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의 수명이 짧은 이유

세상에는, 인생의 보편적인 패턴이긴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유독 강박관념에 가까울 정도로 심하다고들 하는 현상이 있다.
사람은 어느 분야에서든 젊을 때는 현역-_-에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여 몸 쓰면서 열심히 뛰고 일해서 결과물을 내고 돈과 명성을 끌어 모은 뒤,
나이가 들어서 노련하긴 하지만 몸이 예전만치 말을 안 듣고 밑으로 뛰어난 신참 후배들이 계속 들어올 무렵이 되면, 관리자, 해설자, 감독· 코치 등으로 물러나거나, 지금까지 모은 밑천으로 남을 부려 쓰면서 자기 사업을 한다는 것. 뭐, 이건 자연스러운 현상이긴 하다.

자율적이든 타율에 의해서든 뭔가를 열심히 만들던 위치이던 게 이제는 남에게 뭘 만들지 지시를 내리고, 그 과정을 관리하고, 남들이 만들어 놓은 걸 그냥 평가만 하면 되는 위치가 된다. 그거야말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도 하니까.
이제는 오히려, 체면과 위계질서 같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자기는 현장에서 뛰고 일하고 뭔가를 ‘만드는’ 자리로는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 후임에게 그 일을 완전히 맡기고, 간섭을 하지 말아야 한다.

전산학 개념으로 설명하자면,
‘X라는 input에 대해서 Y라는 조건을 만족하는 solution Z를 다항 시간 만에 찾으시오(찾는 알고리즘을 고안하시오’
에서
‘X라는 input에 대해서 어떤 solution Z가 있을 때, 그게 Y라는 조건을 만족하는지 다항 시간 만에 검증하시오’
로 바뀌는 셈이다. 결정성 튜링 기계(DTM)가 비결정성 튜링 기계(NDTM)로 바뀌었으니, P와 NP가 동치이지 않은 한, 일이 편할 수밖에 없다.

난 대학이든 대학원이든 학교를 다니면서 교수들에 대해 무척 놀라는 면모가 있었다. 첫째는 특강 시간에 학생들이 무슨 주제로 발표를 하더라도, 심지어 발표 자료를 미리 올리지 않았더라도, 교수가 즉석에서 발표 내용에 대해 코멘트를 하고 그 바닥 사정이 어떤지 보충 설명을 주절주절 늘어놓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교수는 전산학과 교수라 해도 코딩에는 이제 진짜 전혀 신경 안 쓴다는 것. 이런 게 진정한 지도자 내지 사장· 상사 마인드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축구야 워낙 선수의 체력이 생명인 과격한 스포츠이다 보니 선수의 현역 수명이 굉장히 짧다. 그런데 프로그래밍이라는 업무, 또는 개발자라는 직위는 과격한 스포츠가 전혀 아닌데 적어도 한국에서는 여전히 수명이 짧다. 그 나이가 되도록 아직도 개발자라고 하면 이상하게 본다.
왜 그런 걸까? 한국에는 왜 노짱 개발자가 없는 걸까? 물론 이 바닥이 워낙 변화가 빠르고 날고 기는 친구들이 너무 많은 분야여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우리나라 사정만 그런 건 아닐 텐데 말이다.

문득 드는 간단한 시나리오로는... 1인 개발자가 프로그래밍만으로 먹고 사는 인프라가 마련돼 있지 못해서--극심한 불법복제, 개인 개발 작품의 품질 보증 문제 등의 여러 구조적인 문제-- 결국 프로그래머의 밥줄은 프로그래머 자신이 아니라 그 프로그래머를 이용하는 다른 경영자에게 달리게 되고, 그런데 그 경영자는 사업가· 장사꾼일 뿐이지 프로그래밍 바닥을 잘 모르는 사람이고.. 그 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 이런 식으로 개발자에게 불리한 IT 시스템이 생긴 게 아닐까 한다. 어휴.

빵집의 개발자인 양 병규 씨는 개인 블로그에서 안 철수 씨가 백신 개발자로 남지 않은 걸 개인적으로 아쉬워한다고 썼었다. 물론 안 씨야 백신만 파기에는 너무 아깝고 대학 교수에, 장관에 뭘 해도 이상할 게 없는 넘사벽 천재 만렙 완전체이긴 하다만... 그래도 그 근성으로 백신 하나만 밀었다면 지금 여타 보안 솔루션들을 모조리 떡실신시키는 보안 귀재 장인이 되지도 않았을까? (그분이 안랩을 떠난 후 거기가 예전만 한 명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본인은 프로그래밍을 좋아한다. 까놓고 말해 <날개셋> 한글 입력기 한 8.0~10.0까지 만들고 리눅스나 맥용도 응당 만들고 싶다. 여러 분야를 총괄하는 게 아니라 좁은 분야 하나만 스페셜리스트로 미치도록 파는 걸 좋아한다. 그렇다고 해서 노가다 코더 타입도 절대 절대 아니다. 군대로 치면 ‘장군’보다는 ‘준위’형 인물이다.

허나, 이거 개발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생각하면 한숨이다. ㄲㄲㄲㄲ 아직 갈 길이 먼데... 나 같은 사람이 종사할 만한 업종이 있으려나? -_-
결국은 역시나 돈 문제, 영적으로는 사회의 구조적인 죄 문제와 연결되는 걸 느낀다. 죄가 만연한 사회일수록 결국 일하고 생산하고 연구하는 업종보다는, 인간의 죄를 제어하고 다스리고 통솔하는 업종의 비중이 더 커지고 그 업종과 여타 업종간의 빈부 격차도 커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1/07/23 08:36 2011/07/23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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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주의사신 2011/07/23 09:11 # M/D Reply Permalink

    1. 외국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개발자들도 있다고 합니다. 야후 검색 관련 자회사에서 그 회사 프로그램 아키텍처만 10년 관리하신 분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2. 관리자와 개발자는 경로가 다르기 때문에 둘 다 잘하기 어렵다고 소프트웨어 공학자 분들께서 많이 이야기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사람들이 많이 몰라서, 개발자 좀 하면 관리자 시킬려고 하지요...

    개발자의 수명이 짧은 것은 산업이 성숙하지 않은 탓이 아닌가 합니다.

    3. 상당수 컴퓨터 공학과 교수님들이 학생들 코드 잘 안 읽어 본다는 것에 공감하고 갑니다. 졸업 작품 할 적에 왜 아직도 보이는 것이 없느냐는 추궁을 많이 들어서요...

    믿음을 통해 우리는 세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깨닫나니 그런즉 보이는 것들은 나타나 보이는 것들로 만들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히 11 : 3)

    우리는 보이는 것들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을 바라보나니 보이는 것들은 잠깐 있을 뿐이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은 영원하니라.(고후 4 : 18)

    이 두 구절로 설명을 해야하는가 고민을 많이했을 정도로....

    4. 저희 학과 한 분은 DirectX 10 관련 책 내신 분이 계신데, 그 분은 학생들에게 코드 과제 내 주시고, 코드 다 읽어 보시는듯 합니다. 한 번은 제 것 잘 되었다고, 교수님 직접 작성하신 예제와 더불어서 모범 코드로 공개해주셨던 기억이 나네요.

    1. 사무엘 2011/07/23 22:49 # M/D Permalink

      전산학과 교수는 학생들에게 “프로그램을 개발할 때 생각부터 꼼꼼이 해야지, 곧바로 키보드 앞에 앉기부터 하지는 마라”라고 누구보다도 강조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 분이 눈에 보이는 결과가 당장 안 나온다고 마치 직장 상사가 그러듯이 학부생이나 대학원생을 갈구는=_= 건 좀 안습하지요.

      어쨌거나 이 소프트웨어라는 건, 개발 과정이 눈에 보이지 않는지라 양과 질을 측정하기가 몹시 어렵고, 그렇다고 해서 처음에 대충 만들어 놓으면, 나중에 고치기가 무진장 어려워지고 폭증하는 유지 보수 비용 때문에 돈 처먹는 하마-_-(업주의 관점에서)로 전락한다는 특성이 있습니다. 소프트웨어 공학 관련 이론에서, 한때 대두되었던 소프트웨어의 위기라는 개념을 배웠을 겁니다.

      그래서 개발자는 맨날 닥치고 야근 야근 야근... 마치 구 일본군 시절처럼 비정상적인 군기와 근성-_-인데요..
      그럼, 맨날 비교 대상이 되는 외국은 도대체 품질 관리를 어떻게 하는지, 걔네들은 무슨 다른 뾰족한 수를 쓰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2. 범쥬이 2011/07/30 21:31 # M/D Reply Permalink

    좋은 글 감사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좀 어려운(?) 말들과 머리 복잡해지는(!) 개념들이 좀 있었지만,
    진솔하게 쓰셔서 읽기에는 무난했습니다.

    참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네요.. 우리나라 개발자들 앞에 닥친 현실이 그만큼 밝지가 않다는 거...
    이공계인 저로서도 얼핏 듣곤 하는 단신 뉴스 정도(?)로만 생각했던 류였는데... 상당히 진솔하게
    다가오네요.. 결국 국내에서 개발자로 남으려면 더욱 더 치열하고 뼈 빠지도록 살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밍숭맹숭 다른 길로 접어들고... 한국의 현실을 느끼게 해주는 글입니다.

    참.. 그리고 형제님이 문말에 인간의 죄를 다루는 업종이 각광받기를 원하신다고 하셨는데
    심각한 글에 마지막이 참 신선하다는 느낌이 오네요 ㅎㅎ
    자꾸 어려워지는 현실보다 자신의 깊은 혼의 신음을 돌아보고
    모든 어려움의 근본인 - 물론 백프로 다 그렇다구 할순 없지만 히^^; -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게
    진짜 시급하죠 ㅎ(사45:22; 49:8a; 59:1~2)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받을 만한 때에 내가 네 말을 들었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노라.(사49:8a)

    땅의 모든 끝이여, 나를 바라보라. 그리하고 너희는 구원을 받을지어다. 나는 {하나님}이요,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45:22)

    애고... 솔직히 저는 여러 모로 초짜인 갓 스물(!)이라 그런지
    이 분야의 글을 접하면 뭐가 뭔지 모르는 감이 좀 있습니다..;;
    그렇지만 유익한 글입니다.
    형제님! 그럼 건강하시고 주님 은혜 안에서 평강하시길 기도합니다. 샬롬~!^^

    1. 사무엘 2011/07/31 00:59 # M/D Permalink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여기 오셨군요. 반갑습니다. 방학 기간일 텐데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
      저도 본문 같은 글을 쓸 정도로 인생을 생각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어요. 형제님 나이 때는 세상을 보는 안목이라고는 전혀 없었죠. 전 그래서 제 여건에 맞게 내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아무래도 학문 융합이 어울릴 것 같아서, 지금 같은 진로를 가 있지요.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사회 구조에 대한 개혁을 부르짖어도(현 정부 비판이든 교육 제도 비판이든 뭐든지) 쳇바퀴만 돌 뿐 사회가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성경을 알면 인간이 처한 문제의 본질을 볼 수 있거든요. 그건 이미 형제님도 어렴풋이 아실 것이고, 나중에 군대든, 졸업 후 취업이든 더 본격적인 사회 생활을 해 보면 성경 말씀을 더욱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과 사람에게서 모두 인정받는 훌륭한 크리스천이 되었으면 합니다.

    2. 범쥬이 2011/08/01 00:21 # M/D Permalink

      방학이라면 요새 운전면허와 여러가지 자격증 시험 준비로 그다지 한산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바쁘지도 않는 상태라고 해야 할 겁니다. ㅎㅎ 물론 청지기 카페는 매우 자주(!) 들어가는 편이구요.

      저도 여기(킹-성경 진영)에 들어온 지는 아주 얼마 안되었지만, 그래도 지나간 일들 다 겪으신 인생, 성경 선배들의 지난 날의 입담을 들어 보니 제가 직접 겪은 일도 아닌데도 - 그렇다고 지금 겪지 않는것도 아니지만 - 제가 직접 겪는 일처럼 느껴지고 가슴이 많이 아프고 교훈이 많이 됩니다. 정말로 저도 초기땐 하나님께만 그저 자녀로서만 인정받기만 하면 다 되는 줄로 생각했었지만, 5, 6개월 지난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실로 그 생각이 엄청나게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크리스천 다운 향기를 나타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고후2:15)

      정말 감사합니다. 역시나 킹제임스 성경 진영 분들은 거의 모두 글들도 말들도 확실하십니다. 여담이지만 저도 청지기 카페 처음 와서 놀라서 겁먹고 잠깐 길 잃은 양처럼 딴 데 가 있었던 적이 있었죠. 지금은 이렇습니다. 야~ 세상 어느 교회에 이런 데가 어딨느냐.. 며...ㅎㅎ; 이제 여기까지 진출했으니 여기를 많이 들러야겠군요 .. 음.. 그럼 또 뵙겠습니다. 샬롬~!^^

  3. 남정현 2011/09/05 13:48 # M/D Reply Permalink

    그런 이유로 개발자들이 문서를 잘 쓸줄 알아야하고, 협상에 재능이 있어야 하는것 같습니다만, 현실은 시궁창이네요. ㅋㅋ

    1. 사무엘 2011/09/05 16:30 # M/D Permalink

      그렇습니다.;; 자기 몸값은 자기가 지킬 줄 알아야 하죠.
      개발자뿐만이 아니라 이공계 대학원생도, 협상 재능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의사소통과 프레젠테이션은 잘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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