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전에 한번씩 했던 말들이긴 하지만 그걸 이런 식으로 나열하고 한데 대조· 비교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주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니 이렇게 한번 더 개념을 정리하도록 하겠다.

1. 비킹: 예정 vs 자유의지

난 기회가 된다면 킹 제임스 진영의 밖에 있는 제도권/일반 교회 신자와 다음 주제들에 대해 언제든지 진지하게 토론해 보고 싶다.

  • 님 다니는 교회· 교파에서는 예정과 자유의지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잡느냐?
  • 구원의 영원한 보장에 대해 어찌 생각하느냐?
  • 선과 악을 분간 못 하는 어린 아기는 병이나 사고로 죽으면 어찌 될까? 이런 의문에 대한 댁들의 생각은 어떤가..?

난 이 주제에 대해 극도로 단순화시켜서 비약해서 말하자면..
"십자가 이전에는 알미니안(자유의지), 그 이후부터는 칼빈(섭리, 예정, 영원한 구원)"설을 개인적으로 지지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과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뜻을 분간한다.

성경에는 당연히 절대자 하나님의 주권과 재량, 예정이라는 게 있다.
그래서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마다 환경 처지가 제각각이고 신체· 지능 리소스도 제각각이다. 하루 종일 일한 품꾼이건 마감 1시간 전에 온 품꾼이건 동일한 일당을 받았다는 포도원 비유도 있다. 모태신앙 구원도 있고, 십자가 강도 같은 끝물 구원도 있다.

(1) 그러나 이건 개개인의 구원 여부가 엿장수 마음대.. 아니, 하나님 마음대로라는 얘기가 아니다.
미리 아심도 있고 구원받은 사람의 신분 변화가 '예정'된 건 있지만, 그게 로보트 마냥 개개인의 구원 여부를 말하는 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정을 수학 집합에다 비유하자면 원소나열법이 아니라 '조건제시법'이다. 울나라 법에다 비유하자면 특별사면이 아니라 일반사면을 말하는 거다.

"파라오의 마음을 더 강퍅하게 만들겠다" 이건 스스로 삐딱서니 타기 시작한 악인의 벡터의 크기 정도나 하나님이 더 키워 버리시겠다는 얘기이다, 아예 벡터의 방향을 마인드 컨트롤 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시험이나 함정수사는 기회제공일 뿐, 아예 대놓고 죄 지으라고 꼬드기는 범의유발이 아니다.

어떤 경우건 "신이 누구누구는 처음부터 죄인 역할극을 하게 만들려고, 지옥불로 떨굴려고 창조했다", "하나님이 악도 필요해서 같이 창조했다" 같은 식의 결론은 난 절대절대 지지하지 않는다.

아 그래서 하나님이 악도 필요해서 아우슈비츠 수용소 독가스실도 냅두고, 북괴 정치범 수용소도 저렇게 냅두고 731 부대와 캄보디아 킬링필드도 다 묵인한 건가?
그러면 죄의 책임이 인간이 아니라 신에게 있는 꼴이 된다. 그런 하나님 믿으라고 불신자한테 복음을 참 잘도 전할 수 있겠다.

저걸 믿을 바에야 차라리 진화론이 낫다!! 진화론은 "서로 죽고 죽이고 속고 속이고 중독시키고 말려 죽이는 자연의 적자생존 약육강식을 신이 만든 게 아니라면 오랫동안 스스로 진화해서 저리 된 거다"라고 이렇게 변명하는 거라도 있다! 알겠는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죄악까지 전부 하나님이 의도한 빅픽처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건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착각하는 거다.

(2) 이와 같은 맥락으로.. 아기· 영유아가 병이나 사고로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가 도대체 신학적으로 왜 논란이고 논쟁거리인지 난 이해되지 않는다.
예수님 탄생 당시에 헤롯 왕에게 학살당했던 2살 이하 아기들이 다 원죄 때문에 지옥 갔다면.. 나는 정말 기독교 안 믿었을 거다. 나부터가 부끄러워서라도 그런 신 믿으라고 주변에 못 전한다.

성경에 따르면 그 어떤 흉악범죄자라도 회개하고 예수 믿으면 죽어서 천당 갈 수 있다. 반대로 예수 안 믿고 자기 죄 가운데 죽었다면 그 범죄자를 체포한 경찰이나 사형 판결을 내린 판사 검사, 심지어 그 범죄자에게 희생당한 피해자라 해도 지옥 간다.
이건 불신자 입장에서는 선뜻 동의나 납득이 안 될 수 있지만, 이게 기독교 교리이다. 허나, 이런 기독교조차도 예수님을 선택하거나 거절할 능력조차 아직 없는 아기까지 몽땅 지옥으로 보내는 미친 짓거리는 하지 않는다!

(3) 내가 간극 재창조를 적극 지지하는 이유도 겨우 젊은 지구 오래된 우주 같은 과학 연대기 문제 때문만이 아니다.
6천 년 전 6일 창조가 전부라면 사탄 마귀는 도대체 언제 창조됐고 언제 타락했는데? 인간은 죄를 짓는 바람에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후손들이 대대로 고생하게 됐구만, 그럼 저놈은 언제 어디서 반역해서 무슨 처분을 받았는데? 최소한 인간보다는 훨씬 더 큰 스케일의 벌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는가?
이게 이전 세상의 멸망과 간극 없이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다.

이러니 성경에는 하나님의 주권 예정도 있고, 인간 쪽의 자유의지도 있다. 가중치가 반반이고 상호 보완적이다. 마치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 세 분과 한 분.. 빛의 입자성과 파동성.. 거의 그런 급이다. 서로 자기만 옳다고 피터지게 싸울 주제는 아니어 보인다.

이것 말고도 킹 진영과 비킹 진영 간에는 교회와 이스라엘(유대인)의 관계, 전천년주의 vs 무천년주의 같은 관점도 차이가 있다. 더 깊게 들어가면 세대주의도 나온다만, 이 이슈는 이 글에서는 일단 논외로 하련다. 벌써 글이 너무 길어졌으니 말이다.

2. 킹: 영어 vs 원어

자, 킹 제임스 진영은 한킹이고 흠정역이고 표킹이고 어느 역본 진영을 가건, 위에서 논했던 저런 교리 문제는 그럭저럭 다 일치한다. 이견이 없고 교통정리가 돼 있다. (적어도 난 그런 걸로 알고 있음) 나는 저 관점이 매우 합리적이고 건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좁디좁은 진영을 지지하고 있는 거다.

하지만 킹 제임스 진영들이 시급하게 필요한 게 뭐냐 하면.. 원문과 원어, 원어와 영어 사이의 개념정리 교통정리이지 싶다.
이게 제대로 정리되지 않고 자체적으로 승패가 가려지질 않았기 때문에 안 그래도 작은 킹 진영들이 더 쪼개지고 분열되는 거다. 그러면서 자기 역본이 제일 짱이네 하면서 도토리 키 재기 대립이 끊이질 않는다. 이거 심각한 지경이다.

일단, 원문 레벨은.. 정말 더 말이 필요하지 않다.
루터고 칼빈이고 옛날 종교개혁자 대선배들은 마 5:22가 "누구든지 자기 형제에게 '정당한 이유 없이' 화내는 자"라고 적혀 있는 바른 본문 계열의 성경을 봤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오늘날의 비킹들은 그렇지 않다. 그냥 무조건 화내서는 안 된다고 적혀 있다.

요일 5:7 요한의 콤마 삼위일체 구절도 마찬가지. 비킹이 삭제한 게 아니라 오히려 킹이 후대에 첨가한 거라고 반박하는 분도 있다. 근데.. 이때는 킹뿐만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아예 가톨릭 예수회의 두에 랭스 성서조차도 이 구절이 들어가 있었다. 빼면 뺐지 도대체 누가 언제 왜 뇌피셜을 펼쳐서 첨가를 했다는 말인지..??

킹 유일주의를 반대하고 반박하는 그 어떤 목사, 신학자도 벧전 2:2가 "말씀의 젖을 사모하라, 영적으로 자라려면"이 틀렸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려면"이 사본학적으로(?) 맞다고 자신의 학자적 양심과 손모가지를 걸고 맹세하는 사람..? 난 못 봤다.

이런 것들 말이다. 이건 번역 오역의 문제가 아니라 아예 원문 내용이 변개되고 달라진 사항이다. 다시 말하지만 옛날 칼빈이나 루터나 에라스무스 이런 사람이 번역했거나 봤던 성경이랑, 지금 현대인들 대다수가 보는 성경이 이런 건 서로 같지 않다. 이런 문제에 관해서는 나는 킹 쪽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
말씀 보존 학회가 다른 행실이나 언변에서 제아무리 깽판을 쳤어도 걔네들이 이 주제에 관해서 말하는 건 절대적으로 맞다. 나는 저쪽을 지지한다.

자 여기까지는 한킹 흠정 표킹 어느 진영들도 일치한다. 그러나 그 뒤에 번역을 함에 있어서 영어와 원어의 비중을 서로 어떻게 둘 것인가 하는 것에서 또 예송 논쟁 노론 소론, 탕수육 부먹 찍먹 같은 당파싸움이 벌어져 있다.

내가 예전에도 말했지만, 이 바닥 대안 성경 1호라 할 수 있는 말보회 한킹은 영어 킹을 그대로 곧이곧대로 중역한 성경이 아니라, 영킹과 동일한 원어 대본을 번역하고 영킹을 일부 참고만 한 성경이다. 그래서 여기에 만족하지 못해서 원어 누룩(?)을 좀 뺀 게 흠정역이고, 흠정역보다도 더 과격하게 영어 직역을 추구한 역본이 표준역.. (심지어 도량형까지 마일, 파운드 그대로 썼을 정도로. =_=)

예를 들자면 "영어로 같은 단어이면 우리말로도 (가능한 한 어지간해서는 몽땅) 다 같은 단어로 번역돼야 한다", "it came to pass도 그대로 반영해야 한다", "God forbid는 하나님이 금하신다라는 뜻을 넣어서 번역해야 한다" 이런 거 말이다. 영어 KJV는 영어권 화자에게만 최종 권위인가, 아니면 원어 원문과 대등한 전세계의 최종 권위인가???

사실 성경 원어 원문은 우리 생각 이상으로 꽤 함축적이고 모호성이 많다. 뜬금없이 나오는 it he 대명사가 뭘 가리키는지 애매한 게 많고, 시제가 과거 미래 중 뭔지, 대화 인용이 어디까지이며 어디부터가 내레이터인지.. 알쏭달쏭한 게 많다.
이런 부분에서 한킹은 영킹과 자잘하게 미묘하게 일치하지 않는 게 있다. 그러니까 오역 변개는 분명 아닌데 어쨌든 영킹과는 미묘하게 다른 이게 오로지 영킹 최종 권위 순수주의(!!!) 성향인 분들한테는 성이 안 차는 거다. =_=;;

그럼 원어가 헷갈릴 때는 무조건 영킹대로 번역만 하면 되느냐? 그런데 영어는 또 영어만의 중의성이 있다. 아주 간단한 예를 들자면 전치사. for을 '위하여'라고 할지, '인하여'라고 할지?? of나 in은 또 얼마나 뜻이 다양한가?
제아무리 교리적인 편견 없이 기계적으로 곧이곧대로 번역만 했다고 한들, 교리와 해석을 전혀 가미하지 않고 번역을 옳게 할 수는 없다.

그리고 킹 제임스 영어는 현대 영어와는 뜻이 달라진 것도 여럿 있고, 이럴 때도 번역자의 해석과 취사선택이 필요하다.
제아무리 영킹이 단어 뜻을 스스로 정의하는 내장사전이 있다고 하더라도, 반대로 엄밀한 뜻 구분 없이 단순히 운율이나 패러프레이징 차원에서 비슷한 단어를 일부러 다르게 늘어놓은 것도 있다. slay와 kill, create / form / make 같은 거.

시간과 지면이 부족하고 이 블로그는 킹이나 비킹, 심지어 불신자까지 다 보는 공간이니 내가 내막을 자세하게 다 늘어놓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거 상황이 생각보다 복잡하다. 앗싸리 오로지 영킹 그대로 번역만 할 수 있다면 모든 문제가 진작에 해결됐을 텐데 그것도 아니니 참 문제다.;;

그러니 이 동네에서는 아까처럼 예정이냐 자유의지냐 이런 거 논쟁은 할 필요 없고, 그 대신 비킹 입장에서는 정말 상상도 못 할 희한한 주제를 갖고 논쟁을 벌이는 지경이다.

아 끝으로.. 영킹에 하나님 영감이 또 짠~~ 임했건, 자필원문에 임했던 영감이 번역과 필사 과정에서도 쭉 내려오고 '보존'되어 왔건.. 결과물은 어쨌든 지금 우리말 성경도 영감으로 주어져 있다는 얘기 아니냐?
이거 갖고도 너무 쓸데없이 머리 쥐어뜯고 싸우지는 말자구우~~ 아멘!

Posted by 사무엘

2024/10/30 08:35 2024/10/3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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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5년은 참 공교롭게도 국내의 여러 킹 제임스 진영에서 약속이나 한 듯이 찬송가를 제각각 편찬해 냈던 해였다.

(1) 영광을 주께 2판 (초판은 2002년쯤에) -- 말씀 보존 학회
(2) 마제스티 찬송가 -- 사랑 침례교회
(3) 복음 찬송가 2판 (초판은 2009년쯤에) -- 타 독립 침례교회 진영에서. 2022년인가 23년쯤엔 3판도 나왔음.

이렇게 찬송가를 따로 만드는 이유는.. 기존 통일찬송가/새찬송가 가사가 교리적으로 만족스럽지 않거나 심지어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려고, 주요 신학 용어 구분을 더 엄밀히 하려고, (영 vs 혼, 천국 vs 하나님 왕국 등등) 성경 구절 인용 가사를 자기네 역본에 더 맞추려고~~ 등의 명분 때문이다.

'교리적으로 만족스럽지 않거나 심지어 잘못된 부분'이 뭔지를 물으신다면..
구원의 상실 암시라든가 단순 신세 한탄(...), 직통계시 은사주의라든가 후천년주의 종말론 뉘앙스가 느껴지는 것 말이다.
당연히 "돈으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라든가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 이런 가사는 교리적으로 문제될 게 단 1도 없다. 하지만 찬송가에 그렇게 명확한 가사만 있는 건 아니어서 문제다.

그리고 이런 독립 침례교 쪽 찬송가는 성탄절을 안 지킨다는 특성상, '탄생' 카테고리의 곡이 아주 적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교리적으로 별 영양가가 없으니 저 찬송가들엔 어디에도 실려 있지 않고..
기껏해야 '천사들의 노래가', '하늘에 찬송이 울리던 그 날' 정도만 살아남았다. 그나마도 예배 때 불릴 일은 없다시피하다.

마제스티는 기억이 안 난다만, (1)은 '침례교 찬송가'가 베이스이고, (3)은 기존 통일찬송가(후대에 개정된 새찬송가가 아님)를 베이스로 삼았다. 무엇을 베이스로 삼느냐에 따라 '참 즐거운 노래를'의 조가 Eb 장조 또는 F장조로 달라지고, '그 참혹한 십자가에'가 G장초 또는 Ab 장조로 달라진다.

개인적으로는 퀄리티는 (3) 복음찬송가가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클래식 찬송가뿐만 아니라 20세기 중후반의 복음성가 내지 올드 스타일 CCM까지 다 수록해서 곡이 제일 많다. 나머지 두 찬송가는 4~500곡 수준인 반면, 얘만 1200곡에 달한다. 그리고 그리고 거의 모든 악보에 반주 코드가 꼼꼼히 적혀 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공식 홈페이지가 있어서 악보 조회와 가사 검색이 가능하고, 주요 교회들로부터 수집한 음원까지 제공된다.

왜, 기존 통일찬송가 / 새찬송가만 해도 생존해 있는 편찬위원의 창작곡이 몇 곡 수록돼서 호불호가 갈리곤 한다.
그것처럼 킹 진영 찬송가들도 각 진영별로 자기 진영 목사가 작사· 작곡한 창작곡이 수록된 경우가 있는데..
이런 쪽의 저변도 (3)이 가장 넓다. 유 진선, 구 정민, 임 동선, 박 노찬(대체로 번역)..

(1)은 초판에서는 김 기준, 2판에서는 조 동화(작사만)를 볼 수 있다. 조 동화는 '나 하나 꽃 피어'라는 시로 세상에서도 유명한 그 시인· 교사 겸 목사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건 현재는 저 두 분이 모두 말보회를 떠나 있다는 거. 미래에 영광을 주께 3판이 나온다면 거기서는 조 동화 작사 찬송가까지도 아마 없어져 있을 것이다. 저 동네는 일을 처리하는 게 대체로 저런 식이어서.. -_-;;

(2) 마제스티 찬송가는 자기 진영 창작곡이 수록된 건 딱히 없는 걸로 나는 알고 있다. 그 교회 덩치와 인재풀이면 가까운 미래의 2판, 3판에서는 자체 창작곡이 들어갈지도 모르겠다.
단, (2)에는.. '킹 제임스 바이블 쏭'이라는 노래가 끝에 번역 수록돼 있다.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 내게 읽어 주신 책~~" 이렇게 시작하는 가사 말이다.

참고로, 본인의 여친의 동성 절친..이 저 마제스티 찬송가의 교열에 참여했었다. 음악 계열 전공자인 관계로.. 그래서 머리말/감사의 글에 이름이 실려 있다. ㅎㅎ

만약 우리나라 킹 제임스 진영이 서로 에큐메니컬 운동(!!!!)을 한다면.. 이렇게 창작곡 찬송가 교류부터 하는 게 제일 첫걸음이 아닐까 싶다.
한킹 쓰는 교회에서 상대방 구 정민, 유 진선 곡을 부른다거나, 흠정역 쓰던 교회에서 김 기준· 조 동화 곡을 부른다거나. 교리나 번역 때문에 싸울 일 없고 그것도 음악을 매체로 교류하니까 제일 거부감 없지 않겠는가.

아 물론 이마저도 당장 실현 가능성은 없다.. ^^
시간과 여건, 재정이 된다면 아마 표준역 쓰는 진영에서도 자체 찬송가를 만들 판이고, 말보회에서 기록말살된 목사님들도 자체적으로 찬송가를 만들려 한다. 아주 그냥 춘추전국시대가 따로 없다. ㅠㅠㅠ

* 여담: 찬송가 오마주를 넣은 CCM

한때 우리나라 CCM계에 송 명희와 최 덕신 콤비가 있었고,
19세기 말 미국에 패니 크로스비와 윌리엄 도언 콤비가 있었던 것처럼..
비교적 최근인 20세기 말에는 미국에 Nancy Price와 Don Besig이라는 CCM 작사 작곡자 남녀 콤비가 있었다.

이쪽은 작곡 스타일이 뭔가 진취적이고 웅장하고 감동적이다. 마지막 절에서는 조가 반음 올라가기도 한다.
이분들의 아주 대표적인 작품이 뭐냐 하면 “여기에 모인 우리 -- 이 믿음 더욱 굳세라”이다. 더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따끈한 1990년도 곡이지만 워낙 고퀄이니 개신교 새찬송가에 수록도 됐다. (620장)

저 콤비의 작품 중에 “주님께 감사 기도 드릴 때 / We are yours, Lord”가 있다.
국내에 많이 알려진 것 같지는 않지만.. 이것도 곡과 가사가 아주 훌륭하다.
언제적 작품인지는 인터넷을 도저히 뒤져도 안 나오는데.. 최소한 1990년대나 2000년대 초반으로 추정된다.

형제
When we pray, we will pray with thankful hearts.
When we sing, we will sing with joyful voices.
When we serve, we will serve with willing hands.
For we are Yours, Lord. For we are Yours, Lord.

자매
When we speak, we will speak with loving care.
When we act, we will act with firm conviction
When we give, we will give with boundless joy
For we are Yours, Lord. For we are Yours, Lord. (☞ 음원 링크)


형제 파트는 경배의 태도이고 자매 파트는 행실의 태도인 걸 주목해 보라.
그런데 이렇게 한 파트가 끝나고 나서는 갑자기 분위기가 싹 조용하게 바뀌고 심지어 반주도 잠시 꺼지면서 아카펠라가 나온다. 저 영상에서 1분 45초 이후 지점부터이다.
Within this calm and peaceful place, near to Your heart, O Lord...

근데 얘는.. 알고 보니 Near to the heart of God이라는 1901년인지 1903년도 클래식 찬송가의 오마주이더라~! (☞ 음원 링크)
There is a place of comfort sweet, near to the heart of God
우리나라 개신교 찬송가에는 딱히 소개되지 않은 것 같다. 작사 작곡자는 Cleland B. McAfee라는 사람인데.. 나로서는 일단은 듣보잡(ㅠㅠㅠ)이다.;;

이게 참 신기한 게..
내가 이전에 다녔던 교회의 찬송가(복음찬송가 2판)에서는 We are yours, Lord만 수록돼 있고, 지금 다니는 교회의 찬송가(영광을 주께 1판)에는 Near to the heart of God만 있다.

처음 보는 찬송가 책의 악보를 읽고 있었는데.. 어 이거 낯설지 않고 어디서 봤던 멜로디이다.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전자가 중간에 후자를 오마주해서 넣었다는 걸 알게 됐다. 참 신기하다~! 예전에는 그게 그런 관계인 줄 알지 못했다.

Posted by 사무엘

2024/08/26 08:35 2024/08/26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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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성경 번역 이슈

1. '-시니라'의 시제

한국어 성경은 개역성경의 선례 덕분에 '-느니라, -도다, -소서' 같은 고어체가 여전히 현역이다.
그런데 창 1:1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거는 시제가 현재일까 과거일까?
'하시니라'는 형태· 통사론 상으로는 당연히 현재 시제이다!! '하셨느니라'가 과거이지 '하시니라'가 도대체 어떻게 과거 시제가 되겠는가.

하지만 더 상위의 의미· 화용론 레벨에서는 '하시니라'가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도 모두 포함하는 시제로 오랫동안 구분 없이 뭉뚱그려서 사용돼 왔다.
개역, 한킹, 흠정역 어느 역본도 모든 구절에서 철두철미하게 용언 형태소 차원의 시제 구분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걸 악의적인 변개나 오역이라고 말하기에는 좀 그렇다.
우리말이 단· 복수나 정· 부정관사 구분을 별로 안 하고,
초록과 파랑을 별 구분 없이 '푸르다'라고 표현하고,
"A와 B의 C"만으로 "A의 C" + "B의 C"를 모두 표현한 것과 비슷하게...
그냥 한국어 한국 문화권이 시제를 엄밀하게 따지지 않고 지냈다. 그리고 그게 성경 번역에도 반영됐던 거다.

차라리 현대어 어미를 썼으면 '창조하셨다, 숨을 거두셨다'라고 시제가 더 분명히 구분됐을 텐데, 고어체 어미가 시제 구분이 불분명했던 편이다.
'-함, -음'도 생각해 보자. 엄밀히 따지면 '-했음, -갔음'이라고 써야 과거가 되지만 통상적으로는 일일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학교에 감, 밥을 먹음" 그냥 이렇게 써도 문맥에 따라 과거라고 통용되는 편이다.

그래서 뒤늦게 창 1:1을 "창조하셨느니라"로 바꿔야 된다느니, 기존의 "창조하시니라"만으로 충분하다느니 논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가령, 말보회 한킹의 경우, 처음에는 '시니라'이다가 나중에 '셨느니라'라고 바뀌었다.
흠정역은 6일 창조 이전의 과거의 존재를 부정하는 진영이다 보니 저기 시제는 절대 바꿀 생각이 없는 상태이고. (허나, 요 1:1 하나님이셨느니라 이거는 과거 시제로 개정했음)

영어 문장대로 용언의 현재 과거 시제를 철저하게 해 준 최초이자 현재 유일한 역본은 바로 바로...... 표준역이다.
가령, 요 19:30은 고어체로 번역된 우리말 성경 중에 유일하게 표준역만 '숨을 거두셨더라'이고 딴 역본들은 '거두시니라, 돌아가시니라' 등이다.
그 반면, 2장 가나의 혼인 잔치처럼 영킹이 saith 같은 현재 시제를 쓴 곳에서는 '하시니라'이다.

이거는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말 성경 번역이 점진적으로 자연스럽게 개선돼 나가야 할 점인 것 같다.
마치 요한일서의 beloved를 마치 dear XXX처럼 "사랑하는 자"라고 쓰던 것을 더 엄밀하게 "사랑받는 자"라고 바꾸듯이 말이다.

우리말도 영어 영향을 받아서 100년 전보다는 단· 복수나 능동· 피동 구분을 더 엄밀하게 따지면서 하지 싶다. 그게 마냥 번역투라고 부정적으로만 볼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걸 엄밀하게 따지지 않던 옛날 성경이 악의적인 변개나 오역을 저질렀다고 판단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2. 무엇을/어떻게

의문사 무엇(what)과 어떻게(how)는 지칭하는 영역이 언어 품사 차원에서 다르다. "이건 뭘 표현한 거야?" / "이거 어떻게 만들었어?" 처럼 말이다.
그런데 우리말에는 '어떡하다'라는 굉장히 미묘 므흣한 단어가 있다. 그래서 같은 의문이지만 영어로는 what으로 시작하는 반면, 우리말로는 how에 가까운 뉘앙스로 표현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때가 발생한다.

그래서 성경에서 유명한 행 16:31의 바로 앞 절.. 30절 감옥 간수의 질문을 보자.
개역, 표준, 한킹 같은 우리말 성경들은 모두 "어떡해야 구원받을 수 있죠?"라고 번역되었다.
그러나 한킹 이후에 등장한 킹 계열 역본.. 흠정역 내지 표준역만이 "무엇을 해야 구원받을 수 있죠?"라고 what을 직역했다. 흥미롭지 않은가?

문제나 위기가 생기고 난감한 상황이 됐을 때 한국어 화자에게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은 "이를 어쩌면 좋지? 어떡해야 하지?"이다. "뭘 해야 하지"가 아니다. 예전에 월급값 못 한 여경들이 사회적 물의를 빚었던 '오또캐스트라' 드립을 생각해 보자.
"뭘 해야 하지"는 그건 자기 신변과 무관한 업무를 인계받으면서 "이제 내가 뭘 하면 되지?" "여기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뭐죠?" 아주 객관적으로나 할 만한 말인 거다.

영어는 명사 지향적이고 체언을 꾸미는 관형어가 발달해 있다. 그러나 우리말은 동사 지향적이고 용언을 꾸미는 부사어가 발달해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있다"라고 하지 않고 "사람이 많이 있다"라고 말한다.

이런 정서가 반영되어 영어로는 what(무엇을 명사)으로 표현하는 것을 우리말로는 how(어떻게 동작)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오죽했으면 방문 용건을 묻는 질문조차 "어떻게 오셨습니까?"("무슨 일로"가 아니라)라고 묻는 경우가 있고, 그걸 마 동석이 어느 영화에서 "봉고차 타고. 내비 찍고 왔어"라고 동문서답 개드립을 치지 않았던가.

이게 한국어다. 이것 말고도 영어로는 come인데 우리말로는 정황상 '가다'라고 번역해야 할 때가 있고, 부정의문문의 대답도 대놓고 yes/no의 번역이 갈리곤 한다. ㄲㄲㄲㄲ

3. 챔피언

성경에 나오는 블레셋(필리스틴) 장수 ‘골리앗’은 성경뿐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정말 유명하다. 스타의 테란 메카닉 유닛의 이름으로도 쓰였을 정도이다.
하지만 사무엘상 17장을 읽어보면 성경 기자, 아니 하나님은 골리앗이라는 이름을 언급하는 걸 극도로 꺼리고 있다. 거의 다 ‘그 블레셋 사람’, ‘그 블레셋 사람’ 일색이다. 이 점을 한번 생각해 보자.

이건 의도적인 서사이다.
성경의 진술 방식에서 이름 언급이 매우 중요하다는 건 누가복음 “부자(익명)와 나사로”, 룻기 “보아스와 아무개(익명..)”, 그리고 다니엘서 풀무불 씬에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친구 이름들의 등장 빈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곳곳에 미주알고주알 명단들이 나오는 거다. 하다못해 로마서 16장 안부 인사 대상자 명단처럼 말이다.

그 대신, 성경은 골리앗이.. 그냥 평범한 파이터, 글래디에이터, 워리어 따위가 아니라 ‘챔피언’이었다고 언급한다. 성경에서 유일하게 champion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곳이 삼상 17이다. 우리말로는 대체로 ‘투사’라고 번역됐다.

오늘날이야 챔피언은 무슨 개인 단위 게임이나 스포츠의 전국 단위 우승자, 1등 타이틀 보유자..라는 뜻이 강하다. 바둑 챔피언, 20xx년도 탁구 챔피언.
그래서 “세상에서 너무 챔피언이 되려 애쓸 필요 없다. 성경에서 챔피언은 부정적인 인물인 골리앗에게나 쓰였다” 이렇게 적용하는 경우가 있다.

무슨 뜻인지는 이해하겠다만 그건 “성경에서 그림(pictures)이 민 33:52 같은 부정적인 뜻으로 쓰였으니 각종 영화 산업들도 영적으로 별로 안 좋은 것들이다~ 영화사들도 다 OOO pictures이잖아?” 와 비슷한 급으로 아주 간접적이고 영적인 적용이라 하겠다.

챔피언은 원래는 자기 고용주나 VIP를 대신/대표해서 전투나 결투에 나가서 싸우는 직업 싸움꾼..이란 뜻에서 출발했다. 성경의 용례도 1차적으로는 이거지 싶다.
골리앗 저 시절에 “블레셋 대왕배 특전사 격투기 대회 우승 타이틀”이라든가.. 무슨 태평양 전쟁 일본군마냥 100인 참수 시합 같은 게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무언무언가를 지키고 수호하는 사람한테도 챔피언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다. 그 대상이 굳이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
“친환경 전기차를 운전하는 당신은 환경 챔피언입니다” 이렇게 써도 된다는 것이다. (전기차가 진짜로 완벽하게 친환경인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기아 니로 CF에 나오는 환경전투사 같은..;;
글쎄, 싸이의 노래 가사처럼 음악에 미치면서 인생을 즐기는 건 무슨 챔피언인지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만 말이다.

물론, 지키고 싸우는 게 직업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일반인들보다 더 힘 좋고 체격 좋고 잘 싸울 것이다. 골리앗이라면 더욱 그랬을 것이고. 그래서 우승자라는 의미가 나중에 추가된 것이다.
직업이 챔피언인 사람은 지위 내지 실력도 챔피언일 것이다~~ 이렇게 말이다.

말보회 한킹은 챔피언을 그냥 투사가 아니라 ‘최고 투사’라고 번역했더라. 저런 번역은 한킹이 유일하다. 원래 의미에다가 나중 의미까지 저렇게 넣고 싶었던가 보다. 한킹은 전반적인 번역 스타일이 영킹 직역뿐만 아니라 ‘나중 의미’도 더 살리는 쪽이다 보니.. 일면 수긍이 간다.
또한, testament를 그냥 언약이라고만 옮기기는 아까워서 흠정역이 ‘상속 언약’이라고 번역한 것과 비슷한 워딩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킹은 testament는 그렇게 번역하지 않음)

4. 은과 돈과 재물

행 8:20 말이다. 베드로가 그에게 말하기를 “너는 네 돈과 더불어 망하라. 이는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라.” (행 8:20)
여기서 ‘네 돈’ 부분을 ‘돈’ 대신 ‘은’이라고 번역한 역본이 생각보다 여럿 있다. 당장 개역성경도 그렇고, NASV나 NRSV도 그렇다.

궁금해서 잠시 조사를 해 보니, 이건 원문 변개 이슈는 아니다. 변개된 계보의 성서 중에도 ‘돈’인 역본 또한 많기 때문이다.
같은 헬라어가 문맥에 따라서 은도 되고 돈도 되는 것 같다. 즉, 이건 번역에서의 바리에이션이다.
베드로는 금과 은이 아니라 유독 은과 금이라는 말을 썼는데, (행 3:6, 벧전 1:18) 이때의 은과 저기서의 돈이 같은 단어이다.

우리 한자어에서는 현금, 등록금, 계약금 등.. 금을 돈과 비슷한 뜻으로 많이 사용한다. 하지만 인류 역사를 보면 금에 앞서 은이 먼저 화폐로 널리 통용됐다.
오죽했으면 돈을 보관하는 기관의 이름도 ‘은행’이지 않은가? 그리고 '은전 한 닢'이라는 유명한 수필도 있다. ㄲㄲㄲ

성경에 등장하는 화폐들도 거의 다 은화이다.
주님의 몸값부터 시작해서 요셉의 몸값, 사도행전 19장에서 불태운 주술 서적의 가격.. 은이다.
서양의 로마 제국뿐만 아니라 동양의 중국도 이런 은본위제 국가로 유명했으며, 아편 전쟁 당시에도 은이 거래됐었다.

‘네 돈’ 말고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할 때의 ‘돈’은 앞의 돈/은과는 다른 헬라어이다. 용어 몇 개를 찾아보니 이건 보편적인 ‘부, 재물’과 비슷한 맥락으로서 돈을 의미하는 것 같다.

베드로는 사도행전과 베드로전서에서 하나님의 선물은 한낱 은이나 금과 견줄 바가 아니라는 요지의 말을 여러 번 했었다. 아무쪼록, 우리 같은 헬알못(?) 일반인은 은이니 돈이니 재물이니 이런 게 알쏭달쏭하면 우리의 모국어, 아니면 최소한 영어로 알아들을 수 있는 최종 권위인 킹 제임스 성경이 규정해 준 원어의 뜻을 따르면 될 것이다.

하긴, 신약뿐만 아니라 구약의 시편 8편에서 “인간을 천사보다 약간 낮게 하시고”에 '천사'가 히브리어로 그냥 엘로힘.. 하나님/신들과 같은 단어라고 한다. 돈/은과 비슷한 관계인 것 같다.
같은 단어가 하나님, 신, 천사 모두 가능하다니 너무하지 않은가? =_=;; 하지만 이건 문맥상 하나님일 리가 없고, 신약 히브리서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도 헬라어로 천사라는 단어가 들어갔다고 들었다. 저기서의 의미는 당연히 천사가 돼야 할 것이다.

5. 맺음말

여러 주제의 얘기가 많이 나왔는데 이제 글을 맺고자 한다.
성경 읽을 때는 여건이 허락한다면 다양한 번역본을 참고하면서 다양한 의미와 다양한 관점을 학술적으로 섭렵해서 나쁠 건 없다.
그러나 그런 면모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닥치고 익숙한 단일 모국어 역본만 철썩같이 반복해서 읽으면서 골수에 새겨서 "암송"하고, 일상생활에서 곧장 그 말씀이 떠오르게 하는 거.

이 둘에 대한 균형을 맞춰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둘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으면 전자보다는 후자를 더 우선시해야 할 것이다.

진리는 기본적으로 형태가 단순하다. 성경의 하나님은 헛똑똑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지적사기 말장난 기만을 싫어한다.
이솝 우화던가? 당장 고양이가 쫓아오는데, 똑똑한 쥐는 탈출하는 방법 100가지 중에서 뭐가 지금 가장 효율적일지 짱구 굴리면서 고민만 하다가 고양이에게 잡아먹혔다.
그러나 닥치고 달리기인지 개헤엄인지 방법을 하나밖에 모르던 평범한(?) 쥐는 자기가 아는 방법 하나만 X나 무식하게 밀어붙여서 살아남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저것 잡다하게 아는 건 많은데 지혜가 없고 분별력이 없고, 어느 게 나에게 당장 필요한 진리인지를 모르는 건 영적으로 바람직하게 성장한 상태가 아니다.
전자가 오히려 혼동을 야기하면서 후자의 활동에 해를 끼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으니까 절대적으로 옳은 건 없다~~ 세상에 100%라는 건 없다" 이건 유한한 자원에서 최대의 가성비를 찾는 공학 같은 세상 학문에서나 통용되는 특징이다.
그 반면, 성경을 대하는 태도는 "나의 최종 권위는 이건데 그래도 추가로 참고적으로 요렇게도 볼 수 있다, 옛날 사람들은 저렇게도 생각하긴 했다" 이렇게 중심 절대값부터 잡고 나서 부가설명 액세서리를 참고하는 형태가 돼야 할 것이다. 교리에 대한 문자적 해석부터 한 다음에 영적 교훈을 넓고 다양하게 적용하듯이 말이다.

성경 말씀이나 찬송가 가사 같은 건 책을 보고 있지 않아도, 폰을 들여다보고 있지 않아도 일상생활 중에 튀어나오고 흥얼거릴 수 있어야 한다.
찬송가라고 해서 맨날 군가 아니면 중세 장송곡 같은 식상한 멜로디여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거 뭐 악보를 읽기도 어려울 정도로 정도로 박자가 너무 복잡한 2000년대 이후 CCM은..;; 과연 어렵고 힘들 때나 성령 충만할 때 누구나 쉽게 떠올려서 그대로 부를 수 있을까? 세월을 안 타고 모든 성도들이 부르는 불후의 명곡이 될 수 있을까?

그것처럼 그 좋은 영어 성경도 말이다. 영어 성경에 Believe in the Lord Jesus Christ, Rejoice in the Lord 같은 쉬운 문구만 있는 게 아니다. 성막이나 성전 설명을 영킹으로 바로 읽고 알아듣고 머리에 외울 수 있겠는가?
영어 영어 하다가 자기한테 본질적인 걸 놓치지도 말아야 하리라 생각된다.

Posted by 사무엘

2024/08/23 08:35 2024/08/23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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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보회 한킹

말씀 보존 학회는 우리나라에서 바른 본문에서 번역된 성경이라는 걸 최초로, 가장 먼저 개척했다. 그래서 그런지 한킹이라는 성경도 면류관, 천국, 예수님 대신 예수, 길 대신 도(사도행전) 등 옛날 성경 용어가 남아 있어 좀 정겨운(?) 느낌이 든다.

얘들은 한킹을 다른 교회· 교단들에다가 전파하는 것보다는 독자적인 교회· 교단을 개척하려는 성향이 더 강했다.
모바일 생태계에다 비유하자면 애플의 맥이나 아이폰이 완전히 자기네 하드웨어+소프트웨어 일체형인 걸 생각해 보시라. 이 송오 목사는..

  • 성경침례교라는 아이폰을 만들었고,
  • 그 하드웨어에서 돌릴 한킹이라는 iOS의 개발을 주도했다.
  • 그 뒤 그는 말씀 보존 학회라는 앱스토어를 만들었고,
  • 이를 토대로 세대적 진리, 럭크만 주석서 같은 다양한 앱을 출시했다.
  • 이런 조직과 교회, 성경, 서적을 통해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이라는 여러 앱등이들을 양성했다.

이런 식이다.
스티브 잡스는 사업가로서는 혁신적이었지만 사석에서나 직장 상사로서는 X나 X랄맞은 인성과 싸가지를 자랑했다고 한다. 이 송오 목사도 이런 쪽으로 아주 악명높았었다.

쟤들은 자기 조직, 자기 교리 노선, 성경, 교회를 완전히 통합 일체형으로 본다. 사고방식이랄까 포교 전략이 저렇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저렇게도 독단적으로 구는 거다.

그래서 심지어 30여 년 전엔 자기들(만)이 대한민국 최초의 진정한 성경적인 신약 교회라는 드립을 쳤던 건 유명한 일화이고, 반대급부로 자기 교회에 있다가 나간 사람을 배교자라고 그렇게도 욕을 해댔다.
진짜로 순수하게 진리를 전하다가 부당한 박해와 배척 받는 거랑 그냥 혈기 깽판 부리다가 간증 잃고 욕 쳐먹는 걸 구분을 못 하고.. 심지어 탈퇴자한테는 자기네 성경을 쓰지 말라는 어이 안드로메다 급의 미친 소리까지 했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게 진짜 중요한 사항인데..
한킹은 킹 제임스라는 영어 성경을 중역했기 때문에 '킹'이라는 명칭이 붙은 게 아니다.

400년 전 잉글랜드 사람들이 킹 제임스 성경을 번역할 때 쓰였던 그 바른 원어 원문(TR 공인 본문, 정통 맛소라)을 갖고,
마치 영킹을 만들듯이 우리말 성경을 만들었다..!! 도착어만 다르지 출발 원문이 영킹의 그것과 같다는 뜻에서 '한킹'인 것이다. ㄲㄲㄲㄲㄲㄲ

어, 써 놓고 보니 약간 진화론 얘기 같네..??
현대 진화론에서는 인간(한킹)이 원숭이(영킹)로부터 진화(번역)한 게 아니라..
인간과 원숭이가 같은 공통조상(히브리 헬라 원어)으로부터 진화했다고 말하니까 말이다! 딱 그 모양새이다!!!

한킹은 신약은 TR 원어 원문 기반(시민권)에다가 영킹 용어(이스터, 순교자 등)를 참고해서 만들어졌고,
오히려 구약이 영킹 중역(로뎀나무가 아니라 향나무)에다가 맛소라 히브리어 본문 용어(음부, 아세라)를 참고해서 만들어졌다.
후대의 그 어떤 성경도 채택하지 않은 특이한 하이브리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_=;;

일각에서 모함하는 것처럼 "한킹은 킹 제임스 성경이 아예 아니다"는 당연히 아니다. 단지, 성서 초등학교 애들을 도롱뇽 소년이 아니라 개구리 소년이라고 불러도 문제 없는 거, 구치소 얘기이지만 교도소 일기라고 웹툰 제목을 붙인 거,
그리고 복음 전할 때 예수 안 믿으면 불못이 아니라 지옥 간다고 말하는 거(정작 영원히 있게 되는 곳은 불못인데)..

이런 관계일 뿐이다. 별개가 아니고 어차피 그게 그것인 관계이기 때문에 좀 더 인지도 높고 대중적인 명칭을 썼을 뿐이다. 차이라고 해 봐야 영킹이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을 묘사했다면, 한킹은 그게 결국 이런 뜻이라는 식으로 표현한 정도가 대부분이다. (자유-생활방식 → 시민권, 긴장하다 → 거르다, 작은숲 → 아세라)

1980년대에 이 송오 목사가 TR을 기반으로 코리언 성경 번역을 시작했다는 건 그 당시 미국의 KJV 옹호 진영에서도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피터 럭크만 같은 강성 영킹 유일주의자도 그에 대해서 "당신 왜 영킹에서 성경을 번역하지 않아?" 같은 문제 제기는 하지 않았다.
말보회 교회를 직접 다니는 사람들조차도 자기 교회 조직이나 성경책에 대해서 이렇게 애플에, 진화론에, 개구리 소년 비유까지 동원하면서 진지하게 깊이 고찰해 본 적은 아마 없을 것이다. -_-;;;;;

2. 표준역

표준역은 2020년대에 정말 젊은(나보다도 어린..!) 신학도가 과감한 영킹 중역을 표방하면서 편찬한 성경 역본이다.
우선 칭찬부터 하고 시작하자. 몇몇 일부 단어나 표현은 참신한 시도이거나 잘 번역한 것 있다.

- (가령, seek와 find를 찾다/발견하다 라고 구분해 준 것, win을 쟁취라고 시도한 것,
행 5:30을 단순히 "나무에 매달아 죽인"이 아니라 "죽여서 나무에 매단"이라고 옮긴 것.. 이런 건 잘한 거다.)
기존 타킹 쓰는 진영에서는 표킹의 이런 면모까지 다 무시하면서 밟아버리려는 듯이 감정적으로 비하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 영킹 직역이라지만 일부 표현은 말보회 한킹의 번역을 따른 게 있다. grave, walk 등.. 단지 원어를 참조한 게 아니라 영어에도 그런 뜻 있다고 웹스터 사전을 들이댈 뿐.

- 그러나 몇몇 접속사나 관사 복수형을 일일이 다 살려서 넣은 건 무리수이다. 영어의 모든 관사가 정확하게 수효를 한정짓는 용도로 쓰이는 게 아니다. 그냥 다음에 오는 단어가 형용사나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라는 것만 명시하는 용도로 습관적으로 붙는 것도 있으며, 그런 건 한국어로 옮길 때 굳이 번역하지 않는 게 정상적인 번역이다!
저런 번역 스타일만으로도 논란이 되는데 하물며 그렇게 하지 않은 타 역본을 변개 삭제라고 까는 거는.. 무리수를 넘어 누워서 침 뱉는 자충수이다.

- 같은 뜻인데 단순히 영문학상 패러프레이징 하느라 유의어를 동원한 것을 굳이 우리말로 무리해서 다 다르게 쓸 필요는 없어 보인다. (가령 행10의 kill '잡아먹다'과 11의 slay '도살하여 먹다')

- '비둘기 그녀, 지혜 그녀'는 좀 다시 생각했으면..? 영킹은 솔로몬의 재판에 나오는 아기도 it이라고 가리키는 부분이 있다. 표킹도 아기를 '그것'이라고 옮기지는 않았더구만? 영어 대명사랑 우리말 직역이 어차피 대응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 마케팅 방식이 적절치 못했다. 그렇게도 영킹 직역 성경을 내고 싶었으면 차이점만 나열하고 자기 것이 뭐가 좋은지만 얘기를 하면 됐는데 무슨 타킹들이 변개하고 삭제했다는 소리는 그 뒤로 욕을 십자포화로 얻어먹어도 실드를 칠 수 없다.
누가 정말 순수한 의도로 정당하게 성경 번역 새로 해도 기득권들로부터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욕 먹고 비방 당할 수는 있다. 하지만 저거는 부당한 욕이 아니라 욕먹어도 싼 짓을 해서 욕먹는 거다.

- 영어 본문을 갖고 검증되지 않은 이상한 썰을 풀면서 어그로 끌었던 것도 이 바닥의 금도의 도를 어긴 거다. 일부 목사님들로부터 미운털 단단히 박힌 꼴이 됐다.

그러니 표킹에 대한 내 생각을 세 줄로 요약하면

  • 일부 영킹대로 잘 캐치하고 잘 번역한 표현
  • 좀 논란의 여지가 있는 번역 스타일
  • 적절하지 못했던 마케팅

정도다.
참조용으로 고려할 만은 하다. 나도 처음엔 '다시 채우라'와 '하나님이 자신을 어린양으로', '예언'이 모두 살아 있고 it came to pass를 다 번역했다고 해서 아주 긍정적으로 봤으나.. 밝은 면뿐만 아니라 어두운 면도 아직은 무시 못 할 지경인 것 같다. 일부 장점이 아니라 성경의 전반적인 번역 퀄리티나 저 진영의 인성의 퀄리티가 아직 검증이 덜 된 것 같다. 더 지켜봐야지.

"이제야 우리 민족에게 참다운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다 앗싸!" 이렇게 샴페인을 터뜨릴 수 있을지는.. 글쎄? 표킹 쓰고 싶거들랑, 한참 더 교열 보고 다듬는 일에 동참할 의향이 있는 사람만 그 진영으로 가는 게 좋을 거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 성경으로 예배드리고 싶거들랑 혼자 조용히 교회 옮기면 된다. 기존 교회 목사를 비방하고 딴 초신자들 꼬드겨서 우르르 나가고 분탕질 치지는 마시라. 그건 무식하고 덕이 되지 않는 짓일 것이다.

3. 흠정역 (+ 근본역)

그리고 그 이름도 유명한 '흠정역'은 한킹의 뒤를 이은 2인자로 시작했지만.. 말보회의 삽질 뻘짓으로 인한 반사 이익을 받으면서 지난 20년 동안 점유율을 꾸준히 올려 왔다. 안티오크 권위역의 용어와 번역 이념을 많이 계승한 한편으로, 영킹의 표현을 말보회 한킹보다 더 많이 반영했다.

말보회가 애플이면 흠정역은 기기의 제조사가 다양한 안드로이드 진영이기라도 한 걸까? 흠정역 진영은 성향도 더 개방적이었다. 교리 노선이 번역자와 다른 기성 개신교회나 독립 교회들에게 자기 성경을 널리 보급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그 대신 흠정역 쓰는 교회들은 영어와 원어 사이의 관념부터 시작해서 세부 교리의 파편화가 말보회 계열보다 더 큰 편이다.

그래서 흠정역 진영이 한킹 진영을 완전히 대체했느냐 하면.. 안타깝게도 그리 되지 못했다. 이쪽도 단점과 한계가 있고, 공과 과가 모두 생겼다.
세월이 흐르고 세력이 커지면서 성경 번역자 개인이 분별력이 흐려지고 흑화하는 건 이쪽이나 저쪽이나 방식만 다를 뿐 절대값은 별 차이 없었다. 허나, 말보회 쪽은 교리 노선이 확고하고 탄탄해서 성경과 성경 번역자를 완벽하게 분리해서 판단할 수 있는 반면, 흠정역 쪽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흠정역은 번역자의 독특 내지 이상한 신념이 들어가서 성경에 예언이라는 단어가 전혀 없다. 그리고 창조과학회 영향을 받아서 세대적 진리에서 간극 재창조는 별 이상한 근거를 들면서 거부하는 등 교리 노선이 예전부터 많이 삐그덕거렸다.
10년 전에는 "원어로 너스레 떠는 목사 격퇴하기" 하면서 영킹을 강조하다가 지금은 원어 의존도가 훨씬 늘었다.
10년 전에는 "바른 성경을 믿어서 이단 소리 들으니 얼마나 영광입니까?" 하다가 지금은 "우리는 이단 아니다. 성경 선택권을 보장하라"...;;;

차라리 한 교리 노선에 일관되게 단호박이면서 탈퇴자 뒷담화만 거하게 하던 원래 동네가 더 나아 보일 지경이다.
이 와중에 최신 마제스티판은 딤전 6:5 '이익이 경건'을 이상하게 고쳐서 이전 판보다 개악되었고, 이것 때문에 학을 떼는 사람과 이것도 별 상관없다고 실드 치는 사람이 갈라져서 싸우는 촌극이 벌어졌다.

말보회에서는 지금도 흠정역이 짝퉁 가짜 성서라면서 비방 험담하느라 여념이 없다. 근데 쟤들은 상대방의 동태에 대해 공부를 하긴 할까? 욕할 거면 진짜로 물어뜯기 좋은 이런 아이템을 갖고 물고 늘어져야지, 책 제목 같은 별 쓰잘데기없는 걸 갖고 참 수준 낮게 트집 잡고 제 얼굴에 침 뱉더라.

그 와중에.. 2020년대에 근본역이라는 게 성서 침례교회 진영에서 만들어져 나왔다. 이건 예언 같은 몇몇 단어만 빼면 흠정역과 아주 비슷하다.
다만 판이 올라갈 때마다 정오표를 만들어서 수정 내역을 정직하게 공개해 주고(!!!!), 개인이 아니라 위원회 명목으로 판권 없이 오픈소스 정신을 반영해서 출간하고.. 딱 3판까지만 만들고 영원히 관두겠다는 선언까지 했다. 번역보다는 번역 방식 면에서 참신한 시도를 한 것 같다.

이상이다.
이 2020년대 대한민국 땅의 킹 제임스 성경 진영은.. 왕짜가 들어간 성경을 쓴다면서 정작 왕이 없는 판관기(사사기) 말기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어느 한 진영이 다른 진영을 완전히 압도하고 대체· 흡수하지 못하고 전부 찢어져서 각자도생 중이다. 다양한 번역본들이 서로 장점을 합쳐서 하나로 수렴을 못 하고 혼란만 더 커지고 있다.

생각 같아서는 각 진영의 번역자들을 골방에다 몇 달 가둬 놓고 한킹의 교리 체계에다가 흠정역 정도의 문장 구성, 거기에다 표준역의 일부 잘 캐치한 표현들을 집어넣어서 단일 역본을 좀 만들었으면 좋겠다만.. 그런 기적적인 통합이 성사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없다. -_-;; 애초에 정교분리 세속 국가에 제임스 왕 같은 중재자도 있을 리 없으니까.

어느 거 하나도 선뜻 못 고르겠으니 "역시 영킹을 직접 보는 수밖에 없군.." 이것도 정답이 될 수 없다. 아주 짧고 단순한 구절이야 영어가 임팩트 있을 수 있겠지만, 당신은 엄청 길고 복잡하고 꼬인 영킹 구절도 술술 읽고 암기할 수 있겠는가? =_=;;

이 와중에 "이거는 이 번역이 맞고, 저거는 저 번역이 맞는 거 같다" 식으로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입맛대로 판단하는 교만이나 지적사기는 정말 위험한 짓이다. 내가 저런 짓을 하기 싫어서 킹 진영으로 왔는데, 한국어 한정으로는 그 진영 안에서도 똑같은 짓을 하게 됐구나. -_-;;

본인은 오랫동안 흠정역을 쓰는 교회를 다니다가 모종의 이유로 인해 교회를 옮길 일이 생겼다. 이 참에 예언이 있고 "하나님 자신을 어린양으로"(창 22:8)가 있는 성경을 쓰고 싶어서 진영을 옮겨 봤다. 유의미한 단점이란 게 "영어가 아닌 TR 번역이다"밖에 없다면.. 그게 뭐 어때서? 영어와 TR의 차이점에 대해서 판단을 보류하고 공부 중이다.
이래저래 우리나라는 대한 성서공회만이 성경 번역을 독점하는 동네가 결코 아니게 됐다. 지금으로부터 20년, 30년 뒤엔 3rd-party 성경의 점유율이 어떻게 달라져 있을지? 참 궁금해진다.

Posted by 사무엘

2024/07/30 08:35 2024/07/30 08:35

이 블로그 구독자라면 이미 다 아시겠지만.. 본인은 어린 시절부터 예수 믿고 구원의 확신을 얻고 교회 생활을 오래 해 온 크리스천, 예수쟁이이다. 그래서 블로그에다가도 성경 관련, 기독교 교리 관련 글을 지금까지 엄청 많이 써 왔다.
장기적으로는(한 10년 안?).. 그 글 내용들 일부를 정제하고 분야별로 나눠서--구원 복음, 성경 난제, 신앙 생활, 성경 번역 등등등-- 유튜브를 한다든지, 아니면 종이책을 출간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뭐, 이것도 마치 컴퓨터 분야에서 github 계정 파는 것처럼 그냥 구상만 하는 거고 적극적으로 실행까지는 아닌 상태이다. 현실적으로는 직장이나 한글 입력기 개발이 더 급해서 말이다.;;

본인은 20여 년 전 대학 시절에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 진영에 입문함으로써 신앙 노선이 크게 바뀌었다. 대외 이미지가 좋지만은 않고 이단 편견도 많은 곳을 굳이 선택한 것엔 다 이유가 있었다.
다들 예전에 한번씩 했던 말 같지만, 지금은 바야흐로 말씀 보존 학회 한글 킹 제임스 성경이 초판 발간된 지도 벌써 30주년=_=이 임박했다. 그거 기념으로 한번 더 개념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사실, 본인은 신앙 노선이 바뀌었다거나 달라졌다는 말도 좀 어폐가 있다고 생각한다. KJV 진영으로 오면서.. 원래 막연하게 믿던 것들이.. 자연스럽게 "확장"되고 강화된 것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 둘은 대립 관계가 아니다!

  • 행위가 아닌 믿음만으로 구원이라고 말은 하는데, 그 구원이 영원히 보장되는 건지.. 죄 짓고 회개 안 하면 도로 취소되는 건지는 긴가민가했다. ==>> 당연히 영원히 보장되는 것이고, 죄 짓고 회개가 없으면 보상 등 딴 걸 잔뜩 잃는다고 알게 됐다.
  • 성경 말씀은 완전하고 무오류하다고 배웠지만.. 최초의 자필원본만 그렇다고 들었다.. ==>> 그렇지 않고 번역과 보존도 완벽하게 무오류하며, 그 실체가 지금 이 시간에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건 맞는데 창세기 1장의 6일이나 계시록의 1천 년은 많이 애매했다. ==>> 문자적 해석과 영적 적용의 관계를 명확하게 깨우쳤다.
  • 신약 시대 은혜의 복음에 대해 배웠다. ==>> 응 그건 당연한 건데, 대환란 때는 왕국복음이 등장하고 영원한 복음이라는 것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 아기는 병이나 사고로 죽으면 무조건 다 구원받는다. 유아세례 안 받아도 된다. 그 대신 살아 있는 동안은 부모가 꼭 의로 양육해야 된다. 체벌은 악을 훈계하고 바로잡는 용도로는 필요하다.

이런 식이다.

한편으로는 믿음만으로 구원이라고 배웠지만 "자살하면 구원 상실인가?", "끝까지 신실하지 않으면 대환란 때 남겨지나? 666 안 받으려고 버텨야 되나?" 갖고 고민하던 거.
성경 역시 여느 고문서와 다름없으니 현대의 학자들이 옛날 텍스트와 의미를 새로 복원해 줘야 하냐고 생각했던 거.
어린아기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뭐는 자유의지이고 뭐는 예정인지 이런 간단한 문제들에 대한 답도 모르고 있다가 속 시원하게 논리적으로 해결됐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해 준 진영을 선택한 것이다.

킹진영이건 기성 교회건 같은 하나님, 같은 예수를 믿는 게 아닌가? 원래는 성경도 같은 성경을 보지 않는가?
그런데 세부 방법론이 다르다고 서로 이 정도로 적대하고 이단시하고 대립해야 한다는 게 솔직히 이해가 잘 안 된다.

예수 말고 다른 구원의 길이 절대 없다고 말하는 배타적인 종교(?)가 있다면 그렇게 "예수 말고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고 쓰여 있는 경전, 말씀도 당연히 하나만 맞지 이와 일치하지 않는 건 다 잘못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너무 당연한 소리이지 않은가?

"예수..?? 응 훌륭한 사대성인 도덕 선생이지. 근데 예수만 믿어야 구원이라고? 그건 사이비 광신이지~"와
"킹 제임스 성경..?? 응 훌륭한 영문학 고전이지. 근데 성경 번역이 그것만 맞다고? (통상적인 이역 수준은 논외) 그 본문 계보만 맞다고? 그건 이단이지~"가
내가 보기엔 둘 다 거의 같은 영, 같은 분별에서 유래됐다.

"기존 개역성경(개역개정)은 사탄 마귀에 의해 변개되고 부패된 성경이다"
이 말은 매우 극단적이고 사람 감정을 상하게 하기 좋다. 개역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구원받고 신앙생활 하고 있는 사람도 많은데 누가 감히 저런 무엄한 말을 입 밖에 낼 수 있겠는가?

저 말은 "제아무리 구원받은 크리스천이라도 육신 모드가 극에 당해서 마귀 들린 듯이 깽판칠 수 있고, 마귀에게 실컷 쓰임받을 수 있다"와 같은 격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개역성경에도 변개되지 않은 말씀이 많이 있고 그거 읽고 구원받은 사람이 있는 것과 별개로..
소량의 변개 삭제된 부분은 누가 뭐래도 마귀 영향을 받은 게 맞다. 그게 불편한 진실이다.

사람이 무인도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야 벌레나 풀뿌리라도 먹어야겠지만.. 멀쩡히 좋은 음식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일부러 그런 저질 단백질 공급원을 찾아 먹을 필요는 추호도 없다.
마트에서 물건 하나를 사도 하자나 결함이 전혀 없고, 남이 만진 흔적이 없는 깔끔한 걸 고르려 애쓴다.

맛집 찾아가서 밥 먹는데 음식에 머리카락이 한 가닥이라도 나왔다? 어디 곰팡이 슬고 상한 부위가 있다? 그러면 찝찝해서 그 음식은 통째로 교환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무시하고 그냥 먹어도 어지간해서는 탈 날 일 없더라도 말이다.
당신에게 성경이 정말 귀중하고 사랑스러운 책이라면 성경 역본을 고를 때도 이런 잣대가 자연스럽게 적용될 것이다! 아멘~

KJV 유일주의를 반박하고 빠져나가는 논리는 대부분이 "그건 후대에 첨가된 거고 원본에 없던 구절이다", "여기에는 빠졌어도 다른 책에는 있어서 괜찮다(마태-마가, 에베소서-골로새서 따위)", "오히려 KJV의 오역이다" 이런 식이다.
하지만 나는 그 어떤 반대자도.. 말이 완전히 다른 벧전 2:2 구절이 KJV가 틀렸고 다른 현대 역본들이 맞다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걸 지난 20년 동안 본 적 없다. 약 5:16의 '잘못/허물'이 틀렸고 변개됐고 '죄'가 맞다고 양심을 걸고 당당하게 얘기하는 사람도 본 적 없다.

그 발달된 성서고고학 사본학과 헬라어 원어 지식으로 나온 결과물이 고작 그거라면.. 미안한데 나는 그게 맞는 하나님 말씀이라고는 동의 못 하겠다. KJV 유일주의 소신을 버릴 생각이 없다. 내가 수학이나 과학 등 다른 학문에서는 인간의 지성을 동원한 논리와 합리주의, 과학적 방법론을 다 존중하지만, 이 바닥만은 쪼금 다른 잣대를 적용한다. 애초에 종교나 신학은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와 진영논리"가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동네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원본 원문이 없지만 온전히 번역되고 보존된 필사본이 original과 동급이다. 행정에서 말하는 '원본대조필' 도장이 찍힌 거나 마찬가지다.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안 그럴 거면 진짜로 하나님이 지옥을 전하기 위해서 지옥 구경을 진짜로 하고 온 사람을 살려 보내셔야 할 것이고, 성경 시대의 헬라어 히브리어를 구사하던 사람을 살려 보내서 뜻풀이를 시켜 주셔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하시지 않고 후세를 모두 기록된 말씀을 통한 간접 체험만으로 충분하다고 처분하셨다. 오히려 "예수님의 변화산 변모 목격보다도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 "보지 않고 믿은 자들은 복되다"라고 인증까지 해 주셨다. 그 약속은 성경의 온전한 보장을 당연히 전제로 깔아야만 성립 가능하다. 이런 원리를 알면 특정 성경 번역본만 우상화.. 이런 무식하고 민망하고 저열한 소리는 할래야 할 수 없을 것이다~!

아 물론 KJV와 타 성경들은 거시적으로는 일치하지 않는 구절보다 일치하는 구절이 훨씬 더 많다. KJV 진영 교회라고 해서 24시간 365일 내내 '변개된 구절 차이점'만 파고 있는 게 아니다.
그런 일상적인 교리 쪽에서 KJV 계열 교회가 기존 개신교회와 큰 차이를 보이는 건 앞서 말했던 것처럼 성경 해석 방식이라든가 교회사· 경륜에 관한 인식이다.

(1) 개신교 쪽에서는 기독교가 로마 제국으로부터 공인받은 게 기독교가 세상을 상대로 큰 승리를 쟁취한 거라고 생각한다. 교인들이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세상 요직에 진출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킹 진영의 관점은 다르다. 세상적인 성공은 자기가 재능과 노력을 다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성공하면 하는 거고, 그 자체가 교회의 세력이나 개인의 영적 성장과는 별개라고 여긴다. 박해보다도 왜곡과 변질, 배도, 순수성 상실이 기독교계에 훨씬 더 해로운 현상이라고 분명하게 인지한다.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은 당장은 기독교 박해를 멈추게 했지만 의도가 순수하지 않았으며, 그 뒤로 훨씬 더 큰 비극을 불렀다고 본다. 그냥 일제 시대 문화 통치의 로마 제국 버전이나 마찬가지이다.

(2) 종교 개혁자들을 좋아하는 개신교 쪽에서는 에라스무스, 칼빈 같은 그 선조들이 성경 본문의 편찬과 성경 번역에도 신경 썼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가 보다. 그렇게도 제네바, 제네바 그러는데 KJV의 전신인 제네바 성경은 모름..;; 그래서 일각에서는 이 점을 특별히 공략해서 개신교들을 대상으로 킹 제임스 성경을 전하기도 한다.

(3) 이 킹 제임스 진영은 대체로 '온건한 세대주의' 성향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이나 침례나 구원이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서 다 똑같지는 않다고 본다. 계시록 예언은 대부분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고, 예수님 재림 때 이뤄진다면 철저하게 문자적으로 그대로 이뤄진다고 본다. 함부로 비유나 묵시 따위로 치부하지 않는다. 과거에 이미 이뤄진 예언들 사례를 보니 아주 문자적으로 이뤄졌었기 때문에 그렇다.
이게 건전한 관점 아닌가..?? 도대체 왜 세대주의가 막연하게 이단 프레임을 뒤집어쓰고 있는지..? 종말 자체는 있지만 당연히 특정 날짜 정해 놓고 깽판 치는 시한부 종말론이 절대 아니다.

아무쪼록 나는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내 양심에 따라 정확하게 전하기는 하고서 거절 거부 당하거나 이단 소리 듣는 것에는 아무 두려움이 없다.
시한부 종말론, 구약 무용론을 주장하기 때문에 이단이 아니라 문자적인 예수님 재림과 천년왕국 통치를 믿기 때문에 이단.
자기네 성경 안 보면 구원 못 받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13구절이 삭제됐고 6만여 단어가 변개됐다고 팩트폭격을 하기 때문에 이단.

이러면 진짜로 예수님이나 바울이 이단 소리 들었던 것과 똑같은 취급이고, 하늘나라 보험에서 보상 사유이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것보다 더 합리적이고 건전하게 성경 교리를 풀어 주는 신학 노선이 있다면 나도 들어는 보고 싶다.

※ 여담: 이단 중의 이단 안식교

아니 무슨,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도 안식교에서 유래됐고.

"벤자민 G. 윌킨슨(1872-1968)은 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선교사이자 제7일안식일워싱턴재림대학교 신학부 학장이었다. 킹제임스성경의 유일주의는 윌킨슨이 1930년에 출간한 『입증된 우리의 흠정역 성경』이란 제목의 책으로부터 비롯되었다. … 그는 시편 12:6~7을 잘못 적용하여, 그 말씀이 마치 킹제임스성경 보존에 대한 약속인 것처럼 주장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정작 윌킨슨이 KJV를 지키려 했던 이유는 1881년 개정된 성경RV이 KJV보다 자신이 믿고 지지하고 있는 안식교 교리에 불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 권 동우, 『킹제임스 성경 유일주의의 망상』(CLC, 2016), pp. 41-42


젊은 지구 창조론/창조과학도 안식교에서 유래됐다니..

1938년 제7일 안식교인인 조지 맥크리디 프라이스(1870-1963)가 홍수 지질학을 주장하며 홍수 지질학회(Deluge Geology Society)를 설립한 것이 근대 창조설의 시초가 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사이비 과학적인 설명을 더해 만들어진 것이 현재의 젊은 지구 창조설, 혹은 창조과학이다.
-- 로널드 L. 넘버스, 『창조론자들』(2016). 새물결플러스, pp. 295


만만하면 다 호구 안식교 탓이냐..?? 1930년대에 안식교라는 곳은 아주 대단한 곳이었구나. -_-;; ㄲㄲㄲㄲㄲㄲㄲ
내가 확실하게 아는 건 '론 와이어트'(1933-1999)라는 아마추어 성서고고학자인지 아니면 사기꾼인지.. 논란 많은 이 아저씨가 안식교인이었다는 것이다.

노아의 방주 흔적은 말할 것도 없고, 홍해 밑바닥을 탐사해서 모세 시절의 병거 바퀴를 발견하고 심지어 골고다 언덕에서 부계 염색체가 없이 모계 염색체만 있는 예수의 진짜 혈흔을 발견했다고 주장한 사람 말이다. =_=;; 물론 이건 안식교의 공식 입장은 아니다.

사실, 내가 알기로 정작 안식교는 크리스천도 안식일 지켜야 된다는 요지의 이상한 소리 하는 것 말고 다른 건 별로 이단기가 없다. 교리 측면에서만 이단일 뿐,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는 것도 없다고 들었다.
하물며 성경 말씀이 번역 과정에서도 온전히 보존되었고 그 실체가 지금까지 있다고 믿는 것, 문자적인 6일 창조를 믿는 것 그 자체는 아주 건전한 기독교 신앙이다. 문제될 게 전혀 없다. =_=;;

아무쪼록 누구든지 "이단들이 성경을 엄청 파고든댄다, 요한계시록 공부 열심히 한댄다. 6일과 1천 년을 문자적으로 믿는댄다. 이단들이 재림을 사모한다고 하니 우리는 성경 공부하지 말자, 재림 사모하지 말자." 이런 무식한 짓은 제발 안 했으면 좋겠다.
다음은 진짜 마지막 여담.

  • the Holy Bible '성경'이라고 해도 충분할 텐데 '성경전서'라는 말이 왜 붙었을까? 신구약 66권이 모두 들어있다는 걸 굳이 강조하고 싶었는가 보다.
  • 한킹이 출간된 1994년 4월 12일은 KBS 박 지원 아나운서의 생년월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15일은 서울 2기 지하철을 관할했던 서울 도시철도 공사가 창립된 날이다. ㄲㄲㄲㄲㄲㄲ

Posted by 사무엘

2024/04/11 08:35 2024/04/1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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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 번역: 킹 제임스 성경에만 나오는 가르침

(1) 마 28:19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마태복음의 결말부에 나오는 great commission은 흔히 make disciple(제자 삼다)라고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최 용덕 작곡 "가서 제자 삼으라"(갈릴리 마을 그 숲속에서)라는 복음성가가 쌍팔년도 시절에 유명했다.

그러나 킹 제임스 성경은 그냥 간단하게 '가르치다' teach라고만 돼 있다. 이건 뭐 변개라기보다는 번역 표현의 차이인 것 같다. 제우스(그리스)냐 주피터(로마)냐 하는 차이점과 비슷한 건지도?
저 복음성가 역시 후렴 가사가 "가서 제자 삼으라, 나의 길을 가르치라"라고 그게 결국 그 말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2) 삿 8:16 "그 도시의 장로들을 붙잡은 뒤 들가시와 찔레로 숙곳 사람들을 가르치고"
이건 기드온이 숙곳 사람들에게 무슨 삽자루 선생이라든가 일제 시대 칼 찬 선생처럼 흉기를 폼으로만 들고 열혈 강의나 교육(...)을 한 게 아니다.;; 진짜로 흉기를 휘둘러서 처절한 피의 보복을 했다는 얘기이다. 7절 "들가시와 찔레로 너희 살을 찢으리라"라고 경고 내지 예고한 걸 그대로 행한 것이다.

위급할 때 주변에 좀 도와 달라고 요청했는데 듣보잡 취급받고 인격 모독과 함께 무시 당하는 건 사람을 정말 최고로 빡돌게 만든다. 그 위기를 이 악물고 극복하고 나서는 당연히 그들에게 보복하고 싶어진다. 기드온이 숙곳 사람들에게 당한 거랑.. 나중에 다윗이 나발에게 당한 게 서로 거의 판박이인 것 같다. (삼상 25)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래서 KJV 외의 타 성경들은 저 구절을 "기드온이 숙곳 사람들을 '징벌했다, 응징했다' punish"라고 번역한 편이었다.
그러나 KJV는 저 행동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인생은 실전이야 존만아, ㅆㅂ 누구든지 작은 기드온을 건드리면 X되는 거예요" 시쳇말로 표현하자면 참교육인 것이다. 매우 흥미롭다. -_-;

성경은 체벌을 적극 지지하는 논조이고, 심지어 잠 26:3 "어리석은 자의 등에는 매가 약" 같은 말씀마저 있는 걸 생각하면 일면 수긍이 간다.
그나저나 말보회 한킹은 이 구절의 teach를 '일깨워 줬다'라고 꽤 특이하게 번역했다.

2. 성경 해석: 잠 25:12 숯불 쌓기

성경이 인간의 행실과 관련하여 요구하는 전반적인 논조는 "악을 악으로 되받아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라, 원수를 사랑하라, 남의 잘못을 용서하라"이다.
그러나 이는 죄에 대한 자각과 회개, 뉘우침이 없는 악인들한테 무한한 호의와 관용을 베풀면서 호구 취급받으라는 말이 절대 절대 아니다. 북괴한테 무한정 퍼 주라거나, 술주정뱅이 알코올 중독자한테 뜬금없이 현금 쥐어 주라는 말도 아니다.

내 가족을 죽인 흉악범이 죽이고 싶도록 밉고 보복하고 싶어하는 거.. 그 자체는 부당한 피해를 입은 인간이 충분히 가질 만한 심정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도피성이라는 걸 괜히 만드셨겠는가.
성경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칙 자체는 절대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확하게 당한 만큼만 되돌려 줘라. 되로 받은 걸 말로 보복하지 마라"라고 권고할 뿐이다! 이 와중에 인간의 입장에서 용서니 사랑이니 아량이니는 보복을 대신 집행해 주시는 하나님을 근거로 삼아야만 할 수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잠 25:21-22를 보자. 그리고 이를 인용하고 있는 신약의 롬 12:19-21도 보자.
내용을 요약하자면 "니 원수가 곤경에 처하게 되면 물과 음식까지 주면서 선대해라. 그거야말로 원수의 머리 위에다 숯불을 얹는 것 같은 효과를 낼 것이다. 하나님이 대신 보복을 해 주실 것이다"이다. 아까 저 기드온과 다윗이 받았던 취급의 완전 정반대를 하라는 것이다.

"믿음으로 지금 당장 손해를 감수하면 하나님이 나중에 더(이자까지 쳐서??) 갚아 주신다~~" 이 패턴이야 구약 율법에서 이삭 줍기나 종 제도 등 곳곳에서 발견되니까 익숙할 것이다. 그게 원수· 보복과 관련해서도 적용된다고 보면 된다.

여기서 많은 오해가 나도는 건 '원수의 머리 위에 숯불'이라는 표현이다. 이건 무슨 심상이며 무엇을 의미할까?
어려울 것 없다. 결론부터, 답부터 말하자면.. 이건 문자 그대로 아주 잔인하고 처참한 보복을 의미한다. 오죽했으면 휴버대 고문 소믈리에 에피소드 중에도 아주 적절한 묘사가 있더라.

사용자 삽입 이미지

머리 위에 숯불은 딱 이걸 의미한다. -_-;;;;
"죽이고 싶은 니 부모의 원수, 니 자녀의 원수가 마침 쫄딱 망해서 길거리에서 헐벗은 상태이네? 원수를 제일 완벽하게 압도하고 제일 가학적으로 보복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바로 그때 그 원수놈을 신앙의 힘에 의지해서 반대로 먹이고 입히고 도와 줘 봐라. 그러면 그놈은 머리에 숯불이 얹혀서 쪄 죽는 것 같은 급의 보복을 당할 것이다." 이런 말인 것이다. 아멘?

(1) 머리에다 숯불을 얹는 것은 원수가 "뜻하지 않은 선대를 받아서 부끄럽고 미안해서 얼굴이 후끈후끈 빨개지는 걸 의미한다" 이렇게 해석하고, 심지어 이 구절의 번역을 그런 쪽으로 한 역본이 있다. 휴~ 이건 인본주의적인 뇌피셜을 너무 발휘한 것 같다. 성경에는 죄인이 회개하는 건 있어도 그렇게 반응하는 모습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아니면.. (2) 이건 원수한테도 불씨를 빌려주는 선행을 의미한다..? 옛날옛적에 성냥이나 가스레인지가 없었고 아무리 불씨가 귀했다지만, 이 얘기도 전혀 아니다. 그리고 세상에 어느 고깃집에서 겁대가리 상실한 종업원이 불 붙은 조개탄이나 숯을 머리에 이고 다니던가? 그러다가 엎어지고 자빠지면 어쩌자고? =_=;;;

성경에서 단서를 전혀 찾을 수 없는 내용이라면 때로는 원어나 그 당시 역사 고증 따위를 참고해서 문제를 해결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창세기 6장 고펠나무의 정체 같은 거라면야..  하지만 이 숯불은 그렇지 않다.
이건 그냥 시 140:10에서 말하는 그 숯불이다. 유황불과 다를 바 없는 부정적인 심판 맥락이다. 이 숯불은 인간이 얹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보복 차원에서 얹는 불이다. 이 정도면 "머리 위 숯불 선행설"은 설 자리를 완전히 잃을 것이다.

요즘 어떤 성경 역본은 잠 25:22를 보니.. '조건문'을 만든 게 있었다. "니가 그의 머리에 불타는 숯을 쌓으면 주께서 보답해 주실 거다" ...;;; 안타깝지만 이건 영어· 원어에 충실한 번역도 아니고 숯불의 성경적인 심상도 모른 채 '숯불 선행설'을 전제로 깔고서 번역을 아주 잘못한 것 같다. 여기서 숯을 쌓는 건 비유적인 심상일 뿐이다. 하다못해 구닥다리 개역성경이 원래 의미에 더 근접하게 번역했다.

Posted by 사무엘

2024/02/23 19:36 2024/02/23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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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언 또는 예언

'킹제임스 흠정역'은 prophe-로 시작하는 단어들(-sy, -cy, -t)을 한 치의 예외 없이 모두 '대언-'이라고 옮긴 것이 특징이다. 선지자, 예언(자) 대신 전부 '대언(자)'이다. 이건 우리말 성경 중에 안티오크 권위역에서 처음으로 시도했고 그게 오늘날 흠정역에까지 남아 있는 흔적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대신 전하기, 또는 그렇게 전하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대언'이 틀린 말은 아니다. 출 7:1-2 같은 용례도 있다. (아론이 모세의 대언자)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한 속성은 미래 예언이다. 성경이 인간의 개똥철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감받은 말씀인 증거 중 하나도 바로 예언이 확률적으로 절대 불가능할 정도로 문자적으로 많이 적중했다는 것에 있다.

쉽게 말해 성경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 말씀을 "대언"한 것이긴 한데, 그 대언 중에 미래 "예언"도 있다는 것이다. 관계가 이렇게 정리된다.
성경 중에서 요한계시록은 prophesy에 속하는 책이라고 분류되는데, 이건 당연히 예언을 말한다. 후자까지 몽땅 대언이라고 싸잡아 풀이해 버리면 문제가 생긴다. 요한계시록이 성경 중에서도 어떤 특성을 갖는지를 알 수 없어진다.

흠정역이 아쉬운 점은 성경에서 예언이라는 키워드를 완전히 없애 버렸다는 것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예언이라고 하면 자꾸 은사주의 점쟁이 예언 기도... 가령, "너는 몇 월 몇 일 몇 시에 무슨 일이 터질 것이고.. 이 번호의 로또를 사면 당첨될 것이다" 이런 걸 떠올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고린도전서 14장에다가 '예언'이라는 단어를 넣는 걸 너무 부담스러워한 것이다.

하지만 시한부 종말 갖고 뻘짓 하는 인간들이 있다고 해서 휴거나 종말이라는 개념 자체가 비성경적이고 잘못된 건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언 갖고 이상한 뻘짓 하는 인간들이 있다고 해서 성경에 예언이라는 개념이 없는 건 아닐 것이다.

꼭 초자연적인 점쟁이급 예언이 아니더라도.. "너는 언젠가는 죽을 것이고 구원받지 못한 채 죄 가운데 죽는다면 지옥에 가게 된다" 같은 원론적인 얘기만으로도 이미 미래에 대한 예언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 말씀을 대언한 것이다. 예언과 대언은 서로 대립하고 상충하는 관계가 아니다.

물론 같은 단어가 어디서는 예언에 더 가깝고 어디서는 그냥 대언에 더 가까운지를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원칙을 갖고 번역하더라도 호불호가 갈리고 논란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예언을 단 하나도 없이 깡그리 없애 버린 건.. 마치 구약의 사자음어를 몽땅 LORD라고 번역하느라 '여호와'라는 단어를 아예 깡그리 없애 버린 것과 비슷한 면모로 보인다.

이건 흠정역을 사용하는 교회에서도 목사님들이 지적하며 아쉽게 생각하는 면모이다.
말씀 보존 학회에서는 흠정역을 20여 년째 아주 부정적으로 까내리고 비방하는 편인데.. "우리 한킹을 도둑질한 짝퉁" 같은 영양가 없는 저질 네거티브 말고 "예언이 없는 성경" 이런 식으로 흠정역의 진짜 약점에 대한 공략은 왜 안 하는지 모르겠다.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인데.. 계 19:10 "... testimony of Jesus is the spirit of prophecy"의 경우, 옛날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대언'이었다가 나중에 나온 개역개정에서는 '예언'으로 바뀌었다~!
이는 킹 제임스 계열이 아닌 성경을 만드는 진영에서도 prophecy의 번역이 쉽지 않은 고민거리라는 걸 시사한다. "예수 믿는 증거는 말씀 선포/대언" vs "예수님이 하나님인 증거는 미래 예언 능력" 이렇게 뉘앙스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2. 회개, 축복

영어의 동사 중에는 repent나 bless처럼.. 사람과 하나님이 모두 주체가 될 수 있는데 동일하게 번역했다가는 난감해지는 단어가 있다.
기계적으로 한 단어로만 번역하면 하나님이 잘못을 저질러서 후회· 회개(!!)를 하고, 남에게 복을 빌게 될 수 있다..!! 당연히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돌이킨다, 슬퍼하신다 / 복을 '주신다')

prophesy도 이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사람의 입장에서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겠지만 하나님이 자기 말을 또 대언(?)하는 것일 리는 만무하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역시 예언이 되어야만 타당하겠다. 이 역시 생각할 점이다.

3. 전치사

(1) 예전에 한번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흠정역은 OF를 중의적으로 직역해서 갈 2:16 faith of Jesus Christ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라고 옮긴 성경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 11:9 knowledge of the LORD는 '{주}를 아는 지식'이라고 번역했다.
말보회 한킹은 그 반대다. 갈 2:16은 예수님 믿는 믿음이라고 풀이를 했지만 후자는 그냥 '{주}의 지식'이라고 옮겼다. 영어에서 of는 정말 독보적으로 중의적인 전치사임이 틀림없다.

(2) FOR에 대해서는 예전에 한번 얘기한 적이 있었지 싶다. '-를 위한'(목적)과 '-로 인한'(이유)의 의미가 모두 있다. for sinner, for sin이 모두 가능한데 우리말로는 번역 표현이 갈린다.
한킹은 for the remission of sins를 "죄사함을 위한"이 아니라 "죄사함으로 인한"이라고 따박따박 번역했다. 하지만 흠정역은 요일 2:2를 "죄로 인한 화목제(화해 헌물)"라고 옮겼다.

(3) IN은 기본적으로는 '-안'이라는 뜻이지만 rejoice in, believe in처럼 그냥 '-를'이라고 타동사처럼 보는 게 더 자연스러울 때가 있다. 하다못해 미국 지폐에 쓰여 있는 In god we trust도 말이다. ㄲㄲㄲㄲㄲ 생각보다 까다롭다.
요일 4:3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이라는 표현으로 번역한 최초의 역본은 안티오크 권위역이고, 그 뒤 흠정역도 이를 따르고 있다. 한킹은 그냥 '육체로..'이다.

4. 조동사

영어의 can, may, will, must 같은 조동사는 우리가 중학교 수준에서 배우는 아주 쉽고 기초적인 단어이다.
그런데 이 조동사들은 뭐랄까, 손에 잡으려 해도 잘 잡히지 않는 굉장히 므흣한 단어이기도 하다.
의미가 마치 to 부정사처럼 예정-의지-가정 속에서 막 유동적으로 변하기도 하고, 과거형은 단순히 시제만 과거인 게 아니라 뜻이 또 변하기도 한다. 과거형이 좀 더 완곡하고 공손한 표현이 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shall은.. 1인칭이 포함돼서 "이렇게 할까?"라는 제안으로 의미가 굳어져 버렸고, 과거형 should만이 과거가 아닌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다.
킹 제임스 성경 영어에서 몇몇 조동사들이 쓰인 걸 보면 다음과 같은 패턴이 있다.

  • shall: 할 것이다(미래), 할지어다, 제안, 게다가 명령까지 붙어 있다. (thou shalt not kill) be 동사가 is, are 등으로 굴절되지 않고 뜬금없이 be 원형으로 등장한다면.. 그 문장은 십중팔구 should가 생략된 형태여서 그렇다.;

  • will/would: 역시 shall처럼 미래의 뜻이 있는데... shall과 달리 명령 뉘앙스가 아니라 want와 거의 같은 급으로 '원하다'라는 뜻이 덧붙어 있다. 딤전 2:4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will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용례 때문에 '유언'도 testament뿐만 아니라 요즘은 will이라고 표현한다.

  • want: 그럼.. 현대 영어에서 '원하다'라고 즐겨 쓰이는 이 녀석은 킹 제임스 영어에서는 lack/need와 비슷한 뜻의 자동사로 쓰인다. 시 23:1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가 I shall not want이다. 현대 영어로 I will not be in need 정도의 뜻이 저렇게 표현된 것이다.

군대의 야전교범이란 게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하면 된다"라는 지침뿐만 아니라 "그때는 이렇게 하라"라는 명령도 된다. 그렇다면 이런 교보재의 문장은 옛날 같았으면 다 shall이라고 쓰면 됐을 것이다. ㄲㄲㄲㄲㄲ

5. wine

이것도 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지 싶은데, 흠정역은 우리말 성경 중에 wine을 최대한 알코올 없는 '포도즙'이라고 옮긴 역본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감히 술을 만드는 이적을 행하셨을 리는 없으니, 요한복음 가나의 혼인 잔치에 나오는 음료도 '포도즙'이다. 이건 의외로 권위역이 아닌 흠정역의 독자적인 관행이다.

그 정도면 괜찮지만.. 그래도 옆에 '독주'가 나란히 나오고 부정적인 문맥이 명백해 보이는 곳에서까지 무리하게 포도즙이라고 워딩 할 필요가 있나 싶은 구절도 있다.
"모조리 포도즙"도 "예언 대신에 몽땅 다 대언"와 비슷한 흠정역 번역 정책인 것 같다.

물론 창세기 9장에서 노아가 술 취해서 자빠진 장면, 잠언에서 술을 극딜하는 장면에서는 흠정역도 당연히 '포도주'이다. wine이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용례가 술인 만큼, wine은 그 뒤로도 가능한 한 '포도주' 쪽으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6. virgin

끝으로.. 계 14:4의 '처녀'는 흠정역 마제스티판에서 고쳐졌나 모르겠다. "여자와 더불어 자기를 더럽히지 않은 처녀"라니.. =_=;;;
하필 공교롭게도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저 딱 한 구절.. 성경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virgin은 여자가 아니라 그냥 동정남을 가리킨다. 곧이곧대로 한 단어만으로 옮겨서는 안 되는 지뢰 같은 단어가 성경에 의외로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흠정역은.. 창 19:5의 man은 그냥 사람이 아니라 반드시 '남자'라고 옮겨야 된다는 지론을 초창기 거의 20년 전부터 고집하고 자랑해 왔다. 왜? 이건 소돔 놈들이 남색을 저지르는 문맥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건 흠정역만의 독특한 특징이며, 그건 번역 방침을 존중한다.

그런데, 그런 성별을 철저하게 챙겼으면서 계 14:4 virgin을 숫총각 동정이라고 안 하고 처녀...;;;
소돔만큼이나 남자라는 단서가 버젓이 붙어 있는데.. 이건 일관성이 심각하게 결여되는 아쉬운 조치로 보인다.

처녀 virgin를 그냥 젊은 여자(기혼 여부는...??)라고 의역 변개하면 예수님의 탄생의 특성이 희석돼 버린다.
그런데 어느 동네의 워딩처럼 동정녀...라고 하면.. 엄마가 평생 남편과의 자식을 안 낳았다는 뉘앙스가 들어가 버리니 문제인데..
계시록에서는 애초에 여자가 아닌 virgin이라는 게 함정이다.;;

7. kill

'죽이다'를 뜻하는 kill은 중학교 수준의 아주 쉬운 기초 단어로, 사람이건 동물이건 모두 목적으로 받을 수 있다. 한국어는 '죽이다' 말고 '살해하다'는 사람에게만 쓰고, '잡다'는 짐승에게만 쓴다.

십계명 제6계명 Thou shalt not kill은 우리말로 '살인하지 말지니라'라고 적절하게 번역되어 있다. 이건 일체의 살생을 하지 말라는 얘기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영어권에서 이건 '살생'이 아니라 '살인'이니까 murder가 더 나은 워딩이 아니냐는 제안이 있을 정도이다. 실제로 KJV 이후의 현대 역본들 중 일부는 murder로 말을 바꾸기도 했다.

하지만.. 십계명의 주변 계명들을 보시라. 부모 공경, 간음, 도둑질... 오로지 신 아니면 인간만을 다루는 저 문맥에서 등장한 kill은 당연히 살인이지, 갑자기 동물 보호 따위가 튀어나올 여지는 전~~혀 없다. 혼동될 일이 없기 때문에 그냥 음절수 더 적고 간결한 단어를 쓰는 게 더 낫다.

ere - before / foe - enemy / list - desire / let - allow ... 이런 식으로..
KJV의 영어 단어를 살펴보면.. 옛날 고어 단어가 더 짤막하고 운율과 암송에 더 유리한 경우가 적지 않다.

참, kill 말고 slay - slew(과거) - slain(과거분사)도 kill과 거의 같은 뜻이지만 더 문어적인 느낌의 '죽이다'이다. 특별한 차이 없이 그냥 섞여 쓰인 게 아닌가 추측된다. see / behold와 비슷한 관계인 걸까..??
카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창 4:8에서도 이 단어가 쓰였고.. 짐승을 잡아서 고기를 먹겠다는 얘기에서는 아예 목적어 없는 자동사로 slay가 창 43:16에 나온다.

사도행전에서는 베드로가 본 짐승 환상이라는 같은 장면에서 두 단어가 일부러 동시에 쓰이기도 했다. (행 10:13, 행 11:7) 표준역은 둘을 서로 달리 번역했다. (잡아먹으라, 도살하여 먹으라)

Posted by 사무엘

2024/02/18 08:35 2024/02/1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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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관련이 없는 아이템들이긴 하지만, 그냥 한 글에다 한데 엮었다. ㄲㄲㄲㄲㄲㄲ

1. 사다리

성경의 창 28:12에 나오는 야곱의 꿈 말이다. 하늘에서 아래로 사다리가 하나 내려와서 천사들이 그걸 딛고 하늘과 땅 사이를 오르내렸다고 한다. 그걸 묘사한 성화도 역사적으로 아주 많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과거에서 현대로 갈수록 “사다리가 아니고 계단이지 않을까?”로 바뀌어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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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1490년경에 프랑스에서 그려졌다는 이 옛날 그림을 보자. 천사들이 손까지 기둥을 붙잡아야 할 정도로 (1) 직각에 가까운 경사의 사다리를 타고 오른다. 진짜 문자적인 사다리.. 무슨 성벽 타는 공성전을 치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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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중에는 손까지 붙잡지는 않고, 다락방 계단 같이 아주 가파른 (2) 계단 반 사다리 반이 등장한다.
더 나중에는 보다시피.. (3) 아예 희고 단단하고 경사도 훨씬 더 완만한 돌계단으로 바뀐다.
야곱이 꿈 속에서 실제로 본 장면은 (1)~(3) 중 어디에 가장 근접해 있을까?

이건.. 흔히 말하는 본문 계보에 따른 변개 이슈가 아니다. 그냥 옛날 성경과 현대 성경의 차이일 뿐이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개역성경이고 킹 제임스고 뭐고 다 똑같이 사다리였기 때문이다. 20세기 중후반부터 창 28:12의 번역이 대놓고 ‘계단’이라고 바뀌기 시작했다.
ladder는 성경에서 저기 딱 한 번밖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구절의 용례를 비교해 볼 수 없다. 고펠나무가 노아의 홍수에서 딱 한 번밖에 나오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말에서는 사닥다리와 사다리 모두 표준어이다. 특히 개역성경이 이 구절에서 ‘사닥다리’를 썼고 개역개정에서도 같은 워딩을 유지하고 있다.
개역성경은 이것만 사닥다리이고, 에스겔서 등에서 운제(공정전용 이동형 사다리), 보루 같은 건 사다리라고 나름 구분을 해 놨다.

그나저나 저 1490년 그림은 사다리 주변에 아무 후광이 비치는 게 없어서 별로 간지도 안 나고, 결정적으로 사다리 꼭대기가 너무 낮다.. ㅡ,.ㅡ;; 그림을 너무 대충 그린 것 같다. ㅠㅠㅠㅠ
그래도 히브리어 원어로도 설마 계단과 사다리가 같은 단어는 아니겠지.. 계단이 아니니 처음에 옛날 번역도 사다리로 시작했던 게 아닐까 싶다.

야곱은 밤에 딱딱한 땅바닥에서 돌을 베고 자연 속 노숙을 했다. 나도 야곱처럼 살고 싶다~!!
이 창세기 28장의 야곱 이야기가 가사에 담겨 있는 드문 찬송가 중 하나가 바로..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이다..! 1절이 아니라 2절과 그 이후의 가사이기 때문에 존재감이 좀 덜 느껴질 것이다. ^^

2. 물이 와인으로 변환된 기적

요한복음 2장에 기록된 ‘가나의 혼인 잔치’ 사건, 혹은 예수님이 물을 와인으로 변환하신 기적 말이다.
그때 기적적으로 자동 생성된 와인의 양은 얼마 정도였을까?

6절을 보면, KJV에 따르면 2~3 firkin 분량인 항아리가 6개가 현장에 있었다고 한다.
firkin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여기서 단 한 번밖에 나오지 않는 생소한 단어인데.. 1 firkin은 10갤런에 대응한댄다. 그래서 KJV 이후의 통상적인 영어 성경들은 20~30 갤런짜리 항아리 6개라고 표현하였다.

1 firkin, 10갤런은 38리터에 달하는 용량이다. 생수 담는 그 말통의 두 배가량인데..
한글 개역성경은 거리의 단위 mile은 5리라고 토착화 단위를 붙였으면서 저기서는 4~6말이라고 토착화를 하지 않은 것 같다. 마 5:41의 mile도 성경에서 단 한 번밖에 안 나오는데 말이다.

요 2:6에서는 firkin을 물통에다 대응시켰는지, ‘두세 통’이라고 번역했고 이걸 후대의 우리말 성경들이 별 생각 없이 따른 것 같다. ‘통’을 단위로 보고, “2~3통짜리 항아리 6개”라고 번역하는 게 관행이 됐다.

말보회의 한글 킹 제임스는 의외로 이 관행을 깨고.. firkin의 원어를 밝혔다. “2~3메트레타짜리 물통 6개.” 즉, ‘통’은 원래 뜻인 용기, 그릇으로 사용했다. 국내의 우리말 성경 중에 요 2:6을 저렇게 번역한 성경은 한킹이 유일하다.
furlong을 ‘스타디온’이라고 원어를 밝혀 번역한 것과 동일한 정책을 취한 것이다. (계 21:16 등~) 흠정역은 furlong은 스타디온이지만 firkin은 원어를 밝히지 않았다.

요즘 말 많고 논란도 많은 표준역은?? 그쪽은 워낙 영어 직역만 고집했기 때문에 펄킨, 펄롱에다 파운드, 마일까지 몽땅 영어 도량형을 그대로 썼다. ㄲㄲㄲㄲㄲㄲ 제일 파격적이고 과격하다.

뭐, 한국어 토착화든 영어든 그리스 원어든.. 저 계산에 따르면, 가나의 혼인 잔치에 나오는 저 석재 물항아리 하나의 용량은 거의 100리터에 달한다.
예수님은 그 항아리 6개에 가득 담겼던 물을 몽땅 와인으로 변환하셨다.

600리터를.. 생각보다 양이 많다! 겨우 와인잔이나 유리병 몇 개 수준이 아니다!! 도대체 하객을 몇 명이나 초청해서 잔치를 얼마 동안이나 진행한 걸까? 오병이어처럼 수천 명은 아니더라도 100수십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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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서양 해적 영화에 나오는 허리 불룩한 나무 배럴이 용량이 개당 150~160리터였다고 한다. 그거 4개 분량이다.
그리고 요즘 석유 담는 용도로 쓰이는 철제 드럼통 용량이 개당 200리터에 가깝다고 한다. 그거 3개 분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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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의 혼인 잔치를 묘사한 옛 성화들 중에는 항아리가 너무 작게 묘사된 게 여럿 눈에 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고증을 무시한 결과물인 것 같다. =_=;;
오히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끝부분에 나오는 것처럼.. 사람이 어째 구겨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큰 항아리를 생각해야 하지 싶다.

  • 가나의 혼인 잔치 기적은 인간이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받는다는 영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요 2:5)
  • 그러고 보니 배럴(barrel)도 처음에는 150~160리터짜리 나무 술통이라는 뜻이었는데.. 지금은 200리터짜리 드럼통의 단위 명칭으로 슬며시 바뀌었다. (석유 10만 배럴..) 우리말 성경 요 2:6에 나오는 '통'도 그런 의미 확장을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다. ^^

3. 동방박사

마태복음에 따르면, 먼 옛날 예수님이 탄생하던 당시에 일명 '동방박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별을 보고는 예수님이 태어난 곳을 찾아왔다고 한다.
성경에는 그 동방박사의 인원수나 이름 같은 건 전혀 안 나온다. 오히려 10수 명 이상 무리를 지어서 왔을 가능성이 높은데 굳이 3명에 이름까지 거론된 건 아무래도 다른 종교적인 전통이나 설화가 첨가됐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동방박사들이 바친 예물이 세 종류이긴 했다. 그것 때문에 인원수까지 3이었을 거라는 편견이 생긴 것이지 싶다.

그리고.. 우리말 성경이 ‘박사’라고 해 놓으니 본문을 읽는 독자들은 저 사람들이 꼭.. 무슨 학위를 소지한 학자 글쟁이였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건 아니고.. 저기서는 지식보다는 지혜.. wise men 지혜자가 더 정확한 뉘앙스이다.
시쳇말 ‘현타’라고 할 때 떠올리는 그 ‘현자’.. 딱 그걸 생각하면 된다. 현자타임!!!
나중에 예수님이 어린 시절에 회당에서 진짜 율법 ‘박사’들과 논쟁하고 키배를 떴었다. 눅 2:46을 같이 보시길 바란다. ㅋ

Posted by 사무엘

2024/02/03 19:35 2024/02/03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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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애굽기의 강한 손

성경에서 출애굽기의 앞부분은 모세라는 인물이 태어나고 광야로 도피 중이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자기 동족을 이집트에서 구출해서 나오라는 소명을 받는 내용이다. 모세는 자기는 인간적으로는 이집트 왕가를 맞닥뜨릴 면목이 없는 상태라고 변명하면서 뒤로 빼지만, 하나님은 겁먹지 말라고 다그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파라오에게 이러쿵저러쿵.. 말하면서 내 백성을 놓아 주라고 얘기해라. 하지만 파라오는 처음에는 네 말을 절대로 호락호락 듣지 않을 거다."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걔는 강한 손이라는 초월적인 파워로 쳐맞기 전까지는 절대로 너희를 놓아 주지 않을 것이다."
라고 얘기하는 것이 출 3:19의 핵심이다. 즉, 하나님이라는 강한 손이 개입해야만 놓아 준다는 뜻이다.
이게 언뜻 보기엔 문맥상 굉장히 자연스러운 서사인 것 같다.

게다가 뒤의 6:1에서 '강한 손'이 다시 나온다. 이때는 모세가 파라오에게 겁먹어서 선포가 아니라 애원· 당부· 네고와 비슷하게 얘기를 하다가 오히려 역공을 당하고 완전히 의기소침해 있을 때이다.
"파라오는 강한 손한테 혼쭐이 단단히 난 뒤에 네 백성을 거의 추방하다시피 진절머리를 내며 내보낼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니.. 3:19도 '강한 손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놓아 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워딩을 하는 게 자연스러운 것 같다.

그런데... KJV의 출 3:19는 not let you go, no, not by a might hand이다. '강한 손이 있어야 풀어 준다'가 아니라 '강한 손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풀어 주지 않는다'라는 반대의 뜻이다.
no, not은... 로마서 3장에서 "의인은 없나니, 단 한 명도 없다", 시 14와 시 53에서 "선을 행하는 자가 단 한 명도 없다", 백부장의 믿음에서 "이와 같음은 이스라엘 전체에서 단 한 건도 못 봤다" 등.. 의심의 여지 없이 시종일관 전체 부정을 뜻한다.

이런 점이 감안되어 킹제임스 흠정역의 경우, 작년 여름에 출간된 6판 마제스티 판에서야 "강한 손으로도 가게 하지 않는다"라고 번역이 수정되었다. 딱히 변개 이슈와 관련된 구절이 아니다 보니, 흠정역도 얘는 오랫동안 별 생각 없이 타 성경의 번역을 그대로 따랐던 것 같다.

그 반면, 말보회의 한글 킹제임스 성경은 오래 전부터 저렇게 번역되어 있었다. 그쪽은 '하나님이 자신을 어린양으로', '다시 채우다 replenish' 등, 진작부터 KJV의 튀는 번역을 과감하게 수용하는 성향이어서 그런 듯하다.

2. 삼손이 빡친 이유

사사기 15장에는 이스라엘의 천하장사 재판관이었던 삼손이 적국 여자와의 사랑에 실패해서 사고뭉치로 흑화하는 과정이 기록돼 있다.
우선 3절.. "선 넘네.. 이제는 내가 승질대로 깽판 쳐도 니들은 할 말 없을 줄 아쇼~~" 이거는 성경에서 제일 빡친 사람의 대사이지 싶다. 삼손이 빡친 구체적인 이유는 이 글에서 설명하지 않을 것이므로 관심 있는 분은 성경을 직접 찾아 보시길..

블레셋 사람들은 앵그리 삼손으로부터 불여우 테러를 당한 뒤, 맨 처음엔 의외로 삼손이 아니라 원인 제공자인 저 여자네 가족을 보복하고 응징했다. 집을 불질러서 그 집안 사람들을 몰살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6절)

그랬는데.. 삼손은 화를 푼 게 아니라 여자네 가족을 죽인 블레셋 사람들에게도 양학을 벌였다. 그 이유가 뭘까..??
어지간한 다른 성경들에 따르면, 삼손은 그래도 여자 집안에 대한 연민이 있어서 그들을 죽인 블레셋 사람들에게 보복을 했다. "이런 잔인한 살인극을 벌이다니 내가 보복을 하겠다" (because, since) (7절)

그러나 킹 제임스 성경의 묘사는 다르며, 싸이코패스 급으로 더 잔혹하다. "니들이 이렇게 하더라도 내 성에 안 찬다. 나는 더 보복하고 말겠다" (though)라는 도발이다~!!!
즉, 7절이나 앞의 3절이나 동일하게 '-하더라도' though가 나란히 쓰인 것이다. 이것 말고 다른 해석의 여지는 없다.

성경엔.. 특히 구약을 보면 사건의 묘사가 동심파괴스럽고 잔혹한 경우가 가끔 있다. "입다의 딸이 궁극적으로 어찌 됐는가?", "피지배민들을 톱으로 잘랐는가, 아니면 톱으로 노동을 시켰는가?" 같은 것 말이다. 성경 자체가 그러한데, 내 경험상 킹 제임스 성경은 그런 강도가 조금 더 높게 느껴질 때가 있다.
다만, 아무리 당장 이해가 안 되고 수긍이 안 된다 해도 말을 뜯어고치고 성경을 변개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3. 욥기의 영과 독

욥 6:4를 보자. "전능자의 화살이 내 안에 들어와서(박혀서/있어서)" 보통은 '내 영이 그 독을 마셨다' 인데,
킹 제임스 성경만 혼자 '그 독이 내 영을 마셨다' 라고 돼 있다.
우와.. 러시아식 도치 유머가 성경 역본에도 존재하는구나.;;;

이거 뭐

  • 미국에서는 시민이 대통령을 암살합니다. 하지만 소련에서는 대통령이 시민을 암살합니다~!!
  • 미국에서는 당신이 파티를 찾아 다닙니다. 하지만 소련에서는 당원(party)이 당신을 찾아 다닙니다!!
처럼..
  • 개역/NIV에서는 당신의 영이 독을 마십니다. 하지만 KJV에서는 독이 당신의 영을 마십니다~!
인 것이다. ㄲㄲㄲㄲㄲㄲㄲ the poison whereof drinketh up my spirit

일각에서는 "도치됐을 뿐 KJV도 영이 독을 마신다는 뜻이다, 이건 한국어 번역 문제일 뿐이다"라고 실드 치기도 하는데..
글쎄? 그건 아닌 것 같다. 도치를 하더라도 "the poison whereof MY SPIRIT drinketh up" 정도가 돼야 주어가 '영'이 되지, 저건 누가 봐도 평이하게 독이 영을 마신다는 뜻이다.

내가 지난 10여 년 동안 KJV 특유의 그 복잡하게 꼬인 도치 문장을 파헤쳤던 경험으로는, 저 문장은 통사론적(= 문법)으로 영이 독을 마신다고는 절대로 읽히지 않는다.
해석은 독자 마음대로.
의미상으로는.. 영이 독을 마시든 독이 영을 쭉쭉 흡입해 버리든 어쨌든 털리고 X된다는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_+

얘는 의외로 흠정역이 영어대로 번역돼 있고 한킹은 '내 영이 독을 마셨나니'라고 non-KJV 스타일로 번역돼 있다. 아까 출애굽기의 강한 손과는 좀 반대의 면모이다.

4. 물리 치료

사람을 두들겨 패서 질병이나 못된 심보를 고치는 걸 시쳇말로 참교육 내지 '물리 치료'라고 부른다. 뭐, 참교육은.. 엄밀히는 패는 것뿐만 아니라 경찰서 정모나 소송, 금융 치료까지 포함 가능한 더 큰 용어이지만 말이다.
성경에도 물리 치료라는 게 나온다. 그런데 KJV와 non-KJV가 사용한 방식이 서로 정반대인 곳이 있다.

바울의 비장한 심정이 담겨 있는 고전 9:27에서 KJV는 "억제하여 keep".. 단순히 욕구 절제, 자제.. 이런 뉘앙스가 강한 반면, 타 역본들은 beat, discipline, 심지어 punish라고.. '쳐서 복종하게 한다'라고 돼 있다. 기독교 외의 타 종교에서 행하는 고행을 연상케 한다.

그런데 왕하 5:11에서 나아만 장군이 빡쳐서 내뱉는 말을 보자. "이야, 엘리사가 직접 날 찾아와서 썩은 부위를 팍팍 치고(strike) 신나게 푸닥거리를 벌이면서 나병을 고칠 줄 알았는데.. 꼴랑 강에 가서 목욕을 하라고? 이거 뭐야..?"
이건 반대로 KJV는 '치다, 때리다'인데 다른 역본들은 몽땅 다 '손을 흔들다'(wave)라고 수위가 약화됐다. 참 흥미로운 차이점이다~!

오늘날 2020년대까지도 이상한 데서 신앙 치료 한답시고 사람을 때려죽이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KJV는 이를 정확하게 통찰한 것 같다. ㄲㄲㄲㄲㄲㄲ

5. 이익이 경건인가, 경건이 이익인가??

딤전 6:5는 킹 제임스 성경과 타 성경 간의 차이점이 두 가지 존재한다.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가 없어진"이라는 수식은 동일한데, 그 다음.. 대개는 "경건을 이익의 수단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라고 알려져 있다.
말이 저렇게 쓰여 있으면 십중팔구 삯꾼 목자 정도를 떠올리게 된다. 영적인 거, 종교심 이런 걸 갖고 돈벌이나 하려는 사람.. 목회를 비즈니스로 생각하는 사람이 이 범주에 들지 않겠는가? 나도 이전 성경을 보던 시절엔 오랫동안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킹의 번역은 단어의 배치가 타 성경과는 반대다. (1) "이익을 경건이라고 여기는 사람들".
이건 쉽게 풀이하자면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이 세상에서 일 잘 풀리고 잘 살게 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신자 수가 늘고 헌금 많이 걷히고 교회 팽창하고 이익 많이 남기는 것이 '곧' 하나님 뜻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것이 경건이다.. 이렇게 실용주의를 적극적으로 접목한 사고방식이다. 더 뼈때리게 비유를 들자면 발람의 사고방식.

그냥 삯꾼 목자이기만 한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잘못된 사고방식임이 명백하다. 아니, 저건 삯꾼 목자의 사상을 본질적으로 저격한 게 아니겠는가?
킹은 이익이 경건인 게 아니라, 반대로 '만족함이 있는 경건에 큰 이익'이 있다고 바로 다음 6절에서 말한다. 둘의 차이를 명심하시길 바란다.
빌 1:21 '죽는 것이 이익'과 더불어 신약 성경에서 예수쟁이의 '이익'에 대해 언급하는 둘뿐인 구절이다.

(참고로: 성경은 말씀 사역자가 물질적으로 보상받는 것 자체는 지극히 정당하다고 몇 번이나 말한다. 비현실적으로 물질 자체를 부정하고 죄악시하면서 무소유 위선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장사 해서 이익 남기는 것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기도 하는걸... 하지만 이 딤전6은 그와는 다른 문맥을 말하고 있으니 오해 마시기 바란다.)

그리고 킹은..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쓰잘데기없는 논쟁이 발생하니까, 독자 여러분은 (2) 저런 자들로부터 떠나고(withdraw 발 빼라) 쟤들과는 상종을 하지 말라고, 분리되라고 추가로 명령한다!!! 살후 3:6처럼 말이다.
그러나 킹 말고 다른 성경들은 '쓰잘데기없는 논쟁이 발생한다'까지만 말하고 5절이 끝난다. 왜 이렇게 차이가 발생했는지는 난 모르겠고, 어쨌든 그렇다는 거.

요즘 안 그래도 킹을 우리말로 번역했다는 역본들이 여럿 난립해서 정신 시끄러운 상태다. 근데 어떤 역본은 차이가 날 이유가 하나도 없는 이 간단명료한 구절의 (1) 파트의 번역이 갑자기 뜬금없이 달라져서 독자들에게 많은 혼란을 야기했는가 보다. 킹의 번역본을 표방했다면서 non킹 스타일로 돌아간 거다.

난 그렇게 달라진 줄도 몰랐는데 최근에야 얘기를 듣고는 놀랐다. 도대체 왜 바꿨지? 딤전 6:5가 무슨 아세라/grove도 아니고, replenish도 아니고, baptize for the dead도 아니고, 해산함으로 구원도 아니고.. 하나도 어려운 구절이 아닌데 말이다.
부디 착오였길 바라며, 다음 판이나 쇄에서는 도로 원복 됐으면 좋겠다.

Posted by 사무엘

2023/12/17 08:35 2023/12/1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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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민권

말보회 한킹에는 영어 KJV에는 존재하지 않는 '시민권' citizenship이라는 단어가 두 군데 나온다.
하지만 1600년대에 그런 직접적인 단어가 없었을 뿐이지, 그 문맥에서 그 단어의 실질적인 의미는 시민권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고려할 필요가 있다. 로켓이라는 단어가 없던 시절에 로켓을 'NASA 제트 추진 연구소'에서 개발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먼저 빌 3:20이다.
conversation은 단순히 '소통/대화수단(...)'이 아니라 사람의 행실이라는 뜻으로 신약에서 쓰였다. 베드로전/후서에서 타인에게 모범이 될 만한 것의 사례로 특별히 자주 쓰였다.
쉽게 말해 찬송가 가사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망령된 '행실'을 끊고"에서 저 '행실'이 conversation과 개념적으로 정확하게 대응한다.

그런데 딱 하나 빌 3:20 "우리의 conversation은 in heaven 하늘에 있다"...;; 이게 무슨 뜻일까?
이건 우리의 영적 지위 얘기이다. 이 세상에서 드러나는 행실 문맥이 절~~대로 아니다. 아무리 "conversation = 행실" 영어 직역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그래서 한킹을 제외한 나머지.. 먼 옛날의 권위역부터 시작해 흠, 근, 표.. 모두 이 단어를 "생활 방식"이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방식'은 성경의 다른 구절에서는 거의 다 manner에 대응한다. 즉 저 말을 영어로 역번역하면 오히려 manner of conversation이 된다.

그럼 어차피 빌 3:20의 conversation은 벧후 3:11이나 벧전 1:15 같은 행실이 아닌데.. 여기서만 예외적으로 '생활 방식'이라고 새로운 말을 만들 바에야 '시민권'이 뭐가 대수인가?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
미국에 90일 관광비자만 받고 놀러 와 있는 사람이랑.. 아예 미국 영주권· "시민권"이 있고 거기 정착해서 직업도 갖고 있는 사람은 미국 땅에서의 "생활 방식"이 당연히 서로 완전히 다르다. 이런 관계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빌 3:20 말고 또 시민권이 등장하는 곳은 바로... 행 22:28이다. 성경 스토리 좀 들어 본 분이라면 다들 아실 스토리 되시겠다.

-- 로마군 사령관: 난 돈 왕창 많이 갖다바쳐서 로마 시민권을 간신히 취득했는데..
-- 바울: 난 모태 로마인이오.

영킹은 이 부분이 시민권이 아니라 '자유' freedom이라고 돼 있다.
이건 그냥 옛날 성경과 현대 성경의 용어 차이이지, 변개 이슈가 아니며 KJV만의 교리적으로 우수한 번역이라고 간주하기도 어려워 보인다. KJV 이전 계보의 영어 성경들도 다 freedom이라고 옮겼기 때문이다.

왜냐고? 이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같은 근대적인 시민 계층, 민주주의, 상비군, 국가 체계 같은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로마인이면 로마인이지, 로마 시민권자??? 이런 개념이나 용어가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후천적 로마인"으로서의 권한과 혜택을 freedom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영어 freedom을 있는 그대로 번역하지 않은 거잖아~~" ㅇㅇ 그렇긴 하다.
그런데 이 본문이 교리적으로 무슨 갈라디아서 4장 같은 문맥인가? free하지 않은 사람은 자유를 박탈당한 종 노예인가? 저 사람은 무슨 땅거지 노예였다가 극적으로 해방된 걸까?
그 당시에 로마 시민이 아닌 유대인이나 다른 외국인들은 사회적 신분이 전부 창세기의 하갈 같은 처지였을까? 그렇지 않다.

로마 시민은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고, 당장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것처럼 고문을 동반한 심문을 받지 않았으며.. 재판 받다가 억울하면 항소해서 로마에 직접 가서 재판 받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어떤 중죄 반역죄를 지어도 십자가형으로 처형 당하지는 않았다.

로마인이 아닌 사람은 저 정도의 권한이 없고 생활이 다른 제약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로마 제국 내에서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한 비참한 사람은 아니다. 그게 아니어서 저 사령관이 밑바닥 노예에서 해방된 거라면, 평민이 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지 과연 어떻게 요즘으로 치면 대령~준장 급의 고위급 군인이 될 수 있었을까? 이것도 생각할 점이다.

1600년대 당시에 영킹으로 행 22:28을 읽었던 영어권 화자나, 지금 우리가 한킹으로 행 22:28을 읽으나 결국 그 말이 그 말, 로마 시민권을 떠올리는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시절 1600년대 영어 언어 문화에서는 freedom이 최선의 번역이었고, 지금 우리 언어 문화에서는 시민권도 전혀 문제 없는 번역이다. 이걸 최소한 오역이나 변개라고 치부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Service Guarantees Citizenship "군복무 하시면 시민권 무조건 드립니다~!!" (옛날 공상과학 영화 "스타십 트루퍼스"에 나오는 유명한 선전 문구 ㄲㄲㄲㄲㄲ)

세상에서는 어느 강대국의 Citizenship을 얻으려면 행 22:28처럼 돈을 왕창 내거나, 아니면 저 영화에서처럼 군복무라도 하면서 나라에 기여하고 왕창 고생해야 한다.
그러나 구원받은 크리스천은 순서가 반대다. 먼저 하늘나라 Citizenship부터 얻고 나서 롬 12:1처럼 Service, 아니 reasonable service를 실천한다.
'시민권'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유일한 우리말 킹 제임스 성경을 보시는 분이라면 이 점을 잘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그분의 기쁨을 위하여

계시록 4:11에 나오는 스물네 장로들의 찬송을 보면.. 여느 성경들은 "주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피조물들은 주의 '뜻'에 따라/의해/뜻대로 창조되었다"고 나와 있다. by your will, because of your will
그러나 킹 제임스 성경은 특이하게도 이 부분을 주의 '기쁨을 위하여/인하여' for thy pleasure 라고 번역했다. 말보회 한킹은 도로 '뜻'이라고 옮겼다.

그리스어 '델레마'는 다른 모든 구절에서는 그냥 '뜻, 의지, 의도'를 의미한다. (논리 용어 딜레마와는 무관한 단어)
주기도문에 나오는 "뜻이 이루어지이다", 누가복음에서 "내 뜻대로 말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요한복음 "나를 보내신 분의 뜻", 살전 5:18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내가 찾아본 바로는 전부 이 단어이다!

(1) KJV 이전에 계 4:11을 thy will 대신 thy pleasure라고 옮긴 역본은 내가 아는 한 비숍밖에 없다. KJV는 이 구절에서 비숍과 제네바 중, 비숍의 번역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건 일단 본문 자체 변개 문제는 아니고, 그 다음의 번역의 차이점 문제이다.
(비숍은 바른 본문 기반이긴 하지만 전 11:1 "빵을 젖은 얼굴 wet faces 위에 놔둬라"처럼 자신만의 튀는 오역이 존재하기도 했던 역본이다. ㅎㅎ)

(2) '뜻'과 '기쁨'이 모두 나오는 엡 1:5 같은 구절도 있다.
여기 말고도 여러 구절을 찾아보니, 기쁨을 뜻하는 원어는 원래 당연히 따로 있다.

(3) 계 4:11이 혹시 히 12:10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그걸 비교해 봤다.
"육신의 아버지는 자기가 기뻐하는 대로 우리를 징계했거니와" 이거야말로 '자기 마음대로/뜻대로'와 '자기 기분 좋을 대로'가 상호 교차 가능하지 않겠는가? 참고로 구약에도 "주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행하셨음이니이다" (욘 1:14) 같은 표현이 있으며, 이 역시 '자기 마음대로, 뜻대로'와 다를 바 없는 의미라 하겠다.

하지만 히 12:10에서 쓰인 원어는 계 4:11과의 접점이 의외로 전혀 없었다.
물론, "기뻐하는 대로(= 멋대로 마음대로라는 뉘앙스) 징계"와 "숭고하고 심오한 기쁨을 위해 창조"는 어감과 심상 자체가 서로 동일하지 않다는 건 감안할 점이다.
그러니 이쯤 되면.. 사람마다 어떤 언어관 성경관을 가졌느냐에 따라서 판정이 달라진다.

(1) 그냥 평범하게 원어 원문이나 헬라어 사전을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KJV가 혼자 특이하게 번역했거나 심지어 오역을 했네~ 헬라어로 보니 '뜻' will이 맞네?"라고 말하고 코웃음 치며 간단하게 넘어간다.

(2) 그게 아니라 킹의 번역을 존중하는 사람이라면 "여기서는 그냥 뜻이 아니라 기쁨이 수반된 뜻이기 때문에 킹이 일부러 다르게 번역했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인다. (영킹은 어린 시절부터 히브리어 그리스어를 일상적으로 팠던 미친 석학들 47명이 각자가 성경을 전부 번역한 뒤, 그걸 서로 대조하고 14번이나 검토하는 식으로 왕창 빡세게 만들어졌다는 걸 생각해 보시길..)
마치 빌 4:1 '나의 기쁨'처럼 피조물들이 창조되어 존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창조를 하셨고 실제로 기쁨을 얻으셨다.

(3) 그런데 '뜻'이라는 원어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진짜 오로지 영어 KJV의 표현 for thy pleasure만 보면..
좀 의역 내지 확장된 해석이 추가로 나올 수 있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사명.. 아니 하나님 기쁨조의 사명을 띠고 창조되었다"처럼 된다.
빌 4:1이 아니라 군인은 자기 상관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딤후 2:4 같은 논리가 된다. 이쯤 되면 원래 '뜻'이라던 그리스어하고는 꽤 멀어지는 것 같다. ^^

당연히 교리적으로야 우리는 행실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게 마땅하다.
하지만 아기가 갓 태어나서 부모가 기쁜 것하고, 그 애가 커서 효도해서 부모가 기쁜 건 조금 다른 차원인 것도 사실이리라. 계 4:11은 무슨 기쁨을 말하는 걸까?

계 4에서 장로들의 찬송은 그렇잖아도 하나님의 권능과 주권을 얘기하는 문맥이다. 그러니 "뜻대로 창조" 1, 2번이 일면 더 어울려 보인다.
하지만 정말 원어를 생까고 영어 킹에서만 발견되는 계시와 교훈을 찾자면 3까지도 확장 가능하다. 영어 전치사 for, in, of 따위는 무진장 중의적이고 함축적인 단어이니까.

킹 빌리버들의 믿음에 따르면, 성경엔 문맥에 벗어난 말도 갑자기 툭 튀어나올 수 있다. 시편 12편에서 온통 경건한 자, 가난한 자, 학대받는 자, 이스라엘 백성 얘기를 하다가도 끝에 갑자기 말씀을 영원히 온전히 보존한다는 얘기가 뜬금없이 나올 수도 있을 정도니까.

이런 구절에서 킹을 단순히 잘 번역된 성경, 바른 본문에서 번역된 성경 정도로만 아는 사람과.. 아예 원어를 초월하는 계시가 담긴 더 뛰어난 성경(!!!)이라고 보는 사람의 관점이 미묘하게 달라진다. =_=;;

3. 기뻐하라 / 세굿빠

고린도후서의 끝부분인 13:11 말이다. "끝으로 형제들아.. finally, brethren" 다음에..
어떤 성경은 "안녕히 계세요, 바이바이, 잘 있으라"(farewell, goodbye)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성경은 "기뻐하라"(rejoice)라고 되어 있다. 영어 KJV는 전자인데, 한킹은 후자를 택했다.;; 어찌 된 일일까?

이 역시 원어로 '카이로'.. '기뻐하라'와 같은 단어이기 때문이다. 살전 5:16의 그 유명한 "항상 기뻐하라", 그리고 기쁨이 넘치는 옥중서신 빌 4:4의 "기뻐하라"..
심지어 같은 고린도후서 13장의 바로 앞 9절의 "기뻐하라"와도 같은 단어이다. 하지만 KJV는 거기서 이미 '기뻐하라'가 나왔으니 또 '기뻐하라'일 것 같지는 않아서 작별인사를 선택한 것 같다.

이건 역사적인 근거도 아까 계 4:11보다는 더 갖추고 있다. KJV 이전의 틴데일, 그레이트, 비숍이 다 farewell이었다.
심지어 NIV, NRSV 같은 일부 변개된 계보의 성서도 farewell이고 우리말 공동번역 성서도 아마 의역하다 보니 작별인사로 옮겼다. 그러니 이건 변개나 오역 문제가 아니다.

다만, 9절과 11절에는 perfection(온전함)이라는 말이 공통으로 나온다. 그래서 11절에서도 '기뻐하라'를 써 주면 9절과 11절이 모두 '기뻐하다'와 '온전함/온전하라'가 나와서 뭔가 호응이 이뤄진다.
그리고 11절은 어차피 live in peace.. 말 그대로 "평안히 지내라"라는 작별인사 의미가 따로 들어있기도 하다는 점 역시 참고할 사항이다. ㄲㄲㄲㄲㄲ

(1) 여담으로.. 행 23:30은 편지를 인용하는 부분의 결말부인데.. 여기서도 킹 제임스 성경만이 끝인사 farewell이 붙어 있다.
고후 13:11과 행 23:30을 보면.. KJV 번역자들은 farewell이라는 작별인사를 좀 좋아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 사도행전 구절은 그냥 원문 계보의 차이라고 한다. 변개된 본문에서는 그리스어에서부터 기뻐하라고 나발이고 끝인사 자체가 빠져 있다. 그러니 고후 13:11과는 상황이 좀 다르다.

이런 걸 강경 영킹주의자가 발견하면 farewell과 관련하여 원어가 아니라 영킹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영적 진리~ KJV의 우수성~ 어쩌구 하면서 얼마든지 말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 나야 그게 구체적으로 뭔지는 모르지만 그 바닥을 오래 경험해 봤기 때문에 거기서 어떤 식으로 주장을 하는지 패턴을 안다.

(2) 끝으로 NIV의 경우, 1984년판 NIV 첫판은 "형제들아, good-bye"였다. 그러다가 2011년판 개정 NIV는 "형제 자매님들, 기뻐하십쇼~!"로 바뀌었다. 형제가 '형제 자매'라고 바뀌고, 저 단어를 '기뻐하라'라고 옮기는 게 요즘 번역 트렌드이기는 한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23/11/05 08:35 2023/11/0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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