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A is better than B.” (A는 B보다 더 낫다)라는 영어 평서문에 담긴 정보를 생각해 보자.
여기서 A를 묻는 wh 질문을 만든다면 “Who is better than B?” (누가 B보다 낫다고?)가 될 것이다. 이건 쉬운 문제다.
그럼 B를 묻는 질문은 뭐가 될까?
Who is A better than? (A가 누구보다 낫다고?)
Than who is A better?
내 문법 시스템으로는 위와 같은 두 문장이 만들어지긴 한데... 평생 저런 형태의 문장을 만들 일이 없다가 만들고 보니 정말 괜찮은가 모르겠다.
인간의 언어가 경이로운 점이 뭐냐 하면 화자는 평생 접한 적이 없는 새로운 문장을 그것도 안긴 문장· 이어진 문장 같은 복잡한 형태로 자유자재로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2.
그리고 than 다음에는 문법 원칙상으로는 목적격이 아니라 주격이 온다. better than me가 아니라 일단은 better than I가 맞다는 것. 하지만 It's me/I만큼이나 이건 원어민들 사이에서도 구분이 굉장히 문란해져 있다.
게다가 who와 whom의 구분도 이와 같은 처지이다. 3인칭 단수는 him/her을 쓸 곳에다가 he/she를 갖다붙이지는 않을 텐데 왜 그러는 걸까?
테이큰에서도 리암 니슨이 유괴범을 고문하면서 "You sold my daughter? You sold her? Huh? To who(m)?"라고 물을 때 나는 당연히 whom이라고 말했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다시 들어 보니 너무나 분명하게 그냥 who였다.
의문대명사 얘기가 나오자마자 이번에도 내 머리는 0.1초 만에 테이큰 대사를 검색 결과로 내놓았다. 영화 한 편 제대로 봐 놓으니 실생활에서 대사를 정말 많이 우려먹으며 지낸다. 테이큰은 좋은 영화이다~ㅎㅎ
3.
다음으로, “Replace A with B.” (A를 B로 바꿔라)라는 문장을 생각해 보자.
여기서 A를 묻는 wh 질문은 What do we replace? (우리는 뭘 바꾸는가?) 이다.
그럼 또 B를 묻는 질문은 어떻게 만들면 될까? 영어는 with만 붙이면 간단히 해결된다.
With what do we replace? (우리는 무엇으로 바꾸는가?)
What do we replace with?
그래서 찾기/바꾸기 대화상자를 우리말로 옮길 때면 난 늘 껄끄러웠다. Find what / Replace with가 각각 "찾을 문자열 / 바꿀 문자열"이긴 한데, '바꿀 문자열'은 문맥에 따라 개념상 B뿐만 아니라 A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국어에서 체언 없이 조사를 앞세워서 '으로 바꿈'이라고는 안 쓰니까 의미가 엄밀하지 못하게 되는 건 뭐 어쩔 수 없다. (뭐, See also를 가뿐하게 '도보시오'라고 옮긴 백괴사전은 참 기발하다.)
4.
우리말에서 (내가 보기에) 관계가 굉장히 이상해져 있는 단어의 쌍이 최소한 둘 있는데, 바로 '장/쪽'과 '성/이름'이다. 양면이냐 단면이냐가 분명치 않다 보니 '다섯 장'은 대부분의 경우 다섯 페이지이지만 가끔은 앞뒤로 열 페이지를 의미하기도 한다. page/sheet에는 양면 개념이 없는 것 같은데 우리말만 왜 그런지 잘 모르겠다.
이름의 경우, 가끔은 first와 family를 모두 포함한 full name을 뜻하지만 가끔은 그 자체가 '성'과 대립하여 first name만을 뜻하기도 한다. 한 단어가 상위 개념과 하위 개념을 모두 포함하다니 거 참..;;
성/이름도 그렇고 다시 '장'으로 돌아오면, '장'은 '쪽'뿐만 아니라 알다시피 chapter를 의미하기도 해서 더욱 지저분하다. 이런 건 순우리말만으로 도저히 변별이 불가능하다면 외래어를 로컬라이즈 해서라도 논리적으로 분간이 되게 만들어야 하지 않나 싶다.
5.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한국어에는 sibling을 뜻하는 한 단어가 없나 참 궁금하다. '내일', '초록' 같은 건 순우리말이 없어서 한자어라도 있지만, sibling은 부모/자식 같은 한 단어도 없어서 그냥 "형제 자매는 있습니까?" 이렇게 매번 풀어서 설명하게 되는 게 불편하다. 이렇게 꼭 필요한 우리말이 없으니 전산학에서 트리 구조를 설명할 때는 오늘도 '시블링, 시블링' 이런 외국어가 나올 수밖에 없다.
6.
한국어는 '저희'라는 1인칭 복수형이 존재하는 것도 다른 언어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아이템이라고 한다. '우리'와는 달리 청자를 확실히 배제한 1인칭 복수이고 1인칭 쪽을 좀 낮춤으로써 청자를 높이는 효과까지 있으니, 특히 회사가 고객에게 말할 때 사용하기에 무척 적절한 대명사이다. 언어학자에 따라서는 이것을 제4인칭으로 분류하기까지 한다고 들었다.
7.
종교관 중에는 이신론(deist)이라는 게 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긴 하지만 그 신은 아주 기계적이고 정교한 자연 법칙에 가까운 추상적인 존재일 뿐, 무슨 인격을 갖고 있고 인간의 삶에 관여하거나 인간에게 무슨 계시를 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는 종교관이다. 뉴턴의 법칙은 절대적인 법칙이긴 해도 무슨 종교적인 숭배의 대상은 아닐 테니까. 유신론을 뭔가 무신론 내지 불가지론 스타일로 풀이한 것 같다.
미국이 지폐에까지 In God we trust가 적혀 있는 나라이고, 메이플라워 서약 역시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멘"으로 시작할 정도로 기독교 이념이 철철 넘쳤다고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초대 대통령을 포함한 건국 공신들이 다 프리메이슨이네, 구원받은 크리스천이 아니네 하는 이의 제기도 많다. 이들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믿은 신자가 아니라 실제로는 저런 이신론자였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이신론의 '이'는 한자로 무엇일까?
二(2)는 당연히 아니요,異(다름)도 아니며, 바로 理(이치)이다. 이성이라고 할 때의 그 한자이다.
한때 일부 '유(柳)씨' 가문에서 자기 성을 한글로 '유'가 아닌 '류'로 쓰게 해 달라고 소송도 냈던 것 같던데, 理는 '리'로 좀 구분해서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리신론'. 二나 異와는 완전히 다르지 않은가?
게다가 우리는 이미 "그럴 리가 없다" 같은 문맥에서 의존명사 理는 두음법칙 없이 오랫동안 잘 사용해 오고 있다. 그래서 내가 이런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기도 하는 것 같다.
8.
뭐, 영어도 만능은 아니긴 마찬가지다. time이 시각도 되고 시간도 되고.. number가 번호도 되고 수도 되어서 꽤 모호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 건 본인이 예전 글에서 몇 번 지적한 바 있거니와, free가 무료 & 자유를 다 의미하는 것도 상당히 불편한 점이다. "free software"는 영어권 사람이 문서에다가 친히 'free as in free beer(맥주가 공짜!)'이라고 모호성 해소를 해 줄 정도로 free는 유명한 다의어이다.
한국어가 ㅐ와 ㅔ의 중화로 인해 '내, 네'가 동음반의어가 돼 버린 것은 굉장한 막장 상황이긴 하다만, 영어도 2인칭 대명사의 단· 복수 구분이 없는 것과, 남녀 구분 없이 3인칭 단수 사람을 간단히 일컫는 대명사가 없는 것은 굉장히 불편한 점이다. 이것 때문에 (s)he, he or she, 심지어 they 등 갖가지 꼼수가 나돈다. 그렇다고 사람까지 it으로 싸잡아 일컬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9.
영어에서 안테나(antenna)의 복수형은 antennas또는 antennae이다.
곤충의 더듬이를 가리키는 안테나의 복수형은 불규칙인 antennae인 반면,
더 나중에 생긴 기계 안테나의 복수형은 규칙인 antennas이다.
이와 비슷한 진통을 겪고 있는 대표적인 단어는 mouse이다. 요놈의 복수형에 대해서는 영어권에서도 혼란이 많다.
전통적인 생물 생쥐의 복수는 mice이지만, 컴퓨터 포인팅 장비인 마우스는 mouses도 인정하는 분위기이다.
동사 hang은 처음에는 '걸다, 매달다'이다가 '사람 목을 매달다 → 교수형에 처하다'라는 뜻이 확장되어 나갔다.
본래 뜻인 '걸다, 매달다'의 과거형은 불규칙인 hung이지만, '교수형에 처하다'의 과거형은 역시나 hanged이다.
이렇듯, 다의어의 경우, 단어의 활용· 파생 형태에까지 그대로 의미 확장이 반영되지는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10.
그나저나 일본어에는 우리말 주격조사 이/가(일본어 발음으로는 '가')와 보조사 은/는(일본어 발음으로는 '와')에 개념적으로 거의 그대로 대응하는 조사가 존재한다는구나..!! 신기하다. 그래서 '고레와', '고레가' 요런 말이 있었구나.
지구상에 이런 개념 pair가 존재하는 언어는 한국어/일본어 정도밖에 없다고 한다. 굉장한 레어템을 공유한다는 것만으로도 두 언어가 문법 구조는 무척 비슷하며, 상호간 학습 장벽을 크게 낮춰 준다.
일본어는 음운 구조가 워낙 간단하다 보니 한국어처럼 받침 유무에 따른 이/가 바리에이션 같은 건 없다. 다만, 쓰기는 '하'라고 적고 읽기는 '와'라고 이상하게 한다는 것도 어렴풋이 들었다.
11.
'르' 불규칙이 적용되는 형용사 용언인 '빠르다'와'다르다'를 생각해 보자. 얘들은 '-ㄹ리'가 붙어서 '빨리, 달리'라고 부사형 활용이 가능하다. '-이/-히'라는 부사형 접미사가 붙어서 얼추'빠르게, 다르게'를 짧게 줄인 뜻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멀다/가깝다'에 서 '멀게/가깝게' 대신 '멀리/가까이'라고 하는 것처럼.
그런데 이런 활용은 보편 생산적이지 않다. 즉, '바르다'(right, correct 형용사), '가파르다', '푸르게' 같은 용언은 저렇게 활용이 가능하지 않다. '게으르다'는 '게을리 하다' 정도로만 활용 가능한데 양상이 좀 다른 듯.
그래서 '달리', '빨리' 같은 단어는 좀 예외적인 케이스로 간주되어서 사전에 별도로 등재돼 있기도 하다.
올림픽 표어를 '보다 빠르게'라고 번역할 때와, '더 빨리'라고 번역할 때는 어감이 서로 확 달라지는 것 같다. "더 빨리, 더 높게, 더 힘차게" 중에서 faster만 '-게'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 주목하라.
'다르다'가 활용된 '다른'은 말 그대로 활용된 형용사(different)도 되지만, another를 의미하는 관형사 '다른'도 된다. 같은 형태의 단어가 두 의미를 모두 지닌다는 게 꽤 흥미롭다. '와/과'가 and뿐만 아니라 with의 뜻도 갖는 것처럼.
사전에서 '다른'을 찾아 보면 관형사의 뜻만 실려 있다. 형용사 하나만 있는 영어와는 달리, 국어의 체언 수식언에서 형용사와 관형사가 구분이 필요한 이유 중 하나가 이 때문이다. 국어에서 형용사는 수식언 중에서 용언에서 유래된 것만을 일컬으니까 말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새 이름으로'에서 '새'는 관형사이지만, '새로운'은 형용사이다.
12.
옛날에는 인간 학문의 모든 분야가 그런 것처럼 언어 쪽도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학풍이 꼴보수였다.
대표적인 예가 <걸리버 여행기>를 지은 조너선 스위프트인데.. 사회 풍자적인 선구자라는 점에서는 중국의 루 쉰과도 이미지가 비슷해 보인다.
루 쉰은 한자를 없애지 않으면 중국 인민은 망한다고까지 한자를 디스한 걸로 유명한데, 스위프트는 사전을 만들어서 사랑스러운 자기 모국어 영어의 스냅샷을 기록으로 남기고, 앞으로 세속화되거나(?) 더럽혀지지 않게 영원토록 불변의 언어로 남길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couldn't 같은 구어체의 어휘가 버젓이 인쇄되어 나오는 것에도 왕창 분노했다고... 이런 사람이 오늘날의 일명 인터넷 축약어, 한글 파괴 이런 걸 보면 노발대발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에휴.." 이랬을 것 같다.
오늘날은 분위기가 이와는 완전 반대로 갔으니 참 아이러니다. "그 어떤 것도 절대적인 건 존재하지 않는다, 사전은 말뭉치 데이터를 바탕으로 당대의 언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반영만 하면 된다."이다. '너무'도 사람들이 다 긍정적으로 쓰면 뜻풀이를 바꿀 수 있다. 동성애자들도 결혼을 하니까 결혼의 정의도 굳이 남자와 여자가 하는 건 아니라고 업데이트 할 필요가 있다는 식이니까.
지금 학풍이 0이고 스위프트가 1이라면 난 그래도 여전히 0.7~0.8 정도의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다. 내가 모든 걸 감히 판단할 만한 실력은 없지만, 난 그래도 언어에도 타락이라는 게 있긴 하다고 개인적으로 믿는다. 물론, 그 타락이라는 게 겨우 맞춤법 안 지키고 상스러운 비속어 남발 같은 단편적인 현상만을 의미하는 건 아님.
그냥 쓰기 나름, 정하기 나름인 용례가 바뀌는 것은 상관없지만, '다르다/틀리다'처럼 분명하게 구분이 되고 있던 개념의 구분이 문란해지는 것만은 막았으면 싶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