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계시와 비유

1.
먼저 성경 말씀 패러디부터 좀 소개하겠다. 난 철도의 역사가 드디어 욥기 장면과도 오버랩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내가 서울-부산간의 땅에 철길을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게 명철이 있거든 밝히 고하라.
누가 그것들의 궤간을 정하였는지 네가 아느냐? 누가 선로 위에 열차를 맞춰 놓았느냐?
그 차량의 대차를 어디에 고정하였느냐? 혹은 그것의 동력 기관을 누가 놓았느냐?
어느 때에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고 하나님의 모든 아들들이 기뻐 소리를 질렀느냐?" (욥 38:4-7 패러디)

"이제 내가 너를 만들 때 함께 만든 특대형 디젤 전기 기관차를 보라. 그가 소처럼 기름을 먹느니라.
이제 보라, 그의 기력은 엔진에 있고 그의 힘은 발전기와 연결된 전동기에 있느니라.
그가 자기 바퀴를 백향목같이 움직이며 동력 전환 계통의 부품들은 서로 얽혀 있고
그의 대차는 강한 놋 덩이 같으며 그의 차축은 쇠막대기 같으니라.
그는 하나님의 철길들 중에서 으뜸이거니와 그를 만든 이가 자신의 연장을 그에게 가까이 댈 수 있느니라." (욥 40:15-19 패러디)


베헤못 빙고.
사실, 힘 자체는 전기 기관차가 더 좋지만 소리와 포스가 더 웅장한 건 디젤 전기 기관차여서.. ^^
욥이 그 당시에 무슨 총연장 몇 km에 차량이 몇 량 있는 사철을 소유하고 있는 회사 사장이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2.
5월에는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나란히 있는데.. 그때 본인은 윌리엄 워즈워쓰의 유명한 시 <무지개>가 문득 떠올랐다. 본인은 아주 오래 전에 접했지만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역설법 싯구가 워낙 강렬해서 내 기억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아이와 어른을 대조한 다른 유명한 구절은 성경에서 고전 13:11인데, 거기서는 어른이 된 뒤에 유치하고 초딩스러운 일을 버렸다는 심상이어서 낭만주의 시와는 분위기가 영 다르다.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A rainbow in the sky:
So was it when my life began;
So is it now I am a man;
So be it when I shall grow old,
Or let me die!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And I could wish my days to be
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


첫 행이 무척 공감이 갔다. 나는 when I behold a rainbow in the sky가 아니라 when I listen to Looking for You일 때 my heart leaps up이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영원무궁토록 그러하리라! 그리고 자연의 경건함이 아니라 철도의 경건함 속에서 매일 매일 살고 싶다.

아니, 시의 제목 자체를 레인보우가 아니라 레일웨이라고 바꿔도 될 것 같다. 소리가 비슷하다!
예전에 3· 1 운동 관련 글을 읽으면서 천도교를 보면서도 철도교를 연상한 적이 있었다. rain과 rail도 역시 ㄴ과 ㄹ 차이이다!

3.

"참고로 카지노의 카페트와 조명들은 전부다 심리학적으로 매우 신경써서 만든 것들인데, 들어서자마자 이상하게 두군거리고 슬롯머신을 한번쯤을 돌려봐야할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 구성되어 있다. 특히 슬롯머신처럼 단순하게 생긴 카지노 장비들(...)의 효과음은 돈 짤랑거리는 소리 등 도박욕구(...)를 자극하기 위해 정말 공들인 사운드 이펙트를 자랑한다."
* 나무(엔하)위키의 '카지노' 설명 본문 중.


그렇다. 새마을호 역시 카페트와 조명, 안내 방송과 음향들은 전부 심리학적으로 매우 신경써서 만들어져 있었다. 들어서자마자 이상하게 두근거리고 단순 이동이 아니라 뭔가 철도라는 악기를 이용한 문화 예술 공연 같은 느낌이 들도록 구성되어 있다. 기내지 레일로드, 고급스러운 간접 조명과 독서등, 두툼한 좌석에다 Looking for you 음악은.. 그야말로 승객을 뼛속까지 철덕으로 세뇌시키고 철도의 노예로 만들기 위한 정말 공들인 사운드 이펙트였다.

도박은 왜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만약 유흥 차원에서 한다면 내 돈을 잃거나 뺏긴 게 아니라, 그냥 게임 요금에 자리값/서비스료를 지불했다는 생각으로 하는 게 그나마 바람직하다.
비슷한 맥락으로 철도를 이용하는 것, 더 구체적으로 새마을호를 타는 것은 단순히 몸을 이동하는 데 드는 교통비 운임을 지불한 게 아니라 샘솟는 평안과 기쁨, 행복을 구입했다는 생각으로 접근하는 게 바람직하다. 아이폰만 감성 마케팅을 한 게 아니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Looking for you를 듣는 것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새마을호 객실에서 흘러나오는 Looking for you를 듣는 것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경부선 새마을호 전후동력형 디젤 동차를 타고 열차가 시종점에서 도달할 때 연주되는 Looking for you를 객실에서 듣는 것이오"라고 대답할 것이다.


4.
전철을 타서 좌석에 앉으면 가방이나 도시락 같은 소지품을 어디에다 놔 둘지가 고민되는 때가 생긴다.
그런데 그런 물건을 두는 위치는 전기 철도 차량의 전력 공급원 내지 집전 방식에 대한 좋은 예표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제각기 장단점이 있다.

  • 머리 위의 선반에다 두는 것은 가공전차선+팬터그래프 집전 방식에 해당한다. 제일 편하긴 하지만 깜빡 잊고 짐을 놔 두고 내리기 쉽다.
  • 바닥의 양 발 사이에다 두는 것은 바로 제3궤조 집전 방식이다. 놔두고 내릴 염려는 적지만 발을 편하게 두기 어렵다.
  • 그냥 손에 쥐고 있거나 백팩에 넣은 채로 있는 것은 배터리 또는 기름+전기 하이브리드 방식이다. 놔 두고 내릴 가능성은 0이지만 승차감이 제일 안 좋다.

선반에 물건을 적재하는 건, C++ 프로그램으로 치면 '전동차 탑승'이라는 함수가 실행되고 스택에 C++ 개체를 하나 선언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전동차에서 내리는 것은 함수 실행이 종료되고 그 변수가 scope을 벗어나는 것과 같다. 그러니 변수는 스택에서 소멸되고 해당 개체의 소멸자 함수가 실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heap도 아니고 스택에 선언된 개체에 대해 메모리 leak이 발생하기도 하는 것 같다.

난 옛날에 논산 훈련소에 있을 때 침상형 생활관에서 바닥 위의 빨랫줄을 보고도 전차선을 떠올렸다. 국방색은 갈록색을 빼닮은 듯이 비슷해서 서울 지하철 7호선의 예표이고, 긴 행렬이 우측통행을 하는 것 역시 지하철의 예표이다.

성경에는 질질 끌리는 긴 옷자락(사 6:1) 내지 수행원 행렬(왕상 10:2)조차도 train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으니 저렇게 생각을 하는 건 성경적인 근거가 충분하다.
자나깨나 철도를 생각하는 것은 가까운 것부터, 일상생활을 소재로 삼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5.
난 솔직히 내가 아니어도 전세계의 날고 기는 천재들이 알아서 다 발전시켜 줄 컴퓨터 하드웨어/소프트웨어 신기술에는 별 관심이 없다.
기술은 어지간한 건 다 상향평준화해 버리고 심지어 오픈소스로 풀리기까지 한다.
내가 안목이 좁은 건지.. IT 업계는 어지간한 아이템, 아이디어는 나올 거 다 나오고 게임 말고는 더 할 게 없는 레드오션이 돼 버린 지 오래인데, 미국은 아직도 뭘 더 만들 게 있어서 컴퓨터 관련 학과가 인기가 많고 코딩을 배우네 창업을 하네 하는 분위기인지 궁금하다. 아이템이 계속 있다면 참 다행이긴 한데.

나는 컴퓨터보다는 우리나라 철도를 위해 일하고 싶다.
나를 죄에서 구원한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해서 내 삶을 주께 드리고 내 몸을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듯이,
객실에서 Looking for you를 틀어서 잠자던 내 야성과 똘끼를 깨우고, 감성을 흥분시키고 한편으로 촉촉히 적시고, 한편으로는 무한한 행복과 감동과 평안과 희락을 준 철도를 위해, 철도를 전하는 일에 내 일생을 바치고 싶다.

"철도 안에서의 한 날이 세상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으니이다. 내가 장막들에 거하는 것보다 차라리 철도의 집(= 철도역) 문지기가 되겠사오니" (시 84:10 패러디) 가 강렬하게 떠올랐다.

  • 피스톤 왕복 엔진 (자동차. 휘발유와 디젤 모두)
  • 제트 엔진 (비행기. 터보 제트, 터보 팬)
  • 로켓 엔진 (우주 발사체)
  • 전기 모터 (전동차, 전기 철도)

의 내부 구조와 원리, 제원을 측정하는 규격과 물리적 특성, 구동음 등등을 전부 마스터 하고 싶다. 난 정작 대학 졸업할 때까지 기계· 전자 같은 건 완전 담을 쌓고 살았다만..;;

아 뭐 지금처럼 국어정보학 쪽으로 가서 언어를 공부하는 프로그래머가 됐고 한글 입력기와 글꼴 쪽으로 논문 쓰게 된 것도 충분히 의미가 있고 무엇보다도 창의적인 일이긴 하나,
내가 새마을호에서 Looking for you를 몇 년 좀 일찍 들었으면 진로가 딴판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철도 만세 만만세. 새마을호여 영원하라.
자동차나 비행기 쪽에 관심이 가는 것도 언제까지나 철도와의 비교 차원에서 하는 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얼마 전 학교 안 대졸자 취업 박람회(?)에서 본 코레일 부스..;;

Posted by 사무엘

2015/09/14 08:34 2015/09/14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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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 용태 2015/09/14 16:38 # M/D Reply Permalink

    그야말로 읽고 있어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철도간증(?) 입니다ㅠㅜㅠㅜ
    오랫만에 인사드리네요. 작년 이맘때쯤 시베리아 횡단(블라디보스토크->이르쿠츠크->모스크바) 다녀왔을때
    용묵님께도 엄청 추천해드리고 싶었어요!! 철도팬으로서 행복 그자체였습니다.

    1. 사무엘 2015/09/14 19:14 # M/D Permalink

      우와~ 그 이름도 유명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시승해 보셨군요! 부럽습니다. ^^
      요 근래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철도 글이 없었다는 걸 보고는 놀랐습니다. 그만큼 참 정신 없이 살았던 것 같습니다.
      여건만 되면 철도 업계로 갈아탈 생각도 있습니다만, 실력 부족과 기존 노예 계약으로 인해 제게는 요원한 일이네요. 언제까지나 취미로만 머무를 듯.. ^^

  2. 신세기 2015/09/16 16:29 # M/D Reply Permalink

    욥기의 철도 패러디가 재미있군요. 원문보다 기차가 상대적으로 실생활에서 더 접할 수 있는 것이라서 은근히 와닿았습니다. 저도 평행선 두 개와 또 다른 평행선 두 개가 엇갈려 있는 것을 보고 선로 교체기를 떠올렸던 게 생각나네요.

    1. 사무엘 2015/09/16 21:14 # M/D Permalink

      저는 결혼식장 중앙에 신랑· 신부가 지나가는 복도를 보고도 단선 철길 노반을 떠올렸습니다. ^^
      철도를 떠올릴 수 있는 시설이나 물건은 주변에서 많이 찾을 수 있지요.
      두 평행선 두 쌍이 엇갈려 있으면 정말로 선로 분기기가 연상되겠네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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