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철도 이야기

2003~2004년의 역사적인 Looking for you 사건을 계기로 본인의 혼이 철도와 완전 동화해 버린 후, 지금까지 본인은 철도에 대해서 많은 글을 써 왔다.
하지만 그 범위는 '우리나라'로 한정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의 철도 노선, 철도 차량 계보, 심지어 더 나아가서 우리나라의 고속도로 구조, 지형, 도시 교통 양상 등등..

특히 그 분야에 그 정도로 미쳐 버린 사람치고는 의외로 일본 철도에 대한 관심과 지식은 별로 없었다.
나는 솔직히 일본 문화와는 별 흥미나 인연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딱 하나 예외 케이스인 개그 만화-_-만 빼면 일본 애니나 게임 등과는 담을 쌓고 살아 오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일본 철도에 대해서, 특히 신칸센을 위주로 개념을 좀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일본은 로봇, 자동차 쪽 기술이 강하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고 철도도 한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앞서 있다. 철도가 문화이며 생활의 일부이다. 우리나라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런 배경 하에서 은하철도 999 같은 애니도 나온 게 아닐까 한다. 건널목을 지나는 디젤 동차를 아버지와 아들이 나란히 디카로 사진 찍는다거나, 심지어 아버지는 시각표 펼쳐들고 "맞은편 열차가 올 때가 됐다!" 하면 아들은 카메라로 촬영한다. 이 얼마나 감동적인 모습인가!

시속 200km를 돌파한 신칸센 첫 개통이 1964년이요, 도쿄 지하철 첫 개통이 1927년이니, 철도 핵심 기술의 총아라 할 수 있는 지하철과 고속철이 모두, 한국보다 시기만으로 쳐도 거의 반세기 가까이 앞섰다. 그것도 전부 자체 기술과 자본이다.
1900년대 초, 조선을 식민지로 영원히 부려먹으려고 장기 계획을 짜면서도 맨 먼저 생각한 것은 바로 치밀한 지형 측량과 철도 건설이었다. 자기네는 협궤이면서 한반도에 간선 철도는 표준궤로 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치떨리고 무서운 전략이었다.

일본은 영국의 영향을 받아 모든 교통수단이 좌측 통행이고 운전대가 우측에 있다. 100% 표준궤(1435) 일색인 우리나라와는 달리 일본은 간선인 신칸센을 제외한 도시 철도는 협궤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수인선 같은 762mm협궤는 아니고 1067mm인가 한다. 우리나라가 70년대에 서울 지하철용으로 일본 히타치 사에다 주문해서 도입한 전동차는, 스타일만 일본식이었지 사실 본토 일본에서도 안 쓰는 어마어마한 대형 전동차였다. 그것도 한 편성에 10량씩이나 후덜덜!

작고 가벼운 협궤 차량의 잠재적 위험성은 지난 2005년 일본 어딘가에서 난 전동차 탈선 추락 대형 사고에서 한 번 입증된 바 있다. 서울 지하철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 아닐까 한다.
도쿄에도 야마노테 선이라고 순환 지하철이 있긴 하지만, 차도 작고 노선 길이도 서울 2호선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차량뿐만 아니라 노선도 한국의 지하철은 스케일이 굉장히 크다.

하지만 물리적인 규모와는 달리, 일본의 철도의 인프라는 한국보다 모든 면에서 스케일이 크다. 한국 코레일은 철도청이라는 정부 직속 기관이었다가 그나마 공기업화한 수준인 반면, 일본 철도는 민영화도 훨씬 일찍부터 더 개방적으로 진행됐으며, 사설 운영 기관도 많고 그래서 역마다 회사별 개성도 더 짙다(나쁘게 말하면 한국 같은 완벽에 가까운 환승 할인과 요금 통합을 기대하기도 어려움). 민영화의 특성상 일본의 철도 운임은 양국의 경제력을 감안하더라도 한국보다 훨씬 더 비싸다. 그 대신 비싼 만큼 노선도 풍부하고 서비스나 정시성 따위도 한국보다 월등히 뛰어나다. 철도 여객 회사들은 운임 말고도 부동산, 임대업 등 다른 사업 분야 진출을 통해 많은 이윤을 올리고 있기도 하다.

영국, 일본 같은 나라의 지하철 기본 운임은 한국으로 치면 거의 택시 기본 요금 정도는 된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한국처럼 철도와 버스가 경쟁하는 이상한 구조가 아니어서 간선 버스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 장거리 간선 이동은 100% 철도이며, 철도가 좀 큰 사고가 나거나 파업이라도 하면 자가용을 이용하지 않는 승객들은 진짜 교통이 마비되고 만다. 철도가 깊숙한 생활의 일부이기 때문에, 열차 지연으로 인한 지각은 학교나 회사에서도 공식 인정되는 면책 사유이며, 그런 지연 사고라도 나면 역마다 지연 증명서를 떼 주는 것도 지극히 보편화해 있다.

그럼 지금부터는 신칸센에 대해서 알아보자.
철도 동호인이라면 신칸센이 후지 산 아래로 달리는 사진을 한번 쯤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고속철 차량 후보로는 신칸센은 일찌감치 배제되었는데 그 이유로는 같은 표준궤이지만 차체의 크기가 한국의 기존 철도역 구조와 맞지 않았던 것(신칸센이 더 컸음), 당시엔 신칸센이 해외 수출 사례가 전무했다는 것, 기술 이전에 시큰둥했던 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늦게 개통한 만큼 우리나라 KTX도 하드웨어적인 면에서는 세계 어느 고속철에 내놔도 뒤지지 않는다. 시속 300~310으로 이 정도로 상시 주행할 수 있는 선로와 차량을 갖춘 나라는 정말 드물다. 일본이나 프랑스에서 성공했다던 시속 4, 500 달성은 시운전이며, 언제까지나 시운전일 뿐이다.)

신칸센은 차량 구조가 근본적으로 한국에서 아직 찾아보기 쉽지 않은 동력 분산식 전동차이다. EEC 내지, 좀더 까놓고 말하면 오히려 지하철과 비슷한 형태라는 것이다. 전동기의 구동음을 객실 아래 바닥에서도 들을 수 있다. 심지어 선두차에도 새마을호 PP 동차보다도 좌석이 많다.
기관차+객차 구조에 너무나 절어 있는 한국 철도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라 하겠다. 한국의 철도 운영이 그만큼 일제 강점기 이후로 변한 게 별로 없고 많이 경직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실용적이기는 동차 형태가 더 실용적이며, 앞으로 공항 철도 직통 열차라든가 신창 급행 좌석형 동차 등, 우리나라에서도 전기 동차를 더욱 많이 보게 될 것이다.

또 하나.
신칸센이 역에 정차해 있는 사진을 눈썰미 있게 살펴본 분이라면, 승강장이 전부 "고상홈"이라는 것에 적지 않게 놀랄 것이다. 분명 서울-부산 장거리급 열차인데, 열차가 생긴 모습도 그렇고 타는 방식도 마치 지하철 타듯이? 이것도 한국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일본 신칸센의 문화라 할 수 있겠다.

신칸센의 초창기 차량은 앞이 마치 구형 비행기(정확히 말하면 전투기)처럼 동그랗게 생긴 소위 "0계"이다. 처음에는 비주얼 스튜디오 .NET이라고만 불리다가 2003이 등장하면서 이전 제품이 2002라고 불리게 된 것처럼, 0계라는 숫자는 후속 차종이 등장하면서 서로 구분을 위해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다. ^^;;

이 0계의 외형은 증기 기관차만큼이나 기차의 대표적인 상징물이 된지라 심지어 우리나라에서도 "경축 어디어디 전철 개통" 이런 현수막이나 전단을 보면 신칸센 0계 그림을 심심찮게 볼 수 있을 정도이다.
그 후 신칸센의 디자인은 점차 개선되어 앞은 점점 새 부리처럼 더 뾰족해지고 세련되게 바뀌었다. 500계가 그 변화의 극치가 아니었나 싶다. 앞이 워낙 작고 뾰족한지라 선두차의 운전석이 뒤로 꽤 밀려나고, 덕분에 열차 탑승 정원도 약간 줄어들 정도였다.

그런데 신칸센이 정말 무지막지하게 비싸다는 것도 알 만한 사람들은 알 것이다. 같은 노선의 국내선 비행기보다도 비싸며, 서울-부산 정도 거리의 편도 운임이 우리 돈으로 최하 10몇 만원씩은 깨진다고 봐야 한다. 그래도 "출장은 신칸센으로!"이런 구호가 있을 정도로 신칸센은 일본인들의 주된 교통수단으로 쓰이면서 생활을 바꿔 놓고 있다.

KTX가 2004년에 첫 개통했을 때 경부선 이용객이 예상 수요의 70% 남짓밖에 안 됐다고, 정치적 실패라고 그때 언론이 떠들썩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안정화가 덜 돼서 그렇게도 욕 얻어먹던 그 시절에도 벌써 70%씩이나 탔으면 별로 실패는 아닌 것 같은데?" 싶기도 하다.

사실 2005년 코레일 출범 이후, 내가 보기에 새마을호의 몰락은 무척 안타깝지만 걔네들이 KTX로 영업을 못 하지는 않았다. 일제 강점기 이후로 별 차이 없는 너무나 열악한 노선만으로 어떻게든 사람들이 최대한 많이 KTX를 타게 만들고 일반열차와 환승 연계가 잘 되게 하려고 애썼다. KTX 이용객은 꾸준히 증가하기 시작했고, 3천억짜리 간이역이라고 엄청 욕 얻어먹었던 광명 역도 많이 회생하긴 했다. 극심한 초만원으로 시달리는 경인선 전철과 더불어 경부 고속선은, 코레일의 흑자 양대 산맥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KTX는 전기로 달려서 수송 원가가 매우 저렴한 데다, 속도도 빨라서 운임을 비싸게 받을 명분이 되고 한 편성으로 무려 900명 가까이를 태울 수 있다. 어차피 접근성 면에서는 자동차한테 경쟁이 안 되고 무궁화호급 운임으로는 수지도 안 맞으니 거기는 포기하고 코레일 경영자라면 그 누구라도, 뇌가 있다면 어떻게든 KTX에다 올인해서 이윤 챙겨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KTX에 사운이 걸려 있다.

  (승객 입장에서는 싸고 좌석이 편한 새마을호와, 빠르고 비싼 KTX가 상호 경쟁하는 것을 원하지만, 경영자 입장에서 새마을호는 위상이 어중간하고 완전히 KTX 시다바리로 전락시키기도, 처분하기도 곤란한 계륵 같은 열차가 되었을 것이다.)

승객의 user experience 만족도 향상을 위해 고속신선 주행 최대 시속을 305에서 310으로 올려 잡은 것엔 나름 센스도 부렸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쪼록 2단계 구간도 속히 개통되어 KTX가 대구-부산 고속도로도 멀찌감치 따돌리고, 서울-부산을 진짜 2시간대 이내로 어서 연결해 줬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개통 첫 해도 아니고 작년의 이용객이, 예상 수요의 70%는커녕, 7%였다던 공항 철도야말로 정말 어찌 할 방법이 없는 것 같다.
맑고 신선한 인천 영종도 공기를 서울로 수송하기 위해 만든 철도라는 비아냥까지 나돌았다고 하니. ㅜㅜ

Posted by 사무엘

2010/01/11 09:48 2010/01/11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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