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중에 혹시 옛날에 Alley Cat이라는 아래의 완전 구석기 시대 게임을 해 보신 분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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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해 봤다.
전설의 카세트테이프까지 접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1990년대의 16비트 IBM 호환 PC의 발전은 다 지켜본 세대이기 때문이다.

저 게임의 제목은 우리말로는 딱 ‘도둑고양이’라는 뜻이다.
내가 갓난아기이던 1984년에 만들어진 게임이요, (PC용이 1984년. 8비트 Atari용 원판은 1983년에!)
6만 바이트가 채 안 되는 실행 파일 하나에 게임에 필요한 모든 코드와 데이터가 다 들어있다.
실행하면, 도.도. 시.시. 라~시라솔... 로 시작하는 그 중독성 있는 음악이 나온다.

실행 파일을 들여다보면,

This program requires a color graphics adapter.

라는 문자열이 있다.
This program requires Microsoft Windows도 아니고(과거에 윈도우 3.x용 프로그램이 도스에서 실행되었을 때 뜨던 실행 거부 메시지), VGA도 아니고.. 컴에 CGA가 없을 때 출력해 줄 에러 메시지가 들어있다니 도대체 얼마나 옛날 게임인 걸까? 320*200 4색짜리 그래픽 ㅋㅋ

이 게임을 만든 사람은 Bill Williams (1960-1998)라는 분이다. 정확히 말하면, John Harris라는 다른 프로그래머가 만들다 만 것을 이어받아서 자기 식으로 완수한 거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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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영문 위키백과)

아주 흔하고 동명이인이 많은 이름이긴 한데, William의 애칭이 Bill 아니던가? 그럼 동일 이름 중복?

그야말로 20대 초중반의 나이에 그 열악한 하드웨어에서 어셈블리 코딩만으로 저렇게 고양이가 뛰어다니는 세계를 창조했다는 게 심히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참고로 존 카맥(John Carmack)이 Doom 엔진을 만들어 낸 나이도 저 때와 비슷하다. 다들 25세가 채 되기 전이다! 천재들은 다 그 나이 때 이미 세상에 이름을 남긴다.

저 게임은 솔직히 내 취향은 아니었다. 나는 아케이드· 플랫폼 게임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HP가 없이 즉사하는 시스템을 별로 안 좋아했다. (사람을 조마조마하게 만들고 놀라게 해서-_-) 그리고 맨날 빗자루에 걷어 채여 날아가는 고양이가 좀 불쌍했다. 드럼통에서 창문 빨랫줄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그때 딱 창문에서 떨어지는 물건에 이따금씩 맞는 게 싫기도 했고.

하지만 게임의 세계관이 심히 창의적이고 독특한 건 사실이다. 게임은 몰입도가 상당히 높다. 게임 속의 고양이는 끊임없이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길바닥에서 고양이가 좀 지체하고 있으면 개가 달려와서 고양이를 죽인다. 드럼통에도 너무 오래 있으면 밑에서 괴물 머리가 툭 튀어나오면서 고양이를 밑으로 쫓아낸다. 방에 들어가서도 안심할 수 없다. 빗자루의 방해를 안 받고 미션을 완수하려면, 주기적으로 계속 바닥을 돌아다니면서 흙먼지를 묻혀 줘야 한다. 고양이가 좀 발 붙이고 쉴 틈이라곤 없다.

보글보글만큼이나 게임에 갑툭튀하는 랜덤한 요소가 많다. 화살표 키도 어떻게 조작하냐에 따라 고양이의 이동 속도와 점프 방향이 생각보다 다양하게 바뀐다. 나름 머리를 써서 만들었다는 흔적을 느낄 수 있다. PC 스피커만으로 상당히 정교하게 합성해 낸 효과음도 일품.

이 게임은 딱히 엔딩이 없어서, 퀘스트를 달성해서 암고양이를 만난 뒤에도, 진행 속도와 난이도만 더 올라간 채 게임은 한없이 반복되었다. 또한 원래 PC가 아닌 게임기용으로 만들어져서 그런지 PC 버전도 종료 기능이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컴퓨터를 그냥 끄거나 Game Wizard 같은 유틸리티의 Crash back to DOS 기능을 사용해서 빠져나가야 했다.

난 Bill Williams의 작품이라고는 Alley Cat밖에 알지 못하지만, 외국에 있는 어느 고전 게임 개발자 열전 사이트에서는 그를 1980년대를 풍미한 천재 게임 개발자라면서 게임 디자인계의 ‘스탠리 큐브릭’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His games are completely original and stunning.”

그는 1990년대에는 게임 개발을 완전히 접고, 뜻밖의 진로를 선택했다.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목회를 할 의향으로 시카고에 있는 루터 신학교에 돌연 입학하여, 1994년에는 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재학 중에도 성경 탐구에 대한 열의가 남다른 우수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下에서 계속됨)

Posted by 사무엘

2012/02/07 08:18 2012/02/07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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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범준 2012/02/07 11:38 # M/D Reply Permalink

    1. 이 Bill Williams라는 사람은 여러 면에서 놀랍군요.
    대부분의 프로그래머들은 거의 그리스도인들이 없는 게 보통이었는데
    이 사람은 골수 신앙인인데다가 20대 당시에 이미 세상을 저렇게 떠들썩하게 했다니!! 귀가 쫑긋한데요.

    2. 링크 거신 영문 글을 읽어 보니 Bill이 게임 프로그래밍을 완전히 접고 신학의 길로 접어든 이유를 '자신의 어떤 경험을 통해 악몽에서 벗어났다'고 재미있게 기술했더군요. 자신의 선천성 질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한 그의 집념이 어떠했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었습니다.

    신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지 몇 년 만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신앙 열정은 귀감이 됩니다.

    1. 사무엘 2012/02/07 17:59 # M/D Permalink

      2, 30년 전의 컴퓨터 환경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하편에서는 곧바로 이 사람의 장애와 시련에 대해서 더 흥미진진한 얘기가 이어질 겁니다.

    2. 아라크넹 2012/02/09 14:31 # M/D Permalink

      의외로 고전게임계에 기독교인이 꽤 있습니다. TASvideos를 만든 사람도 기독교인인 걸로 알고 있고요.

    3. 소범준 2012/02/09 16:02 # M/D Permalink

      아라크넹>
      잘 알려지지 않은 예가 또 있었나보군요.
      짚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2. 김 기윤 2012/02/07 15:45 # M/D Reply Permalink

    처음에 스크린샷만 보고, 처음 보는 건데 라고 생각을 했는데,

    왠지 이상하게 엄청난 기시감이 느껴져서 검색해서 스크린샷을 확인해 보니, 내가 한 적이 있는 게임이다, 라고 생각하게 되고, 어떻게 exe 파일을 구해서(...) 돌려보고나서 제가 해본 적이 있는 게임이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언제 플레이했는지는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확실하게 이건 플레이해 본 적이 있다는 기억이 있다는 것으로 후덜덜 상태..(...)


    여담으로, 카세트 테이프 하니, 이전에 부모님과의 대화 내용이 떠오릅니다. 아버지께서 어찌저찌하여 88년도에 처음으로 컴퓨터를 구입했다고 했는데, 무려 3개월치의 월급(..)을 부어서 질렀고, 그때 그 컴퓨터는 카세트 테이프 부팅 방식이었다고..

    1. 사무엘 2012/02/07 17:59 # M/D Permalink

      기윤 님은 도스 자체를 거의 경험하지 않으셨을 것 같은 세대인데 이 옛날 게임을 해 본 적이 있다니.. 무척 놀랍습니다.
      아버님도 음향 장비를 비롯해서 여러모로 얼리 어답터이시군요.
      하긴, 옛날에 매킨토시 컴퓨터를 안 사고, 돈 더 보태서 강남에다 집을 사 놨으면 지금쯤 벼락부자 됐을 거라고 한탄(?)하는 IT 얼리어답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2. 김 기윤 2012/02/07 18:41 # M/D Permalink

      저는 집안 환경이 저러다보니, 도스를 경험하지 못할 세대...가 되어야 하지만, 어렸을 적부터 도스를 가지고 놀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기초 도스 명령어+mdir 에 익숙했고, 각종 고전 게임(너구리, 고인돌, 페르시아의 왕자, Transport Tycoon 등등)에도 익숙합니다. orz.

  3. Lyn 2012/02/08 09:02 # M/D Reply Permalink

    역시 천재들 ...

    1. 사무엘 2012/02/08 23:07 # M/D Permalink

      어렸을 때는 이런 게임이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줄로만 알았지만, 내가 직접 프로그래밍을 공부하고 나니 그 디테일이 짐작이 가고, 그 시절에 벌써 이런 걸 상상하고 만들어 낸 게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할 수 있더군요. ^^
      옛날에는 부족한 하드웨어 자원으로 정말 기발하고 창의적이고 심오한 게임이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4. 근성인 2012/02/10 16:43 # M/D Reply Permalink

    허 이럴수가 저건 초딩때 윈95 돌리던 시절에 했던 게임인데. 거진 5.25 인치 디스켓 돌리면서 하던 때니 되게 오래됐구만.

    1. 사무엘 2012/02/10 23:12 # M/D Permalink

      김 기윤, 근성인 님 세대에도 Alley Cat을 해 본 가이가 있다니 놀랍기 그지없구나??

  5. 정 용태 2012/02/13 16:21 # M/D Reply Permalink

    발자국 잔뜩 남겨서 빗자루 일시켜놓고 치즈속의 쥐를 잡는 쾌감과 달리기 도움닫기를 해야 높이 뛰어지는 경험, 교미;;;;;를 위해 암컷이 있는 창문에 뛰어들어서 꼭대기에 있는 암컷과 만나기 위해 함정을 피해 움직이면서 플레이했던 기억이 납니다 ^^ 잠시도 멈출수 없었죠.. 줄에 매달려 있으면 창문에서 쓰레기 던집니다;;; 가끔씩 미친듯이 개한테 돌진했던 ㅋㅋ 오프닝의 음악은 Titus FOX의 배경음악과 함께 아직도 음이 정확히 기억에 남네요...

    1. 사무엘 2012/02/14 08:51 # M/D Permalink

      잘 아시네요. ^^ 지금까지 생각해 봐도 Alley Cat 같은 시스템을 갖춘 게임은 찾기 힘들 것 같습니다. 재미있냐 없냐, 취향에 맞냐 아니냐를 떠나서 정말 독창적이지요. 이 모든 걸 정말 신의 경지인 최적화로 그 자그마한 실행 파일 하나에다 다 집어넣은 것도 기술적으로 대단합니다.

  6. 더듬이군 2013/11/05 02:13 # M/D Reply Permalink

    깜짝놀랐습니다.이 게임을 보게되다니 그림만봐도 추억이 많이 생각나는군요 어릴적 이게임과 또 여러게임들이 생각나네요.잘보고갑니다..

    1. 사무엘 2013/11/05 11:42 # M/D Permalink

      넵, 옛날 추억에 공감해 주셔서 반갑고 고맙습니다. ^^

  7. 산비 2023/06/29 01:54 # M/D Reply Permalink

    추억의 게임 이름을 드디어 찾았네요.
    좋은 포스팅 감사합니다.
    286 XT 로 플레이하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네요.

    1. 사무엘 2023/06/29 09:57 # M/D Permalink

      아앗.. 저 골동품 게임을 기억하는 세대이시군요. 반갑습니다~~ ㅋㅋㅋ
      후대에 모바일용으로 저 게임의 리메이크? 리마스터작도 나왔지요.
      옛날 글을 찾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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