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의 확장

단칸방에서 살림을 시작한 신혼부부가 세월이 흘러 경제력이 생기고, 또 자녀들 때문에 더 넓은 행동반경이 필요해지면 더 큰 집으로 이사를 간다.
어떤 교회가 성도 수가 늘고 기존 건물이 너무 비좁아지면, 역시 더 큰 곳으로 예배당을 옮긴다.
건물을 예로 들었지만 길도 예외가 아니다. 처음에 설계했던 길의 크기에 비해 교통량이 지나치게 늘면 길을 넓히게 된다.

과거에 경부 고속도로의 건설이 끝난 뒤, 박 정희 대통령은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내가 야당이 하도 반대를 해 대서 일단 4차선으로만 만들었지만, 이 도로는 얼마 못 가 너무 비좁아지는 때가 분명 온다. 그러니 언제든지 확장을 할 수 있게 대비해 두고, 도로의 양 옆 50m에는 건물 건축 허가를 내 주지 말아라.”

오늘날 박통의 예상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오늘날 경부 고속도로가 40년 전의 4차선 형태 그대로 아직까지 남아 있는 곳은 영천-경주-울산과 추풍령 일대의 극소수 구간뿐이다.
비록 경부 고속도로가 처음에 너무 저비용으로 단기간에 날림으로 만들어져서 나중에 땜질을 하는 데 비용이 더 들었다는 비판이 있긴 하다만, 박통 역시 정황상 원하던 규모로 도로를 애시당초 못 만든 고충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1. 길을 넓히는 작업은, 이상적인 경우라면 기존 도로의 양 옆에 차선이 하나씩 추가되는 게 가장 자연스럽다. 중앙 분리대의 위치가 바뀌지 않으며, 기존 도로의 센터를 건드릴 필요가 없다는 점이 매우 좋다.
다만, 터널이나 교량은 유연한 확장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양 옆으로 같은 시설을 더 만드는 식으로 확장이 이뤄진다. 오래 된 터널이 세 개 존재하고 중앙의 2차선짜리 터널 내부에 중앙선이 있다면, 그건 100% 나중에 1차선짜리 터널이 추가로 건설된 거라고 보면 된다. (예: 서울 종로구의 사직 터널)

2. 그러나 기존 도로의 한쪽 옆에 동일한 규모의 새 도로가 건설되어 기존 도로는 상행, 새 도로는 전체가 하행이 되는 식으로 확장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기존 도로와 새 도로가 완전히 분리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서로 고저 차이가 있기도 하다.

서울의 대표적인 횡축 자동차 전용 도로인 강변북로(그리고 아마 올림픽 대로도)가 이런 식으로 확장된 좋은 예이다. 강변북로는 지금의 서쪽 방향이 원래 있던 도로였다. 편도 2차선의 4차선짜리 도로였는데 좀더 한강 쪽에 가까운 4차선짜리 고가 도로가 추가로 건설됨으로써 총 8차선이 되고, 새 도로는 동쪽 방향을 맡게 되었다.
터널 중에서는 남산 제1터널이 이런 방식으로 확장되었다. 추후에 옆에 터널을 하나 더 만든 뒤, 각각 상· 하행 역할 분담.

3.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 그냥 옆에, 혹은 복층으로 독립적인 상· 하행 방면이 존재하는 새 도로가 추가되는 걸로 끝난다. 중부 고속도로(고속국도 35호선)가 좋은 예이다. 험준한 산 위에 놓인 높은 고가는 이거 뭐 건드릴 수가 없기 때문에 옆에 그냥 제2 중부 고속도로(고속국도 37호선)를 추가로 만드는 것 외엔 답이 없었다. 철도로 치면 방향별 복복선이 아닌 선로별 복복선처럼 되었다.

세 가지 경우 중 기존 선로나 차선의 상하행 용도가 바뀌기도 하는 방식은 2번이 유일하다. 그래서 길에 각종 신호 시스템이 정교하게 얽혀 있는 철도가 2번처럼 확장되기란 대단히 어렵다. 뭐, 철도는 복선에서 복복선으로 바뀌는 것 자체가 수도권 대도시가 아니면 대단히 드문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경부· 경인선은 1번과 같은 방식으로 복복선으로 확장되었지만, 이들이 합류하는 구로 이북의 서울 시내 구간은 3번 방식으로 확장되었으며, 이는 아마 부지 문제 때문에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식으로, 어떤 길이 처음엔 작았다가 나중에 확장되었다는 증거는 구조물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자동차 전용 도로의 경우는 진출입로에서도 드러난다.

우리나라는 자동차가 우측통행을 하며, 편도 4차선 도로라면 진출입로는 당연히 맨 오른쪽 끝인 4차로에 있다. 중앙선과 가장 가까운 곳이 1차로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강변북로의 동쪽 방면 도로는 맨 왼쪽 끝의 1차로에 진출입로가 수시로 존재한다. 마포 대교나 원효 대교의 진출입 램프를 생각해 보기 바란다. 왜 그럴까?

그것은, 예전 도로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진출입로의 영향 때문이다.
강변북로가 확장되기 전에는, 한강 다리의 북단에서 강변북로의 동쪽 방면으로 진입하려면, 지금은 서쪽 방면으로만 쓰는 옛 도로의 오른쪽 끝으로 진입로(램프)가 이어져야 했다. 그게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그 길을 크게 고치지 않은 채로, 옆에 있는 강변북로 동쪽 방면으로 살짝 연결시키다 보니 새 도로에 처음 닿는 곳은 4차로가 아닌 중앙선 근처의 1차로가 된 것이다. 즉, 강변북로 동쪽으로 갈 때도 서쪽 방면 도로를 살~짝 찍은 뒤에 동쪽 방면으로 건너간다는 뜻이다. (옛 도로의 오른쪽 끝인 2차로 → 새 도로의 왼쪽 끝인 1차로로 바뀜) 이해가 되시겠는가?

동서 방면 도로와 남북으로 가는 도로가 십자형으로 만나고 어느 방향에서든 모든 방향으로 진입할 수 있는 입체 교차로의 가장 교과서적인 형태는 두말 할 나위도 없이 클로버형 나들목이다. 그러나 한강과 복잡한 시가지를 끼고 있고, 더구나 기존 시설물까지 존재하는 서울 시내의 자동차 전용 도로가 그런 깔끔한 모양을 유지하기란 현실적으로 곤란하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약간의 복잡한 시설물이 만들어진 것이다.

한 도로에서 다른 도로로 갈아타는 입체 교차로 램프가 좀 복잡하고 삽질스럽게 생겼다 싶으면, 이것도 옛 도로가 확장된 흔적이기라도 한가 의심해 봐도 좋을 것이다. 입체 교차로는 신호 대기가 없어서 무척 좋긴 하지만, 자동차에 내비가 보급되기 전에는 이런 복잡한 도로를 어떻게 찾아갔을지 옛날에 운전하던 분들이 초행길에 적응하느라 힘들었을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2/02/05 08:36 2012/02/05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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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범준 2012/02/05 13:09 # M/D Reply Permalink

    1. 예전에 이 강변북로를 지도에서 봤을 때 글에 쓰신 것처럼 교량에서 강변북로로 내려가는 램프가 왜 4차선이 아닌 1차선 쪽으로 향하게 되었는지 궁금했는데, 이게 강변북로가 나중에 확장이 되어서 그런 기묘한 구조가 되어서 그랬군요.

    강변북로의 상행선 교량화 확장 사례와 같은 사례가 아주 없지는 않았습니다.(제가 과거 지도덕(!!)이기도 했습니다.^^;)
    보니 6번 국도의 양평 구간의 '용두대교'(횡성 방면), 46번 국도의 가평 구간 춘천 방면의 모 교량, 춘천 구간 춘천 방면의 '등선교'와 또.. 뭐였지..? 암튼 그 외 하나 더 있었습니다.

    2. 옛날에는 기술이 잘 발달하지 않아서 고가 교량을 확장하기가 어려웠는데, 지금은 잘 확장하기도 합니다. 서해안 고속도로의 박달2교를 인근에 광명역 IC를 신설한다고 해서 확장공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었습니다.

    근데 중부고속도로가 달리는 지역, 특히 경기도 광주-이천은 워낙에 험준한 지형이라서 그런지 발달된 기술로도 접근하기가 어려운가 보군요.

    3. 경부선 개통과 관련해서 박통의 소견은 흠좀무.

    1. 사무엘 2012/02/05 19:38 # M/D Permalink

      지리 지식이 풍부하시군요. 철덕으로 이어지기에 손색이 없는 좋은 배경을 갖추셨습니다. ㄲㄲ

      아울러, 서해안 고속도로와 외곽 순환 고속도로가 만나는 조남 분기점도 딱 정석적인 네 잎 클로버가 아닌 게, 좀 확장 공사의 잔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시는 곳이 서해안 고속도로 쪽과 가까우니 드리는 첨언입니다.

  2. 김재주 2012/02/05 14:27 # M/D Reply Permalink

    동서 방면 도로와 남북으로 가는 도로가 십자형으로 만나고 어느 방향에서든 모든 방향으로 진입할 수 있는 입체 교차로

    roundabout도 십자형 얘기만 빼면 다 해당하죠. 교통량도 더 수월하게 해결되고

    근데 이건 더 많은 공간을 요구하는지라...

    1. 사무엘 2012/02/05 19:38 # M/D Permalink

      로터리 말이죠? 그렇습니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는 그냥 입체 교차로가 아니면 4현시 신호 교차로 식으로 도로 운영이 좀 경직된 편입니다.
      재주 님과 컴퓨터/IT/전산학/프로그래밍 같은 쪽 말고 이런 분야 얘기를 나눈 건 거의 처음 같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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