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정치 분야에서 언어 구사가 좀 과격한 구석이 있을지언정, 우리 남한만치 한자어나 외래어를 막 남발하지 않고 순화를 많이 한다고 그런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짜로 아이스크림 대신 얼음보숭이 같은 오글거리는 말까지 적극 사용할 정도는 아니라는 탈북자의 증언도 있다.
이런 와중에 남한 같았으면 그냥 '정지'라고 할 것을 북한의 도로 표지판은 진짜 단순무식하게 '섯!'이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언어학적 의미 전달이야 이보다 더 명확할 수 없고 문제가 전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격식이 안 어울리다 보니 우리 같은 사람들은 빵터지게 된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이 흐릿한 사진이 제일 유명하지만, 구글링을 해 보면 이것 말고 다른 장소에서도 곳곳에 '섯/섯!'이라고 적힌 북한 표지판이 많이 나온다. 교차 검증이 되는 셈이므로 이 자료는 신빙성이 있다.
그런데 북한에 '섯!' 표지판이 있다면, 옛날에 남한에는 주차 대신 '둠'이라는 표지판이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Doom 게임이 아니라-_-;; '(세워) 두다'의 명사형이다.
본인도 지금까지 '그랬다 카더라'라고 소문만 들었는데 그 표지판의 실제 모습을 우연히 발견했다. 다음은 1970~80년대의 어느 대한뉴스에서 교통 질서 캠페인이 나오던 화면을 캡처한 것이다.
둠. 참 강렬하지 않은가..??? =_=;;
이런 말이 잠시나마 만들어져 쓰인 배경에는 국어학자 최 현배 박사가 있었다. 이분이 한국어에서 '-음/ㅁ' 명사화 접미사를 굉장히 좋아했던 분이기 때문이다. 저서를 '지음'으로, 생활을 '살음'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내가 지금까지 관련 자료를 소개한 적이 없었구나. 그분의 저서..라기보다는 유고작인 <한글만 쓰기의 주장>의 한 부분을 인용하고자 한다. 원작의 맞춤법과 띄어쓰기, 외래어 표기를 그대로 옮겨 썼다.
한국말은 움직씨의 끝에 뒷가지 "음"을 붙여서 이름씨로 만드는 편리한 말본이 있다. 이 말본을 활용하면 개념의 혼란없이 한자말을 모두 한글로 풀어쓸 수 있다. 한글은 한자의 음을 빌릴 필요없이, 새로운 말을 구성해 낼 수 있다.
일본말은 움직씨에 뒷가지를 붙여서 이름씨로 만드는 말본이 없기 때문에, 한자와의 인연을 결코 끊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한국 말본은 일본 말본보다 우수하여, 한자와의 전면적 결별이 용이하다. 이점에 대해서는 일본인이 부러워해야 할 바이다. 정거장의 개설구를 "나가는 곳", 집찰구를 "나오는 곳" "分離"를 "나눔", "誕生"을 "낳음" 들로 쉽사리 새 이름씨로 풀어 쓸 수 있기 때문에, 한자 전폐는 더욱 용이하다. 고.
이스이 교수는 학술회의 회원이기도 하고, 많은 언어학 저서도 있는 일본 유수한 노 언어학자인데, 강연 뒤 신문 기자와의 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한글 연구의 방향도 제시하였다.
"음"을 붙여서 움직이름씨(동명사, Gerund)를 만들고, 이를 사색의 대상으로 한다면, 의미의 세계가 넓어져서, 한국인의 정신 활동이 크게 발달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언어학은 지금 있는 말을 분석 정리하는 데에 그치지 말고, 한글의 조어력을 발달시키고, 한글의 저력(속힘)을 발굴해 내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그리고 그는, 최근 한국 정부가 취한 한글 전용화 계획은 한국의 사회적인 편리를 위해서나, 한국만의 독특한 문화발전을 위해 잘한 일이라고, 덧붙여 말하였다.
참 고맙고도 존경할만한 말씀이다. 일본인인 언어학 박사 교오또 대학 노교수가 학자적 양심 그대로 배달말본의 우수성, 조어력의 풍부함에 대한 학적 소견을 솔직히 베풀어서, 자비자굴(自卑自屈)에 빠진 우리 학계에 큰 각성과 격려를 주었으니, 이것이 참 고맙지 아니한가?
지금이야 민족이나 인종, 심지어 언어를 서로 대놓고 비교하면서 어느 게 우수하네 마네 하는 소리는 그야말로 히틀러스러운 나치즘, 파시즘, 국뽕 전체주의 소리 들으면서 욕 먹기 딱 좋다. 더구나 난 일본어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동명사를 만드는 게 한국어보다 뭐가 그렇게 불편한지 저 말의 배경도 잘 모르겠다. 뭐, 일본인 학자가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저 때가 어떤 시절이었는가? 최 현배 박사는 1970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지금으로부터 무려 반세기 전의 옛날 사람이다.
1968년 12월 8월이면 뭐 떠오르는 거 없으신가? 박 정희 대통령에 의해 국민 교육 헌장이 선포된 지 겨우 사흘 뒤의 일이다(12월 5일).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옛날이 아닐 수 없다.
저 때는 언어건 문화건 경제건 "우린 안 될 거야 아마"라고 아무 꿈도 희망도 없던 시궁창 헬조선 반도에서 국민들에게 "우리는 우수한 민족이다, 우리(는/도) 할 수 있다"라고 정치인 지식인들 할 것 없이 무지한 국민들에게 마음껏 국뽕이라는 동기 부여를 주입해 줘야 했다. 그러던 와중에 한글은 가히 이보다 더 훌륭할 수 없는 약이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저 글을 보면 알 만한 거물급 국어학자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어'를 쓸 만한 문맥에서까지 문자인 '한글'이 엄밀한 구분 없이 종종 섞여 쓰여 있다.
최 현배는 당대를 살았던 공 병우· 이 승만 같은 인물과 비슷한 급의 천재이고, "방망이 깎던 노인"을 연상케 할 정도로 아주 강직하고 괴팍한 고집쟁이였다. 194~50년대엔 단순히 한자를 없애는 수준을 넘어서 문자를 기계화하지 못하면 민족이 망할 거라고까지 생각해서 <글자의 혁명> 같은 굉장히 과격한 책도 쓴 적이 있다. (한글을 라틴 알파벳 같은 풀어쓰기 문자로 마개조하자)
그리고 일본인 스승 밑에서 언어학을 공부했고 언어학뿐만 아니라 교육학과 철학에도 일가견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조선어 학회 사건 때 투옥되어 고초를 겪고 죽을 뻔하기까지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일본의 일 짜만 나와도 몸서리 쳤던 골수 민족주의자 항일 인사였다.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아들 말고 아버지)이 개인 소신으로는 평생 일본을 싫어하며 지냈듯이 말이다(군 복무 시절에 동료들이 미친 식인귀 일본군에게 잡아먹혔으며, 자기도 극적으로 구조되지 못했으면 그렇게 될 뻔..).
이런 최 현배 박사의 주장에 대해서 날틀, 배꽃계집큰배움터 같은 이상한 오해와 음해가 나돌았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 장려했던 순우리말 용어는 말본, 셈본, 넘보랏살, 콩팥 이런 온건한 선을 넘지 않았으며, 그리고 저런 '둠'이야말로 주작이 아닌 팩트이다. 최 박사의 저서를 보면 '둠'이 제안된 배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순화라는 게 명사를 억지로 뭉쳐 붙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동사를 명사화해서 표현할 때 영한사전 번역투 영향을 받아서 천편일률적으로 '-는 것'만 쓸 게 아니라, '-음/ㅁ', '-기' 같은 접미사도 많이 활용하는 것이 표현의 다양성 차원에서 좋다고 여겨진다. 뭐, 전에도 얘기했듯이 영어는 근본적으로 명사와 형용사를 좋아하는 반면, 한국어는 동사(용언)와 부사를 좋아하는 언어라는 차이가 있기도 하다.
도시락, 동아리, 모꼬지 이런 말은 최 현배의 사후에 그의 학풍을 물려받은 대학생 우리말 사랑 단체에서 1980년대쯤에 만들거나 재발견하여 보급되었다. 특히 동아리가 '서클'을 성공적으로 대체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다.
이거 이후로 국내에서 순우리말 순화 운동은 1990년대에 컴퓨터 분야를 중심으로 무른모, 셈틀, 누리그물(...;; ) 이런 거나 나오다가 지금은 완전히 생명력을 잃고 자취를 감춘 것 같다.
이상. '둠, 섯'에서 시작해서 오랜만에 한글, 국어, 최 현배 박사 등 여러 얘기가 나왔다. 나의 모국어인 한국어의 문법과 어휘를 어떻게 활용하고 개량하면 이 영어 만능 시대에 더 간결하게 구사하고, 더 정확하게 번역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쏟아져 나오는 용어들을 일일이 다 번역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결국은 있는 그대로 빌려 쓰는 말도 있겠지만, 그게 결국은 독해력· 문해력의 격차로 이어지고 학문 수준의 격차로 이어지 않을지?
진실은 한국어· 한글이 앞으로 수십~수백 년 안에 사멸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던 옛날 민족주의 성향의 언어학자들하고, 그런 거 아무 의미 없다고 상대주의적으로만 흘러가는 요즘 추세의 중간에 있지 않나 생각이 든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