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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6/06/03 해와 빛 by 사무엘

해와 빛

1. 해

박 두진이라는 사람은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어쩌구~~)"
중학교 국어(문학) 시간에 배우는 '해'라는 시를 지은 문인· 시인으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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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글귀가 물 흐르듯 흐르고 흥겹고 운율이 느껴지는 게.. 곡을 붙여서 노래로 만들어도 될 것 같다. 건전가요도 될 수 있고 민중가요도 되고, 어쩌면 적절한 장르의 뮤지컬 넘버도 될 수 있지 않을까?

검색을 해 보니 민족주의 기조가 넘치던 1980년대는 말할 것도 없고, 21세기에도 몇 차례 곡이 붙은 사례가 있었다.
아~ 저 사람이 연세대 교수를 해서 그런지, '해'의 싯구 일부가 아예 연세대의 응원가로 쓰인 적도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박 두진은 같은 학교에서 후학인 마 광수를 발굴해서 문단에 등단도 시켜 줬다고 하는구나.
나는 일단 그런 선례들에 대해서는 모르는 상태로 얘기를 계속하겠다.

이 시는 전반적으로는 흥겹고 즐겁고 밝고 긍정적인 분위기인데, 딱 한 구간 "달밤이 싫어" 여기만 잠시 암울하고 부정적이다.
이건 영락없이 동요 "아기염소"의 부정적인 구간 "빗방울이 뚝뚝뚝뚝 ... 엄마 찾아 음메" 같은 느낌이 든다. 선율을 붙인다면 "달밤이 싫어.." 구간만 그렇게 단조 코드로 표현하면 되겠다. ㄲㄲㄲㄲㄲ

그리고 이 시는 1946년 5월에 '상아탑'이라는 시집에 수록돼서 처음으로 발표됐다고 한다.
저 때는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았던 시절이다. 그땐 경부선 열차의 이름도 "해방자"(liberator)였으며, 광복 후 만들어지고 상영된 최초의 한국 영화도 "의사 안중근"이었다. 공교롭게도 전부 다 1946년 5월 비슷한 시기의 일이다~!
문학, 영화계에서는 그야말로 한이라도 풀듯이 온통 해방의 감격을 표현하고, 반일 항일 독립운동을 예술로 표출하고 있었다.

그러니 박 두진의 저 시에서도 해가 무엇을 의미하고 달밤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당대 문맥을 투영시켜 보면.. 뭐 안 봐도 비디오, 안 들어도 오디오였다.
이 시가 당대에도 반응이 좋았는지, '해'는 1949년에 출간된 박 두진의 개인 시집에도 실리고, 더 나아가 시의 제목이 시집 전체의 제목으로도 채택됐다.

이런 '해'라는 시를 썼던 사람이 그로부터 몇 년 뒤 1951년에는 6· 25 노래의 가사도 썼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이때는 해가 떠오르는 기쁨이고 감격이고 없이 "저 불의의 역적 멧도적 오랑캐들을 하늘의 도움이라도 빌려서 무찌르고 섬멸해 버리리라~~ 우리는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우리라~ 정의는 반드시 승리하리라~ 우리의 원쑤들을 단 하나도 살려두지 않으리라!!"
정말 비장하고 섬뜩하게 가사를 썼다. 그도 그럴 것이 북괴 공산당은 그 떠오르던 해를 도로 가려 버리는 먹구름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6· 25 노래는 같은으뜸음인 단조와 장조가 중간 전환되는 곡이다.
그래서 같은 시인이 그리 멀지 않은 시간 차를 두고 지은 '해'와 '6 25 노래'가 내 머릿속에 나란히 오버랩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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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하나 더.. "무찌르자 오랑캐 몇 백만이냐 / 대한 남아 가는 데 초개로구나"도 1951년 초, 1· 4 후퇴로 서울을 빼앗긴 지 얼마 안 됐을 때 만들어지고 발표된 시? 노래? 군가이다. 6· 25 노래와 시기적으로 비슷하다.
본인의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무찌르자 오랑캐.."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어린애들이 공기놀이를 하면서 동요처럼 즐겨 불렀다고 한다. 원제는 '승리의 노래'라는데, 뭔가 찬송가나 CCM의 제목처럼 느껴진다.

2. 빛

자, 이제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꺼내겠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인 2005년 7월경 새벽엔 이런 일이 있었다.
경기도 광주의 어느 산기슭 농촌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던 어느 가정집에서 불이 났다.

그런데 화재 원인이 참 민망 기구한 게, 무슨 누전이나 배터리 때문이 아니고 완전 정반대.. 밤에 켜 놓고 방치했던 촛불 때문이었다.
그 집은 전기료가 몇 달간 많이 밀리는 바람에 전기가 완전히 끊겼던 것이다.
직장인 점심 밥값이 4~5천 원이던 20년 전 물가로 가정용 전기료가 88만 원이나 밀린 건 적은 양이 아닐 테니까..
아무리 시골이라지만, 그 더운 7월에 전깃불뿐만 아니라 선풍기, 에어컨, 냉장고를 가동을 못 하고서 일가족이 도대체 어떻게 살았나 싶다.

부모가 범죄, 이혼 등으로 인해 막장 파경이거나 심각한 질병· 장애가 있는지 구체적인 정황은 모르겠지만, 거기는 전기료가 밀릴 정도로 많이 가난했다.
슬하에 10대 나이의 딸이 둘 있었는데, 저 때 중학생이던 막내딸이 집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화마에 참혹하게 희생되고 말았다.

이 소식이 매스컴을 타자 뒤늦게 이웃 주민들과 관공서에서 힘을 합쳐 새 집을 마련해 주고, 맏딸이라도 학비 지원해 주고, 누군가가 밀린 전기료도 대납해 줬다.
그리고 나라에서는 전기료가 아무리 밀려도 어느 가구든 "형광등 3개와 TV 하나" 정도 켤 수는 있는 최소한의 전기는 끊김 없이 공급하도록(그게 가능하냐? 그럼 총 몇 와트시 정도??) 인도적 차원의 조치를 추가했다. =_=;;

물론 뒤늦게 그런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건 아니니.. 동생을 잃은 언니는 진짜 한동안 넋이 나갔다고 하며, 애비 되는 사람은 자기가 무능해서 이 지긋지긋한 가난 때문에 딸을 죽게 만들었다고 자책하고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다고 전해진다.

이 일이 있은 뒤, 한전에서 정말 뜬금없게 이례적으로 "빛으로 만드는 세상"이라는 동요까지 만들어서 공개하면서 이미지 광고를 내보낸 게 내 기억으로 아마 2005년 말~2006년 그 무렵이었다.
무슨 창작동요제 입상작이 아니고, 현직 교사도 아니고 기업에서 웬 동요를 만들면서 따스한 이미지 선전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

검색을 아무리 해 봐도 저 곡이 만들어진 사연, 배경이나 작사· 작곡자(유 재광)의 신상이 소개되는 건 이상할 정도로 없다. 정말로! 제목이 비슷한 "빛으로 만든 세상"과 혼동하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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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 정황이면, 아마 한전에서..
"매정하게 가정집을 단전시켜 버려서 촛불 때문에 집이 불 나서 애까지 죽게 만든 것에 도의적으로(법적으로는 아니지만) 책임져라"라고 불거진 여론을 의식해서 이미지 쇄신을 시도한 게 아니었을지..?? 이런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저 좋은 빛이라는 게 전기 에너지가 있으니까 1년 내내 존재 가능한 것이고, 그러니 전기를 공급하는 우리 한전이 최고... 그런 식으로 말이다. 남한 대한민국은 밤에 불이 꺼진 암흑천지인(인공위성 사진) 북한처럼 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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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우리는 백열등과 형광등을 거쳐서 인류 역사상 가장 효율이 높은 전기 광원인 LED등까지 발명하는 지경에 다다랐다. LED 덕분에 그 자그마한 스마트폰에 달린 꼬마전구가 어지간한 휴대용 손전등 역할까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스마트 팜 어쩌구 하면서 제한적으로나마 천장 없는 실내에서 식물 농사가 가능해졌다.;; 기존 재래식(?) 하늘에서는 햇볕과 햇빛이라는 넘사벽 급의 자원이 공짜로 쏟아지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자연재해도 쏟아지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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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물리적인 빛에 국한시키지 않더라도 성경도 빛에다가는 거의 무조건적으로 긍정적인 심상을 부여하고, 반대로 어둠은 일관되게 나쁘다고 디스한다.
창 1:2에 나오는 어둠, 고후 4:6와 6:14에 나오는 빛과 어둠, 엡 5:8과 살전 5:5에 나오는 '빛의 자녀', 요한일서에서 시종일관 나오는 '빛'... 이루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니 "빛으로 만드는 세상" 가사가 신앙적으로도 뭔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1950년대에 만들어진 옛날 동요인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은 어떨까?
얘도 가사와 곡이 매우 아름다우며 2000년대 초에 일본의 소학교 음악 교과서에 잠시 소개되기도 했을 정도로 명곡이긴 하다만.. 이 곡의 가사는 딱히 광명과 암흑을 비교하는 내용이 아니다. 그냥 "여름엔 파랄 거예요, 겨울엔 하얄 거예요"이다.

저기서 '빛'은 그냥 '색'이라는 의미이다. 한국어는 green과 blue를 별로 구분하지 않고 '푸르다'라는 말을 썼듯이, 심지어 color와 light도 별로 구분하지 않고 '빛'이라는 말을 썼다. 그래서 한자도 光(빛 광)뿐만 아니라 色도 "빛 색"이라고 불렀고, 색깔뿐만 아니라 '빛깔'이라는 말도 있었던 것이다.

즉, 결론적으로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의 가사는 "빛으로 만드는 세상"이 아니라 포카혼타스 "Colors of the wind"(바람의 빛깔)와 더 비슷한 공감각적 심상이라고 보면 정확하겠다. 저 동요가 일본어로 번역될 때도 응당 光이 아니라 色이 쓰였다.

영어에 man 남자/사람, good 좋다/선하다, day 낮/날 같은 중의성이 있는 것처럼.. 한국어에도 저 정도 중의성은 감수해야 하는가 보다. 사전만 보고 무식하게 곧이곧대로 번역하다간 실수하기 쉽다.

내 모국어인 한국어는 한편으로 괴상망측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 ㅁ과 ㅂ 대응(어머니 아버지, 물 불, 맑다 밝다, 묽다 붉다)이라든가, 빛과 색의 중의적 관계,
내가 아는 다른 어떤 외국어에서도 발견하지 못한 딱 한 단어짜리 '모르다' 동사,
하필 흑백과 삼원색만 활용 가능한 용언 형태로 말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꽤 심오하다는 생각도 든다. 잘 알다시피 영어는 '빛'이 '색'이 아니라 '가벼운'과 동음이의어 관계다.

이상이다.
아, 앞서 얘기했던 비극적인 화재 사고에 대한 내 견해는 전적으로 중립이다.
한전이 비난받아야 한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반대로 저 집 부모의 무능? 가난? 이 죄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누구 탓도 할 수 없이 운이 나빴던 안타까운 사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는 애한테 비싼 장난감을 안 사 줘도 유괴 범죄가 일어날 수 있고, (이 삼촌이 장난감 사 줄게!)
사 줘도 유괴 범죄가 일어날 수 있다는 소신이다. (오~ 이 집은 잘 사는가 보군!)
화재 역시 전기가 들어와도 날 수 있고, 전기가 없어도 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꼭 가난이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어 보인다.

뭐랄까, 6 25 전쟁 났을 때 모병관이 어린 꼬마한테 먹을거 주고 구슬리면서 "너희 아빠 어디 있는지 알아?" → "아 우리 아빠요?" (너무 순진해서 솔직하게 다 말함) → (아빠는 징집돼 끌려가고 전사) → 그 꼬마는 고아가 됐고, 나중에 다 커서야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됨
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거 갖고 그 꼬마나, 모병관 그 누구도 비난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것과 비슷한 모양새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6/06/03 08:35 2026/06/03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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