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한말의 매국노

옛날에 나라를 일본에다 팔아먹은 을사오적 매국노 중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완용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사실 송 병준도 만만찮은 악질이고 후손들이 하는 짓까지 쌍으로 우주 쓰레기급임에도 불구하고 이 완용만 너무 유명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건 정당한 자업자득 인과응보이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이 완용의 행적은 흔히 얘기가 나오는 것처럼 "저 사람이 아니었어도/없었어도 어차피 조선은 망할 처지였다, 매국은 한 개인만으로 가능한 악행이 아니다" 같은 실드를 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우파 진영에서 괜히 그런 말을 해서 친일 수꼴이라고 안 먹어도 될 욕과 오해, 거짓 고소를 쳐먹을 필요가 없다.

저 사람은 김 옥균처럼 애국을 생각하고 의도는 그게 아니었는데 결과가 안 좋게 된 그런 성향의 친일을 한 사람이 아니다. 그럼 일본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좋아하는 일빠 오덕후 매니아였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무능하고 부패하고 개 썩어 빠진 미개한 조선 정부보다는 선진국 일본에게 통치를 맡기는 게 근대화를 제대로 이룰 수 있고 장기적으로는 조선 백성에게 더 좋을 거라는.. 그런 순진한 의도로 매국을 한 것도 아니다.

단적인 예로 이 완용은 일본어라고는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던 사람이다. 이토 히로부미와 나라를 팔아먹는 얘기를 나눌 때도 통역을 쓰거나, 아니면 간단한 담소쯤은 영어로 나눴다. 둘 다 똑똑하고 영어는 잘했으니까. =_=;; 이 완용은 죽기 전에 아들한테 유언으로 "앞으로는 또 미국이 뜰 거 같으니 그쪽으로 잘 보여라" 이런 말을 했다고 하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사실이라면 정말 꺼삐딴 리의 실사판이다.

그는 성경으로 치면 발람처럼 그냥 자기 가족의 영달을 위한 기회주의자일 뿐이었다. 자기는 일본어를 할 줄 모르면서 조선 땅의 학교에다가는 일본어 시간을 잔뜩 늘리고, 3·1 운동 가담자에게는 불순분자 선동에 넘어가서 뻘짓 하지 말고 곱게 찌그러져 있으라는 공갈 담화문이나 신문에 게재했었다.

만에 하나 시대의 대세가 도저히 어쩔 수 없어서 나라를 팔아먹는 일에 관여했다 해도, 그 뒤의 태도가 어떻느냐에 따라서 실드와 평생까임권이 갈릴 수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이 완용은 평생 일말의 반성이 없었으며 이에 대해서는 그 어떤 실드와 동정의 여지가 없다. 그 사람도 한반도에 무슨 근대적인 제도를 도입하고 마냥 나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식의 말도 있나 본데, 그런 식이면 김 일성조차도 왕년에는 눈꼽만치 항일 운동을 한 경력이 있는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사실 지금의 북한 치하보다야 차라리 일제 강점기가 훨씬 더 낫다. 일제 말기로 갈수록 '훨씬'이라는 단서는 설득력을 잃겠지만.)

물론, 일제 강점기 때도 근대화가 이뤄지고 식량 생산이 늘고 인구가 느는 등, 말기의 전쟁만 아니었으면 일말의 긍정적인 면모가 있을 수 있었다. 그런 얘기 자체를 무조건적으로 금기시하지는 않아도 된다. 굳이 일제만을 욕하기 위해 조선의 탐관오리들을 미화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허나, 그렇게 식민지 근대화론을 최대한 감안한다 해도, 이 완용은 그와 무관하게 요리 보고 조리 봐도 완벽한 개새끼가 맞다(글자를 XX 따위로 가리는 처리를 일부러 하지 않았다). 단군의 후손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영원무궁토록 욕과 저주를 먹을 것이며, 족보에서 이름이 파이고 후손들이 부끄러워서 혹은 무서워서 전부 외국으로 이민 가도 그건 어쩔 수 없는 귀결이다.

사실, 이 완용의 후손들은(송 병준의 후손도 마찬가지) 다 재산 잘 챙겨서 잠적하거나 외국으로 도피해 있지, 누구 말마따나 겨우 조무래기 경찰이나 군 간부로 가 있지는 않다. 그리고 숨어서 자기 재산 되찾는 소송이나 걸지 그런 사람들이 미쳤다고 시사· 정치 발언이나 하면서 자기 정체를 드러내고 광역 어그로를 끌겠는가? 얘들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일본어를 할 줄 모르는 친일파 이 완용의 대조군이 될 만한 사람은 두 명 정도가 있다.
이 봉창 의사는 이 완용과는 달리, 일본어를 일본 토박이와 분간을 못 할 정도로 능숙하게 구사했으며 일본인 지인과 인맥도 많았다. 독립 운동을 하겠다고 김 구를 찾아갔을 때에도 김 구는 쟤가 혹시 일제의 첩자가 아닌가 오랫동안 의심했을 정도였다. 대화를 많이 나눠 보면서 이 봉창의 레알 진심을 확인한 뒤에야 의심을 풀었다.

그는 그렇게 일본 내부에서의 인맥과 접근성 덕분에 덴노가 있는 곳까지 가까이 가서 폭탄을 던질 수 있었다. 의거를 치르러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의 일본인 친구들은 그가 어디 여행이나 다녀 오는 줄 알고 배웅을 했다. 그때 히로히토 덴노가 죽거나 중상을 입었으면 역사가 또 크게 바뀌었지 싶다. 사람의 속마음은 겉으로 드러나는 언행만 봐서는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음을 느낀다.

그 다음으로, 외국인 대한 독립 유공자인 호머 헐버트가 있다. 그는 한국과 한국인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사랑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한국어를 독학으로 마스터 하여 유창하게 구사했다. 그리고 한글 같은 대단한 문자를 스스로 만들어 놓고 지금까지 왜 안 썼냐고 본토 사람들에게 반문을 했을 정도였다. 구한말 때부터 이미 헤이그 특사들을 같이 도와 주고, 이 완용이 디스했던 3·1 운동을 지지한 정말 대단한 분이었다.

2. 아베 노부유키의 괴예언

그럼 다음으로, 구한말이 아니라 일제 말기에 마지막(제9대) 조선 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와 관련된 얘기를 좀 하겠다.
이 사람은 전범이며,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실드의 여지가 없는 악행을 많이 저지른 사람이다. 전쟁이 더 길어지고 일제가 일찍 항복해서 물러나지 않았으면 정말 가관이었을 것이다.

이 사람은 일제의 패망으로 인해 한반도에서 철수하면서도 이런 저주에 가까운 말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왔다.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세뇌라..;; 그래서 저 말은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고 친일파에 대한 피해의식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꽤 자주 언급되고 인용되는 편이었다.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민이 제정신을 차리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 넘는 세월이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 교육을 심어 놓았기 때문에 이들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의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그 식민 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아베 노부유키는 조센징 노예들을 우습게 여긴 아주 나쁜놈이었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본인은 이 사실과는 별개로, 저 말이 그에게서 직접 유래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저 말이 내용면에서 사실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 이유를 몇 가지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서로를 이간질하는 노예적 삶'이라고 했는데..
한반도에 서로를 믿지 못하고 감시하고 이간질하는 노예적 삶을 조장한 진짜 주범은 소련과 그쪽을 추종한 공산주의자이다! 공산주의는 사람의 악한 본성을 최대한으로 뽕을 뽑아서 시너지 효과를 내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모든 인민을 평등한 거지로, 입에 풀칠하기에 바쁜 바보 노예로 만들지 않으면 유지가 되지 않는 저주받을 체제이다.

UN의 제안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위원회를 발족시킨 것부터(1946년 2월) 시작하여 단독 국기와 애국가 제정(1947년), 분단과 단독 정부 수립도 북한이 먼저 시작한 거다! 아직도 이 승만이 분단의 원흉이네 정읍 발언(1946년 6월)이 민족 반역질이네 이 따위 헛소리가 내 눈에 띄는 거 난 용납 못 한다. 정읍 발언은 이미 다 발생해 있는 원인으로 인한 "대응의 결과"일 뿐, 그 자체가 원인이 아니다.

일제는 단군의 후손들에게 많은 불행을 끼쳤지만, 그래도 이념 갈등과 남북 분단에까지 관여하지는 않았다. 공산주의는 일제의 입장에서 보기에도 그저 탄압과 박멸의 대상일 뿐이었으니 말이다.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지고 러시아가 이겼다면 조선은 일제 식민지가 되지 않는 대신에, 러시아의 식민지가 돼서 훗날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가 됐을 거라는 전망도 있지 않은가.

남한은 나라가 잘 세워진 덕분에 공산주의의 직접적인 마수는 천만다행으로 피해 갔다. 하지만 그래도 북한의 방해 공작 때문에 민주주의 내지 시민의 자유를 불가피하게 더욱 제약하게 됐고, 더 강력한 공권력이 필요해진 관계로 친일 군경 간부 청산도 제대로 하기 어려워지는 등 여러 간접적인 피해를 입었다.

둘째, '옛 조선의 영광'이라고?
일제는 조선을 아주 비하하면서 망할 수밖에 없는 나라였다는 세뇌를 일삼아 왔다. 그 예 중 하나가 바로, 멀쩡한 지리학자인 김 정호가 병신 같은 조선 정부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옥사한 거라고 조작한 것이고 말이다. 그런 식으로 비하를 하거나, 아니면 일본과 조선은 정체성이 하나라고 내선일체를 주장했다.

이런 와중에 일제 식민 지배의 수뇌부라는 양반이 갑자기 웬 뜬금없는 '옛 조선의 영광' 드립을 공개적으로 친단 말인가? 논리적으로 앞뒤가 전혀 안 맞는다. 이 어설픈 립서비스만 없었어도 예언(?)의 신뢰성과 사실성이 크게 올라갔을지도 모르는데... 저건 이순신 장군을 존경한다는 무슨 일본 해군 제독 얘기보다도 현실성이 더 떨어진다.
일본이 부러워할 정도로 조선이 리즈 시절이었던 때를 굳이 생각해 보자면, 아마 세종대왕 시절 정도밖에 없을 게다. 그리고 그건 아베 같은 사람이 그 상황에서 갑자기 거론할 이유가 없는 너무 먼 옛날이다.

마지막으로,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은 족히 걸릴 것이다'를 생각해 보자. 이거 어디서 많이 들은 표현이다.
바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했다는 말 중에도 '100년 드립'이 존재한다. 6· 25 전쟁 중이던가 후던가.. 돌 위에 돌 하나 안 남은 처참한 폐허를 보고는 "한국은 이거 다 복구· 재건하려면 한 100년은 더 걸리겠다"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그런데 맥아더의 저 말도 아베 노부유키의 말과 마찬가지로 정확하게 출처 검증이(언제 어디서 한 말?) 되지 않아서 아쉬움이 남는다.

허나, 맥아더의 말은 설령 사실이 아니라 주작이라 하더라도, 저주· 악담이 아니라 그냥 주관적인 전망일 뿐이었으며 결정적으로 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비록 영토가 반토막 나고 병크와 비리도 많고 문제도 없는 건 아니지만, 세계 10위권의 찬란한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이 여전히 한낱 '옛 조선의 영광'만도 못한 상태인 걸까?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두 '100년 드립'은 모두 적중하지 않았다.

아베의 괴예언은 "그때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라는 병맛나는 허세로 끝나는데.. 이것조차도 맥아더 장군이 필리핀에서 후퇴하면서 직전에 남긴 말 "I shall return.."을 묘하게 닮아 있다. 물론 맥아더는 나중에 진짜로 돌아와서 마치 프로토스 드라군의 생산 대사처럼 "I have returned"까지 당당하게 찍은 반면, 아베 노부유키는 그런 거 없었다.

우리나라는 이제 사실상 있지도 않은(유효 오차 범위 이내) 친일 망령보다는, 당장 현실적으로 훨씬 더 큰 위협인 이런 망령이 다시 나타나지는 않을까 주의하고 경계하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로운 처사라 생각된다.

폴 포트는 죽었지만 그는 언제고 시공을 초월해서 다시 나타날 수 있다.
성공한 자들을 무조건 부정한 무리로 몰아붙이고
자신의 불행한 처지가 무조건 사회 부조리 때문이라 몰아붙이고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 선동가들의 장난에 놀아날 때
폴 포트는 언제고 다시 돌아올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6/01/15 08:32 2016/01/15 08:32
,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182

숭고한 죽음, 영웅 이야기

1. 장기를 기증하고 죽은 어린이

'리앙 야오이'라고 중국에서 11살짜리 소년이 뇌종양을 앓다가 지난 2014년 6월 6일에 세상을 떠났다. (☞ 자세한 내용) 그런데 그 아이는 전에 학교에서 뭔가 배운 게 있었는지, 기왕 죽더라도 남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면서 장기 기증을 유언으로 남기고 죽었다.
그래서 아이의 부모는 유언을 따라 아이의 신장, 간 같은 주요 장기를 다른 환자에게 기증해 줬으며.. 그 장기 이식 수술을 마친 의사들은 아이의 시신의 옆에 늘어서서 허리를 90도로 팍 숙이고 진심으로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부자가 굶는 건 의사로부터 굶으라는 처방을 받았을 때뿐이다"라는 말이 있다.
의사는 남의 의학적인 생명을 관할하는 전문직이다. 그러니 부자를 강제로 굶게 만들 수 있다. 남에게 "병 빨리 낫고 싶으면 / 건강을 되찾고 싶으면 이렇게 하세요, 저건 하지 마세요"라고 고자세로 훈수를 놓으면 놨지, 의사가 남에게 저 정도로 감사와 경의를 표할 일이 평소에 얼마나 있겠는가? 그런데 환자이던 고인이 자기 장기 기증을 하면서 갔으니, 저건 정말 의대생 시절 해부 실습용 시신 기증에 맞먹는 예우를 해 줘야 할 것이다.

저 사진을 보니 문득 떠오르는 생각: 초록색 아니면 파란색의 solid color(순색) 배경을 볼 수 있는 분야가 크게 둘 있는 것 같다.

  • 외과 의사의 수술복
  • 일기예보나 일부 영화처럼 크로마 키를 사용하는 촬영 현장

(군인 전투복은 황록· 갈록 등에 가까우니 이 범주에 속하지 않음)

2. 6· 25 국군 전사자 유해

다음으로 군대 이야기이다.
이 명박 정권 시절이던 2012년 5월 25일, 6· 25 전쟁 중에 다른 지역이 아니라 '북한 지역'에서 전사한 국군 무명 용사의 유해 12구가 처음으로 우리나라로 운구되어 왔다. 정확히는 장진호 전투에서이다. 장진호는 인명이 아니라 함경남도 장진군에 있는 호수의 이름이며, 저 전투는 UN군이 트라우마급의 참패를 당했던 치열한 전투였다.

6· 25 전쟁은 잘 알다시피 (1) 초반에 남한이 대구와 부산까지 밀림 (2) 인천 상륙 작전을 계기로 확 북진 (3) 중공군 때문에 다시 후퇴 뒤, 1951년 하반기쯤부터는 지금의 휴전선 일대에서 고지 탈환 엎치락뒷치락이 2년간 계속되고 후방은 사실상 일상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그러니 대한민국 국군이 저렇게 북쪽 끝에서 전사했다는 건 국군이 일시적으로나마 쭉쭉 북진해 있던 1950년 가을경의 일이다.

북한은 만만한 호구 겸 자존심 문제가 걸려 있는 남한하고는 손잡지 않고, 오히려 원쑤 미 제국주의자들과 협정을 맺어 자국 영토 내의 장진호 전투 전사자 유해를 합동으로 발굴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이 북한에 아마 돈 많이 쑤셔넣어 줬을 듯) 미국은 거기서 발굴된 유해를 미 합동 전쟁 포로· 실종자 사령부(JPAC)로 옮겨 신원 확인 작업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12구가 아시아 인종으로 분류되었다.

이 단계가 돼서야 대한민국 국방부 소속의 유해 발굴 감식단이 나서서 추가 감식을 실시한 결과 그 유해는 국군 전사자로 확인됐으며, 그 중 2구는 김 용수· 이 갑수라고 신원이 완벽하게 확인되고 유족들과 연결까지 되었다! 저런 걸 도대체 어떻게 다 확인할까? 현대 과학 기술의 위대함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서 거의 70년간을 북한 땅에 파묻혀 있던 무명 용사의 시신은 하와이로 갔다가 대한민국 땅으로 귀환하게 됐다. 위안부 할머니와 일본군 만행을 배경으로 <귀환>이라는 영화가 제작 중이라고 들었는데 이것도 또 다른 종류의 "귀환"인 셈이다.
시신은 군 수송기를 통해 서울 공항에 도착했으며, 이때는 대통령, 국방부 장관, 한미 연합사 사령관 같은 최고의 높으신 분들이 쭈욱 도열해서는 관을 향해 이등병마냥 각 잡고 거수경례를 하면서 최고의 예우를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저런 사람들이 현직에 있으면서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각 잡고 경례할 일이 도대체 있겠는가? 의사들이 장기 기증을 하고 죽은 아이의 시신에게 깍듯이 예를 갖추고 경례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남을 구하기 위해 죽음도 감수하는 직업으로는 경찰, 소방관, 군인, 보디가드· 경호원=_= 등이 있다.
이에 덧붙여 기독교 역시 나를 사랑하여 누군가가 나를 위해 대신 죽어 주었다는 걸 가르치고 믿는다. 물론 저런 세상 직업에서의 죽음과는 성격이 좀 다르며, 죽음뿐만 아니라 부활까지 있기도 하지만 말이다.

3. 불굴의 의지로 43년 만에 귀환한 국군 포로 조 창호 중위

1994년 10월 23일, 겨우 이틀 전에 성수대교 붕괴 사고 때문에 전국이 떠들썩하던 시절에, 서해상에 어느 괴선박이 남하해서 우리나라의 어업 지도선에 나포되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먼 옛날 6·25 때 납북되었던 국군 포로가 타고 있었다.

조 창호 중위(1932-2006). 그는 연세 대학교의 전신인 연희 학교를 다니다가 겨우 대학 새내기 나이 때 6· 25 전쟁을 맞이했다. 그 옛날에 대학생이면 굉장한 엘리트였으니 그는 국군 포병 장교로 임관하여 전투에 참가했다. 그러다 1951년 5월, 강원도 인제에서 중공군에게 밀려 대참패를 당했던 그 '현리 전투' 때 그는 포로로 잡혀서 북한으로 끌려갔다.

그는 다른 국군 포로들과 함께 탈출을 계획했다가 적발되어 13년간을 북한 내부의 온갖 오지에 있는 강제 노역소에서 복역하며 고생했다. 농장과 광산에서 온갖 중노동을 해야 했으며, 작업 중에 사고로 몸의 이곳저곳이 다치고 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포로들이 다수가 희망을 잃고 북으로 전향해 버린 것과 달리, 그는 끝까지 전향하지 않았으며 대한민국 정체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는 요양을 빙자하여 변방에서 늘그막을 보내게 되었는데, 거기서 한 조선족 상인과 접촉하면서 고향의 가족들과 서신 연락이 닿고 더 나아가서는 탈북에 기적적으로 성공했다. 그래서 그는 1951년 이래로 무려 43년 만에 남한 땅을 다시 밟게 되고 가족들과 상봉했다. (북한에서 새로 둔 처자식들과는 안타깝지만 이별이지만)

그는 곧바로 병원에서 총체적인 치료와 회복에 들어갔다. 이 놀라운 소식이 전해지자 그 당시 김 영삼 대통령, 국방 장관에 육군 참모 총장까지 높으신 분들이 줄줄이 문병 와서 이 위대한 노병 영웅을 깍듯이 예우하고 격려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는 참모 총장에게 "귀환"을 정식 보고했고, 서울 현충원에 가서 실종-전사자로 처리되어 있던 자기 이름을 손수 지웠다. 국가로부터는 훈장(보국훈장 통일장)을 받았으며, 6· 25 당시 계급이었던 소위에서 중위로 진급한 뒤 곧바로 육사 생도들의 사열을 받으며 전역했다. 모교인 연세 대학교로부터는 명예 졸업장도 받았다.

그는 그 뒤 12년을 더 살다가 2006년 11월에 향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6· 25 당시에는 아직 정식으로 있지도 않았던 군진수칙을 43년간 몸으로 실천한 대한민국의 참 군인이었다. 국가에서 공식적으로는 없는 사람으로 간주하며 쥐도 새도 모르게 보낸 북파 공작원이 아니라, 대놓고 국가 정규군으로 전투에 참가하다가 북으로 끌려간 포로들에 대해 우리는 평소에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 걸까?

1. 나는 대한민국 군인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신명을 바치겠다.
(중략)
4. 나는 만약에 포로가 되더라도 아국이나 우방에 불리한 여하한 적의 권고나 우대도 거절하며 추호도 적을 돕지 않겠다.
(중략)
6. 나는 만약 포로가 되어 심문을 받더라도 계급·성명·군번·연령을 제외하고는 진술을 회피하며 아국과 우방에 불리한 서명, 기타 여하한 요구에도 응하지 않겠다.
7. 나는 조국에 신명을 바친 대한민국 군인임을 명심하고 나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 나는 조국을 사랑하며 조국은 나를 보호하고 있음을 확신한다.
(국방부 훈령 제27호 군진수칙의 일부)

Posted by 사무엘

2016/01/03 08:33 2016/01/03 08:33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178

1. 인재 양성 기관

대기업· 공기업이나 정부 기관 같은 거대 조직은 망할 일이 없이 안정적이고 임직원에게 복리후생도 좋다 보니, 똑똑한 사람들이 들어가려고 많이 몰린다. 그런 조직은 일단 뽑은 사람들을 자기 조직의 일원으로 동화시키려는 목적으로, 또 이미 입사한 간부들이라 해도 부려먹기만 하는 게 아니라 때때로 재교육을 하려는 목적으로 자체적인 연수 내지 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법조계에는 사법 연수원이 있으며, 군대 내부에도 장교를 첫 양성하는 사관학교뿐만 아니라 기존 장교들을 재교육하는 학교들이 자운대에 있는 게 그 예이다.
이런 교육기관들은 입소자들의 합숙(?)을 목적으로 도시의 외곽 내지 산기슭에 있는 편이며, 존재가 대외적으로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사실은 알려져야 할 필요도 없고.

(1) 한전 인재 개발원
태릉 사격장, 서울여대, 서울 과학 기술 대학교 사이의 산기슭에 있다. 한전에 합격한 신입사원들은 여기서 연수를 받는다. 연수 시설치고는 보안 수준이 이례적으로 청와대· 군부대와 동급인 최고이다. 지도에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항공 사진 지도에는 숲으로 완전히 가려져 있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던 중, 공채를 뚫고 한전에 합격해서 연수까지 다 받은 어떤 사람의 수기를 본 적이 있다. 만인이 부러워하는 안정적인 공기업에 합격했다만, 급여가 당장 그렇게 많지 않고 결정적으로 첫 발령지가 강원도 깡촌인지라 무척 고민 중이었는데.. 마침 인서울 근무를 하는 다른 대기업으로부터 추가 합격 통지가 오는 바람에 한전을 퇴사하고 직장을 옮겼다고 한다. 당장 연봉은 더 높을지 모르지만 일은 더 빡셀 텐데.. 그래도 인서울인 것이 결정적인 메리트였다고 한다. 공기업과 대기업을 나란히 선택해서 들어간 그 글쓴이가 참 대단하다.

(2) 국가 정보 대학원
국정원에 합격한 신입 사원..은 아니고 요원들이 비밀리에 직무를 위한 연수를 받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부지도 어지간한 군부대 급으로 넓다. 소재지는 성남시 운종동으로, 반경 수 km 이내엔 이 경석 선생 묘, 대한 송유관 공사, 고기리 유원지, 한국학 중앙 연구원이 있는 깡촌이다.
얘 역시 (1)처럼 100% 은폐이므로 지도에서 찾을 생각은 하지 말 것. 단, 국정원 본원과는 달리, 근처 도로의 이정표에는 잠깐 언급이 돼 있는가 보다.

원래 이 기관은 서울 이문동의 천장산 동쪽 구석, 의릉 인근에 있었으나 2003년경에 이전을 했다. 지금은 거기 일대는 한국 예술 종합 학교 캠퍼스가 돼 있다.
천장산 서남쪽 구석의 홍릉 일대는 잘 알다시피 수백· 수천 명의 이공계 박사들이 근무하는 과학 연구소들이 즐비하다. 여기 부지가 너무 좁아졌고 또 서울이 북한과 너무 가깝다는 안보 문제도 있고 해서 1970년대엔 나라에서 대전 대덕에 연구 단지를 추가로 만들고, 카이스트도 거기로 이전을 시킨 것이다. 다만 지금은 인서울 연구소들을 모두 이전하려는 계획도 있는 듯하다.

(3) 서울특별시 인재 개발원
시에서 운영하는 연수원도 있다. 서울시 인재 개발원은 예술의 전당 옆 서초 IC 근처의 우면산 기슭에 있다. 지도에는 표시가 돼 있고 내부의 로드뷰까지도 별 제한 없이 제공되지만, 최소한의 보안이 필요한지 항공 사진만은 흐리게 처리되어 있다.

여기는 서울시 소속 공무원들이 입소하여 교육· 연수를 받는다. 하지만 지방에서 서울시 공무원 공채를 지원하러 상경한 수험생들의 숙소로도 쓰이는가 보다. 전국에서 서울만이 유일하게 타 지방 사람들도 공무원 취업에 지원을 할 수 있다.

(4) 코레일 철도 인력 개발원
철도 회사에도 인력 양성 기관이 응당 존재한다. 코레일의 경우, 철도 박물관과 한국 교통 대학교 의왕캠(구 철도 대학)사이라는 아주 적절한 곳에 있다. 여기는 자사 직원의 재교육뿐만 아니라 철도 차량 기관사 지망생들의 학원 역할도 한다.
여기는 항공 사진으로 딱히 가려져 있지는 않다. 여기 대신 구로 역 인근에 있는 철도 교통 관제 센터는 매우 중요한 곳이다 보니 완전히 은폐되어 있다.

코레일 말고 서울시의 지하철을 운영하는 공기업인 서울 메트로와 서울 도시철도 공사도 자체적인 인재 개발원을 두고 있다. 원래는 두 회사가 따로 썼는데 서울시의 조율로 한데 통합했다고.
서울 남산 어디 모처에도 무슨 기관의 연수원이 있는 걸 옛날에 지도에서 봤는데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설마 이전했나?

2. 대한 송유관 공사

우리나라에 에너지 기업으로는 SK 에너지 같은 사기업 내지 '한국 석유 공사' 같은 공기업이 있는데, 그와 더불어 송유관 시설 자체만을 관할하는 기업도 있다. 본사는 아까 잠시 언급했던 국가 정보 대학원과 가까운 위치에 있다.

외국에서 수입된 석유를 비축해서 국가적으로 관리하는 시설들은 다 발전소와 동급의 보안이 필요한 기간 시설이기 때문에 민간 지도에 나오지 않는다. 또한, 이런 기름은 유조차로만 수송하는 게 아니며, 경부 고속도로의 노선과 얼추 비슷한 선형인 온산-울산-경주-대구-대전-천안-성남에 이르기까지 송유관이 매설돼 있다고 한다. 그 송유관의 중간엔 역시 항구로 통하는 몇몇 지선도 있다.

하긴, 그 많은 석유를 전부 엘리베이터로만 나르기에는 양이 너무 많다. 에스컬레이터도 좀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다니지도 않고 그렇다고 통상적인 화물을 수송하는 것도 아닌 선이 매설되어 있다는 게, 마치 해저 인터넷 광케이블과 비슷해 보인다. 우리 땅 밑엔 신기한 시설이 생각보다 많이 있다.

석유 공급과 관련된 범죄는 크게 (1) 유사 석유 제조..;; (2) 면세유를 무단 유출 판매하여 차액 챙기기, 그리고 아예 (3) 지하 수십 m에 매설된 저 송유관을 근성으로 뚫어서 기름을 직통으로 탈취..로 나뉜다.
(3)은 개념적으로 은행 현금 수송 차량을 털거나 TV 방송에서 전파 납치를 하는 것과 별 차이 없다. 혹은 폐전자기기 재활용 업체에서 회수되는 금 같은 귀금속을 직원이 몰래 조금씩 빼돌리는 짓하고도 비슷하다.
물론 송유관 공사 같은 데서는 송유관의 유압을 측정해서 누유가 발생하고 있는지 체크를 하기도 하니, 오차 범위에 들 정도로 조금씩 찔끔만 빼돌린다고 한다.

3. 자동차 주행 시험장

다음으로, 옛날 엑셀 추억의 CF 영상을 하나 시청하도록 하자.

여기서 드는 의문: 이거 어느 도로에서 찍은 걸까?
이건 여느 고속도로나 시내 도로는 아니고, 자동차 연구소 안의 주행 시험용 전용 도로이다.
지금이면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교통 안전 공단 내부의 주행 시험장에서 찍을 수 있었겠지만 저 모델의 엑셀이 출시된 건 무려 1980년대 말이다. 그때는 저 시설이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그렇다고 레이싱 서킷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길이 너무 곧고 넓고 평평하다.

외국에서 찍은 게 아니라면 저건 현대 자동차가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주행 시험장에서 촬영했을 것이다.
1980년대에는 울산 공장 근처에 시험장이 있었고, 그로부터 몇 년 뒤엔 남양읍(동) 연구소에 또 시험장이 신설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엑셀의 CF는 엑셀 개발의 산실이던 남양 연구소의 주행 시험장에서 곧바로 찍지 않았나 싶다.

이건 사람이 뛰는 운동장· 경기장이 아니고 경마장도 아니다 보니 한 바퀴 도는 전체 거리가 거의 4~5km에 달할 정도이고 반경이 그런 경기장보다 훨씬 더 크다. 동일 축척의 항공 사진들을 한데 대조해 보면 자동차 주행 시험장이 얼마나 거대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런 시설은 자동차가 나름 시속 200~250km급으로도 밟을 수 있게 설계돼 있다. 초고속 주행 테스트도 해야 되니까... 이런 이유로 인해, 뱅글 도는 곡선 부분은 원심력의 상쇄를 위해 노면 cant(좌우 기울기)가 굉장히 크게 잡혀 있다.

자동차 제조사가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주행 시험장은 나름 기업의 자산이고 보안 시설이기 때문에 항공 지도 사진에도 완전 은폐까지는 아니지만 흐리게 표시돼 있다.
여담이지만 현대 자동차 미국 연구소는 모하비 사막에도 주행 시험장을 운용하고 있다고 한다. 노후 비행기들이 가는 모하비 공항이 있는 그곳 말이다.

4. 남북 분단 관련

우리나라에서 봉인된 장소의 갑중갑은 단연 정치· 안보 분야 쪽일 것이다.

(1) 오리지널 판문점
본인도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된 건데.. 6· 25 중 당시에는 판문점이 지금의 판문점 위치에 있지 않았다. 지금 판문점은 휴전선의 선형에 맞춰서 오리지널 판문점보다 동쪽으로 약 1km쯤 이전하여 새로 만든 것이다.
물론 그게 시점이 1953년 10월이므로, 휴전 거의 직후부터 판문점이 지금의 위치에 있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휴전 협정이 이뤄졌던 그 장소는 지금은 완전히 북한 영토로 넘어갔으며, 옛 판문점은 지금 판문점에서 먼발치 너머로나 볼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2) 옛 장단면사무소 건물
군사 분계선 안의 경의선 철길 주변 사진을 보면, 장단 역 옛 부지라든가 "죽음의 다리"(판문점 인근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 말) 따위는 있는 그대로 보존돼 있는 듯하다.
단, 장단 역은 전쟁 폭격으로 인해 돌 위에 돌 하나 안 남고 사라진 반면, 옛 "장단면사무소" 건물은 폐건물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 사실이 나를 자극한다.

물론 얘는 민통선 정도가 아니라 위험한 DMZ 안에 있기 때문에 개인의 접근이나 관광은 불가능함.
그리고 인터넷에 나도는 주소 중에 '동장리 어쩌구' 하는 주소는 잘못됐다. 언론에서 공개한 주변 사진을 보면 이 건물은 분명 길가에 있는 반면, 동장리 일대는 아무리 뒤져도 허허벌판일 뿐 길이 보이지 않는다.
'도라산리'로 시작하는 주소가 길가에 있는 맞는 주소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철원 노동당사는 38선 시절에 북한 치하에 있다가 우리가 수복한 폐건물인 반면, 옛 장단면사무소 건물은 38선 시절에는 남한 관할이다가 나중에 봉인되어 버린 폐건물이라는 차이가 있다.

이런 곳에 실제로 드나들고 싶은 분이라면 열심히 공부해서 각종 공기업, 관공서, 군부대에 취업(!)을 하거나, 기자가 돼서 방문 취재를 하면 될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5/12/23 08:25 2015/12/23 08:25
, , , ,
Response
No Trackback , 2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174

1. 6· 25 개전 초기의 승전 기록

우리는 6· 25 전쟁에 대해서 초기엔 기습적인 남침에 허를 제대로 찔린 나머지 서울을 사흘 만에 뺏기고 한동안 졸전과 패전, 후퇴만을 거듭하다가 낙동강 일대까지 밀렸다고 알고 있다.
그건 물론 거시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개전 초기에도 다음과 같은 일부 국지전에서는 국군이 승리하기도 했다는 것을 기억해 두면 좋겠다.

(1) 춘천-홍천 전투
6월 25일부터 30일까지 한반도의 중· 동부 지역인 춘천 일대에서 북한군이 진격해 오는 것을 국군 제6보병사단이 성공적으로 차단한 전투이다.

물론 서울을 빼앗긴 상황인 데다 북한군의 엄청난 물량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아군도 7월 1일에 춘천을 내어주고 후퇴하게 되었지만, 이때 제6보병사단이 벌어 준 며칠간의 시간은 정말 결정적인 금쪽같은 시간이었다. 이로 인해 북한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서 남진이 사흘 정도 지연되었으며, 그 동안 우리 쪽에서는 전열을 가다듬고 UN군의 파병을 논의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정말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서 나라를 구했다. 당시 이 사단의 최고 지휘관은 김 종오 장군이었다.

(2) 대한해협 해전
본토의 휴전선 인근에서 저런 난리가 벌어지는 동안 바다, 그것도 후방도 그저 조용하지만은 않았다. 북한군은 육로뿐만 아니라 배를 타고 동해를 따라 부산으로도 곧장 후방 침투용 공작원을 보냈기 때문이다. 누가 주장하는 것처럼 1980년 5월에 광주에 공작원 600명이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1950년 6월에 부산에 공작원 600여 명이 괴선박 한 척을 타고 침투되고 있던 건 사실이었다.

손 원일 제독이 도입한 백두산함은  6월 25일 당일 밤에 북한군이 탄 괴선박을 발견하고 "귀함은 언제 어디서 출항하여 어디로 가고 있는가? 소속 국가가 어디인가? 정지하라. 정지하지 않으면 발포한다"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응답이 없고 나포도 되지 않자 결국 함포를 발사했다.
괴선함도 무장이 달린 군함이었기 때문에 몇 차례 교전이 오갔으나.. 결과는 남한의 승리였다. 아군은 몇 명이 전사· 부상하고 군함이 경미한 손상을 입은 반면, 괴선박은 완전히 침몰했으며 그 안에 있던 수백 명의 북한군 병사들은 부산에 상륙하지 못하고 수장됐다. 대한민국 최초의 6· 25 전투 승전은 바로 이 해전이었다.

영화 <국제시장>에서도 다뤄졌던 흥남 철수는 이로부터 거의 정확히 반 년 뒤 크리스마스 직전에 있었던 일이다. 중공군의 개입 때문에 서울까지 도로 빼앗긴 1· 4 후퇴가 있기 열흘 남짓 전이기도 하다. 이때 수많은 피난민들이 탔던 미군 군함은 다행히 적군의 공격을 받지 않고 부산에 무사히, 기적적으로 잘 도착했다.

6· 25 하니까 나는 생각이다. 리암 니슨이 맥아더 역을 맡아서 인천 상륙 작전을 배경으로 하는 6· 25 영화가 내년에 나온다고 하는데.. 기대된다. <오! 인천>이나 <클레멘타인>(스티븐 시걸..) 꼴 나지 말고 잘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난 니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전쟁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UN군이 널 찾아 내서 널 죽여 버릴 거야." / "잘해 보라우" 이런 대사가 나오려나 모르겠다.
딸을 구출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에펠 탑이라도 폭파할 기세였으니, 북괴군을 섬멸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평양에 핵이라도 떨어뜨릴 생각 정도는 충분히 하고도 남겠다. ㄲㄲㄲ

2. 일제 강점기 때의 독특한 인권 변호사

일제 강점기에 대한민국의 독립에 기여하여 건국 훈장을 받은 인물 중에는 프랭크 스코필드 같은 외국인이 있다는 건 다들 아실 것이다. 그런데 유럽/미국인, 혹은 중국인이 아니라 적국인 일본인 중에도 이런 훈장이 추서된 사람이 딱 한 명 있다.
무다구치 렌야처럼 캐 무능 병신 졸장 일본군 고위 인사를 빈정대면서 대한민국 독립 유공자감이라고 얘기하는 경우가 있긴 하다만, 여기서 말하는 건 그게 아니라 진짜로 진지하게 훈장을 받은 사람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 주인공은 바로 '후세 다쓰지'(1880-1953)라는 변호사이다. 임진왜란 때에도 김 충선 같은 항왜 귀순 장수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저 사람은 애초에 군인이 아니고 메이지 대학 출신의 법조인이다. 훈장이 추서된 건 다소 늦은 2004년으로, 당연히 당사자의 후손이 훈장을 대신 받았다. 외국인인 관계로, 훈장만 줄 뿐 연금 같은 다른 혜택은 없다.
사실은 더 일찍부터 이 사람에게 훈장을 추서하려는 논의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태생이 일본 국적이라는 점 때문에 논의가 미뤄지곤 했다고 한다.

그가 일본의 법조인으로서 조선인에게 잘해 줄 수 있었던 것은.. 뭐 안 봐도 비디오다.
이 사람은 정말 인권 변호사였다. 일본 자국 내에서 차별과 설움을 받는 부라쿠민 소수 민족들, 그리고 자기 나라의 식민 지배를 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적극 변호를 해 줬다. 그리고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고 심지어 자국의 조선 침탈을 비판하기까지 했다.
덕분에 일본 정부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찍혔으며, 굳이 조선 편들기뿐만이 아니라 굉장히 진보 좌파스러운(일본 제국주의의 입장에서 봤을 때) 다른 판결들 때문에 급기야는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물론 종전 후에는 복권됐다.

그는 1919년에 3· 1 운동 이전에 일본의 조선 유학생들이 벌였던 2· 8 독립 선언의 주동자들을 변호하고 이들은 일본 내란죄 혐의에 대해 무죄라고 주장했다. 관동 대지진 때 벌어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사죄문을 신문에 기고하고, 정부의 폭동 묵인과 날조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 정도면 굳이 한국 편 일본 편을 떠나서 정말 일본 안의 살아 있는 양심 급이 아닌가 싶다.

3. 태평양 전쟁의 마지막 일본군 패잔병

잘 알다시피 일본은 1930년대 말에 중일 전쟁부터 일으켰다가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 전쟁까지 일으키고, 동남아 일대 나라들을 무단 침략하고 점령하면서 세계를 상대로 그야말로 온갖 깽판을 부렸다. 그러다가 핵을 두 방이나 맞는 험한 꼴까지 당하고 전쟁에서 완벽하게 참패했다.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했으며, 그 대가로 단순히 2차 세계 대전 직전까지가 아니라 20세기 이래로 자기가 차지했던 식민지들을 몽땅 뱉어 내게 됐다. 우리나라 역시 이때 덤으로 일제로부터 해방됐다.

이에, 지금까지 점령지에 있던 일본군들은 무장을 해제당하고 그대로 본국으로 귀환하게 됐다. 그런데 연합군과 직접 교전하다가 항복하고 포로가 된 게 아닌 일부 군인들은 그 당시의 교통· 통신 사정을 감안했을 때 패전과 항복 소식을 제때 접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것이 도가 지나쳐서 종전 후 수~수십 년이 지나도록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으면서 동남아 밀림 속에서 문명을 거부하고 혼자 일본군 행세를 하며 산 독특한 패잔병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는 '오노다 히로'라는 일본군 소위인데.. 무려 1974년까지 필리핀의 루반 섬에서, 본국으로부터 아무런 보급도 명령도 안 받으면서 자칭 일본군 행세를 하며 지냈다고 한다. 필리핀 민간인을 약탈· 살상하면서 말이다.
전쟁이 끝났으니 이제 그만 투항하라고 필리핀 정부, 동료 병사, 심지어 일본에 있는 가족까지도 애걸복걸을 했지만 그는 싹 다 귀축영미의 거짓 선전쯤으로 치부하고 믿지 않았다.

머리가 없는 좀비도 아니고..
우리 부모님이 죽지 않았다고 믿으면서 시신 옆에서 먹고 자며 지내던 누구처럼..
도대체 일본군 내부에서 정신 교육 세뇌 교육을 어떻게 받았길래 저런 인지부조화 망상에 젖어 지낼 수 있었을까?
6· 25 때는 우리나라에도 "후퇴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끝까지 고지를 지킬 것이고 죽음을 각오하고 싸움에 임하겠습니다"란 FM 답변으로 맥아더 장군을 감동시킨 병사가 있긴 했지만, 저 아저씨는 좀 심하게 오버했다. =_=;;
게다가 6· 25 때 남한은 침략자로부터 자국 영토를 지키는 입장이었던 반면, 저기서 일본은 대놓고 남의 나라에 쳐들어간 침략자였으니 동일선상에 있는 비교 상대도 안 된다.

그는 그렇게 근성으로 살다가 결국, 한참 전에 예편한 옛 직속상관으로부터 명목상 투항 명령서를 정식으로 전달받은 뒤에야 투항했다. ㅋㅋㅋ
무슨 도마냐..;; 내 눈과 손으로 못자국과 창자국을 직접 보고 만지지 않는 한 절대로 믿지 않겠다고.. (요 20:25)
이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었는지 사도 요한은 훗날 요일 1:1에서 말씀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가 보았을 뿐만 아니라(look, see) 만지기까지 했다(handle)는 표현을 특별히 넣었다.

4. 6·25 때 일본군이 몰래 참전했는가?

우리나라는 건국 당시에 주변에 적이 참 많았다.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과 소련이 전부 공산화가 된 와중에, 남조선만 친미 자유 진영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비록 붉게 물든 나라는 아니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 식민 통치를 했던 철천지 웬쑤이니 역시 수교를 할 리가 없었고, 서로 소 닭 보듯 애써 외면하면서 없는 사람 취급하는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우리나라는 6·25 전쟁의 포화에 휘말렸다. 이에 UN군이 북한을 저지하러 참전했다. 일본은 아직 UN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전범국이었으며, 헌법 차원에서 무장을 영구적으로 해제 당한 상태였다. 이념에 따라 남북 어디를 군사적으로 편들 필요가 없고 애초에 편을 들 수조차 없으며, 그저 이웃집 불 구경만 하면 되는 중립 옵저버였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몰래 무슨 군대를 파견해서 원산 앞바다에서 기뢰 제거 같은 전투 행위를 슬그머니 했다고도 한다. 이건 마치 196~70년대에 휴전선을 몰래 넘어 북한 영토로 가서 북한군 몇십 명을 때려잡았다는 북파공작원의 얘기를 듣는 듯한 느낌이다. 비록 일본이 북한을 편든 건 아니었지만, 저것도 결국은 다~ 군사 무장 명분이라는 자기 이익을 노리는 수작이기 때문에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6·25 당시에 참전한 남한 아군 중에는 재일 학도 의용군도 있었다. 이들은 UN군의 신분으로 참전했는데, 일본어는 잘하지만 한국어는 못하곤 했다. 이 승만 대통령은 전선 시찰 중에 이걸 우연히 발견하고는 일본이 전쟁에 슬그머니 개입한 줄로 생각했다. 그 연륜과 성깔이라면, 그 순간 그는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구한말 동학 농민 운동의 트라우마가 떠올랐지 싶다.

당장 급하다고 외세를 끌어들여서 내란을 진압했다간 내란이 끝난 뒤에 나라가 무슨 꼴이 나는지? 게다가 일본은 지금 이 상태로도 미국의 병참 기지가 된 덕분에 얼마나 대박 재미를 보고 있는데, 하물며 진짜 병력까지 한반도에 개입한다면?
이 사람이 젊은 시절에 받은 트라우마의 양대 산맥이 바로 저 일본이랑, 미국(가쯔라 태프트 밀약 때문에 버림받은 것)이었으며, 이로 인한 강박관념 성향은 그가 훗날 대통령이 된 뒤 초강경 외교 노선으로 고스란히 표현됐다.

이에 이 승만은 거침이 없었다. "미국이 일본까지 슬그머니 끼워서 전쟁에 참가시키려는가 본데, 만약 왜놈들이 한반도에 온다면 우린 왜놈부터 죽이고 나서 북한군을 쏘겠다" 이런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요즘으로 치면 "전쟁 나면 간부들부터 죽이고 나서 북한군 쏘겠다" 거의 이런 급의 극단적인 발언이었다. 물론 "아, 쟤들은 일본인이 아니라 교포입니다"라는 해명으로 오해는 곧 풀렸다.

'정읍 발언'이 아니라 '왜관 발언'이라고 검색해 보면 이때 대통령의 행적을 알 수 있다.
전자는 이 승만이 남북 분단의 원흉이라고 말도 안 되는 거짓 선동질을 할 목적으로 종종 언급되는 반면, 후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승만의 독도 수호 궁극의 반일 노선의 결과물인 평화선이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렇게 팩트를 모르니까 6· 25 때 이 승만이 일본으로 도망칠 계획을 잡고 있었네 하는 이상한 위사가 나오면 그런 떡밥은 좌우 문맥 따지지도 않고 좌좀들이 옳다구나 잘도 물고 낚이는 것이다. 이 승만은 오히려 이때에도 권총샷 드립을 구사하면서 자신은 한국 땅에서 뼈를 묻겠다는 굳은 의지를 밝혔다.
"우리나라가 전쟁에서 져서 북한군이 내 앞에까지 쳐들어오게 된다면 난 이 권총으로 적을 쏘고 다음에 아내를 쏜 뒤, 마지막 총알로는 자결할 것이다."

5. 구국의 영웅에서 쳐죽일 나치 부역 반역자로 -- 프랑스의 앙리 필리프 페탱 장군(1856-1951)

마지막으로, 우리나라가 아닌 프랑스 얘기를 좀 하고 글을 맺겠다.
저 사람은 보병 장교 출신의 군인이다. 1차 세계 대전 때 베르됭 전투에서 독일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면서 가히 구국의 영웅으로 등극했으며, 종전 후에는 프랑스의 역사상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드문 원수 계급에 추대되었다.

저기 연도가 보이시는지? 저 사람은 1856년생이다. 1차 세계 대전 타이밍 때만 해도 이미 50대 나이가 꺾인 노장이었으니, 저 전쟁을 끝으로 완전히 은퇴만 해 버렸으면 그는 평생 부와 명예를 거머쥐면서 행복한 노후를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처음엔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급박한 시대 정세가 "구관이 명관" 운운하면서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2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또 프랑스가 전쟁에 휘말리자 그는 총리 자리에 올랐는데, 여기서 그는 자기의 영광스러운 과거 커리어를 모조리 말아먹는 실책을 저질렀다. 나치 독일에게 그냥 항복해 버렸고, 그 대가로 '비시 프랑스'라는 괴뢰 정부의 수립을 보장받은 것이다. 그는 강대국인 나치 독일에 저항해 봐야 국민적으로 얻을 게 없으며, 이렇게 정권을 유지하는 게 국민에게 더 이익이고 그리 치욕스러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또한 히틀러가 그렇게까지 인간 악마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오판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모조리 빗나갔다. 나치가 패망하고 전쟁이 끝나자 그는 졸지에 매국노 반역자가 되었다. 고국으로 돌아오자 부하 군인들은 아무도 페탱 장군에게 경례를 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그를 사형시키라는 여론까지 들끓었다. 90세에 육박하는 고령이 된 그는 최종적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며, 마치 나폴레옹처럼 대서양 연안의 섬으로 유배를 당하고 거기서 세상을 떠났다.

이 사람은 뭔가 중국에 조공을 바치던 조선의 사대주의를 추구한 것 같기도 하고, 김 옥균처럼 악의적이지는 않았지만 오판을 저지른 구한말의 친일파 같기도 하다. 리즈 시절 이후에 다른 분야에서 삽질을 하다가 예전 커리어를 다 말아먹었다는 점에서는 심 형래나 홍 명보, 그리고 프리츠 하버(시대를 잘못 타고나고 잘못된 줄을 선 과학자)와도 비슷해 보인다. 일생일대의 패착을 저질러서 쳐죽일 반역자가 된 건 박 헌영과도 비슷하지만, 박 헌영은 리즈 시절의 업적도 별로 없으니 페탱과 같은 급이 아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친일 청산 문제를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 청산 문제와 같은 잣대로 비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마치 성경에서 벧후 3:6-7을 노아의 홍수하고 비교하는 것만큼이나 바른 비교가 아니어 보인다. 겨우 몇 년 적군에게 점령당했던 것하고, 아예 한 세대가 바뀔 정도로 긴 시간을 지배당한 것을 어떻게 똑같이 비교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6· 25 때 북한군 부역자 청산 문제와 비교하는 것이 체급이 더 맞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만 봐도 이전의 독립 운동 경력을 나중의 변절 내지 좌익 공산주의 활동으로 다 말아먹었다던가, 반대로 이전의 친일 경력을 나중의 반공 활동 경력으로 상쇄한 입체적인 인물이 적지 않다. 자기 개인 블로그나 SNS에다가 개인적인 인물 취향과 호불호만을 밝히는 것이야 상관 없겠지만, 남과 논쟁을 하고 남을 설득까지 하려면 공과 과를 따로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야겠다.
다만, 기회주의자는 분명 아닌데 당시 판단력의 한계로 줄을 잘못 서서 평판을 망친 사람이라면 참 안타까운 예가 아닐 수 없다.

Posted by 사무엘

2015/12/20 08:39 2015/12/20 08:39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173

앞의 글에서 살펴봤듯, 북한에서는 자유를 찾아 귀순한 공군 파일럿이 역사적으로 쭉 있어 왔다. 하지만 월북을 한 남한 파일럿은... 있을 리가. -_-;;
물론, 육군에서는 최 덕신 같은 최고위층의 월북 흑역사가 있었고, 1984년에는 사회에서도 이미 문제가 좀 있던(..) 22사단 소속의 조 준희 일병이 동료와 상관을 사살한 후 월북해 버리는 일도 있었으나.. 그래도 남한에서 공군 전투기 파일럿이 미제 F-xx 전투기를 갖다 바치면서 월북한 정신나간 경우는.. 없다.

단, 북한의 공작원에 의해 남한의 항공기가 북으로 납치 당한 일은 먼 과거에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폭탄을 터뜨려서 너 죽고 나 죽는 테러 말고, 납북 말이다.

1. 창랑호 납북 (1958. 2. 16.)

지난번 글에서는 김포 공항의 역사를 얘기하느라 글이 길어졌는데, 이번에는 대한 항공의 전신인  "대한 국민 항공"이라는 회사의 얘기를 좀 많이 하겠다.

저 시절은 김포 공항이 개항한 지 한 달이 채 안 됐다. 또한 나라가 몹시 가난하고 항공사도 가난해서 더글러스 사(훗날 타사와 합병되어 맥도넬 더글러스가 된)의 중소형 프로펠러 여객기인 DC-3 세 대를 굴리며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는 각각의 비행기 기체에도 마치 배처럼 우남호, 만송호, 창랑호라고 이름이 붙어 있었다. 비행기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 항공 시스템의 많은 용어와 관행이 배에서 유래되었다는 걸 감안하면 이건 그리 이상한 모습이 아니다. 그리고 사실은 열차도 다 저렇게 차량별 이름을 따로 썼으니까 말이다.

그때는 경부 고속도로 따윈 없고 도로가 죄다 비포장이니, 자동차로는 차가 아무리 성능이 좋아도 서울에서 부산까지 세월아 네월아 10몇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그나마 가장 빠른 경부선 열차를 타도 해방자호가 9시간이었고, 1955년 광복절에 등장한 통일호 특급열차가 7시간 이랬으니(훗날 1960년, 무궁화호가 6시간 40분으로 단축), 이 당시 교통 사정이 어떠했는지가 이해가 되시겠는가?
비행기는 육상 교통수단보다야 넘사벽급으로 빠르겠지만 당연히 외국인, 정부 고위 관료, 극소수 유학생 같은 사람들밖에 못 탔지, 서민들은 국제선이 아닌 그냥 서울-부산 국내선이라 해도 비싼 가격 때문에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어쨌든.. 저 날 창랑호는 승무원 포함 34명의 승객을 태우고 부산을 출발하여 서울 김포 공항으로 가고 있었다. 하지만 승객 중에 북한 공작원이 타고 있었고, 비행기는 평택 부근의 상공에서 하이재킹을 당했다. 비행기는 기수를 북으로 돌려서 그 당시 북한에서도 지은 지 얼마 안 되었던 평양 순안 공항에 착륙했다.
탑승 전에 짐 검사 같은 건 안 하다시피했는지, 공작원은 반항하는 승객을 둔기로 제압하고 기장을 위협하여 얼마든지 자기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북한은 뻔뻔하게도 창랑호의 승무원과 승객들이 위대한 수령님을 앙망하여 자진 월북했다고 의기양양하게 거짓 발표를 했다. 남한은 이에 맞서 당연히 규탄 성명을 발표했으며 승객들의 송환을 요구했다. 비행기와 함께 이미 북으로 가 버린 공작원들은 어쩔 수 없으니, 승객들의 신원과 주변 인물들을 조회하여 공작원들을 지원한 것으로 의심되는 간첩 몇 명만을 뒤늦게 잡아들여 벌을 줬다.

승객 중에는 미국인이나 독일인 같은 외국인도 적지 않게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다국적 외교 문제로 불거졌다. 압박을 견디다 못해 북한은 자기네 공작원을 제외한 나머지 피랍 승객· 승무원 26명은 3월 6일에 판문점을 통해 전원 돌려보냈다. 북에 있는 동안 공산당 세뇌 교육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던 사람은 좀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증언이 전해진다.

그러나.. 북한은 비행기는 돌려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비행기 3대 중 한 대를 그냥 잃은 대한 국민 항공사는 심각한 경영난에 직면해야 했다. 게다가 사실은 만송호도 1957년 7월 7일에 부산 수영 비행장에 착륙하던 중에 추락해서(2013년 아시아나 214 사고처럼?) 비록 인명 피해는 없지만 기체를 다 날린 상황이었는데 창랑호까지 잃었으니..=_=;;

회사의 창업주인 신 용욱은 자신부터가 일제 강점기 때부터 항공 덕후에 유능한 비행기 조종사였고 이 불모지에서 항공 사업까지 한 비범한 인물이었다. 이 승만이 대통령이 된 뒤에도 대통령 각하보다는 박사라는 호칭을 더 좋아했듯이, 저 사람도 사업가가 된 뒤에도 사장님보다 기장님이라는 호칭을 더 좋아했을 정도.

단, 이 사람은 업종과 행적이 그렇다 보니 과거에 대동아 전쟁을 위한 일본군 항공 수송과 비행기 헌납 같은 빼도 박도 못 할 친일 논란이 있기도 하다. 동갑내기 파일럿인 안 창남과 같은 인생을 살지는 않은 게 아쉽지만, 그래도 한편으론 그 시절에 일제한테 그 정도 협조를 안 하고서야 고자본 전문직인 항공 사업을 조선인이 어떻게 그것도 한반도 본토에서 경영할 수 있었겠나 싶기도 하다.

게다가 해방 후에 그가 비행기에다 붙인 우남· 만송· 창랑이라는 이름들 역시 이 승만, 이 기붕, 장 택상... 당대 정치인들의 호였다. 다소 정치적이고 권력 지향적인 작명이었다. 막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돈이 많이 깨지는 항덕의 꿈을 사업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배후 권력이 무엇이 되건 적절히 잘 이용하고 기름칠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허나 그 당시에 대한민국은 항공업으로 막 재미를 보기에는 근본적으로 너무 국력이 부족하고 서민들이 가난한 나라였다.
각 비행기들은 사장이 사업 밑천 마련을 위해 미국에 로비를 하고 집 팔고 빚 내면서 정말 힘들게 어렵게 구입한 것이었다. 그 가난하던 시절에 비행기를 구입할 정도의 엄청난 외화 유출을 감수하려면 구두쇠 대통령으로부터 승인도 필요했다.
그랬는데 광복 후에는 북한으로 인한 악재, 늘어 가는 적자, 경영난, 회사 빚을 감당치 못하고 사장은 환갑을 갓 넘긴 1961년에 결국 한강 투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대표까지 세상을 뜨자 대한 국민 항공사는 상황이 막장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 나라에 항공사가 없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이걸 국가가 인수하여 국영 기업을 만들었다(1962. 9.). 허나, 이것이 영 실적이 좋지 않아서 한진 그룹 산하로 민영화해 버린 것이 오늘날의 대한 항공이다(since 1968. 11.). 박통이 조 회장에게 "시궁창이 된 이 회사를 임자가 책임지고 좀 살려 보게나" 이렇게 구슬리면서 떠넘겼다고 한다.

그 시절의 옛날 비행기 중 유일하게 우남호만이 내구연한이 경과할 때까지 잘 날다가 만기 퇴역했으며, 요건 인하 대학교 본관 1호관 옆의 잔디밭에 정태보존돼 있다. 항공 사진 지도로도 확인 가능하다. 옆의 인하공전 안에 교육용으로 비치되어 있는 보잉 727하고는 다르므로 혼동하지 말 것!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남호의 모델인 DC-3은 나름 1940년대를 풍미하며 전세계적으로 많이 생산되었던 명품 비행기이다. 그런데 평평한 지면에 정지해 있을 때는 기체의 전방이 위를 향하게 경사가 져 있다. 비행기가 엔진 성능이 지금만치 좋지 못하던 시절에 최대한 양력을 많이 받아서 잘 뜨게 하려고 일부러 저렇게 설계한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비행 중에는 물론 평평한 상태로 움직인다.

그리고 보잉 727은 DC-10 같은 삼발기이고 엔진이 날개 아래가 아니라 동체 뒤에 있다. 보잉 사가 개발한 여객기 중 유일하게 삼발기라고 한다. 당연히 엔진이 있으리라 여겨지는 날개 밑에 엔진이 없다니, 전동차로 치면 팬터그래프가 없는 제3궤조 집전 차량이요, 헬리콥터로 치면 꼬리날개가 없는 동축 반전 로터 같은 변종을 보는 것 같다.

두 비행기 모두 오늘날의 전형적인 비행기들과 비교했을 때 독특한 점이 하나씩은 다 있었다. 우남호는 몰라도 보잉 727 정도 되는 비행기를 분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옮겨 오는 건 보통일이 아니었을 것 같다.
얘는 1991년에 조종사의 부주의로 동체 착륙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수리 불가 비행 불능 판정을 받고 퇴역하여 학교에 전시되는 운명이 되었다. 그래도 삼발기여서 엔진의 위치가 높은 덕분에, 바닥이 쫘악 긁히는 와중에도 엔진이 터지거나 연료가 새어서 화재가 나는 일은 다행히 벌어지지 않았다.

한때는 인하공전 말고도 전라남도 강진의 '성화 대학'도 항공 특성화 전문대를 표방하면서 캠퍼스 안에 보잉 727을 비치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 학교는 몇 년 전에 망하고 폐교했다.

끝으로, 비행기와는 관계 없는 여담이지만,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후엔 북한은 좌초한 자기네 잠수함을 돌려 달라는 개소리를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부는 무장공비들의 시신만 돌려 주고 저 무례한 요구는 당연히 씹었다.

2. 대한 항공 (1969. 12. 11.)

창랑호 납북 사건으로부터 10여 년 뒤, 그리고 한진 그룹 산하의 대한 항공이 출범한 지 1년 남짓 뒤에 북한에 의한 비행기 하이재킹 사건이 또 발생했다. 강릉에서 출발하여 서울 김포 공항으로 가던 대한 항공 여객기인데, 지금 같은 운행편 번호는 모르겠고 비행기 기체가 일제 YS-11이었다는 것만 전해진다.

이번에도 뻔하다. 승객으로 위장해 타고 있던 북한 공작원 내지 간첩이 승무원을 위협하는 바람에 비행기는 원산의 선덕 비행장에 착륙하게 됐다. 북한은 역시 남조선 인민의 자진 입북이라고 선전했으나 그런 거짓말이 통할 리가..
결국 북한은 사건 이후 2개월에 가까운 시간이 지난 이듬해 2월 14일에야 승객 50명 중 39명은 돌려보냈으나 11명(승객 7, 승무원 4)은 여전히 그리하지 않았으며, 그 뒤에도 이들의 생사조차도 알려 주지 않았다. 참고로 1969년은 김 신조 사건, 강릉· 삼척 무장공비 등 북한이 온통 무력 도발을 벌였던 살벌한 1968년의 바로 이듬해이다.

돌아오지 못한 승객은.. 듣자하니 대체로 1년 전의 이 승복처럼 북한에서 투철한 반공 정신을 너무 발휘해서 세뇌 교육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고, 북한 사람들에게 밉보인 나머지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 듯하다. 다만, 전부 싸그리 처형 당하거나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간 것까지는 아니고 지방 어디선가 정착해서 살고 있는 경우도 있으며, 더러는 지난 이산가족 상봉 행사 때 가족이 잠깐 만나기도 했다고 한다.
뭐, 어떤 경우든 6· 25 전쟁으로도 모자라서 하루아침에 멀쩡한 가정을 찢어 놓고 이산가족을 또 만든 북한은 천하의 개쌍놈이 맞다. 이 사건 역시 북한이 비행기를 돌려 줬을 리는 만무하고..

요즘 항공 업계에서는 다음과 같은 관행이 정착해 있다.

  • X선을 동원한 정밀한 짐 검사: 두 말할 나위가 없음. 이런 첨단 기술이 일제 강점기 때부터 존재했다면 굳이 비행기가 아니어도 안 중근, 윤 봉길 등 여러 항일 의사들의 거사들 역시 이뤄질 수 없었을 것이다.
  • 기내에서 절대 금연: 일부 승무원이 간접흡연으로 폐암에 걸린 뒤에야 정착했다. 화재의 위험도 있는데 과거엔 비행기 내에서 액체 연료 라이터까지 반입해서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 수하물과 탑승객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절대로 출발하지 않음: 수하물을 가장한 폭탄 테러를 몇 번 겪은 뒤부터 도입됐다. 마치 사격 훈련 후에 모든 탄피를 반드시 수거해서 개수를 확인하는 것과 비슷한 격의 안전 조치이다.
  • 비행 중에 조종실을 절대로 개방하지 않음: 9· 11 테러를 겪은 뒤. 단, 테러범이 아니라 반대로 파일럿이 혼자 미치거나 맛이 간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외부에서 그를 전혀 제압할 수가 없는지라 최근에(2015. 3. 24.) 저먼윙스 9525편 고의 추락 사고 같은 일도 발생했다.
  • 나이프는 기내식의 스테이크를 써는 플라스틱제조차도 기내에 반입하지 않고 액체 역시 기내 반입을 제한함: 이것도 9· 11 테러를 겪고서 미국이 신경이 바싹 곤두서서 내린 조치이다.

한국은 북한의 테러에 이골이 나 있는 관계로, 비행 중에 조종실을 절대로 개방하지 않는 건 진작부터 시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조치로도 하이잭이 아닌 1987년의 대한 항공 858 폭탄 테러를 막지 못한 건 안타까운 점이다. 승객과 짐이 다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건 이미 그때 다 정착돼 있지 않았나?

북한은 서울 올림픽의 개최를 방해할 목적으로 비행기도 폭파하고 1986년 9월엔 김포 공항에서 외국인을 사주하여 폭탄 테러를 저지르기도 했다. 이번에도 명불허전 천하의 개쌍놈 북괴 인증이다.

본인은 건국 초기에 우리나라의 친일 청산과 민주화를 제일 방해하고 가로막은 원흉도 결국 따지고 보면 북괴라는 지론이 예나 지금이나 전혀 변함이 없다. 걔네들 때문에 결국 보안을 빌미로 국민의 자유를 제약하는 복잡한 법이 필요하고 강한 공권력이 필요하고, 일제에 부역했던 형사와 경찰들에게 또 일자리를 줘야 하게 됐다.
요런 절대악에 대한 배경 설명을 쏙 빼고 필요악이 좀 한계를 지녔고 일부 잘못하고 병크 저지른 것만을 편파적으로 부각시키면서 남을 속이고 역사 왜곡하고 선동질 하는... 입에 들어가는 쌀이 아까운 인간들에게 절대로 속지 말라.

일제 강점기 때는 그나마 우리가 힘이 없어서 나라를 빼앗겼으니 실력을 양성해서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일말의 건전한 구호라도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북한엔 도대체 무슨 선한 것이 있고 우리가 뭘 배울 게 있단 말인가? 그저 걔네들의 교묘한 간첩질과, 종북 세력들의 이적 행위만을 잘 감시하고 잡아내면 될 뿐이다.

우리가 중동에 노동자를 보내서 달러를 벌어 온 동안 쟤들은 위조지폐와 마약으로 외화를 벌었다. 살아 온 게 늘 그런 식이다. 민족? 통일? 꿈 깨라. 김돼지 왕조나 그에 준하는 막장 통치 체제가 살아 있는 한,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쟤들은 비교하는 것조차 수치스러운 악의 무리들이다. 민족이 일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 추구하는 이념과 가치관이 일치하는 것이다.

특히 어떤 경우든지 남한이나 북한이나 하나도 다를 바 없고 똑같다는 말은 내가 정말 극혐한다. 인간이라면 뚫린 입이라고 말을 그 따위로 지껄이지 말라.
우리나라 진보, 중도라고 하는 진영이 종북 빨갱이라는 오명을 만년 벗지 못하는 이유는,
북한이 아주 정상적으로 외교를 하는 국가이고 인민들을 정상적으로 먹여 살리고 있는데도.. 아주 불가피하게 가난하고 못사는 줄로 그쪽 동네를 거짓으로 미화하기 때문이다. (왜 안 도와 주느냐, 왜 대화를 안 하느냐, 왜 안 퍼 주느냐, 쟤들이 막나간다고 우리까지 막나가면 우리도 쟤들하고 똑같게 되는 거다) 법과 규칙을 지키지 않으며 그저 힘에 굴복할 줄밖에 모르는 놈들은 힘으로 제압해 줘야 할 뿐이다.

철도야 국토 분단과 함께 곧장 찢어졌으며, 장단 역 기관차, 김 재현 기관사, 월정리 역 등 안보 주제와 관련해서 할 얘기가 넘쳐난다.
그러나 철도뿐만 아니라 비행기· 항공에다가도 뭔가 색다른 분위기로 이런 현대사와 안보 주제를 연결할 수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5/12/17 08:30 2015/12/17 08:30
, , , ,
Response
No Trackback , 2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172

요즘 북한 주민들이 북한을 탈출하는 전형적인 방법은 일단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서 중국으로 간 후, 거기서 또 국경을 넘어 친북 성향이 아닌 나라로 가서는 거기서 배나 비행기를 타고 남한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관리들을 매수하기 위해 뇌물을 줘야 하기 때문에 자금이 많이 필요하다. 탈북 여대생 이 현서 씨의 TED 강연 같은 걸 들어 보면 정말 처절한 사연을 들을 수 있다.

왜 그렇게 힘들게 빙 돌아서 남한으로 오는가? 두 말할 것도 없이 최단거리 루트인 휴전선 일대는 경계가 너무 삼엄하고 철조망과 지뢰밭도 즐비해서 접근이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인민들의 눈과 귀를 틀어막지 않으면 체제 유지가 안 되기 때문에, 그리고 남한의 입장에서는 자유 왕래를 허용했다간 일부 불순분자들의 이적· 간첩 행위가 만연할 것이기 때문에 남과 북은 이런 서로 다른 이유로 인해 상호 왕래를 금지하고 있다.

반대로, 다른 화해니 평화니 온갖 정치 쇼를 한다 해도, 이런 기본적인 남북 왕래와 서신· 통신 왕래조차 지금까지 이뤄진 게 없으니 옛날 햇볕 정책이니 뭐니 하는 건 들인 돈에 비해 아무 선한 열매가 없으며, 심지어 그 돈이 다 북괴의 핵 개발에 보태졌다고 단정을 지어도 반박이 도저히 안 되는 것이다. 분단의 본질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안목을 갖춰야 한다.

한때는 집단으로 배를 타고 탈북하는 경우도 있었다. 1990년대에 <광호의 일기> 시리즈를 출간하기도 했던 김 만철 씨와 그쪽 집안이 대표적인 예임. 요즘은 북한 당국도 그걸 알기 때문에 어선이 조업을 하는 것도 일일이 다 감시하고, 특히 일가족 전체가 한 배에 타는 것 자체를 허락을 안 해 준다.

근래에는 오히려 최전방에서 근무하던 육군 병사가 DMZ를 성큼성큼 횡단해서 귀순하기도 했다. 노크 귀순 사건도 있었고, 심지어 상관 병사들을 프래깅 한 뒤에 귀순한 경우도 있다. 민간인보다는 차라리 거기서 직접 근무를 하는 군인이 육로 접근이 더 쉬운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공군 전투기 파일럿에게는 육로나 해로보다 더 좋은 선택이 있다. 바로, 자기가 조종하는 비행기로 직접 남한 영공으로 진입해서 탈북하는 것. 어쩌면 이게 제일 화끈하고 쉬운 방법이다.
파일럿까지 됐을 정도이면 북한에서도 최정예 엘리트이며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탈북을 할 필요도 없을 텐데, 그래도 자유가 좋아서 남한을 선택한 것이다.

1. 노 금석

6· 25가 휴전으로 끝난 지 얼마 안 되었던 1953년 9월 21일에 귀순했으니 귀순 공군 파일럿 라인의 거의 1호가 아닌가 싶다(귀순 당시 22세). 뭐, 전쟁 전인 1950년 4월에 이 건수라는 북한 파일럿이 이미 귀순했다고는 하지만, 너무 오래 됐고 기록이나 관련 소식이 부족하다.

노 금석은 그 옛날에 공산주의 거짓 세뇌 교육 내지 소련군이 북한 지역에서 벌인 온갖 행패에 이미 진절머리 환멸을 느꼈다. 그래서 겉으로는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척하지만 기회만 되면 비행기를 이용해 언제든지 북한을 탈출할 생각을 진작부터 했다고 한다.
8월 종파 사건도 벌어지기 전의 워낙 옛날이었으니 그때의 북한은 김 일성에 대한 우상화는 지금보다 덜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쪽으로든 저쪽으로든 북한은 예나 지금이나 생지옥인 건 변함없다.

그는 훈련 작전 중에 대열을 이탈한 뒤, 목숨을 걸고 저공을 비행하면서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이미 점찍어 뒀던 김포 비행장에 스스로 착륙했다.

잠시 역사 얘기를 하자면, 김포 국제공항의 전신인 김포 비행장은 일제가 1938년에 건설해 놓았던 공군 기지로, 처음엔 민간 공항이 아니었다. 그때는 거기가 인서울도 아니었으니 지금으로 치면 수원 비행장 같은 곳일 뿐이었다(물론 일제 강점기 땐 수원 비행장이 없었고.. ㅋ). 1950년대에 민· 군 공용으로 사용하던 인서울 공항은 여의도 공항이었다. 얘는 일제 강점기 초기부터 있었으니 역사가 매우 길다.

그러다가 김포 공항이 1958년 1월 말에 개항해서 민간 공항 기능을 물려받았으며, 김포 공항은 군 기지가 없는 100% 민간 공항으로 바뀌었다. 1960년에 이 승만 대통령이 하야 후에 하와이로 갈 때는 김포 공항을 이용했다. 그리고 1971년에 지금의 성남 서울 공항이라는 공군 기지가 추가로 생기면서 여의도 공항의 군사 기능까지 인계했다.

과거에 부산에서는 비좁은 수영 공항을 대체하기 위해 외곽에 지금의 김해 국제공항이 생겼지만 여전히 군· 민 공용이다. 부산의 인천 공항 격인 '영남권 신공항'도 몇 차례 논의되었지만 결국 경제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논의만으로 끝났다. 그 반면, 서울에서는 여의도 공항의 역할을 김포(민)와 성남 공항(군)이 분산 인계받고, 김포로도 모자라서 인천 공항까지 생겼다.
아무튼 요렇게 대체 공항이 생김으로써 여의도 공항은 간판을 완전히 내렸으며, 활주로 부지는 여의도 광장으로 바뀌었다가 오늘날 여의도 공원이 되었다.

아무튼, 갑자기 적기가 불쑥 나타나서 사뿐히 착륙까지 했으니, 당시 김포 비행장 관계자들은 발칵 뒤집혔다. 미국은 냉전 시절의 적국이던 소련의 위협적인 미그 15 전투기를 어떻게 좀 구해서 분석할 수 없을까 전전긍긍하던 상태였는데, 웬 적군 파일럿이 귀순하면서 최신형 미그 15 현물을 갖다 바친 것이다.

혹시 이 사람을 따라 북한 전투기가 날아오지 않을까 비행장 전체는 최강의 경계령이 떨어졌다. 미그 15기는 곧바로 격납고로 옮겨졌고 파일럿 당사자는 사진 촬영 후 최고로 삼엄한 경비를 받으며 군 당국으로 이송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는 이내 귀순 용사 영웅으로 최고의 예우를 받았으며 무려 10만 달러(60년 전 물가로!)에 달하는 포상금을 받았다. 이제 평생 일 안 해도 먹고 사는 데 지장 없을 듯.

그는 굳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대한민국에 눌러앉을 필요도 없이, 그 밑천으로 곧장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냉전 초기였던 그 당시에, 적국에서 귀순한 전투기 조종사는 미국의 입장에서도 "언제든지 웰컴"인 최고급 인재였다. 그는 거기서 영어를 배우고 미 공군, 보잉, 록히드, 엠브리-리들 항공 대학교 같은 걸출한 기관을 드나들면서 관련 고위직을 역임했으며, 은퇴 후 2015년 현재에도 생존하여 미국에서 평안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1953년의 귀순은 정말 그의 인생을 바꾼 현명한 결단이었다.

2. 정 낙현

이 승만 정권이 무너진 지 얼마 안 되었던 1960년 8월 3일, 이 사람도 원산에서 미그 15를 몰고 출격했다가 동해안의 속초 비행장으로 단독 착륙 후 귀순했다. 그 당시 파일럿의 나이는 24세.
그 뒤 남한에서 별 문제 없이 정착하고, 공군 교관 등 고위직을 역임하다가 대령으로 잘 예편했다고 나온다. 귀순 파일럿 출신 대령 1호이긴 한데, 그 외에 다른 특이 사항은 보이지 않는다. 인터넷 검색으로도 196, 70년대의 영상 기록관 자료나 옛날 신문 기사들만 나오지 최근 근황은 알 수 없다.

1970년에는 박 순국이라는 북한 공군 파일럿이 미그 15를 몰고 비행하다가 남한 영공에 들어왔고, 이내 남한 전투기들에 둘러싸여 속초 비행장에 불시착했다. 이 사람은 귀순 의사가 없었고 처음에는 "실수로 남조선에 들어왔을 뿐이다. 나를 어서 북으로 송환해 달라"라고 거듭 주장했으나, 한국· 미국의 정보 기관이 선배격인 정 낙현까지 동원해서 끈질기게 회유를 한 끝에 최소한 겉보기로는 전향했다고 한다.
다만 박 순국은 남한에서 과음을 일삼다가 간이 나빠져서 1976년에 사망했다. 이 점에서는 바로 다음에 소개할 이 웅평과 비슷한 처지가 됐다.

3. 이 웅평

본인이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았던 1983년 2월 25일엔 남한에서는 팀 스피릿 훈련이 진행 중이었으며, 여기에 대응하여 북한도 전투기를 출격시킨 상태였다. 이 사람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미그 19를 조종하던 채로 탈북을 감행했다. 남한의 공군에게도 이내 발각되었지만 그는 날개를 흔들어서 귀순 의사를 밝혔으며, 남한 전투기들의 엄호를 받으면서 수원 비행장에 착륙했다.

훈련 중에 진짜로 적기가 출현하다 보니 그 당시엔 우리나라도 혼비백산해서 민방위 관계자가 서울· 인천· 경기 지역에 경계 경보를 때리기도 했다. 그래서 이 사람의 귀순이 대외적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그는 북한에서 전투기 파일럿으로 모자랄 것 없이 살던 상류층이었지만, 남조선의 라면 봉지 하나만 보고도 감격해서 탈북을 결심했다고 전해진다. "라면이 뭐예요? 먹는 거예요?"는 둘째치고라도, 세상에 "판매나 유통 과정에서 훼손· 변질된 제품은 판매점이나 본사 대리점에서 교환해 드립니다".. 이런 민주적이고 당연한 절차조차도 북한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는 귀순 후 역시 남한에 잘 정착했으며, 남한 정착 12년 만인 1995년에 정 낙현에 이어 대령으로 진급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늘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살았으며, 무엇보다도 혼자 불쑥 탈북한 자기 때문에 북한에 남겨진 가족들이 해코지를 많이 당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나중에 다른 탈북자의 증언을 들어 보니 그의 예상은 불행히도 정확했다. 다들 수용소로 끌려 갔댄다. 가장이 전투기라는 국가 자산까지 무단 유출하면서 탈북을 감행한 괘씸죄에 대한 연좌제였다.

그는 가족 걱정을 술로 달래다가 간의 건강이 매우 나빠졌다. 1990년대 말부터 간경화로 투병하다가 2002년 5월에 사망했다. 그 전에 대구 성서 초등학교의 개구리 소년 중 하나인 김 종식 군의 아버지 김 철규 씨도 정확히 같은 이유 때문에 2001년 10월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참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4. 이 철수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 벌어지기 4개월 남짓 전이던 1996년 5월 23일에 귀순한 분이며, 이분은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난 2015년 현재까지 최후의 귀순 공군 파일럿이다. 평안남도에서 미그 19를 몰고 출격한 점(아직도 구형 미그 19를!), 저공 고속 비행으로 북한을 탈출한 점, 우리나라 공군의 엄호를 받으며 수원 비행장에 착륙한 점, 당사자가 훗날 대령까지(2010년에) 진급한 점은 13년 전 이 웅평의 판박이이다.

단, 이 사람이 귀순할 때는 과거의 이 웅평 때와는 달리, 서울과 인천에 민방위 경보가 울리지 않아서 평시 경계가 소홀했다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또한 이 웅평과는 달리 이 사람은 현재까지도 건강하게 현역 복무를 잘 하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탈북자 출신으로는 최초로 장성 자리까지 내다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강릉 무장공비 사건 때 유일하게 생포된 공작원은 이름이 이 광수이다. 그는 대한민국으로 완전히 전향한 후 해군 군무원 겸 교관, 안보 강사 등으로 재직 중이다. 천안함 사건에 대해서도 "내가 어뢰를 오래 다뤄 봤고 북한 관행도 잘 아는데(어뢰에다 숫자를 표기하는 방식)... 저건 확실하게 북한 소행으로 보인다. 2009년 11월에 벌어졌던 대청해전에 대한 보복이다."라고 소신 발언을 하기도 했다.

Posted by 사무엘

2015/12/14 08:37 2015/12/14 08:37
, , , , ,
Response
No Trackback , 4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171

1.
하임 바이츠만. (Chaim Weizmann; 1874-1952)
우리나라의 초대 대통령이 문과 계열의 만렙 박사였다면, 현대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은...;; 천재 과학자였다.
그리고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이 미국을 끌어들여서 나라를 세웠다면, 저 사람은 영국을 끌어들여서 자기네 땅을 얻어 냈다. 서로 나이 차이도(1874 & 1875년생) 거의 안 나는 동시대 사람이다. 그러고 보니 윈스턴 처칠과도 동갑임.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임 바이츠만은 1차 세계 대전 당시에 옥수수로부터 아세톤을 저렴하게 양산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게 전시 군수 물자인 탄약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기술이었던지라 그는 이것 덕분에 완전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됐다.
영국 정부에서는 그의 노고를 치하하며 그에게 훈장을 주려 했다. 그때 그 사람이 말했다. "저는 돈과 명예는 필요 없습니다. 단지 우리 민족을 약속된 땅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가서 살게 해 주세요." 성경에서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에게 자기 동족을 구해 달라고 간청하는 장면이 떠오르지 않는가?

"우리 대영제국의 식민지 중엔 거기보다 더 넓고 좋은 땅도 얼마든지 있는데. 가령, 아프리카에 우간다 영토 일대는 어때?"라는 제안에도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ㄴㄴ. 런던이 지금 같은 영국 수도가 되기도 전부터 예루살렘은 원래 우리 땅이었습니다. 부디 거기를 돌려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영국 내부에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믿는 크리스천들이 물론 있었으며, 이를 토대로 1차 세계 대전의 말에 1917년에 밸푸어 선언이 이뤄졌다. 우리나라 역사로 치면 2차 세계 대전 말기에 발효된 카이로 선언 및 포츠담 선언과 비슷하다. 일제로부터 조선의 독립이 그때 명시됐으니 말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들의 귀환이 곧장 이뤄진 건 아니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 뒤, 유대인들이 몇백만 명씩이나 나치에 의해 처참하게 학살당하고 세계 질서가 확 바뀐 뒤에야 이스라엘이 세워질 수 있었다. 사람에겐 기본적으로 귀차니즘이 있는지라 박해를 안 받으면 잘 안 움직이니까.;;

어쨌거나 초대 대통령이 군인이나 외교관 같은 다른 직업이 아니라 과학자라니 참 멋있고 부럽다(우리나라는 박 근혜 대통령이 일단 전자공학과 출신이긴 하다만..). 바이츠만은 자기 실력을 민족의 독립과 건국을 위해 사용한 위인 애국자였다.

2.
이스라엘의 국가인 Hatikvah(희망)은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우연의 일치인지 <밝은 빛을 따라서 앞만 향해 나가자>라는 희망적인(?) 내용의 찬송가 멜로디로 쓰인다. 하지만 쟤네들 국가 가사는... 나 같은 비유대인이 보기에도 인간적인 감정상 정말 구슬프고 찡하고, 나라 없는 백성의 한이 레알 서려 있는 게 느껴진다. 1절 가사를 대충 드라마틱하게 의역하면 이런 내용이다.

“내 심장은 동방을 향해, 시온을 향해 오늘도 꿈틀댄다.
우리는 결코 희망을 잃지 않으리.
약속의 땅에서 자유로운 내 조국을 세우는 날을 염원한 지가 어언 2천 년.
그곳은 시온 땅의 예루살렘이어라.”


이 글에서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을 뺏었네 나쁜 깡패네 하는 얘기는 논하지 않을 것이므로 이 점을 양해 바란다. 원래 그런 분쟁이 얼마든지 안 생길 수 있었고 이스라엘은 합법적으로 땅을 받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보상을 하는 것도 다 합의가 돼 있었는데 영국이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오해가 생기면서 내력이 복잡하게 배배 꼬인 게 있다. 그런 것까지 다 설명하기에는 시간과 지면이 부족하다.

아 그리고, 이스라엘도 사람 사는 곳이고, 모든 이스라엘 국민들이 자기네 국가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저런 노래가 너무 국뽕스럽다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인 중에도 애국가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일본인 중에도 기미가요가 너무 존재감 없다고 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3.
하나님이 보우하셨는지 유대인들이 참 똑똑하긴 했다. 바이츠만 말고 프리츠 하버(1868-1934)도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천재 과학자이다. 그는 공기 중의 질소로부터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기술을 개발하여 인공 질소 비료를 만들어 냈다. 햇볕을 이용해 사람을 죽이는 핵을 만드는 게 아니라 공기로부터 사람을 살리는 빵을 만드는 급의 엄청난 기적을 이뤘다. 기아 해소와 인류 복지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그는 응당 노벨 상도 받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허나 그는 바이츠만과는 달리 줄을 치명적으로 잘못 섰다. 그는 독실한 유대교 신자도, 시온주의자도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영국이 아닌 독일에 충성했다. 그것도 아주 열정적으로. 그래서 조국을 위해 사람을 살리는 발명만 한 게 아니라 독가스도 발명했다. 1차 세계 대전 때 전장에 처음으로 살포된 염소 가스부터 시작해, 유대인 아우슈비츠 수용소 시절의 치클론 B 독가스도 다 이 사람 혼자 또는 공동 연구로 만들어졌다.

그럼 그가 그 덕분에 독일로부터라도 인정받고 떵떵거리며 살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이용 가치는 있지만 굉장히 애매한 왕따 포지션이 되어서 타지에서 무척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다. 독일로부터는 나중에 나치 당이 집권하면서 "저런 더러운 생물(=유대인)을 고위 과학자 자리에 앉혀 둘 순 없다"라고 문전박대를 당했고, 영국 등 다른 나라로부터는 "저 자식은 머리는 비상하지만 정신이 완전 맛이 간 싸이코야."라고 단단히 찍혔다.

그래도 다행히 2차 세계 대전 이전에 일찍(1934년) 죽은 덕분에 히틀러와 엮이지는 않았으며, 홀로코스트의 희생자가 되거나 반대로 나치 출신의 전범 매드 사이언티스트로 전락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관여한 발명품이 가까운 미래에 심지어 자기 동족을 학살하는 용도로까지 쓰인 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역설이다. 그는 사람을 살린 엄청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위인전에는 도저히 오를 수 없게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과학자의 연구 윤리를 논할 때 빠짐없이 거론되는 씁쓸한 사례가 되었다.

4.
이스라엘 건국 얘기가 나왔으니 우리나라의 건국도 다시 좀 복습하고 글을 맺겠다.
1948년 5월 10일에 우리나라에서 남쪽만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었다.
그리고 14일에 이스라엘이 건국됐고, 같은 날 낮에 한반도에서는 북으로부터 대남 송전이 끊겼다.
그 달 말일인 31일엔 그 국회의원들을 바탕으로 제헌국회가 개최됐고, 당시 의장이던 이 승만의 요청으로 이 윤영 목사의 감사 기도가 이때 행해졌다.
이어 그 해 7월 17일엔 잘 알다시피 헌법이 제정되었고, 8월 15일 광복절에 맞춰서 약 3년간의 미군정이 끝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전인 1948년 3월에 이북에서는 이미 자기만의 국기와 국가도 다 정하고 분단은 기정사실이 된 상태로 북조선로동당 제2차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악의 무리들은 서로 동무 동무 하면서 비판과 삿대질이나 일삼으면서 어떻게 백성들의 재산과 자유를 빼앗고 몽땅 착취하고, 서로 감시하고 통제하고 믿질 못하는 생지옥을 만들까, 어떻게 남조선까지 몽땅 집어 삼킬까 흉계를 꾸미고 있었다.

그 반면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하나님께서 오랜 시일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고 정의의 칼을 빼셔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고 ...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우리에게 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것은 개인의 종교관을 떠나서 매우 다행이고 자랑스럽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Posted by 사무엘

2015/09/05 08:38 2015/09/05 08:38
, , , , ,
Response
No Trackback , 4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135

한국과 일본은 가까운 이웃 나라이지만 기독교계 종교에 대한 정서는 거의 지구와 금성의 차이만큼이나 극과 극이다. 물론 일본뿐만이 아니라 북한 내지 중국하고 비교해 봐도 극과 극에 가까운 건 마찬가지이지만.

난 솔직히 말해 일본의 보편적인 종교관을 잘 모르겠다. 완전히 불교도 아니고 유교, 도교도 아니고 전적으로 샤머니즘이라고 봐야 하는 건지? 신사는 무엇이고 덴노(일왕/천황)는 무엇이고 이들이 정치 종교 통합적인 존재인지? 어쨌든 기독교 배경이 절대로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한국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해도 딱히 단군을 숭배한다거나 하지는 않는데?

일본은 서양 문물을 잘 받아들이고 근대화를 잘해서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으며, 반대로 다른 식민지를 거느리고 침략 전쟁을 일으키기까지 할 수 있었다.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흔히 '기독교'라고 부르는 종교 교리도 당연히 전파되었고 선교사들도 들어왔다. 단, 엄밀히 말하면 기독교 계열은 아니고 스페인의 예수회가 주축이 된 천주교 중심이었다.

16~17세기 사이는 조선에서는 임진왜란이 벌어져서 나라가 작살이 나 있었고, 서양의 영국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 제임스 1세, 찰스 1세의 순으로 왕이 바뀌고 있었다. 신대륙에서는 버지니아 주 제임스타운, 포카혼타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스페인에서는 종교 개혁을 저지하고 유럽을 다시 가톨릭화하기 위해 예수회가 만들어졌는데... 이와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 천주교가 전래되었다.

조선도 한때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없지는 않았다. 황 사영 백서 사건 같은 병크 때문에 스스로 매를 번 것도 있었고. 하지만 그 기간이나 규모는 일본의 박해에 비할 바는 못 됐다.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부터가 극렬 "안티개독"이었으며, 정말 중세 종교 재판을 뺨치는 가학· 변태적인 악랄한 고문과 형벌로 신자들을 괴롭히고 죽이고 박멸했다. 천주교고 기독교고 그딴 건 그 양반이 알 바 아니었을 테고.

다른 때도 아니고 서양에서는 킹 제임스 성경이 나오는 동안 동양에서 저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천주교 기독교를 떠나서 일단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 시기에 있었던 일들은 일본의 B급 새디스트 사극 영화의 좋은 소재가 되어 왔다. <쇼군의 새디즘>처럼.
사람을 십자가에다 묶어 놓고 산 채로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기, 미꾸라지가 가득한 어항에다 사람을 옷 벗겨서 집어넣기, 썰물 때 바다 갯벌에다가 십자가 기둥을 꽂고 사람을 거꾸로 묶어 놓기(그 상태로 나중에 밀물이 되면..;;) 이런 건 중세 서양에서는 못 본 장면 같다. -_-;;

사용자 삽입 이미지

또한, 육체적으로 끔찍한 형벌이나 고문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런 것도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당시의 기독교인을 색출, 고문, 박해하는 형태를 여러 가지로 연구하면서 철두철미하게 기독교 박해를 자행했다. 십자가나 예수나 마리아 상을 새긴 동판이나 목판 위를 밟게 함으로써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후미에 제도는, 1629년 나가사키에서 시작되어 전국에 걸쳐 오랜 기간 사용되었다."


"어디에 절을 해라", "입으로 믿음을 부인해라", 아니 단순무식하게 "김 일성 개XX 해 봐라" 식의 더 간단한 판별법도 있었을 텐데, 저건 그야말로 성상, 형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천주교 스타일에 최적화된 판별법이라 여겨진다. 나 같았으면 저런 건 걸릴 게 없었을 것이다. 마치 주의 만찬이 끝나고 남은 빵과 포도 주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누가 몽땅 집어먹거나 여느 잔반을 처리하듯이 임의 처분해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소설 <바비도>에 나오는 것처럼, 성찬식에 대한 견해 하나만으로도 서양에서는 한때 순교 사유였다. 기독교인이 천주교인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뜻이다.)

북한은 민주화에 실패하고 8월 종파 사건을 계기로 완전 김씨 일가의 철권독재 생지옥으로 전락했다. 종교도 주체사상 외에는 당연히 전면 말살. 스페인은 종교 개혁이 실패하고 다시 가톨릭 국가로 돌아가서 20세기까지만 해도 누가 '개신교인'(천주교의 입장에서 기독교의 호칭)이 되면 잡혀 가는 나라가 됐다.

그것처럼 일본도 이 박해를 못 이기고 천주교/기독교를 막론하고 양놈(이 또한 엄밀히 말하면 양놈이 아니라 유대계=_=) 종교는 거의 씨가 말라 버렸으며, 그 상태가 오늘날에 이르렀다. 개신교 계열 교파가 나중에 안 들어온 건 아니지만, 그래도 1억이 넘는 일본 인구 중에 그나마 명목상 교회 다니고 예수 믿는다는 사람은 몇십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배경이 있는 일본은 오늘날까지도 이슬람도, 공산주의도 아니고 나름 자유 진영의 강대국 선진국인 것치고는 상당히 이례적인 기독교 선교의 불모지로 여겨진다. 솔까말 기복신앙에 대한 반례이기도 하다. 뭐, 국가가 부유한 것만치 국민들이 다 잘사는 건 아니더라도 말이다. 쟤들이 과거에 한국의 크리스천들을 박해하긴 했지만 역사 전체를 통틀어 봤을 때 아예 자국민에 대한 천주/기독교 박해는 그 이상이었다는 점도 고려할 사항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인이 일본 선교를 가는 건 마치 요나가 니느웨로 설교하러 가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앗시리아가 훗날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게 뻔히 보이니, 요나는 니느웨로 가기 싫어서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생쑈를 했던가? 하지만 인제 와서 일본에서 니느웨 같은 대각성 부흥이 과연 일어나기라도 할지는 좀 회의적이다. 성경적으로 민족주의를 적용할 문맥이 있고 그게 별 의미나 영양가가 없는 문맥도 있는 법이다.

한국은 역사가 워낙 스펙타클하다 보니, 조선 정부에 의한 박해보다는 일제 말기에 일제로부터의 박해, 그리고 해방 후에 공산주의자에 의한 기독교 박해가 더 부각되는 편이다. 그리고 아시아의 여느 나라들과는 달리, 기독교회가 이 정도로 양적 성장을 이루는 이례적인 선례를 세계에 남겼다. 신자라면 감사할 일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5/08/21 08:31 2015/08/21 08:31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129

실종과 사망의 차이

1.
1993년 가을에 서해훼리(페리) 호 침몰 사고 때의 일이다. 탑승자들을 구조하고 수색하는데 웬일인지 이 배의 최고 책임자인 선장이 행방이 묘연해 보였다. 그런 와중에 일각에서는 "선장이 혼자 살아서 배를 탈출하여 몰래 튀는 게 목격됐다"라는 카더라 루머가 나돌았고, 언론은 이것을 확인도 안 하고 냅다 물어서 동네방네에 소문을 냈다.
이에 경찰조차 별 의심 없이 이 말을 믿게 되었으며 선장을 대문짝만 하게 공개 수배하고 가족들을 압박하여 선장더러 자수를 권유하게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러나 결말은? 선장은 수색 닷새 만에 기관장과 함께 배 안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서해훼리호의 선장은 세월호의 선장 같은 급의 인간말종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 예전의 선장 생존 보도는 국내 언론 역사에 길이 남을 오보 흑역사로 전락했다. 그리고 그 기자들은 선장의 유가족을 찾아와서 싹싹 빌었다. 범죄자를 숨겨 주고 있다는 누명을 이제야 벗은 유가족들은 "당신들이 선장이 살아 있다고 말했으니 이제 그 선장을 살려내 보시오"라고 그들을 꾸짖었다.

2.
1996년 가을,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때에는 싸리비를 만들기 위해 싸리나무를 벌목하러 혼자 나갔던 표 종욱 일병이 덜컥 실종됐다. 군에서는 제대로 수색도 안 하고 이걸 전시 무단 탈영으로 단정짓고 탈영병을 찾는다는 방송을 전국에 내보냈다. 그의 집엔 헌병대 사람들이 와서 표 일병 내놓으라고 마치 사채업자가 빚독촉 하듯이 수시로 온갖 민폐를 끼쳤다.

그러나 이 역시 결말은? 그는 무장공비에게 살해당했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이건 부끄럽게도 군 당국이 스스로 적극적으로 수색해서 찾은 게 아니라, 사살한 무장공비에게서 노획한 '일기'에서 의심스러운 점을 발견하여 그걸 토대로 추적한 덕분에 찾은 것이었다. 그 무장공비는 위장을 위해 표 일병에게서 국군 군복을 빼앗은 상태였으며, 그 대신 표 일병은 시신 발견 당시 속옷 바람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헌병대 관계자들은 표 일병의 유가족 앞에서 그야말로 석고대죄하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생사도 알 수 없는 치욕스러운 탈영병과, 현충원에 묻히는 영예로운 전사자는 그야말로 한 끗발 차이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전시 탈영은 평시 탈영보다 처벌이 훨씬 더 무겁다!)

무장공비는 그를 결박하고 목을 졸라서 살해했다. 총은 시끄러운 데다 걔네들 입장에선 안 그래도 총알 한 알이 극도로 아까운 지경일 텐데 당연히 총을 썼을 리는 없다.
또한, 생지옥 북한에서 태어나서 거기서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남파 간첩이나 무장공비까지 됐을 사람이라면 목표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간성이라고는 그야말로 완전히 제거된 인간 흉기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잠수함을 좌초시키고 비밀 작전에 실패했다고 동지들끼리도 무자비하게 처형을 했는데, 하물며 자신을 발견해 버린 민간인도 아니고 적군을 살려 둘 이유는 전혀 없었을 것이다. 생포해서 인질극 협상을 벌일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기록을 찾아 보니 표 일병은 군 복무 당시 계급이 이미 일병이었다.
“이제 일병을 달고 군생활에도 적응이 되었지만 원인모를 한숨과 동경이 계속되고 있다. 언제까지 이 신세타령을 해야 하는지 내자신도 한심하다.” (고인의 일기 중)

그럼 전사자니까 이제 공식 매체에서는 '표 상병'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는가? 제설을 하다가 사고로 죽어도 작전 중 순직이기 때문에 1계급 특진 추서인데.
탈영 중으로 잘못 알려졌을 때의 계급이 너무 깊게 인식돼 버려서 그런 것 같다. 이런 점에서 거짓 선동이라든가 오보의 해악은 더욱 큰 셈이다. 한번 생긴 사람의 편견은 쉽게 고쳐지지 않으니까.

* 그러게 사람이 없어진 듯이 보이면 덮어놓고 악한 추측부터 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하긴 출애굽기 32장의 금송아지 사건도 따지고 보면 그런 심성을 바탕으로 벌어졌다. 이때 모세는 시신이 발견된 게 아니라 멀쩡히 살아 돌아오기도 했고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5/06/24 08:30 2015/06/24 08:30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108

오늘은 원래는 있었는데 국토 분단으로 인해 기능이 상실되고, 게다가 6· 25 때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터만 남은 비운의 철도역을 심층 탐방해 보겠다. 오오오~ 흥미진진 두근두근~!
얘들은 황량한 부지만 달랑 있고 건물 실체가 없는 관계로, 주소도 도로명 주소 같은 게 없이 여전히 지번 기반이다. 이름도 '역'이 아니라 그냥 '역지'이다. 황룡사가 아니라 황룡사지인 것처럼 말이다.

1. 경의선 장단 역

장단 역은 원래는 1906년 4월에 경의선이 개통했던 당시부터 영업을 시작한 창립 멤버이다. 그때는 같은 창립 멤버인 문산 역의 바로 다음이 장단이었다. 지금 문산 이북에 있는 운천, 임진강, 도라산 같은 역은 먼 훗날 이뤄진 남북 경의선 철도 연결 작업의 산물이다. (더구나 운천은 그저 임시승강장일 뿐이고.)

장단 역이 유명해진 건 잘 알다시피 인근 선로에 반세기 동안 버려져 있던 녹슨 증기 기관차 때문이다.
1950년 12월 31일, 고 한 준기 기관사는 평양 방면으로 화물 열차를 운전하고 있었는데, 그 때는 중공군의 인해 전술로 인해 국군과 UN군은 후퇴 중이었다(서울을 북한군에게 도로 빼앗긴 1· 4 후퇴의 불과 닷새 전이었다). 그래서 이 열차는 더는 북상할 수가 없게 되었으며, 장단 역에는 전차대 같은 게 없어서 진행 중인 열차의 방향을 남쪽으로 돌릴 수도 없었다.

결국 이 열차는 북한군에게 노획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 차라리 동작 불능 상태로 파괴 대상이 되었다. 이에 명령을 받은 미군 병사들은 소총을 난사하여 기관차를 벌집으로 만들고 또 탈선까지 시켰다. 한씨는 다른 하행 열차를 갈아타고 후퇴했다. 김 재현 기관사 때처럼 열차가 무슨 북한군의 공격을 받아서 벌집이 된 건 아니다.

그렇게 긴급 상황에서 버려진 증기 기관차 화통은 2005년에 임진각으로 옮겨졌고, 녹을 벗겨내는 대공사를 거쳐서 2009년부터 임진각에 전시되고 있다. 하지만 그 난리 중에 장단 역 자체는 완전히 파괴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위치 자체도 38선, 지금의 군사 분계선과도 너무 가까운지라 복원이나 관광지 조성 같은 건 요원하다. 민통선도 아닌 완전 비무장지대에 있으니 말이다.

장단역지의 공식 주소는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동장리 198”이다. 지도 사이트에서 주소를 입력하면 위치가 정확하게 나온다. 도라산리도 아니고 동장리이기 때문에 도라산 역에서 1km가 넘게 북쪽으로 멀찌기 떨어져 있고, 군사 분계선이 몇백 m 코앞이다.
이 일대의 항공 사진을 보면 4차선 도로의 옆으로 경의선 단선 철길이 지나고, 주변은 온통 숲이다.
예전에 기관차가 임진각으로 옮겨지기 전에 시뻘겋게 녹슨 채 내팽개쳐져 있던 시절의 사진을 보면.. 여기 어딘가의 경의선 선로 옆에 나란히 있었던 것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남북 분단 전의 리즈 시절엔 장단 역은 제법 컸다고 그러는데 지금 저 지형을 봐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또한 '죽음의 다리'라고 불리는 교량이 장단 역 남단 300m쯤에 지금도 있다고 하는데 항공 사진으로는 짐작을 못 하겠다.

2. 경원선 철원 역 외

철원은 남북 분단 이전에는 지금의 춘천에 맞먹는 큰 도시였으며, 철원 역도 무려 1912년에 개통한 경원선의 창립 멤버역으로서 대단히 중요한 교통 요지였다. 게다가 금강산선의 분기역이기까지 했으니 역의 덩치도 당시의 경성 역만큼이나 컸다고 한다.
철원 역 일대는 분단 직후에는 북한 치하에 있다가 6· 25가 발발하면서 건물과 시설이 모조리 초토화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대한민국이 수복한 후, 다행히 터와 최소한의 흔적은 건졌다. 위치도 DMZ는 아닌 단순 민통선 내부인지라 개인이 그럭저럭 찾아가서 답사하는 것도 가능하다.

안보 패키지 관광을 이용해서 이 지역을 방문하면, 철원 역은 아무래도 건물 실체가 짝퉁 형태로라도 남아 있는 월정리 역보다는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는다. 관광버스가 정차하지도 않고 가이드가 그냥 차창 밖으로 “여기가 철원 역 부지입니다”라고 설명하는 걸로 넘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를 직접 땅밟기를 하고 살펴보고 싶으면 평일에 개인이 자가용을 끌고 민통선 안으로 들어가 봐야 한다. 물론 사전에 군부대에 연락해서 허가를 받고서 말이다. 다른 방문자의 경험담을 보자면, 원래부터 그 지대의 출입증을 갖고 있는 지역 주민으로부터 초대를 받고 같이 들어가는 게 아닌 경우(외지인의 단독 방문), 감시하는 군인이 동승· 동행을 한다고 그런다.

"사람이 가득하던 도시가 어찌 외로이 앉았는가! ..." (애 1:1)
성경의 이 애가(lamentation) 구절이 철원역지를 보면 저절로 읊어질 것 같다.
경원선은 경의선과는 달리 남북이 연결되지 않았다. 그러니 지도를 펴 놓고 옛 철길 궤적을 한번 추적해 보도록 하자.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그림 한 장으로 모든 게 설명된다.
좌측 최하단의 '묘장로' 인근에 있는 붉은 점은 바로 지금의 경원선 종점인 백마고지 역이다.
그리고 근처의 오른쪽 위에 있는 점은 옛 철원 역으로, 지금은 민통선 안에 빈 터만 남아 있다.
더 위로 들판과 산지의 경계에 있는 붉은 점은 월정리 역이다.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남한 쪽의 논밭 들판들은 거의 다 민통선 내부라고 생각하면 정확하다.
단, 월정리 역은 원래는 민통선 지대를 넘어 더 북쪽의 DMZ 내부에까지 걸쳐 있었으나 좀 덜 위험한 곳으로 살짝 옮겨져서 복원된 것이다.
그리고 철원 역도 지금은 국도 3호선에 딱 붙은 지점에 복원되었지만 원래 있던 곳은 그보다는 좀 더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북한으로 넘어가서 홀로 덩그러니 남아 있는 붉은 점이 바로 가곡 역으로 추정되는 지점이다. 북한의 월정리 역에 해당하는 버려진 역이다! 선로는 없고 역사 흔적만 있다.
다음으로 '평강군'에 걸쳐 있는 점은 평강 역으로, 오늘날 경원선의 북한 구간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북한에서는 자기 구간을 강원선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 쪽에 있는 푸른 점은 철원에서 금강산선의 궤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각각 한다리, 대위교, 그리고 전선 휴게소 인근에 있는 교각이다. 위의 자료가 정확하다면, 철원 역에서 분기한 금강산선은 남쪽으로 좀 내려간 뒤에 동쪽을 향해 간다는 걸 알 수 있다.

끝으로, 군사 분계선 인근의 분홍색 점은 제2 땅굴 입구가 있는 지점인데 참고로 첨가해 넣었다.

위의 점들이 다 철길로 연결되는 날이 온다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할까?
본인은 경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황룡사지보다도 철원역지, 장단역지 같은 이름을 들었을 때 더욱 가슴이 뭉클하고 뭔가 울컥함을 느낀다. 분단된 철도의 아픔은 곧 나의 아픔이기에.

미국의 로스엔젤레스는 잘 알다시피 '천사의 도시'라는 뜻이고,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이다. 그런데 평화와는 별 관계가 없는 짓을 하는 북한 같은 또라이 반국가단체가 '평강, 평양' 등 '평'자가 들어간 지명을 갖고 있다는 건 참 역설적인 것 같다. 북한은 자기들의 악한 체제의 유지를 위해 주민들에게 절대로 자유를 주지 않으며 눈과 귀를 강제로 틀어막고 지내고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다.

한편, 경의· 경원 라인과는 달리, 동해중부선 쪽은 일제가 한창 공사를 하다가 패망해 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그쪽에는 영업을 하다가 우여곡절을 겪고 파괴되고 없어진 역 같은 건 없다.

Posted by 사무엘

2014/11/16 08:41 2014/11/16 08:41
, , ,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029

« Previous : 1 :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 16 : Next »

블로그 이미지

그런즉 이제 애호박, 단호박, 늙은호박 이 셋은 항상 있으나, 그 중에 제일은 늙은호박이니라.

- 사무엘

Archives

Authors

  1. 사무엘

Calendar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Site Stats

Total hits:
2665278
Today:
516
Yesterday:
1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