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우리말/언어 관련 메모.
요즘 참 다양한 분야별로 블로그질 하는데, 방학 중에도 본인의 매일 수면 시간은 5~6시간대.. 아 피곤하다..;; 남들이 게임이나 연애 하는 동안 난 맨날 이 짓 하고 있다. 이것도 병 내지 중독이다. ㄲㄲㄲㄲㄲㄲㄲㄲ
1. 조어법
요즘 언어학의 설명에 따르면, 어휘의 조어 방식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통사적 합성이라 하고 다른 하나를 비통사적 합성이라고 하는데, 전자는 생성에 사용된 개별 형태소가 온전하고 자립 가능한 형태인 것을 말하고 후자는 그렇지 못한 걸 일컫는다.
까놓고 말해 ‘먹자골목’은 통사적 합성인 반면, 논란이 많은 ‘먹거리’는 비통사적 합성이다. 동사의 어간 ‘먹-’은 이거 하나만으로는 자립할 수 없는 의존형태소로 일컬어지며, ‘먹는, 먹자’처럼 뒤에 어미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헐 그럼 ‘먹튀’도 비통사적 합성이군?
그래서 성격 까칠한 민간 우리말 운동가 중에는 ‘먹거리’는 잘못 만든 말이기 때문에 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이 있다.
난 조어에는 비교적 관대한 편이다. 명사, 특히 고유명사야 겹치는 동음이의어 없이 어감상 거부 반응 안 들고 변별만 잘 되면 뭘로 지어도 나쁠 게 없지 않겠는가. 뭐, ‘나드리’처럼 표기법 바꿔서 고유명사화하는 게 한글 파괴라는 식의 개드립에는 결코 공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다양한 조어는 적극 권장해야 한다. 요즘 무섭게 쏟아지는 영어 신조어나 작명 센스들, 그리고 우리나라 인터넷 유행어들도 내가 보기엔 압도 다수가 비통사적 합성들이다.
‘쌍룡’이 표준어이건 말건 자동차 회사 ‘쌍용’은 고유명사이다. 하다못해 외래어 표기법도 아무리 Hyeondae가 원칙상 맞다 해도 현대 자동차 할 때 현대의 공식 로마자 표기는 Hyundai인 것이다. 성씨의 두음법칙 같은 문제에서도 본인은 ‘당사자가 원하는 대로 불러 주는 게 맞다’ 주의이다.
본인은 ‘다르다’와 ‘틀리다’ 구분 안 하는 것 굉장히 싫어하고, “이 제품은 성능이 아주 좋으십니다” 이런 말 들으면 손발리 오그라들긴 하지만, 조어는 아주 창의적이고 파격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된 웃기는 현상이 하나 더 있다.
우리나라는 God의 표기가 천주교하고 기독교(천주교에서 개신교라고 부르는)가 서로 다른 이상한 나라이다. 하나님 vs 하느님. 참고로 천주교 말고는 여호와의 증인도 ‘하느님’이라고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사전처럼 종교색이 없는 문헌도 하느님, 더 나아가서 공동번역 성서의 컨벤션을 더 존중하는 것 같다. '하나님'의 설명을 보면 '하느님으로 가셈' 같은 식.
어른들의 사정이 있어서 표기가 달라진 건 어쩔 수 없다 치는데, “‘하나님’은 ‘하나(one)’이라는 숫자에다가 님이 붙은 것이어서 어법에 어긋난다”고 ‘하나님’을 까는 건 영 수긍하기 곤란하다. 실제로 국어깨나 좀 아는 어느 천주교 신자에게서 본인이 들은 적이 있는 말임. 아하, ‘하나님’도 비통사적 합성이다 이거지?
종교적인 교리나 이념은 싹 배제하고, 순수하게 국어학 관점에서 “남이사 무엇에다 님 붙여서 말 만들든 무슨 상관이심?” -_-;;; 이라고 반문해 주고 싶었다. 오히려 카더라 통신에 따르면 서양 선교사도 그 ‘하나+님’ 조어를 보고는 정말 멋진 번역이라고 감탄을 했다고도 하는데.
뭐.. 그냥 그랬다고.. ㅋㅋ 아님 말고.
2. 문법 용어
아마 내막을 아는 분도 있겠지만, 옛날에는 국어 문법 용어와 체계가 서울대 이 희승 라인과 연세대 최 현배 라인으로 갈려서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그래서 서울대 국문과를 가려는 사람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서울대 기준으로 맞춰진 책으로 공부를 해야 했고, 연세대 국문과를 가려는 사람은 연세대 에디션으로 공부를 해야 했다...; 그리고 나중에 입시 점수가 엇갈리게 나오더라도, 맞은편 경쟁 대학으로 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거 가히 도시전설 수준의 충격과 공포인걸??
그래서 학교 문법 체계를 통합하려는 시도가 이뤄졌는데... 이거 무슨 글자판 통일 얘기 같다(세벌식 매니아의 직업병..ㅋㅋ).
문법 용어는 한자어 위주의 서울대와, 순우리말 위주의 연세대가 땅따먹기 하는 식으로 통합되었다. ㅜ.ㅜ “난 이거 양보할 테니 저건 우리 식으로 하자” 식. -_-;;
아하, 그래서 중학교 때 배운 음운 법칙이 ‘음절 끝소리 규칙’과 ‘된소리되기’, ‘사잇소리’는 순우리말이고 ‘구개음화’, ‘자음동화’, ‘음운 축약’은 한자어로 뒤죽박죽 섞여 있었구나.
그 엄청난 내막을 알게 됐을 때 대략 정신이 멍했다. ㅋ
하지만 문법 용어 말고 다른 분야 용어는 세월이 흐르면서 상당수 한자어로 이미 바뀐 것 같다.
과학 그림책에서 본 살갗, 힘살, 작은창자, 콩팥 같은 용어는 중학교 과학 책에서 전혀 볼 수 없었고(피부, 근육, 소장, 신장 등), 한글 학회 어르신들이 접했다는 넘보랏살(자외선) 같은 단어는 전혀 접하지 못했다.
요즘 애들은 6 25가 언제 일어났는지도 모른다는데, 저런 단어들도 안 쓰면 나중엔 애들이 진짜 못 알아들을 것 같다. 가령, 여기 오는 분들은 ‘뭍’이 육지(land)라는 뜻인 줄은 다 알려나?
3. 형태소 분석기를 엿먹이는 문장
한국어: 가가 가가가? (걔가 가씨 집안이냐?) -_-
영어: I think that that that that that boy wrote on the blackboard is wrong.
(접속사, 지시형용사, 명사, 관계대명사, 지시형용사) ㅋㅋㅋㅋ
4. 흠좀무스러운 다의어와 동음이의어
동사 table
- 영국: (의안 등을) 상정하다
- 미국: (의안을) 묵살[무기연기]하다.
뭐 어쩌라고.. -_-;;
학원을 끊다
- 전화를 끊다: 학원을 그만두다
- 승차권을 끊다: 학원에 등록하다
뭐 어쩌라고.. -_-
진돗개 1호가 풀렸다
- 5만원권이 전국에 풀렸다: 경보가 내려지다
- 통금이 풀렸다: 경보가 해제되다
release와 비슷한 의미의 중의성을 지닌 듯.
1977년의 테네리페 여객기 참사의 원인 중 하나도, 교신 중에 이런 식으로 중의적인 표현이 조종사와 관제탑 사이에 오해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구제역 / 해충 구제 / 빈민 구제
물론 한자는 서로 완전히 다 다르지만, 어째 어감이 이상하다. “구제역 병균을 구제해서 불쌍한 소들을 구제해야지”라고 써도 될 것 같다.. ㄲㄲㄲㄲ
5. 부사를 겸하는 명사
‘오늘’, ‘내일’ 같은 시간이 명사도 되고 ‘부사’도 되는 건 한국어나 영어나 똑같다.
“나 내일/오늘 집에 가”라고 영어로 말할 때 today나 tomorrow 앞에 전치사를 붙이질 않으며, 한국어로도 ‘내일에, 오늘에’ 같은 식으로 조사를 붙이지 않기 때문이다.
영어는 그런 게 더 발달해서 home이나 downtown 같은 장소를 가리키는 명사도 부사로 통용되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6. 흠좀무스러운 발음
아래의 두 단어 쌍은 영어 발음이 완전히 동일하다!
Colonel (육군 대령) / kernel (커널)
Pilate (성경에 나오는 본디오 빌라도-_-) / pilot (파일럿)
'컬라널'이 아니었군.. ㅜ.ㅜ 영어가 워낙 다양한 어원에서 유래된 단어가 많아서 어쩔 수 없다. 그 중 gh가 제일 판타지 같은 음운이라는 건 알 만한 분들은 알 것이다.
만약 한글이 세계 문자가 된다면, 같은 한글 단어도 중국어를 표기한 단어에서는 ㅐ를 ‘ㅏㅣ’로 풀어서 읽는다거나 하는 그런 예외가 생기지 말라는 법이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김밥, 비빔밥, 볶음밥, 자장밥에서 ‘밥’과 ‘빱’ 소리가 갈리는 원칙을 설명할 수 있으신 분??
‘김빱’이 아니라 ‘김밥’이라고 그대로 소리내는 게 맞다고 말은 하는데 왜 그렇게 되는지 난 모르겠다. 아무 원칙이 없이 랜덤이라면 본인은 아까 조어와 마찬가지로 무슨 발음이든 다 허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인은 김밥, 효과를 다 김빱, 효꽈라고 발음한다.
해님도 ‘햇님’이라고 자꾸 쓰기 쉬운데, 원래 ㅅ을 붙일 필요가 전혀 없다고 한다. 사잇소리는 정말 너무 어렵다.
7. 영어 번역투
영어는 A must be followed by B 같은 표현조차 가능한 언어이다. 수동태와 피동형 남발은 민간 차원에서도 하도 많이 까여 왔고, 좀 각성하자는 움직임도 적지 않은데.. 본인은 전형적인 영어 번역투로 그 외에도 아래의 사항도 지적한다.
- 명사형 관형어로 죽어라고 ‘-는 것’만 너무 남발하는 것 (to 부정사와 동명사의 번역. -음, -기 도 때때로 좀 써 주세요!)
- ‘가지다’를 너무 남발하는 것 (have 번역. 품다, 지니다 등도 좀 쓰세요!)
- 영문법 책에서 본 듯한 뭔가 장황하고 최적화(optimized)되지 않은 문장. 한국어 표현을 추적해 보면 원래 영어 원문이 무엇이었을지 디스어셈블리(?) 가능한 문장.
한국어는 단· 복수나 성별 구분은 거의 안 하는데 주체가 인격체냐 그렇지 않냐는 꽤 엄격하게 구분한다. 비인격체가 주어로 오는 걸 싫어하는데, 영어는 오히려 그걸 전혀 따지지 않으니 그게 문제이다.
“이 열쇠가 문제 해결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같은 식.
세상에 영어로 유입되는 지식과 정보가 너무 많다 보니, 영어가 한국어에 끼치는 영향도 방대하다. 영어를 무작정 배척할 수는 없으나,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지킬 건 지켜야 할 것이다. 그래서 본인은 영한사전이 제대로 돼야 국어가 산다는 지론을 오래 전부터 펴 왔다.
본인의 모국어인 한국어는 대명사가 극악인 언어이다 보니, 개인적으로 영어의 간결한 대명사 체계에 대해서는 가끔 부럽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영어도 2인칭이 단· 복수 구분이 없다는 기괴한 약점이 있기는 마찬가지. 차라리 킹 제임스 영어는 그 구분이 있는데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