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성경 번역 이슈

1. 혼을 얻는 자

잠 11:30 he that winneth souls is wise.
통상적으로는 주변 사람들에게서 호의를 얻고 마음을 사서 다들 자기 편으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은 지혜롭다~~ 이런 뜻이다. 그러나 좀 더 영적으로 들어가면 이건 '전도'하는 거.. 복음 전해서 남을 회개시키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끌어 온다는 뜻이 된다. soul winning.

말씀 보존 학회의 한킹은 저 구절이 동사가 win이라는 이유로 "혼들을 이겨 오는 자"라고 정말 단순무식 투박하게 번역했다. =_=;;
"우리 교회는 거리설교를 통해 매년 수십 명의 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이겨 오고 있습니다" 자기들끼리 말도 저렇게 전투적으로 한다. 옛날 개역성경의 "강하고 담대하라"처럼 언어에 대한 비표준 확장이라고 봐야 할지.. ^^

당연한 말이지만 저건 win a prize(상을 탄다/받는다) 할 때의 win이다. 경쟁 상대를 꺾거나 제쳐서 이긴 것은 beat라고 한다.
예전에 언급한 적이 있는 예시이다만, "1994년 올해의 명작 게임이라는 영예를 차지하고(win) 싶은 작품이 있다면 먼저 Doom부터 제쳐야/능가해야(beat) 할 것이다." 이렇게 말이다.

세상을 이기거나 마귀를 이기는 것도 아니고 혼들을 이기는 건 뭘까.. =_=;;
그렇다고 평범하게 get obtain acquire과 아무 차이 없이 얻는다고만 하면 성이 안 차니.. '쟁취'라는 말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개인적으로 했다.
오, 근데 유일하게 표준역이 저기서 쟁취라고 번역했구나. 우리말 성경 중에서는 첫 사례인 것 같다.
표준역이 논란이 많은 역본이긴 하지만.. 저기서는 단어를 잘 고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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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not a prize to be won! 나는 무슨 남자들의 전리품이 아니라구요! (디즈니 알라딘에서 자스민 공주의 대사. Prince Ali 노래가 끝나고 얼마 뒤에..ㄲㄲㄲㄲㄲ)

2. 강하고 담대하라?

우리말 국어에서는 형용사 뒤에 명령문이 바로 오는 게 잘못됐다면서 여호수아의 저 유명한 말 "강하고 담대하라"라든가 예수님의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가 비문(문법에 어긋난)이라고 비판이 제기되곤 했다.
그런데 기껏 대안이란 게 훨씬 더 길어지고 장황해지고 거추장스러워진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해져라"이면.. 어떡해야 할까?

그리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벧전 1:16) 같은 구절도 있다. 표준어를 준수했다는 최신 우리말 성경들도 이 구절은 거의 건드리지 않고 놔두고 있다.
'거룩하다'도 형용사인데? 동사가 아니기 때문에 '거룩한다'라는 말이 없는 거다. 쉽게 말해 '거북하다'(불편하다)와 완전히 동일한 품사이다.

하지만 '거룩하라'라는 말이 너무 간결하고 잘 와 닿는다. "거룩해져라, 거룩하게 살아라" 이렇게 군더더기를 붙일 필요가 없고, 저걸 그대로 그냥 성경 언어적 허용이라고 정착시키는 게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난 그렇게 본다.
우리말은 '맞다/틀리다/맞는/알맞은'처럼 근본적으로 형용사와 동사의 경계가 애매한 구석이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새로 번역되는 우리말 성경은 현행 언어 규범을 가능한 한 따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거기에만 절대적으로 얽매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한킹은 흠정역 같은 후대의 역본 대비, 개역성경 스타일의 간결함이 있어서 더 잘 읽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되"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가 더 간결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울나라 헌법도 생각해 보자. 1987년 개헌 이후에 맞춤법이 개정되는 바람에 지금 관점에서 맞춤법에 어긋난 문장(..."투표에 붙이다")이 생겨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헌법을 호락호락 또 수정하지는 않는다. 그건 개헌이라는 엄청난 과업이 되어 버리며, 헌법에는 무슨 위키백과 같은 '사소한 수정'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헌법이 그러한데 하물며 성경 본문에도 그런 정도의 권위와 무게감이 있어야하지 않겠나 싶다.

3. help meet for him

한국어 '맞다'뿐만 아니라 영어에도 드물게 형용사-동사 품사통용이 있는 것 같다. 대표적으로 meet.
옛날 영어에서는 '만나다'가 뭔가 '만족시키다, 충족시키다' it meets the requirement으로 확장되고, 그게 '-에 적합한, 알맞은'이라는 형용사로 더 확장된 듯하다.

그게 바로 창세기 2:18에서 아담을 위한 합당한 조력자(help meet for him)라고 번역되었다. meet는 형용사이므로 "help meet - for him"이 아니라 "help - meet for him"이라고 끊는 게 바람직하겠다.

근데 저 문맥에서 조력자란 곧 '배우자'이지 않은가?
이게 얼마나 임팩트가 컸으면 helpmeet라는 한 단어가 생겨서 배필, 배우자라는 뜻이 됐고.. helpmate라는 말까지 파생돼 나왔다. 이거는 마치 비키니에서 모노키니가 나온 것처럼, 어원상 관계는 없지만(meet ≠ mate) 걍 비슷한 조어가 튀어나온 것으로 보인다.

즉, help가 먼저이고 helpmeet는 후대의 해석 내지 파생 의미이다. 그러니 성경 번역을 helpmeet로 미리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조력자/도우미가 1차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help는 굳이 helper이라고 하지 않아도 help만으로 어느 정도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뜻이 얼추 들어있는가 보다. 물론 반대로 helper이라고 해서 굳이 사람일 필요가 없고 사물, 기계가 모두 가능하다.
게다가 help me라고 외치면 "사람 살려!!"가 되니.. help가 생각보다 인간적인 단어인 것 같다.

4. God forbid? The LORD forbid?

성경에는 그냥 No를 넘어서 천부당만부당, Absolutely not이나 May it never be 같은 강한 부정을 나타내는 관용구가 있다. 킹 제임스 성경은 이를 God forbid라고 번역했다.
성경에서 이 표현을 제일 많이 사용한 책은 로마서이다. "그럼 그렇다고 우리가 이렇게 하리? ㄴㄴ 절대 그럴 수 없음" 이런 패턴으로 말이다.

그래서 킹 제임스 진영에서는 이 구절에 대해 "반드시 God을 살려서 '하나님이 금하시리'라고 번역해야 한다" vs "아니다, 저기서 God은 원어에도 없는 그냥 영어의 관용 어휘일 뿐이다~ 저거 한 덩어리 전체가 '절대 안 됨'이라는 뜻이다" 갖고 치고 받고 싸우는 일이 많다.
본인은 이런 소모적인 논쟁에 진지하게 가담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 문제에 대해 뭔가 가타부타 의견을 내려면 다음 경우도 생각해서 일관되게 적용 가능한 답을 제시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1) 성경엔 God forbid뿐만 아니라 God save the king (국왕 폐하 만세 vs 하나님이 울 국왕을 보우하시리)라든가 God speed (축복 인사. 요즘으로 치면 God bless you에 가까운..)도 있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 전자는 구약 성경 역사서에서 두루두루 나오는 편이지만, 후자는 요한이서에서만 딱 두 번 등장하는 희귀 관용구이다.

(2) 짤막한 God forbid 감탄사뿐만 아니라 "God forbid that ..." 이런 문장도 있다. 창세기 44장에서 요셉의 형들이 "저희가 감히 파라오님의 술잔을 훔쳐 가다니요~ 저흰 절대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럴 때 최초로 이 문장이 쓰였다. God forbid를 '하나님이 금하시리라'라고 옮기려면 창 44:7이나 창 44:17도 그렇게 옮길 수 있겠는지를 따져 봐야 한다.

(3) 그리고 끝으로.. 성경엔 God forbid만 있는 게 아니라 the LORD forbid도 구약에 있다. "주가 금하신다"..이고, 개역성경 용어로는 "여호와가 금하신다"이다. 단, 이건 단독 감탄사는 아니고 문장 형태만 있다.
삼상 24:6, 26:11에서 다윗이 사울 왕을 해코지할 수 없다고,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사람에게 내가 감히 손을 댄다니~~~ "절대 그리할 수 없다"라고 말할 때 쓰였다.
그리고 왕상 21:3에서 나봇이 아합 왕에게 조상 대대로 살아 온 땅을 처분한다니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말할 때도 이 표현이 쓰였다.

내가 궁금한 건.. 우리말 성경들이 God forbid의 문장형은.. "결코 그럴 수 없다"라고 옮긴 반면, The LORD forbid의 문장형은.. "주께서 금하신다"라고 옮겼다는 것이다. 개역성경 이래로 표킹을 제외한 킹 계열 역본들이 모두 동일하다. (표준역은 '하나님이 금하신다'를 첫 시도했음)

이렇게 LORD forbid와 God forbid의 번역이 달라질 만한 이유가 원어 차원에서나 다른 이유로 인해 있는지 개인적으로 궁금하다.

하긴, 우리말에도 딱히 하나님을 진심으로 의식하지 않는 "하나님맙소사" 이런 말도 있고, 영어 Good-bye도 god be with you에서 유래되기는 했다고 들었다. 재채기 인사인 Bless you도 그렇고..
그리고 예전에 영국에서 찰스 3세 국왕이 즉위했을 때 국가적으로 참 오랜만에 God save the king 인사가 울려퍼졌고.. 그게 자막에서는 우리말 애국가 가사 "하나(느)님이 보우하사"처럼 번역돼 나갔었다. 흥미로운 일이다.

사실 지금이야 우리말 '만세'는 hooray banzai-_-라는 평범한 감탄사로 많이 쓰이지만, 원래는 국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할 때만 쓰이는 아주 존귀한 단어였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그 만세를 국왕 폐하가 아니라 자기 나라에다가 끌어다 쓴 삼일 운동이 정말 파격적이고 민주적인 발상이었으니 말이다.
이를 감안하면 God save the king을 "국왕 폐하 만세"라고 옮긴 건 더욱 적절한 용례인 것 같다. 영어의 God이 우리말의 만세에 대응하는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5. 하루살이를 걸러내나, 모기에 긴장하나

성경의 마 23:24는 대략 "이 눈깔이 썩은 가이드놈들아. 니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잘도 꿀꺽하네?" 이런 의미의 책망 구절이다. ㄲㄲㄲㄲㄲ
개념적으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같은 구조이다. 그리고 본질적이지 않은 디테일에는 왕창 목숨 걸면서 진짜 큰 잘못은 슬쩍 답습하고 넘기는 부조리가 잘못됐다는 뜻이다.

저 구절에서 후반부, 낙타를 삼킨다는 말은 지구상의 모든 성경 역본들 간에 이견이 없다.
하지만 전반부, strain at a gnat은 역본마다 번역이 좀 갈리는 편이다.

먼저 gnat이 하루살이냐 모기냐를 갖고 갈리는데, 이건 이 글에서는 논외로 하겠다.
다음 strain가 진짜 문제다. "힘주다, 끙끙대다, 애쓰다, 신경 곤두세우다"인지 아니면 '걸러내다'인지가 갈린다. 참고로 현대에 strainer라고 하면 주방에서 쓰이는 걸러내는 동그란 체를 뜻한다.

거의 모든 성경들.. 심지어 킹 계열이라는 한킹, 근본역 표준역까지 다 "하루살이/모기를 걸러낸다"라고 옮겼다. 비킹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딱 하나.. 흠정역만이 유일하게 "모기에 긴장하고"라고 옮겼다. 뭐, 이것도 '대언'과 마찬가지로 안티오크 권위역에서 처음으로 유래된 번역이다.

서로 자기 번역이 맞다고 스트롱 성구 사전이 어떻고 웹스터 영영사전이 어떻고 심지어 원어 사전이 어떻고 막 떠드는데, 내가 이 문제를 접근하는 방식은 이렇다.

strain out도 아니고 strain at이라면
뭔가를 '걸러 내는(out)' 것보다는 '-에(at) 신경이 곤두선다, 긴장한다'라는 의미가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흠정역 측의 견해에 일면 동의한다.

하지만,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해 보자.
모기한테 왜 긴장하는데? 왜 눈 부릅뜨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난리인데?

모기가 무서워서 긴장할 리는 없다. 쬐끄맣지만 성가신 놈이 있으니까, 잡으려고, 걸러내려고 저러는 거다.
불 끄고 침대에 누웠는데.. 짜증나는 앵앵~ 소리가 들릴 때.
잡가시가 왕창 많은 생선살을 씹어먹으려 할 때.. 그 심정 말이다. =_=;;

이런 차원에서 "모기한테는 긴장하고"라는 말이 결국은 "모기를 걸러내고"라는 말과 다를 바 없다고 여겨진다.
'긴장하고'는 표면적인 동작이고, '걸러내고'는 본질적인 의미이다.
"선물은 넙죽넙죽 받으면서"라는 의미를 "선물만 보면 입 헤 벌리면서", "선물만 있으면 손 잘도 내밀면서"라고 표현한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오키?

피터 럭크만이 저기서 at은 out이라는 뜻과 다를 바 없다고 얘기까지 했다는데.. 당연히 문법적으로야 at이 on도 아니고 어떻게 out이랑 같을 수 있냐? 저 구절에 한해서 화용론적으로 동치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니 킹의 영어 표현을 존중해서 "모기에 긴장하고"라고 번역을 하려거들랑, 여기 긴장이 최소한 무서워서 쫄아서 긴장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옆의 성경 교사가 보충 설명을 하면 좋을 것 같다. 저 표현이 '걸러낸다'라는 의미와 별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차라리 두 동작을 합쳐서 "기를 쓰고/눈 부릅뜨고 걸러내면서" 이렇게 표현하는 것도 괜찮을 수 있겠다. win을 "쟁취하다"(이겨서 얻음)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은 한킹이 영어 킹 제임스 성경을 번역한 게 아니라고 비판받는 다른 여러 표현들도 이런 식으로 해명이 가능하다.
작은 숲(외형) vs 아세라(정체, 실체)라든가, 생활방식 vs 시민권 따위 말이다. 결국은 같은 뜻이다.
차라리 의역이 지나치다고(?) 비판할지언정, 최소한 오역이나 변개는 아니다.

Posted by 사무엘

2024/03/24 08:35 2024/03/2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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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민권

말보회 한킹에는 영어 KJV에는 존재하지 않는 '시민권' citizenship이라는 단어가 두 군데 나온다.
하지만 1600년대에 그런 직접적인 단어가 없었을 뿐이지, 그 문맥에서 그 단어의 실질적인 의미는 시민권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고려할 필요가 있다. 로켓이라는 단어가 없던 시절에 로켓을 'NASA 제트 추진 연구소'에서 개발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먼저 빌 3:20이다.
conversation은 단순히 '소통/대화수단(...)'이 아니라 사람의 행실이라는 뜻으로 신약에서 쓰였다. 베드로전/후서에서 타인에게 모범이 될 만한 것의 사례로 특별히 자주 쓰였다.
쉽게 말해 찬송가 가사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망령된 '행실'을 끊고"에서 저 '행실'이 conversation과 개념적으로 정확하게 대응한다.

그런데 딱 하나 빌 3:20 "우리의 conversation은 in heaven 하늘에 있다"...;; 이게 무슨 뜻일까?
이건 우리의 영적 지위 얘기이다. 이 세상에서 드러나는 행실 문맥이 절~~대로 아니다. 아무리 "conversation = 행실" 영어 직역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그래서 한킹을 제외한 나머지.. 먼 옛날의 권위역부터 시작해 흠, 근, 표.. 모두 이 단어를 "생활 방식"이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방식'은 성경의 다른 구절에서는 거의 다 manner에 대응한다. 즉 저 말을 영어로 역번역하면 오히려 manner of conversation이 된다.

그럼 어차피 빌 3:20의 conversation은 벧후 3:11이나 벧전 1:15 같은 행실이 아닌데.. 여기서만 예외적으로 '생활 방식'이라고 새로운 말을 만들 바에야 '시민권'이 뭐가 대수인가?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
미국에 90일 관광비자만 받고 놀러 와 있는 사람이랑.. 아예 미국 영주권· "시민권"이 있고 거기 정착해서 직업도 갖고 있는 사람은 미국 땅에서의 "생활 방식"이 당연히 서로 완전히 다르다. 이런 관계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빌 3:20 말고 또 시민권이 등장하는 곳은 바로... 행 22:28이다. 성경 스토리 좀 들어 본 분이라면 다들 아실 스토리 되시겠다.

-- 로마군 사령관: 난 돈 왕창 많이 갖다바쳐서 로마 시민권을 간신히 취득했는데..
-- 바울: 난 모태 로마인이오.

영킹은 이 부분이 시민권이 아니라 '자유' freedom이라고 돼 있다.
이건 그냥 옛날 성경과 현대 성경의 용어 차이이지, 변개 이슈가 아니며 KJV만의 교리적으로 우수한 번역이라고 간주하기도 어려워 보인다. KJV 이전 계보의 영어 성경들도 다 freedom이라고 옮겼기 때문이다.

왜냐고? 이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같은 근대적인 시민 계층, 민주주의, 상비군, 국가 체계 같은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로마인이면 로마인이지, 로마 시민권자??? 이런 개념이나 용어가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후천적 로마인"으로서의 권한과 혜택을 freedom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영어 freedom을 있는 그대로 번역하지 않은 거잖아~~" ㅇㅇ 그렇긴 하다.
그런데 이 본문이 교리적으로 무슨 갈라디아서 4장 같은 문맥인가? free하지 않은 사람은 자유를 박탈당한 종 노예인가? 저 사람은 무슨 땅거지 노예였다가 극적으로 해방된 걸까?
그 당시에 로마 시민이 아닌 유대인이나 다른 외국인들은 사회적 신분이 전부 창세기의 하갈 같은 처지였을까? 그렇지 않다.

로마 시민은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고, 당장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것처럼 고문을 동반한 심문을 받지 않았으며.. 재판 받다가 억울하면 항소해서 로마에 직접 가서 재판 받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어떤 중죄 반역죄를 지어도 십자가형으로 처형 당하지는 않았다.

로마인이 아닌 사람은 저 정도의 권한이 없고 생활이 다른 제약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로마 제국 내에서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한 비참한 사람은 아니다. 그게 아니어서 저 사령관이 밑바닥 노예에서 해방된 거라면, 평민이 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지 과연 어떻게 요즘으로 치면 대령~준장 급의 고위급 군인이 될 수 있었을까? 이것도 생각할 점이다.

1600년대 당시에 영킹으로 행 22:28을 읽었던 영어권 화자나, 지금 우리가 한킹으로 행 22:28을 읽으나 결국 그 말이 그 말, 로마 시민권을 떠올리는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시절 1600년대 영어 언어 문화에서는 freedom이 최선의 번역이었고, 지금 우리 언어 문화에서는 시민권도 전혀 문제 없는 번역이다. 이걸 최소한 오역이나 변개라고 치부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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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vice Guarantees Citizenship "군복무 하시면 시민권 무조건 드립니다~!!" (옛날 공상과학 영화 "스타십 트루퍼스"에 나오는 유명한 선전 문구 ㄲㄲㄲㄲㄲ)

세상에서는 어느 강대국의 Citizenship을 얻으려면 행 22:28처럼 돈을 왕창 내거나, 아니면 저 영화에서처럼 군복무라도 하면서 나라에 기여하고 왕창 고생해야 한다.
그러나 구원받은 크리스천은 순서가 반대다. 먼저 하늘나라 Citizenship부터 얻고 나서 롬 12:1처럼 Service, 아니 reasonable service를 실천한다.
'시민권'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유일한 우리말 킹 제임스 성경을 보시는 분이라면 이 점을 잘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그분의 기쁨을 위하여

계시록 4:11에 나오는 스물네 장로들의 찬송을 보면.. 여느 성경들은 "주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피조물들은 주의 '뜻'에 따라/의해/뜻대로 창조되었다"고 나와 있다. by your will, because of your will
그러나 킹 제임스 성경은 특이하게도 이 부분을 주의 '기쁨을 위하여/인하여' for thy pleasure 라고 번역했다. 말보회 한킹은 도로 '뜻'이라고 옮겼다.

그리스어 '델레마'는 다른 모든 구절에서는 그냥 '뜻, 의지, 의도'를 의미한다. (논리 용어 딜레마와는 무관한 단어)
주기도문에 나오는 "뜻이 이루어지이다", 누가복음에서 "내 뜻대로 말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요한복음 "나를 보내신 분의 뜻", 살전 5:18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내가 찾아본 바로는 전부 이 단어이다!

(1) KJV 이전에 계 4:11을 thy will 대신 thy pleasure라고 옮긴 역본은 내가 아는 한 비숍밖에 없다. KJV는 이 구절에서 비숍과 제네바 중, 비숍의 번역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건 일단 본문 자체 변개 문제는 아니고, 그 다음의 번역의 차이점 문제이다.
(비숍은 바른 본문 기반이긴 하지만 전 11:1 "빵을 젖은 얼굴 wet faces 위에 놔둬라"처럼 자신만의 튀는 오역이 존재하기도 했던 역본이다. ㅎㅎ)

(2) '뜻'과 '기쁨'이 모두 나오는 엡 1:5 같은 구절도 있다.
여기 말고도 여러 구절을 찾아보니, 기쁨을 뜻하는 원어는 원래 당연히 따로 있다.

(3) 계 4:11이 혹시 히 12:10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그걸 비교해 봤다.
"육신의 아버지는 자기가 기뻐하는 대로 우리를 징계했거니와" 이거야말로 '자기 마음대로/뜻대로'와 '자기 기분 좋을 대로'가 상호 교차 가능하지 않겠는가? 참고로 구약에도 "주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행하셨음이니이다" (욘 1:14) 같은 표현이 있으며, 이 역시 '자기 마음대로, 뜻대로'와 다를 바 없는 의미라 하겠다.

하지만 히 12:10에서 쓰인 원어는 계 4:11과의 접점이 의외로 전혀 없었다.
물론, "기뻐하는 대로(= 멋대로 마음대로라는 뉘앙스) 징계"와 "숭고하고 심오한 기쁨을 위해 창조"는 어감과 심상 자체가 서로 동일하지 않다는 건 감안할 점이다.
그러니 이쯤 되면.. 사람마다 어떤 언어관 성경관을 가졌느냐에 따라서 판정이 달라진다.

(1) 그냥 평범하게 원어 원문이나 헬라어 사전을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KJV가 혼자 특이하게 번역했거나 심지어 오역을 했네~ 헬라어로 보니 '뜻' will이 맞네?"라고 말하고 코웃음 치며 간단하게 넘어간다.

(2) 그게 아니라 킹의 번역을 존중하는 사람이라면 "여기서는 그냥 뜻이 아니라 기쁨이 수반된 뜻이기 때문에 킹이 일부러 다르게 번역했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인다. (영킹은 어린 시절부터 히브리어 그리스어를 일상적으로 팠던 미친 석학들 47명이 각자가 성경을 전부 번역한 뒤, 그걸 서로 대조하고 14번이나 검토하는 식으로 왕창 빡세게 만들어졌다는 걸 생각해 보시길..)
마치 빌 4:1 '나의 기쁨'처럼 피조물들이 창조되어 존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창조를 하셨고 실제로 기쁨을 얻으셨다.

(3) 그런데 '뜻'이라는 원어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진짜 오로지 영어 KJV의 표현 for thy pleasure만 보면..
좀 의역 내지 확장된 해석이 추가로 나올 수 있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사명.. 아니 하나님 기쁨조의 사명을 띠고 창조되었다"처럼 된다.
빌 4:1이 아니라 군인은 자기 상관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딤후 2:4 같은 논리가 된다. 이쯤 되면 원래 '뜻'이라던 그리스어하고는 꽤 멀어지는 것 같다. ^^

당연히 교리적으로야 우리는 행실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게 마땅하다.
하지만 아기가 갓 태어나서 부모가 기쁜 것하고, 그 애가 커서 효도해서 부모가 기쁜 건 조금 다른 차원인 것도 사실이리라. 계 4:11은 무슨 기쁨을 말하는 걸까?

계 4에서 장로들의 찬송은 그렇잖아도 하나님의 권능과 주권을 얘기하는 문맥이다. 그러니 "뜻대로 창조" 1, 2번이 일면 더 어울려 보인다.
하지만 정말 원어를 생까고 영어 킹에서만 발견되는 계시와 교훈을 찾자면 3까지도 확장 가능하다. 영어 전치사 for, in, of 따위는 무진장 중의적이고 함축적인 단어이니까.

킹 빌리버들의 믿음에 따르면, 성경엔 문맥에 벗어난 말도 갑자기 툭 튀어나올 수 있다. 시편 12편에서 온통 경건한 자, 가난한 자, 학대받는 자, 이스라엘 백성 얘기를 하다가도 끝에 갑자기 말씀을 영원히 온전히 보존한다는 얘기가 뜬금없이 나올 수도 있을 정도니까.

이런 구절에서 킹을 단순히 잘 번역된 성경, 바른 본문에서 번역된 성경 정도로만 아는 사람과.. 아예 원어를 초월하는 계시가 담긴 더 뛰어난 성경(!!!)이라고 보는 사람의 관점이 미묘하게 달라진다. =_=;;

3. 기뻐하라 / 세굿빠

고린도후서의 끝부분인 13:11 말이다. "끝으로 형제들아.. finally, brethren" 다음에..
어떤 성경은 "안녕히 계세요, 바이바이, 잘 있으라"(farewell, goodbye)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성경은 "기뻐하라"(rejoice)라고 되어 있다. 영어 KJV는 전자인데, 한킹은 후자를 택했다.;; 어찌 된 일일까?

이 역시 원어로 '카이로'.. '기뻐하라'와 같은 단어이기 때문이다. 살전 5:16의 그 유명한 "항상 기뻐하라", 그리고 기쁨이 넘치는 옥중서신 빌 4:4의 "기뻐하라"..
심지어 같은 고린도후서 13장의 바로 앞 9절의 "기뻐하라"와도 같은 단어이다. 하지만 KJV는 거기서 이미 '기뻐하라'가 나왔으니 또 '기뻐하라'일 것 같지는 않아서 작별인사를 선택한 것 같다.

이건 역사적인 근거도 아까 계 4:11보다는 더 갖추고 있다. KJV 이전의 틴데일, 그레이트, 비숍이 다 farewell이었다.
심지어 NIV, NRSV 같은 일부 변개된 계보의 성서도 farewell이고 우리말 공동번역 성서도 아마 의역하다 보니 작별인사로 옮겼다. 그러니 이건 변개나 오역 문제가 아니다.

다만, 9절과 11절에는 perfection(온전함)이라는 말이 공통으로 나온다. 그래서 11절에서도 '기뻐하라'를 써 주면 9절과 11절이 모두 '기뻐하다'와 '온전함/온전하라'가 나와서 뭔가 호응이 이뤄진다.
그리고 11절은 어차피 live in peace.. 말 그대로 "평안히 지내라"라는 작별인사 의미가 따로 들어있기도 하다는 점 역시 참고할 사항이다. ㄲㄲㄲㄲㄲ

(1) 여담으로.. 행 23:30은 편지를 인용하는 부분의 결말부인데.. 여기서도 킹 제임스 성경만이 끝인사 farewell이 붙어 있다.
고후 13:11과 행 23:30을 보면.. KJV 번역자들은 farewell이라는 작별인사를 좀 좋아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 사도행전 구절은 그냥 원문 계보의 차이라고 한다. 변개된 본문에서는 그리스어에서부터 기뻐하라고 나발이고 끝인사 자체가 빠져 있다. 그러니 고후 13:11과는 상황이 좀 다르다.

이런 걸 강경 영킹주의자가 발견하면 farewell과 관련하여 원어가 아니라 영킹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영적 진리~ KJV의 우수성~ 어쩌구 하면서 얼마든지 말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 나야 그게 구체적으로 뭔지는 모르지만 그 바닥을 오래 경험해 봤기 때문에 거기서 어떤 식으로 주장을 하는지 패턴을 안다.

(2) 끝으로 NIV의 경우, 1984년판 NIV 첫판은 "형제들아, good-bye"였다. 그러다가 2011년판 개정 NIV는 "형제 자매님들, 기뻐하십쇼~!"로 바뀌었다. 형제가 '형제 자매'라고 바뀌고, 저 단어를 '기뻐하라'라고 옮기는 게 요즘 번역 트렌드이기는 한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23/11/05 08:35 2023/11/0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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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의 원천

우리나라엔 그 이름도 유명한 말씀 보존 학회(이하 말보회)라는 출판사가 있어서 한글 킹 제임스(이하 한킹)라는 이름의 성경을 출간· 판매하고 있다. 내년이면 발간 30주년이 된다. 이 단체는 전국 각지에 '성경 침례 교회'라고 자기네 성경을 사용하는 침례 교회들을 두고 있기도 하다.

현실적으로 성경을 번역했다면 자기네 성경을 써 줄 기존 교회· 교단을 물색하거나, 아니면 자기들이 직접 교회· 교단을 개척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기네 성경을 인용해서 독자적인 내용의 책도 많이 내면서 세력을 키워야 한다. 그리하지 않으면 그 성경 역본은 현실의 기독교계에서 쓰이지 못하고 그냥 듣보잡 군소 번역으로 전락한 채 사라질 테니 말이다.
그래서 말보회는 딱 이 전략을 충실히 수행해 왔다. 성경은 한킹을 밀고, 이를 기반으로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를 잔뜩 출간한 것이다.

말보회는 대외적으로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를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고, 이 때문에 이상한 이단 소리를 들었다. 물론 순수하게 성경관 신념 때문에만 이단 소리를 들은 건 아니고, 그들 고유의 간증 상실 삽질과 흑역사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이 글에서는 논하지 않겠다. 진짜 중요한 논란거리는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말보회에서 내놓은 한킹은 정작 같은 킹 진영 내부에서는 참 아이러니하게도 영어 KJV를 그대로 번역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왜 그렇냐 하면 한킹은 언뜻 보기에 KJV의 영단어를 그대로 번역하지 않은 듯한 표현과 어휘가 여럿 있기 때문이다.

허나, 한킹 측의 입장을 변호해 보자면 걔들도 할 말은 있다. 기계적인 직역을 안 했을지언정,

  • grave 무덤 // 음부 (문자적인 무덤 묫자리가 아니라 구약 시대의 지하 사후세계 자체를 나타낼 때. 낙원+지옥 통틀어)
  • 환난 (일상적인 역경 고난) // 환란 (미래의 유대인 대환란)
  • 나라 // 왕국
  • 위하여 (for sinner) // 인하여 (for sin)
  • 육체 안에 // 육신으로
  • 심지어 그리스(Greece) // 헬라(Greek) 등등

이런 걸 나름 자기 원칙대로 임의로 구분을 많이 해 놨다. 영어로는 같은 단어인데. ㅎㅎ
저런 거 말고 루시퍼, 갈보리, 이스터, 다시 채우다(창 1:28), 순교자, 말씀의 젖으로 자라라(벧전 2:2), 하나님 자신을 어린양으로(창 22:8).. 이런 건 한킹도 당연히 영어 KJV의 번역을 그대로 따랐다. 애초에 한킹의 존재 의의가 저런 걸 공론화하고 한국어로 반영한 거의 최초의 우리말 성경이니까 말이다.

한킹의 번역 방침 내지 스타일에 공감되지 않아서 한킹을 안 쓰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게 변개 오역이라고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영어 그대로 번역하지 않은 게, 최소한 아무 이유 없이 제멋대로 의역을 해서 그런 건 아니다.
영킹이 아니라 영킹의 번역 원천인 원어를 좀 참고한 것에 대해 너무 부정적인 편견을 가질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이 점을 알면 한킹을 읽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문득 드는 생각인데.. 한킹은 이름과 실체의 관계가 웹툰 '교도소 일기', (작가가 실제로는 구치소에만 갇혀 있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대구 성서 초등학교 '개구리 소년' 사건 (실제로는 애들이 도롱뇽을 잡으러 갔다가 실종되고 살해당한 거지만)과 비슷하다고 느껴진다.

구치소나 도롱뇽 대신 더 친숙한 교도소나 개구리를 썼다고 해서 저 타이틀이 독자를 심각하게 악의적으로 기만하는 건 아니라는 점에서 말이다. 타이틀이 무엇이건 간에 "범죄자가 수용되는 국립호텔은 이런 험악한 시궁창이다" 내지 "초딩 꼬마들이 저렇게 천진난만하게 놀러 나갔다가 안타깝게 실종되고 살해당했다"라는 게 본질이고 핵심이니까 말이다.

마치 C++ 이후로 얘처럼 무식한(?) #include #define 전처리기나 다중 상속을 몽땅 구현한 프로그래밍 언어가 결코 다시 등장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한킹 이후의 소위 KJV 계열 역본 중에 한킹의 저런 독자적인 용어와 번역 스타일을 답습한 역본은 결코 다시 등장하지 않지 싶다.

게다가 한킹은 재판관기(사사기)처럼 일부 책 이름을 통째로 바꾸기도 했으며, 인명과 지명 표기도 ㅋㅌㅍ 음운을 첨가해서 자기 스타일로 많이 바꿨다. (스카랴, 스테판, 카나안 등)
이런 걸 한킹 말고 후대의 어느 진영이 수용하겠는가? 말보회는 이 분야의 선두 주자로서 우리나라 기독교계의 역사에 한 획을 긋긴 했다.

글쎄,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영킹은 변개되지 않은 원문에서 번역을 가장 잘한 역본 정도가 아니다. 원어 원문 성경보다도 더 뛰어난 계시이다~!!! 히브리어 그리스어의 중의성을 해소하고, 원어에 없던 미세한 뜻 변별과 운율까지 다 살려 줬다~!!" 이런 급이라면 한킹의 번역 스타일은 의미가 다소 퇴색할 것이다.

이 정도로 영킹을 극도로 지지하는 영어 순수주의자(?)가 보기에는 한킹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나온 흠정역조차도 순수(?) 영킹 번역이 아니며 100% 만족스럽지 못하다. 2020년대에 출간된 표준역은 그런 순수주의자 성향을 더 반영해서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그 대신 다른 쪽으로 논란거리가 있다.

그래서 오늘도 한쪽에서는 상대방을 보고 "맨날 수시로 잠수함 패치되어 온 성경이 무슨 놈의 최종 권위냐"라고 까고, 거기서는 이쪽을 향해 "한번 주어진 영감이 쭉 전수되고 보존되는 거지, 번역본에 무슨 영감이 이중 삼중으로 임하냐" 이러면서 맞받아치는 일이 되풀이된다.

이건 내가 보기엔 그냥 영감이나 최종 권위라는 단어에 대해 서로 생각하는 정의가 달라서 벌어지는 말장난이다. 자기네가 번역한 우리말 성경에다가 차마 최종 권위라는 말은 못 붙이니, 거기서도 그래도 이게 perfect 하고 온전 완전하다면서 같은 용도의 다른 수식어를 붙일 뿐..
내 공식 입장은 "아무나 이겨라"다. -_-;; 그럼 다음으로 최종 권위라는 개념에 더 자세히 얘기해 보고자 한다.

2. 최종 권위

옛날에.. 과학계에서는 1킬로그램의 정의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이 킬로그램 원기의 질량을 그대로 1kg이라고 한다" 이러던 시절이 있었다.

진짜배기 원기는 세계에 단 하나만 존재해야 했고, 워낙 귀하신 몸이니 함부로 여기저기 움직이고 활약할 수 없었다. 평소 대부분의 시간 동안은 화학적으로 극도로 안정한 금고 안에 짱박혀 있는다.
취급 부주의로 인해서 원기에 이물질이 묻거나 생채기가 생겼다간 얘의 질량이 0.1 마이크로그램이나마 달라지게 되고, 그랬다간 전세계 과학계에서 참조하는 킬로그램의 정의가 달라져 버릴 테니 말이다... 그러면 정밀 실험의 결과값이 달라질 것이고, 같은 금의 거래 가격이 달라져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원기를 아주 정교하게 복제한 레플리카가 수십, 수백 개 만들어져서 세계 각국에 보급되었다.
세계 각국엔 자기들의 표준 과학 연구원에 상당하는 기관이 있고, 걔들은 그 레플리카를 기준으로 자국에서 생산되는 저울, 무게추의 품질을 측정하고 실험의 정확도를 판정해 왔다.

그리고 그 기관에서는 수 년 간격으로 그 레플리카 원기가 질량이 달라지지 않았는지를 '오리지날' 원기와 대조해서 보정· 시정 조치를 취했다.
지금이야 1kg의 정의가 플랑크 상수 어쩌구 하면서 어렵긴 하지만 자연 실험으로 재현 가능한 객관적인 방법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이게 옛날 일이 됐다. 허나, SI 단위 중에서 질량 단위가 원기 의존 정의를 제일 늦게 벗어났다. 이 질량이라는 게 생각보다 난해하고 오묘한 물리량이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의 권위라는 것을 말할 때도 이와 비슷한 원리를 적용할 수 있다.
일각에서 우리가 영어알못이고 한국어가 모국어인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영어 KJV만이 최종 권위라고 말하는 건.. 영킹이 바로 저 "오리지날 킬로그램 원기"와 같다는 차원에서이다.

평소에 일상적으로 영킹 읽어서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한국인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어 성경은 지금도 계속 교열하느라 난리인 반면, 영어 성경 본문은 불변 고정된 지 400년이 넘었다.
한국어 성경들을 교열 보고 비교할 때 기준이 영킹인 거다. 이런 원론적인 차원에서 영킹이 최종 권위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보회에서 말하는 "자기네 한킹이 최종 권위"라는 건.. 실제로 개인이 읽고 묵상하고 교회에서 낭독하고 설교하고 믿고 실천하는 그런 권위라는 얘기이다. 실생활에서 다른 저울과 무게추를 판정할 때 쓰이는 레플리카 원기가 킹왕짱이라는 말과 같다. 뭐, 그냥 최종 권위도 아니고 '믿음과 실행에서의 최종 권위'라고 말하니 그쪽 논리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지도?

허나 오리지날 원기가 평소에 맨날 금고에 짱박혀 있는다고 해서 아무 짝에 쓸모없는 무용지물인 게 아니고, 레플리카들이 오리지날 대비 믿을 게 못 되고 아무 권위가 없는 게 절대 아니다. 각자 역할과 쓸모가 있을 뿐이다.
kg원기의 경우, 저런 물리적인 여건의 한계가 있는 거고, 영어 성경의 경우 언어 장벽으로 인한 접근성 한계가 있는 거지.
그래서 내가 양측이 생각하는 '최종 권위'의 정의가 서로 다른 거라고 진단한 것이다.

C 코드로 비유하자면
const BIBLE my_final_authority = 한킹;
이 아니라

BIBLE *const my_final_authority = &한킹;
인 거라고 생각하자. =_=;; (가리키는 위치만 불변이고 거기에 들어있는 값이 바뀌어도 무관)
그러고 보니 Java는 키워드의 이름부터가 const가 아니라 final이긴 하다. 그리고 '값 변경 불가'뿐만 아니라 '더 상속 불가, 오버라이드 불가' 같은 다양한 봉인 용도로 이 키워드를 사용하고 있다. ㄲㄲㄲㄲㄲㄲ

이상이다.
본인은 20여 년 전에 흠정역을 통해 처음으로 KJV 유일주의에 입문했다.
그러나 짬이 좀 찬 지금은 흠정역 쪽의 약점도 그럭저럭 파악해서 알고 있고, 반대로 한킹이 더 잘 번역한 부분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특히 한킹은 지금까지 출간된 우리말 성경들 중에 서문이 제일 고퀄-_-인 것 같다.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 읽어보면 그야말로 피가 끓을 것 같다. 영적 전쟁에서 성경이란 게 어떤 존재이며 아군과 적군이 무엇인지를 딱 칼같이 정의한 뒤, 이 성경을 번역하고 출간한 이유, 목적, 배경, 번역 방법론과 기대되는 효과를 일목요연하게.. 논문에 가까운 스타일로 잘 써 놓았기 때문이다.

첫 시작을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했는데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뒤, 우리나라 킹 진영은 너무 찢어져 있다. -_-;;
너도 나도 성경 번역하겠다고 나서서 인구 1억도 안 되는 고립어인 한국어에 영킹을 번역했다는 역본이 과장 좀 보태면 10종 가까이 난립해 있다. (군소 마이너까지 포함해서)
물론 역본이 수백 종에 달하는 영어 성경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영어는 세계에서의 인지도가 한국어 따위와 비교를 불허하는 넘사벽이니 처지가 다르다.

이렇게 성경 역본들이 쏟아져 나오는 게 더 나은 성경을 향해 나아가는 디딤돌이기라도 하면 다행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고 그냥 분열과 혼란으로 빠져드는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30년, 50년 뒤에 우리나라의 킹 제임스 성경 진영의 모습은 과연 어떠할까?

이런 와중에 우리나라 KJV 계열 역본 원조라 할 수 있는 말보회 한킹을 다시 살펴보니 감회가 새롭다. ㄲㄲㄲㄲ 다음 시간에는 한킹의 특이한 번역 내지 표현에 대해 조금 논하도록 하겠다.

Posted by 사무엘

2023/11/02 08:35 2023/11/0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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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번역 스타일의 차이

이 글에서는 KJV 유일주의자가 주로 관심을 갖는 분야인 교리 분야의 텍스트 변개가 아니라, 그냥 번역 스타일의 차이(이역)에 더 가까운 주제들을 다루었다.

1. 비인격적(?)인 표현

영어 킹 제임스 성경은 현대에 번역된 성경들에 비해 뭔가 덜 인격적인(?) 대명사를 써서 번역된 구절이 좀 있다.

(1) 먼저 떠오르는 건 열왕기상 3장의 그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 장면.
영어를 잘 읽어보시면 문제의 갓난아기를 전부 it으로 가리키고 있다. 아기의 성별이 뭔지 모르는 문맥인 것도 아니고, 두 여인이 나름 아들이라고 거듭 거듭 얘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he/him을 쓰지 않았다.

아기 예수, 그리고 창세기에서 베레스와 세라(창38:27-29)의 출산처럼 다른 곳에서는 갓난아기에게 성별을 부여한 인칭대명사를 얼마든지 사용한 사례가 있다. 그런데도 솔로몬의 재판만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걸까?
히브리어 원어가 그렇게 쓰여 있어서? 아니면 진짜 엄마가 나서기 전까지는 왕이 아기를 진짜로 물건 취급하고 divide it, slay it 이런 명령까지 내렸기 때문일까? 잘 모르겠다.

(2) 성령님의 기도 중보를 말하는 유명한 롬 8:26에서 the Spirit을 itself라고 가리킨 것도 유명하고 심지어 오역 논란을 빚고 있기도 하다.
성령은 물이나 불, 바람, 기름 같은 무생물로 예표될 때가 있지만 그래도 명백하게 하나님의 삼위 구성원이고 인격적인 존재이다. 그런데도 himself가 아닌 itself라고 번역된 것은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일단 원어가 그렇게 쓰여 있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3) 예수님 관련 예언인 눅 1:35에서는 다른 거의 모든 성경은 the Holy One (거룩한 이, 거룩하신 분)이지만 KJV만은 아예 the holy thing (거룩한 것)이다.
KJV를 번역했다는 흠정역조차 오래 전 초창기에는 '거룩한 이'라고 의역을 해서 출간됐었다. 그러다가 "우리 통념상 어색하더라도 KJV를 번역했다면 닥치고 KJV 단어에만 충실하게 옮겨야 합니다" 이런 설득과 권면이 받아들여져서 지금처럼 번역이 수정됐다.
그 예언은 예수님의 육신, 생물학적인 단백질 덩어리 몸만을 가리키는 문맥이기 때문에 thing이라는 것이 이쪽 진영의 입장이다.

사실, KJV는 요즘 영어처럼 하나님/예수님을 가리키는 대명사의 첫 글자를 대문자로 표시하는 처리조차도 돼 있지 않다. 그런 관행 자체가 후대에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2. 더대오? 렙배오?

마 10:3은 예수님의 공생애 시절 제자들 명단의 일부이다.
다른 모든 성경들은 “빌립, 바돌로메, 도마,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인 야고보, 그리고 다대오(Thaddaeus)”라고 돼 있다.
그런데 킹 제임스 성경은 다대오가 그냥 다대오가 아니라 “다대오라는 별명을 가진 렙배오(Lebbaeus)”라고 돼 있다. 이 렙배오라는 명칭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본인은 KJV 유일주의에 입문한 지 어언 20년 가까이 돼 가지만, 이런 차이가 있는 건 꿈에도 몰랐다.;; 사실은 다대오가 가룟 유다와 동명이인인 제자 유다를 가리키고, 요 14:22에서 질문을 한 그 사람이란 것도 지금까지 별로 인지를 못 하고 있었다.
더 놀라운 건 이 사실을 내가 원래 다니던 교회가 아니라 여친 교회의 설교에서 처음 들었다는 것이다. (개역개정 쓰는 일반 기성교회)
이분들도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해서 모르시는 건 아니구나. 한 수 배웠다.

사실, KJV 유일주의 진영에 들어오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 “하나님이 육체 안에 나타나셨고” 같은 교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고 더 자극적이고 치명적인 차이점/변개 내역에 대해서 자주 듣지, 저런 단순 정보 전달 쪽의 성경 번역 차이에 대해 들을 기회는 생각보다 드물다. (압살롬의 반역 본문에 나오는 40년 vs 4년 같은 것도..)
렙배오인지 랩배틀인지 저것도 뭐.. 루시퍼, 갈보리, 이스터처럼 유명한 명칭은 아니니까 말이다.

야고보와 유다는 신약 성경에서 헷갈리는 동명이인이 굉장히 많은 명칭 중 하나이다. 저 다대오 유다는 가룟 유다하고는 말할 것도 없고, 유다서를 기록한 유다하고도 다른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그나저나 다대오의 영어 스펠링을 보니.. 옛날에 애니매트릭스의 첫 에피소드 “오시리스의 마지막 비행”에서
Good bye, Thadeus / Good bye, Jue / Fly baby, fly!
대사가 떠오르는군..;; 매트릭스가 아예 삼위일체도 나오고 이것저것 성경에서 모티브를 딴 명칭이 여럿 있었던 걸로 내가 기억한다.

3. 한킹(말보회)과 흠정역의 차이는?

번역자의 인성과 자질 논란 같은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를 몽땅 배제하고..! 순수하게 텍스트만 따져보면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 흠정역은 이집트, 페르시아, 에티오피아처럼 세속적으로 통용되는 것을 제외하면 책 이름과 고유명사 외래어를 개역성경과 동일하게 표기했다. 한킹은 그렇지 않다 '스카랴/슼, 판관기(사사기) 등'
  • KJV, 그리고 흠정역, 개역성경 등은 인용을 나타내는 여닫이 문장부호가 없다. 하지만 한킹은 어째 따옴표를 임의로 넣었다. 하나님/예수님 가라사대 같은 인용문들을 볼 것.

  • 흠정역은 번역 방침과 번역자의 신념으로 인해 KJV에서만 튀는 단어를 티 안 나게 최대한 보수적(?)으로 번역한 반면, 한킹은 튀는 쪽으로 번역했다. 창 1:28 replenish가 한킹은 '다시 채우다'이지만 흠정역은 그냥 '채우다'이다.
  • 한킹은 창 22:8 God will provde himself a lamb을 "하나님이 자신을 어린양으로 예비하실 것이다"라고 번역한 유일한 역본이다.
  • 흠정역은 노아의 흑역사, 잠 23의 극딜 같은 극도로 부정적인 상황이 아닌 한, wine을 몽땅 '주'가 아닌 '즙'이라고 번역했다. 그래서 요한복음 가나의 혼인 잔치에 포도주 대신 포도즙이 등장하는 유일한 역본이기도 하다. 한킹은 그렇지 않음.
  • 흠정역은 구약 여러 곳에서 등장하는 우상 숭배 장소인 grove(창 21:33)를 그대로 '작은 숲'이라고 번역했지만 한킹은 타 성경 같은 '아세라 목상'도 아니고 그냥 '아세라'라고 번역했다. 고증과 교리 특성상 그렇게 했다고 당당히 해명을 하고 있다.
  • 반대로 흠정역이 고증(?)을 이유로 달리 번역한 단어 중 하나는 candlestick이다. 한킹은 촛대, 흠정역은 등잔대임. (그 시절에 파라핀 양초가 존재했었느냐의 여부..)
  • 한킹은 신약의 경우, 영어 KJV가 아니라 TR 본문을 따라 번역한 곳도 있다. 이 점은 초판 서문에도 명시돼 있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고후 13:11 잘 있으라, 바이바이(farewell)를 뜬금없이 '기뻐하라'라고 옮겼다.

  • 흠정역은 2011년에 나온 제5판 400주년 기념 에디션이 최신이고, 조만간 마지막 6판 개정이 계획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킹은 2010년대 더 나중에 또 개정된 것이 있지 싶은데.. 이건 본인은 잘 모르겠다.
  • 요즘 나오는 한킹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한킹은 한글 본문에서 고유명사를 고딕체로 표기하지 않아서 읽기 좀 불편한 감이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21/10/21 08:36 2021/10/21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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