한자 독음법이 있는데 왜 그런 헛짓을 하나? 우리식으로 읽어야 한다.

우리말은 a와 b 표기가 굉~장히 문란한 상태이다. 이런 난잡한 실태를 한국어 학습자 외국인에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걔네들 입장에서 생각해 봐도 난감할 지경. 다만, 영어에도 '씨저'와 '캐자르'(카이사르)가 공존하듯이, 비슷한 맥락의 표기 바리에이션이 없지는 않다.

요즘도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본인이 어렸을 때 보던 각종 백과사전류의 책에는 “신해혁명 이전의 중국 인명· 지명은 b대로 표기하고, 그 이후의 것들은 a로, 다시 말해 현지음으로 표기한다.” 같은 황당한 절충안(?)까지 명시되어 있었다.

본인은 a안을 선호한다. 걍, 장 제스, 쑨 원, 루 쉰, 마오 쩌둥, 덩 샤오핑이라고 쓰면 편하겠는데. -_-
이상하게 배우 이름은 현대인이라고 해도 전부 b안이 굳어져 버렸으니 원..;; 이연걸, 성룡처럼.
똑같이 라틴 알파벳으로 쓰인 유럽 인명이라고 해서 그걸 죄다 영어식으로 읽는 건 실례이고 무식한 짓 아닌가? (적당한 예가 당장 생각이 잘 안 나네) 본인은 한자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한다.

또한 중국과는 대조적으로, 일본의 인명과 지명은 똑같이 한자인데 우리식으로 읽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KJV가 출간되기도 전 시대를 산 엄청난 옛날 인물이지만 중국의 '서태후'와는 달리 언제나 현지음 표기로 통용된다.
일본인 중에서 우리식 표기가 잘 알려져 있는 사람은 내 기억으론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밖에 없다. 일왕 히로히토? 데라우치(일제 강점기 총독)? 우리식 한자를 내가 알 게 뭐야. ㅋ

일본은 지명도 비슷한 상황이어서, 동경(도쿄)과 대마도(쓰시마) 말고 우리식 한자음이 널리 통용되는 곳은 거의 없다. 대판이라고 적으면 오사카라고 알아들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물론, 일본어는 훈독이라는 복병 때문에 애시당초 현지음 표기가 더 보편화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처럼 한자 문화권이라고 해도 현지음 표기는 그냥 익숙해지기 나름일 뿐이다. 유럽, 프랑스, 이탈리아를 놔두고 굳이 구라파, 불란서, 이태리를 고집할 필요가 뭐가 있나? 중국에 대해서도 그렇게 현지음으로 부르면 된다.

그리고 어느 나라 인명이든 현지음으로 적다 보면 성과 이름은 저절로 서로 띄어서 적게 되고, 그 관행에도 더욱 쉽게 익숙해진다. 난 솔직히 그걸 원한다. (덧붙이자면, 현재 한국의 인명 체계 자체도, 성씨 수가 너무 적고 글자수가 짧아서 동명이인이 너무 많은 등, 무척 기형적이기도 하고 말이다.)

여기서 본인의 경험 하나.
본인은 어릴적 영어의 음운 구조에 대해 배우면서 은사님으로부터 이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들리는 말을 한글로 절대로 적지 마라. 한글은 무조건 잊어버려라. 소리를 소리 그대로 익혀라”

그래서 한글을 너무 사랑하는 분들 중엔, 저 말에 발끈하여, 한글을 변형· 개량해서 외국어 발음을 받아적는 기호를 만들고 그걸 퍼뜨리고 다니는 분들이 적지 않다... 그런 노력이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본인은 개인적으로는 그런 것의 도움 없이 영어를 공부했다. 한글을 배제해야만, 영어를 공부하는 데 방해가 되는 “한국어 음운 구조라는 고정관념”을 탈피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한글 자체가 나빠서가 아니다.

그런 것처럼, 중국어를 공부할 때도 어줍짢은 한국의 한자/한자어 지식일랑은 잊어버리고 그 말소리를 익히는 게 중요하다. 게다가 걔네들은 옛날 스타일의 번체자는 쓰지도 않는다. 현지음 표기는 그런 사고방식의 맥락에서도 더욱 바람직할 거라고 본인은 생각한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해 본인과는 견해가 극단적으로 다른 분도 있다.
한글 찬양 진영(?)과는 반대로 한자 매니아들 중 일부는.. 중국의 인명· 지명을 중국 현지음으로 적는 걸 몸서리치게 혐오한다. 줏대 없는 짓, 미친 짓, 정신나간 짓, 사대주의 등 온갖 악담을 갖다붙이기까지 한다. 진짜로.. ㄷㄷㄷ;;

난 현지음 표기를 그 정도로 강경하게 고집하거나, 우리식 표기를 저 정도로 극단적으로 나쁘다고 매도하지는 않음. 절대적으로 옳은 게 없이 그냥 정하기 나름인 것에 너무 목숨 걸지는 않는다. 다만 어지간하면 현지음 표기 쪽을 대원칙으로 삼으면 좋겠다.

다음은 추가 잡설들.

1. 성 이름 표기 순서를 갖고도 열폭하는 분들이 있다. 이에 대해 본인은 한국식 이름의 로마자 표기랑, 아예 영어식 이름이라는 두 개념을 구분하자는 주의이다.
전자의 경우는 Kim Yongmook이라고 언제나 일관되게 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Samuel Kim이라고 쓴다.
일본은 로마자로 표기만 하는 순간에 성과 이름 순서를 알아서 싹 교환하는 반면, 중국과 한국은 그렇지 않다.

2. 중국의 사상가인 '공자'와 '맹자'는, 어른들의 사정에 의해 서양에서 라틴어 어미가 붙어서 Confucius와 Mencius라는 간지나는 영어 이름이 지어진 걸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거야말로 오늘날 한국어로 치면 부카니스탄, 귀차니즘, 오노스럽다.. 이런 것과 동일한 맥락의 작명법이지 않은지? ㅎㅎ

3. 오늘날은 한국어에서 한자나 한자어를 이용한 조어 자체가 사멸하다시피했다.
스키를 배우는데 강사가 말하길, 다리를 A자 모양으로 모으랜다. 옛날 같았으면 팔(八)자 모양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십자가처럼 말이다. (아니, 그러고 보니 걍 시옷자 모양이 더 편하겠네.)
아마 기독교가 21세기에 전래되었으면 십자가, 유월절, 휴거 같은 말이 생길 리가 없었으리라... 다 크로스, 패스오버, 랩처라고... 휴거를 뜻하는 랩처(rapture)는 유명한 컴퓨터 용어인 캡처(capture)와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1/07/31 08:35 2011/07/3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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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주의사신 2011/07/31 15:18 # M/D Reply Permalink

    중국의 자국어 사랑은 엄청나서, 그 많은 외래어를 다 새로 익혀야 합니다.

    가끔은 반반씩 섞어 놓은것도 있어서 그냥 소리나는 대로 읽어도 감이 안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星巴克 가 있는데요. (씽빠커라고 읽습니다.) 앞의 星은 별, 뒤의 巴克는 벅스의 음역입니다. 스타 벅스이지요...

    1. 사무엘 2011/08/01 10:48 # M/D Permalink

      훈독과 음독이 섞인 정서법은 난이도가 헬게이트 수준으로 치솟습니다.
      우리나라의 고대 문학에 존재하는 이두· 향찰이라든가, 일본어도 그렇고..;;
      중국은 자국어 사랑이라기보다는 한자 때문에 저렇게 안 할 수가 없는 처지이죠.
      저는 뜻글자는 로마 숫자 같은 접근이고, 소리글자는 아라비아 숫자 같은 접근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2. 소범준 2011/08/22 09:20 # M/D Permalink

      아... 이걸 보니 우리 나라 고대 국어의 '향찰'이 생각나는군요.
      음.. 어떤 것은 뜻을 빌려오는 훈차로, 또 어떤 것은 음차로 하는 것이 비슷하군요.

  2. 인민 2011/07/31 23:04 # M/D Reply Permalink

    1. 전 b안을 선호... 하지만 b안은 대부분 중국 이야기고 일본부터는 섞어서 씁니다. 부모님이 한양대 중어중문학과 나오셔서 전직 중국어+한자선생을 하신 덕에 b안이 편해요. (그러나 France를 아직도 법국法國이라고 하는 특이한 사람 중의 하나가 저)

    2.외국어 음을 표기하기에는 너무 “한글”이 부족하기 때문에(그 위대한 훈민정음 28자를 만들었음에도 듕귁용으로 ?????? 여섯 글자나 만들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현재 가지고 있는 한글의 범위 내에서 생각한다면 어떻게 개량해도 “한국어” 내에는 많은 도움을 주겠지만 절대 실용화될 수 없기에 전 현재 아예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Neo-한글 프로젝트를 생각중입니다.

    <그러나 인민이 어떤 말을 하든 그냥 씹어주셔도 문제될 것 없습니다>

    1. 사무엘 2011/08/01 10:48 # M/D Permalink

      한글의 표음 능력을 좋아하는 사람은 보통 현지음(a안)을 선호하는 편인데.. 의외네요.
      하지만 한문 전공하신 분은 아무래도 b안에 더 편하겠죠.

      프랑스를 의미하는 한자는 불(佛)이 통용되는데 법은 생소합니다.
      프랑스가 법국이면 독일은 덕-_-국이겠네요. (오덕의 나라 ㄲㄲㄲㄲ)
      프랑스의 佛은 미국의 美만큼이나 의미는 아무 관계 없는 음차이죠.
      하지만 달러를 나타내는 弗은 그냥 모양이 비슷한 한자를 갖다 쓴 것입니다.

    2. 인민 2011/08/01 19:02 # M/D Permalink

      글쎄요, 날개셋 한글입력기 도움말에도 언급되어졌지만 현재 문제는 strike를 1음절로 표시할 도리가 없는 것이고(스트라이크라고 표시하면 필요없는 ㅡ가 3개나 붙는다는) 특히 한자의 경우 鄧小平은 음운학적으로도 글자적으로도 3글자인데도 한글은 덩샤오핑이라고 써야 되는 불운을 겪고 있달까요. 결론은 네오(新)한글 프로젝트로 귀결

      듕귁에서는 아직도 실용적으로는 fa(1) guo(3) 즉 법국이라고 합니다.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냥 말할때는 법국이라고 계속 해요. 중국에서 프랑스를 불란서라고 하는 건 아직까지 못들어봤고요. 그나저나 德국인가요?

    3. 사무엘 2011/08/01 21:56 # M/D Permalink

      흠, 그럼 불란서는 정체불명의 음차인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오덕 할 때 덕은 아무래도 德이겠죠.

    4. 인민 2011/08/02 11:50 # M/D Permalink

      주의사신)?을 ran이라고 읽나요? lan이라고 읽는 경우는 흔했는데 처음들어봐서.

    5. 주의사신 2011/08/02 13:02 # M/D Permalink

      인민님// lan3이 맞습니다.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6. 주의사신 2011/08/02 13:03 # M/D Permalink

      1. 프랑스는 중국에서 법란서가 공식 명칭이긴 합니다.

      http://baike.baidu.com/view/54509.htm 에 가 보시면 중간 쯤에 中文名?: 法?西共和? 라고 중문 명칭은 법란서공화국이라고 되어 있지요.(fa(3)lan(3)xi(1)라고 읽습니다.)

      다만 위에 얘기했던 싱빠커처럼, 중국 사람들은 자기네 말 섞은 다음에 약어를 만들어버리는 이상한 작명법이 있어서 faguo가 된 것입니다.

      적고 보니 저 역시 왜 불이 쓰이는지 조금 궁금해지네요.

      2. 덕국(德國)의 경우, 독일이 덕이 많은 나라라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 아니라, 역시 中文名?: 德意志?邦共和? 도이치라는 것을 음차로 바꾸면서 德意志가 되었습니다. de2yi4zhi4로 읽습니다.

      법국과 같은 이유로 덕국이 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http://baike.baidu.com/view/3762.htm 확인하시면 됩니다.

      이 글은 인민님 글 위에 있었는데 댓글을 수정하니 위치가 이상해졌네요...

  3. France 2011/08/02 17:33 # M/D Reply Permalink

    불란서(佛蘭西)는 일본에서 ?蘭西라고 쓰고 후란스라고 읽는 것을 그대로 가져온 것 같아요. ?逸라고 쓰고 도이츠라고 읽는 것을 그대로 가져와서 독일(獨逸)이라는 이상한 발음이 된 것 처럼요.

    1. 인민 2011/08/03 00:39 # M/D Permalink

      하긴요.
      자본 공산 민주 이런단어가 다 일본어에서 왔으니 그렇게 되는 것도 무리는 없을듯. 가깝게는 사물함이 있겠죠

      그런데 왜 중국은 혼자 법란서일까요

  4. 소범준 2011/08/10 01:00 # M/D Reply Permalink

    저는 선택의 여지없이 a쪽입니다.^^

  5. 겨울하늘 2011/08/21 22:38 # M/D Reply Permalink

    신해혁명을 기준으로 중국어의 한글표기를 가르는 것은 어느 백과사전의 황당한 절충안이 아니라, 문교부고시인 현행 공식 외래어표기법의 입장으로서 현재까지도 교과서나 각종 보도의 기준입니다.
    저는 B안을 지지하긴 하는데 김 용묵 님이 말씀하신 그 B안은 아니고 중국어에 한해서만 B안입니다.
    타이, 프랑스는 당연히 그렇게 적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독일까지도 도이칠란트로 적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하지만 중국어는 중국사 전체를 통틀어 표기법을 현대어 발음으로 통일할 수 없다면 우리식 한자음대로 적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이상한 기준 때문에 중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엔 같은 페이지의 같은 지도 안에 “장안”('서안'으로 바뀌어서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 지명이므로 우리식 한자음으로 표기함)과 “뤄양”(낙양. 현재도 쓰는 지명이기 때문에 현대 북경어 발음으로 표기함)이 공존하는 황당한 일까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건 문제가 있지요.

    1. 사무엘 2011/08/22 09:36 # M/D Permalink

      오랜만입니다.
      아.. 그게 문교부 고시에 근거한 규정이었군요. 역시 법률· 규정 쪽 전문가이시다 보니.. 코멘트 감사합니다.
      이거 아니면 저거로 확실하게 통일을 못하니 한자를 처리하는 문제는 더욱 미궁으로 치닫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이 주제로 블로그 글이 올라오겠지만, 일본은 긴 현지음 표기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축약을 잘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고 구닥다리 한자음 음차나, 그냥 알파벳 이니셜로 축약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도이칠란트를 그냥 '도이치'로 줄이질 않고 그냥 '독일'로 쓴다거나
      오스트레일리아를 '오스틀' 식으로 줄이지 않고 그냥 '호주'로 쓰는 식이죠.
      텔레비전은 '테레비' 대신 간단하게 TV..;;

      그 반면, 일본은... 프레스테(PlayStation), 쇼바(shock absorber) 등등...;;
      한자음과 관련해서도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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