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단순히 성경 어휘 이슈나 기본 교리 말고.. 경건, 영성 쪽으로 글을 쓰는 건 엄청 오랜만이고 이례적이지 싶다. ㄲㄲㄲㄲㄲㄲㄲ
1. 선교사 짐 엘리엇
1940년대 후반~1950년대 그 무렵에 우리나라에는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손 양원 목사가 있었다. 자기 아들들을 죽인 좌익 폭도들을 용서했는데 나중엔 자기도 공산당에게 순교한 분이다.
한국에 선교를 하고 복음 전하기 전에 먼저 6· 25 참전부터 선택했던 윌리엄 해밀턴 쇼(1922-1950)라는 엄청난 분이 있었다. "위급할 때 도와주는 친구, 자기 목숨까지 바치는 친구가 참 친구이다"를 몸으로 실천한 분이었는데 그 꿈을 다 펴지 못하고 전사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는 짐 엘리엇(1927-1956)이라는 선교사도 있었다.
이 사람은 우리나라가 아니라 중남미 에콰도르라는 나라의 내부에 있는 '아우카'라는 미접촉부족 원주민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자기 인생을 다 바쳤다. 쟤들은 외부인은 닥치고 죽이고 보는 아주 폐쇄적인 집단이었다고 한다.
짐 엘리엇은 본인 포함 5명으로 선교팀을 꾸렸다. 그리고 경비행기를 타고 쟤네 마을 상공을 날면서 선물 바구니부터 마구 떨구면서 저쪽 마음을 열어 나갔다.
그리하여 1956년 1월, 접선을 성사시켜서 부족 대표를 한번 만났다. 그러나 부족 내부에서 악의적인 오해와 이간질 같은 불상사로 인해 그들은 겨우 며칠 뒤, 원주민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그만.. 전원 살해당하고 말았다.
선교사들은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고, 호신용으로 공중에 위협 사격도 했다. 그러나 원주민들을 향해 쏘지는 않고 자기들이 죽음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화력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우리는 죽으면 바로 천당으로 가니 걱정 없다. 그러나 아직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으로 향하고 있는 저 사람들이 죽어서는 안 된다"라는 신념을 실천했기 때문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미국과 유럽 사회는 크게 술렁거렸다고 한다.
옛날 대항해시대 스페인이라든가 19세기 제국주의 시절 같았으면 "저 미개한 야만인들을 당장 토벌하고 놈들을 기독교로 강제로 개종시켜야 한다" 이랬겠지만.. 때가 20세기 중반이니 이번엔 조금 다른 관점의 반응이 나왔다. (실용주의?)
"거 봐, 쟤들은 수백 년 동안 외부와 접촉을 일절 거부하고 침입자를 죽여 온 부족이잖아.. 왜 쓸데없이 저런 데에 선교하러 가서 자기 명을 재촉했을까? 그 친구.. 공부도 잘하고 장래가 촉망되던 인재였는데??? 완전 재능낭비이구만!"
그랬으나.. 이야기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
정말 믿어지지 않지만.. 짐 엘리엇 등 몇몇 선교사들의 아내(= 미망인)가 몇 년 뒤에 그 부족을 다시 찾아가자 원주민들은 정말 큰 충격을 받고 사랑과 용서에 감화됐다고 한다.
원주민들 대다수가 예수님을 받아들였으며, 부족의 외부인 살해 문화가 사라졌다. 심지어 짐 엘리엇 일행을 직접 창으로 찔러 죽였던 부족의 전사는 목사가 됐다고 전해진다.
짐 엘리엇은 20대 초반 때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사람은 결코 바보가 아니다."라고 다짐을 일기에 쓴 것으로 유명하다. 애초에 "주여, 저를 주를 위해 써 주십시오, 저를 주의 일에 정말 새하얗게 탈탈 불태워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입버릇처럼 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엘리엇도 마찬가지다. 아까 저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낭비라니요? 제 남편은 어린 시절부터 오로지 이 순간만을 위해 인생을 준비했던 사람입니다. 이제야 그 꿈을 계획대로 이룬 건데 뭐가 낭비입니까? 다시는 말을 그런 식으로 하지 마세요."라고 단호히 일축했었다. (저분은 복음서에 나오는 향유 옥합 여인 이야기의 의미를 아주 잘 알고 있었지 싶다.)
그리고 그분은 No Graven Image이라고.. 표면적으로 선한 의도이기만 하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내 뜻을 들어주고 당장 형통케 해 줘야만 한다"라는 생각의 위험성을 저격한 소설도 썼다(1966년). 자기 남편을 모티브로 한 주인공을 넣어서 말이다. 하나님이 아까 그 해밀턴 쇼나 짐 엘리엇 같은 사람을 역설적으로 왜 일찍 데려가셨는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뭔가 19세기 말 제국주의 시대가 아니라.. 2차 세계대전이 끝난 20세기 중반 현대에도 저런 선교사가 있었다는 게 개인적으로 정말 놀랍게 느껴진다.
이 정도면 짐 엘리엇은 친아들의 살해범을 용서한 손 양원 목사보다 더하고, 와이프는 주 기철 목사를 내조했던 오 정모 사모보다 더 강직했던 분 같다.
* 저런 일이 있고 반세기 가까이 뒤, 2018년에는 '존 앨런 차우'라는 이름의 선교사가 인도 부근의 미접촉부족인 '센티널 족'이 사는 노스센티널 섬에 무단 접근하다가.. 원주민으로부터 화살세례를 받고 죽었다. 이 사람은 그 해에 다윈 상을 받고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됐다. ㄲㄲㄲㄲ
저 사람은 과연 짐 엘리엇 정도로 기도 잔뜩 하고 준비하고 원주민들을 진짜 사랑하는 마음으로 접근했었는지..
아니면 그냥 중2병 관심병자였는지, 그것도 아니면 설마 저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센티널 족을 상대로 뭔가 일을 하셨는지?? 나로서는 판단을 못 하겠다.
2. 주님은 나의 최고봉
오스왈드 체임버스는 우리나라에 ‘주님은 나의 최고봉’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My Utmost for His Highest라는 경건 묵상집으로 유명한 목사이다. 그야말로 “나의 최고존엄에 대해서 내 뼛속까지 진심을 다해서 생각한다, 깊이 묵상한다, 그분께 바친다, 헌신한다” 이런 뜻이다.
책이 대체로,
- “당신은 양심을 통해 속삭이는 성령님의 권고를 놓치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영이 건강한 상태입니까?”
- “거리끼는 게 있다면, 꺼림칙하다면, 좀 고민을 하고 생각을 해야 한다면 이미 글러먹은 것입니다. 하지 마십시오”
- “당신의 종교 행위가 신앙 생활의 본질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아무리 좋은 취지로 시작한 것이라도 죽은 껍데기로 전락하고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요지의 내용이다.
제대로 예수쟁이로 살아 보지 않은 사람은 자기랑 너무 안 맞고 뜬구름 잡고 재미없는 얘기밖에 없어서 오래 못 읽는다.
가령, 갓 구원받은 영적 뉴비 아기들을 위한 초급 입문서에서는 “기도를 생활화하십시오”라고 말하고,
중급에서는 “자기 간구만 할 게 아니라 남을 위한 중보기도가 더 수준 높은 기도입니다” 이러는데..
최고봉에서는 그건 너무 당연한 거고 “중보기도라는 명분으로 자기 의가 교묘히 드러나지 않도록 유의하십시오” 이러는 식이다. 그러니 고급이다.
애초에 중보기도 자체를 할 줄 모르거나 해 본 적 없는 사람은 저 책이 무슨 상황을 다루는지 이해를 당연히 못 한다.
저 사람은 1874년생으로, 김 구, 이승만, 윈스턴 처칠, 앨버트 슈바이처 같은 인물과 동시대 동갑이다.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서양은 과학기술이 눈부시게 발달하면서 한편으로 제국주의, 황금 만능주의, 극심한 빈부격차, 시궁창이던 노동자 인권, 기존 윤리관의 타락 등 온갖 잡음도 많았다.
그래도 한편으로 서양에서 저 정도의 영성을 자랑하는 목사도 있었으니 그 문화권이 진짜 회복 불가 막장까지 가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물이 썩지 않게 하는 소금 역할을 한 셈이다.
저 사람은 1차 세계대전 때 종군목사 명목으로 사역하다가 1917년에 겨우 43세의 나이로 맹장염이던가 오늘날 관점에서는 별로 치명적이지 않았을 병 때문에 소천했다. 불의 전차 ‘에릭 리들’(1902-1945)과 같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최고봉이라는 단어는 옛날에 현대자동차 각그랜저의 광고카피이던 “고급 승용차의 최고봉” 이후로 이 책 제목에서 처음 듣는다.
그리고 믿거나 말거나,
난 바로 이 책을 선물로 받으면서 지금 내 와이프가 된 자매와 교제를 시작했다...!!
“책 감사히 잘 받았습니다. 답례를 드리고 싶은데 우리 밥 같이 좀 먹을 수 있을까요?”로 시작해서.. 뭐 그렇게 됐다.
3. 위로와 평안 찬송
모든 기독교 찬송가에는 찬양과 경배, 예수 그리스도, 사랑, 기쁨 등등등과 더불어 중후반부에 '위로와 평안'이라는 카테고리가 있다. 여기에 속한 곡이 적지 않고 꽤 된다.
개인적으로는 몇 년에 한 번꼴로 컨디션 조절 실패 때문에 외출 중 급ㄸ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질 때가 있었다.
그때 신속히 화장실로 들어가서 문을 걸어잠그고 산출물을 원없이 흘러보낼 때...
농담이 아니라 정말 진지하게 하늘 문이 열리고 세상이 다시 보이는 것 같았다. 땅에서는 새장 문이 열리고 하얀 비둘기들이 푸드득 파란 창공을 향해 날아가고..

머릿속에서 "펴어어어엉~~ 화아아아아아~~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가 자동 재생된다!! =_=;;;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는 거 실사판을 경험하게 되더라.
약간 다른 상황을 또 말하자면, 치과에 가서 스케일링 받을 때 말이다.
기계가 드르르륵 키이이잉 쇳소리와 함께 내 잇몸 구석을 쑤시고 신경을 건드릴 때..
그땐 난 의도적으로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를 떠올린다.
이때는 자동 재생은 아니고 강제 재생을 한다.;;; ㅠㅠㅠㅠ
그래도 이렇게라도 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다는 확실히 낫더라.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_-;;
찬송가라는 게, 굳이 가사 내용이 다 공감되지 않더라도, "제발 공감되게 나를 바꿔 다오"를 다짐하면서 부르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햐~ 저건 세월호 같은 사고로 가족을 다 잃은 슬픔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면서 지어진 찬송가인데.. 100년 이상 뒤에 태어난 어느 후대 사람은 그걸 치과 치료를 극복하는 용도로 써먹고 있구나~! ㅋㅋㅋㅋㅋ
내가 1번과 2번에서 너무 위대한 신앙의 선배 이야기를 하다가 3번에서 갑자기 병맛으로 컨셉을 바꾼 이유는..
예수쟁이의 신앙 생활은 홀리한 주일 따로, 세속적인 평일 따로가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먹든지 마시든지, 심지어 화장실에서 X을 쌀 때라도(성경에 이런 직접적인 예시는 없지만 ㄲㄲㄲㄲㄲ) 무엇을 하건 하나님 영광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고, 정말 어느 상황에서든 예수님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3번부터, 작은 것부터 생활화하고 그게 더 발전해야 나중에는 2번 같은 묵상과 1번 같은 행적도 나올 수 있다.
밥먹기 전, 자기 전, 점잖게 격식 차려서 기도할 때도 있지만 여호사밧 왕은 전쟁터에서 위험에 빠졌을 때 "으악!! 주여 도와주시옵소서!" 부르짖은 것조차도 일종의 긴급기도였다(대하 18:31). 그리고 그 기도는 응답됐다.
그게 살전 5:17에서 말하는 "끊김 없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의 의미일 것이다.
공부고 생업이고 다 때려치우고 CPU 사용량을 100% 기도 process에만 몰빵하라는 말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든 세상적인 일을 마치고 idle time이 됐을 때마다 언제든지 끊김 없이 예수님 생각하라는 뜻이다.
그러니.. 하다못해 감탄사도 말이다.
깜짝 놀랐을 때, 혹은 갑자기 안 좋은 상황이 닥쳤을 때.. "썅~ 젠장, X발"을 내뱉을 바에야 차라리 진지하게 "오 주여~"가 나와야 할 것이다.
주여 주여 장난으로 헛되이, 망령되이 입에 담지는 말아야겠지만, 필요할 때 진심으로 언급하는 건 오히려 바람직하고 권장된다고 하겠다.
이러면 보통은 감사와 찬송이 더 나오지, 무슨 한국인의 정서라는 서러움, 한맺힘 이런 감정은 어지간해서는 맺히지 않을 것이다. 아리랑 대신에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 나올 것이다.
성령 충만한 바람직한 신앙생활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광신적인'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광신은 흔히 불신자나 개독안티들이 세상 매체에서 프레임 씌우는 그런 이상한 결과물이 나오는 광신이 절대 아닐 것이다.

내가 요즘 참교육을 너무 많이 봤나.
'여기에 모인 우리' 찬양을 부르다 보니 이 처자가 생각나더이다. 이 믿음 더욱....!!!! =_=;;;;;
Posted by 사무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