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상화

배우는 원래 없는 감정을 있는 것처럼 잘 몰입해서 연기하는 게 주업이었다.
그런데 CG가 발달하면서 드라마· 영화 배우에게 추가적으로 꼭 필요해진 능력은.. 없는 물건이나 배경을 있는 것처럼 인지하고 훼이크 치는 스킬임이 틀림없다.

뭐, 손바닥 펴서 앞에 가상의 벽면을 두드리는 흉내를 낸다거나, 손동작만으로 줄다리기 흉내를 내는 건 일반인들도 흔히 하는 장난이다. 그리고 기상 캐스터도 시퍼런 크로마 키 가림막밖에 없는 공허한 세트 안에서, 머릿속으로만 가상의 지도를 떠올리면서 여기저기를 혼자 가리키며 예보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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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TV 드라마 "딸부잣집"의 오프닝 직전에 잠깐 나오던 무선 줄다리기 퍼포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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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작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실사 영화의 촬영 장면 중 하나..)

하지만 전문적인 연기자는 더 정교한 동작을 소화해야 한다. 그것도 모션 캡처 장비를 치렁치렁 착용한 상태로 말이다. 공허한 세트에 있지만 지금 배를 타고 있거나 뉴욕 길거리 한복판에 있거나, 치열한 전장이나 우주 공간에 있는 것처럼 행동을 해야 하니 이것도 만만찮은 감정 노동일 것이다. 자기 내면뿐만 아니라 외부 배경까지 가상화를 해야 한다.;;

로보캅 같은 영화가 요즘 만들어졌다면 주연 배우는 센서가 달린 쫄바지 쫄티 차림으로 연기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쟤는 무려 1980년대 말 작품이니.. 그 금속 분장이 레알 현물이었다. 분장을 걸쳤다가 벗는 수고도 장난이 아니었고, 분장의 무게도 무시 못 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나저나 "Dead or alive, you're coming with me!"라는 로보캅의 대사는 아저씨에서 "결론부터 말할게. 넌 내가 잡는다."라는 치곤 형사의 대사와 아주 비슷해 보인다.

2. 무인화

비행기 조종사의 자리를 무인기가 조금씩이나마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요즘은 사이버 모델이 다시 등장해서 인간 배우의 역할을 제한적이나마 대신하기 시작했다.
지난 7월에는 '신한 라이프' CF에서 여성 사이버 모델 '로지'(오로지;;)가 전격 출연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웬 예쁘장한 무명 신인 모델이 격렬한 댄스를 선보였는가 싶었는데.. 이 처자는 실존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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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모델이라는 건 먼 옛날인 1990년대 중후반에도 미국, 일본 같은 나라에서 등장한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아담이니 루시아니 이러면서 데뷔했었지만.. 그때는 기술이 충분히 뒷받침되지 못해서 큰 인기를 끌지 못하고 망했다.
비주얼도 사실감이 부족하고 엉성하고, 또 출연 영상 한 회분을 만드는 데 드는 난관과 비용도 너무 커서 채산성이 안 맞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20년 이상 시간이 지나니 CG 기술은 그때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눈부시게 발달했다. 실사와 구분이 어려운 디테일을 자랑하는 사이버 모델이 진짜 사람처럼 격렬하게 댄스를 추는 영상을 훨씬 더 저렴하고 빠르고 쉽게 생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90년대까지만 해도 3D 그래픽 좀 만지려면 비싼 워크스테이션 급 컴터가 필수였다지만.. 요즘은 일반 PC가 그런 영역까지 진작에 다 흡수했으니 말이다.

사이버 모델이 출현할 거라는 건 이미 1990년대의 컴퓨터 잡지들에서도 예견했었다.
사이버 모델은 현실 연예인 같은 높은 인건비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고, 건강 문제 없고 요즘 같은 코로나19 영향도 전혀 받지 않을 것이며, 자기관리 실패 스캔들을 일으키지도 않을 테니.. 기획사의 입장에서는 눈독을 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이버 모델이 충분히 연기 잘 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면 말이다.
1990년대에는 아이디어가 시대를 너무 앞서갔던 감이 있었던 반면, 지금은 그때에 비해 실현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졌다.

3. 몰입

자동차건 비행기건 자율 주행 기술이 현업 자동차 운전사나 비행기 조종사의 직업을 완전히 빼앗을 날은 아직은 요원하다. 기계 번역이 인간 전문 통번역사의 밥줄을 완전히 빼앗을 날 역시 가까운 미래엔 없을 것이다. 이 점에서는 사이버 모델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의 연예인들은 여느 분야와 마찬가지로 고도로 전문화된 업종의 종사자이다. 혼을 담은 연기를 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맡은 배역의 정체성을 그야말로 세뇌에 가깝게 주입하고 연습한다.
가령, 학대 범죄 피해자를 연기한다면 진짜로 밥을 굶고 얻어맞기도 하면서 범죄 피해를 경험하고.. 여느 운동 선수 만만찮게 키와 체중을 조절하고.. 실존했던 역사 인물을 연기한다면 그 인물의 모든 생애와 심리를 미주알고주알 공부한다.

이런 사례들이 한둘이 아니다.
예전에 일본 SEGA에서 버추어 파이터를 처음으로 개발할 때, 프로젝트 책임자이던 스즈키 유는 자기부터 중국 소림사에 가서 직접 무술 수련을 받으면서 격투 동작을 연구했음은 물론이거니와, 휘하의 팀원들끼리도 서로 개싸움이라도 시키고 주먹과 발로 때리고 맞게 하면서 게임 개발의 감을 잡게 했다지 않는가..??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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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모탈 컴뱃이야.. 2D 시절에는 액션 배우의 실사 연기를 그대로 따서 만들어지기도 했고..
물론 게임 개발은 연기하고는 약간 영역이 다르지만, 어쨌든 이런 것들도 이 정도로 장인 정신을 동원해서 개발하고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굳이 영화· 드라마를 위한 연기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옛날에 김 대중 대통령이 남북 정상 회담 때문에 김 정일을 만나기 전에..
국정원에서 자체적으로 김 정일을 카케무사 내지 도플갱어 급으로 시뮬레이션( ...;; )한 북한 전문가를 양성해서 대통령을 독대하면서 리허설 예행 연습을 시켰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 사람은 북한에 대한 첩보란 첩보는 다 공부하면서 자기 원래 정체성을 삭제하고 북한 수괴의 말과 행동과 생각을 최대한 비슷하게 재현했다고 한다.
글쎄, 오늘날 같은 엄청난 머신러닝과 AI 기술이면 기계가 사람의 인격을 흉내 내는 것까지 이론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이건 그래도 AI 덕분에 의사· 판사 같은 직업이 필요 없어지는 정도까지는 돼야 실현되지 않을까 싶다.

4. 유행어

  • 김 영철: 4딸라 / 누가 기침소리를 내었는가?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에서!)
  • 김 광규: 아부지 뭐 하시노??
  • 김 희원: 방탄유리 -_-;;;

어떤 배우가 단순히 흥행 대박 난 작품에 주연으로 출연하는 정도를 넘어서, 이렇게 국민 명대사의 주인공으로 각인되는 건 정말 엄청난 행운일 것이다. 사이다 아니면 병맛 중독성 중 하나 이상은 만족돼야 하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명대사라는 게 해당 작품이 갓 상영됐을 때는 별로 주목을 못 받다가 뒤늦게 조명되어서 뜨는 경우도 있다.

<태조 왕 건>이나 <야인시대>가 본방 나오던 시절엔 코흘리개였거나 심지어 태어나지도 않았던 애들도 김 영철의 별명이 4딸라와 궁예인 걸 알 정도이다.
김 희원은 이제 자기 평생에 방탄유리-_-를 능가하는 다른 무언가는 더 나오지 않을 거라고 말하기도 했댄다.;;

Posted by 사무엘

2021/10/18 08:35 2021/10/1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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