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바탕체를 기억하십니까?

요즘은 조금 인지도가 있는 기업이나 단체들은 전속 서체를 만드는 게 유행이다.
MS에서 2006년 말부터 윈도우 비스타+오피스 2007+IE 7과 동시에 맑은 고딕을 뿌리기 시작했으며,
한겨레나 조선일보 같은 신문사들도 자기네 전속 서체를 일반인에게 공개했다.
그 후 네이버 역시 나눔명조/고딕 시리즈를 공개한 것으로 유명하고, 최근엔 한컴도 아래아한글 2010과 함께 함초롬 바탕/돋움 시리즈를 공개하여 그 뒤를 따랐다.
대기업인 삼성도 전용 서체가 있고, 코레일도 역명판에 사용하는 전속 서체가 있다.
인천 공항은 각종 표지판에 미공개 전속 서체를 사용하고 있다.
물론 그 배후에는 하청을 받은 산돌이나 윤디자인 같은 회사의 디자이너들이 엄청 고생했다.
 
개개의 서체를 만들어 파는 방법으로는 도저히 수익을 낼 수 없으니 서체 회사들은 확실한 과금 체계가 존재하는 포털 사이트(싸이)나 모바일 쪽으로 사업 대상을 바꾸거나, 저렇게 전속 서체 외주를 수행하는 방법으로 수익을 내고 있다. 웹브라우저나 MP3 플레이어 소프트웨어를 개인이 따로 돈 주고 쓰는 경우가 없듯이, 서체 역시 그 자체가 수익이 아니라 마케팅 수단처럼 되어 가는 게 현실이다.
 
전속 서체는 이미지가 중요한 사기업만 만드는 게 아니다. 가끔은 지방 정부 내지 국가가 세금을 투입하여 만들기도 한다. 월드컵 때엔 경기장 내부 표지판용으로 나라에서 각종 표지판용 전속 서체를 제작해서 썼는데 이 글꼴은 요즘 WOW 같은 온라인 게임에서도 애용되고 있다고 들었다.
최근엔 서울시에서 시 브랜드 재고를 위해 서울 남산체를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고 이 서체는 지하철 인테리어에서 적극 쓰이는 중이다.
 
그런데.. 이렇게 브랜드 이미지 마케팅이 중요하게 부각되기 전에, 무려 1990년대... 그때는 어지간한 PC 환경에서는 윤곽선 글꼴 자체를 구경할 수 없던 시절에,
지방 정부도 아니고 우리나라 중앙 정부가 팔 걷어붙이고 국고를 투입하여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무료로 쓸 수 있는 '전속 서체 세트'를 개발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특정 단체나 브랜드를 위한 톡톡 튀는 서체가 아니라, 본문용 네모꼴 한글 서체의 디자인 표준을 제시하는 가장 원천적이고 교과서적인 서체를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
 
그 작품은 바로 문화바탕체이다. 여기서 '문화'란, 당시 이 서체 개발하라고 연구비를 대 준 정부 부처인 '문화부'(훗날 문화관광, 문화체육 등 다양한 이름으로 바뀐)의 이름을 딴 것이다.
짜잔~ (맨 아래의 검은 글자)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명조체와 비슷하나 우리가 흔히 보는 그런 명조류가 아니다. 명조라고 보기에는 좀 붓글씨 내지 펜글씨 같기도 하지만 흘리거나 날린 흔적은 없다. 특히 명조 계열임에도 불구하고 ㅈ이 명조가 아닌 고딕처럼 ㅡ+ㅅ 형태로 그려져 있으며, ㅠ에서 왼쪽 ㅣ가 왼쪽으로 삐쳐져 있다. 문화바탕 말고 ㅈ이 그렇게 그려져 있는 본문용 명조는 아마 신문명조 부류밖에 없을 것이다.

문화바탕은 1991년엔가 그때 개발되었으며, 1992년에 발매된 아래아한글 2.0 전문용이 지원하는 윤곽선 글꼴로 공개되어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그 후 문화돋움도 나왔으며, 아래아한글 3.0 시기인 1994~1995년에는 문화바탕제목, 문화돋움제목 같은 진한 제목용 서체와, 문화쓰기흘림, 문화쓰기정자, 문화쓰기필기 같은 진짜 펜글씨· 붓글씨 서체가 후속작으로 잇달아 개발되었다.

이 문화* 서체들은 아날로그 서체이다. 마치 만화 그리듯이 사람 손으로 원도를 그린 후, 그걸 스캔하여 윤곽선을 추출하고 따로 보정을 거쳐서 만들어졌다. 사실, 수많은 서체들이 그런 방식으로 새로 만들어지고 있으며, 컴퓨터가 발명되기 전부터 쓰여 온 서체들도 그런 방식으로 디지털화했다.
 
문화바탕의 원도를 그린 사람은 최 정순 씨이나, 서체 컨셉은 개발 위원회 멤버들의 합의를 거친 것이지 전적으로 그 사람 개인 작품인 것은 아니다. 원도의 디지털화는 한글 타이포그래피과 출판 기술 쪽으로 최고의 권위자이며 왕년에 <컴퓨터는 깡통이다> 시리즈로 매스컴도 여럿 탄 유명한 이 기성 교수가 작업했다. 세리프가 많은 아날로그 글꼴을 디지털화했다는 특성상 문화바탕은 덩치가 크고, 과거 도스 시절에도 래스터라이즈하는 데 좀 시간이 걸리는 글꼴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요즘은 종이에 그리는 원도 없이 처음부터 컴퓨터의 포인팅 장비만으로 만들어지는 글꼴도 있다. Georgia라든가 윈도우 비스타에서 새롭게 추가된 글꼴들은 그런 순수 디지털 서체라고 한다. 전통적인 서체들에 비해 모니터 화면 같은 저해상도에서의 가독성이 더욱 강화되었는데, 특히 숫자를 좀더 위아래로 들쑥날쑥하게 그린 것도 그런 효과를 위해서라고 한다.)

문화바탕은 나름대로 굉장한 의미를 지니고 개발되었다. 앞으로 이런 문화바탕 특유의 냄새가 나는 서체는 거의 찾을 수 없을 것이다. ㅈ이라든가 ㅠ의 모양 같은 것도 본문용 한글 서체라면 앞으로 이렇게 문화바탕처럼 만드는 게 맞다는 식으로 나름대로 원칙과 표준을 정한 것이다. 하지만 매우 보수적이라는 출판계의 보수성으로 인해, 그로부터 거의 20년 뒤, 윤명조가 대세가 된 오늘날까지도 그 가이드라인대로 만들어지는 본문 글꼴(특히 ㅠ 모양)이 거의 없다시피한 것이 현실이다.
 
그 대신 오늘날까지도 문화바탕을 출판물에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곳이 어딘지 아는가?
여호와의 증인-_-이다.
본인이 몇 달 전에 우연히 간행물 파수대를 봤을 때에도 본문이 문화바탕체인 걸 봤다.
그런데 그들 간행물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의 정교한 유채화(oil painting) 스타일의 삽화와 더불어 문화바탕체는 내가 보기에 근엄하고 진지한 분위기도 내면서 잘 어울리는 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본문은 딱 보면 문화바탕, 굵은 글씨는 문화바탕제목임을 알 수 있다. 이걸 알면 용자. 그리고 저 본문 내용이 전혀 성경적이지 않은 이단 교리라는 걸 아는 독자라면 더 용자. ㅋㅋ)

이러다가 문화바탕체가 여호와의 증인들 전속 서체처럼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본인이 21세기 이래로 문화바탕체를 본 곳은 이 기성 교수가 관여한 출판물 아니면 여호와의 증인, 딱 두 곳뿐이다! ㅜㅜ
 
아울러, 문화* 글꼴들은 한글에 어울리는 영문/숫자 글꼴이 전혀 개발되지 못한 것도 아쉬운 점이다. 연구비 삭감-_- 때문이라고 하며, 이 교수 역시 그 시절을 회고하면서 이 점에 대해서는 몹시 아쉬워하는 것을 강연에서 들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0/03/12 19:11 2010/03/12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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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 용태 2010/03/13 20:42 # M/D Reply Permalink

    문화바탕체... 좀 무겁고 요즘의 쿨(?)한 느낌은 나지 않는 서체죠. 저도 항상 설치해두고 있긴 하지만 인쇄물작업할때 손이 잘 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2002월드컵체는 특유의 말쑥함 그리고 어느 인쇄물에 넣어도 그다지 어색하지 않은 느낌 때문인지 정말 광범위하게 사용됩니다.

    1. 사무엘 2010/03/13 22:02 # M/D Permalink

      예, 그렇습니다. 진지하고 착 가라앉은 느낌이 나고 무엇보다도 한 2, 30년 전의 옛날 인쇄물을 보는 느낌이 드니 손이 잘 가지는 않는 게 사실이죠. 교과서라든가 법조문, 종교 경전 같은 데에서 어울릴 것 같습니다. ^^;; 개인적으로 문화바탕은 숫자/알파벳 글꼴이 없는 것뿐만 아니라, 작은 본문용 서체임에도 불구하고 힌팅이나 비트맵 적용이 전혀 되지 않아 화면용으로 쓰기 곤란하다는 점도 아쉽더군요.

      성경이 문화바탕체 좀 쓰면 어떨까 싶은데, 이걸 노리고 여증들이 이미 선점이라도 한 걸까요? (가정 방문이나 거리 설교 같은 성경적인 복음 전파 방법도 다 이단들이 도둑질해 가 있죠 -_-)
      월드컵체에 대해서도 저 역시 100% 동감합니다. 깔끔하고 ‘부담 없는’ 인상이 무척 좋지요. 게임뿐만 아니라 간판, 소제목 등에서 두루두루 잘 받는 서체입니다.

  2. 김 민규 2010/03/15 11:45 # M/D Reply Permalink

    안녕하세요, 재미있는 글 읽고 갑니다. 덧글은 쓰지 않아도 가끔 들러서 읽기는 읽습니다. 저도 이제는 블로그에 이것저것 써 보려고 하지만 글이 마음대로 안 써지고 참 어렵습니다. 이런 재밌는글을 이렇게 꾸준히 올리시는 용묵 님 근성이 존경스럽네요 ㅋㅋ

    저 문화바탕이라는 걸 어릴 때 본 적이 있는데 뭐 다른 데서가 아니고 초등학교(당시에는 국민학교) 1학년 국어 책에서 저 글꼴을 썼습니다.
    본문은 문화 바탕이고 아이들에게 글씨 써 보게 시키는 칸에는 문화 궁서?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궁서 느낌이 나는 문화글꼴이었는데 이것도 자모의 모양이 아주 특이해서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몇 년 전에는 윤디자인에서 낱개 글꼴 하나에 4400 원씩 해서 팔았는데 그때 사서 썼다가 들어있던 vxd(아마 복제 방지용 상주 프로그램이겠죠) 때문에 컴퓨터가 이상해져서 고생을 하고 그 뒤로 다른 건 사서 쓴 적이 없습니다.
    이제는 8800 원으로 가격도 올리고 2 년인가 3 년인가 하는 기간 제한까지 두었더군요. 물론 폰트를 만드는 사람들의 고생에 비하면 너무 싼 가격이지만, 보통 사람들은 이미 글꼴을 왜 사서 써야 되는지도 모르는 판에 8800 원이면 얼마나 팔릴까 싶습니다.

    아, ㅅㅇ ㅈㅎㅊ 글꼴을 드디어 운 좋게 입수했습니다. 이것도 불법이긴 불법인데... 역시 이토록 보기 좋고 아름다운 한글 글꼴은 또 없을 것 같습니다.;;

    1. 사무엘 2010/03/15 14:05 # M/D Permalink

      반가워요! ^^ 블로그이다 보니 이제 다른 사람이 여기에 새 포스트를 직접 올리지는 못하지만, 민규 님의 재치 있는 글과 리플이 그립습니다. ^^;;

      아직 초등학교가 아니고 국민학교인 시절이라면, 저는 그 당시 교과서들의 본문 글씨체는 IBM PC 상으로 존재하는 그 어느 서체도 아닌 이상한 다른 명조였던 걸로 기억해요. 문화바탕이 교과서 본문으로 등장한 적이 있던가? 그랬을 법도 한데 딱히 제 머리에 남는 기억은 없습니다. 문화바탕은 거 참, 제일 기본적이고 FM대로만 만든 서체가 그 어느 본문 서체보다도 카리스마틱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예인 것 같습니다. ㅋㅋ

      글꼴의 저작권 보호는 사실 운영체제 차원에서 폰트 엔진이 해 줘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아래아한글은 글꼴 파일 드라이버 계층을 따로 뒀거든요. 그래서 드라이버 소프트웨어만 락을 걸면 그 드라이버를 만든 회사의 글꼴은 다 쥐락펴락할 수 있었습니다. 글꼴 파일의 압축과 암호화도 마음대로 가능했고.. 하지만 지금은 그런 제도적 장치가 없죠. 아예 서체 회사가 자체 드라이버를 만드는 건 저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꺅, 그리고 그 글꼴... 저도 갖고 싶어요오옷! 납작한 건 그 글꼴의 성격상, 마치 신문명조처럼 세로쓰기에도 잘 어울리게 만드느라 그런 것인데, 무척 잘 만든 서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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