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니라'의 시제
한국어 성경은 개역성경의 선례 덕분에 '-느니라, -도다, -소서' 같은 고어체가 여전히 현역이다.
그런데 창 1:1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거는 시제가 현재일까 과거일까?
'하시니라'는 형태· 통사론 상으로는 당연히 현재 시제이다!! '하셨느니라'가 과거이지 '하시니라'가 도대체 어떻게 과거 시제가 되겠는가.
하지만 더 상위의 의미· 화용론 레벨에서는 '하시니라'가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도 모두 포함하는 시제로 오랫동안 구분 없이 뭉뚱그려서 사용돼 왔다.
개역, 한킹, 흠정역 어느 역본도 모든 구절에서 철두철미하게 용언 형태소 차원의 시제 구분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걸 악의적인 변개나 오역이라고 말하기에는 좀 그렇다.
우리말이 단· 복수나 정· 부정관사 구분을 별로 안 하고,
초록과 파랑을 별 구분 없이 '푸르다'라고 표현하고,
"A와 B의 C"만으로 "A의 C" + "B의 C"를 모두 표현한 것과 비슷하게...
그냥 한국어 한국 문화권이 시제를 엄밀하게 따지지 않고 지냈다. 그리고 그게 성경 번역에도 반영됐던 거다.
차라리 현대어 어미를 썼으면 '창조하셨다, 숨을 거두셨다'라고 시제가 더 분명히 구분됐을 텐데, 고어체 어미가 시제 구분이 불분명했던 편이다.
'-함, -음'도 생각해 보자. 엄밀히 따지면 '-했음, -갔음'이라고 써야 과거가 되지만 통상적으로는 일일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학교에 감, 밥을 먹음" 그냥 이렇게 써도 문맥에 따라 과거라고 통용되는 편이다.
그래서 뒤늦게 창 1:1을 "창조하셨느니라"로 바꿔야 된다느니, 기존의 "창조하시니라"만으로 충분하다느니 논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가령, 말보회 한킹의 경우, 처음에는 '시니라'이다가 나중에 '셨느니라'라고 바뀌었다.
흠정역은 6일 창조 이전의 과거의 존재를 부정하는 진영이다 보니 저기 시제는 절대 바꿀 생각이 없는 상태이고. (허나, 요 1:1 하나님이셨느니라 이거는 과거 시제로 개정했음)
영어 문장대로 용언의 현재 과거 시제를 철저하게 해 준 최초이자 현재 유일한 역본은 바로 바로...... 표준역이다.
가령, 요 19:30은 고어체로 번역된 우리말 성경 중에 유일하게 표준역만 '숨을 거두셨더라'이고 딴 역본들은 '거두시니라, 돌아가시니라' 등이다.
그 반면, 2장 가나의 혼인 잔치처럼 영킹이 saith 같은 현재 시제를 쓴 곳에서는 '하시니라'이다.
이거는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말 성경 번역이 점진적으로 자연스럽게 개선돼 나가야 할 점인 것 같다.
마치 요한일서의 beloved를 마치 dear XXX처럼 "사랑하는 자"라고 쓰던 것을 더 엄밀하게 "사랑받는 자"라고 바꾸듯이 말이다.
우리말도 영어 영향을 받아서 100년 전보다는 단· 복수나 능동· 피동 구분을 더 엄밀하게 따지면서 하지 싶다. 그게 마냥 번역투라고 부정적으로만 볼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걸 엄밀하게 따지지 않던 옛날 성경이 악의적인 변개나 오역을 저질렀다고 판단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2. 무엇을/어떻게
의문사 무엇(what)과 어떻게(how)는 지칭하는 영역이 언어 품사 차원에서 다르다. "이건 뭘 표현한 거야?" / "이거 어떻게 만들었어?" 처럼 말이다.
그런데 우리말에는 '어떡하다'라는 굉장히 미묘 므흣한 단어가 있다. 그래서 같은 의문이지만 영어로는 what으로 시작하는 반면, 우리말로는 how에 가까운 뉘앙스로 표현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때가 발생한다.
그래서 성경에서 유명한 행 16:31의 바로 앞 절.. 30절 감옥 간수의 질문을 보자.
개역, 표준, 한킹 같은 우리말 성경들은 모두 "어떡해야 구원받을 수 있죠?"라고 번역되었다.
그러나 한킹 이후에 등장한 킹 계열 역본.. 흠정역 내지 표준역만이 "무엇을 해야 구원받을 수 있죠?"라고 what을 직역했다. 흥미롭지 않은가?
문제나 위기가 생기고 난감한 상황이 됐을 때 한국어 화자에게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은 "이를 어쩌면 좋지? 어떡해야 하지?"이다. "뭘 해야 하지"가 아니다. 예전에 월급값 못 한 여경들이 사회적 물의를 빚었던 '오또캐스트라' 드립을 생각해 보자.
"뭘 해야 하지"는 그건 자기 신변과 무관한 업무를 인계받으면서 "이제 내가 뭘 하면 되지?" "여기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뭐죠?" 아주 객관적으로나 할 만한 말인 거다.
영어는 명사 지향적이고 체언을 꾸미는 관형어가 발달해 있다. 그러나 우리말은 동사 지향적이고 용언을 꾸미는 부사어가 발달해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있다"라고 하지 않고 "사람이 많이 있다"라고 말한다.
이런 정서가 반영되어 영어로는 what(무엇을 명사)으로 표현하는 것을 우리말로는 how(어떻게 동작)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오죽했으면 방문 용건을 묻는 질문조차 "어떻게 오셨습니까?"("무슨 일로"가 아니라)라고 묻는 경우가 있고, 그걸 마 동석이 어느 영화에서 "봉고차 타고. 내비 찍고 왔어"라고 동문서답 개드립을 치지 않았던가.
이게 한국어다. 이것 말고도 영어로는 come인데 우리말로는 정황상 '가다'라고 번역해야 할 때가 있고, 부정의문문의 대답도 대놓고 yes/no의 번역이 갈리곤 한다. ㄲㄲㄲㄲ
3. 챔피언
성경에 나오는 블레셋(필리스틴) 장수 ‘골리앗’은 성경뿐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정말 유명하다. 스타의 테란 메카닉 유닛의 이름으로도 쓰였을 정도이다.
하지만 사무엘상 17장을 읽어보면 성경 기자, 아니 하나님은 골리앗이라는 이름을 언급하는 걸 극도로 꺼리고 있다. 거의 다 ‘그 블레셋 사람’, ‘그 블레셋 사람’ 일색이다. 이 점을 한번 생각해 보자.
이건 의도적인 서사이다.
성경의 진술 방식에서 이름 언급이 매우 중요하다는 건 누가복음 “부자(익명)와 나사로”, 룻기 “보아스와 아무개(익명..)”, 그리고 다니엘서 풀무불 씬에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친구 이름들의 등장 빈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곳곳에 미주알고주알 명단들이 나오는 거다. 하다못해 로마서 16장 안부 인사 대상자 명단처럼 말이다.
그 대신, 성경은 골리앗이.. 그냥 평범한 파이터, 글래디에이터, 워리어 따위가 아니라 ‘챔피언’이었다고 언급한다. 성경에서 유일하게 champion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곳이 삼상 17이다. 우리말로는 대체로 ‘투사’라고 번역됐다.
오늘날이야 챔피언은 무슨 개인 단위 게임이나 스포츠의 전국 단위 우승자, 1등 타이틀 보유자..라는 뜻이 강하다. 바둑 챔피언, 20xx년도 탁구 챔피언.
그래서 “세상에서 너무 챔피언이 되려 애쓸 필요 없다. 성경에서 챔피언은 부정적인 인물인 골리앗에게나 쓰였다” 이렇게 적용하는 경우가 있다.
무슨 뜻인지는 이해하겠다만 그건 “성경에서 그림(pictures)이 민 33:52 같은 부정적인 뜻으로 쓰였으니 각종 영화 산업들도 영적으로 별로 안 좋은 것들이다~ 영화사들도 다 OOO pictures이잖아?” 와 비슷한 급으로 아주 간접적이고 영적인 적용이라 하겠다.
챔피언은 원래는 자기 고용주나 VIP를 대신/대표해서 전투나 결투에 나가서 싸우는 직업 싸움꾼..이란 뜻에서 출발했다. 성경의 용례도 1차적으로는 이거지 싶다.
골리앗 저 시절에 “블레셋 대왕배 특전사 격투기 대회 우승 타이틀”이라든가.. 무슨 태평양 전쟁 일본군마냥 100인 참수 시합 같은 게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무언무언가를 지키고 수호하는 사람한테도 챔피언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다. 그 대상이 굳이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
“친환경 전기차를 운전하는 당신은 환경 챔피언입니다” 이렇게 써도 된다는 것이다. (전기차가 진짜로 완벽하게 친환경인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기아 니로 CF에 나오는 환경전투사 같은..;;
글쎄, 싸이의 노래 가사처럼 음악에 미치면서 인생을 즐기는 건 무슨 챔피언인지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만 말이다.
물론, 지키고 싸우는 게 직업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일반인들보다 더 힘 좋고 체격 좋고 잘 싸울 것이다. 골리앗이라면 더욱 그랬을 것이고. 그래서 우승자라는 의미가 나중에 추가된 것이다.
직업이 챔피언인 사람은 지위 내지 실력도 챔피언일 것이다~~ 이렇게 말이다.
말보회 한킹은 챔피언을 그냥 투사가 아니라 ‘최고 투사’라고 번역했더라. 저런 번역은 한킹이 유일하다. 원래 의미에다가 나중 의미까지 저렇게 넣고 싶었던가 보다. 한킹은 전반적인 번역 스타일이 영킹 직역뿐만 아니라 ‘나중 의미’도 더 살리는 쪽이다 보니.. 일면 수긍이 간다.
또한, testament를 그냥 언약이라고만 옮기기는 아까워서 흠정역이 ‘상속 언약’이라고 번역한 것과 비슷한 워딩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킹은 testament는 그렇게 번역하지 않음)
4. 은과 돈과 재물
행 8:20 말이다. 베드로가 그에게 말하기를 “너는 네 돈과 더불어 망하라. 이는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라.” (행 8:20)
여기서 ‘네 돈’ 부분을 ‘돈’ 대신 ‘은’이라고 번역한 역본이 생각보다 여럿 있다. 당장 개역성경도 그렇고, NASV나 NRSV도 그렇다.
궁금해서 잠시 조사를 해 보니, 이건 원문 변개 이슈는 아니다. 변개된 계보의 성서 중에도 ‘돈’인 역본 또한 많기 때문이다.
같은 헬라어가 문맥에 따라서 은도 되고 돈도 되는 것 같다. 즉, 이건 번역에서의 바리에이션이다.
베드로는 금과 은이 아니라 유독 은과 금이라는 말을 썼는데, (행 3:6, 벧전 1:18) 이때의 은과 저기서의 돈이 같은 단어이다.
우리 한자어에서는 현금, 등록금, 계약금 등.. 금을 돈과 비슷한 뜻으로 많이 사용한다. 하지만 인류 역사를 보면 금에 앞서 은이 먼저 화폐로 널리 통용됐다.
오죽했으면 돈을 보관하는 기관의 이름도 ‘은행’이지 않은가? 그리고 '은전 한 닢'이라는 유명한 수필도 있다. ㄲㄲㄲ
성경에 등장하는 화폐들도 거의 다 은화이다.
주님의 몸값부터 시작해서 요셉의 몸값, 사도행전 19장에서 불태운 주술 서적의 가격.. 은이다.
서양의 로마 제국뿐만 아니라 동양의 중국도 이런 은본위제 국가로 유명했으며, 아편 전쟁 당시에도 은이 거래됐었다.
‘네 돈’ 말고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할 때의 ‘돈’은 앞의 돈/은과는 다른 헬라어이다. 용어 몇 개를 찾아보니 이건 보편적인 ‘부, 재물’과 비슷한 맥락으로서 돈을 의미하는 것 같다.
베드로는 사도행전과 베드로전서에서 하나님의 선물은 한낱 은이나 금과 견줄 바가 아니라는 요지의 말을 여러 번 했었다. 아무쪼록, 우리 같은 헬알못(?) 일반인은 은이니 돈이니 재물이니 이런 게 알쏭달쏭하면 우리의 모국어, 아니면 최소한 영어로 알아들을 수 있는 최종 권위인 킹 제임스 성경이 규정해 준 원어의 뜻을 따르면 될 것이다.
하긴, 신약뿐만 아니라 구약의 시편 8편에서 “인간을 천사보다 약간 낮게 하시고”에 '천사'가 히브리어로 그냥 엘로힘.. 하나님/신들과 같은 단어라고 한다. 돈/은과 비슷한 관계인 것 같다.
같은 단어가 하나님, 신, 천사 모두 가능하다니 너무하지 않은가? =_=;; 하지만 이건 문맥상 하나님일 리가 없고, 신약 히브리서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도 헬라어로 천사라는 단어가 들어갔다고 들었다. 저기서의 의미는 당연히 천사가 돼야 할 것이다.
5. 맺음말
여러 주제의 얘기가 많이 나왔는데 이제 글을 맺고자 한다.
성경 읽을 때는 여건이 허락한다면 다양한 번역본을 참고하면서 다양한 의미와 다양한 관점을 학술적으로 섭렵해서 나쁠 건 없다.
그러나 그런 면모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닥치고 익숙한 단일 모국어 역본만 철썩같이 반복해서 읽으면서 골수에 새겨서 "암송"하고, 일상생활에서 곧장 그 말씀이 떠오르게 하는 거.
이 둘에 대한 균형을 맞춰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둘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으면 전자보다는 후자를 더 우선시해야 할 것이다.
진리는 기본적으로 형태가 단순하다. 성경의 하나님은 헛똑똑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지적사기 말장난 기만을 싫어한다.
이솝 우화던가? 당장 고양이가 쫓아오는데, 똑똑한 쥐는 탈출하는 방법 100가지 중에서 뭐가 지금 가장 효율적일지 짱구 굴리면서 고민만 하다가 고양이에게 잡아먹혔다.
그러나 닥치고 달리기인지 개헤엄인지 방법을 하나밖에 모르던 평범한(?) 쥐는 자기가 아는 방법 하나만 X나 무식하게 밀어붙여서 살아남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저것 잡다하게 아는 건 많은데 지혜가 없고 분별력이 없고, 어느 게 나에게 당장 필요한 진리인지를 모르는 건 영적으로 바람직하게 성장한 상태가 아니다.
전자가 오히려 혼동을 야기하면서 후자의 활동에 해를 끼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으니까 절대적으로 옳은 건 없다~~ 세상에 100%라는 건 없다" 이건 유한한 자원에서 최대의 가성비를 찾는 공학 같은 세상 학문에서나 통용되는 특징이다.
그 반면, 성경을 대하는 태도는 "나의 최종 권위는 이건데 그래도 추가로 참고적으로 요렇게도 볼 수 있다, 옛날 사람들은 저렇게도 생각하긴 했다" 이렇게 중심 절대값부터 잡고 나서 부가설명 액세서리를 참고하는 형태가 돼야 할 것이다. 교리에 대한 문자적 해석부터 한 다음에 영적 교훈을 넓고 다양하게 적용하듯이 말이다.
성경 말씀이나 찬송가 가사 같은 건 책을 보고 있지 않아도, 폰을 들여다보고 있지 않아도 일상생활 중에 튀어나오고 흥얼거릴 수 있어야 한다.
찬송가라고 해서 맨날 군가 아니면 중세 장송곡 같은 식상한 멜로디여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거 뭐 악보를 읽기도 어려울 정도로 정도로 박자가 너무 복잡한 2000년대 이후 CCM은..;; 과연 어렵고 힘들 때나 성령 충만할 때 누구나 쉽게 떠올려서 그대로 부를 수 있을까? 세월을 안 타고 모든 성도들이 부르는 불후의 명곡이 될 수 있을까?
그것처럼 그 좋은 영어 성경도 말이다. 영어 성경에 Believe in the Lord Jesus Christ, Rejoice in the Lord 같은 쉬운 문구만 있는 게 아니다. 성막이나 성전 설명을 영킹으로 바로 읽고 알아듣고 머리에 외울 수 있겠는가?
영어 영어 하다가 자기한테 본질적인 걸 놓치지도 말아야 하리라 생각된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