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차이, 오류들

1. 종교 개혁

통상적으로 가톨릭이 아닌 기독교회는 종교 개혁을 계기로 생겨난 개신교라고 불리는 편이다. 그러나 기독교계엔 침례교처럼 개신교의 노선과 100% 일치하지는 않는 교파도 있다. 이런 진영에서는 1500년대의 종교 개혁에 대해 대체로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 긍정적인 유물: 이신칭의와 만인 제사장 교리 재정립. 구교 가톨릭의 부정부패를 용감하게 폭로하고 교황의 권위를 약화시킴. 바른 계보에서 나온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 개혁자들이 직접 만든 찬송가 등
  • 한계: 유대인, 유아 세례, 정교분리 같은 주제에서는 종교개혁자들도 구교의 배경과 방법론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음

물론 침례교라고만 써 놓으면 세부적인 교리 스펙트럼이 왕창 넓다. 그러나 얘들은 대체로 이스라엘의 문자적인 회복을 믿고, 유아 세례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통상적인 개신교와 노선이 차이가 있다.
스스로 자기 믿음을 고백할 정도로 자란 사람에게만 침례를 준다는 점은 자유 의지를 강조하는 알미니안주의와 비슷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침례교가 구원의 상실까지 말하는 알미니안주의를 전적으로 지지하는 건 아니다.

2. 행위에 대한 오해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이라는 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혜의 복음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걸 갖고 정말 말도 안 되는 저질 궤변을 펴는 사람이 좀 있던지라, 구차하지만 이 기회에 좀 개념 정리를 해 보겠다.

(1) "저요~! 예수님 믿고 싶습니다, 구원이라는 공짜 선물을 받고 싶습니다."라고 스스로 손 내미는 것도 행위이고 선물에 대한 값을 지불하려는 짓이다
(2) 믿기만 하면 된다면서? 그러면 회개하는 것도 행위니까 할 필요 없네?

이 정도면 "이 가게는 없는 게 없다고요? 그럼 '없는 것'이라는 게 없다는 얘기네요~" 거의 이런 부류의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논리학이나 철학에서 이런 궤변을 가리키는 용어가 분명 있지 싶다.;;

인간이 짓는 많고 많은 죄들 중에 용서받지 못하고 지옥 가는 유일한 죄가 바로 "예수 안 믿는 죄"인 건 사실이다. 그런데 예수 안 믿는 게 어째서 죄인가? 그게 죄로 성립하기 위한 전제 선행 조건이 바로 도둑질, 거짓말 등의 다른 수많은 악행들이 추악한 죄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써 값을 치러야 한 그 죄 말이다.

선행으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은.. 인간의 알량한 선행만으로 신의 기준을 채우지는 못한다, 즉 불완전하고 불충분하다는 뜻이다. 그 자체가 일체의 의미가 없다거나 인간에게 무의미· 무익하고 심지어 해롭다는 뜻이 절대 아니다.
술· 담배 끊고, 사기꾼 범죄자 인생을 스스로 그만뒀으니까 나를 구원해 달라는 말은 어불성설이지만, 구원받고 나서도 그렇게 계속 죄 가운데 살아도 된다는 것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회개는 마음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며,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행위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조건이다. 예수 믿는 그 믿음을 행사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죄가 나쁘다는 걸 인지하지 않고서 어째 내가 구원받아야 하는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내 구원자로 믿을 수 있겠는가?

세상에서 누가 교통법규 위반 과태료를 대신 내 주기만 해도 그 사람이 고맙고, 그 사람을 생각해서라도 앞으로는 운전을 더 조심해서 몸 사리면서 하게 된다.
내가 큰 사고를 쳐서 교도소에 가게 생겼는데 누군가가 신분 위장해서 나 대신 교도소를 가 주거나 벌금을 대신 내 주면..?? 심지어 사형장에 대신 가 준다면..?? 대신 벌받아 준 사람을 생각하면 밖에서 또 죄 짓고 싶어지겠는가? 이런 점을 생각하면서 (2)와 같은 궤변을 논파하시길 바란다.

(1)이야.. 사람을 최소한의 자유 의지조차 없는 로봇으로 만들고, 태초부터 천당 가기로 예정된 사람, 지옥 가기로 예정된 사람을 설정하려는 의도 같은데.. 길게 반박하지 않겠다. 본인은 '전적 타락'과 '무조건적인 속죄'는 스스로 선악을 분간하지 못하는 영· 유아, 정신지체아가 죽었을 때에만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3. 진단은 맞지만 처방이 틀림, 혹은 답은 맞지만 계산 과정이 틀림

  • 공의롭고 전지전능한 신이 존재한다면서 세상에 왜 이렇게 악이 만연하고 선한 사람이 고통당하는가~ 하나님이 죄악도 창조하셨는가?
  • 자연 세상이 마냥 아름답다고만 보기에는 그 속에 잔인한 약육강식, 죽고 죽이기, 병들고 썩고 중독되기.. 이런 것도 많다.
  • 사람이 구원받고도 왜 이렇게 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짓는가? 이 사람은 정말 구원받은 거 맞나?

이런 게 "언뜻 보기에" 굉장히 모순돼 보이고 해결하기 어려워 보이는 문제인 게 사실이다.
그런데 그걸 어거지와 억측을 동원해서 억지로 설명하려다 보니..

  • 구원 상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정도면 구원을 잃을 만한 죄다.. 뜨악~~)
  • 애초에 구원받은 것도 아니다 (진짜 그런 경우도 있지만.. 논리적으로는 이건 문제 해결이 아니라 그냥 논점 회피임)
  • 인간이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예정 섭리 주권이다 (하 정말 답답한 능구렁이 어물쩡)

결국 원천봉쇄의 오류나 자기 교리의 본질을 부정하는 쪽으로 빠지는 것 같다. 본인이 보기엔 그렇다.
특히 "이 정도면 구원을 잃을 만한 죄" 중 대표적인 예는 자기 자신을 죽인 자살일 것이다.
세상 비관해서 자기 혼자 곱게 자살한 것만으로 구원을 잃고 지옥 간다면.. 그럼 세상 비관해서 화풀이 하느라 지하철을 불지르고 무고한 시민들 여러 명을 골로 보낸 건 뭐가 되는가? 당장 지옥불 할아버지한테 떨어져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저렇게 예외를 만들고 논리 헛점을 허용하다 보면.. 애초에 그 어떤 죄라도 예수의 보혈로 용서받는다는 기독교 교리 자체가 어거지 모순덩어리이고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된다. 그러느니 차라리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게 더 낫다.
내가 여러 번 글로 변증했었지만, 이미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이판사판으로 죽으면 다 끝나고 없어질 거라고 잘못 생각하고 자살해서 불행하게 지옥에 갈 뿐이다. 죽는 방식 자체는 그 사람의 구원 여부에 아무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자살하지 말아야 한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유가 그저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라면.. 그건 답은 맞지만 계산 과정이 틀린 것이다. 당장 답만 맞다고 계산 과정이 틀린 걸 계속 방치하는 건 그 사람의 성장에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구원관을 왜곡하는 것 말고, 다른 분야에서 진단만 맞고 처방이 비성경적인 방향으로 간 사례를 더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불교는 세상의 문제점 자체는 올바르게 진단했다. 하지만 통찰이 전도서 수준에만 머무른 채, 진짜 진리와 빛으로 나아가지 못한 게(=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기에) 한계이다. 그냥 혼자 열심히 수련하고 노력해서 번뇌를 떨치고 득도 해탈 성불하는 쪽으로 결론이 난 것이다.

(2) 진화론도 마냥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적인 이론이 아니다. 단지, 타락한 자연 세계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적자생존 약육강식 아귀다툼을 신이 직접 만든 게 아니라면 스스로 진화해서 된 거라는 쪽으로 결론을 냈을 뿐이다.
'종'이 분화하는 건 과학적으로 진짜 사실인데.. 신의 존재를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는 건 아니니 남는 가능성은 그냥 저절로 진화하는 것밖에 없다. 진화론 자체보다는 진화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풀이가 우생학 같은 더 악한 결과를 낳았다.

4. 외부 이슈와 관련된 오류

한편, 요즘 교회 내부에서 이런 얘기가 오가는 경우가 많다.

  • 지구 평평;;;
  • 나라 걱정과 정치 얘기, 부정 선거 음모론
  • 우한 폐렴 백신 음모론

이런 건 성경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이슈이다 보니.. 교회에서도 "저런 주제는 교회 차원의 공식 입장을 내지 않으며, 각자 어떻게 믿든지 자유이다. 한쪽만 옳다고 너무 강하게 주장하면서 서로 싸우고 기력을 낭비하지 말라~ 교회까지 와서 자극적인 주제에만 너무 심취하지 말라" 정도의 원론적인 입장만 내면서 유야무야 넘기는 편이다.

뭐, 교회는 세상 학문을 논하는 곳이 아니니, 그런 태도도 잘못된 건 아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과학 발견이나 논리 추론, 합리적인 의심까지 다 종교의 이름으로 찍어누르고 괴상한 반지성주의를 조장하는 건...;;; 성경이 말하는 고귀한 믿음이라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 천동설이나 지구 평평은 어설픈 사진이나 과학 이론(?)이 아니라 아니라 성경 구절을 들이대며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부류의 오류는 교회에서도 어느 정도 바로잡아 줘야 한다. 그리하지 않으면 성경의 다른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방법론까지 싸잡아 사이비로 매도되고 설득력을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개인적으로 굉장히 우려하는 점이다. 까놓고 말해 킹 제임스 성경 신자라면 지구 평평에 현혹될 게 아니라, 인류 역사상 달 상공에서 낭독된 성경 역본이 KJV였다는 것이나 알아야 할 것이다.

정치 이슈도 마찬가지이다.
무슨 기독당을 만들고 교회 명의로 단체로 태극기 들고 길거리에 뛰쳐나가거나 심지어 불신자까지 교회에다 초청해서 시국 강연을 하는 건 교회의 존재 목적과 임무 우선순위를 심각하게 망각한 짓일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교회 댕긴다는 사람이 분별력이 없어도 너무 없는 것, 교회가 무슨 여호와의 증인 급으로 세상 현실과 지나치게 단절을 감행하는 것, 뭐든지 다 예수님 다시 오셔야 해결되는 사항이니 우리는 닥치고 신경 끄면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도 그닥 바람직하지 못해 보인다.

그래서 난 개인적으로 "난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파입니다" 같은 소리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논점 회피라는 생각이 들며, 이런 말을 하는 사람치고 진짜 세상에 얽매이지 않은 균형 잡힌 관점을 가진 경우를 거의 못 봤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기도만 열심히 하면 공부 안 해도 시험 100점 맞을 수 있다거나, 아예 세상 지식 공부는 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무책임 무질서한 개소리로 귀결되기 쉽다.

기독교는 혈과 육에 속한 싸움이 악하다고 해서 그렇다고 아예 집총도 하지 말고 국가의 병역 의무까지 거부하라고는 절대 가르치지 않는다. 이런 분야에서 균형을 어떻게 맞추면 좋을지는.. 답을 내기가 생각보다 어렵다.

Posted by 사무엘

2023/06/09 08:35 2023/06/0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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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죄의 성립

기독교의 핵심 기본 교리 중 하나는 바로 인간이 세상 법보다 훨씬 더 원론적이고 고차원적인 의미에서 '죄인'이라는 것, 그리고 인간의 알량한 노력으로는 그 무슨 수를 써서도 죄의 고리를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걸 일깨우기 위해서 복음 설교에서는 "형제를 마음 속으로 미워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살인,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것만으로도 간음" 등 여러가지 말씀 인용과 비유가 제시되는데.. 뭐 좋다. 세상 법과는 달리 마음의 동기와 근원 차원에서 죄가 성립되니까 말이다.
그런데 논리를 펴는 과정에서 최소한의 개연성과 합리성은 있어야 한다. 최소한 자기끼리 모순을 일으키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다음과 같은 얘기는 좀 조심해서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1) 인간은 당장은 티가 안 나지만 환경이 나빠지고 여건만 갖춰지면 누구라도 지금까지 착 가라앉아 있던 추악한 본성이 다시 튀어나올 거라고 한다. 이는 물론 큰 그림 차원에서는 맞는 말이다.
그런데 나쁜 환경이란 도대체 무엇을 말할까? 정당방위나 긴급피난까지 죄일까? 당장 남을 안 죽이면 내가 죽게 되는 상황이어서 어쩔 수 없이, 혹은 패닉에 빠져서 남을 죽인 것까지 살인죄일까?

이건 세상 법리로나 성경의 법리로나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다못해 출애굽기조차도 깜깜한 데서 자기 집에 침입한 도둑을 정당방위 차원에서 때려죽인 건 무죄라고 실드 치니 말이다. (출 22:2-3)
하나님은 인간의 동기와 마음을 일일이 다 따져보시니 이런 문제를 오히려 더욱 정확하게 판결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사랑의 체벌이고 어디부터가 아동학대 폭력인지, 안락사가 어디까지가 살인이고 어디부터가 하나님이 데려가시도록 놔 주는 건지.. 이런 모호한 상황 문제에 대해서는 신앙을 가졌다는 사람들끼리도 좀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남에게 복음 전할 때 자기가 책임질 수 없는 말을 동원하면서 꼬드겨서는 안 된다.

(2) "당신이 어디어디에 낸 돈은 이런이런 나쁜 일을 하는 기업이나 다른 조직의 배를 불리게 됩니다. 그러니 여기 제품을 불매합시다" 이런 부류의 보이콧 권유 문구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특히 기독교계에는 어느 기업이 무슨 이단 종교 계열이라는 식이기 때문에 당신이 그 기업의 제품을 구입한다면 그 기업의 악행에 동조하게 된다는 식으로 반쯤 팩트 내지 반쯤 루머 괴담이 나도는 게 많다.

그런데 몇 년 전에는 기업 제품 구매를 넘어서, 세금을 내는 것만으로도 모든 사람들은 이미 죄에 관여하고 있다는 식의 논리 전개를 어느 설교에서 들어서 본인은 개인적으로 굉장히 의아함을 느꼈었다. 이유인즉, 내가 낸 세금이 어차피 반성경적인 나쁜일을 조장하는 데 쓰이기도 하기 때문이랜다.

허나, 기업 제품 구매는 생필품 독과점이 아닌 한 전적으로 자기 자유 의지인 반면, 납세는 마치 군 입대만큼이나 내게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의무이다.
더구나 예수님조차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발언과 함께 로마 제국 식민지 휘하에서 납세를 사실상 몇 차례 실천해 보였다. 그럼 예수님도 죄에 관여한 것인가? 저건 비유에 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켄트 호빈드 같은 사람을 지지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신념에 의한 병역..이 아닌 납세 거부 혐의로 오랫동안 감방 생활함. 꽤 극렬 강경한 젊은 우주 창조론자이기도 함)

(3) 인간은 불법 중에 수태되었고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를 짓긴 하지만(성악설),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지옥 가는 건 결코 아니다. 이것은 어린아기가 죽었다고 지옥 가지는 않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스스로 선과 악을 분별할 능력이 없고 하나님 역시 걔들에게는 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애는 체벌도 불사하는 양육과 훈육이 필요한 거지, 아예 죽어 버렸을 때의 구원 걱정은 안 해도 된다. 갓 소환돼서 잠시 동안 무적 상태인 게임 캐릭터와도 같다.

내가 늘 강조하지만 인간이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가는 건 전적으로 자신의 자유의지와 행위로 인해 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옥 가기로 찜해 놓고 예정했기 때문에 가는 게 아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점에 대해서는 칼빈주의가 전적으로 틀렸으며 알미니안주의의 통찰이 정확하다.

난 당연히 그런 걸로 알고 있고,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듣기 싫은 얘기를 하는 것도 인간의 그 자유 의지를 돌려 놓고 바꾸기 위해서인 것으로 알아 왔는데.. 그걸 이상하게 배배 틀어서 가르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고서 놀랐었다.
다시 말하지만.. 세종대왕과 이 순신이라 해도 자기 의지에 따라서 죄 가운데 죽어서 엄한 곳에 갔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럴 능력조차 없는 어린애들까지 죽어서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2. 회개

이건 몇 년 전에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에 대해 논하면서 다뤘던 주제이지만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복습하고자 한다.

주변에 복음을 전할 때 앞서 다뤘던 저런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 공의로움, 심판과 지옥 같은 불편한 진실을 전하지 않고..
무슨 종교 영업사원마냥 “하나님은 사랑이에요, 우리 교회 나오기만 하세요, 님 인생에 나쁠 거 없어요. 이 영접 기도문 따라 읊기만 하세요” 이러기만 하는 건 복음 전파가 전혀 아니다. 그건 시간과 노력의 낭비일 뿐만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전혀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 거짓으로 구원의 확신까지 심어 줄 수 있는 대단히 잘못되고 위험한 짓이다.

그런데 그런 관행을 까고 비판하는 건 좋은데, 거짓 evangelism을 비판하는 진영은 대단히 높은 확률로 반대편의 잘못된 극단으로 또 빠지더라. 드러난 행실의 변화가 없는 사람은 구원도 못 받은 거라고 말이다. 폴 워셔 목사라든가..

그 진영의 최대 문제점이 뭐냐 하면..
“저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이제 술 담배 끊고 모든 세상적인 생활방식을 그만두고 예수님처럼 홀리하게 살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러니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가 된다는 것이다.
(앞으로 니 힘만으로 그렇게 잘도 살아지는가 한번 테스트 해 봐라)

술 담배, 음란방탕, 살인 간음만 회개의 대상인 줄 알지,
지금까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한 것, 죽으면 다 끝이라고 생각한 것, 착한 일을 나쁜 짓보다 더 많이 하면 구원받는 걸로 생각한 것, 예수가 그냥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대성인 출신 죄수인줄로만 안 것..

이런 건 회개의 대상이 아니거나 ‘선행’(?)에 비해 굉장히 사소하고 하찮은 것으로 안다. 전자가 아니라 후자야말로 성경이 규정하는, 구원을 가져다 주는 진짜 회개인데도 말이다! 이 황금 만능주의 인본주의 안티개독이 횡행하는 시대에 후자처럼 믿는 또라이 별종이야말로, 당장 인간적으로 바보 같고 거칠고 서툰 구석이 많아도 하나님 눈엔 얼마나 기특하고 예쁘게 보이겠는가? 이런 믿음 체계가 아니면 성경의 기독교가 도대체 타 종교와 무슨 차이가 생기겠는가!

구원은 그냥 구원받은 죄인이라는 영적 출생이고 0차원 점이다. 그 뒤 신앙생활을 통해 영적으로 자라서 차차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고 제자의 삶을 살고 그리스도의 심판석용 보상을 쌓는 건 1차원 선이고 축적, 적분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내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라고 믿어서 갓 구원받았다고 해서 곧바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가 선뜻 믿어지고 행할 수 있게 되는 거 아니다. 구원받았다는 게 영적으로 내부적으로는 정말 대단하고 새로워진 것이지만, 한편으로 외형적으로는 정말 별것 아니고 달라진 거 없이 그대로이다.

세상에는 교회 댕긴다는 사실상의 논크리스천들도 굉장히 많다. 그 사람들은 만약 구원을 못 받았다면, 선행 안 하고 거룩하게 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저런 믿음 체계도 세워지지 않은 경우가 90% 이상일 거라고 본인은 단언한다.

구원의 결과, 열매(fruit)를 구원의 조건, 근간(root)과 헷갈리지 말라. 킹 제임스 이외의 성서에서 요 3:36 (아들을 믿는 자 vs 순종하는 자)과 벧전 2:2 (말씀의 젖으로 자라라 vs 신령한 젖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가 괜히 변개된 게 아니다.
그리고 행 2:38은 비록 변개 이슈는 없지만 이게 잘못 적용되면 괜히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 게 아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바라바를 선택한 “당대의 유대인들”에게 특별히 처방되었던 회개 조치가 행위 구원 조건으로 둔갑해 버리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생각만으로는.. 하나님이 구원받을 사람, 지옥 갈 놈을 다 미리 갈라 놨다고 생각하는 게 더 편할지 모르고(예정론), 그렇게 컴파일 타임이 아니면 런타임으로 사람이 구원을 상실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게 자기가 싫어하는 교회 내부 사람을 정죄하는 용도로 더 적합하다! 그에 비해 "구원은 확실하게 받았는데 존나 육신적이고 이기적인 영적 아기"라는 개념은 솔~직하게 말해서 별 재미가 없고 이해하기 쉽지 않다. 내 말 틀렸나?

영이랑 혼 구분 없이 싸잡아서 생각하는 게 더 편할 수 있으며, 구원받은 죄인이랑 레알 크리스천을 한데 싸잡아서 생각하고 멋대로 판단하는 게 더 편할지 모른다. 마치 생명 자연 발생설과 지구 평면설이 당장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더 직관적인 것처럼 말이다. 자살하면 지옥 간다고 생각하는 것도 일단 그렇게 믿어서 해로울 건 없다.

하지만 답이 맞다고 해서 계산 과정이 틀려도 되는 건 아니다. 성경이 그렇게 귀걸이 코걸이 엿가락 같은 책이 아니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그 정도로 원칙 없고 제멋대로 성품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보다 굉장히 더 고차원적이시기 때문이다.
선행을 보태서 구원받고 악행으로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들 중에 평범한 행실 말고.. 기도를 안 하면, 성경을 안 읽으면 구원을 잃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결국 그건 성경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자기 편한 대로, 자기 직관대로만 내린 결론일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교리 공부를 통해 인간이 예수님의 어떤 면모를 믿어서(죽으심, 부활), 정확하게 무엇이 거듭나고(내 영)이 무엇이(내 혼) 무엇으로부터(죄의 형벌, 권능, 임재..) 무엇을 통해(은혜와 믿음) 어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3. 믿음

믿음과 순종· 행위는 일체인 걸까 별개인 걸까? 이건 거의 모든 논쟁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의문이다.
이거 갖고 서로 용어의 정의와 범위도 모른 채 쓸데없는 논쟁이 왕창 많이 오가고, 보다시피 부분적인 면모만 왕창 강조하는 이단 파당이 왕창 많이 생겨 왔다. 여러 장님들이 코끼리를 만지고서 코끼리는 뱀 같은 길쭉한 동물이다, 무슨 건물 기둥 같은 동물이다, 말 같은 안장이 달린 동물이다 등등으로 싸우는 거나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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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믿음이라는 건, 당장 가시적이고 물리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어떤 정보· 이념을 받아들여서 그에 따라 반응하는 것을 말한다.
성경이 그냥 그리스 로마 신화, 단군 설화 같은 책인 줄 알았다가 전능한 하나님의 영감으로부터 유래된 무오류한 계시라고 보기 시작한 것,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스스로 부활한 게 맞다고.. 그게 나를 위한 것이었다고 인정한 것이 '믿음'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건 과학으로는 증명도, 반증도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이 정도로 생각을 고쳐먹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회개· 회심이며 일종의 순종이고 행위이다. 기독교가 요구하는 구원 조건은 대외적인 선행이 아니라 이런 머릿속 소프트웨어 개조가 전부이다.

구원이라는 선물을 내 돈 지불하지 않고 받기 때문에 '행위 없이 오직 믿음'이라고 말한다. 선물을 받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하는 것, 팔에 힘을 주고 손을 내밀어서 그 선물을 받는 것조차 무슨 '자기 의'가 들어간 행위라거나, 선물에 대한 대가를 지불한 거라고는 사회 통념상으로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칼빈주의에서는 전적 타락이라든가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얘기를 하면서 이와 관련된 말장난을 좀 하는 모양이다.

그럼 행위란 무엇인가? 간단하다.
형이상학적인 것을 믿고 구원을 받았으니 이를 토대로 당장 나한테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손해가 오는 상황에서도 성경의 다른 가르침을 믿고서 절제하고 헌신을 실천하고, 예수 믿는 삶을 나타내 보이는 것을 말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증거를 보이는 행동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땡볕에 기우제를 지내러 나가기 전에 우산을 미리 들고 가는 것과 같다.

믿음만 있고 행위가 없는 것은 기껏 내 자신과 집, 처자식을 지키려고 성능 좋은 총을 샀는데, 아니 자기 돈으로 산 것도 아니고 선물 받았는데.. 그 총으로 무장 강도에게 맨날 공포탄만 쏘다가 집이 털리는 것과 같다.
성능 좋은 차를 장만했는데 시동 걸어서 맨날 중립 기어에서만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것과 같다.

웅웅거리는 엔진음이 들리고 엔진이 돌아가기는 하는 것 같은데 차가 차주의 일상생활에 실제로 쓰이지는 않는다. 그럼 그 차나 총을 선물해 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물리학적으로 '일'이란 힘에다가 '거리/길이'를 적분한 것으로 정의됨!)
다만, 어이없고 좀 말이 안 되는 상황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총이나 자동차 자체가 거짓 가짜는 아닌 셈이다. 자동차 등록증이 있고 총기 사용 허가증은 있다. 물건 자체의 존재와 진품 여부는 소유자의 저 이상한 행동과는 전적으로 별개로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그리고 믿음에도 분량이 있으며, 믿으려 하지만 잘 안 믿어지는 경우가 있다. 마치 열심히 찾으려(seek) 하지만 안 찾아지는(find) 것처럼 말이다.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올 거라고 믿고 우산을 챙겨 가는 것 정도는 별 부담 없이 할 수 있다. 우산 하나 챙긴 것쯤이야 설마 비가 안 오더라도 내 신상에 큰 타격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가 오는지 여부에 따라서 집 문서를 걸거나 내 손모가지를 건다면 선뜻 하겠는가? 갓 구원받은 초짜가 당장 순교가 가능할까?? 그리고 그걸 못 한다고 해서 "에라이 믿음이 부족한 놈"이라고 욕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초짜가 겁먹어서 순교를 못 하면 구원이 도로 취소될까?

그런 식이다. 믿음도 여러 종류와 강도가 있다. 구원으로 이르는 믿음 이후에는 또 다른 종류의 믿음이 필요하며 그 크기도 차츰 업그레이드 해 나가야 한다. 신혼 부부에게 데이트 때 씌였던 콩깍지가 길어야 얼마나 지속되겠는가? 바로 그것처럼 갓 영접하고 구원받았을 때의 내 감격과 감정과 믿음은 절대로 무한하지 않으니 지속적인 믿음 공급과 성장이 필요하다.

이런 것들을 잘 분간하면 요 3:36 "아들을 믿지 않는 자" vs "아들을 순종하지 않는 자"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으며, '믿음 따로 행위 따로' 같은 말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옳은 내용과 전체적으로 틀린 논리 전개를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구원받은 뒤에 믿음의 행위가 나오는 거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벧전 2:2)는 변개된 텍스트이다. 그리고 "구원을 일하여 이루라"(빌 2:12)는 변개는 아니지만 work out을 좀 오해의 소지가 있게 번역한 대목인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0/01/17 08:33 2020/01/17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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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과 행위의 관계

세상의 다음 법칙들을 생각해 보자.

  • 길거리에서 나눠 주는 무료 유인물이 공짜라고 해서, 거기 있는 유인물들을 몽땅 혼자 가져가도 되는 건 아니며,
  • 지하철역의 쓰레기통이 공짜라고 해서 자기 집 쓰레기를 몽땅 가져와서 거기에다 버려도 되는 게 아니다.
  • 뷔페가 음식 무한 리필이 가능하다고 해서 딴 그릇에 담으면서까지 막 퍼 가도 되는 건 아니다.
  • 노인은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고 해서 무임 승차권조차 아예 없이 개찰 구역 안으로 제 집처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건 아니다.
  • 남이 만든 어떤 소프트웨어가 누구나 무료로 쓸 수 있다고 해서 그걸 자기가 만들었다고 저작권 자체를 사칭해도 되는 건 아니다.
  • 자유가 있다고 해서 남의 자유를 침해할 자유,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와해시킬 자유까지 허용되는 건 아니다.

우리 주변엔 이와 비슷한 원리의 적용을 받는 것들이 이것 말고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finally..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받는 혼의 구원이 공짜이고 영원히 지속된다고 해서 □□□ 해도 되는 건 아니다. 안에 들어갈 말은 건전한 예수쟁이라면 누구나 유추 가능할 것이고. (롬 6, 엡 2, 고전 8:2, 갈 5:13 등)

다시 말하지만, 크리스천은 구원받기 위해서, 혹은 받은 구원을 유지하기 위해서 선행을 하는 게 아니다.
단지 그 구원에 감격하고 감사해서, 다른 사람이나 세상 정세를 보는 게 아니라 절대적인 선과 보상의 기준을 보고 믿음 안에서 성령의 열매 차원에서 선행이 나오는 것이다.

크리스천이 믿음의 선행을 하는 것은, 마치 철덕이 Looking for you를 3천 번 듣고 우리나라 철도의 모든 것을 줄줄 외우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게 없는 자연스럽고 지당한 이치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는 증거는 보이는 형태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Q. 너는 철도를 사랑한다는 것을 무엇으로 보일 테냐?
A. 새마을호 객실에서 흘러나왔던 Looking for you를 3천 번 듣고 악보로 만든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입증하는 방법이 이것만 있는 건 물론 아니다. 복수 정답이 존재함)


이렇듯, 로마서와 야고보서는 lexical하게는 이랬다 저랬다 하는 진술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 실질적인 내용은 일맥상통하며 모순이 아니다.
그 정도 모순도 분간 못 할 정도면 성경 못 읽는다. 성경엔 그거 말고도 이랬다 저랬다 하는 말이 차고 넘친다.

Posted by 사무엘

2015/06/03 08:29 2015/06/03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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