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 의식의 변화

1980년대 말, 한강 고수부지에 가기 위해 사람들이 무려 올림픽대로를 무단횡단으로 건너고.. 아예 자전거를 몰고 역주행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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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수도권 전철 1호선 신도림 역에서 내린 시민들이 한두 명도 아니고 패거리로.. 개집표기를 통과하지 않고 그냥 울타리를 넘어서 지상으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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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 다 옛날에 9시 뉴스 카메라 출동 같은 데서 소개된 아이템들이다.
우리나라가 국민 의식이라는 게 저 정도로 무지하고 미개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저런 걸 고발하는 방송계도 남말 할 처지는 아닌 게.. 지금 같은 저작권 의식이 없어서 일본 TV의 시그널송이나 드라마 같은 거 무단으로 베껴 오는 건 예사였다.
지금 같은 초상권 보호나 개인정보 보호 그딴 관념도 없음. 저 부끄러운 짓을 하는 사람들을 그 어떤 보호 처리 없이 대뜸 인터뷰 해서 쌩얼을 내보냈다. 신기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2, 30년 전 사람들이 지금 세대보다 특별히 더 사악한 게 아니다. 그냥 하는 짓도 수위가 세고, 그걸 통제하고 계도하는 방식도 수위가 셌을 뿐이다.
단군의 후손들이 역사상 피똥 싸는 가난을 떨쳐낸 지 얼마나 됐다고, 법과 질서와 시스템과 국제 매너라는 걸 접한 게 얼마나 됐다고 지금 같은 의식 수준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그 시절에 올림픽대로의 경우는 도로 크기 대비 차도 지금보다 훨씬 덜 다녔으니 무단횡단이 가능했던 측면도 있을 것이다.
경부 고속도로가 갓 만들어진 시절에도 마찬가지다. 자동차 전용 도로라는 개념이 존재한 적이 없었고, 지금처럼 자동차가 넘쳐나는 때도 아니었으니.. 그때는 "고속도로에 보행자는 제발 얼씬도 하지 마세요. 제발 무단횡단 하지 마세요. 소 끌고 다니지 마세요"라고 지겹도록 계도와 홍보를 해 댔다.
게다가 일부 비상활주로 구간을 정기적으로 틀어막고 아예 전투기 이착륙 훈련도 할 정도로 고속도로가 널널했다. 지금은? 그랬다가는 작살나지..

(그리고 전철역의 경우도, 저 많은 사람들이 불법 무임승차를 했다는 소리는 아니므로 오해 말 것. 그때는 지금 같은 교통 카드가 없었다. 출발역에서 승차권을 선불로 끊은 뒤 도착역에서 그 승차권을 넣고 나가야 하는데, 나가는 절차만을 생략한 것일 수 있다. 그 시절의 마분지 승차권이야 어차피 재사용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물론, 집표를 안 했으니 2구간 이상 장거리를 이용하고도 1구간 요금만 지불한 뒤 쓰윽 나갔을 가능성은 있음.)

뭐, 1970년대에 서울 지하철이 처음 개통했을 때는 "지하철 열차 안에는 화장실이 없습니다."(통상적인 여객 열차와는 달리) 이런 것도 차내 안내방송으로 나왔을 정도였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198~90년대에 우리나라에 마이카 + 너도 나도 해외여행 풍조가 막 생겨났다. 그때는 인구당 교통사고 발생 세계 1위에, 외국 나가서 진상과 추태 부리는 어글리 코리안 이러면서 각성하자는 공익 광고 + 교통 안전 캠페인도 엄청 많았다.

이거도 무슨 조센징들만 국민성이 유전자 차원에서 문제가 있다거나, 이 엽전노무 새끼들이 노예근성 쩔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보릿고개 이러다가 겨우 30년 남짓 만에 자동차라는 문명의 이기와 외국 여행이라는 걸 난생 처음 접해서 그런 것일 뿐이다.

난 어렸을 땐 우리나라 국민성에 뭔가 진짜 심각한 문제가 있는 줄 알았다.. 근데 이거 뭐 해외여행 전면자유화가 된 게 무려 1989년부터이고 그 전엔 외국행 어학연수와 신혼여행, 배낭여행 자체가 없었더구만, 지금까지 개같이 일하고 돈 버는 것밖에 안 해 본 집단한테서 하루아침에 뭘 선한 게 나오길 기대하겠는가?

지금이야 많이 고쳐졌다. 뭐, 레알 선진국 수준으로 고상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웃집 '대륙'에서 우리나라의 전철을 밟고 따라오고 있을 뿐이다. 걔들도 국력 대비 외국 나가기 굉장히 어려운 곳에서 사는 사람들이며, 그나마 제일 만만하게 갈 수 있는 외국이 제주도이니 거기에 왕창 몰리는 것이다.
'대륙의 기상' 이러면서 유커들의 미개한 짓을 보면서 비웃는다면, 과거에 한국인들도 외국에서 그렇게 비웃음 받았을 거라는 점을 생각해야 할 것이며 왜 일본인이 선진국들에서 한국인보다 더 높은 대접을 받는지도 같이 생각해야 한다.

자동차에 이어 1990년대 말엔 국민 의식 관련 최대의 이슈는 응당 "공공장소에서는 휴대전화 제발 진동 모드로 해 놓으세요"였다. 기억나시는지? 그게 세뇌 수준으로 정착하고 공감대가 형성된 덕분에 지금은 그래도 이 정도로 괜찮아졌다.

이런 역사 선례들을 감안할 때 본인은 필요 이상의 '국까'나 "민중은 개돼지" 이런 식의 비하의식에 공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도 미개하던 옛날에 바랄 걸 바라야지, 모 대통령이 경제는 살렸지만 민주주의는 죽였네 뭐네 하는 배부르고 비현실적인 불평불만 피해의식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195, 60년대에 애초에 무슨 성숙한 민주주의 같은 게 있었다고 개수작을. 어유;;; ㅉㅉㅉ

※ 우리는 할 수 있는가?

우리나라가 지금 같은 사회 구조와 분위기에서 예측 가능한 미래에 과학 분야의 노벨 상 수상자가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도대체 뭐가 잘못됐고 무엇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난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저 사회 탓, 제도 탓, 우리 모두의 잘못 이런 식으로 어물쩡 넘어가서도 안 될 문제인데도 말이다.

그리고 분야를 막론하고 '한국형'이라는 이름을 달고 시작했던 무슨 프로젝트들이 잘되고 성공하고 지금까지 이어진 예가 있나? 이 역시 거의 없다시피할 것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우리나라는 점점 성장 동력이 멈추고 있다. 제발 내 느낌일 뿐이었으면 좋겠지만, 옛날, 특히 서울 올림픽을 준비하던 시절 같은 팀웍과 화합이 다시 이뤄지지 못하고 뭔가 국운이 다한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든다. 지금까지 해 놓은 것, 벌어 놓은 게 적지 않으니 당장 몇 년간은 먹고 살겠지만 중국이 추격하고 일본· 미국이 더 격차를 벌리면 건축· 전자· 기계· 컴터· 항공우주 등 분야들이 미래에 어떻게 도태하고 뒤쳐질지 모른다.

지금만 해도 "우린 안 될 거야 아마", 그저 오로지 돈, 돈, 돈, "스펙 아무리 좋아 봤자 부모 재력 절대 못 이김", "금수저 흙수저 헬조선 계급론" 같은 인식이 팽배한 지경인데 우리나라가 지금보다 훨씬 더 못살던 시절에는 도대체 무슨 일말의 희망이 있었을까 싶다.
그러니 옛날에는 나라에서 앞장서서 단순무식 반공뿐만 아니라 국뽕 주입도 정말 많이 했다. 엽전의식 노예근성을 없애려고 도로를 하나 닦고 지하철 노선을 하나 개통해도 현수막에 "선진조국 창조", "우리는 할 수 있다" 프로파간다를 집어넣었다. 그 시절 기록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다.

지금이야 옛날 같은 그저 "국산품 애용, 과소비 추방, 닥치고 저축" 같은 국뽕스러운 경제 이념은 의미가 많이 퇴색했다. 그러나 애국심 마케팅이 필요없어진 것 자체도 알고 보면 그 전에 한창 애국심 마케팅 하에서 육성된 국내 기업들이 세계적으로 꿀리지 않는 경쟁력을 갖춰서 외제품 수입하는 것만치 수출과 국부 창출도 대등하게 가능해진 덕분에 이뤄진 것이다.

그런 거 못 하면? 우리나라도 그저 다국적 기업들에게 원자재 싸게 공급하는 셔틀 국가밖에 못 된다. 아니, 우리나라는 애초에 1차 산업만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처지도 아니지. 외국에 기술 식민지, 경제 식민지가 돼 버리면 국산품과 수입품 한가하게 골라서 사는 사치를 누리는 시절도 다 끝난다.

이런 와중에 다시 나라의 기운이랄까, 성장 동력을 재충전할 만한 이벤트가 있으면 좋겠다. 올해는 안 그래도 대선도 있는 해인데.. 군인으로 치면 "이 지휘관 휘하에라면 내가 기꺼이 믿고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칠 수 있겠구나!"처럼, 자기 나라를 사랑하고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고 연구할 만한 동기를 제공하는 지도자가 나왔으면 좋겠다.

※ 물가 등 추가 회상

국민의식이고 뭐고 하는 골치아픈 얘기는 마치고, 이제부터는 순수하게 옛날 모습 회상만 더 하고자 한다.
내가 여기저기서 모은 자료들을 종합하자면,
1899년 9월에 경인선 개통했던 당시에 인천-노량진간 경인선 열차의 운임은 상등(퍼스트?) 1원 50전, 중등(비즈니스?) 80전, 하등(이코노미?) 40전이었다. 쌀 한 가마의 가격이 4원 정도 하던 시절이니 저기에다 0이 4개 정도 더 붙어야 지금 가격과 비슷할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 한반도의 철도는 지금의 일본처럼 사철 위주로 굴러갔으며, 물가 대비 운임은 지금보다 더 비쌌다. 지금 일본의 철도 운임이 매우 높은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 때 한반도에서 돌아갔던 철도 회사들은 대체로 수지가 잘 맞았으며 흑자를 많이 냈다는 통계가 전해진다.

그러니 그 시절에 기차를 타고 장거리 여행을 가는 것은 지금으로 치면 비행기를 타는 것과 비슷한 위상으로 생각해야 했다. 그것도 저가항공도 아니고 대한항공 급 비행기 말이다.
1899년 철도가 갓 개통한 직후의 얘기이긴 하지만, 그 시절의 느린 증기 기관차로도 최대 100분 남짓이면 갔을 서울-인천 거리에 무슨 장거리 여객기처럼 좌석이 3등급이나 존재했던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설명 가능할 것이다. 경인선에 첫 도입되었던 증기 기관차는 탄수차가 별도로 있지 않았고 그리 큰 열차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신분제가 지금보다 더 고착화했던 시절임을 감안하더라도 많이 삽질스럽다.

그로부터 반세기쯤 뒤, 지금 "문화역 서울 294"로 바뀐 옛 서울 역 건물은 1925년에 완공됐으며 그 시절 물가로 건설비가 94만 5천원이 들었다고 전해진다. 이것도 지금 물가라면 '만'이 '억~십억'급은 돼야 할 것이다. KTX 광명 역을 건설하는 데도 3천억이 넘는 비용이 들었다고 하니 말이다.
강 우규 의사가 이 역 광장 근처 위치에서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저격을 시도하긴 했지만, 시기가 1919년이기 때문에 이 건물이 있던 때는 아니었다.

그 다음 1935년, 소설가 심 훈이 잘 알다시피 소설 <상록수>를 집필해서 동아일보 발간 15주년 기념 소설 공모에서 당선되었다. 그때 상금이 500원이었던 걸로 유명하다. 소 한 마리의 가격이 60원 정도라고 하니 1900년대 초의 쌀 한 가마 4원과 대조해 보시길.
그 500원은 지금 물가로 최하 수천만~억대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심 훈은 상금의 일부를 떼어서(아마 100원) 장학 재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1935년과 그리 멀지도 않은 1937년도 노래 중에는 놀랍게도 <백만원이 생긴다면>이라는 곡이 있다.
가사는 검색해 보면 나온다. 금비녀 보석 반지 살 거고 그랜드 피아노에.. 자동차도 아니고 비행기를 살 거라고 한다. 지금 100만원이면 당연히 택도 없는 소리지..

저때 100만원은 지금의 100억~1000억 원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1960년대도 아니고 1937년에 저런 문명의 이기들은 서민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사치품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고.

가사가 1960년대에 한번 리메이크가 됐는데, 이때는 그 시대 상황을 감안해서 TV를 장만하고 3절에 아예 "로케트 타고 달나라 가지"라는 가사가 등장한다. 1930년대에는 비행기가 각광받던 시절이었고 1960년대는 우주 시대가 관심사여서 그랬던 것이지 싶다. 참고로 지금도 혼자서 우주 정거장 정도까지 갔다오는 데 저 몇백~천억 가까이 돈이 든다.

사실, 일제 강점기와 그 이후 대한민국 사이에는 워낙 격변이 심하고 화폐 단위도 여러 번 바뀌긴 했다. 그걸 감안하고 계속 살펴보면,
1968년에 금성사에서 최초로 내놓은 국산 텔레비전의 가격이 68000원이었다. 그 당시 제조업 생산직 근로자의 1년 연봉에 맞먹는 가격이었으며 굳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도 TV는 집집마다 들여 놓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이걸 감안하면 독일이 영상 기술이 아주 앞서 있긴 했다. 나치 치하에서 1936년에 베를린 올림픽을 하던 시절에 벌써 공공장소 곳곳에 TV를 비치해서 경기 장면을 중계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브라운관'의 원조 국가답다.

1976년 초부터 국내 판매가 개시된 현대 자동차 포니는 그 당시 대당 가격이 230만원 남짓이었다. 1974년에 개통한 서울 지하철이 기본 운임이 30원부터 시작했고 짜장면 한 그릇이 140원가량 했는데 비슷한 시기에 자동차 가격이 저러했다.

그 뒤, 1990년대 초로 가서 내가 직접 겪고 기억한 물가를 나열하자면, 봉지 라면과 200ml 우유가 전부 200원대이던 시절이 있었다. 포니 택시의 기본요금은 700원이었고, 버스비는 초딩 기준으로 80원으로 시작했다가 140원까지 올랐다. 그러다가 1995년에 광역시 등 행정구역 통합이 이뤄지고 본인이 중학생으로 업글하면서 버스비는 400원으로 폭증했다.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600원대 이러던 걸 본 기억이 있다. 그러다가 나중에 IMF 외환위기 이후부터 주유소마다 가격이 들쭉날쭉이 되고 또 리터당 1000원대 이상으로 가격이 확 올랐다.

서울 택시의 기본요금은 2005년에 1600원다가 지금은 거의 3000원에 근접하는 수준으로 올랐다. 그래도 여전히 택시 뒤를 보면 "10년째 동결인 주행 요금 재조정하라" 이런 구호가 붙은 게 있는데, 당연히 기본요금이 아니라 임률을 말하는 것이다.

버스/지하철의 기본요금은 10여 년 전에 600원인 것부터 봤다가 700원으로 오르고, 2004년 대개편 때 800원이 된 후 900 (2009), 1050 (2012)을 거쳐서 지금은 1250 (2015)이 돼 있다. 이 요금이 지금까지 은근히 가파르게 많이 올라 왔다.
한 줄짜리 일반 김밥도 2000년대 초에 김밥천국이 처음 나타났을 때는 1000원에서 시작했다가 지금은 1500, 2000이 된 지 오래다. 식당에서 시켜 먹는 사이다 한 병도 1000이 유지되는 곳을 찾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중.

그러고 보니 옛날에 지하철은 지금처럼 에어컨이 있는 것도 아니고(천장에 그냥 선풍기!) 열이 후끈후끈 올라오는 원시적인 저항 제어 방식인 데다, 기껏 직원용 사무실에 설치된 에어컨의 실외기가 승강장에 있는 무개념 구조이기도 했다. 그러니 승강장와 열차를 막론하고 여름에는 정말 찜통 불지옥이 따로 없었다.

옛날에는 유인 매표소가 있어서 "구로 하나요!" 이러면서 동전을 내밀면 직원이 마분지 승차권을 쓱 주곤 했었다. 요즘 시대엔 그건 인건비 투입하면서 하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비생산적인 업무로 간주되어 다 무인화되고 없어졌음. 마치 버스 안내양이 없어지듯이 없어진 거다.
게다가 옛날에는 승차권을 개찰하는 직원도 있었다. 일반열차의 관행이 지하철에도 있었던 셈인데, 지금은 일반열차조차도 개찰이 없어진 지가 오래이니 생소하다.

1966년 서울 모습이 컬러 사진으로 담겨 있는 유튜브 링크를 소개하며 글을 맺겠다. 공교롭게도 서울 찬가(패티김)가 발표된 것도 1969으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꽤 옛날이다. 증기 기관차, 노면 전차 같은 게 싹 사라지던 시절. 또한, 산업화 전이라고 해서 마냥 환경이 깨끗하고 푸른 풀숲이 살아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옛날 '컬러'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다.
뭐, 일본에도 <나 도쿄에 갈란다> 같은 노래가 있으니, 어디든 사람 많이 모여 사는 곳에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 심리는 변함없는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7/01/17 08:38 2017/01/17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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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문제 끝장내기

난 소위 말하는 친일파· 민족 반역자라는 건 다음과 같은 세 그룹으로 나뉘며, 이들을 분명히 나눠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A: 매국의 대가로 일제로부터 예우 받고, 당대에나 지금까지도 일체의 참회 없이 대대로 금수저로 잘 쳐먹고 잘살고 있어서 어그로 (조선 말기의 일부 관료· 지주· 황족 출신과 그 후손)
  • B: 일제 강점기 동안 독립운동가를 고문하고 때려잡는 짓을 해서 어그로 (악질 헌병· 경찰 복무자)
  • C: 공인으로서, 지식인으로서 먹고 살려고 권력에 아부하고, 자기 인지도를 이용해서 신사참배 내지 황국신민 징병 권유 같은 짓을 해서 어그로

그리고 난 이들의 적극성과 죄질은 명백하게 A > B > C의 순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비주얼한 임팩트는 B가 가장 강하겠지만 실질적으로는 A가 앞선다. 시간적인 등장 순서도 A, B, C의 순에 가깝고, 해당되는 사람 수도 A < B < C로 갈수록 많아진다.
점점 더 당대 사람의 책임보다는 애초에 나라를 말아먹은 선조의 책임이 더 커지며, 죄질이 가벼워지고 정상 참작의 사유가 생기는 건 당연지사다. 단적인 예로, 내가 그 시절을 살았다고 가정하더라도 내가 C가 될 가능성은 조금 있지만 B나 A 같은 간 큰 짓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일제 강점기 35년을 나치 치하에 한 몇 년만 점령당했던 프랑스하고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본데, 어디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세대가 바뀌어 버리니 한반도의 경우 해방 당시엔 태극기 모양을 기억 못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고 어린애들은 "어? 우리나라(=일본)가 전쟁에서 졌는데 왜 어른들이 다들 기뻐해?" 이럴 정도였다. 프랑스가 나치 독일한테 이렇게까지 오래 점령당하고 세뇌당했었냐? -_-;;

이 완용· 송 병준 같은 놈들은 A이고, 노 덕술은 B, 김 활란 같은 사람은 C다. 박 정희가 B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그 증거는 없다. 그냥 평범한 도적을 잡는 일만 한 경찰이나 중공군하고만 싸운 군인이라면 난 문제삼지 않음.
그 시절에 일제 치하의 공무원(교사, 경찰, 헌병 등등)에 취업하려 한 것 자체는 요즘 애들이 전부 공무원, 대기업에만 몰리고 과학고 나와서 의대에만 몰리는 것하고 하나도 다를 바 없다고 여겨진다. 공부 잘하면 다들 남을 통솔하고 다스리는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싶어하지, 너 같았으면 평생 농사만 짓거나 프롤레타리아 로동자 기술자로만 살았겠는가? 굳이 "조센징 엿먹어라"가 아니라 단순 출세욕 때문이라는 것이다.

난 죄질을 A > B > C의 순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똑같은 일제 강점기 여주인공이 나오는 영화인데 C급인 <청연>은 친일 논란에 휩싸이면서 망한 반면, A급에 '준하는' <덕혜옹주>나 <명성황후>는 어째 항일투사로 미화되면서 필요 이상으로 흥행하는지 이해가 잘 안 된다. 비록 그 사람들은 적극적인 매국노와 같은 급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잘한 것도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그 시절에 이 완용 내지 을사오적 같은 특정 개인 몇 놈만 없었다고 해서 대세가 뒤엎어졌다거나 나라가 안 망할 수 있었다거나 한 게 아님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만, 이 완용이 진짜 개새끼인 이유는 매국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뒤의 태도와 처신이 더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건 정말로 그 어떤 실드의 여지도 없다.

A, B는 몰라도 C는 법적인 처벌까지는 아니고 도의적인 비판· 비난, 불이익 수준이 적절하다고 여겨진다. 음주운전 적발 경력 같은?
그 시절에 일제한테 그 정도 협조 내지 영혼 없는 립서비스조차 안 했으면 조선인이 기업을 경영하고 고급 기술을 그만치 만질 기회라고는 있을 수 없었을 거란 점을 감안해야 한다.

물론 그땐 그랬다 치더라도 해방 후에도 일말의 반성이 없이 고개 꼿꼿하게 세우고 잘나가고 있다면 그 꼴은 보기가 참 민망하겠지만, 그래도 C 욕하는 그 의협심 강한 깨시민들도.. 자기가 그런 위기에 처하면 걔네 역시 십중팔구 변절하고 깃발 바꿔 달 거라는 건 내가 절대 장담한다. -_-;; 지금 중국에 대한 태도만 봐도 안 봐도 비디오, 안 들어도 오디오다.

신사참배 갖고 한국 교회가 썩었네 어쩌네 하는 좌독들이 있다. 물론 신사참배 결의는 한국 교회의 치욕적인 흑역사인 건 사실이다. 또한, 이 역시 외압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결의한 것 자체보다도, 해방 후에까지 곧장 참회하지 않고 뻣뻣한 목을 유지한 것이 더 큰 죄악이긴 하다.

허나, 한편으로는 지들은 그 상황에서 과연 꼿꼿하게 버텼을까? 일제가 그땐 가족까지 인질로 잡아서 얼마나 치사하고 악독하게 협박과 회유를 일삼았는데? 흔히 생각하는 단순히 부정부패 때문에 굴복한 거 아니다! 그런 것들을 감안해서 판단한다. 저건 비판받을 사항이긴 하나, 자기가 도덕적으로 우월한양 정죄를 일삼고 교회 정체성을 부정할 정도는 명백히 아니다.

우리나라가 건국 초기에 반민특위의 해체와 친일 군경· 관리 재등용 때문에 문제가 되고 좌빨들에게 두고두고 꼬투리를 잡히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이건 C보다는 수위가 높은 B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아마 롤모델로 삼고 있을 북한조차도 B들을 재등용해서 쓴 건 동일할 뿐만 아니라, 내가 늘 말하지만 그건 정말 전적으로 불가피하게 그렇게 된 것이다. 인재가 부족해서 말이다.

"친일 군경들이 해방 후에 그대로 옷만 갈아입고 반공투사로 변신"
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이건 절~대로 부정적이기만 한 현상이 아니다! 그땐 그런 반공투사라도 없으면 안 됐다! 그 시절에 불가능했던 일을 이루지 못했다고 자꾸 이상한 피해의식 망상 집어넣는 선동질에 속지 마라.

우리나라는 건국 당시에 대통령과 내각 등 브레인들이야 당연히 다 독립운동가에 광복군 출신이었다. 단지, 말단에서 궂은일 하는 중하급 군경 간부들 중에는 일제 부역자들이 있었다. 이거는 램 4MB에서 돌아가는 Windows 95가 32비트 껍데기 밑에 불안정한 16비트 도스 코드가 부득이하게 호환성 때문에 여전히 포함돼 있던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이유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건국 당시의 백성들의 컴퓨터 사정은 Windows NT 따위는 절대로 돌릴 수 없는 여건이었으니 말이다.

자, 그럼 마지막으로 남는 A급 잔당들은?
일일이 색출해서 재산 몰수했으면 좋겠지만 워낙 극소수이기도 하고 B급과 겹치는 놈도 있고, 그 혼란한 와중에 일일이 죄질을 파악해서 공산당 식으로 일을 처리하기 어려웠다. 이런 놈들이 일부 오늘날까지 호의호식하고 있는 건 안타깝고 화가 나긴 하지만, 정말로 예외적인 경우일 뿐이지,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 비관하고 탓할 정도는 절대 아니다.

2010년이던가, 산낙지 살인 사건 기억하는가? 이건 단순 사고가 아니라 보험사기를 노리고 남자가 여친을 살해한 악질 살인이 거의 확실해 보이는 모든 심증 정황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증거가 없고 피해자인 여자애가 일찍 화장되어 없어져 버리는 바람에 용의자는 증거불충분으로 덜컥 무죄 선고를 받아 버렸다! 그런 것과 비슷하다. 세상엔 그런 분통 터지는 일도 있다. 무고한 사람을 막 빨갱이로 몰아가서 억울한 피해자를 만든 '유죄 추정의 원칙'만큼이나, '무죄 추정의 원칙'도 이런 식으로 한계와 부작용이 있는 법이다. 100% 만능이 아니다.

또 다른 예로는, 가평과 춘천 사이에 있는 남이섬 유원지가 A급 친일파 반역자 민 모 씨 가문의 후예 소유라고 알려져 있다.
물론 직접적으로 일제로부터 향응 차원에서 남이섬을 하사받기라도 한 건 아니다. 그랬으면 해방 후에 국가에서 정말 0순위로 몰수했어야지. 반쯤은 자기들이 원래부터 한국은행장도 배출할 정도로 출세하기도 했고, 그래서 1970년대에 자기 돈 내고 전주인으로부터 남이섬을 통째로 산 거라고 한다. 이 정도면 어디까지가 친일매국의 댓가이고 어디부터가 개인 사유재산권 추구인지 따지기가 솔직히 모호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명백한 친일파 후손이 남이섬을 우리나라 안의 딴 세상 '나미나라 공화국'처럼 꾸며 놓았다는 걸 알면 그게 마냥 재미인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잠재적 내란죄? 남이섬이 평범한 국공립 유원지라면 마케팅을 그런 식으로 할 리는 절대 만무하지 않겠는가?
거기서 한 해 벌어들이는 입장료 수입이 어마어마하다던데, 이 문제에 양심이 민감한 분이라면 남이섬 관광 같은 건 안 가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이상이 맨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친일 청산 문제에 대한 나의 생각이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친일파라는 건 용어의 정의 내지 범위는 오락가락 하는데 빨갱이와 더불어 한국 사회에서 남을 인격 모독하고 억울하게 매장할 수 있는 마법의 단어 양대산맥이다.

자기도 감당하지 못했을 '의로운' 잣대를 강요하면서 남을 정죄하고 쓸데없이 세상 비관하는 건 옳지 못한 자세이다. 하지만 반대로 C급만 부각시키면서 단순 가담자와 악질 주동자를 한데 싸잡아 "그땐 누구나 다 그랬을 것"이라는 양비론으로만 퉁치는 것 역시 옳지 못하다. (1) 나라도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겠냐 (2) 동족을 괴롭히고 등쳐먹는 등 물질· 정신적으로 악한 영향을 적극적으로 끼쳐서 사익 챙겼냐 (3) 그 뒤에 참회· 반성하고 있냐 정도를 잣대로 판단하면 큰 오류에 빠질 일은 없으리라 여겨진다.

참고로 아래의 부류들은 이 글에서 진지하게 다루는 부정적인 심상의 '친일파' 라인이 아니므로 오해 없도록 하자.

  • 김 옥균: 매국 의도 제로. 정말 악의 없이 일본을 선하게 보고 걔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려 했던 옛날 사람일 뿐이다.
  • 오덕: 그냥 비정치적으로 일본 문화만을 좋아하는 사람.
  • 김 완섭: 그냥 책 팔아먹으려는 관심병자 또라이 생계형 친일파일 뿐이다. 이 승만 대통령이 잘못한 게 부정선거 야당 탄압 독재 등등 많은 흑역사 과오들을 제치고 평화선을 그어서 독도를 빼앗은 것이라고 말하는데 더 일고의 가치가 있겠나? 국가 정체성에 아무 위협이 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끼치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5 18 민주화 운동 유공자랍시고 국가로부터 예우와 혜택도 받고 있다.
  • 일본과 일제 강점기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긍정적으로 말하는 편인 일부 우파 논객: 진짜 일본과 커넥션이 있고 자기 재산 지키고 싶고, 한편으로 우리나라가 망하길 바라는 개XX라면 절대로 저런 짓 안 한다. 얼굴 내밀고 소신 발언 하면서 어그로 끄는 멍청한 짓 따윈 절대 안 한다. 일부 과격 극단으로 치우친 견해가 있더라도 진짜 북한과 커넥션이 있고 지령도 받고 있는 종북 좌빨보다야 비교가 무의미할 정도로 해롭지도 위험하지도 않은 사람들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6/12/14 08:31 2016/12/14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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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한에서 수뇌부가 거주하는 곳은?

우리나라야 대통령이 근무하는 관저는 북악산 기슭에 있는 '청와대'이다. 대통령은 출퇴근 이동을 하지도 않으며, 잘 알다시피 보안을 위해 아예 이 캠퍼스 안에 가족이 다 눌러앉아서 지낸다.
그럼 한편으로 북한에서 청와대에 해당하는 건물은 무엇일까?

일명 주석궁이라고 불리는 평양의 그 거대한 건물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지 모르겠다. 본인 역시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됐다.
주석궁은 2~30년 전, 김 일성이 살아 있던 시절에는 '금수산 의사당'이라고 불리면서 김 일성이 거주하고 집무하는 관저로 쓰인 게 맞다. 그러나 저 사람이 죽고 나서는 그 궁전 전체가 무슨 성경에 나오는 지성소 같은 성역이 되어 버렸다. 이름도 '금수산 기념 궁전'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금수산 태양 궁전'이 됐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직 대통령이 서거하면 현충원에 묻어 준다. 그것처럼 김 일성 역시 개인적으로는 북한의 현충원뻘인 '대성산 혁명렬사릉'에 묻히길 원했으나.. 독재자를 한도 끝도 없이 우상화해야만 체제가 유지될 수 있는 북한에서 바랄 걸 바라야지. 그 유언은 상큼하게 씹혔다. (베트남에서는 호치민의 유언도 그렇게 씹혔음.)

그 큰 주석궁 전체가 예전에는 프로토스 넥서스에 해당했는데 이제는 시타델 오브 아둔 같은 역할로 바뀌었다. 김 일성의 미라가 들어갔으며 나중에는 김 정일의 미라까지 추가로 들어갔다. 그리고 근처의 지하철역이던 광명 역은 보안 강화를 위해 폐역되고 열차가 무정차 통과하게 됐다. 달랑 미라 두 구만 보관하기에는 아무래도 너무 큰 건물인데.. 다른 공간은 어떻게 바뀌었나 모르겠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인해 금수산 태양 궁전은 일종의 박물관 내지 왕릉 같은 곳이 됐기 때문에 지금 김 정은이 거기에 늘 상주하지는 않는다. 김 일성이 죽은 뒤 오늘날까지 김씨 가문이 사용하는 관저 내지 아지트는 평양, 신의주, 원산, 심지어 백두산 근처 등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평양 근처에 있는 걸로 알려진/추정되는 아지트도 시내에서 상당히 떨어진 외곽 모처이며, 위성 첩보 사진으로 위치를 추측할 뿐이다.

요컨대 거기는 워낙 폐쇄적이고 비밀도 많은 집단이다 보니.. 대한민국의 청와대, 미국의 북악관 같은 딱 떨어지는 단일 집무 공간이라는 개념이 현재 공식적으로 없는 셈이다. 더구나 그런 아지트들의 지하에는 무슨 거미줄 같은 네트워크가 깔려 있을지 생각하면 의문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2. 김 정일의 카게무샤(대역)

우리나라 육군에는 KCTC(육군 과학화 전투 훈련단)이라는 훈련장이 있으며, 거기엔 '전갈 대대'라고 타 부대를 상대로 북한군 코스프레를 하면서 가상의 적군 역할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부대가 있다. 얘들은 마치 버추어 파이터의 듀랄 컨셉 같아 보인다고 본인이 예전에 언급한 바 있다. 여느 군부대 사격장이나 각개전투장에서 볼 수 있는 북한군 차림의 인형(?) 표적만으로는 실전 같은 훈련을 하기에 충분치 못하니 군대에서 저런 것까지 도입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북한군 코스프레만 하는 게 아니다. 북한 김돼지의 코스프레를 전문으로 하는 북한 전문가를 몰래 양성해서 운용하기도 했다. 요즘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과거에는 그런 게 확실하게 있었다는 것이 김 달술 씨 같은 전직 코스프레 요원의 증언을 통해 알려져 있다.

그런 사람을 왜 두냐고? 북한의 고위 관료나 심지어 김돼지를 직접 만날 예정인 우리나라 측의 대통령 내지 고위 관료를 비밀리에 교육· 훈련시키기 위해서라고 한다. 언어는 일단 같은 한국어를 쓰는데 현실적으로는 일본보다도 위험한 반국가단체 빨갱이들의 수괴요 적장이고.. 그런데 또 대놓고 적대시만 하기에는 좀 민망한 존재이니..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누게 되더라도 절대로 기선제압 당하지 말고 쫄지 마라."라는 취지에서 우리 내부에서 모의 훈련을 할 만도 해 보인다. 이건 북파 공작원을 양성하는 것과도 목적이 완전히 다르다.

김돼지 등 북한 역할을 하는 사람은 무슨 공작원처럼 인간흉기로 양성되지는 않는다. 단지, 자고 일어나면 맨날 역대 로동신문과 평양 방송을 송두리째 흡입하면서 북한 정세를 학습하고 김돼지의 말투와 몸짓, 요즘 관심사, 머리에 든 것 따위를 숙지했다고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단순히 정치 드라마에서 김돼지 연기만 하는 배우와는 차원이 다른 양의 공부를 해야 한다. 그런데 남한 내부에서 북한의 사고방식을 룰 기반으로 정공법으로 익힐 수는 없으니, 결국 통계 기반으로 북한에 대한 빅데이터 머신 러닝 딥 러닝을 몸으로 실행하는 셈이다. 또한, 마치 음란물 자동 탐지 필터를 개발하는 엔지니어가 직업적으로 맨날 음란물에 파묻혀 지내야 하듯, 저 아저씨는 합법적으로 맨날 이적표현물에 파묻혀서 산다고 볼 수 있다.

북한 내부에서는 쿠데타나 암살에 대비해서 가짜 김돼지가 예비용으로 돌아다닐 법도 한데, 어쨌든 남한에서는 뭔가 다른 용도로 김돼지의 코스프레가 이런 식으로 그것도 몇 대에 걸쳐 비밀리에 양성되어 왔다는 게 신기하다. 인간을 화성으로 보낼 생각으로 지구의 하와이 모처에다가 화성 같은 환경을 꾸며 놓고 우주인들에게 몇 개월 동안 생존 훈련을 시키는 것과 비슷한 관행으로도 보인다.

우리가 자체적으로 이런 짓을 해 봤자 도대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북한 사람과 만나는 데 무슨 도움이 됐겠냐 싶지만... 카더라 통신에 따르면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실제로 김 정일이 만나서 거론한 것, 질문한 것은 남한에서 자체적으로 준비해 간 예상 문제의 범위를 별로 벗어나지 않았으며 적중률도 대단히 높았다고 한다. 특히 우리나라 역사상 북한 수뇌를 최초로 직접 대면한 김 대중의 경우 70대 중반의 고령에도 참모진들이 준비해 준 대응 매뉴얼을 일일이 숙지하면서 답변을 아주 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 때문에 이 나라에서는 안 그래도 지금까지 곳곳에 비밀도 많고 비리도 많고 숨겨진 게 너무 많은 채로 돌아갔던 게 사실이며, 저 카더라 통신도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발표한 것이니 전적으로 믿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렇게 기껏 철저히 준비하고는 김돼지를 만나고 와서 이뤄진 열매가 겨우 이 모양이라면 말이다.
김 대중 대통령이 집권하자마자 국정원을 싹 뒤집어엎고 북파 공작원들의 신원을 북쪽에다 넘겨 줘 버렸다는 말까지 나도는데.. 그것도 내가 직접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다만 김 대중· 노 무현 같은 친북 성향의 정권이 설령 악의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북한에 엄청난 거금을 퍼 주고도 북한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으며 전화· 서신 왕래 하나 제대로 이뤄진 게 없었다. 가만히 놔두기만 하면 붕괴했을 북한 정권은 이 돈으로 원래 계획했던 핵을 무난히 개발하는 쾌거를 이뤘다. 철도 연결이나 이산가족 상봉 깜짝쇼쯤은 도박판에서 돈 다 날리고 받은 위로금 개평 수준?

남북 경제 협력 명목이랍시고 이뤄 냈다는 개성 공단을 온갖 이상한 논리와 궤변으로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양심이 있다면 박통 시절에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무 여건(특히 전 태일 열사)을 같이 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박통 시절에 아무리 노동자 인권이 열악했어도 임금의 90%를 체제 충성 비용으로 국가가 떼어 가던가?

이래도 햇볕 정책이 악의적이지 않은 실책일 뿐이라고 별다른 비판 없이 넘어간면, 그렇다면 6· 25 때 이 승만 정권의 한강교 폭파와 인명 살상이야말로 훨씬 더 악의적이지 않은 실책일 뿐이라고 실드 치고 넘길 수도 있겠다. 이게 전체 그림의 진실인 것이다.

정치색 들어간 얘기는 이쯤에서 접고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면..
이렇듯 국가 대표로서 적성국가 사람과 대면하는 건 어지간히 힘든 일이 아니다. 옛날에 이 후락 중앙정보부장도 몰래 북한을 방문했을 때,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 만약을 대비해 언제든지 즉시 자폭 가능하게 독약 앰플을 준비해 갔을 정도였다.

그리고 같은 전방에서도 상대적으로 낙후해 있는 동부 전선 강원도 산간지대 말고.. 서울과 가까운 평지이고 판문점도 있는 서부 전선이 훨씬 더 엄선된(체력· 사상 모두) 정예 군인들이 배치된다. 여기 일대는 민통선과 DMZ의 구분이 좀 므흣해서 북한군과 직접 대면하기 쉽고 각종 높으신 분들도 많이 오며, 덩달아 어느 지역보다도 월북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여기가 그야말로 노다지 진급 코스이다. 육사 졸업생은 바로 이런 데에서 소대장으로 첫 근무를 시작한다.

3. 탈북자가 가는 곳

북한 주민들이 탈북을 하는 경로는 신분과 지위에 따라 다양하다. 외국에 파견 나가 있다가 별안간 망명을 신청하기도 하고, 천신만고 끝에 중국 국경으로 넘어간 뒤 다른 나라를 거쳐 한국으로 오기도 한다. 배를 타고 넘어오거나 국경에서 근무 중인 군인이 별안간 남쪽으로 오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남쪽으로 넘어오는 북한 주민들은 명목상으로는 반국가단체의 지배 하에 있다가 탈출해 온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자유 대한의 품에 안긴 그들을 최대한 인간적으로 대우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탈북자로 위장 행세를 하는 간첩도 있기 때문에, 대접을 하기에 앞서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의심과 검증은 거친다. 탈북했다가 별안간 "나 마음이 바뀌었으니 북으로 다시 보내 주쇼" 하고 떼쓰는 이상한 아줌마도 있는데 이건 99.9% 간첩이다.

필요 이상으로 이상하게 북한을 자주 방문하는 사람도 굉장히 의심해야 한다. 그런 놈들은 북에 가서는 돈 왕창 바친 뒤 또 지령 받아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정치· 종교 쪽으로 유명한 사람이 북에서 자기 지위와 관련된 약점을 한번 잡힌 뒤부터는(마약이나 성 스캔들 같은) 북에 대해서 소신 발언은 끽소리도 못 하는 친종북 인사가 돼 버린다.

뭐 이런 경위가 있기 때문에, 탈북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접수되면 곧바로 하나원 같은 정착 지원 시설로 가는 게 아니다. 이들은 정확한 신원 파악을 위해 먼저 탈북자 전용 신문 센터에 며칠간 수용되어 정밀 조사를 받는다. 이건 국정원 자체는 아니지만 국정원에서 관할하는 시설이며, 시흥시 수인로라는 대로변에 자리잡아 있다. 당연히 아무 이정표도 없고, 밖에서 봐서는 이런 시설이 있는지 일반인은 전혀 알 수 없다.

정밀 조사를 통해 이들이 정말로 북한에서 왔고 악의가 없는 탈북자가 맞는지를 최종 확인한다. 우리나라도 정부 수립 이래로 지금까지 탈북자가 한두 명 쌓인 게 아니고 이 바닥 장사를 하루 이틀 하는 게 아닌데, 수많은 탈북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교차 검증 가능한 데이터쯤이야 왕창 쌓여 있다. 정말로 북한의 그 지역에서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내용을 거듭 질문해서 제대로 대답하는지 확인한다.

검증을 통과한 뒤 탈북자들은 하나원에서 총 12주간 남조선 사회 제도에 대한 교육을 받은 뒤, 각종 정착 자금을 받고 사회로 배출된다. 게임에서 튜토리얼을 한 뒤, 캐릭터가 본게임 필드에 스폰돼서 처음엔 깜빡거리는 실드 모드이다가 그 뒤부터는 실드 모드가 꺼지는 것과 같다.
세월이 흐르면서 탈북자가 워낙 많아지고 이들을 받아들이는 게 '귀순 용사'로 일일이 띄울 필요도 없는 일상적인 일과가 되자.. 하나원 역시 2010년대에 와서는 화천군에 멀티를 또 만들었다. 본원은 안성 품곡마을 근처에 있다.

하나원과 신문 센터 모두 법적으로 '가급 보안 시설'이고 지도에는 전혀 나와 있지 않다. 북한이 위치를 알아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 시설이니까. 국정원 본원 자체도 코렁시설이지만 신문 센터라든가 국가 정보 대학원 같은 추가적인 연계 코렁시설도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나저나 서독산과 수리산의 사이에 있는 안양 박달동은 보아하니 산지 같은데 산 전체가 몽땅 온갖 군부대로 가득하구나. 예비군 훈련장도 당연히 있고. 산 전체가 탄약고인 천안 성환읍 학정리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6/12/05 19:37 2016/12/05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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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2016년이고 좀 있으면 우리나라에 제6공화국이 출범한 지도 30주년이 되는데.. 우리나라는 개헌과 디노미네이션(화폐 개혁)이 국가의 미래를 위해 21세기 전반부에 풀고 가야 할 대표적인 숙제가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는 둘 다 지금 당장까지는 아니어도 예측 가능한 가까운 미래에 추진하는 것에 찬성 입장이다.
먼저 정치 쪽은.. 대통령 선거 타이밍을 국회의원의 타이밍과 맞추고, 대통령은 미국처럼 4년 + 호응 좋으면 1회 중임 가능하게 하는 게 어떨까?

우리나라가 역사 정서적으로 독재자의 엿장수 식 개헌에 대한 트라우마가 좀 있는 건 사실이다. 이에 대한 반발 때문에 지금 헌법은 반대로 고치기가 너무 어렵게 바뀐 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러나 본인이 예전에도 생각을 밝혔듯이, 옛날에 그 정도 독재는 당대의 국민 의식 대비 북한의 위협 때문에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 그 정도로 위태롭던 시기에도 그 정도 인권유린이나 정치범 탄압 부작용밖에 없었다면, 세계 역사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나마 아주 선량한(?) 독재였다고 본다.

그 독재 권위라도 없이 국론이 완전 사분오열돼서 나라꼴이 도떼기시장 개판오분전이 되고 뭐 하나 큰 사업을 시작하려 해도 맨날 반대를 위한 반대에, 조선 시대식 당파 싸움에, 제발 데모질 좀 하지 말라고 데모가 벌어지고, 이 틈을 노려 공산주의자 간첩들이 활개를 치면서 민· 관을 마음껏 이간질하다가 또 북한이 남침하는 시나리오를 생각해 보라. 이것보다야 차라리 강력한 독재가 나았으며 특히 그 옛날에는 그게 더 절실한 필요악이었다. 오죽했으면 전땅크의 5. 18은 몰라도 박통의 5. 16 쿠데타는 그 시절에 어지간한 지식인 지도층들도 지지했을 정도였다(예: 장 준하).

그 와중에 민주화라는 것도 백성들이 그냥 저항만 한다고 이뤄질 수 있는 거 아니다. 통치자들이 기본적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최소한의 선량한 마인드는 갖춰져 있었으니 정권 교체가 가능했다. 그게 아니라면 북한은 주민들이 민주 의식 저항 의식이 남조선 인민들보다 부족해서 저 지경이 된 것이겠는가?

예전의 통치자들이 국민을 우습게 여기고 비리 저지르고 잘못한 거야 신나게 까고 비판하고 씹어야 할 것이다. 두 번 다시 그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게 국민이 감시를 잘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큰 그림을 보면 명백히 썩은 내 풀풀 나는 쓰레기 시궁창 속에서 그나마 이 정도 꽃이라도 기적적으로 피워 낸 거라고 볼 수 있다.

그게 아니라 무슨.. 우리나라가 해방 직후에 우리 민족끼리 아~주 평화롭게 통일 국가 이뤄서 잘 살 수 있었는데 무슨 나쁜놈이 친미 친일 공화국을 만들고 나라를 분단시키고 좋은 기회를 다 망가뜨렸네 하는 그딴 소리에는 본인이 내 양심과 명예를 걸고 죽어도 전~혀 동의하지 않으며 온몸으로 반대한다.
통일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그 시절에 그런 식의 통일이란 100% 김 일성 치하의 적화통일을 의미할 뿐이지. 그 나이 쳐먹도록 아직도 그런 순진한 말을 믿고 있냐?

얘기가 좀 엉뚱하게 흘렀다만.. 아무튼 북한을 대치하고 있는 시국 속에서 우리나라는 미군정을 졸업하고 군사 정권까지 청산한 뒤, '직접 민주주의'까지 잘 이뤘다. 하지만 이제는 1987년 체제도 좀 초월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이렇게 정치 시스템을 고치는 일은(민주화? 직선제 등등).. 좋은 일이긴 하지만 그게 무슨 북한 주민들을 구출한 급이 아닌 이상, 나라를 외적 침략으로부터 지키거나 가난을 극복한 일만치 위대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 역시 변함없다. 그게 급이 서로 같을 수가 없다.

다음으로 화폐 얘기다. 우리나라의 헌정 시스템은 since 1987이라지만, 지금의 '원'이라는 단위 체계는 무려 since 1962이다. 박통 때 제정된 돈이 만약 있기만 하다면 지금도 동일한 액면가로 통용 가능하다. (물론 그런 골동품 돈은 액면가 그대로 써 버리는 건 완전 바보짓이다. 수집가에게 파는 게 훨씬 더 이익이므로.)

허나, 대한민국 급의 선진국들 중에서 이 '원'만치 가치가 너무 작고 반대로 자릿수가 너무 큰 화폐단위를 쓰는 나라는 없다. 반세기 동안 인플레가 쌓이고 쌓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10만원 지폐까지 만들 지경이 된다면 그걸 하느니 끝의 0 한두 개를 좀 없애 버리면 어떨까 싶다.

그리고 화폐를 새로 만들 때쯤이면, 제발 조선 시대 이씨 말고 대한민국 시대 인물도 모델로 좀 넣자.
굳이 조선을 또 넣을 거면 성역 고정출연급인 세종대왕 이 순신 말고는 장 영실· 정 약용 같은 발명가, 실학자 계열을 넣고 말이다. 유학자들만 너무 빨아댄다. 유교탈레반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요즘 저게 평판이 얼마나 안 좋은데!

이런 개헌과 화폐 개혁이 통일과 함께 안 그래도 어차피 사회 기반을 갈아엎어야 할 타이밍 때 원큐로 싹 같이 진행돼 버리면 비용도 제일 덜 들고 좋을 것이다. 이 시기 이전과 이후의 대한민국은 광복 전후, 6· 25 전후 같은 급으로 분위기가 싹 달라질 것이고 그 날은 아마 국경일· 기념일 정도는 돼서 달력에 표기될 것이다.

아, 한반도에 유일하게 바람직한 통일, 평화 통일, 진정한 통일이란 당연한 말이지만 이북의 김돼지 정권이 스스로 무너지든, 군사력으로 쳐부수든 어쨌든 걔네들이 축출되고 제거되고 처벌받는 통일밖에 없다. 그것 말고 적과 싸우다 져서 통일 '당하든가', 적과 내통하고 적당하게 타협하고 적에게 왕창 돈 갖다 바쳐서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얻은 통일 따위는 안 하는 것만도 못한 잘못된 통일이다.
아무리 통일이 좋기로서니 주체사상 내지 김돼지 부자 동상을 그대로 놔 두고 존치시킬 생각이신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생각해 보라.

제대로 된 통일이 불가능하다면 차선· 차악 차원에서 차라리 영구분단이 1억 배 이상 낫다. 사채· 보증 써서 막느니 차라리 평범한 신용불량자가 되는 게 나은 것과 정확하게 같은 이치이다.

어차피 북괴는 교류 끊고 고립만 제대로 잘 시켜도 알아서 붕괴한다. 굳이 전쟁 벌여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조차 없다.
상황이 급하고 저자세로 나와야 되는 건 걔네들이지 우리가 아니다. 걔네들이 그 와중에 핵까지 개발하는 데 성공한 건 그렇게 고립시키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군인의 본분에다 비유하자면 작전에 실패한 것도 아니고 경계에 실패한 것과 같다.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비극이 앞으로 다시는 없어야 한다.

북괴 정권은 완전히 패망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폭탄 끌어안고 최후의 발악을 할 것이다. 자기가 없어지더라도 땅 한 평, 인민 한 명이라도 남조선에 도움이 될 건 하나도 남겨놓지 않고 독 뿌리고 방사능 오염시키고서 망할 게 뻔히 보인다. 차라리 중국에다 주면 줬지 우리한텐 안 준다. 옛날에 일제가 핵폭탄 안 맞았으면 마지막까지 전인민 옥쇄니 뭐니 하면서 무슨 짓거리를 하려고 했었던가? 그걸 생각하면 된다. 북한은 그런 나라이다.

그렇게 김돼지 정권을 몰아냈다고 생각해 보자. 못 먹어서 허약하고 기형이고 마약에까지 취한 인민들.. 물론 인도적인 차원에서 구제는 해야겠지만, 반쯤 병신인 인민들에게 최소한의 경제력이나 생산 능력이 있을 리 없을 것이고 이건 통일 비용을 왕창 잡아먹는 요인이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민족끼리'의 허상을 버리고, 북괴 정권을 도와준 건 인민에게는 절대 안 간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북괴를 조직적으로 고립 압박해서 망하게 해야 한다. 이럴 자신이 없으면 그냥 영구분단으로 가든가.

이 개념을 복습해 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 전혀 사실이 아님

  1. 통일은 지금 외세의 방해 때문에 못 하고 있다.
  2. 김씨 부자 정권과 주체사상을 그대로 존치하면서 남북을 통일하는 것이 가능하다 / 적절하다 / 옳다.
  3. 북한 정권은 완전히 개과천선해서 대남적화 야욕이 없어졌다.
  4. 북한은 정부가 인민들을 먹여 살리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데도 다른 외형적인 불가피한 이유 때문에 못살고 있다.

* 100% 절대무오한 사실임

  1. 통일은 남 탓 할 필요 없이 북괴의 잘못된 통치 이념과 사상 때문에 못 하는 것일 뿐이다.
  2. 북한은 이념으로서 스탈린이니 레닌이니 하는 공산주의는 물론 진작에 버렸다. 하지만 근처에 있는 제일 만만한 나라의 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이 사용하던 위장, 간첩질, 거짓 선동, 유언비어, 역사왜곡, 계층간 이간질 등 온갖 비열하고 더러운 방법은 여전히 적극 운용 중이다.
  3. 정상적인 경제개발 및 군사력 육성으로 남조선을 적화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쟤들은 더 극단적이고(핵 등 비대칭무기) 치사한(위와 같은..)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북쪽에 대해서 positive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쟤들이 공략하는 건 오로지 남쪽에 대한 negative이다.
  4. 우리나라가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는 "아는 게 힘이다. 이제라도 우리보다 힘센 일본을 배우자. 근대화하자" 이런 움직임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북한에게서 우리가 일말의 배울 만한 선한 것이 있나? 전혀 그렇지 않다. 쟤들은 하다못해 경제력과 군사력을 키워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적화통일을 꾀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비열하고 더러운 전술에 속지 말아야 하고 경계 분리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5. 자기도 말로만, 입으로만 북한 정권 싫어한다 김 일성 싫어한다 그러면서 필요악과 절대악은 구분할 줄 모르고, 6·25 전쟁이 무슨 남북 양비론인 줄 알고, 적화통일 반대한다면서 적화통일 자금줄 대주는 일에는 아무 관념이 없는 무지한 사람들이 남조선에 너무 많다.

위와 같은 나의 팩트 인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기지 않는 한, 내가 우리나라 근현대사 내지 정치와 관련하여 쓰는 글에는 북괴, 종북개빨, 더 나아가서 좌좀 깨시민 같은 과격한 단어가 사라질 일이 없을 것이다.

나의 정치 성향이 마음에 안 들고 불편해서 견딜 수 없다면, 누구든지 위의 저 전제조건들만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면 된다. 남이 지지하는 것의 욕만 자꾸 하지 말고 자기가 지지하는 것이 옳고 맞다는 걸 입증해 보이면 된다. A가 틀렸다고 해서 자동으로 B가 맞게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날개셋> 한글 입력기는 오픈소스가 아니지만 난 사상 체계는 철저한 오픈소스다. 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지 논리를 구성하는 근거 팩트들을 아주 투명하게 제시해 놓았다. 저것만 무너뜨리고 논파하면 내 생각을 바꿔 놓을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진영논리에 사로잡혀서 남이 뭐라고 지껄이든 듣지 않고 답은 정해 놓고 박박 우기는 거야말로 폐쇄 클로우즈드 소스겠지.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한 나라 체계 하에서 법망을 요리조리 피해서 특혜 받고 나쁜짓 하고 평범하게 부정축재 해 온 놈과,
아예 적국에게 자금 바치고는 그걸 온갖 평화드립 궤변으로 합리화하고 오로지 자국 폄하만 일삼는 놈이 어떻게 서로 레벨이 같냐..? -_-;;
저 둘은 성경에서 아담의 죄와 루시퍼의 죄가 다른 것만큼이나 다르고, 노아의 홍수와 이전 세상 홍수가 다른 것만큼이나 완전히 다르다.

후자가 전자보다 청렴하기라도 한 것도 당연히 절~대 아님. 선조의 친일 내력이나 자식새끼의 특혜/병역비리를 파자면 절대적으로 평균이나 그 이상 나온다. 서로 네거티브 대결만 해서는 양쪽 다 오십 보 백 보이고 끝이 안 난다. 6· 25의 책임이 양비론인 게 아니라 이런 거나 양비론 피장파장이다. 그러니 결국은 대적관과 이념의 건전함으로 결판을 낼 수밖에 없다.

통일이란 건 너무나 엄청난 일이다. 마치 결혼이나 교통사고처럼 나(혹은 우리나라)만 잘한다고 혼자 할 수 있거나 예방 가능한 게 아니다.
그게 어느 때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가 통일에 덧붙여서 개헌· 디노미네이션까지 국가 체계를 적절한 타이밍에 잘 개편해 내는 복을 누리게 될지는 모르겠다. 옛날에 더 늦기 전에 좋은 타이밍 때 220볼트 승압을 싹 해치웠고 철도 표준궤 개궤를 해서 미래에 후손들이 편해진 것처럼 말이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그때쯤이면 한글 글자판도 세벌식 중심으로 다시 제대로 논의됐으면 좋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6/10/26 08:31 2016/10/26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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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상륙 작전 (영화)

영화 인천 상륙 작전, 혹은 오퍼레이션 크로마이트.
일부러 날짜를 맞춘 건지는 모르겠지만, 6· 25 전쟁의 휴전이 타결된 날인 7월 27일에 개봉했다.
보는 내내.. 감독이 표현하고자 한 사상이 본인의 내면과 잘 통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반대로 좌빨 매체에서 별 이유 같지도 않은 궤변 늘어놓으면서 이 영화를 왜 저렇게 못 물어뜯어서 야단인지가 적극 이해되었다. 북괴 치하에서 벌어지던 잔학한 공포통치, 세뇌, 인민재판, 숙청을 저렇게 적나라하게 그려 놨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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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막론하고 전쟁은 그저 참혹한 거고(그 전쟁을 먼저 일으킨 쪽이 누군데?), 공산당도 알고 보면 사실 착한놈이고 미군 국군도 민간인 왕창 학살했어(민간인 위장해서 치사하고 비열하게 도발한 놈 얘기는 절~대로 없이), 동족상잔의 비극은 남북 모두 책임이네 식의 메시지를 본인은 거의 부모 모독 패드립과 같은 급으로 정말 온몸으로 혐오한다. 저건 정말 천하에 듣기 싫은 불순하고 사악하고 마귀적인 사상이다.

이 영화는 요즘 각종 다른 매체들이 그러는 것처럼 이미 다 검증돼 있는 선악 구도를 괜히 비비 꼬고 비틀고 재해석(?)하고 절대악과 필요악을 교란하는 식의 전개가 없다. 그래서 참 건전하다.
스토리의 표현이나 묘사가 옛날 영화처럼 좀 진부한 건 일단 사상이 건전한 것에 비해서야 그리 큰 흠이 아니라고 본다.

특공대가 기차를 타고 적진으로 침투하는 건 김 재현 기관사(미군 딘 소장 구출 작전)의 이야기를 다룬 <미카 129> 애니메이션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그건 1950년 7월에 있었던 일이니 시기적으로 인천 상륙 작전보다 2개월 전, 이제 막 대전을 빼앗겼던 시절의 얘기다. 그 시절엔 열차 객차들이 다들 저렇게 목재에 직각 의자로 돼 있었나 보다.

그리고 대원들이 흩어지기 직전에 서로 손목시계의 시각을 동기화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그래야 시간 약속에 맞춰 정확하게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엔 그 정도로 소형화된 손목시계는 굉장한 사치 고가품이었기 때문에 아무나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한반도의 해방 직후에 소련군이 들어와서는 민간인에게 행패와 약탈을 일삼았으며, 특별히 약탈한 손목시계들을 한 팔목에다 주렁주렁 차고 다녔다는 걸 생각해 보시라.
그로부터 20여 년 전에 윤 봉길 의사가 김 구와 교환한 시계는 손목시계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 회중시계였다는 점도 같이 생각해 보자.

본론으로 돌아오면, 이 영화에서 맥아더 장군 역을 맡은 배우는 잘 알다시피 그 이름도 유명한 리암 니슨이다. 테이큰에서 내가 완전 반해 버린 그 아저씨가 '군산, 원산, 인천' 등 한국의 지명을 발음하면서 맥아더 연기를 하다니 무진장 기쁘고 고맙다. 잘생겼고 무엇보다 우리나라에 호의적이고 개인적인 품행과 사상이 건전한 배우인 것 같아 더욱 믿음직스럽고 호감이 간다. 아주 건전하고 뜻깊은 역사물 영화를 만든대서 여느 할리우드 영화를 찍을 때보다 훨씬 더 저렴한 출연료만 받고 선뜻 출연해 줬다고 한다.

이 사람이 전화통 붙들고 김 일성과 "난 니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전쟁을 멈추고 철수하지 않으면 난 군대를 보내서 널 찾아내고 널 죽여 버릴 것이다." / "풋~ 잘해 보라우" 설마 이런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영화엔 더 감격스러운 장면이 있었다.
팔미도 등대가 점등되었을 때, 그리고 선발대로부터 조명탄이 성공적으로 발사됐을 때.. 어둠 속에서 '빛'이 쫙~ 비친다. 맥아더도 이걸 보고는 감격한다. 작전 성공을 이렇게 묘사한 게 단순히 적진을 다 때리부순 장면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이었다. 성경에서도 빛은 절대적으로 긍정적인 심상이고 어둠은 절대적으로 부정적이고 나쁜 심상이다.

  • 어머니를 지켜 주고 싶어 군대에 자원한 이 정재 vs 이념을 위해서라면 가족도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이 범수
  • 부하의 죽음에 눈물 흘리는 이 정재 vs 홧김에 부하를 쏴 죽이는 이 범수
  • 대통령 하고 싶어서 인천 상륙 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품은 반대 세력 vs 나라를 지킬 총과 탄약을 더 달라는 소년병의 군인정신에 감동해 반드시 이 전쟁을 이기겠다고 다짐한 군인 맥아더
  • 인민군 내부에서조차 림 계진과 박 남철은 서로 감시 vs 국경을 초월하여 서로 신뢰하는 맥아더와 장 학수

어느 게 선이고 어느 게 악인지, 어느 게 빛이고 어느 게 어둠인지를 이 영화는 단순하게 잘 대조해서 보여 줬다.
또한 러시아어를 읊조리는 북한군 애들은 "신이 도대체 어디 있다는 거야? 보이기나 해?" 이러지만 맥아더 포함 미군 장성들은 수시로 "신의 가호가 있기를.." 이러는 것 역시 좋은 대조를 이룬다.
간호사로 출연한 진 세연은 여기서도 항거 대상이 일제에서 북괴로 바뀌었을 뿐, 각시탈의 오목단과 비슷한 역할을 한 것 같다.

결말부로 가면 드디어 인천 시내에 시뻘건 저주받을 선전 구호들이 철거되고 시내가 태극기 물결로 바뀐다. 이건 그야말로 8· 15 해방과 동급의 기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이걸 아미타불로 바꾼 원흉이 중공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미제 분단 식민지로 들어갈 게 아니라 김 구와 함께 김 일성 밑에서 무혈 통일 이뤄서 우리 민족끼리 행복하게 살았어야 했다" 요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인천 상륙 작전>은 감동적이면 감동적이지 불편할 내용은 하등 존재하지 않는다. 괜히 표현이 식상하고 진부하네 이런 거 불평하기에 앞서 난 이런 역사를 다룬 귀한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것 자체가 일단 고맙고 기쁘다.

이 영화에서는 일명 "맥아더 장군을 감동시킨 소년병" 씬이 흑백 과거 회상 형태로 잠깐 들어갔다. 이건 문헌에 따라서 날짜와 대사가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한데.. 6월 27일 or 29일, 서울 영등포 or 흑석동.. 어쨌든 개전 초기 서울을 빼앗기기 직전 또는 직후에 서울 한강 이남 전선을 시찰하던 맥아더 장군이 통역 장교를 대동하여 어느 앳된 병사와 실제로 나눈 대화이다.

"후퇴 명령이 내려올 때까지 자리를 지킬 것이고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계속 싸울 것입니다."
"원하는 건.. 딴 건 필요 없고 단지 총과 실탄을 좀 더 주십시오."


본인은 저 일화를 먼 옛날 시스템클럽 글을 통해서 진작부터 접했었다. 거기 운영자분이 맥아더를 굉장히 좋아하시기 때문에.

훗날 박 정희 대통령이 무슨 미국 무기 회사 임원과 청와대에서 몰래 거래를 하면서 "님이 내게 준 개인 비자금 100만 달러를 도로 님에게 줄 테니 이 가격만치 M16 소총을 더 주시오" 뭐 이랬다는 일화(?)도 전해 내려온다. 그런데 그건 솔직히 출처와 정확도를 확신을 못 하겠다. 그것과는 달리 맥아더 + 소년병 일화는 국내외 여러 군 관계자의 회고록에도 수록돼 있으며, 주작이 절대로 아니다.

일제 강점기를 생각해 보자. 비록 당장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은 무모한 짓으로 보여도, 계속 항쟁과 의거가 벌어지니까 외국에서도 "조선은 정말로 일제와 한 뿌리가 아니며 독립을 원하는구나"라고 생각을 하게 됐다. 윤 봉길 의사가 폭탄 투척을 했을 때 장 제스가 얼마나 감탄했던가?

이런 일들이 쌓이고 쌓이니 1940년대의 국제 여론은 구한말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일제를 쫓아낸 뒤 조선을 독립시키자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조선은 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일제 식민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카이로 선언에서 독립 보장이 명시되는 감격의 성과가 나타났다.
그리고 바로 그것처럼.. 당장 자국민부터가 적과 맞서 싸우겠다는 확연한 의지를 드러내니 그것이 나비효과가 되어 맥아더 장군의 심리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역사를 바꾸게 됐다.

개전 초기에 국군은 전열이 무너지고 지휘 체계가 황폐화되는 혼돈의 카오스 속에서 허둥대다 1개월쯤 뒤부터는 희대의 막장 조치인 즉결처분조차 시행할 정도로 암울한 지경에 도달했다. (군기가 얼마나 개판이었으면 상관의 '까라면 까' 명령에 불응하는 부하를 현장에서 재판 없이 바로 사살 허용..;; 부하란 굳이 병뿐만 아니라 초급 장교들도 포함이다. license to kill -_-)
게다가 맥아더는 채 병덕 같은 남한의 X맨 급인 무능한 수뇌부에 이골이 나 있기도 했다. (유 재흥은 전투 패배 후에 밴 플리트 장군에게 까였고, 채 병덕은 개전 초기부터 맥아더에게..)

그랬는데 그 타이밍에 마침 저런 모범 병사를 만난 것이다. 맥아더가 포레스트 검프에서 "이런 씨발. 내가 지금까지 들은 가장 훌륭한 대답이다. 귀관은 IQ가 한 160쯤 되는 천재임이 틀림없다!" 거의 이런 급으로 감탄했을지도 모르겠다.

66년 전에 거기에 있었던 그 소년병 당사자(고 신 동수 옹. 2013년에 작고)의 부인 되시는 분<인천 상륙 작전> 영화를 관람하고는 감격에 눈시울이 젖었다고 한다! "우리 남편이 살아서 같이 봤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런데 기자 양반, 혹시 이 영화 비디오로 하나 살 수 없을까? 남편 얼굴이 가뭇가뭇할 때마다 보고 싶어서 말이야." 가슴 뭉클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이분의 인터뷰가 보도되고 나자 주연 배우인 이 정재 씨가 직접 비디오 테이프와 꽃다발을 들고 그분을 찾아뵈었으며, 리암 니슨도 직접 이분을 칭송하고 격려하는 이메일을 보냈다고 한다.
이것만으로도 인천 상륙 작전은 평론가 평점 3점대 테러나 당할 작품은 절대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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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시 2:2-4라든가 계시록에서 여러 민족들이 한데 뭉쳐서 특정 한 민족을 대적하는 사건을 언급한다. 이것은 영적으로 명백하게 좋은 현상이 아니며, 사실은 UN조차도 앞으로 그런 악역을 수행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저런 트렌드와는 반대로,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나라들이 한데 뭉쳐 한 나라를 도왔던 6· 25 전쟁은 거의 전무후무한 사례이고 예외적으로 봐야 하지 않나 싶다. 미국이 개입했던 전쟁들 중 정당성 명분이 톱급으로 가장 큰 전쟁이었다.

뭐 괜히 쓸데없이 김치, 된장, 한복 이런 것보다야 차라리 한글이라든가..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시대를 너무 앞서 간 엄친아 괴수요 국제 정세의 달인인 어느 할배에 의해 미국의 도움을 받아 기적적으로 건국됐고, 저렇게 드라마틱하게 지켜져 왔다는 사실에나 좀 자부심 가졌으면 좋겠다. 과장 보태면 그런 건 좀 국뽕에 취해도 되겠구만, 왜 저런 정말 중요한 아이템엔 사람들이 관심이 별로 없나 하는 생각이 든다.

6· 25 개전 초기에 남한 정부의 우왕좌왕 실책과 병크가 나온 것을 비판할 건 비판하더라도... 국내 관료들과 미국 정치인들이 그 할배의 선견지명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받아들였다면 애초에 그 전쟁 자체가 벌어지지 않고 피해가 훨씬 줄어들 수도 있었다는 걸 먼저 감안해야 될 것이다.

그에 반해 김 구는 '그 할배' 같은 선악 관념이 없이, 남북 분단을 민족주의 감정에 호소하며 어떻게든 중재하고 막으려 했다. 이 사람이 덜컥 암살 당해 버리는 바람에 중재자가 없어졌고 남북 관계는 더욱 싸늘하게 식으면서 전쟁이 났다는 식의 해석도 있는데.. 그건 김 일성을 너무 착하고 순진하게 본 어리석은 생각이다.

김 구는 암살 당하지 않았고 계속 살았다면 최악의 경우 피아 구분을 못 한 채 적화통일 꼭둑각시로 이용당하면서 이 승만의 4· 19 부정선거 하야보다도 대한민국의 미래에 더 악영향을 끼치고 더 추하게 몰락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잘해 봐야 그냥 전쟁 타이밍의 시간만 약간 더 버는 역할밖에 못 했을 것이다. 악한 힘은 더 강한 힘으로 찍어 누르고 견제하는 것밖에 답이 없다.

이런 북한이 <인천 상륙 작전> 영화를 좋게 평가했을 리는 만무하다. 대남 종북 매체인 '우리민족끼리'를 통해 신랄하게 디스했다. 지난 7월 29일자 보도를 보면 "남조선 괴뢰들이 지난 27일 그 무슨 '인천상륙작전'이라는 영화에 대한 시사회 놀음을 벌리였다. 불가능한 작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된 작전이니, 죽음을 불사한 이야기니 뭐니 하는 희떠운(분에 넘치며 버릇이 없는) 수작들을 늘어놓고 있다."고 비난했었다.

아무쪼록 이 시간 나에게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새 기능을 코딩할 자유를 지킨 호국영령들의 은혜를 잠시 생각하며 감사한다. 이상.

Posted by 사무엘

2016/08/23 08:33 2016/08/23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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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답사기: 불곡산 (성남)

경기도 성남과 광주는 산들로 가로막혀 있어서 전통적으로 생활권이 서로 단절돼 있다. 성남 분당에서 어디서든 동쪽으로 끝까지 진행해 보면 결국 인적이 뜸해지고 산이 나오는데, 그 산을 넘으면 행정구역이 바뀐다. 본인은 바로 거기 일대를 탐험하고 싶어진 관계로, 하루 날 잡아서 분당의 동남쪽에 있는 불곡산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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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곡산 등산 진입로는 분당동 주민센터, 정자동 이마트, 분당 서울대 병원 근처 등 여러 곳이 있다. 본인은 그 중 이마트를 선택해서 정상을 향해 북쪽으로 산을 올랐다. 위의 사진은 등산 진입로 근처의 풍경이다. 지난번에 검단산을 오를 때처럼 날씨는 흐린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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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곡산은 전반적으로 등산로가 넓고 잘 닦여 있었다. 가끔 벤치와 운동 기구가 놓인 공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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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줄을 잡고 암반을 타고 오르는 험한(?) 구간이 딱~ 한 군데 있었다. 하지만 다른 곳으로 우회도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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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번 암반을 오르자 산등성이에 진입하고 이정표가 나타났다. 정상은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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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는 역시 운동 기구와 함께 책꽂이가 비치된 정자가 있었다. 단, 이 산은 내가 지나간 곳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전망대 같은 건 전혀 없어서 역시 산 아래 경치는 감상할 수 없었다.
전망대가 없고 정상 표지석도 꽤 찾기 힘든 곳에 짱박혀 있어서 난 처음엔 여기가 정상이 아닌 줄 알았다.
어쨌든 산에서 제일 높은 곳에 땅밟기를 성공했으니 1차 목표는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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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서는 곧장 광주 방면으로 하산할 수도 있고, 산등성이를 따라 분당동이나 태재고개 등 북쪽으로 산행을 계속할 수도 있었다.
북쪽에 정상보다는 낮지만 '형제봉'이라는 다른 봉우리가 있다고 해서 본인은 그쪽으로 향했다. 등산로는 역시나 전반적으로 폭도 크고 돌 밟을 일이 없을 정도로 아주 잘 닦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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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봉은 불곡산 정상에서 1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여기도 간단한 정자와 운동 시설이 있었지만 역시나 전망대 같은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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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봉까지 들른 뒤, 본인은 분당동이 아니라 반대편 광주 방면으로 하산하기 위해서 태재고개 쪽으로 계속 산을 탔다. 성남을 넘어 광주로 진입할 때쯤 되자 언제부턴가 등산로가 좁아지고 산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태재고개를 몇백 m 앞두고 수풀 속에서 위와 같은 이정표가 나타났다. 여기서 지체없이 광주 뒷골 방면을 선택했다. 태재고개에는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지만 광주의 산기슭 마을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궁금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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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옷, 드디어 이런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기자기한 빌라들이 늘어서 있는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 마을 어딘가에 착륙했다. 가장 가까운 길 모퉁이에는 '상태길68번길'이라는 표지판이 있었다.
큰길을 향해 몇백 m 정도 걸어가니 마을 입구가 있고, 근처에 버스 정류장도 보였다. 버스를 타니 말로만 듣던 지방도 57호선에 차들이 바글바글 몰려 있었다.

이곳을 떠날 때는 시내버스 17번을 탔다. 덕분에 지금까지 말로만 듣던 성 요한 성당, 율동 공원, 분당동 주민센터를 비롯해 성남대로와 분당선 일대만 돌아다닐 때는 접할 수 없던 분당 시가지 내륙 쪽의 모습을 차창 밖으로나마 잘 구경할 수 있었다. 버스가 워낙 꼬불꼬불 돌아서 다니니 투어용으로는 좋았다. =_=;;

사실, 북쪽의 분당동 주민센터 쪽에서 입산해서 형제봉부터 들른 뒤 불곡산 정상까지 남쪽으로 내려가는 경로도 생각할 수 있었다. 동선의 관점에서는 그게 더 낫다. 하지만, 불곡산 정상에서 광주 방면으로 곧바로 하산하는 경우 귀가하는 연계 교통편이 문제가 됐다.
상태마을보다 더 외진 농촌 마을에 도달하게 되며, 이마저도 탐험이 목적이라면 오히려 더 나은 선택이다. 허나 여기는 대중교통이 아예 없는지라 버스를 타려면 어차피 상태마을까지 북쪽으로 몇백m~수 km를 걸어가야 한다.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하산하자마자 곧장 버스를 탈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하게 북남이 아니라 남북으로 코스를 짰다. 기왕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려면 산길로 이동하는 게 낫다고 판단해서이다.
단순히 헬스장의 러닝머신 위를 뛰거나 동네 주변을 조깅하는 것에 비해 등산은 여행과 탐험이라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집에서 상대적으로 멀리 외진 곳으로 나간다는 특성상, 중간에 취소를 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가기 전에 시간과 체력 분배, 교통편 같은 계획을 잘 짜야 된다. 이것도 많이 해 보면 계획 짜는 것 자체에 재미가 붙는다.

Posted by 사무엘

2016/06/21 08:31 2016/06/21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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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태양 아래

개그에 장난끼가 농후하던 <디 인터뷰>보다야 훨씬 더 고퀄이고 진지하고 고증 잘 됐고, 북한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외국 영화가 하나 만들어져 나왔다. 감독은 러시아 사람임. 본인은 바로 극장에 가서 관람했다. 이런 진귀한 영상은 돈 주고 볼 가치가 있다.
제목이 태양 아래(under the sun)라니, 영락없이 전도서의 표현에서 모티브를 딴 건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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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엔 <태양의 후예>라는 드라마가 그야말로 국내외로 초대박을 쳤는데, 한편으로 뭔가 반인륜 범죄를 폭로하는 영상물에도 '태양'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경우가 있다. 국내에 마루타라고 소개되었던 1988년작 고어 영화 <흑태양 731>도 영어 제목은 the men BEHIND the sun이다. 물론, 이제 와서 북괴는 잔학함(함수의 특정 지점 최대값)과 지속 기간(함수의 구간 적분값)이 둘 모두 과거 일제를 능가하고 있긴 하다만 말이다.

<태양 아래>는 북한을 소재로 한 영화이지만 딱히 스릴 넘치게 싸우고 죽이는 장면 같은 건 전혀 없다. 이건 탈북자나 북한 지하 교회, 국경의 버려진 꽃제비나 정치범 수용소를 다루는 영화가 아니며, 오히려 완전히 반대다.
북한이 외국인에게 어느 정도 촬영해도 좋다고 허가를 했을 정도로, 평양에서 핵심계층으로 최상위급으로 잘사는 어느 집안의 애가 2014년도 김 일성 탄신일(태양절) 행사를 앞두고 소년단에 가입하고 행사 준비에 어떻게 투입되는지를 굉장히 잘 묘사해 놓은 일종의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그러니 잘 조작되고 각본대로 돌아가고, 북이 찍어도 좋다고 OK 한 장면 위주로 영화를 만든 건데 애초에 그런 위기나 돌발상황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런 장면에다가 감독이 위험을 무릅쓰고 추가로 몰래 찍은 북한의 민낯 폭로 장면이 들어갔을 뿐이다.

영화에서 먼저 인상적으로 와 닿았던 건 언어와 말투다.
이 영화에는 북한 사람들의 라이브 실황이 담겨 있다. 남한 사람이나 다른 외국인, 재외 교포가 북한 사람을 어설프게 연기한 게 아니다.
먼 옛날, 초등학교 사회/도덕 시간에 교과서에서 "남과 북은 언어도 차츰 이질감이 생기고 있다"의 예로 딱 한 번 들은 걸로 기억하는 북한말 '마사지다'(못 쓰도록 망가지다)를 현지인이 구사하는 걸 난생 처음 봤다. 저 영화 중에 나온다.
" '입빠이'는 일본어 잔재이니 쓰지 맙시다" 이런 말은 여러 번 들었지만, 일본 사람이 직접 저 말을 쓰는 걸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에서 봤을 때 신기하게 느낀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평양 사람들이 대놓고 "일정이 급하지비. 날래 하라우. 내레 죽겠시요." 이렇게 사투리를 구사하지는 않는 것 같다. <신이 보낸 사람>에서는 남한의 배우가 종결어미만 저렇게 어설프게 북한 말 흉내를 내면서 북한 사람 연기를 했지만, 현실적으로 진짜로 어색하고 북한말처럼 느껴지는 요소는 내가 이 자리에서 차마 흉내내기 어려운 고유한 억양이더라.

학교에서는 한복을 입은 여선생이 김 일성 수령님의 리즈 시절 행적을 설파한다. 사악한 왜놈과 지주놈들을 방법했으며, 1950년에 원쑤 미국놈들이 백두조선을 침략했을 때 전투기를 무슨 척 노리스처럼 빵~ 하고 떨어뜨리면서 무용담을 남겼다고 가르친다.
애들이 언제부터 세뇌 받았는지 "동방에서 해가 제일 먼저 뜨는 고운 나라래서 이름도 '조선'이래요. 아~ 세상에 부러울 것 없어라" 이런 오글거리는 노래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부른다. 여기가 정녕 2016년에 서울에서 불과 200km쯤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일이란 말인가... 연기가 아니라 라이브 실황??

수령님의 탄신일이 다가오니 평양의 어린이들은 다들 온갖 매스게임에 동원된다. 체제 선전 내지 외화벌이용으로. 저것들 정말 얼마나 연습해서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2012년쯤이던가, 이 명박 대통령이 이 태양절 행사를 겨냥해서 "그런 쓸데없는 짓거리에 돈지랄 안 하면 인민이 얼마든지 더 먹고 살 수 있다"라는 요지로 살짝 쿠사리를 먹였더니.. (말 표현을 대놓고 저렇게 한 건 당연히 아니지만, 뜻은 통하게)
북에서는 발끈 해서 "우리의 최고존엄을 모독한 불구대천의 원쑤 쥐명박 역적패당 무리를 죽탕치자!!"라는 구호로 또 인민들을 끌어들이며 더 지X을 해 댔다. 이에 대해 더 자세한 사항은 옛날 글을 참고할 것.
그런 식의 인민 동원이 내부적으로 어떻게 이뤄지고 각본이 어떻게 짜여지는지, 저거 연기를 하다가 어떤 NG가 나기도 하는지를 저 영화를 보면 얼추 알 수 있다.

그렇게 밤낮으로 안무 공연 연습을 하던 중, 여자애 하나가 발목이 삐어서 병원 입원 신세를 지게 됐다.
그러자 학교 선생과 급우들이 단체로 문병을 가는 장면도 선전용으로 취재해서 내보냈는데.. 선물에 잔뜩 둘러싸여 있는 당사자는 "저는 수령님의 은덕으로 완치 중입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복귀하겠습니다" 이러고, 선생과 급우들은 "네가 없으니 너무 가슴이 아파 연습이 안 될 지경이야. 동무야, 빨리 복귀해서 같이 자리를 빛내자" 대사를 카메라 앞에서 읊어 댄다..

다친 당사자는 속으로 얼~마나 압박을 느꼈을까..? ㅠㅠ 이거 뭐 한 번만 더 다쳐서 병원 갔다가는 나가 죽어야 하지 싶다. 사실, 북한은 자살조차 했다가는 가족에게 뒤끝 해코지가 가는 곳이긴 하다만..;;

북한은 정말 개인은 없고 오로지 집단, 당만이 존재하는 숨막히는 곳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완벽한 실사판이다.
임금님이 아주 아름다운 어의를 입고 계신다고 침이 마르도록 아부를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이 벌거벗었네?" 그랬다가는 가족이 다 수용소로 끌려가는 곳. 그게 동화와 다른 점일 뿐이다.

영화는 제일 압권인 장면을 맨 마지막에 보여준다. 주인공인 북한 소녀(진미)에게 어느 기자가 "이제 소년단 가입해서 빨간 머플러 받으니 뭐가 좋을 거 같아요?"라고 슬쩍 물었는데.. 얘는 오로지 각본 대사만 읊지 자기 생각을 말을 못 하고 울먹인다.
"좀 서정적인 동시 같은 거 생각나는 거 없어요?"라는 질문에 즉시 튀어나오는 건 "나는 소년단에 가입하면서 위대하신 김일성 수령님 ..." 어쩌구저쩌구다.

이 영화를 찍은 만스키 감독은 "북한에 살지 않는 사람들이 누리는 자유와 삶이 얼마나 행운인지, 북한에서 반인륜적인 범죄가 아직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그래서 난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 한반도 전체를 이런 생지옥으로 만들지 않고 반쪽에나마 자유를 선사하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그 남조선 할배가 떠올랐다.

내치에서 잘못한 것, 병크와 과오도 많았지만 공로가 과오를 넘사벽급으로 압도한다고밖에 볼 수 없다. "ㅇㅅㅁ 없었으면 적화통일"은 "ㅂㅈㅎ 없었으면 아직도 보릿고개"보다야 훨씬 더 부정할 수 없는 절대적인 사실이다. 그 할배에 대해서 뭐 부정선거, 야당 탄압, 다리 끊고 도망한 거(?) 그거야 결과만 보면 뭐 잘못한 거니 더 할 말이 없는데, 딴 건 몰라도 분단의 원흉이라고?? 이건 한 마디로 정신병자 급의 미친 소리다.

난 자유가 없는 곳에서 살았으면 일찌감치 미쳐 버리거나 자살했지 싶다. 내 인생 최고의 업적인 날개셋 한글 입력기도, <음란한 성경은 가라> 같은 글도 자유가 있으니 만들어질 수 있었지. 난 남조선 정도의 통제나 억압도 못 견뎌서(교육제도, 군대 문제) 옛날엔 개 깽판 난리를 쳤는데 하물며 북에서는 상상도 하기 싫다.

한편으로 ㅅㅇㅁ 같은 사악한 미국 서식 종북충들을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 "평양은 참 살기 좋은 도시예요" 저런 악한 인간들이 버젓이 활개를 치는데 지금이 어디 겨우 일베충 따위나 욕하고 있을 때냐?
"남이나 북이나 '똑같다' " 이러는 인간들하고도 난 정말 상종을 하고 싶지 않다. 대학 교육까지 받은 사람이라면 자기 나라가 마음에 안 들고 현 대통령이 싫고 더러운 감정을 표출할 게 있더라도, 정말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는 지키면서 해야 하는 법이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이지 좌우 이념 문제가 아니다.

저런 악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서 저 무리들과 공존? 통일? 개가 웃고 소가 웃을 일이다. 저기엔 절대 침묵하면서 일본 욕만 하고 민족 팔고 통일 파는 그 어떤 짓거리들도 내 경험상 다~ 멍청하거나 사악한 수작이다. 그놈의 전쟁이 무서워서 저 체제를 무너뜨릴 수가 없다면야 차라리 영구 분단을 유지하면서 놈들을 고립시켜서 말려 죽이고 굶겨 죽이기라도 하는 게 100배 1000배 나은 전략이지.

이 문제에 관해서는 난 그 어떤 금전적인 손해나 인간 관계 단절을 감수하고라도 한 치도 뒤로 물러서고 싶지 않다. 악의 제국을 미화하면서 자국 정부과 국민을 이간질시키는 악한 무리들은 대한민국 땅에서 썩 꺼질지어다.

영화 제목에서 '태양'이란 김씨 왕조의 자칭 타이틀을 풍자하여 붙은 단어이다. 아래 성경 말씀은 굳이 북한 왕조 같은 곳이 아니어도 보편적인 세상을 염두에 두고 기록되었겠지만, 이북 저 동네는 정말 이 말씀이 절실히 적용된다고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해 아래에서(under the sun) 이루어진 모든 일을 보았는데, 보라, 모든 것이 헛되며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이로다. (전 1:14)

Posted by 사무엘

2016/05/01 08:38 2016/05/01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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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종 어차(1903)

황제의 즉위 무려 40주년을 기념하여 도입됐으며(참고로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60년이 넘었다만..), 이게 한반도 땅에서 최초로 달린 자동차이다. 차종은 '포드 모델 A'이라는 2도어 오픈카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기록이 없어서 확실치 않으며, 자동차 역사 연구자 사이에서 그게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이런 거야말로 고종 실록 같은 데에 수록되지 않았나?

허나, 이 차는 얼마 못 가 러일 전쟁 기간 중에 소실된 관계로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 시절에 자동차는 얼마나 비싼 물건이었을 텐데, 명백한 사고 폐차도 아니고 러일 전쟁 자체가 한국 땅에서 벌어진 것도 아닌데(청일 전쟁이 아님), 도대체 그 당시에 국가 자산 관리가 얼마나 막장으로 되고 있었는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그래서 얘는 가정사로 치면, 첫째 자식보다 먼저 태어났지만 이름도 없이 일찍 죽은 형· 누나 정도의 존재감으로 취급된다.

2. 순종 어차(1913)

일제 강점기가 된 뒤에 데라우치 총독이 자기 차와 더불어 조선 황실에 대한 예우를 위해 선물해 준 차라고 한다. 1911년엔 고종 어차 시즌 2로 영국제 다임러 리무진이 들어왔고, 1913년에는 순종 어차 명목으로 더 큰 캐딜릭 8기통 리무진이 들어왔다. 고종-순종 부자가 타라고 차를 두 대 구매했으나, 실소유자는 곧 순종-왕비 부부로 바뀌었다. 도입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운전대는 명백하게 오른쪽에 있다.

이 차들에 대해서도 도입 시기에 대해서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는 건 아니다. 1911-1913년 도입이라고 하는데 다른 자료에서는 한참 나중인 1918년식이라는 얘기도 있고. 저래 뵈어도 엔진의 배기량은 5000cc가 넘는데 제원상 최대 출력은 30몇 마력밖에 안 됐다는 것 역시 참 안습하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자동차 기술의 한계가 거기까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차들은 엄연히 현재까지 국내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 된 자동차 실물이다. 그리고 저 차종 자체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차량이 전세계적으로 극소수인데, 한국에 있는 물건은 보존 상태가 양호해서 세계 자동차 역사의 관점에서도 유물로서 가치가 대단히 높다고 한다. 6· 25 전쟁의 포화까지 견뎠을 정도이니, 얼마 타지도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고종 어차 최초 도입분과는 운명이 정반대이다.

일단 아래 사진에서 왼쪽 것이 1911년도 다임러 리무진이고 오른쪽 것이 1913년도 캐딜락 리무진이다. 범퍼와 라디에이터 그릴의 모양이 서로 미묘하게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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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한때는 흙 묻고 빛 바래고 먼지가 수북이 앉은 채로 창덕궁 차고에 방치돼 있었으나, 1990년대 말에 현대 자동차와 영국의 올드카 복원 전문 업체가 협력해서 표면을 광 내고 대대적으로 보수를 했다. 복원하는 덴 시간이 5년에 가깝게 걸렸으며 비용도 10억 원가량이 들었다고 한다.

복원 작업은 2001년 말에 완료됐으며, 이 덕분에 어차는 완전히 새 차처럼 변했다. 캐딜락의 경우 원래 검정이었는데 표면 도색도 빨강으로 바꾼 듯하다. 현재 이들은 경복궁 안의 국립 고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아래 사진은 캐딜락 리무진의 before과 after를 대조한 것이다. 그야말로 환골탈태를 했다. 저 차들이 191X년대에 갓 들여 온 직후에는 저렇게 반들반들 윤이 났을 것이다. 자유의 여신상이 지금 시퍼렇게 녹이 슬었다고 해서 그게 처음 만들어지던 당시에도 퍼렇지는 않았으며(동상은 원래 갈색· 구리색임), 옛날 사진이 지금 누렇게 바래 있다고 해서 옛날 그 당시의 풍경 자체가 누렇게 바랬던 건 아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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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 일성 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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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다름아닌 북한의 수괴인 김 일성이 몰고 다니던 승용차이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구소련 시절의 자동차이다.
구소련이라 하면 총(AK47!)과 비행기(AN-??)와 우주선은 만들었어도 정작 고유 모델 자동차를 만들었다는 정보는 영 생소하다. 저건 ZIS 110이라는 모델로, 1948년에 김 일성이 스탈린으로부터 선물받았다고 한다.

김 일성은 이 차를 즐겨 몰고 다녔다. 6· 25 전쟁 중에는 안전한 후방에서 보고나 받고 명령만 내린 게 아니라, 경북 왜관까지 남하해서 전선을 시찰하고 북한군 병사들을 지휘했다고 한다. 고속도로도 없던 와중에 참 멀리까지도 내려왔다. 낙동강을 사수하네 마네 하던 리즈(?) 시절엔 그야말로 한반도 전역의 적화통일이 코앞에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랬는데 1950년 가을, 인천 상륙 작전으로 인해 전세가 역전되었고 김 일성은 시급히 후퇴를 해야 했다. 평양까지 빼앗기고 계속 북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앞은 강으로 가로막혀 있고 다리가 없고 차량으로는 도저히 건너갈 수가 없었다. 다른 길로 뺑뺑이를 칠 수도 없고.. 그래서 김 일성은 (아마 눈물을 머금고) 자기 애마를 어쩔 수 없이 버리고 도망쳤다고 한다. 난 차량이 남한에서 노획되었는 줄 알고 있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이 차량은 1950년 10월 22일, 평양에서 동북쪽으로 약 100km쯤 떨어진 청천강 근처에서 남한 국군(6사단 수색대)에 의해 발견되고 노획됐다. 국군이 38선을 최초로 넘어서 국군의 날이 시초가 된 10월 1일 이후로 정확히 3주 만의 일이다.
이걸 최초로 발견하고 신고한 병사가 누군지를 인터넷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검색은 더 귀찮아서 안 하련다. 그 병사는 당연히 큰 포상을 받았다.

김 일성의 리무진은 대한민국의 국고로 귀속됐다. 김 일성은 차만 버렸지 차키까지 놔 두지는 않았겠지만, 그 시절의 옛날 차들은 지금 같은 첨단 이모빌라이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스타터 모터의 배선만 연결하면 강제 시동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차가 그때 이후로 줄곧 한국에서 애지중지 보존되어서 반공 안보 교육(?) 아이템으로 쓰였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이 승만 대통령은 1951년, 미 8군 사령관이던 월튼 워커 장군의 부인에게 이 차를 선물로 줬다. 워커 장군은 잘 알다시피 1950년 12월에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교통사고로 한국 땅에서 순직했기 때문이다(교전 중 전사는 아니고..).

부인 되시는 분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차를 인수했지만 차는 곧 고장 났다. 냉전 중에 미국에서 적성국인 구소련제 차량은 부품을 구해 유지 보수를 하기도 어려웠던 관계로, 그녀는 차를 또 처분해 버렸다. 그렇게 김 일성 리무진은 미국 땅에서 정처 없이 30년 가까이를 방황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차가 사고가 나고 폐차됐다면 김 일성 리무진은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그랬는데 사단법인 유엔 한국 참전국 협회라는 단체에서(대표: 지 갑종) 1970년대에 백방으로 수소문을 한 끝에 이 차의 소재를 미국에서 찾아 냈으며, 뉴저지에 소재한 어느 자동차 수집상으로부터 거금을 주고 1982년에야 그 차를 한국으로 도로 역수입을 해 왔다. 먼 나라로 수출되었던 포니가 20여 년 뒤에 드라마 촬영을 위해 도로 역수입된 것처럼. 그때 고맙게도 대우 그룹 김 우중 회장이 재정적인 지원을 해 줬다고 한다.

또한, 그때 이래로 지 회장이 러시아 엔지니어까지 초청해서 관리를 잘 한 덕분에, 김 일성 리무진은 현재도 간단한 정비만 하면 곧장 주행이 가능할 정도로 상태가 좋다고 한다. 이분은 6· 25 전쟁 휴전 60주년을 얼마 남기지 않았던 2013년 7월 16일, 차량을 전쟁 기념관에다 기증했다. 덕분에 우리는 전쟁 기념관에서 김 일성 리무진과 동시에 곧 소개할 이 승만 리무진도 나란히 관람할 수 있다.
참고로 6· 25 전쟁을 계기로 김 일성은 자기 애마뿐만 아니라 강원도 고성에 있던 자기 별장도 빼앗겼다.

4. 이 승만 리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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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일성 차량에 비해 이 승만 리무진은 설명할 게 훨씬 없다. 1956년에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으로부터 선물받은 의전용 방탄 캐딜락이다. 그러므로 전쟁 중에 굴러다닌 건 아님. 애초에 이 승만은 6· 25 때 피난도 자차가 아니라 열차를 타고 갔다.

얘는 어차처럼 창덕궁에서 보관되어 오다가 2000년부터 전쟁 기념관으로 옮겨져 전시되었으며, 2013년경에는 역시 때 빼고 광 내는 부분적인 복원 작업을 거쳤다고 한다. 이 작업은 당연하지만 구한말 어차를 복원하는 것만치 힘들고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차 역시 당장 시동 걸고 주행이 가능할 정도로 정태를 넘어 동태보존 상태라고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6/04/28 08:31 2016/04/28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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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들 중에는 아동용 위인전을 안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 어렸을 때 위인전을 읽으면서 어떤 인물을 왕창 좋아하고 존경하게 됐는데, 나중엔 그 사람에 대해 감춰져 있던 흑역사도 알게 되고 위인전들이 그 인물의 긍정적인 면만 부각시키면서 미화와 왜곡을 일삼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환상이 깨지고 일종의 동심 파괴를 경험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발명왕 에디슨의 경우 경쟁자인 테슬라와 얽힌 아주 지저분한 흑역사가 존재하며, 나폴레옹도 단순히 전쟁만 벌인 게 아니라 부하의 아내를 비열하게 빼앗은 것과 타 원주민 학살이라는 흑역사가 있다. 십일조 잘 바친 신앙인(?) 기업가로 칭송받는 록펠러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일본의 생리학자 노구치 히데요는 자국의 지폐에 등재될 정도로 유명세를 탔지만 사실 업적으로나 인간성으로나 위인 레벨은 절대 아니라는 게 이미 다 까발려져 있다.

사실은 심지어 세종대왕, 이 순신 같은 (복음을 거부하는 핑계로 즐겨 언급되는) 언터쳐블급인 인물이라 해도 업적과는 별개로 다 부족한 죄인인 건 변함없으며, 까보면 다 흑역사가 나올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누가 죄인으로 판명되고 지옥에 가는 게 어떤 경우건 아무 이유 없이 어거지로 이뤄지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어떤 인물을 다루면서 일방적인 미화나 왜곡을 하지 않고 인간적인 심정으로는 도저히 기록하고 싶지 않았을 것 같은 내용도 너무 적나라하게 써 놨다. 그래서 성경은 정황상 도저히 인간의 저작물일 수가 없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이런 식으로 성립할 정도이다.

다윗의 흑역사, 모세의 흑역사.. 그리고 성경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되었다는 욥기만 해도 그렇다. 흔한 동화라면 권선징악 구도를 설정한다 하더라도 나쁜 부자, 구두쇠 악당 부자, 나쁜 계모를 조지는 이야기가 주류일 텐데 이건.. 부자인데 아주 착한 부자이고 의인이 왜 아무 까닭 없이 고난을 받는가 하는 너무 초월적으로 심오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렇다고 욥이 이 상황을 대처하는 방식이 무조건 모범적이고 바람직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으며, 욥 역시 극한의 상황에서 너무 답답한 나머지 결국 성질 부리고 인간성의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뭐..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사람을 모 종교의 성인처럼 너무 떠받들고 칭송하는 것도 잘못됐지만, 그렇다고 자기도 그 상황에서는 그 이상으로 뻘짓 했을 거면서 남을 탓하고 욕만 하는 것도 바른 자세가 아니다. 감히 예수님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인간적인 수준에서는 아무리 까발려 봐도 정말 먼지가 거의 안 나올 것 같은 인물이 있으며, 예수님에 근접하는 삶을 살았던 극소수의 인물은 있다.

우리나라의 일제 강점기 때 주 기철 목사는 바로 그런 그룹에 속하는 인물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교회가 무너지고 교단이 무너지고 조선 기독교계가 황폐화되는 현실 속에서 신사 참배를 홀로 거부하다가 온갖 악랄한 고문을 당하고 형무소에서 순교한 분이다. 게다가 유 관순이나 윤 봉길, 조선어 학회 학자들과는 달리 법정에서 정식으로 재판을 받아서 형벌을 받은 것도 아니고, 걔네들 일제의 관점에서도 법적으로 아무 근거 없이 불법으로 구금· 협박· 폭행을 당한 것일 뿐이다.
작년 성탄절 때 웬일로 KBS1에서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것을 감명깊게 잘 봤다.

일본은 단순히 조선에서 수탈만 저지른 게 아니라 조센징들의 문화와 언어, 관습을 없애고 그들을 무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일본인으로 개조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영미귀축과 맞장을 뜨려면 자기 제국의 덩치를 부풀려야 했으며, 그래서 조센징들도 단순히 노예에 물자 셔틀에만 머물 게 아니라 그들 자신이 더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덴노 헤이카를 위한 총알받이가 되게 세뇌를 시켜야 했다.
쉽게 말해 SCV, 드론을 넘어서 마린이나 인페스티드 테란이 필요하다는 걸 느낀 거다. 정신 상태로 치면 질럿에다가도 비유가 가능하겠다. "My life for Tenno!" -_-

지금 생각하면 이건 정말 "무슨 마약 빨고 그런 생각을 했어요?" 급이었다. 뭐, 일본인으로 만들어 봤자 자국민과 동등한 레벨도 아니고 2류 3류 신민이었겠지만. 일본 자국민과 동급의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는 신노예를 만들려는 의도였으니 말이다.
또한 그렇다고 자국민도 편하게 지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고 걔네들 역시 전쟁광 수뇌부 때문에 겁나게 고생하긴 했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 신궁을 보니까 저 정도면 단순히 국기/국가에 대한 충성 맹세가 아니라 종교적인 게 맞긴 해 보였다.
일본에서는 패전 후에 덴노가 인간 선언을 하자 고작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평생 신념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 때문에 멘붕해서 자살하는 사람이 나올 정도였다. "내가 신으로 떠받들던 존재가 사실은 나와 똑같이 먹고 자고 싸는 인간에 불과했다니!"

맥아더도 이런 일본의 문화와 일본인들 습성을 감안했기 때문에, 비록 히로히토 덴노가 악질 전범이긴 하지만 대놓고 그를 법정에 세워 처벌하거나 덴노 제도 자체를 없앨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일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 맥락이다. 북한 정권이 확 붕괴하고 김씨 부자가 자기와 똑같은 인간임이 폭로되고 나면 북한에서 제대로 세뇌돼 있던 핵심 계층 중에는 저렇게 멘붕하는 사람이 분명 나오지 싶다.

그 대신, 맥아더는 자신이 히로히토 옆에서 일부러 양아치 같은 거만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을 언론을 통해 내보냈다. 그러자 이번엔 반대로 맥아더를 신으로 숭배하고 집에 신사까지 만들어 모시는 사람들이 나왔다고 한다. 거의 행 14:11-13와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이래저래 일본은 전반적인 정신 문화가 성경의 기독교와는 완전 상극이라는 게 느껴졌다. 일제는 이런 정신 문화를 조선인들에게 강요했다. "누가 너희 하나님을 믿지 말라고 그러더냐? 니 예배도 할 거 다 하고, 여기서 잠깐 고개만 까딱하고 경의를 표해 주면 너도 살고 나도 가오가 살고 아무 탈 없을 텐데 왜 그렇게 뻣뻣하게 구냐? 이건 그냥 대일본제국 신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충성 맹세이지 종교적인 게 아니래도 그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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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사 참배와 동방요배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이 지켜야 할 신성한 제1의 임무이다. 일찍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같은 성주들께서도 서양 기독교를 신봉하는 자들을 모두 참(수)하고 유황불에 던져 넣었던 것을 기억하라. 저들의 유일신은 우리 천황과 태양신 아마테라스를 대적하는 것이다."

조선 땅에 있던 대다수의 종교 종파들은 집요한 협박과 회유, 특히 가족까지 동원한 악랄한 해코지를 이기지 못하고 굴복했다. 거기에 굴복했다고 해서 딱히 민폐가 가는 게 아니니 이건 애초에 예수님을 안 믿는 불신자의 입장에서는,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비판할 거리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물리적인 민폐는 굴복 안 했을 때 더 끼쳤을 가능성이 높지..

그러나 일부 기독교회들은 그리하지 않았다. 주 기철 목사 같은 영성으로는 저런 일제의 꼬드김은 영적으로 볼 때 출애굽기에서 파라오가 모세에게 제안했던 교묘한 절충안과 별 다를 바 없는 것임이 빤히 보였다. 오늘날로 치면, 성경을 들먹이면서 일부 배도한 목사가 "하나님은 동성애자도 사랑하니까 동성애자들도 다 자기 스타일 대로 순수한 사랑을 하면 됩니다" 이러는 것과도 같다.

회유에 안 넘어가자 일제는 결국 "어쭈? 우리 덴노 헤이카가 더 강한지, 네놈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더 강한지 두고 보자!"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 목사는 여러 번 체포되었다가 풀려나기를 반복했고 지독한 고문을 당했다. 나중에는 목사직에서 해임되어 사택에서도 쫓겨났으며 교회가 폐쇄당했다.

주 기철 목사의 막내 아들 주 광조는 어린 시절, 그 와중에도 평소에는 평양 경찰서를 거의 자기 집처럼 드나들면서 형사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저기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인지도 모른 채. "광조 왔다~!!ㅋㅋㅋ" 그러면 형사들이 용의자 취조할 때 먹이는 코렁탕...은 아니고 주먹밥이라도 쥐어 주고 "요 귀요미 녀석 또 왔냐?" 그렇게 귀여워해 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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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거기서 주 목사의 가족들을 다 불러 놓고 주 목사를 공개적으로 고문 시연을 했으니 얼마나 끔찍한 트라우마가 생겼겠는가?
주 광조는 정신적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몇 년간 실어증을 앓았다고 한다.

저 때 TV에서 맛보기로만 묘사한 고문은 '비행기 태우기'이다. 그 당시에 일제가 행한 '흔한' 고문이다.
그나저나 주 목사 하면 못 위를 맨발로 걸었다는 ㅎㄷㄷ한 일화까지 전해지는데, 이건 언제 어느 형무소에서 있었던 일이고 누구의 증언을 통해서 전해지는지 정확한 출처를 지금까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것 같다. 그게 궁금하다.

성경은 평소에는 그렇게도 친가정적인 교리를 표방하기 때문에, 근대 이래로 마 19:29, 막 10:30처럼 가족을 버리는 것까지 권장하는 정말 극단적인 상황은 대환란이 아니면 역사적으로 북한이나 일제 말기, 이슬람권 같은 곳밖에 없었다. 일본 경찰들은 나중에는 주 목사의 부인인 오 정모 사모도 두들겨 패면서 분풀이를 했다. "에라이, 남편을 죽으라고 부추기는 독한 년 같으니! (네놈들 때문에 우리까지도 실적 못 내서 상부로부터 잔뜩 갈굼 먹고 고달프단 말이다!)"

주 기철 목사뿐만 아니라 오 정모 사모도 신앙면에서는 정말 한 근성 한 분이었다. "따뜻한 숭늉을 한 사발 좀 마시고 싶소" 이런 유언을 남긴 남편 보고 "당신은 살아서 형무소를 못 나갑니다. 조선의 교회를 위해 꼭 승리하셔야 합니다" 이런 말을 격려(?)랍시고 이를 악물고 했을 정도이니 일본 경찰과 간수들이 경악할 법도 했을 것이다. "저 조센징이 믿는 신은 도대체 어떤 신인가? 우리 황국신민 중에 덴노를 위해 저렇게까지 충성을 바칠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같은 생각을 한 번쯤은 하지 않았을까.

주 목사는 정식으로 사형을 당한 게 아니며, 비록 지독한 고문에 만신창이가 되긴 했지만 최후의 순간 자체가 "바보야, 그러게 좀 적당하게 두들겨 패고 강약 조절을 했어야지 아주 죽여 버리면 어떡해!" / "헉~ 죄..죄송합니다 ㅠㅠ"  같은 고문치사도 아니었다. 일제는 이런 면모에서는 오히려 아주 치밀하고 교묘했다. (유명한 고문치사 사건은 일제 강점기가 아니라 훗날 대한민국 시대에 몇 건 터졌었다.)

이거 뭐 아무리 고문을 해도 소용없고 주 목사만 회생 불가의 죽기 직전 상태가 되자, 일제는 그를 슬쩍 병보석으로 풀어 주려 했다. "이 사람은 어찌 됐건 우리가 죽인 건 아니야. 우리 손으로 위대한 순교자 따위 만들고 싶지는 않아~" 면피를 위해서였다.

이런 예가 의외로 여럿 있다. 3· 1 운동 당시에 수원의 유 관순이라고 기록을 통해 뒤늦게 알려진 이 선경, 일제 말기에 진실을 외치다 주 기철과 비슷한 시기에 순국한 소년 주 재년도.. 다 의외로 옥중에서 죽은 게 아니다. 풀려나긴 했지만 고문 후유증 때문에 몇 달 못 가 죽은 거다. 풀어 줘도 그건 사실상 석방이 아니었다.

이런 속셈마저 눈치 챈 오 사모는 남편에 대한 병보석 제안을 거부하였으며, 주 목사는 마지막 면회 후 감방 바닥에 누워 있던 중에 드디어 기력이 다하고 소천했다. 허나, 오 사모의 강직하고 대쪽같은 행적은 남편이 이렇게 순교한 뒤에도 계속되었다. 속된 말로 '시체 장사'를 하지 않았다.

"주 목사는 당연히 외쳐야 할 때 도저히 벙어리로 있을 수가 없어서, 무익한 종으로서 당연히 가야 할 길을 갔을 뿐입니다. 주 목사의 행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서는 절대 안 됩니다"라고 못을 박았다! 남편 개인이 대외적으로 막 알려지고 떠받들어지는 것을 우상 숭배라고 최대한 경계하고 만류했다.
뭐, 주 목사를 거론할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 개나 소나 "나도 저분 존경해요" 립서비스 차원에서 위선적으로 이러는 건 대단히 보기 좋지 않으며, 이런 짓은 심지어 본인에게조차도 적용되는 사항이 될 수도 있으니 특별히 조심해야겠다.

그 시절에 주 목사의 자녀들은 일제로부터 불령선인 취급을 받아 쫄쫄 굶고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고 너무 고생하면서 컸다. 너무 고지식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부모가 매정하고 야박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의로 양육된 자녀들은 바르게 잘 컸다. 장남 주 영진은 6· 25 때 빨갱이들에게 순교하여 손 양원 목사 가문처럼 부자가 순교자의 반열에 올랐다. 4남인 주 광조가 제일 늦게까지 살아 있으면서 선친의 행적에 대해 증언하다가 지난 2011년에 세상을 떠났다.

주 목사는 일제의 통치에 정치적으로 반대하고 저항한 독립 운동가는 아니었다. 종교 영역의 침범이 아닌 창씨 개명 정도까지는 별 반발 없이 따르기도 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의 길을 간 것일 뿐이지만, 그 행동이 결과적으로 나라 사랑에 항일 운동을 한 것과 다름없는 것이 됐고 일제로부터 그런 짓(?)을 한 반동분자로 취급을 받았다. 덕분에 그는 '건국훈장 독립장'이라는 꽤 높은 등급의 훈장이 추서되었으며(유 관순· 윤 동주와 같은 급) 서울 현충원에 가묘까지 만들어져 있다. 평양에서 유해를 찾아 와 이장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특별히 만화로 각색된 것이 <만화로 보는 나의 아버지 순교자 주 기철 목사>(2007), <대동강의 순교자 주 기철>(1998, 두란노) 이렇게 두 종류가 있으므로 관심 있는 분은 참고하시기 바란다. 이 글에서 몇 컷 소개한 만화는 전자이다.
KBS 다큐멘터리는 일본의 신학계에서도 주 목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취재해 보인 것이 흥미로웠다. 하긴, 일본인들은 이 순신 장군에 대해서도 그렇게도 치밀하게 연구했다는데 그 국민성으로 주 기철 목사까지 연구하는 건 이상한 현상이 아닌 것 같다.

일제도, 북한 정권 같은 것도 없는 이 대한민국 땅에도 엄연히 신앙 생활에 고난과 시험은 있다. 내가 늘 말하지만, "너 이렇게 믿으면 죽는다" 대신에 "너 여기서 약~간만 타협하면 돈과 명예와 좋은 대외 평판을 무진장 얻을 텐데!"라고.. "눈 딱 감고 나에게 절만 하면 이 모든 걸 네게 주겠다"라는 마귀의 시험과 본질적으로 똑같은 시험이 존재한다.
그래서 신앙 생활은 교리 쪽이든, 행실 쪽이든 참 좁은 길이다. 예수님을 위해서 내가 더 낮아지고 바보 되는 것. 그걸 내 힘으로 하는 게 아니니까 견디고 할 말한 뿐이다.

그리고 지난 3월 17일엔 다큐멘터리에서 나왔던 배경과 출연진을 토대로 <일사각오>라는 영화도 나왔다. .

신사 참배 거부는 단순히 자기 종교 입장에서의 지조만을 고집한 게 아니라 사악한 일제의 군국주의 통치에 대해 거부의 뜻을 당당히 표현한 거라고 의미를 굉장히 많이 부여하고 있다. 그 당시 일제 당국조차 기독교는 자기네 식민 지배에서 굉장한 걸림돌이었다고 문서에다 기록했다고 영화는 소개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에 조선 청년들을 군대에다 강제 징집하자는 발상은 1930년대에 이미 논의됐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징병은 완전 말기인 1944년이 돼서야 시행됐는데, 여기엔 조선인들의 이런 저항이 기여한 게 클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의식이 고분고분 일본인으로 개조되지 않은 사람에게 함부로 총을 쥐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Posted by 사무엘

2016/03/28 08:36 2016/03/28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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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2년엔 강원도 동부 전선에서 일명 '노크 귀순' 사건이 벌어졌다.
굶주리던 북한 주민이 목숨 걸고 생지옥을 떠나 자유의 땅에 찾아온 것은 기쁜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와는 별개로, 남방 한계선의 경계 상태가 지금까지 개판이었다는 게 탄로나는 바람에, 군대의 높으신 분들 여러 명이 무더기로 징계를 받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과장 좀 보태서 서정적으로 묘사하면, 하늘에서는 별들이 우수수 떨어졌고 땅에서는 영창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난 탈출한 그 병사가 당연히 최전방 철책 근무를 하던 중에 근무지를 이탈해서 남쪽으로 넘어갔다고 생각했다. 거기서 근무하던 중에 상관을 상대로 프래깅을 저지른 뒤 탈북한 병사도 실제로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저 노크 귀순의 경우는 검색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강원도 소재이긴 하지만 최전방은 아닌 데서 군생활을 하다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탈영했다. 몇십 km를 며칠에 걸쳐 혼자 걸어서 남쪽 전방까지 이동하고, 그 동안 잠은 산 속에서 자는 역경을 거친 뒤에야 탈출에 성공한 것이었다.

게다가 작년 6월에는 무려 함흥에서도 한 북한군 병사가 전방까지 수백 km를 걸어서 탈북했다.
이 시점에서 본인은 먼 옛날, 초딩 시절에 읽었던 반공 동화 <용감한 탈출>이 생각났다. 25년도 더 전에 본 책이다. <한국 서적 공사>라는 출판사를 통해 1987년과 1990년에 두 차례에 걸쳐 발간되었다. 사실 내가 태어나서 '탈출'이라는 단어를 난생 처음으로 접한 곳도 저기였지 싶다. 의미심장하다.

주인공은 역시 10살 안팎의 북한 어린이인데 부모가 하루아침에 반동으로 몰린다. 아버지는 어디론가 끌려가서 생사도 모르고 어머니는 벌목장에서 중노동을 하다가 사고로 죽는다. 어머니는 “너는 이 생지옥을 어떻게든 빠져나가라” 이런 유언을 남기고, 애는 탈출을 결심한다.

그래서 주인공은 어린 나이에 진짜로 저 노크 귀순자처럼 산 속에서 숨어 지내면서 남쪽으로 내려간다. 마침 집에 흰 개가 한 마리 있어서 아이와 동행한다.
(1) 차를 탄 군인들이 아이가 숨은 곳 근처에서 갑자기 내리는데, 다행히 노상방뇨만 하고 가 버린다. (2) 개가 어디 물자 보급고를 냄새를 맡고 찾아내서 건빵 포대를 물고 온다. 뭐 요런 깨알같은 장면이 있던 걸로 기억한다.

나중에는 어떤 군인에게 걸린다. 전화를 걸어서 요런 정체불명의 어린이를 잡았다는 걸 본부에 보고를 하려는데, 개가 필사적으로 그 군인을 공격하고 기절시켜서 당장 위기는 넘긴다. 하지만 이제 탈북 시도가 들통났기 때문에 큰일 났다.

결말로 가면 군사분계선 근처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고 개는 총에 맞아 죽는다. 깨갱 소리와 함께 피 내지 '붉게' 이런 묘사가 분명히 있었다. 남한 쪽에서는 아이를 향해 군인들이 "안심하라. 우리는 대한민국 국군이다! 개는 버리고 어서 xxxxxx해서 여기로 뛰어 와라!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라!" 이렇게 외친다. Aㅏ...

초딩 1~2학년용이라고는 하지만 북한· 반공을 소재로 다소 무겁고 슬픈 내용이었다. 그 먼 옛날 초딩 시절에 잠재의식 속에 각인된 반공 spirit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지금 성인의 관점에서 봐도 그 spirit은 충분히 유효하고 건전하지, 뭔가 방향이 수정되어야 할 아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책의 저자는 이 영두라는 분인데, 검색을 해 보니 퇴직한 교사이다. 2014~2015년 현재까지도 아동문학계에서 여러 동화나 희극을 지어 발표하면서 아주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신다. 이메일 주소도 있다. 10여 년 전에 작고한 이 오덕 선생과 비슷한 인상이다. 그렇다고 고향이 이북인 실향민이지는 않음.

너무 옛날 책인 관계로 오늘날 상업용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다. 그래서 본인은 국내에서 출판된 모든 책들을 소장하고 있는 국립 중앙 도서관에 들러서 몇십 년 만에 현물을 다시 구경할 수 있었다. 단, 득템 장소는 본관이 아니라 강남 역 근처 국기원의 옆에 있는 별관인 어린이· 청소년 도서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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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 도서 읽기 운동..;; 우리나라가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트렌드가 저랬다는 게 믿어지시는가?
우리나라도 옛날에는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쥐를 박멸하자! / 머릿니를 퇴치하자" 이런 구호· 포스터가 나돌곤 했다. 그런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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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여러분! 우리나라는 88 서울 올림픽을 열 수 있을 만큼 국력이 커졌습니다. 그러나 북쪽에는 자유와 행복을 몽땅 빼앗고, 얼어붙은 땅을 만들어 버린 음흉스러운 공산당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유와 행복을 누리며 잘 사는 우리 대한민국을 몹시 배 아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쳐들어올 흉계만을 꾸미고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손발리 오그라들 정도로 민망한 반공 구호가 웃프게 느껴지겠지만 저 때는 마냥 웃을 일이 아니었다.
배 아파한 거 맞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1988 서울 올림픽이 개최됐을 때, 북한은 같은 민족으로서 축하를 해 주거나 같이 참가하기는커녕 대회를 방해하기 위해 대한 항공 여객기를 폭파하고(1987, KAL 858) 김포 공항에서도 외국인까지 사주해서 폭탄 테러(1986)를 저지르기도 했다.

이건 수뇌부와 무관하게 말단의 또라이가 저지른 주한 미군의 범죄나 사고 같은 것과는 성격이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저런 인간말종들이 어떻게, 무슨 얼어죽을 민족, 통일 운운할 자격이 있단 말인가? 쟤들은 어떤 이념이나 가치도 적화통일 내지 사탄적인 김씨 부자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은 집단이다.

특히 요즘은 북한도 과거 김 일성 시절 초기에, 고난의 행군이 있기 전, 8월 종파 사건이 터지고 주체 사상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에는 그럭저럭 살 만했다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게 유행인 듯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
분단 직후와 6·25 전의 극초창기 때부터 이미 소련군과 김 일성 정권의 만행에 학을 떼고 공산주의의 실체를 깨닫고서 탈출을 생각했던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음을 알아야 한다. 남한의 반공 독재자들이 그렇게도 싫다면, 월남을 거부하고 북에서 최후를 맞이한 조 만식 선생의 비장한 유언이 어떠했는지라도 절대로 잊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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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어머니가 통나무에 깔려서 다친 그림이 있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쟤네 가족이 반동으로 몰린 이유는.. 다름아닌 삼촌이 탈북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연좌제에 걸렸다.
삼촌은 예전부터 저 조카에게도 "우리나라(북한)의 선전선동에 속지 마라. 여기야말로 진짜 헬조선이다. 너도 남조선으로 탈출해야 한다"라고 자기 목숨을 걸고 얘기해 주곤 했다.

"남조선은 지옥이 아니란다." 그런데 책이 출간된 지 거의 30년이 돼 가는 오늘날은 남조선이 지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선동질 조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무리 대기업의 횡포(?)가 심하고 입시· 취업 경쟁이 심하다 한들 남조선이 북조선만도 못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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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맣게 잊고 있었다. 쟤들은 열차를 이용한 히치하이킹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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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은 드디어 전방에 도착하고 북한의 민통선 지대에까지 진입했다. 나중에 어느 병사에게 들켰을 때에도 병사가 "여긴 민간인은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곳이고, 일부러 침입하지 않고서야 길을 잃어서 들어오는 게 절대 불가능한 곳이다. 넌 누구냐?"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군사 분계선 인근은 민통선까지 넘어서 말 그대로 '비무장 지대'인데, 거기서 저 동화에 나오는 것처럼 거기서 개가 피탄되어 죽을 정도로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지고 북한의 초딩 꼬마가 혼자서 남한으로 넘어온다는 건 정말 굉장한 허구 각색이긴 하다.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나중에 지리적인 설정을 더 고찰해 보겠지만, 저 스토리에서 총격전이 벌어질 만한 곳은 판문점과도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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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에서는 DMZ에서 적군과 총격 교전이 벌어졌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TV와 신문에서 대서특필을 할 일이다. 그 와중에 "용감한 탈출"의 주인공인 북한 어린이는 온갖 매스컴 인터뷰를 타면서 떠받들어질 것이다. 더구나 TV에 나와서 저 책에서처럼 "우리 부모님과 사랑하는 재롱이(개)를 죽인 공산당은 나빠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외치기까지 하면..;;

저 애는 안 그래도 1980년대 5공 시절, 북풍에 없는 간첩도 만들어 내던 시절에 그야말로 제2의 이 승복으로 거의 국가적인 영웅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_=;;;; 군대에서 각종 정훈 교육의 소재로도 쓰이고 말이다.
그리고 이 정도로 유명세를 타 버렸으니, 먼저 탈북한 삼촌과의 만남도 큰 어려움 없이 성사되었을 것이다. 삼촌은 어떻게 탈북했을지가 궁금해지지만, 그래도 어린이가 아닌 성인이다 보니 그렇게까지 주목받을 일은 아니었으리라 생각된다.

자, 그림을 곁들이느라 분량이 길어졌으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쓰겠다. 다음 시간에는 북한 정권 욕 같은 정치 얘기는 없이 북한 지리 얘기를 하면서 <용감한 탈출> 동화의 설정 고증을 해 보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6/03/12 08:32 2016/03/12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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