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 : 1 : 2 : 3 : 4 : 5 : 6 : ... 11 : Next »
김 종삼이라는 시인이 1971년에 발표했다는 <민간인>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본인은 먼 옛날 학창 시절 문학 시간에 아주 어렴풋이 이런 시를 접했던 기억이 있다.

1947년 봄
심야
황해도 해주의 바다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당포
사공은 조심 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


시의 제목부터가 군인이 아닌 사람이라는 뜻에서 '민간인'이라고 지었던 것 같은데..
얘는 읽어 보면 정말 섬뜩하고 비극적인 내용임을 느낄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헤밍웨이가 즉석에서 지었다는 6단어짜리 비극 소설이 곧바로 너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 같다.;;; 분위기가 완전 비슷하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아기용 중고 신발 판매. 사용된 적 없음)


원래의 시에서 언급하는 시기인 1947년 봄은 아직 남한 단독 총선거를 하기 전이고, 북한이 자체적인 애국가와 인공기를 제정하기도 전인 완전 초창기였다. 하지만 남북 분단은 갈수록 굳어지고 남북 왕래가 어려워지던 중이었다.

그 와중에 황해도 해주는 서쪽이 아니라 남쪽이 바다로 뻥 뚫려 있었다. 그러니 배 타고 전방의 바다를 향해 조금만 나아가면 38선 이남으로 갈 수 있었다.

빨갱이 치하에서 살 수는 없겠다 싶어서 이 지역 주민들 약간명이 모여서 탈북을 시도했다. 감시를 피해 보트 타고 해상으로 몰래 야반도주 중이었는데..
갑자기 아기 울음 소리 때문에 자기들의 존재가 노출되고 들킬 위험에 처했다. 그러자 아기의 부모는 눈물을 머금고 아기를 바다에 던져 버리게 됐다.

이게 바로 시가 묘사하는 상황이다. 시인은 어쩌다 보니 그 쪽배에 동승해서 이 사건이 벌어지는 걸 목격했던 모양이다.
사건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이건 1947년 이후로 1970년대가 될 때까지 20년이 넘게 잊혀지지 않는 엄청난 트라우마가 된 것 같다.

인간이 너무 굶주려서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자기가 죽을 지경이 되면... 인륜이고 천륜이고 인간성이고 다 없어져서 거의 동물로 퇴화해 버린다. 그래서 자기 친자식이라도 잡아먹거나 노예로 팔아 버릴 수 있다. 이런 건 비교적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사례이다.

그런데 목숨 걸고 어디를 탈출해서 몰래 피난 가고 도망치는 상황에서 예기치 못한 아기 울음 소리를 억제하지 못해서 걔를 불가피하게 버리게 되는 비극은.. ㅠㅠㅠㅠ 정말 할 말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저렇게 도망치다가 들키게 생긴 상황에서는 부모가 자기 한 몸만 희생함으로써 어차피 자녀라도 살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 게다가 어영부영 하다가는 자기 가족뿐만 아니라 남까지 다 죽이게 되니까.. 도저히 답이 없다.

게다가 이런 사례가 역사적으로 드문 것도 아니다.
위의 '민간인' 스토리의 해상이 아닌 육로 버전도 존재한다고 한다. 38선을 넘어서 일가족이 야밤에 월남을 시도했는데, 공산군 초소 부근에서 아기가 우는 바람에 엄마는 얘 입을 강제로 틀어막았다. 허나, 위기를 모면하고 확인해 보니 아기는 그 사이에 질식사한 상태였다고..

1907년 평양 대각성--은사주의 논란은 일단 논외로..-- 당시엔 길 선주 장로부터 시작해서 자기 죄를 자백하는 회개가 곳곳에서 터져나왔는데.. 그때에도 한 여인이 10여 년 전, 청일 전쟁으로 인한 피난 중에 자신의 아이를 죽게 했다며 참회했다고 한다. 위급한 상황에서 아기가 너무 우는 바람에 근처의 나무에다 걔를 부딪쳐서 죽게 했다고..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고 독소 전쟁 당시의 온갖 끔찍 잔혹한 회고가 가득한 회고록이 있다. 여기서도 어느 애엄마가 적군에게 들킬 위험에 처하자 결국 울음 소리를 없애기 위해 자기 아기를 우물에 던졌다는 얘기가 나온댄다. 우물 속에서 울음 소리가 완전히 멎어 버리자 주변 사람들은 죄책감과 절망, 멘붕에 빠져서 침묵하고 만다.

성경에도 대환란 중의 피난 상황에서 "임산부와 산모에게 화 있으리로다" (마 23:19)가 괜히 기록된 게 아니었겠다 싶다.
아 하긴, 출애굽기에서 모세의 부모가 생후 겨우 3개월이던 모세를 더는 몰래 키우지 못하고 버리기로 결심한 주 이유도 울음 소리 때문이었을 것이다(출 2:2-3). 그래도 그 울음 덕분에 이집트 사람의 동정심을 사서 살아남기도 했지만 말이다.

아울러, 울음 소리 때문에 아기를 죽인 것보다는 덜 비극적인지 모르겠지만 6 25 사변 초기에 이런 믿지 못할 일화도 있었다고 한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멀쩡한 남자들은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곧바로 모병관 일행에게 붙들려서 군대로 납치에 가깝게 끌려가는 지경이었는데.. 어떤 4살배기 딸의 아버지는 징집을 피하려고 잘 짱박혀 숨어 있었다.

그런데 징집관이 그 아이에게 먹을것도 주면서 꼬드겨서 “네 아버지 혹시 어디 계신지 아니?” 이렇게 물었는데 애가 순진하게 아버지가 숨은 곳을 발설해 버렸다. 이 때문에 아버지는 징집되어 끌려갔고, 전장에서 전사했다. 그 아이는 아버지가 어디로 가서 어떻게 됐는지를 그로부터 수십 년 뒤에야 알게 됐다고 한다.

옛날에 어디에서 들은 얘기인데 지금은 출처를 검색해도 잘 안 나온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한테 죄를 물을 수 없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는데 장병을 징집하는 업무를 수행했던 모병관을 비난할 수도 없다.
이런 것도 전쟁이 야기한 너무 슬픈 비극이다. 오로지 자기 권력욕을 위해 동족상잔을 추진한 이북 수뇌부들이 개XX일 뿐일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2/11/18 08:35 2022/11/18 08:35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2091

일본은 잘 알다시피 현재까지 지구의 전 인류 역사를 통틀어 자국민 거주지에 핵폭탄을 쳐맞아 본 유일한 나라이다. 그것도 두 번이나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렇게 되기란 엄청 무지막지하게 어려운 일인데 1945년 8월경의 일본은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단순히 침략 전쟁을 벌이고 점령지에서 민간인을 학살하는 평범한(?) 악행만으로는 절대 그렇게 되지 못한다.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제때 항복 안 하고, 총체적으로 멍청하고 병신같은 뻘짓만 골라서 하면서 천조국한테 개겼기 때문에 저 지경으로 참교육을 당한 것이었다. 지 무덤을 파면서 매를 벌었다.

1. 원폭이 떨어진 곳

잘 알다시피 히로시마(6일)와 나가사키(9일)였다. 모두 후쿠오카 일대에 있으며 일본 본토의 완전 남서쪽 끝 지방이다. 수없이 많은 소이탄 폭격을 당해서 먼저 잿더미가 됐던 도쿄하고는 위치와 방법이 딴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거기 근처에 있는 고쿠라, 그리고 좀 더 동부의 교토도 목표물 후보로 거론됐었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인해 비껴 가게 됐다.

2. 원폭의 위력

원폭 이전에 인류 역사상 가장 대규모 폭발 사고였다고 여겨지는 건 1917년의 캐나다 핼리팩스 대폭발이었다.
거대한 화물선 한 척에 실려 있던 화약이 화재로 인해 몽땅 폭발하면서 TNT 2.9kt 정도의 위력이 발생했다고 추정된다. 도시 하나가 통째로 날아갔으며, 바닷가에서 불구경 하러 모였던 사람들이 파편과 잔해에 맞아서 사망자만 2천여 명이 발생했다.

그랬는데 우라늄235 기반의 히로시마 원폭의 폭발력이 TNT 16kt, 플루토늄238 기반의 나가사키 원폭의 폭발력은 TNT 21kt 정도로 여겨진다. 두 원폭 모두 무게는 그냥 4톤에서 4.5톤 사이였다는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그 뒤에 0이 3개가 추가되고도 남는 사기적인 에너지가 나온 셈이다.

배수량 3000여 톤급 화물선에 가득 실린 일반 폭약 vs 대형 폭격기에 실린 4.5톤짜리 핵탄두 달랑 하나의 위력 차이가 이 정도이니.. 원폭이 떨어졌던 당시에는 "이 폭탄은 30여 년 전, 핼리팩스 대폭발 위력의 수 배.." 이런 식으로 기사가 나갔었다. 지금이야 어디서 핵실험을 하면 "히로시마 원폭의 n배" 이렇게 비교 기사가 나가겠지만, 저 때는 헬리팩스가 기준이었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핼리팩스는 타이타닉 호의 침몰 지점과 꽤 가까이 있어서 5년 전엔 구조 본부가 설치되었으며, 사망자의 일부가 여기에 매장되기도 했다. 어째 1910년대에 굵직한 사건 두 건과 연루되면서 유명해졌다.

3. 원폭이 떨어진 방식

1940년대에는 아직 지금 같은 미사일이 없었기 때문에, 아음속 왕복 엔진 폭격기가 적진의 상공까지 직접 날아가서 폭탄을 떨궜다. 시간이 흐를수록 천조국은 일본과 더 가까운 태평양의 섬들을 점령했으며, 1944년엔 B29라는 걸출한 고성능 장거리 폭격기까지 개발되어 드디어 일본 본토를 직접 폭격할 수 있게 된 덕분이다.

열악하던 둘리틀 특공대 시절처럼 깜짝쇼만 한 뒤에 비행기를 버리고 불시착하는 게 아니고, 살을 많이 뺀 함재기들이 평타 정도 폭격을 하다가 근처의 항공모함으로 허겁지겁 복귀하는 것도 아니고, 더 크고 묵직한 폭격기가 장거리 원정을 가서 왕창 폭격을 퍼부은 뒤에 공간 넉넉한 섬 비행장으로 귀환한다는 것이다.

뭐, 이러고도 일본이 항복을 안 했으면 나중엔 연합군 육군까지 본토에 상륙해서 폭격이 아니라 포격을 퍼부었을 것이다. 나치 독일의 베를린이 함락됐을 때처럼 말이다.

4. 비행기들이 출격 방식

원폭을 떨군 폭격기는 북마리아나 제도의 '티니안 섬'에 있는 미군 기지에서 발진했다. 얼추 괌 근처라고 생각하면 된다.

폭탄 투하 한 시간쯤 전에 먼저 정찰기가 홀로 날아서 투하 지점의 날씨 같은 걸 최종 체크했다. 그 다음으로 폭격기 본체, 카메라맨이 탄 촬영 비행기, 계측기를 실은 비행기가 같이 날아갔고.. 폭탄을 투하한 뒤에는 비행기 세 대가 모두 폭발 예정지로부터 급선회· 급강하하며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파일럿들은 이런 기동 훈련을 반복해서 받으면서 연습했다.

폭탄은 여객기 순항 고도에 맞먹는 거의 9km대 고도에서 떨어져서 히로시마 little boy 기준, 570m대 상공에서 터졌다. fat man도 뭐 대등소이하다.

히로시마에 간 폭격기와 나가사키에 간 폭격기는 같은 B29 기종이고 같은 지역에서 발진하긴 했지만 서로 다른 기체였다. 전자의 애칭은 Enola Gay이고 후자는 Bockscar인데.. 아무래도 '최초'의 타이틀을 획득한 전자가 압도적으로 더 유명하다.
두 폭격기의 승무원도 다 달랐다. 동일한 기체나 동일한 승무원이 두 도시에 원폭을 동시에 떨구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5. 원폭 재료의 수송

폭격기로 원폭을 떨어뜨리려면 그 전에 원폭을 폭격기의 발진 기지로 실어나르기도 해야 했다. 단, 보안을 위해 완제품(?)이 아니라 재료와 부품만 날랐고, 조립은 출격 직전에 기지에서 행해졌다.

고농축 우라늄을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에서 티니안 섬까지 수송한 건 순양함 USS 인디애나폴리스 호였다. 얘는 기밀 유지 명목으로 호위함 하나 없이 살금살금 몰래 항해하며 이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니 우리는 에놀라 게이 폭격기를 기억하기에 앞서 인디애나폴리스 함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배는 그 다음 임무 수행을 위해 필리핀 레이테 섬으로 항해할 때도 호위함 없이 위험하게 다니다가.. 1945년 7월 30일, 인근의 일본 잠수함으로부터 어뢰를 맞고 격침 당해 버렸다.

이제 일본은 전쟁에서 다 졌고 바로 며칠 전에 포츠담 선언 최후통첩까지 나갔겠다, 우리 천조국한테 위험 요소 따위 없을 거라고 상부에서 함장의 요청까지 묵살하면서 너무 방심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종전 직전에 이렇게 순양함 한 척을 허무하게 잃고 말았다.

그런데도 미 군부는 정신을 못 차리고 인디애나폴리스 측의 구조 요청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않아서 수많은 병력을 망망대해 위에서 죽게 만들었다. 그래 놓고는 오히려 함장을 자기 책임을 온전히 수행하지 않고 배와 부하들을 날려먹은 패장으로 몰아붙이면서 진급을 누락시켰다. 그 함장은 말년엔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자살까지 하고 말았다.

먼 훗날, 이 사실이 알려지자 인디애나폴리스를 격침시켰던 일본 잠수함 함장이 직접 "인디애나폴리스 측은 특별히 부주의하거나 잘못한 게 없습니다. 우린 그 배가 어떤 기동을 하더라도 공격해서 격침시킬 수 있던 상태였습니다"라고 인증했다. 그리고 여러 증거들이 더 밝혀지면서 함장은 클린턴 대통령 시절이 돼서야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인디애나폴리스가 아직 우라늄을 싣고 있던 상태에서 격침됐다면...? 햐~ 이건 "아폴로 13호가 달 착륙선을 분리시키고 난 뒤에 폭발했다면?" 같은 급의 비극이 됐을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루스벨트 대통령은 진주만 공습을 당한 뒤에 격노해서 어떻게든 일본을 상대로 보복하라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원폭의 사용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이었다.

그에 비해, 저 그림에서 껄껄 웃고 있는 후임 트루먼 대통령은 취임한 뒤에야 원폭의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보다 더 적극적으로 원폭 사용을 지지하고 승인했었다.
허나, 그는 훗날 6· 25 때 한반도에서 원폭을 또 동원해서 북괴 중공을 몰아내자는 군부의 제안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상이다. 이 글의 요지는 인류 최초의 핵무기 투입은 절대로 그냥 이뤄진 일이 아니며 그 전에 치밀한 사전 준비가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천조국은 이런 원폭을 떨구기 전에 핵 실험까지 미리 해 봤다~!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 주 모처의 사막에서 나가사키 원폭과 비슷한 규모의 플루토늄 폭탄을 터뜨려 본 것이다. 그러니 쟤들은 자기들이 터뜨리는 폭탄이 위력이 얼마나 사기적인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도 아니었다.

물론 이 핵 실험은 진행 당시에는 극비로 부쳐졌고 종전 이후에야 비밀이 풀렸다. 어디서 뭐가 터졌다는 낌새가 신고된 건 모 공군 기지의 탄약고가 벼락 맞고 통째로 유폭해 버렸는데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는 식의 거짓말로 무마시켰다.
'트리니티(삼위일체) 실험'이 바로 냉전 이전에 행해진 전무후무 유일한 핵 실험 기록이 됐다.

* 원폭을 맞은 것 갖고 굳이 죽은 일본 사람들을 희화화하면서 '잘 죽었다, 쌤통이다' 이러는 거야 인간말종 짓이다.
그러나 지들이 한 짓에 대해서는 입 싹 씻고 원폭 맞은 불쌍한 피해자 행세만 늘어놓는 건 더 혐오스럽고 가증스러운 짓일 것이다.;;

예전에 본인은 나치 독일의 유대인 수용소의 사진 기록에 대해 소개했던 적이 있다.
나치 독일이 패망하고 수용소가 해방된 뒤에 연합군이 들어와서 찍은 사진 말고.. 쟤들이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때 내부를 목숨 걸고 찍은 진귀한 사진은 딱 네 장이 전해진다고 말했었다. (☞ 이전 글 보기 )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런데 그것처럼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지고 나서 찍힌 제일 따끈한(폭발 이후 겨우 3시간 남짓 경과) 현장 사진은 딱 5장이 전해진다고 한다. 마츠시게 요시토(1913-2005)라는 일본인 기자가 찍은 건데.. (☞ 보기)
이건 뭐 혐짤은 전혀 없고, 평범한 전쟁 폐허 속에서 흙먼지 뒤집어쓴 사람들이 거지꼴로 앉았거나 줄지어 선 모습이 전부이다. 훨씬 더 끔찍한 혐짤 급의 시체 사진은 일부러 의도적으로 찍지 않았다고 한다.

패전한 일본을 접수한 미국에서는 원폭 피해자의 참상을 묘사한 글이나 현장 사진은 절대로 언론을 타지 못하게 아주 강압적으로 검열하고 찍어눌렀다고 한다. 반전 반핵 여론이 조성되지 않게 할 의도였지 싶다. 그래서 저 사진들도 GHQ가 일본에서 철수한 1952년쯤 돼서야 공개될 수 있었다.

그래서 대외적으로는 간지나는 버섯구름 사진만 매스컴을 잔뜩 탔을 뿐, 버섯구름 아래에서 벌어진 일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 버섯구름조차도 위에서 보다시피 히로시마 껀 영 별로이고 나가사키 것이 훨씬 더 멋있으니 그것만 사골이 되도록 인용되고 쓰였다.

Posted by 사무엘

2022/08/05 08:35 2022/08/05 08:35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2051

1. 1871년

(1) 조선에서는 1871년은 무려 천조국과 맞서 전투를 벌인 '신미양요'가 벌어졌던 해이다(6월).
당연히 절대적인 군사력으로는 조선이 택도 없이 쳐발렸다. 상대방은 그 시절에 벌써 초보적인 잠수함과 철갑선과 철도와 기관총, 후장식 저격총을 굴리면서 내전을 벌였던 미친 나라이다. 어디 조선 따위가.. -_-;;

전사자 교환비는 기관총 소지한 문명국 vs 화살이나 딱총 소유한 미개국 같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조선 병사들은 뭔 신념이 있었는지, 무식하면 용감하다 급으로 탈영병 한 명 없이 사기가 충만했으며, 정말 용맹하게 맞서 싸웠다.

총알이 다 떨어진 뒤엔 돌 던지고 흙을 뿌리기라도 하면서 양키 코쟁이들한테 끝까지 저항했다.
포로로 잡혀 결박당해도 밥과 물을 일체 얻어먹지 않았으며.. 목을 드러내 보이면서 차라리 찌르라고, 자길 죽이라고 길길이 악을 쓰고 날뛰었다. 아니, 포로로 잡히기도 전에 한강으로 뛰어들어 줄줄이 자결한 병사 역시 부지기수였다.

이건 어찌 보면 70여 년 뒤의 태평양 전쟁 때 세뇌된 일본군이 미군한테 한 행동과도 비슷했다. (음 그래도 반자이 어택까지는.. -_-;; )
남북전쟁에서 죽을 고생을 하다 여기까지 온 미군 베테랑들도 조선군의 이 병맛 같지만 너무 진지하고 숙연한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렇게 맹렬히 저항하지, 지정학적으로 너무 멀고 별 메리트 없지.. 자기들도 남북전쟁 폐허를 수습하느라 정신없지..
여기는 천조국이 보기에 전략적 가치가 별로 없어 보여서 쟤들도 그냥 철수해 버렸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대원군은 자뻑하여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정책을 강화하게 된다.

그 뒤로 천조국은 조선을 결코 직접 침략하지 않았다. 자기들이 침략할 가치를 느끼지 않으니 그냥 이웃의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는 걸 걍 묵인하기로 입을 맞춰 버렸을 뿐이다. (가쓰라-태프트 밀약)

(2) 자 다음으로, 서양에서 1871년은 프랑스가 보불 전쟁에서 패배한 해이다(5월).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뜯기고 알자스· 로렌 지방을 빼앗겼으며, 소설 '마지막 수업'의 배경으로도 언급된 그 유명한 전쟁 말이다.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치욕적인 흑역사이다.

프랑스와 독일의 엎치락뒷치락 악연은 훗날 1차 세계 대전 때 반대로 독일이 져서 천문학적 배상금크리, 그러다가 2차 대전 때는 또 반대로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해서 비시 프랑스 괴뢰 정부가 등장하는 식으로 더 이어졌다. 2차 대전 이후에 세계 질서가 개편된 뒤에야 두 나라는 표면적으로 화해하고 협력하게 됐다.

1871년이 프랑스의 역사에서 더욱 특이한 시기인 이유는.. 저런 혼란스러운 패전 시국을 틈타서 '파리 코뮌'이라는 사회주의/공산당 정권이 수도 파리를 점령하고 70일 남짓 집권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다.

그 당시로서는 굉장히 진보적인 정책을 많이 표방했었지만, 공산당 특유의 과격한 과거 단절 노선은 어딜 가지 않았다. 오래된 프랑스 문화재 건축물들이 이때 많이 박살났었다.
또한, 혁명의 나라, 미터법의 원조 나라 아니랄까 봐, 시계와 달력까지 10진법 기반으로 고쳐서 시행했던가 보다. 무엇이든 과거 레거시와는 싹 단절이었다.

하지만 얘들은 오래 못 가고 무력으로 토벌됐다. 이때도 과거의 프랑스 대혁명과 자코뱅 공포정치(1794), 홍 경래의 난(1812), 갑신정변(1884), 청나라 태평천국의 난(1864), 우리나라 6 25 부역자 인민재판(195x) 따위에 결코 뒤지지 않는 잔혹하고 야만적이고 끔찍한 피바다가 벌어졌다. “뒈져라 빨갱이!” 우리나라만 이념 갖고 서로 죽고 죽이던 게 아니었던 것이다.

공산당 인터내셔널가가 이 파리 코뮌의 투쟁을 모티브로 삼아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러니 1871년은 우리나라와 프랑스의 관점에서 꽤 흥미로운 해였다.
프랑스는 아무래도 영국 독일 미국하고는 동네 물이 좀 다르고, 러시아와 비슷한 기운이 있긴 해 보인다.;;
그나저나 2024년 올림픽이 파리에서 열릴 예정이군..

2. 1894년

그 다음으로 본인이 주목하고자 하는 연대는 1894년이다.
찬송가 중에서 '내세, 천국'을 노래하는 곡들은 크게 내 인생의 끝(사후 세계) 내지 이 세상의 끝(종말)으로 세부 주제가 또 나뉜다.
그냥 '육신의 장막을 벗고 주님 만나 보겠네, 셋째 하늘에 올라가겠네' 이런 건 내 인생의 끝이지만.. '나팔 소리, 새 예루살렘, 들려 올라감, 몸이 변화됨, 예수님 다시 오심' 이런 건 명백히 후자이다.

전자는 그나마 장례 예배 때도 어디서나 보편적으로 불릴 수 있다. "예수 믿어서 구원받고 죽어서 천당 간다" 이거야 기독교라면 이견이 없는 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자는.. 교파마다 해석이 차이가 나는 민감한 분야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교파 찬송가에 선뜻 수록하기가 참 난감하다.

우리나라 찬송가에서 드물게 종말을 다루는 곡의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 하나님의 나팔소리 James. M. Black (1856-1938) Milton
  • 오랫동안 고대하던 James. M. Kirk (1854-1945) McPherson

(주의 신부인 교회가 먼저 들려 올라갔다가 나중에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천년왕국이 임하는 건데.. 왜 "천년왕국이 이를 때" 들려 올라가는 걸까?? 후자곡은 가사가 무슨 생각으로 번역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ㄲㄲㄲㄲ)

그런데 위의 두 곡은 작사· 작곡자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가사가 비슷하고 리듬도 비슷하고, 작사· 작곡자도 이름이 묘하게 비슷한 데다 거의 동시대를 산 미국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결정적으로 이 두 곡은 모두 1894년에 발표되었다고 한다~! 신기하지 않은가?

이 시기에 우리 조선의 사정은 어땠는가??
갑오개혁, 청일 전쟁, 전 봉준의 농민군 항쟁, 우금치 전투..;;
개막장 탐관오리가 백성 등골을 빼먹지, 나라는 남의 나라 전쟁터가 됐지, 왕이라는 작자는 외국을 끌어들여서 민란을 진압하고 자국민을 학살했지.. 정말 생각도 하기 싫은 끔찍한 헬게이트에 혼돈과 환란 그 자체였다.

그 동안 천조국에서는 저렇게 성도들이 변화될 것이고 예수님이 다시 올 것임을 노래하는 찬송가가 만들어지고 발표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선교사가 이 꿈도 희망도 없던 조선 땅에 와서 복음 전하고 학교 짓고 병원을 만들었다. "이 사람들에게는 비누와 성경이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말이다.;;;

1800년대 말은 세계 열강의 관점에서는 잘 아시다시피 벨 에포크, 한창 과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팽창하던 리즈 시절이었다. 물론 그런 나라의 자국민이라도 로동자로 저렴하게 착취 당하던 계층이라면 인생이 마냥 행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허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이 아예 피식민지 사람들의 처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일본만 해도 이때는 근대화 잘해서 아주 잘나가던 시대였다. 그래서 이 시기의 자국 모습을 묘사한 작품들은 묘하게 서양 냄새가 많이 나고 희망적이고 몽환적이다. 찬송가 하나만 생각하다 보니 조선하고는 어쩜 이렇게 극과 극이었나 하는 생각이 덩달아 들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2/07/18 08:36 2022/07/18 08:36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2044

1. 8 3 사채 동결 조치

1972년, 박 정희 시절에 국내에서 시행됐던 8 3 사채 동결 조치는

  • 그린벨트와 마찬가지로 국가가 개인의 재산과 시장 구조를 인위로 좌지우지했던.. 반시장적이지만 필요악 성격이 있는 조치였다.
  • 김 영삼 때의 '금융실명제'와 더불어, 우리나라 헌정사상 제일 마지막에 행해졌던 대통령 긴급명령이다. 둘 다 금융· 경제 분야라는 공통점이 있다. (마지막 계엄과 마지막 국민투표는 5공 시절)
  • 우리나라가 그때까지만 해도 국가 기반이 얼마나 허술하고 경제 구조가 얼마나 취약했는지, 오죽했으면 경제 개발을 위해서 그런 통제가 필요했는지를 감안할 필요가 있다. 얘는 10월 유신과도 관계가 있다.

박 정희 시절에 우리나라는 무슨 공산주의 식으로 사유재산을 없앤다거나 땅을 몽땅 국유화한다거나 통치자를 우상화하거나 인민의 거주 이전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산업· 경제 구조가 완전히 자유 방임인 것도 아니어서 국가가 이것저것 통제를 많이 했다. 이건 분명히 짚고 넘어갈 점이다.

그때는 국가 차원에서 돈줄이 끊어지지 않게 하고, 그리고 공급이 충분치 않은 원자재나 농수산물에 수요가 너무 쏠리는 것을 분산시켜야만 사회 안정을 유지시킬 수 있었다. 가령, 혼· 분식 장려 운동은 쌀 소비를 제어하려는 취지였으며, 연탄 보급은 산림을 보호하고 비싼 석유의 소비를 억제하기 위함이었다.

2. 수도 이전 계획

과거에 일제 강점기가 태평양 전쟁과 일제 패망 같은 이변 없이 20세기 중후반까지 계속됐으면 한반도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정황상 조선인에게도 참정권이 주어졌을 수 있고, 철도의 관점에서는 만들다가 말았던 동해중부선이 완공됐을 것이다. 경부-경의선뿐만 아니라 경인선과 경원선의 복선화는 그 시절에도 이미 논의됐던 계획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1960년대 자료에 따르면, 쟤들은 식민지 조선의 수도를 경성에서 근처의 용인으로 옮길 계획이 있었던 것 같다. (출처: <국토종합개발의 역사>, 일본 국토계획협회, 1961) 음.. 도대체 왜?
하긴, 서울 구시가지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한데 엉켜 살기엔 너무 비좁아지긴 했다. 북쪽은 산으로 가로막혀서 더 확장을 못 하고..

그런데 지금 서울처럼 한강 이남을 개발하고 다리를 잔뜩 건설하는 게 아니라, 다른 장소를 개척할 생각을 했다는 게 흥미롭다.
심지어 조센징들은 만주로 쫓아내고 일본인들 뉴타운을 조성하려 했다는데.. 현실성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교통 연계는 어찌 될까? 수려선이 있긴 하지만 얘는 협궤였다. 얘가 당장 표준궤로 개궤되고 복선화도 되고, 경부선과의 연결선이 만들어져야 했을 것이다.

한편, 해방 후 리 승만 할배 시절에야 '경성부'가 서울 '특별시'로 바뀌었고 수도 이전 따위는 전~~혀 논의될 가치가 없는 주제였다. 하지만 1970년대에 박 정희는 남한의 중심부인 충청도쯤으로 수도 이전을 염두에는 두고 있었던 것 같다. 국토 균형 개발이라기보다는 서울이 북한과 너무 가까워서 불안하다고 말이다.
무장공비들이 청와대 코앞까지 침투했던 1 21 사태가 큰 트라우마를 남겼지 싶다.

(내 개인적으로, 박통 시절에 훗날 통치 스타일에까지 영향을 줬을 정도로 비극적이었던 사건 둘은 1 21 (1968), 그리고 영부인 피격(1974)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이를 계기로 박통은 어디 멀리 가지는 못하더라도 차선책인 강남을 적극 개발했다. 강북 여기저기에 난립해 있던 고속버스 정류장들을 통합해서 마침 경부 고속도로와도 가까이 있는 서초구에다가 전용 터미널을 만들었다.
여기는 일제 시대에는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허허벌판 논밭이었다. 리 승만 때까지만 해도 경기도 광주군이었지, 애초에 인서울 자체가 아니었다.

박 정희는 유신 헌법 하에서 9대 임기만 채웠어도 1984년까지는 했을 텐데..
여러 기록에 따르면 자신의 마지막 과업으로 (1) 행정 수도 이전, (2) 1996년쯤을 목표로 올림픽 유치 준비, (3) 핵무기 개발을 목표로 잡았던 듯하다. 각색이 들어간 오글거리는 낭설일 수도 있겠지만, "핵무기를 국군의 날 기념식 때 짠~ 공개하고는 미리 점찍어 둔 후임에게 정권을 물려주고 퇴임한다~~" 급이었다고 한다.

저 사람 이후 행정수도 이전은 세종시로 그럭저럭 실현됐고, 이제는 대통령 집무실이 경복궁 뒤의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옮겨졌다.
올림픽은 뭐.. 바로 후임인 전땅끄가 의욕적으로 추진해서 결국 잘 해냈다. 다만, 핵무기는 미국의 강력한 견제와 반대 때문에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뭐.. 일제의 '용인 철도'와 마찬가지로, 계획만 했다고 해서 진짜 실현된다는 보장이 있지는 않다는 걸 유의하자.
완전히 180도 틀어져 버린 서울 지하철 1~5호선 초창기 계획처럼 말이다.
그리고 경제 개발 5개년 정도는 박 정희 이전의 장 면 내각도 생각했던 것이고, 심지어 박 정희도 그걸 참고하긴 했었다. 그러나 그걸 실제로 추진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3. 청와대 주변의 잠금해제 내력

청와대 부근은 1968년, 북괴 무장공비가 청와대 코앞까지 침투했던 김 신조 사태를 계기로 주변 경비가 역대 최고로 강화됐다. 주변의 산길까지 몽땅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고 묶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간첩 식별을 위한 주민등록번호(지금과 같은 번호 체계는 아니지만), 5분대기조, 실미도 공작원 양성 등 엄청 많은 일이 있었으며, 특히 군복무 중이던 사람들은 복무 기간 역대 최장(3년)으로 연장이라는 날벼락을 제대로 맞았다.

이런 것들에 비하면 청와대 주변 등산로의 전면 봉인쯤은 아주 작은 변화에 불과했을 것이다.;;
평창동 마을이 이때 육성됐으며 북악스카이웨이 도로도 1968년 9월에 개통했다. 그 당시엔 유료 도로였다;;

그로부터 무려 25년이나 지난 1993년, 김 영삼 대통령 취임과 함께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 등산로가 개방됐다.
단, 주요 전망대 포토존에는 공익인지 의경인지 어쨌든 군인까지는 아니지만 경찰에 준하는 아재들이 상주하고 있어서 청와대 쪽으로는 사진을 못 찍게 감시하곤 했다. 본인은 그 시절에 인왕산을 올랐던 경험과 기억이 있다.

청와대를 촬영하지 못하게 하는 게 목적이니, 차라리 해 떨어지고 시야가 불량해진 밤에 인왕산을 오르는 건 괜찮았던가 보다.
그리고 매주 월요일인가? 1주일에 한 번은 감시 요원들이 사정이 있어서 그런지 여전히 입산 금지였다.

1993년 말엔 창의문(a.k.a. 자하문) 일대 구간이 개방됐다고 한다. 헐~ 옛날엔 거기도 민간인 접근 금지였어?? 하긴 북악산 쪽은 월담하지 못하게 높은 담장이 쳐져 있긴 하더라.

한양도성의 북쪽에 있는 숙정문 일대는 2006년 4월, 무려 노 무현 시절에야 개방됐다고 한다. 식목일이 공휴일에서 제외되면서 거의 동시에 저기도 해금됐다는 뜻이다.
그 뒤 2007년은 1월 1일부로 전국의 국립공원들이 무료화되어 입장료 징수가 폐지됐다.
2007년 식목일엔 북악산의 한양도성 구간 산책로가 개방됐다. 단, 신분증 까고 목걸이를 받아야만 출입 가능하다. 남쪽의 청와대 방면은 말할 것도 없고, 북쪽의 기존 북악스카이웨이와 팔각정 방면으로도 왕래는 불가능하다.

2009년 7월 10일엔 북한산과 도봉산 사이에 있는 우이령길이 매일 최대 500명에 예약제 형태로 민간에 개방됐다. 사실, 안보보다는 환경 문제 때문에 오랫동안 선뜻 개방을 못 하고 있었다. 서울 지하철 9호선이 첫 개통을 앞두고 있고, 용인-서울 고속도로가 개통했던 시절의 일이다.
그리고 그 해 10월 24일엔 북악산에서 "성북천 발원지 - 하늘마루" 사이의 제2 산책로, 일명 김 신조 루트가 추가로 개방됐다.

그렇게 규제가 차츰차츰 풀리다가 2019년쯤..?? 인왕산의 촬영 감시요원이 없어졌다. 그리고 북악산 목걸이는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지만, 개인 정보까지 수집하지는 않고 그냥 드나드는 인원 집계만 하는 출입 태그로 바뀌었다.
2020년 11월부터는.. 산중턱의 북악스카이웨이에서 한양도성 청운대 - 곡장 사이를 오가는 등산로가 추가로 개방됐다.

그리고 2022년.. 대통령의 집무실 자체가 청와대 말고 용산 국방부 청사 안으로 이사를 감으로써.. 청와대를 경호하기 위해 취해졌던 온갖 봉쇄· 금지 조치들도 모두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북악산 등산로는 모두 개방되고 목걸이 자체가 폐지되고, 북악산은 지금의 남산이나 인왕산과 별 차이 없는 서울 중심부의 친근한 야산으로 바뀔 것이며, 청와대 기존 건물은 청남대의 서울 버전뻘 될 것이고 흠.. 큰 변화가 예상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제 구글 지도가 아닌 국내 지도 사이트들에서도 청와대의 전체 구조가 멀쩡히 다 표시된다.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경복궁이 조선 시대의 궁궐이라면, 청와대는 대한민국 초기의 궁궐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2020년대 이전의 과거를 배경으로 영화나 드라마 찍을 때 "청와대 세트"를 따로 차릴 필요가 없겠다.

Posted by 사무엘

2022/07/05 08:35 2022/07/05 08:35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2039

1. 러일 전쟁과 경부선 건설 시절

1900년대 초의 경부선 철도 건설은 러일 전쟁과 거의 같은 타임라인이다.
그런데 일본군 군복이 아직 블랙이었고-_- 러시아를 완전히 쫓아내서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기 전이던 이 시절엔..
미래 판도가 어찌 될지 모르니 쟤들도 조선을 생각보다는 신사적으로 대했다.

애초에 이때의 일본군은 40여 년 뒤 태평양 전쟁 때의 그런 미쳐 폭주하던 일본군이 아니었다.
조선 땅을 거쳐 진군할 때도 민폐 안 끼치고 보급품을 꼬박꼬박 제값 주고 사 먹었다!
러일 전쟁 때 여러 조선 지배층 및 지식인들이 **괜히 일본을 응원했던 게 아니다**. 이건 팩트다.
이 인간들이 반민족 친일파 매국노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러시안스키들보다는 인종적으로 더 가까운 일본 편" 같은 논리일 뿐이었던 거다.

그러나 1905년, 경부선 완공되고 러일 전쟁이 끝나거나 최소한 일본의 승기로 기울고, 을사조약까지 맺어진 뒤에야 일본은 본격적으로 조선(인)을 하대하기 시작했다.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생기고, 일본이 우리의 친구가 아니라는 현타가 뒤늦게 전해진다.
을사/정미의병이 조직돼서 최후의 발악을 해 보지만 끝내 다 토벌되고 무장해제됐다.

오죽했으면 몇 년 뒤에 안 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동기· 배경도 한 줄로 요약하면 딱 이거다.
"일본이 우리의 친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네, 이토 이 비열한 자식~!" 더 말이 필요한가?

"조선총독부 토지 조사 사업"이라 하면 곧바로
홍보도 제대로 안 한 채 눈곱만치 짧은 기간 동안에 절차대로 신고 안 한 땅은 몽땅 날강도처럼 몰수 국유화 → 농민들 몽땅 땅 뺏기고 소작농으로 전락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니다.

그런 것처럼 흔히 경부선 철도 건설이라고 하면 곧바로
"대대로 전해지던 땅을 강제로 헐값 처분 → 조선인 노동자를 저렴하게 강제(!!) 징용해서 착취 → 철도 건설 반대 사보타주 하던 항일분자들 총살 처형.." 이런 게 떠오르는데..

과연 그게 그림의 전부일까..??
경부선 철도 건설 여건이 벌써부터 무슨 40년 뒤에 일본 탄광이나 남태평양 섬에서 교량/비행장 건설과 같은 여건이었을까?
그건 일단 물음표로 남겨 두고 자료를 더 찾아 봐야겠다.

2. 관동 대지진 학살

일제 시대 때..
항일 운동을 했기 때문에 일제가 지배자로서 그에 상응하는 탄압· 응징이나 보복을 한 거,
전쟁 때문에 조선인을 강제로 일본인으로 개조시키려고 뻘짓 한 거, 물자 착취한 거,
이런 정치· 군사· 경제적인 요인을 싹 빼고도 제일 실드의 여지가 없이 일본이 치명적인 반인륜 범죄를 저질렀고 욕 쳐먹어야 하고 사죄하고 유족 후손에게라도 배상해야 하는 건 관동대지진 대학살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지들이 자연재해를 겪은 걸 갖고, 또 조선인들한테 켕기는 게 있어 놓으니 "지진 시국을 이용해서 조선인들이 반정부 폭동을 일으킨다, 우물에 독을 탄다" 이런 유언비어 정도는 그나마 일말의 현실성이라도 있고 양반이다. 그런데..
"조센징들이 일본에 지진 좀 일어나라고 매일 축시의 참배를 벌였다, 조센징들이 모두 우리 혼슈 땅을 영차영차 밀고 흔들어서 지진을 일으켰다.."

이건 뭐.. 세월호 7시간이나 닭근혜 굿판, 광우뻥 미친소, 천안함 자침설을 능가하는 미친 짓거리 아닌가?
그때 자경단 폭도들은 항일 운동도 안 하고 그저 평범하게 먹고 살던 조선인들을 무차별 붙잡아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끔찍한 방법으로 학살극을 벌였다. 죽창으로 찌르고 사지 자르고 불태우고..

근처의 강이 며칠 동안 시뻘건 피로 물들었고, 조선인들이 목숨 부지하기 위해서 일본 경찰서에 제 발로 도망쳐 와서 제발 유치장 안에라도 집어넣어서 신변을 보호해 달라고 부탁을 했을 정도였다.
일본군 수뇌부에서는 "미약한 조선인들이 그런 짓을 할 리는 전무하다. 이것들이 정신력이 부족하고 군기가 빠져 놓으니 그딴 황당한 유언비어 선동에 넘어가는 것이다. 너희 일본인들은 정신 차려라잉~" 그렇게 훈시하는 장군도 있긴 했다. 하지만 일본의 공권력은 정작 이런 상황에서는 조선인들을 그닥 적극적으로 보호하지 않았다.

이거야말로 정말 심각한 사항인데 그 어떤 반일 장사꾼도 이걸 진지하게 재조명 거론한 적은 내가 알기로 없다.
정치색이 너무 없어서 별로 선동할 거리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난 반일정신병을 매우 혐오하고 공격하지만, 한편으로 과거 일제의 만행에 대해서도 어지간한 반일정신병자들보다 더 많이 정확하게 자세히 알고 있다. ㄲㄲㄲㄲㄲ

3. 2 26 쿠데타

1936년, 일본의 2. 26 쿠데타에 대해 들어보니 꽤 흥미롭다.. 우리나라에서 배우는 국사나 심지어 세계사에서는 접할 일이 없었던 사건이니 말이다.
구 일본제국에서 육군과 해군이 사이가 극히 안 좋았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만, 육군 안에서도 황도파와 통제파라는 두 파벌이 나뉘어서 서로 사이가 안 좋았다.

쉽게 비유하면 통제파는 좀 기득권 수구 세력에 가까웠다. 그러나 황도파는 진보 성향의 젊은 장교들이 “썩어빠진 것들 다 갈아엎자, 우리도 잘 살아 보자. 특히 천황 폐하께서 얼굴마담만 하면서 간신배에게 놀아나지 말고, 용단을 내려서 우리를 직접 통치해 달라” 이런 걸 주장했다. 그 당시 일본 사회도 모든 계층이 마냥 행복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황도는 누런 복숭아가 아니라 황제의 길을 뜻하는 皇道.. ㄲㄲㄲ

그랬는데 여차여차 하다 보니 황도파 장교들은 자기 뜻을 펴고 실현하려면 좀 더 과격하고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조선인들이 항일 독립 운동을 하듯이 일제히 궐기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녹치 않았으며, 심지어 천황조차도 그들의 기대와 달리 쿠데타 진영에게 전혀 협조해 주지 않았다.
“아무리 짐에게 충성을 바치네 어쩌네 하더라도, 명령 없이 군이 움직인 것부터가 짐에 대한 하극상 반역이다. 더구나 고관대작들을 살해까지 해?? 역적노무 색히들 당장 꺼져”라고 응수하면서 군부에다가도 강경 진압을 명령했다. 히로히토 천황도 이럴 때는 꽤 단호박 같은 구석이 있었다.;;

황도파는 이상은 좋았을지 모르지만 방법론이 너무 서툴렀다. 이런 사건을 계기로 장렬히 자폭하고 와해되고 소멸해 버렸다.
덕분에 군부는 통제파가 아무 경쟁자 없이 완전히 접수하게 됐는데, 통제파의 수장이 바로 도조 히데키.. 일본은 그때부터 더욱 군국주의로 브레이크 고장 난 내리막길 버스처럼 폭주하게 됐다. 이거 뭐 일본판 8월 종파 사건 같기도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강 우규 의사가 1919년 가을,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던 ‘사이토 마코토’를 죽이려 했지만 실패했었다. 3. 1 운동 이후로 문화 정책을 폈다는 그 사람 말이다.
사이토는 훗날 일본 내각총리대신으로 영전을 받아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강 의사의 의거 이후로 17년이나 뒤, 바로 저 2. 26 쿠데타 때 총을 수십 발 맞고 벌집이 되어 죽었다. 그래도 이미 70대 후반의 나이였으니 요절은 아니었다.

일제 시절 동안 맨날 일제가 조선인을 탄압했네 착취했네 어쩌구뿐만 아니라, 적들의 소굴/본부 내부에서는 어떤 변화와 갈등이 벌어지고 있었는지를 아는 것도 역사의 전체 그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4. 일본군 위안부 문제

우니나라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거론한다면 다음 세 가지만 집중적으로 공략하면 될 것이다.

  • 본인과 가족의 의사를 무시하고 강제로 납치해서 끌고 갔는가? 혹은 공장 취업, 취학 등으로 속이고 사기를 쳐서 모집했는가?
  • 미리 계약했던 정당한 화대를 주지 않고 착취했는가? 위생 보건 복지가 심각한 막장이었는가?
  • 패전으로 인해 철수· 후퇴할 때 증거 인멸을 위해서 여인들을 집단 학살했는가?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인멸하려 한 증거는 무엇이었는가?

중일/태평양 전쟁 당시에 일본군이 연합군 포로는 말할 것도 없고 자국민과 아군한테도 반인륜 범죄를 잔뜩 저지른 미친 집단이었다는 걸 본인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니 위안부의 처우도 극악이었을 거라는 선입견을 갖는 것 자체는 정당한 가설이다. 그 가설을 객관적으로 입증하든가 아니면 부정 반박하면 된다.

허나, 위안부의 모집과 운영 방식만 문제삼으면 되지, 무슨 위안부 자체가 인류의 전쟁 역사상 일제만의 최초· 독보적인 죄악인양 헛소리를 해댈 필요는 전혀 없다.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인간의 유구한 역사가 반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벼룩의 간을 빼 먹지, 위안부 할머니한테 빨대 꽂아 있는 사악한 반일 장사꾼 위선자 사기꾼도 당연히 걸러내고 쳐내야 한다. 걔 주변에 있다가 자살 당했다는 어떤 사람의 사인도 철저하게 진상 규명해야 한다. 걔야말로 생계형 친일파 김 뭐시기보다 더 나쁜 놈이다.

일제 초기의 토지 조사 사업도 그렇고, 말기의 강제 징용(?) 노동자도 그렇고..
불법 갈취 착취가 전혀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그 착취나 피해의 정도, 강압/강제성은 우리가 쌍팔년도 반일 항일 국뽕 패러다임대로 배웠던 것보다는 덜했다는 것이 여러 정황상 차츰 입증되는 추세이다.

이런 걸 남이 바로잡기 전에 우리가 먼저 바로잡아야 다른 팩트까지도 우리가 주도할 수 있다.
식인 호랑이를 동물 보호 운동가들이 앞장서서 사냥하고 제거해 줘야 다른 야생 맹수들을 보호하자는 명분이 설 수 있듯이 말이다.

5. 6 25 때 일본의 기여

징병제를 시행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신념에 따른 병역 거부자에게 집총 대신 시킬 만한 대안 작업으로 지뢰 제거가 즐겨 거론되곤 한다. 엄연히 군사 활동이지만 남을 죽이는 일이 절대 아니고, 오히려 자기만 사고를 당해 죽을 수도 있는 어렵고 위험하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6 25 사변 중에 일본이 딱 정확하게 그런 일을 했다는 건 무척 흥미로운 점이다.

일본이야 그 당시엔 UN 회원국도 아니고, 한창 연합군(=미군) GHQ로부터 참교육을 받으며 자숙과 반성 중이던 일개 패전국일 뿐이었다.
그러니 UN군 명목으로 전투병 파병 같은 건 정말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리고 일본군이라면 우리나라의 할배 대통령부터가 “우리는 괴뢰군과 싸우기 전에 왜놈부터 먼저 쏴 죽여 버릴 것이다”라고 맹렬한 거부감과 적개심을 표현한 바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한국과 적당히 가까운 섬나라로서 UN군의 병참 기지 역할을 하기에 너무 좋은 곳이었기 때문에 마냥 놔 둘 수만도 없었다.
그래서 미국이 일본을 적당히 구슬리며 투입시킨 일 중 하나가 기뢰 제거였다. 동해 바다에서 북괴가 매설한 것들 말이다. 굉장히 적절한 활용이었던 것 같다.

지금이야 한국과 일본 모두 인정하기를 민망해하고 꺼리지만, 일본이 자의로든 타의로든 6 25 때 우리나라를 전혀 안 도와 준 건 아니었다. 당장 개전 초기에 은행을 털린 뒤에 돈을 다시 만들어서 찍어내는 시급한 임무도 일본에서 진행됐다.
쟤들이 남의 전쟁 덕분에 물자 많이 팔아서 자기만 일방적으로 부자가 된 건 아니라는 것이다.

6 25는 8월 15일을 광복절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도 아닌 적화 혁명 과업 완수일로 만들려고 50일쯤 전의 더운 초여름에 일부러 침략을 벌인 '김 일성의 난'이었다. 동시에 인류 역사상 거의 전무후무하게 세계의 수많은 나라들이 이 작고 좁은 한 나라를 도와준 전쟁이기도 하다.

Posted by 사무엘

2022/06/27 08:35 2022/06/27 08:35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2036

국사 팩트

1. 조선~구한말

  • 김 정호는 지도를 만든 죄로 대원군의 노여움을 사서 주리를 틀리고 옥사한 게 아니다. 한편으로, 훗날 일제는 자기들이 최신 장비로 더 정확하게 한반도 지형을 측량해 갔지, 굳이 김 정호의 작품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최 남선은 1920년대에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역사왜곡을 저지른 걸까..??)
  • 김 구(그 당시는 김 창수?)는 무슨 칼 찬 육군 장교를 격투 끝에 제압은.. 개뿔, 그냥 무고한 민간인 상인 일본인을 강도살인 저지른 것이었다.

  • 우금치 전투 때 관군과 일본군이 기관총을 동원해서 동학 농민군을 학살하긴 했는데..
    **기관총을 쏴 제낀 진영은 일본군이 아니라 조선 관군이었다!!!** 이때 같이 있던 일본군은 그냥 보병 예비군 수준의 부대여서 중화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청나라와 일본이 싸웠는데(청일 전쟁) 정작 전쟁터는 조선 땅이었던 것만큼이나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안 중근 의사도 소싯적에 동학군의 토벌에 참여했었다. 동학 고위 간부였던 김 개남의 경우, 다른 항일 의병장이었던 임 병찬의 신고로 잡혀서 처형 당하기까지 했다. 여러 정황상 그 시절엔 반드시 “동학 = 구한말 의병 항일 독립운동”도 아니었던 것 같다.

조선은 초기에 고려 왕족들을 학살한 것부터 잔혹했는데 훗날 홍 경래의 난을 진압한 것도 잔혹했고(단순 가담자까지 몽땅 처형), 외세까지 끌어들여 동학 운동을 진압한 것에 이어 갑신정변 개화파를 축출한 것도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잔혹했다.
태평양 전쟁의 책임이 도조 히데키 같은 군 수뇌부뿐만 아니라 히로히토 천황에게도 있듯, 고종은 외제 기관총으로 외적인 일본군이 아니라 자국민을 학살하는 참극이 벌어진 것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동학뿐만 아니라 개화파도 마찬가지다.
서 재필은 그야말로 삼족이 완전히 멸문지화를 당했으며, 고종은 김 옥균에 대해서는 국외로까지 집요하게 자객을 보내서 결국은 암살해 버렸다. 청과 일본으로부터 야만적이라는 지탄을 받으면서까지 기어이 김 옥균의 시신을 송환해서는 이 지경을 만들었다. (혐짤 주의)

more..

"대역부도옥균" -- 천하의 개쌍놈 김 옥균 역적패당놈의 최후 ... 정도의 뜻이다. 글씨는 암살범인 홍 종우가 썼다. 아무리 실패한 쿠데타였기로서니, 젊은 개화파 브레인들이 그 정도로 나쁜짓을 한 것이었을까..?? 고종이 다른 건 등신이어도 자기 권력 지키는 일엔 귀신이었다.

이런 선례를 남겼으니 "일본도 조선 저 나라는 국력은 쥐뿔 없는 주제에 완전 무법 야만인들 동네이군. 신사적으로 대할 필요 없고 우리도 마음놓고 더 적극적으로 무력으로 제압해도 되겠다"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로부터 얼마 못 가 을미사변이 일어난 건 우연이 아니었지 싶다.

그리고 이야기가 이게 끝이 아니다. 하나 더 생각할 점이 있다.
1880년대 중반에는 갑신정변 때문에 친일 성향의 개화파들이 멸문지화를 당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10년쯤 뒤인 1890년대 중반엔, 고종의 아관파천 조치와 함께 이번에도 친일 성향의 김 홍집과 몇몇 대신들이 희생양으로 버림받고 역적으로 몰려 비참하게 죽었다.

저기서 친일이라는 건 일제 시대 이후에 등장한 악질적이고 부정적인 친일이 아니다. 고종의 어영부영 오락가락 양다리 행보 때문에 애꿎은 유능한 인재들만 화를 입곤 했다.

2. 일제 시대

  • 일제의 제암리 학살은 무슨 싸이코패스마냥 여자와 갓난아기까지 다 죽인 건 아니었고, 소총보다 키가 큰 15세 이상의 남자만 가둬서 죽인 것으로 증언과 기록이 정정되었다.
  • 유 관순 역시 시체 토막설은 주작으로 판명되어 폐기되었다. 애초에 생년과 형량조차도 형무소 동기들의 증언과 기억이 아니라 기록의 발견으로 인해 2000년대가 넘어서도 막 정정되곤 했다.

  • 청산리 대첩이라는 말은 이제 폐기됐고 그냥 청산리 전투라고 부른다. 사기 진작과 희망고문을 위해서 전과가 터무니없이 너무 부풀려져 보고되었으며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일제라고 해도 그 정도 대패 참패의 책임소재를 따지는 군 내부 보고서까지 은폐 조작할 수는 없다.
  • 그나마 1920년대 초에 잠깐 있었던 독립군이 왕창 와해된 건 학교에서 잘 안 가르치는 자유시 참변 때문이다. 일본의 적이니까 우리의 친구일 거라는 생각에 소련 공산당을 과신했다가 낭패 본 격이다.

  • 조선어 학회 사건은 일제의 고등경찰이 아주 어이없는 꼬투리를 잡고 한 건 꾸며서 국어학자들이 필화를 당했던 사건이다. 그 당시의 민족 말살 정책과는 별개로, 국어사전을 편찬하는 것 자체는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놨던 상태였다.

3. 해방 후

  • “일본이 좀 더 늦게 항복해서 광복군이 제대로 참전만 했으면 우리나라도 2차 대전의 정식 승전국이 돼서 분단도 되지 않았을 텐데...”라고 아직까지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이제 없을 것이다.

  • 건국 초기에 반민특위를 해체한 주역 중 한 사람은 우리나라 초대 법무부 장관을 역임한 애산 이 인이다.
    일제 시대 때 독립운동가들을 무료 변호했으며,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기도 하고, 훗날 한글학회 건물 건립에 엄청난 사재를 기부했던 이 민족주의자 법조인이 보기에도.. 건국 초기엔 꼴리는 감정대로 남을 단죄하는 것보다, 군경 경력자 간부들을 이용해서 빨갱이 잡고 사회 혼란을 바로잡는 게 더 중요했던 것이다~!

  • 6 25 개전 초기에 피난민들이 위에서 멀쩡히 건너고 있는 중에 나라에서 한강 다리를 폭파한 건 아니었다. 단지, 폭파 후에 사후수습이 제대로 안 돼서 깜깜한 밤에 앞을 못 본 피난민 행렬이 주루룩 앞의 낭떠러지로 떨어진 경우는 있었다.

하다못해 1500년대 말의 기록인 이 순신의 난중일기는 당대의 타 문헌과 고증이 일치하고 교차검증이 되어 사료로 인정받고 있는 반면, 300여 년 뒤의 기록인 백범일지는 일본인 강도살인이나 전화 개통 등 여러 부분이 역사 고증과 맞지 않고 과장· 주작이 의심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우리나라 정체성을 탐구하려면 백범일지보다 독립정신이 훨씬 더 중요하게 다뤄지고 읽혀야 할 것이다.

※ 여담 1: 일제 부역자가 등장하는 문학 작품

내가 소싯적에 접했던 국내 현대 문학 작품 중에서 대놓고 주인공이 친일 부역자 악역으로 등장하면서 친일파 척결(?)을 주제로 내세운 작품은 둘 정도이다.
하나는 희곡 <살아 있는 이 중생 각하>(1949), 다른 하나는 소설 <꺼삐딴 리>(1962).

그나마 전자는 주인공이 재산이 몰수되고 자식한테까지 버림받고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걸로 끝난다. 발표된 시기도 해방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는 걸 생각해 보자.
그러나 후자는 정반대. 주인공이 얄밉게도 일본· 소련을 거쳐 미국으로 빌붙는 처세가 탁월하고, 본업이던 의술도 비현실적으로 너무 뛰어났다. 그래서 끝까지 승승장구하며 잘나가는 동심파괴 엔딩으로 끝난다.

저렇게 나라 정세가 통째로 엎치락뒷치락하던 시절엔.. "앞으로 미국이 뜰 거다, 소련이 뜰 거다" 예측하고 대처하는 게 지금으로 치면 앞으로 어느 지역 집값이 오르느냐 마느냐, 주식을 하냐 코인을 하냐 하는 것과 딱 정확하게 대응했지 싶다.
이건 대놓고 나라를 팔아먹고 보상도 일제로부터 직접 받아서 부귀영화를 누린 구한말 매국노 윗대가리라든가, 완장 차고 현장에서 동족을 대놓고 고문하고 괴롭히는 지저분한 짓을 한 부역자하고는 성격이 다르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박 정희가 1940년대가 다 돼서야 만주군을 거쳐 일본군 장교로 입대한 것은 전시 상황에서 조선인에게 단순 순사 보조원-_- 이상으로 정식 군문이 슬금슬금 열리고 있었고, 그게 흙수저 조선인에게도 출세의 기회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일 뿐이었다. "기왕 갈 거면 더 노력해서 병이 아니라 간부가 돼서 가자~! 실력만 좋으면 진급해서 심지어 왜놈들을 자기 부하로 부리게 될 수도 있다" 같은 생각?

더 현실적으로 비유하면, 과학고에 국립대 공대를 나와서 취업했는데, 불만족스러워서 의대나 로스쿨로 진로를 바꾸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일탈일 뿐이라는 것이다. 자기들도 똑같이 사리사욕이 있기는 마찬가지이면서 '도 넘게' 남을 욕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 여담 2: 관과 민의 관계

우리 선조들도 마냥 평화만 사랑하는 게 아니라 엄청난 전투종족이었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자기들끼리 싸우든 외적과 싸우든 무엇이든 말이다.

임진왜란 때 임금이 피난을 가고 관청이 항복하고 튀었을 정도이면, 밑의 백성들은 보통은 당연히 항복하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조선 백성들은 윗대가리의 부재 상태에서도 자체적으로 의병을 조직해서 잡초같이 끈질기게 저항해서 왜군에게 트라우마를 심겼다고 한다. 보스를 죽였는데도 곁의 졸개 잡몹이 끝까지 버티고 저항하는 게임처럼 말이다. 구한말 의병은 시즌2 정도 되려나?

그래서 한국인은 윗대가리가 아니라 민초가 늘 위기 때 일어나서 나라를 지켰네 마네 이런 말이 나돈다. 본인은 이런 말을 예비군 정신교육 때도 여러 번 들었다.

하지만 군대라는 엄청난 먹튀 소비 조직이 보급과 지원이 없이 어찌 유지되겠나..?
조선 정부가 처음부터 유사시를 대비해서 예비군/민병대 비스무리한 조직을 꾸려 놓은 상태였으며, 민간인의 전투력(?)을 석전 훈련을 통해서 유지시키고 있었고, 이런 민병대 자경단에게 국가적으로도 지원을 알음알음 했기 때문에 저런 대응이 나온 거라고 한다.

요컨대, 민초들이 나라를 지킨 것에도 윗대가리들이 평소에 기여를 전혀 안 한 건 아니라는 뜻이다. 하다못해 그 무능한 암군 고종도 구한말 의병을 일제 몰래 알음알음 지원하긴 했다.
그런 지원 없이 조선의 정치인· 관리들이 몽땅 무능한 탐관오리밖에 없었다면 20세기까지 갈 것도 없이 임진왜란 때 백성들은 옳다구나 왜군에게 진짜로 모조리 투항해 버렸을 것이다. 실제로 임진왜란 때 나라가 통째로 망하지는 않았지만, 도자기 기술자들은 처우의 차이로 인해 일본으로 많이 유출 당하게 된 게 사실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2/04/15 08:35 2022/04/15 08:35
,
Response
No Trackback , 2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2009

1. 양대 세계 대전 비교

  • 1차 대전: 기관총, 참호전
  • 전간기~2차 대전: 항공모함, 무전기와 레이더, 뇌격기, 급강하 폭격
  • 2차 대전 말기에 개발된 것: 제트기, 로켓, 핵무기

육군에서 백병전이란 게 거의 사라지고 제식이나 총검술 따위는 그냥 보여주기 레거시가 되었듯.. 공중에서도 전투기끼리 도그파이트를 벌이며 처절한 기총사격 따위 하는 건 진작에 없어졌다. 육해공 모두 보이지도 않는 먼 곳에서 날아온 미사일 맞고 그대로 끝난다.

  • 1차 대전: 영국에서 포탄이 불량인 게 많아서 애먹었다. 유대인 과학자가 포탄의 대량 생산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해서 승전에 큰 공을 세웠다.
  • 2차 대전: 미국에서 어뢰가 불량인 게 많아서 애먹었다. 영국과 미국 모두 적국의 암호를 해독해 내서 승기를 잡았다.

  • 1차 대전 때는 일본이 연합국 승전국의 말석에 있었지만 그 뒤로 추축국 전범국으로 흑화했다.
  • 2차 대전 때는 중국이 연합국 승전국의 말석에 있었지만 요즘 하는 짓을 보면 다음에는 세계를 대적하는 악역으로 흑화할 것만 같다. 잠깐 일제의 피해자였다고 실드만 치기에는 갈수록 선을 넘고 있다.

  • 1차 대전 이후에 국제연맹이 창립됐지만 제 구실을 못 하고 2차 대전을 막지 못했다. 이때는 민족자결주의가 제정되었다.
  • 2차 대전 이후에 연맹을 대체하는 국제연합, UN이 창립됐고 무려 세계 인권 선언이 제정되었다. 허나 미래엔 과연 얘도 무용지물이 돼서 국제연맹과 같은 길을 가게 될까?

2. 무기들의 변화· 발전 양상

탱크, 대포, 전함은 크기가 2차 대전 때까지 덩치가 왕창 커졌다가 그 뒤로는 다시 좀 작아졌다. 핵무기와 미사일의 개발, 그리고 항공기의 발달 덕분에 저런 형태의 무기가 기동성까지 희생할 정도로 지나치게 거대할 필요는 없어졌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은 2차 대전 시절에 세계에서 제일 큰 탱크와 제일 큰 대포까지는 만들었다. 실험적으로나마 아음속 순항 미사일(V1), 초음속 로켓 기반 미사일(V2), 포신 150m짜리 장거리 대포(V3)..;; 이거 뭐 어떻게든 탄환을 멀리 쏘는 방법은 온몸으로 공돌이들을 갈아넣으면서 연구했었다.;;

하지만 항공모함을 만들거나 초대형 전함을 만들지는 않았다. 알고 보니 1차 대전 때 지면서 해군이 몽땅 봉인 당했기 때문이었다. 식민지 만들었던 것도 다 빼앗겼고.. 그래서 바다에서는 비대칭 전력인 잠수함에 목숨 걸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세계에서 제일 큰 전함을 만든 곳은 섬나라 일본이었다. 특히 야마토 전함은.. 뭔가 전함계의 임페리얼(자동차) 같다. 제대로 운용할 능력이 없으면서 무리해서 너무 큰 물건을 만들었다가 죽도 밥도 못 쑤게 돼 버렸다.

처음엔.. 이런 하찮은 싸움에 내보내기에는 가오가 안 서고 전력을 아껴야 한다는 명목으로 봉인..
그런데 나중에는 이렇게라도 장렬히 산화하지 않으면 가오가 안 서는 신세가 됐으니.. 계륵 그 자체이다.

전투기, 잠수함, 항공모함은 저런 클래식한(?) 무기와는 반대로 천조국에서 현재 만들어진 물건이 세계 대전 때의 물건보다 더 크다.
특히 잠수함은 원자력의 혜택을 제대로 입었다. 동력원이 원자력으로 바뀌고 핵 미사일까지 발사 가능해지면서 예전과는 차원이 다른 무기가 돼 버렸다.

슬금슬금 몰래 잠입해서 배를 상대로 어뢰나 쏘고 튀던 옛날만 생각했다간 큰코다친다.
잠항 능력도 겨우 테란 고스트나 레이스에 가깝다가 이제는 플토 다크템이나 옵저버와 비슷해진 것이다.

그리고 탱크, 대포, 군용기들은 원래 보병을 화력 지원하라고 만들어졌지만, 결국은 유유상종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 탱크는 탱크로 잡고, 포는 포 쏴서 잡고, 군용기 역시 전투기로 잡는 게 제일 낫기 때문이다.
심지어 저격수조차도 같은 저격수로 저격해서 잡는 게 일반적이다. 이러니 쟤들도 자기 코가 석 자가 되고, 원래 도입 목적이던 아군 보병 지원이라는 비중이 작아지게 된다.;;

3. 탱크

앞에서 다뤘던 무기 얘기의 연장선인데..
6 25 사변 당시엔 소련제 땅끄 242대(T-34)가 남한 땅을 짓밟았었다. 그런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는 수많은 러시아 땅끄들이 우크라이나에서 재블린 미사일을 맞고 훅 가면서 체면을 제대로 구겼다.
거대한 전함이 자그마한 어뢰나 항공모함 급강하폭격기의 밥이 된 것처럼, 탱크도 이제 예전 같은 만능 무기라는 의미가 많이 퇴색한 것 같다.

미사일 한 방 가격이 1억대라지만, 그걸로 50억~80억씩 하는 탱크를 박살내기 때문에 이거 굉장히 수지맞는 장사이다. 스커지로 사이언스 베슬 잡는 교환비를 아득히 능가한다.
예전에 팔레스타인 하마스인가 걔들이 쏘는 로켓의 단가는 n이지만, 그걸 요격하는 이스라엘의 아이언 돔의 단가는 10n인지 100n인지.. 그러던 게 떠오른다.

4. 과거의 전범국, 오늘날의 전범국

20세기 초에 독일은 정말 눈부신 과학기술 강국이었다. 수학· 과학뿐만 아니라 신학, 철학, 법학, 예술 쪽도 세계를 이끌었다. 그리고 일본이야.. 서양 문물을 잘 받아들이면서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자력 주도 근대화에 성공해서 열강의 일원으로 등극했다.

이 정도 나라라면 국뽕에 빠져도 이상할 게 없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쟤들은 너무 자만하는 바람에 20세기에 세계를 상대로 사고를 거하게 치다가 자멸했다.
특히 소련 말이다. 독일은 독소 전쟁에서 소련과 대판 싸우다가 패배했고, 일본은 패망하기 직전에 소련으로부터도 선전포고를 받으면서 완벽하게 확인사살 당했다.

이 두 나라는 침략 전쟁을 일으켰다가 졌을 뿐만 아니라, 민간인 학살 포로 학살 같은 흉악 전쟁 범죄도 워낙 크게 저질렀기 때문에 전범국이라는 낙인이 제대로 새겨지게 됐다.
얘들은 그 댓가로 나라가 송두리째 멸망하는 것만 면할 뿐, 주요 산업· 군사 시설들이 몽땅 거세되면서 전쟁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짜끄레기 농업· 경공업 국가로 전락할 뻔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리 되지 않았다.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소련이 냉전으로 인해 미국의 적성국가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소련에게 박살났던 두 전범국들은 소련을 견제하는 반공의 방패막이 명목으로 결국은 다시 지원받고 재건되었다. 특히 일본의 경우, 이웃 한국의 6 25 사변 때 서플라이 디포 역할을 하면서 완전히 기사회생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서 냉전도 끝나나 싶었는데.. 2022년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는 소련의 후신인 러시아가 또 세계의 적으로 등극했다.

덕분에 과거에 소련에게 패했던 전범국들이 또 살 판 났다. 독일은 지난 70여 년에 달하던 봉인을 풀고 재무장을 하는 중이다. 일본은 이럴 때 국제 사회에게 잘 보이고 점수 따서 꿈에도 그리던 UN 상임이사국 지위를 얻으려 노력 중이다. 국제 관계에서 영원한 친구는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는 걸 느낀다.

5. 전쟁/전투 관련 명언들

  • 빈 라덴을 용서하는 건 신이 할 일이다. 그러나 빈 라덴과 신의 만남을 주선하는 건 우리가 할 일이다. -- 2010년경 미국 해병대 표어
  • 제군들은 조국을 위해 죽지 마라. 적군이 우리나라를 위해 죽게 만들어라. -- 조지 패튼 장군
  • 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 -- 태평양 전쟁 당시 윌리엄 홀시 제독
  • 북한/베트남/쿠바를 폭격해서 석기 시대로 되돌려 놓겠다. -- 커티스 르 메이 장군
  • 적의 뇌를 먹어 삼켜라. 그렇게 힘의 근원을 취하라. -- 메이어 다간 (전 이스라엘 모사드 국장)
  • 나는 만년 전사다. 여러분도 전사가 되어라. -- 남 재준 (전 국정원장)
  • 이제 우리는 3천 년 역사 동안 한 번도 지지 않은 동맹을 얻었다(히틀러). / 그럼 이제 한 번은 질 때가 됐군.. ㅋㅋㅋ -- 2차 세계 대전 때.. 처칠
  • 네놈들 앞으로 하늘이 새까맣게 가려질 정도로 수많은 화살들이 날아올 것이다. / 그럼 우리는 그늘 아래에서 시원하게 싸우겠구만. ㅋㅋㅋ -- 영화 300

Posted by 사무엘

2022/03/24 08:35 2022/03/24 08:35
,
Response
No Trackback , 2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2001

1.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베이징 동계 올림픽이 끝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아 세계는 러샤-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매스컴을 통해 접하게 됐다.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 저렇게 무식하게 쳐들어갈 줄은 몰랐다. 쌍팔년도나 1990년대도 아닌 2020년대에 유럽에서 전쟁이라니?
쪼~기 꾸진 동네의 정치 불안정한 듣보잡 신생독립국끼리 툭탁툭탁 싸우는 것도 아니고, 엄연한 강대국이 다른 안정된 민주주의 국가를 침략하다니?

올해는 러샤가 연초부터 세계를 상대로 큰 사고를 연달아 치면서 체면을 구겼다.
쟤들은 약물 도핑 징계 때문에 동계 올림픽에서도 나라 이름을 걸고 출전을 못 한 상태였다. (그냥 위원회 내지 스포츠 협회 명의로만) 그랬는데 그 상태로 또 도핑 적발..

솔직히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망신 개쪽 아니냐..?? 명색이 왕년에 미국과도 항공우주 분야 맞장을 떴던 초강대국이 이 2010년대 이후까지도 국가 차원에서 약쟁이나 양성하고 말이다.;;
덕분에 그 미성년자 아이가 떳떳하지 못한 피겨 공연을 했을 때는 중계진들조차 할 말을 잃고 침묵으로 대응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제는 저 나라는 명분 없는 침략 전쟁 때문에 나라와 대통령 개인이 몽땅 모든 분야에서 세계 왕따가 됐다.
빙상뿐만 아니라 다른 스포츠 경기들에 대해서도 국제 대회 참가가 아예 완전히 금지됐다.
저 나라 대통령에게 수여됐던 체육 분야 명예학위나 명예단증은 취소· 철회됐다.

예전에 혼자 갑질을 일삼으면서 영화 만들겠다고 교만과 망상에 빠져 난리를 치다가 몰락한 국내의 모 전직 코미디언 아저씨가 떠오른다. 그 사람은 업종이 그쪽이었으니 그나마 사업 실패하고 돈만 날리는 걸로 끝났지만, 러샤의 저 아저씨는 정치· 외교 분야에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이상, 과연 곱게 퇴임하고 편하게 죽을 수 있겠는지가 우려된다.

나도 아무리 생각해도 저 아저씨가 왜 저러나, 늙어서 노망 들어서 저런 똥고집을 부리는가 싶을 정도다. 세계를 자국민들 통제하듯이 통제할 수 있을 거라고 진지하게 생각한 건지..??
요즘 UN이 아무리 무능한 허수아비라고 해도, 이 정도로 선 넘는 무식한 만행까지 그냥 용납하지는 않는다는 걸 입증하며 존재감을 과시하는 듯하다.

세계가 하나로 뭉쳐 특정 악에 맞섰던 게 10여 년 전의 소말리아 해적, 7~8년 전의 ISIL(이슬람 국가/다에시)의 사례가 있었다. 2차 대전 이래로 세계 강대국들의 군대를 제일 많이 밀집시킨 악역들인데, 지금은 쟤들은 그럭저럭 다 토벌된 듯하다. 하지만 이젠 저런 조무래기가 아니라, 2차 대전 승전국이었고 핵무기도 보유하고 있는 멀쩡한 강대국이 다음 악역으로 등극했다.

침략을 당한 우크라이나는 70여 년 전의 우리나라처럼 세계로부터 지지와 도움과 원조를 집중적으로 받으며 아직까지는 적의 공격을 근근이 막고 있다.
하지만 러샤도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고, 민간인 거주 지역에다가도 미사일을 날리면서 더 악랄해지기 시작했다. 자기네 동맹국을 통해 병력을 더 동원하고 장기전 섬멸전을 꾸미는 것 같으니, 아직은 완전히 안심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개인적으로는 러샤와 우크의 관계가 중공하고 대만의 관계와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중공이나 러샤나 다 강대국이고, 인권이나 민주주의가 그닥 발달해 있지 않은 나라이다. 특히 중공은 시차까지 전지역을 무식하게 단일하게 밀어붙일 정도로 one China를 고집하고, 대만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걸.. 중공이 폭주하면 저런 식으로 대만과 전쟁 나지 말라는 법이 없을 것 같다.

한편 북괴는..?? 쟤들도 폭주하다 뻘짓으로 장렬하게 자폭해서 한반도가 멸공 통일이 좀 됐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만.. 그래도 그건 현실성이 높지 않다. 북괴는 아무리 깽판을 쳐도 자기 무덤을 팔 정도로 폭주하지는 않으며, 정말 최소한의 누울 자리는 살펴보고 다리를 뻗는 놈들이다. 자기가 중공· 러시아 같은 국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 미국한테 개겨서는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안다.;;

2. 1930년대 우크라이나 대기근

세상엔 위안부 소녀상만 있는 게 아니라 이런 소녀상도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난 이게 지구 어딘가에 있다는 건 개인적으로 아주 오래 전부터 주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위치가 지금 전쟁 벌어져 있는 저 동네라는 것은 아주 최근에야 깨닫고 현타를 체험했다.;;
우크라이나 대기근인데 내가 다른 아르메니안, 아일랜드 학살인지 기근인지랑 지금까지 헷갈렸던 듯하다.

원래 우크라이나는 전 지구를 통틀어서 손꼽히는 비옥한 곡창지대로 이름을 날렸다.
그런데 소련 공산 정권이 들어선 뒤, 1932~33년엔 극악의 기근을 겪으면서 300만 이상~1천 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굶어 죽거나 장애인이 되는 참극이 벌어졌다. 희생자 수는 나치의 유대인 홀로코스트와 대등한 급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공산주의는 사하라 사막에서도 모래 부족/품귀를 야기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더니, 그건 정말 사실이었다. 창세기 파라오의 꿈에 나오는 야윈 암소 7마리처럼 말이다.

잘못된 정책으로 인한 인재인 건 기정사실이고, 단순히 "강철의 대원쑤가 고의로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학살한 거다 / 고의 학살까지는 아니고 그냥 실책이다" 정도의 관점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대해서 과거에 이런 아픈 역사가 있었던 동네이다. 아, 대기근 얘기는 아니지만 체르노빌 원전도 우크라이나 영토에 있었다.;;;

3.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비난했던 인간말종들

대통령 선거가 코앞에 다가온 시국에 내가 어지간해서는 국내 정치 얘기를 자제하고 싶다. 허나 이건 너무 빡쳐서 도저히 까고 씹지 않을 수 없다.
개전 초기이던 2월 25일 부근엔 침략자 러시아가 아니라 피해자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탓하면서 폄하한 미친놈들이 있었다.

지금이야 이딴 소리를 지껄였다가는 완전히 매장 당하는 게 확실시되니 말을 더 못 꺼내겠지만, 저 내뱉었던 발언에 대해서도 쟤들이 제대로 사과나 철회를 했다는 얘기를 난 못 들었다. 그저 오해라는 변명만 늘어놓을 뿐..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새퀴들이 감히 얻다대고 '자극' 드립이냐? 아가리를 확 찢어 버릴라..
러시아가 아니라 미국이 전쟁을 일으켰다면 저 색히들 반응이 어땠을까..?? 저것들 중에 20여 년 전, 부시 시절에 이라크 후세인을 비판했던 놈은 한 놈도 없었을 것이다. 쟤들이야말로 미국을 '자극'하고 어그로 끌었다가 박살나지 않았는가?

우크가 한국과는 아무 상관 없는 지구 반대편 나라랜다.
그럼 이라크나 아프간이야말로 우크보다는 훨씬 더 우리나라랑 관계 없는 나라 아니냐..??
그때는 니들 미국 비난 왜 했어? 우리랑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을 갖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남한이 북한을 자꾸 자극했으니 6 25 남침을 당한 거고, 조선이 일제를 자극했으니 식민지로 먹혀도 싼 거겠지.
나영이는 조 두순을 자극했기 때문에 성폭행 당해도 싼 거고.
현직 우크 대통령이 이전까지 얼마나 무능했는지는 잘 모르겠고 내 관심사도 아니다만.. 그래도 설마 거의 이 완용 급의 평화주의자 종전주의자 종북 공산주의자인 이 후조선 대통령보다는 더 제정신인 사람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 제아무리 러시아가 깡패라 해도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뜬금없이 침략을 한 건 아닐 테니, 나도 변명이라도 제대로 들어 보고 싶어서 검색을 해 봤다. 이런 시각의 국내 기사도 있다.
잘은 모르겠지만, 우크도 국제법을 어기고 러시아의 요구를 무시하고, 자국의 친러 성향 사람들을 오랫동안 탄압하긴 했는가 보다. 좀 회의적 시니컬하게 보자면 마냥 우크라이나 대통령만이 일방적인 애국자 절대선이지는 않을 수 있으며, 겉만 번지르한 언플만 너무 늘어놓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약~간은 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의 저런 무자비한 침략 전쟁이 정당화 가능한 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저 이상한 사람들은 러시아의 입장을 제3자 입장에서 대변해서 옹호하기라도 한 것도 아니다. 젤렌스키의 잘잘못과는 전혀 무관하게 그냥 친중종북의 연장선으로서 친러 발언을 늘어놨을 뿐.. -_-

미국 대비 판단 일관성이 없는 게 본인이 열받는 제1의 이유이고, 그 다음 제2로.. 심지어 리 승만 할배 대통령에다 빗대면서 수도를 버리고 튀네 마네 하는 것도 본인을 심히 빡돌게 한다.

일단 남한 서울은 우크의 키이우보다 훨~~씬 더 적국 내지 국경과 가까이 있다. 그 상황에서 대통령이 피난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외국 망명이 아닌 것만으로 감지덕지해야 된다.;;
또한, 할배도 대비를 안 하긴 뭘 안 했냐 이 등신아..;;
이 시국이면 북괴가 가까운 시일 내에 반드시 쳐들어올 것이기 때문에 우리도 대비해야 된다고 미국한테 진작부터 마르고 닳도록 경고하고 지원 요청을 했는데도 전쟁광의 헛소리 망상으로 치부되고 묵살당한 거구만..

그때는 미국도.. 지금 해군 기지나 싸드 반대하는 멍청이들하고 같지는 않아도 약간 비슷하게 안일하게 생각했었던 것이다. 2차 대전 이후로 세계적으로는 "이렇게 세계가 초토화됐는데 설마 근미래에 또 전쟁?"이게 자연스러운 분위기였으니까 말이다.
그런 열악한 여건에서 긴장 대치 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되는 바람에 더는 못 버텨서 하필 장병들 모처럼 휴가 좀 잔뜩 보내 줬을 때 허를 제대로 찔린 거구만? (이발, 목욕, 농사 모내기..)

다리 끊고 도망갔다는 헛소리는 더 반박하면 입만 아프니 언급을 생략한다.
천안함 생존자들 보고 패잔병 드립 치는 놈, 부시 그렇게도 욕하다가 푸틴 앞에서 절대침묵인 놈..
아~ 정말 난 인간 취급을 하고 싶지 않다. 꼭 유 영철만 싸이코패스인 게 아니다.
종북좌빨에다가 친중, 더 나아가 친러는 역시 바늘과 실처럼 따라다닌다는 걸 알 수 있다.

난 앞뒤 문맥 짜르고 특정 표현만 갖고 침소봉대 왜곡 선동질 하는 걸 기본적으로 혐오하는 사람이다.
허나, 이 우크라이나 망언은 그저 일회적인 막말 독설 말실수가 아니다. 찢점명이라는 사람의 평소의 사상, 가치관, 인생관이 투영돼 나왔을 뿐이다.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예전의 가천대 망언하고 본질적으로 통하는 게 느껴진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우리랑 아무 상관없는 나라'..
이건 "아.. 어쩌다 보니 이름도 모르는 지잡 대학원을 야간으로 다니면서 그냥 학위 땄다 / 가천대 석사학위 따위 없어도 되니, 여의찮다면 학위 걍 반납하겠습니당. 취소하든 말든 니 마음대로 하셔요~"에서 거의 같은 심보에서 비롯됐다고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게 공인, 정치인이라는 색히가 할 말인가..??
저넘은 돈 권력 영향력 없는 사람이나 집단에 대해서는.. 그저 자기가 필요 없다고 생각되면(= 이용 가치가 0으로) 진짜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고 저버리고 배신하고 잊어버리고 찢어 버릴 놈이다.

그러고 나서는 반발이 이니까 수습하는 꼬라지 보소.
전형적인 말 뒤집기, 거짓말 정신승리 합리화, 말단 꼬리만 잘라서 심하면 자살시키기.
그나마 인간이 시늉으로라도 제일 착해져야만 하는 후보일 때도 저런 인간말종 본성을 못 숨겨서 난리인데.. 대통령이 된다?
이런 색히가 러시아 같은 정도의 나라에서 권력을 쥐게 되면 지금 푸틴처럼 하게 된다는 거다. 우리나라에서 최고 권력 쥐면..?? 저런 나라 꼬봉 정도로..

제발 검찰 공화국이나 됐으면 좋겠다. 하이고 경쟁자에 대한 최악의 멸칭이 겨우 검찰 공화국이니? 저쪽은 뭐.. 더 말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2/03/07 08:35 2022/03/07 08:35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995

경제관 교육

1. 경제 원리

이 한국.. 아니 옛날 조선의 밥상머리 경제 교육이라는 건 이런 식이었다.
애가 밥을 남기거나 밥알 하나라도 흘리고 칠칠맞게 굴면 "쌀알 한 톨 생산하기 위해서 농부가 얼마나 땀흘리고 고생하고 노력하는데, 니는 음식 귀한 줄 모르냐~ 어쩌구저쩌구 -_- ㄲㄲㄲㄲㄲㄲㄲ" 이렇게 갈군다.

그러다가 현대에 와서는 농부 얘기는 예전보다 줄었다. 이번엔 밥 못 먹고 굶주리는 소말리아 애들이 어떻고 하는 식으로 선비질 꼰대질의 레퍼토리가 달라지는 편이다. 정~~~말 고지식하기 그지없다.

아 물론 음식은 귀한 것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어야 하고, 허투루 낭비하고 버려서는 안 된다는 말 자체는 맞다.
게다가 우리나라도 반세기 남짓 전까지만 해도 전쟁 폐허 속에서 못살고 굶주리던 시절이 있었으니, 비극적인 역사를 더욱 잊지 말아야 한다.

근데 말이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고작 저게 전부라면...??
쌀알 한 톨 생산하는 것조차 그렇게 힘들어 갖고는 너무 겁나고 무서워서 밥 한 끼 제대로 먹고 살 수 있을까?

농사를 짓는 게 그렇게 힘들고 고생스러우니, 현실에서는 한번 농사를 지을 때 최대한 대규모로 짓는다. 쌀을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왕창 많이 생산해서 쌀알 한 톨당 들어가는 고생을 1/n로 분산시킨다.

애들한테 음식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얘기를 넘어, 저런 경제 원리도 가르쳐야 할 것이다. 그렇게 왕창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거대 자본 인프라가 필요하고, 또 인간의 노력을 줄이려면 기계도 필요하고 과학기술도 필요하다는 것..
그렇게 빈부격차와 편차가 어느 정도 있어야 다같이 발전하고 파이가 커질 수 있고.. 부와 세금은 모두 낙수효과가 존재하는 개념이라는 것.

생산하는 것뿐만 아니라 운송하고 유통하는 것도 정말 중요하다는 거..
아껴 쓰고 저축하는 것뿐만 아니라 투자도 필요하다는 거.
국가간의 통상에서도 수입 없이 수출만 잔뜩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거. 디플레가 인플레보다 안 좋다는 거(물가가 내려가는데도?).

공교육이 이런 관념을 애들한테 일깨워 줘야 하리라 여겨진다.
투기꾼 속물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되도 않은 얼치기 지상락원 공동분배 이딴 것에 현혹되고 선동되지 않기 위해서다!
공교육에서 무슨 성경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즉 만족하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근원" 이런 신앙 교리를 가르칠 수는 없을 테니, 최소한 worst로 가지는 않게 애들을 이끌어야 한다.

2. 정치인--후보건, 당선자 현직이건 불문--이 뿌리는 돈의 맹점

요즘은 정치판에 복지 포퓰리즘이 하도 유행이고 대세이다.
뭐, 극단적으로 생각해서 재벌들 왕창 쥐어짜고 세금 왕창 걷어서 전국민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현금 1억씩 팍팍 뿌려 줄 수는 있다. 거짓말은 안 한다고 치자.

근데 누구나 1억씩 갖고 있으면 점심밥 한 끼 값도 1만을 넘어 10만이건 100만이건 반드시 오르게 된다.
왜냐고? 1억씩 갖고 있는데 예전처럼 7000원짜리 된장찌개, 8000원짜리 제육볶음만 먹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모두 다 쏘고기 등심이나 마구로 뱃살을 먹으려 들면 값이 과연 어찌 될까?
결국은 각 개인이 가진 부의 실질적인 수준은 지금과 비슷하게 도로아미타불 평준화되게 돼 있다. 돈의 가치만 더 떨어질 뿐.

이런 부작용은 그 어떤 복지 포퓰리즘 신봉자들도 절대로 얘기해 주지 않을 것이다.
물가는 식품이건 석유건 부동산이건, 본질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원자재의 값이 내려가야만 잡을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공급이 수요보다 많아지는 것뿐이다! 이것이 진리이다.
그걸 지금까지 상당 부분 가능하게 한 일등공신이 바로 과학기술이었고 말이다.

그리고 내가 예전부터 꾸준히 해 온 말이 하나 더 있다.
우리나라는 개인 사재를 털어서 뿌리는 건 1950년대 자유당 시절 부정선거의 사례도 있고 해서 아주 강경하게 금지하고 단속하고 있다. 뇌물이니 불법 향응이니, 선거법 위반이니 하는 죄목을 씌운다.
시골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마을 잔치에 초대받아 가서 밥 한 끼 얻어먹고 싸구려 경품을 받았던 농부 할배까지 불러다 족칠 정도로 처절하게 응징한다.

근데, 자기 사재가 아니라 세금 풀어서 비슷한 짓을(완전히 같지는 않아도) 하면 이건 복지가 된다.
이 딜레마를 시스템적으로 분간해서 해소하지 않으면 우리나라 정치판에 만연한 망국적인 모랄 해저드를 결코 근절할 수 없어진다. 정치판의 수준이 싹 다 하향평준화 타락하고 나라의 미래가 없어진다.

제아무리 우파 정당이라고 해도 표 얻으려고 대세를 따라 퍼주네 뭐네 헛소리를 할 수밖에 없어진다. 그거 갖고 SNS에서 백 날 실망이네, 우리나라에 진정한 시장 경제 보수 우파가 없네 한탄해도 어쩔 도리가 없다. 시스템이 이미 요따구가 됐는걸 니가 출마했다고 달리 처신할 수 있겠나?

학교에서 중등 과학 시간엔 열역학 이론을 동원해서 영구기관이란 건 존재 불가능하다는 걸 가르친다.
그것처럼 사회· 경제· 윤리 시간엔 비슷하게 다같이 공평한 부자인 세상이라든가 공산주의의 이상향 따위는 절대 존재 불가능하다는 걸 세뇌에 가깝게 가르쳐야 할 것이다.

또한, 소말리아에서 애들이 굶주리는 게 당연히 우리 평범한 사람들의 잘못 때문인 건 아니다. 우리가 걔네들한테 괜히 '미안해하면서' 밥을 먹을 필요는 없다. -_-;; 이건 서울대나 의대에 합격한 애들이 자기 때문에 떨어졌을 이름 모를 경쟁자에게 '미안해하면서'(!!?) 다닐 필요는 없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지금 온갖 과학기술을 동원해서 자연을 쥐어짜고 착취해서 식량 생산 자체는 모든 사람이 먹을 만치 풍족하게 하고 있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근데 그게 분배가 안 되어서 소말리아 애들이 굶주리고 있으니, 탐욕스러운 다국적 기업 농장을 조져서 강제 분배해야 된다..??

이게 바로 사악한 공산주의가 교묘하게 친 함정이고 삼천포 결론인 것이다.
그 다국적 기업 농장들이 자기 이윤과 탐욕을 추구하기 위해 열나게 농산물을 생산하고 품종개량을 하고 밖으로 수출하지 않았으면 소말리아가 아닌 다른 굶지 않는 나라 국민들도 지금 같은 가격으로 밥을 먹는 게 과연 가능할까?? 분배할 거리가 생기기라도 할까?

그 함정에 속지 않고 현실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동일한 생산성의 일을 했는데도 잘사는 나라에서 받는 급여의 가치와 못사는 나라에서 받는 급여의 가치가 왜 이리 차이가 나는가? 어째서 미국의 하루 생활비로 소말리아에서는 한 달을 사는 걸까? 못사는 나라 사람들은 개 취급을 받는 한이 있어도 왜 기를 쓰고 잘사는 나라로 들어가려 하는가?" 이 원리를 알아야 할 것이다.

굶주리는 소말리아 애들을 구제하는 건 그 동네의 정치적 상황까지 감안해서 다른 관점에서 본질을 파헤쳐야 한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기껏 도와줘 봤자 성금이나 구호물자가 굶주리는 애들한테 애초에 가지도 못할 테니 말이다. (열악한 도로로 세월아 네월아 실어 나르는 도중에 다 상하고 썩거나, 아니면 그냥 횡령되고 빼돌려짐)
이건 북한을 도와주는 문제에 대해서도 99% 이상 그대로 동일하게 적용 가능한 원리라 하겠다.

그나저나, 가정이 거짓인 명제는 무슨 결론이 나오든 무조건 참이라는 것은.. 듣보잡 군소후보의 공약집이 딱 정확한 예시인 것 같다. 허 경영처럼 말이다.
당선될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 자기가 만약 당선된다면 전국민에게 1억씩을 뿌리든 10억을 뿌리든 얼마를 뿌리겠다고 말해도 알 게 뭔가?? 거짓말은 안 하는 거다.

그래도 3억인지 5억인지 출마 공탁금만은 전적으로 자기 사재여야만 되는가 보다. 세상엔 도대체 뭔 밑천으로 대선에 군소후보로라도 출마하는지 모를 사람도 좀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22/02/27 08:35 2022/02/27 08:35
, ,
Response
No Trackback , 2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992

2차 세계 대전은 미국-일본이건(태평양 전선), 영국/소련-독일이건(서부 전선) 각색해서 영화 만들 것들이 차고 넘치는 것 같다. 이 글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 두 영화를 주목하며 독자 여러분께도 추천하고자 한다.

(1) 핵소 고지 Hacksaw Ridge (멜 깁슨 감독, 2016) -- 데스몬드 도스(1919-2006)의 일대기
(2) 언브로큰 Unbroken (안젤리나 졸리 감독, 2014) -- 루이스 잠페리니(1917-2014)의 일대기


보다시피 이 두 실존 인물은 거의 동갑내기였다. 그리고 전쟁터에서 적병이나 적함· 적기를 공격해서 무력화시키는 통상적 무공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초인적인 행적을 남기고 영웅이 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두 영화도 나름 비슷한 시기에 나왔다. 그리고 유명한 배우 출신의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는 것, 나름 기독교 색채를 집어넣었다는 것, 평이 꽤 좋다는 것이 일치한다.

1.
핵소 고지는.. 주인공이 제칠일안식교 신자였다. 무정부 반전 평화주의자는 아니어서 진주만의 복수를 하고 싶고 군 복무는 하고 싶은데, 그렇다고 집총은 거부하는 좀 이상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엔 항명죄로 군사재판에 회부됐지만.. 여차여차 해서 의무병으로 들어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는 1945년, 오키나와 상륙 전투에서 총 대신 구급상자를 들고 위험한 적진을 종횡무진하면서, 수십여 명의 부상병들을 혼자 구출해 냈다. 그들은 구출되지 못했으면 다들 그대로 죽거나 적의 포로가 됐을 것이다.
의무병은 전장에서 의사나 간호사가 아니라 119 구급대원 같은 역할을 한다. 이게 얼마나 위험한 보직인지는 2002년 제2 연평해전 때 박 동혁 병장이 다쳤던 걸 생각해 보시라.

이 공로 덕분에 그는 순식간에 영웅이 됐다. 동료와 상관들이 다 너를 얕잡아 봐서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사죄를 했다. 나중에는.. 레알인지 각색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네 소대는 왜 아직 진격하지 않는 거냐? / 아, 도스 이병의 기도가 아직 안 끝났지 말입니다." 이렇게 신앙까지 당당히 인정받는 지경이 됐다.
이 영화에서는 일본군 측 인물이 뭔가 말을 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더라.

2.
다음으로 언브로큰은.. 주인공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했던 육상 선수 출신이었다. (흠 육상 선수라니 뭔가 에릭 리들 같은 느낌이..)
그는 그 다음 1940년 도쿄 올림픽에도 출전하려 했지만 이제는 올림픽 경기 대신 전쟁터에 나가게 됐다. 게다가 올림픽 개최 예정국이 아예 적국이 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는 폭격기 승무원으로 복무했는데.. 하루는 격추를 당한 것도 아니고 정비 불량으로 인해 기체가 태평양 망망대해에 추락했다. 구명보트에서 무려 7주를 근성으로 버티다가 구조됐지만, 운 나쁘게도 아군이 아니라 일본군에게 구조되어서 포로로 전락했다.

그는 일본 해군 수용소에서 2년 넘게 고생했다. 일본한테도 얼굴이 알려진 유명한 운동 선수여서 더 고생했다. 특히 수용소의 간수 일본군이 그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어서 그를 아주 가혹하게 대했다.

하이라이트 장면은.. 주인공이 혹독한 노동에 기진맥진했던 상태에서 무거운 통나무를 들고 땡볕에 서 있는 가혹행위까지 감당해 낸 것이다. (통나무를 떨어뜨리면 총살이라고 위협..) 주인공은 그 상태로 무려 40분 가까이 초인적인 힘으로 버티면서 간수를 노려보며 압도해 버렸다. 주 기철 목사 전기 영화라면.. 솟은 못 위를 맨발로 걸은 일화가 이 장면에 대응할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래도 전쟁이 끝난 덕분에 주인공은 해방되고 무사히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기독교 신앙에 근거해서 심신의 장애와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적국인 일본을 용서하는 경지에 다다랐다.
일본에서 나가노 동계 올림픽이 열렸던 1998년엔 노구를 이끌고 일본을 방문도 했었다. 그러나 예전에 그를 학대했던 간수 등 일본군 출신 인물들은 짱박혀 숨어서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천조국은 "미드웨이" 같은 전투 분야에서도 짱이고, 저런 휴먼 드라마 분야에서도 그냥 짱이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2/02/03 19:33 2022/02/03 19:33
, , , ,
Response
No Trackback , 2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982

« Previous : 1 : 2 : 3 : 4 : 5 : 6 : ... 11 : Next »

블로그 이미지

그런즉 이제 애호박, 단호박, 늙은호박 이 셋은 항상 있으나, 그 중에 제일은 늙은호박이니라.

- 사무엘

Archives

Authors

  1. 사무엘

Calendar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Site Stats

Total hits:
2676465
Today:
1033
Yesterday:
2124